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제5장 광기의 여러 형태들 (1/5)
18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동물적 성향에 의해서 신경의 전달 경로에서 형성되는 상상은 그러한 상상이 갖는 모든 기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함축과 더불어 보다 엄밀한 물리적인 가치, 아니 오히려 상징적인 가치를 갖는 긴장에서 빚어지는 상상으로 대체된다. 여기서의 긴장은 신경, 혈관, 그리고 각 기관의 근육 및 신경섬유를 지배한다. 조증은 따라서 발작으로 발전한 긴장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조증은 다음과 같은 현악기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현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있어 먼 곳에서 주는 자극일지라도, 그리고 아주 작은 자극일지라도 그러한 자극에 의해 진동하거나 심지어는 끊어져 버리는 악기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조증의 정신착란은 감각의 끊임없는 전율이나 진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할 수 있다. 우울증과 조증의 차이는 상상이 형성되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서 분명해지며, 양자는 엄격한 대립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우울증 환자는 더 이상 외부세계와 동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신경섬유들이 이완되어 있거나 지나친 긴장으로 인해 우울증 환자가 활동 불능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긴장의 체계가 우울증 환자의 활동 불능상태와 조증 환자의 흥분과 동요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단 몇 개의 신경섬유만이 진동하는데, 이 섬유들은 우울증 환자의 정신착란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반면에 조증은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여 전율한다. 조증환자의 정신착란은 보편적인 것으로, 우울증 환자의 경우에서처럼 자극이 아무런 움직임도 야기하지 않거나 하지는 않는다. 조증 환자의 신체기관이 다시 흥분하기 시작할 때는 그 흥분은 배가된다. 그것은 마치 조증 환자가 신경섬유의 긴장 속에 추가의 에너지를 축적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조증 환자 역시 무감각해지게 된다. 그러나 조증 환자의 무감각성은 우울증 환자처럼 반수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긴장의 지나친 확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증 환자는 추위도 더위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자기 옷을 찢어 버리고는 아무리 추워도 벌거벗은 채로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조증 환자는 실제 세계를 자신들의 정신착란이 빚어낸 비실제적인 망상의 세계로 대체한다. 물론 그들이 자극을 받는 것은 그들이 대체시켜 버린 실제 세계로부터이지만 "조증의 본질적인 증상은 다음과 같은 사실의 결과이다.
즉, 조증 환자에게는 대상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보여지는 것이다." 조증 환자의 정신착란은 개별적인 판단 오류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정신착란은 감각인상들의 뇌로 전달하지 못하는 데서, 즉 감각인상과 뇌의 작용 사이에서 상호교통이 불가능하거나 결핍되는 데서 빚어진다. 광기에 관한 심리학에서는 '대상과 사유간의 정합성'이라는 낡은 진리개념은 신경섬유가 자신을 진동시키는 감각에 보여주는 일종의 음악적 충실성, 즉 감각과 신경섬유간의 공명이라는 비유로 전환된다. 조증과 긴장의 관계에 관한 견해는 점차 발전하여 보다 질적인 성격을 갖는 직관에 도달했다. 조증 환자에서 나타나는 신경섬유의 강직성은 언제나 신체의 메마름과 관계가 있다. 조증은 일반적으로 체액의 소모를 가져오고 유기체인 신체 내의 일반적인 상태를 건조하게 만든다. 테오필르 보네트(Theophile Bonet)는 자신의 "해부학자의 묘지"(Sepulcheretum anatomicum)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조증 환자의 뇌를 관찰해 보면 그들의 뇌는 언제나 건조하고 굳어진 상태에 있어 깨어지기 쉽다. 후에 알브레히트 폰 할러(Albrecht von Haller)도 마찬가지로 조증 환자의 뇌가 메마르고 굳어 있으며 깨어지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메뉴레(Menurte)는 바싹 마른 혈관과 신경섬유에서 빚어진 체액의 과도한 소모가 조증의 상태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포레스티에(Forestier)의 관찰을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여름에 결혼한 한 젊은이가 아내와의 과도한 성관계의 결과로 조증에 걸린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뒤푸르는 다른 연구가나 학자들이 상상한 것, 가정한 것, 지각과 유사한 작용을 통해서 관찰한 것들을 증명하고,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붙였다. 시체 해부를 통해서 뒤푸르는 조증의 상태에서 죽은 남자의 시체를 해부하여 '각 6인치의 입방체의 뇌'를 잘라냈는데, 그 무게는 3j.g. 였다. 반면에 동일한 크기의 정상인의 뇌의 무게는 3j.g.V였다 : "이와 같은 무게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인의 경우 조증 환자의 뇌의 총무게는 정산인의 뇌의 총무게보다 7gros가 적다. 