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 J. 크리슈나무르티 저 / 정현종 역
1. 인간의 탐구-시달림 당한 마음-전통적 접근-존경할 만함의 함정-인간과 개인-실존의 싸움-인간의 본바탕-책임-진실-자기 변모-정력 낭비-권위로부터의 자유
인간은 여러 세기 동안 줄곧 자기 자신 이상의 어떤 것, 물질적복지 이상의 어떤 것을 찾아 왔다. 즉 우리가 진리나 신 혹은 실재라고 부르는 어떤 것, 어떤 무시간적 상태, 다시 말해서 환경이나 생각 혹은 인간의 타락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아 왔다. 인간은 줄곧 물어 왔다. - 이건 도대체 무엇인가?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는 삶의 엄청난 혼란, 잔인성, 저항, 종교의 끝없는 분열, 이데올로기와 국민적 감정(국적) 등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며 묻는다. -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넘어서 뭐가 있는가? 그리고 그가 줄곧 찾았던 수많은 이름의 이름없는 것을 찾지 못하자 그는 신앙을 길렀다 - 어떤 구세주 혹은 관념에 대한 신앙-그리고 반드시 폭력을 초래하는 신앙을.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란 사회 - 그것이 공산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이른바 자유 사회이든간에 - 에 따른 행동 규범을 세우려고 한다. 가령 우리가 힌두교도이든 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혹은 그 어디에 속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 전통의 일부로서의 행동 기준을 받아 들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행동인지, 무엇이 옳은 혹은 그릇된 생각인지 말해 주는 사람을 찾으며, 이러한 모범을 따라 우리의 행동과 생각은 기계적이 되고 우리의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들 속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우리는 우리의 선생들에 의해, 권위자들에 의해, 책들과 성인들에 의해 숟갈로 떠먹여지듯 양육되었다. 우리는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저 언덕들과 산 너머, 그리고 지구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그러고는 그들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만족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말에 의지해서 살며 우리의 삶이 경박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얻어 들은 것으로 사는 헌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바에 따라 살았고, 우리의 의도나 성정에 의해 이끌려왔으며 여러 조건들과 환경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강요되어 왔다. 우리는 온갖 영향의 결과이며, 우리 속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발견한 게 아무것도 없다. 독창적이고 원래대로이며 명징한 게 아무것도 없다.
신학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들어왔다-즉우리가 어떤 의식을 행하고, 무슨 기도나 염불을 되풀이 하고, 어떤 모범을 따르고, 욕망을 억제하고, 생각을 통어하고, 정열을 승화시키고, 탐욕과 성욕에서의 탐닉을 억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마음과 몸의 충분한 시달림이 있은 뒤에, 이 보잘 것 없는 삶을 넘어서 뭔가를 발견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러 세기동안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해온 일인 바, 그들은 그러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격리되거나, 사막이나 산 혹은 동굴 같은 데로 가거나, 혹은 걸식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로 방랑을 하거나, 아니면 수도원 같은 집단 속에 들어가 기성의 어떤 모범에 순응하고자 한다. 그러나 억지로 시달린 마음, 찢어진 마음, 즉 모든 혼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바깥 세계를 거부하고 훈련과 순응을 통해서 무디어진 그런 마음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 찾아 헤맸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 자신의 일그러짐(의곡)을 따라 발견하게 될 따름이다. 