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4. 쾌락의 추구-욕망-생각에 의한 그릇됨-기억-기쁨
전장에서 우리는 기쁨이 쾌락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라고 말했으니 만큼, 이제 우리는 쾌락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리고 쾌락은 포함돼 있지 않되 엄청난 기쁨의 느낌과 행복의 느낌을 담고 있는 세계에서 살 수 있는지를 알아내 보자. 우리는 모두 이런 형태 혹은 저런 형태의 쾌락을 좇고 있다-지적, 감각적 혹은 문화적 쾌락, 개선의 쾌락,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사회악을 고치고, 좋은 일을 하는 쾌락-더 많은 지식의 쾌락, 더 큰 물질적(육체적) 만족, 더 많은 체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해, 마음의 여러 똑똑하고 영악한 것들-그리고 궁극적인 쾌락은 물론 신을 갖는 것이다. 쾌락은 사회의 구조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은밀하게,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 놓고 쾌락을 좇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쾌락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것이 우리를 이끌고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명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 쾌락의 문제를 면밀히,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탐구하는 일은 우리들 각자에게 중요한데, 왜냐하면 쾌락을 찾고, 키우고, 지속하는 일은 삶의 기본적 요구이기 때문이며, 그것 없이는 실존은 지루하고, 우둔하고, 외롭고, 의미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삶이 쾌락에 의해 이끌려서는 안되느냐고 물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쾌락이 반드시 고통, 좌절, 슬픔과 공포를 가져오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라. 어떻든 대부분의 세상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나 당신이 슬픔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쾌락의 전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즉 항상 쾌락을 찾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면 왜 마음은 항상 쾌락을 요구하는가? 왜 우리는 쾌락의 저류로서 일을 고상하게 하거나 천하게 하는가? 왜 우리는 쾌락의 가는 끈에 매달려 희생하거나 괴로워하는가? 쾌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서 그건 존재 속에 자리 잡는가? 당신들중에 스스로 이 문제들을 묻고 끝까지 대답을 찾아 보려고 한 사람이 있는가? 쾌락은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존재 속에 들어오게 된다-즉 지각, 감각, 접촉, 욕망이 그것이다. 예컨대 나는 이쁜 자동차를 본다. 그러자 그것을 보는 것으로부터 나는 어떤 감각, 어떤 반응을 얻는다. 그래서 나는 또 그것을 만지거나 만진다고 상상하며, 그리하여 그것을 갖고 싶고 그걸 타고 뻐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또 나는 예쁜 구름, 하늘 높이 맑게 솟은 산, 봄에 방금 눈튼 잎, 아름다움과 웅장한 빛으로 가득 차 있는 깊은 계곡, 장엄한 황혼, 혹은 아름다운 얼굴-총명하고 생기 있으며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 그래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본다. 나는 강렬한 기쁨을 가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바라볼 때 거기에 관찰자는 없고 오직 사랑과도 같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있다. 잠깐 동안 나는 모든 문제, 불안, 불평을 잊고-거기엔 오직 그 놀라운 것만이 있다. 나는 기쁨으로서 그걸 볼 수 있고 다음 순간 그것을 잊으며, 아니면 마음이 찾아 들어서 문제가 시작된다-내 마음은 그것이 본 것에 대해 거듭 생각하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왔던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자꾸 보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한다. 생각은 비교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며 <내일 그걸 다시 가져야겠다>고 말한다. 잠깐 동안 기쁨을 주었던 체험의 연속은 생각에 의해 계속된다.