말하자면 조증 환자는 정상적인 성인의 경우처럼 뇌의 무게가 3파운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체액 소모에서 빚어진 조증 환자의 가벼움과 건조함은 몸무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체 내부의 건조함과 열은 조증 환자가 추위를 쉽게 견딜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았을까?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이미 알려진 확고한 사실이다. 즉, 조증 환자들은 수용소 내에서 난방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아가 눈 속을 벌거벗은 채로 돌아다녔으며, 오히려 냉기가 그들에게는 치유의 효과가 있었다. 쟝 밥티스트 헬몬트(Jean-Baptist Helmont)이후 조증 환자를 침수시키는 방법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메뉴레는 숫용소를 탈출한 한 조증 환자가 "폭우 속을 옷도 입지 않은 채 수십 마일을 걸은 후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진술한다. 몽트쇼(Montchau)는 "조증 환자에게 가능한 높은 곳에서 얼음물을 뒤집어 씌워" 조증을 치료했다. 그리고서 그는 자신이 얻어내 결과를 쉽게 받들이게 하기 위하여 17세기 이후에 나타난 유기체의 가열상태에 관한 견해들을 끌어들였다 : "이제 우리는 얼음물이 조증에 대한 신속하고 완벽한 치료수단이라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가열된 혈액, 격렬하게 분비되는 담즙, 체액의 폭발적인 분출에 의해서 야기된 혼란과 흥분, 동요에는 얼음물이 즉효인 것이다." 냉기의 효과에 의해서 "혈관은 보다 강하게 수축했고, 혈관 속으로의 혈액의 흐름을 막았다. 그리하여 최고치로 가열된 체액 및 혈액, 담즙의 열에 의해서 발생한 경직된 신체의 흥분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나서 신경이 이완되면 불규칙적으로 어지럽게 작용하던 정신적 성향들은 다시 원래의 자연적인 상태를 회복한다."
우울증의 세계는 습하고 음울하고 차갑다. 반면에 조증의 세계는 바싹 말라 있고 건조하며, 광포하고 부서기지 쉽다. 말하자면 열-느껴지지는 않으나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은 조증의 세계를 바싹 마르고 메마른 세계로 만들었고, 따라서 조증의 세계는 냉기와 습기에 의해서 언제라도 이완될 수 있는 세계였다. 이런 식으로 진행된 조증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질적인 단순화 작업을 통해 조증의 상세한 증상들이 규정되었고, 조증의 단일성이 확보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17세기 초엽까지도 조증은 '비흥분성 발작'으로 규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의 특징적인 증상-여전히 단지 서술적이기만 한-에 대한 규정 이외에도 지각적인 관찰에 입각한 견해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이 견해들이 의학이라는 무대에서 실제로 활동한 것들이다. 일단 해석적인 신화가 사라지고 나면 체액, 정신적 기질들, 신체의 고체, 액체적 부분들은 더 이상 순환하지 못하고, 일관성을 갖는 성질들에 관한 도식만이 기능하게 된다. 그렇게 되자 그러한 성질들은 일정한 명칭조차 얻지 못했다. 그리고 조증을 설명하는 열과 운동의 역학에 의해서 한 집단에 속할 수 있었던 조증의 특징적인 현상들은 이제 본래적인 콤플렉스로, 즉 심리학적인 관찰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심리적인 진리로 관찰되었다. 열로 지각되었던 것, 정신적 성향의 흥분과 동요로 상상되었던 것, 신경섬유의 긴장으로 인식되었던 것 등은 그 후로는 신체와 관련이 없는 단순한 심리적인 개념으로 파악되었다. 즉, 과장일 정도로 분명한 심리적인 인상들의 표출, 외부 세계에 대한 무감각, 재빠른 관념의 연상 등으로 파악된 것이다. 드 라 리브(De la Rive)의 서술 역시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환자는 건강한 사람과 동일한 인상을 갖지 못한다. 환자들은 분명하지 않은 약한 인상들만을 산출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상들을 거의 하나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의 정신은 혼란된 뇌에 의해서 야기된 관념들의 작용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들은 또한 너무나 명료해서 환자는 이러한 관념들이 실제 대상들을 표상한다고 믿고, 따라서 대상들을 그러한 관념들에 따라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는 18세기 말에 형성되어 고착된 조증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인 구조가 사실은 더욱 심층적인 전체 구조에 대한 피상적인 윤곽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다 심층적인 조증의 실제 구조는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질적 세계가 보지하고 있는, 반쯤은 상상의 성격을 띠고 반쯤은 지각 가능한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