그래서 이 불안하고 죄 많고 무서우며 경쟁적인 실존을 넘어서 뭔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전통적인 접근 방법은 둘레(주변)로부터 안으로 향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시간을 바치고 수련과 포기(단념)를 통해서 점차 그 내면의 꽃, 그 내적 아름다움과 사랑에 이르는 것인데-이것은 사실상 우리를 좁고 왜소하고 가짜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조금씩 조금씩 벗겨내고, 시간을 들이고, 내일 하리라, 내생에 하리라는 것이다-그러다가 마침내 중심에 이르렀을 때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는데 왜냐하면 마음은 이미 무능력하고 무디고 무감각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관찰하고 나서 어떤 사람은, 그러면 도대체 다른 접근 방법은 없는가고 자문한다-즉 중심으로부터 폭발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세상은 전통적 접근방법을 받아들이고 따른다.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무질서의 일차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약속된 리얼리티를 찾는데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적한 정신 생활을 보증할 어떤 사람을 기계적으로 따른다. 비록 우리들 대부분이 정치적 횡포와 독재에 반대하지만, 속으로는 권위와 폭정을 수락하고, 우리의 마음과 생활 방식을 뒤틀어 일그러뜨리는 자를 수락하는 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위 정신적 권위, 모든 식전과 의식과 독단을, 지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홀로 서 있으며 그리고 이미 사회와의 갈등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존경할 만한 인간이기를 그친다. 존경할 만한 인간은 그 무한하고 잴 수 없는 실재에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바야흐로 완전히 그릇된 어떤 것-전통적 접근-을 거부함으로써 출발을 했는데, 그러나 당신이 만일 한갓 반작용으로서 그렇게 했다면 당신은 당신이 걸려들게 될 또하나의 틀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이 거부는 아주 훌륭한 생각이라고 머리 속으로만 말하면서 그것에 관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것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을 이해한 까닭에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자유롭고 두려움이 없는 까닭에 엄청난 이해력과 총명으로서 그걸 거부한다면, 당신은 당신 주위에 어지러운 교란을 낳을 터이지만, 그러나 당신은 존경할 만함 respectability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더 이상 찾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될 터이다. 그것이 알아야할 첫번째 것이다-즉 찾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당신이 찾을 때 당신은 다만 진열장 구경을 할 따름이다.
신이나 진리나 실재, 혹은 그걸 무어라고 부르든지간에 그러한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은 결코 책이나 성직자나 철학자 혹은 구세주들에 의해 해답을 얻을 수 없다. 당신 자신 이외의 누구도 그리고 어떤 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바로 이 점이 당신이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미숙함은 오직 자신에 대한 전적인 무지에 있다. 당신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러면 당신 자신, 개체인 당신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인간과 개인은 다르다. 개인은 국지적 실재로서, 특별한 나라에서 살며, 특수한 문화, 특별한 사회, 특별한 종교에 속해 있다. 인간은 국지적 실재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만일 개인이 광막한 영역의 한 특수한 구석에서만 행동한다면, 그의 행동은 전체와 완전히 관계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좀더 큰 것 속에서는 작은 것이 있지만, 보다 작은 것 속에는 보다 큰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의 작은 신들과 작은 전통에 만족하면서 제한되고 가련하고 좌절된 작은 실재인데 비해, 인간은 세계의 전체적 행복, 전체적 불행 그리고 전체적 혼란에 마음을 쓴다.
우리들 인간은 수백만년 동안 그랬던 바대로의 우리다-즉 때때로 기쁨과 애정의 순간을 가지면서 엄청나게 탐욕스럽고, 선망하고, 공격적이고, 질투하고, 불안하고, 절망한다. 우리는 증오와 공포와 온화함의 이상한 혼합이다. 우리는 폭력인 동시에 평화이다. 달구지로부터 비행기에 이르는 외면적 발전은 있었으나, 심리적으로 개인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세계 전반에 걸친 사회 구조는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외적인 사회 구조는 우리 인간관계의 내적 심리 구조의 결과인데, 왜냐하면 개인은 인간의 전체 경험과 지식과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는 과거 전부의 창고이다. 개인은 모든 인류인 인간이다. 인간의 전역사는 우리들 속에서 씌여졌다.
