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제4장 열정과 정신착란(2/3)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의 광기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해 볼 수 있겠다. 스스로를 유죄라고 판단한 그는 살인은 하늘에 계신 신의 눈에는 저주받을 짓으로 보인다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영원히 저주받았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저주는 인간을 악마의 손에 넘겨주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자신은 끔직한 악마의 손에 맡겨졌다고 말한다." 이 악마를 그가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악마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않고 악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는 머리 속에서 이러한 악마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은 그의 뇌의 작용과 정신의 작용에 의해서 자신이 악마를 보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함께 그의 영혼 앞에 제시된다. 따라서 광기는 디에메르브렉이 분석했듯이 두 차원을 갖는다. 한 차원은 누구나 명백히 알 수 있다. 자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남자에게서 나타나는 부당한 우울증, 악마를 그리는 타락한 상상, 악마와 이야기하는 해체된 이성,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광인의 담론이 가진 엄밀한 구성이 담론을 보호하는 무오류의 기저에 의존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담론은 논리에 있어서 가장 확고한 믿음을 본질적으로 요구한다. 담론은 판단들과 판단들을 연결시키는 추론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것은 이성의 작용의 일종이다. 간단히 말해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혼돈스러운 정신착란의 심층에서 정신착란의 비밀스러운 질서가 광인의 담론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제2의 정신착란,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이성, 즉 정신착란의 화려한 외적 증상에서 해방된 이성이라 할 수 있는 제2의 정신착란은 광기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광기를 참으로 만드는 기저(논박 불가능한 논리, 완벽하게 구성된 담론, 생생한 언어로 이루어진 타당한 추론)를 발견하는 동시에 광기를 진정한 광기로 만드는 기저(광기 자체의 본성, 광기가 드러나는 특수한 유형들, 정신착란의 내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해 보면 정신착란의 언어는 광기의 궁극적인 진리이다. 물론 그것은 정신착란의 언어가 광기의 구성형식, 광기의 발현의 원리인 한에서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진다. 만일 디에메르브렉의 우울증 환자가 스스로가 악마와 대화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악마의 형상이 영혼의 작용을 통해서 그의 뇌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가 구성한 악마의 모습은 단순히 일종의 강박적 선입관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선입관이 나타내는 것은 그의 육체에 각인된 담론, 즉 신이 살인자에게 내린 벌에 관해서 끝없이 반복한 담론이다. 육체와 육체에 숨겨진 각인, 영혼과 영혼이 지각한 형상은 정신착란의 언어가 가진 구문론의 단계들 이상의 것이 아니다. 디에메르브렉이라는 한 저자의 연구사례(우울증 환자에 관한 연구)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른 사례를 고찰해 보자. 우리는 또한 다른 시기, 다른 저자, 다른 질병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광기에 대한 고전주의의 개념에서도 정신착란의 담론의 근본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예는 비앙빌리(Bienville)가 관찰한 '여자음란증'(nymphomania)환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쥴리라는 소녀의 상상은 조숙한 독서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하녀와의 대화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그 하녀는 '비너스의 비밀을 전승받았으며 어머니의 눈에는 고결한 충복'이었으나 동시에 '딸의 욕정을 자극하는 사랑스러운 안내자'였다. 그러나 쥴리는 교육을 통해 형성된 모든 상상을 동원하여 이 새로운 욕망-하녀-과 싸웠다. 그녀는 종교와 도덕의 지식으로 음란소설의 도발적인 언어와 맞섰다. 음란한 상상이 너무나 생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강한 힘으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동안에는' 그녀는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이러한 부끄러운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옳지도 고결하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악한 대화와 위험한 독서는 증대되었고, 매순간 그러한 대화와 독서는 약화된 섬유의 흥분을 가속시켰다. 그러자 그녀의 극기의 지주가 되어주었던 언어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자연만이 말했었다. 그러나 곧 환상, 망상, 방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침내 쥴리는 욕정의 포로가 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일이라는 끔찍한 원칙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기본적인 담론 행위가 광기의 시작이다. 상상은 자유로워졌고, 욕망은 끊임없이 커졌으며, 신경섬유는 최고의 흥분상태에 도달했다. 도덕적 원리의 묘비명인 정신착란은 곧바로 발광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소녀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자유로운 환각에서 시작하여 정신착란의 언어의 엄밀성에서 끝나는 광기의 마지막 주기의 끝에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에는 두 가지 형태의 정신착란이 있었다. 