확실히 열과 냉기, 습기와 건조함의 세계는 바야흐로 실증주의에로 도달하려고 하는 의학적 사유에게 그러한 세계의 기원을 탐구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이러한 광기의 세계를 열이나 냉기 등으로 희화시킨다고 해서 이것이 단순히 무의식적인 상태의 재현작업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 역시 엄밀한 이론적 작업이다. 조증과 우울증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을 이론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특질들을 이론 구성에 끌어오는 것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질들은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친화작용의 체계에 의해서 서로서로를 야기시키는 그러한 특질들이다. 만일 조증이나 우울증에서 인간의 인식작용으로 하여금 조증인지 우울증인지를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특징적인 양태를 상정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인간이 실제 징후들을 '식별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도 명확하게 지각할 수 있는 정화된 지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광기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특정의 질적인 견해들 속에서 구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질적인 견해들은 개념들의 단일성을 형성했고, 개념들의 유의미한 일관성을 확보했으며, 그리하여 개념들은 지각 가능하게 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관념적인 기술에서 질적인 영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 영역은 비록 보다 덜 유기적이고, 보다 단순하고, 보다 분명하기 못하게 한계지워진 영역이지만, 이 영역에서만 광기에 관한 전체 경험 속에 실제로 들어 있는 인식 가능한 뚜렷한 경험의 단위들이 구성될 수 있다. 조증과 우울증이란 질병이 관찰되는 영역은 그러한 질병들의 유형화와 구조와의 기저가 되는 몇 개의 조망에 따라 나뉘어졌다. 한편에는 습하다 못해 거의 흠뻑 젖어 있는 세계가 있다. 거기에서는 인간은 스스로가 경험한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다. 이 세계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세계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한 작은 부분에 있어서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는 세계이다. 다른 한편에는 건조하다 못해 바싹 마른 세계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행위는 분방하고 무질서하고 순간적이다. 우주론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 이러한 엄밀한 견해들이-조심스러운 관찰이 아니라-조증과 우울증에 대한 경험(이제는 거의 우리의 것이 된)을 구성한 것이다.
윌리스야말로 투철한 관찰정신의 소유자였으며, 정확한 의학적 지각이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런 윌리스에게 조증과 우울증의 순환에 대한 '최초의 발견자'라는 명예를 허용해도 좋다. 확실히 윌리스의 방법은 대단한 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다음의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의 정서작용에서 다른 정서작용으로의 전이는 관찰하여 설명해내야 할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조증과 우울증의 비밀스러운 질서의 결과로 이루어진 양자의 깊은 자연적인 친화력의 결과로 보인다. 윌리스는 조증과 우울증간의 전이현상 중 자신이 관찰하게 된 하나의 구체적 경우만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처음 발견해낸 것은 이상한 변형을 야기시킨 조증과 우울증간의 내적 관계였다. "우울증 후에는 반드시 조증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조증과 많은 친화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질병은 종종 다른 하나의 질병으로 발전한다." 사실상 우울증의 소인이 심화되면 발작으로 발전하고, 반대로 발작의 힘이 약화되거나 사라져서 완전히 진정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다. 엄밀한 경험론은 여기서 서로 연관된 두 개의 질병을 발견하거나 또는 동일한 질병의 증상들이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윌리스는 증상이나 질병의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동물적 성향에 관한 역학의 수준에서 조증과 우울증을 연결시키는 고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우울증에 걸린 정신은 음울하고 혼미한성향들을 갖는다. 그러한 음울한 정신적 성향들은 사물에 대한 상상을 지배하고 기분의 기조를 어둡게 만든다. 반대로 조증에 걸린 정신은 끊임없이 흥분하고 뒤끓는다. 그러한 흥분된 정신적 성향들은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불규칙적인 운동에 의해서 야기된다. 조증과 우울증사이에 친화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친화력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증상들간의 친화력이 아니라-보다 강력하고 훨씬 분명하게 상상의 지평에서 보여지는-하나의 동일한 불에서 생기는 연기와 불꽃이 보여주는 그러한 친화력이다. "만일 우리가 우울증의 경우에는 뇌와 동물적 성향들의 작용이 연기와 진한 포말성 기운에 의해서 모호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조증에서는 그러한 연기와 기운에 의해서 큰 불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불꽃의 재빠른 운동은 연기를 흩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연기는 다시 모여서 불을 꺼버리고 불꽃의 밝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윌리스는 조증과 우울증의 결합을 질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은 연기와 불꽃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신비한 불이었다. 말하자면 그러한 결합 속에는 빛과 그림자가 모두 담지되어 있는 것이었다.