경쟁적인 문화, 즉 권력, 지위, 위신, 명성, 성공 및 그외의 모든 것을 얻기 위한 그것의 욕망과 함께 당신이 살고 있는 그 경쟁적인 문화 속에서의 당신 자신의 안과 밖에서 실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하라-당신이 그다지도 자랑스러워하는 성취들을 관찰하고, 당신이 삶이라고 부르는 바 온갖 형태의 관계 속에 갈등이 있고 증오와 적대감, 잔인성과 끝없는 전쟁이 있는 이 삶의 전영역을 관찰하라. 이 터전, 이 삶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며, 그리고 실존의 엄청난 싸움을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우리는 그걸 두려워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 기묘한 방법으로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또한 우리는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죽음을 두려워하고, 내일의 저쪽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는 것을 두려워하며 또한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우리의 나날의 삶이며, 거기엔 희망이 없고, 그래서 모든 형태의 철학 모든 형태의 신학적 개념은 다만 있는 그대로의 진짜 리얼리티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하다.
전쟁, 혁명, 개혁, 법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초래된 모든 외적 형태의 변화는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데 완전히 실패했고 따라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도 실패했다. 이 괴물스럽게 추악한 세계에 사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경쟁과 잔인성과 공포에 기초한 이 사회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가? 지적 개념이나 희망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사실로서, 그러니까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와지고 천진해져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이룩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우리들 각자가 개인들로서, 인간으로서, 세계의 어떤 곳에서 살게 되었고 또 어떤 문화에 속하게 되었든지간에, 세계 전반의 상태에 대해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그러한 세계를 세울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모든 전쟁에 대해 책임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의 삶의 공격성 때문이며, 그리고 우리의 민족주의, 우리의 이기성, 우리의 신들, 우리의 편견들, 우리의 관념들이 모두 우리를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도 지적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마치 우리가 배고픔과 아픔을 깨닫듯이 실지로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행동하게 될 것이다-즉 당신과 나는 이 현존하는 혼돈과 전세계에 걸친 불행(비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이 세계)에 기여했으며, 우리는 전쟁, 분열, 추악함, 잔인함 그리고 탐욕으로 얼룩진 이 기괴한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당신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아주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다. 도대체 뭔가 행해진게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말해줄 것인가?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보다 잘 이해한 것으로 추측되는 소위 정신적 지도자들은 뒤틀어 보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말했고, 새로운 주형속에 우리를 부어 넣었고, 그리고 우리를 별로 이끌어 가지 못했다. 즉 괴변에 능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했고 그것은 우리를 멀리 이끌지 못했다. 우리는 모든 길이 진리로 이끈다는 말을 들어왔다-당신은 힌두교도로서의 길을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도로서의 길을, 또 다른 사람은 회교도로서의 길을 갖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같은 문 앞에서 만나는데-그것은, 보면 알다시피, 너무도 분명히 부조리한 문인 것이다. 진리는 길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그것이 진리의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살아 있다. 죽은 것은 그것이 정적이기 때문에 길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진리란 살아 있고 움직이는 것이어서 쉴 데가 없고, 신전이 없고, 절이나 교회도 없고, 종교도 없고, 선생도 없고, 철학자도 없으며, 아무도 당신을 그리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당신은 이 살아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당신의 실상(있는 그대로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즉 당신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바 당신의 분노, 당신의 잔인성, 당신의 폭력, 당신의 절망, 그리고 고민과 슬픔이 그것이다. 당신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꿰뚫어 볼 수 없고, 어떤 말의 막을 꿰뚫어 볼 수 없으며, 희망과 공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신은 당신이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음을 안다. 안내자는 없으며, 선생도 없고, 권위자도 없다. 오직 당신-당신의 다른 사람 및 세계와의 관계-뿐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당신이 깨달을 때, 그것은 커다란 절망을 가져 오거나-이 절망에서 냉소나 비꼼 같은 것이 나오거니와-또는 당신도 그 누구도 세계와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바에 대해, 당신이 느끼는 바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모든 자기연민은 사라진다. 우리는 보통 남을 비난함으로써 번성하는데, 이것은 자기연민의 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아무런 바깥의 영향 없이, 아무 설득 없이, 형벌에 대한 공포 없이 우리들 속에, 우리의 존재의 핵심 속에 전적인 혁명, 심리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경쟁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우며 질투하지 않게 되겠는지-말하자면 이러한 것을 포함한 그외의 모든 우리의 본성-이것이 우리가 그 속에서 나날의 삶을 사는 썩은 사회를 이룩하고 있거니와-의 현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는지?