그것은 성욕이나 혹은 다른 어떤 형태의 욕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반응하는 것은 완전히 정상적이다. 당신이 내몸에 핀을 꽂으면 나는 대응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마비된다. 그러나 생각은 또 스며들고 그 즐거움을 되씹어보며 그걸 쾌락으로 만든다. 생각은 그 체험을 되풀이하고자 하며, 그래서 되풀이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건 기계적이 된다. 그것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은 쾌락을 부축인다. 그러므로 생각은 욕망을 통해서 쾌락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며, 따라서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생각에 의해 뒤틀린다. 생각은 그것을 기억으로 만들며, 그것을 되풀이 생각하므로 해서 또 기억은 키워진다. 물론 기억은 어떤 수준의 자리를 갖고 있다. 나날의 삶에서 우리는 그것 없이는 제구실을 다할 수 없다. 그것 자신의 자리에서는 그것이 유효함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거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가 있다. 기억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은 마음은 참 자유를 갖는다.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반응할 때, 거기엔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걸 눈여겨 본 적이 있는가? 어떤 도전에 대해 당신의 전존재로서 반응하지 않을 때에만 갈등과 싸움이 있으며 또 이것은 혼란 및 쾌락이나 고통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싸움은 기억을 부풀린다. 그 기억은 줄곧 다른 기억들에 의해 불어나고, 반응하는 것은 그 기억들이다. 기억의 결과는 무엇이든 낡은 것이고 따라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의 자유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은 순전히 넌센스다.
생각은 결코 새롭지 않은데, 왜냐하면 생각은 기억, 체험, 지식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그것이 낡은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즐거움을 가지고 보고 잠간 동안 엄청나게 느꼈던 그것을 낡은 것으로 만든다. 낡은 것으로부터 당신은 쾌락을 끌어내며, 결코 새로운 것으로부터 끌어내지 않는다. 새로운 것 속에는 시간이 없다. 그리하여 당신이 만일 기어드는 쾌락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가령 어떤 얼굴, 새, 옷 색깔,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의 아름다움, 혹은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만일 당신이 그 체험이 반복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걸 볼 수 있다면, 아무 고통도 공포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엄청난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중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쾌락을 되풀이하고 영속화 시키려는 발버둥이다. 당신 자신 속에서 그걸 관찰하라. 쾌락을 반복하고자 하는 바로 그 요구가 고통을 가져오는데, 왜냐하면 그 쾌락은 어제의 그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심미감뿐만 아니라 마음의 동일한 내적 성질에 있어서도 똑같은 즐거움을 얻으려고 발버둥치지만, 그게 당신을 거부하기 때문에 당신은 마음이 상하고 실망하게 된다.
당신이 얼마쯤의 쾌락을 거부할 때 당신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찰해 본적이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당신은 불안하고, 질투에 싸이고, 증오에 찬다. 당신이 술이나 담배, 또는 성이나 그외의 어떤 쾌락을 거부했을 때 유의해 본 적이 있는가-어떤 전장을 당신이 통과하는지 눈여겨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한 형태의 공포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혹은 갖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여러해 동안 지녀오던 어떤 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논리나 삶에 의해 흔들리거나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당신은 혼자 서 있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 그 신념은 여러해 동안 당신에게 만족과 쾌락을 주었고, 그것이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때 당신은 궁지에 빠지고 공허한 채로 남겨지며, 그리고 그 공포는 당신이 다른 형태의 쾌락과 신념을 찾을 때까지 남아 있다. 나로서는 그것이 아주 간단명료하게 여겨지며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간단명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간단명료함을 보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외면할 때, 당신은 질투가 나지 않는가? 당신은 화나지 않는가? 그녀를 매혹한 그 남자가 밉지 않은가? 그리고 당신에게 커다란 쾌락을 주었고, 친밀한 사귐과 소유의 확인 및 만족이라고 할 만한 것을 주었던 것이 실은 뭔가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당신이 쾌락을 추구하면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신이 원할 경우 그런 식으로 살기는 하되, 그리로 미끌어져 빠져들지는 말라. 만일 당신이 쾌락이 끝나기를 바란다면-비록 이것은 고통의 끝장이기도 하지만-당신은 쾌락의 전구조에 대해 완전히 주의 깊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승려나 고행자처럼 그걸 끊지 말고, 그게 죄라고 생각하여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므로써 그들의 이해의 활력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말고, 쾌락의 전의미를 알 일이다. 그러면 당신은 삶 속에 엄청난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쁨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이며, 그리고 그걸 생각함으로써 당신은 그걸 쾌락이 되게 한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즉각적 지각이며,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찾는 일 없이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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