사실상 18세기의 의사들은 조증과 우울증의 유사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의 의사들은 조증과 우울증이 동일한 질병의 두 증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많은 의사들은 비록 증상을 통해서 질병으로서의 단일성을 지각하지 못했지만 조증의 증상 다음에 우울증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드남은 조증 자체의 영역마저 나누어 보고자 했다. 한편에는 평범한 일반적인 조증이 있다. 그러한 조증은 "혈액의 지나친 흥분과 너무 빠른 순환에서 기인한다." 다른 한편에는 일반법칙에 따라 우울증의 한 증상인 '얼빠진 상태'로 발전하는 조증이 있다. 후자의 조증은 "너무나 오랫동안 계속된 흥분으로 인하여 알콜성을 상실한 약해진 혈액 때문에 얼빠진 상태로 발전된다." 심지어는 보다 종종 조증과 우울증의 순환은 각 증상이 변질된 현상으로 파악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증상이 다른 증상을 비록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야기시킨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죠셉 리외토(Joseph Lieutaud)는 우울증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우울증의 토대인 정신착란이 악화되면 우울증의 전통적인 증상은 사라지고 조증과 매우 유사한 특징적인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 "우울증의 마지막 단계에서 보이는 증상들은 조증의 증상들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는 보다 정교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뒤푸르에게는 이러한 연관관계는 훨씬 엉성했다. 뒤푸르는 그것을 원인과론적인 연관관계로 생각했다. 따라서 우울증은 "앞 이마의 우묵한 부분이나 팽창된 혈관, 정맥혈관에서 기생하는 벌레들"과 마찬가지로 조증을 야기시킬 수 있다. 상상의 도움 없이 관찰만으로는 조증과 우울증간의 명백한 순환에 입각하여 증상들의 정확하고 본질적인 구조를 파악해낼 수 없다.
물론 윌리스의 후계자들은 불꽃과 연기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증과 우울증을 구조화하는 작업에는 여전히 상상의 도움이 필요했다-그러한 상상들은 점차로 기능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순환과 가열이라는 생리학적인 견해 속에서 확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점차로 윌리스의 상상의 원천이었던 우주론적인 양상으로부터 벗어났다. 보에르아브와 그의 주석가인 제라르 반 슈비텐(Gerard van Swieten)은 조증이 가장 높은 단계의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 그들은 이러한발전을 단순한 계속적인 출현으로 생각하지 않고 필연적인 역학적 결과로 생각했다. 우울증 환자의 뇌액은 활발한 작용을 하지 못하고 침체해 있다가 특정의 시간 후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장에 가득 찬 우울한 기분이 자신의 무기력성 때문에 '더욱 견디기 어려운 악성의' 기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울한 기분 속에서 날카롭게 작용하는 더욱 강한 산성의 요인들이 형성된다. 이 요인들은 뇌에서 혈액으로 전달되어 조증이라는 강한 흥분을 야기시킨다. 따라서 조증은 정도의 차이에 의해서만 우울증과 구별될 수 있다. 조증은 우울증의 당연한 귀결이며 조증의 발생원인은 우울증과 같다. 그리고 조증과 우울증은 보통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호프만(Friedrich Hoffmann)은 조증과 우울증 사이에서 보여지는 단일성을 운동과 충격에 관한 법칙의 당연한 효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원리의 수준에서의 순수한 역학은 삶과 질병의 전개 속에서 하나의 변증법적인 법칙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우울증은 비활동성 또는 무기력성에 의해서 특징 지워진다. 달리 말하면 진한 농도의 혈액은 혈액이 모이는 뇌를 충혈시킨다. 그러한 뇌에서는 순환해야 하는 혈액은 순환을 멈추기 쉽고, 진해진 농도로 인해서 무겁고 둔해진 혈액은 굳어지기 쉽다. 따라서 활동성을 다소 또는 거의 잃게 된다. 그러나 혈액이 더 이상 무거워지거나 둔하게 되지 않으면 혈액에서는 진동이 발생하고, 그 진동은 발생하자마자 더욱 강해진다. 뇌와 혈액의 통로인 혈관, 그리고 혈액 자체는 보다 강하게 동요한다. 이러한 동요에 저항하여 뇌, 혈관, 혈액 자체는 더욱 강하게 진동을 진정시키려 하고, 그리하여 더욱 굳어지게 되고, 더욱 굳어진 이 혈액에서는 매우 역동적인 인류작용이 일어난다. 이러한 작용은 가속되면 곧 조증을 의미하는 흥분과 동요로 변화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활동적인 충혈이라는 상상을 거쳐서 바싹 마름, 경화, 역동적인 운동과 작용이라는 상상에로 옮겨온다. 이러한 이동은 다음과 같은 연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연계는 고전주의의 메카니즘을 지배하는 원리가 조증과 우울증의 기능적 단일성에 관한 상상적이지만충실한 견해들에 의해서 매순간 영향을 받고, 왜곡되고, 그러한 견해들에로의 편향이 일어나는 그러한 연계이다.