내가 지금 철학이나 관념의 신학적 구조 또는 신학적 개념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바보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삶의 철학이 아니라 우리의 나날의 삶 속에서, 내적, 외적으로, 실지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관찰하는 일이다. 만일 당신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검토한다면, 그것은 지적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터인데, 지성이란 실존의 전역이 아니다. 즉 그것은 하나의 조각이며, 조각이란, 그것이 아무리 영리하게 결합되어 있고 아무리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실존의 부분인데 비해, 우리는 삶의 전체성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외적 과정도 내적 과정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즉 단 하나의 과정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완전히 전체적인 운동으로서, 내적 운동은 스스로를 외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외적 반작용은 다시 내적인 것에 작용한다.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보는 법을 알면, 그 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며, 그리고 보는 일은 아무 철학도 선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당신에게 어떻게 볼 것인가를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당신이 그냥 보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이 모든 그림(사태)을 봄으로써,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봄으로써 당신 자신을 쉽게, 자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정신에 완전한 혁명을 가져올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아마 당신은 <나는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할는지 모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직한데, 특히 사회적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돼 있는 사람들이나 독단적 신념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과 사물의 있는 바 그대로에 만족하거나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변화를 바라지 않음직하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관심할 바 아니다. 또 당신은 <그렇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고, 나한테는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좀더 교묘하게 말할는지도 모르는데, 이 경우 당신은 이미 당신 자신을 봉쇄한 것이 될 터이고, 질문하는 일을 그친 셈이 될 터이며, 이것은 앞으로 더 나아가는데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또 <나는 나자신 속에서의 근본적인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알지만 어떻게 그걸 할 수 있는가? 나에게 그 길을 가르쳐 주고, 그리로 향하도록 나를 도와달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변화 자체가 아니다. 즉 당신은 기본적인 혁명에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다만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어떤 방법이나 체계를 찾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어떤 체계를 줄 만큼 바보스럽고 또 당신이 그것을 따를 만큼 바보스럽다면, 당신은 다만 베끼고, 모방하고,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따름이며,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 속에 다른 권위를 세우는 셈이 되며, 그럼으로써 당신은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일을 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며 그렇지만 그걸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이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체계와 마찰하는 당신 자신의 독특한 의향, 경향 및 억압들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거기엔 모순이 있게 된다. 그래서 당신은 그 체계의 이데올로기와 나날의 실존의 현실성 사이에서 이중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려고 하면서 당신은 자신을 억압하는데-실은 정말 참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당신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에 따라 자신을 탐구한다면 당신은 항상 이차적인 중고 인간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변하기를 바란다, 방법을 가르쳐 달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견 매우 진지하고 열성 있게 보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 속에 질서를 가져다 줄 권위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가 내적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밖으로부터 부과된 질서는 언제나 무질서를 낳는다. 당신은 이와 같은 진실을 지적으로 알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실제로 적용해서 당신의 마음이 더 이상 어떤 권위도 마련하지 않을 수 있는지-말하자면 책의 권위, 선생, 아내나 남편, 부모, 친구 또는 사회 등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지?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떤 판에 박은 방식의 틀안에서 기능해왔기 때문인데, 그 방식은 이데올로기나 권위가 된다. 그러나 당신이 <나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새로운 권위를 설정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당신은 귄위와 영원히 결별한다. 위의 문제를 다시 한번 분명히 얘기해보자. 나는 내가 내존재의 뿌리에서부터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전통에도 의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전통은 이렇게 엄청난 게으름과 수락과 순종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변화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그리고 무엇에도 도움을 바랄 수 없다-가령 어떤 선생, 어떤 신, 어떤 신념, 어떤 체계, 어떤 외적 압력이나 영향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엔 어떤 일이 생기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모든 권위를 거부할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이 여러 세기 동안 지녀오던 그릇된 것을 거부할 때, 당신이 어떤 종류의 짐도 벗어던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당신은 더 많은 힘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는가? 당신은 더 많은 능력, 더 많은 추진력, 더 큰 강도와 생명력을 갖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그 짐을 벗어 던지지 않은 것이며, 귄위의 죽은 무게를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벗어 던졌고 그 속에서는 전혀 두려움-실수에 대한 두려움, 옳은 일 혹은 나쁜 일을 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런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면, 그 에너지 자체가 변화 아니겠는가?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것을 공포 때문에 무산시켜버리는데 그러나 모든 형태의 공포를 던져버리므로서 그런 에너지가 생기면, 그 에너지 자체가 근본적인 내적 혁명을 낳는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하여 당신은 혼자 남게 되며, 이것이, 이 모든 것에 관해 아주 진지한 한 사람이 존재하는 실상이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누구한테도 혹은 어떤 것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이미 발견을 위해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자유가 있으면 에너지가 있다. 또 자유가 있으면 그것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다. 자유는 저항과 완전히 다르다. 자유가 있을 때 거기엔 잘한다든가 못한다는 따위의 일이 없다. 당신은 자유로우며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거기엔 공포가 없으며, 두려움 없는 마음은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이 있으면 그것은 그것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서 알려는 것인데, 그것은 나나 어떤 분석가 또는 철학자를 따라서 알려는 게 아니라-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람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들에 관해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구조에 전적인 혁명을 이룩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바깥의 권위에도 의존할 수 없음을 알고 나면, 이번에는 엄청나게 더 큰 어려움이 우리 앞에 놓인다-즉 우리 자신의 내적 권위, 우리 자신의 특수하고 작은 체험들과 조금씩 축적된 지식, 이념, 관념들의 권위를 거부하는 일이 그것이다. 당신은 어제 당신에게 뭔가 가르쳐 준 체험을 했고, 그게 가르쳐 준 것은 새로운 권위가 된다-그리고 어제의 그 권위는 천년 묵은 권위와 마찬가지로 파괴적이다.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것이든 천년 묵은 것이든 권위가 필요치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며, 항상 움직이고 유동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제의 죽은 권위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순간을 이해하는데 실패하게 되며 그 순간의 아름다움과 특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당신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모든 권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어제의 모든 것이 죽는다는 것이며, 그래서 당신의 마음은 항상 신선하고, 항상 젊고, 천진하고, 활력과 정열에 넘치게 된다. 우리가 배우고 관찰하는 것은 오직 그런 상태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는 상당한 앎이 필요한데, 즉 당신 속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 그것으로서, 이 앎은 그것(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교정 없이 혹은 그것에게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채 행해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을 교정하는 순간 당신은 또 하나의 권위, 하나의 검열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더불어 우리 자신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 책장에 적힌 말들을 따라가며 그의 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읽는 동안 설명하고 있는 한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여행을 떠나는 것, 우리의 마음의 가장 비밀스런 구석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가볍게 여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의견과 편견과 결론들-말하자면 지난 2천년 동안 혹은 그 이상 오랫동안 모아온 낡은 가구들로써 무거워질 수는 없다는 얘기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관해 아는 것을 모두 잊으라. 당신이 자신에 관해서 행여나 가졌던 생각을 잊으라. 우리는 마치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출발하려고 한다. 어젯밤에는 비가 몹시 내렸고, 지금은 개이기 시작하고 있다-새롭고 신선한 날이다. 우리 이 새로운 날을 마치 단 하루밖에 없는 것처럼 만나자. 어제의 기억은 모두 뒤에 남겨 놓고 더불어 여행을 떠나자-그리고 처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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