계속해서 다른 상상적인 견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들은 더 이상 본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 견해들의 유일한 기능은 이미 확보된 조증과 우울증간의 단일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기능이다. 다음의 예가 그에 대한 증명이 되어줄 것이다. 슈펭그러(Spengler)는 조증과 우울증간의 순환현상을 전지(electric battery)의 원리를 가지고 설명한다. 먼저 유기체의 특정 부분에로 신경 호르몬과 신경 자체의 힘이 집중된다. 그러면 오직 이 부분만이 심하게 동요하고 다른 부분은 수면상태에 돌입한다. 이것은 우울증의 단계이다. 그러나 동요의 강도가 특정 정도에까지 도달하면 이러한 국지적인 상태는 갑자기 유기체 전체에로 확산되고, 이 확산 때문에 유기체는 이러한 상태 가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강하게 동요한다. 이것이 조증의 경우이다. 이 수준의 논의에서 보이는 상상적인 견해들은 너무나 복잡하며 완결되어 있다. 이들 상상적인 견해들은 생리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영역으로부터 도입되어서 이 견해들이 생리학적인 단일성을 지각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일성 자체는 그와 같은 지각을 통해서 제시된 것이다. 반면에 이 지각 자체의 토대는 비록 매우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조증과 우울증의 통합의 단초를 제공하는 상상들에 기저하고 있다. 이러한 상상들은 제임스의 "사전"에도 들어 있다. 첫 번째 것 중의 하나에서는 쉽게 지각될 수 있는 단일성의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조증과 우울증을 하나의 단일한 질병에로 환원시켜서 양자를 하나의 동일한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경험과 매일매일의 관찰을 통하여 조증과 우울증이 동일한 기원과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관찰과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정한다. 즉, 우울증으로 여겨지는 한 성향이 특별히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쉽사리 조증 환자로 변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증이 멈추면 우울증은 다시 시작되어 양자간에는 일정 시간에 따른 순환이 일어난다." 17,8세기 동안 이러한 상상적인 견해들은 하나의 구조를 형성했다. 그 구조는 따라서 지각의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개념체계나 증상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증명해 보자. 조증과 우울증증간의 질적인 전환도 지각작용에서 일어나는 변화처럼 각각의 본질적인 모습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윌리엄 쿨렌(William Cullen)은 조증과 우울증에서 '정신착란의 주된 대상'을 발견했을 것이다.-역으로 쿨렌은 우울증은 '굳어지고 건조해진 뇌세포 조직'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본질적인 사실은 이론적 작업이 관찰의 단계에 머물렀지 설명력 있는 상상적인 견해들로 이루어진 이론구성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본질적인 사실 상상에 입각한 견해들에 의해서 이론적 종합의 본질적인 역할이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종합에 의해서 지각의 구조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각의 구조를 통해서 적어도 증상들은 유의미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고, 진리를 가시화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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