첫째 특정의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에 고유한 특수한 징후적인 형태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정신착란의 증세가 있는, 또는 없는 질병들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건 이와 같은 정신착란은 언제나 명백히 존재했다. 정신착란이 광기의 본질적인 기호였기 때문이다. 정신착란은 광기의 진리의 내부에 있었으나 단지 광기의 한 영역이었다. 두 번째의 정신착란은 광기를 통해서 항상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 또 다른 정신착란은 환자 자신에 의해서 광기의 진행과정중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광기에서 광기의 연원을 찾고 광기의 비밀과 진실을 추적하고자 하는 모두의 눈에는 언제나 이 정신착란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 이러한 절대적이고 암묵적인 정신착란은 모든 종류의 정신의 변화에 기저해 있다. 따라서 그러한 정신착란이 결코 예상되지 않는 경우에도 정신착란은 엄연히 존재해 있다. 조용한 몸짓, 무언의 폭력, 기묘한 행위에 불과한 경우에도 고전주의 사고는 이러한 개별적인 기호들을 광기의 본질과 연결시켰다. 따라서 고전주의 사고는 앞의 경우들에서 광기가 항속적으로 기저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제임스(James)의 "사전"(Dictionary)은 다음과 같은 사람과 정신착란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오로 죄를 지은 사람, 지나친 자발적인 행위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 예의와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 그러한 행위에는 예를 들어 실타래를 찢거나 파리를 잡기 위해서 손을 사용하는 경우, 이유 없이 관습을 어기는 경우, 자신의 일상습관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거나 거의 말하지 않는 경우 등이 속한다. 또한 건강할 때는 정연하고 점잖게 말하면서도 그렇지 않을 때는 음란한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사람, 필요 이하로 호흡을 약하게 하는 사람, 주위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노출하는 사람은 정신착란으로 간주해야 한다. 또한 감각기관의 혼란 때문에 전신의 작용이 부자연한 사람, 혹은 행위나 행동의 자유나 자발성을 박탈당한 것처럼 감각기관을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사람도 정신착란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3) 이미 암시되었겠지만, 따라서 담론은 광기의 전영역을 망라한다. 고전주의적 의미의 광기가 정신과 육체에 초래하는 어떤 변화도 정신착란의 담론(delirious discourse)의 존재보다 더 특수하지 않다. 왜냐하면 정신착란의 담론이 육체적 변화, 행위나 말의 기괴함을 기저로 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광기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정의는 정신착란이다. "정신착란(delirium)이라는 말은 항적을 의미하는 ira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deliro는 항적에서의 이탈을, 즉 이성의 고유한 영역에서의 이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18세기의 질병 분류에서 현기증을 광기로 분류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다 드물긴 하지만 현기증을 신경질적인 발작으로 분류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신경질적인 발작에서는 이성적인 언어의 통일성을 발견하는 것이 종종 불가능했고, 현기증의 경우 세상이 실제로 '도는' 것 같은 착란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4) 언어는 광기의 최초의 구조인 동시에 마지막 구조이며, 광기의 구성형식이다. 광기의 본성의 각 발현 주기는 언어에 근거해 있다. 광기의 본질이 담론의 단순한 구조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사실 때문에 광기는 순수한 심리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실 때문에 광기가 영혼과 육체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와 같은 담론은 영혼이 영혼에 고유한 진리에 입각해서 스스로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무언의 언어이다. 동시에 그러한 담론은 육체의 운동에서의 가시적인 분절이다. 우리가 명백하게 생각한 영혼과 육체 사이의 대구, 보어관계, 일체의 즉각적인 교통은 광기에서는 광기의 고유한 언어와 그 언어의 힘에 의해서 중단된다. 발작 직전의 열정, 소멸 직전의 열정, 광기에 수반되는 가시적인 유체의 움직임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것들을 재구성하려고 할 때조차 이미 담론의 언어에 의해 비밀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만일 열정에 관한 결정론이 극복되고 환각의 자유에 의해서 해소된다면, 상상의 것들이 확신과 욕망의 세계 전부를 잠식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신착란의 언어-열정을 모든 한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담론'이 이미 현존해 있기 때문이며, 정신착란의 언어가 상상을 확정하는 힘으로 상상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광기의 각 주기가 시작하고 끝나는 것은 영혼과 육체, 언어와 상상, 어법과 생리학의 정신착란에서이다. 처음부터 정신착란은 그 엄밀한 의미로 영혼, 육체, 언어, 상상, 어법, 생리학을 구성한다. 결국 광기의 진실을 구성하는 것은 광기 자체이며, 광기의 현상 일체를 넘어서는 광기의 말없는 초월이다. 이제 마지막 문제를 생각해 보자. 무슨 근거로 광기의 토대가 되는 이 근본적인 언어는 정신착란이라는 간주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근본적인 언어가 광기의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언어를 진짜 광기, 그리고 광기의 원초적 발생형식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 언어는 '담론' 속에 들어 있어야 하는가?-여기서 말하는 담론은 그 형식은 이성의 규칙을 아주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이성 자체의 결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온갖 기호들을 담고 있다. 고전주의 시대는 어떤 중요한 중심적인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정식화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선 광기의 토대가 되는 이 본질적인 언어와 광기와 즉각적으로 가까운 증상인 꿈과 망상에 관해 고찰해 보기로 하자. 광기가 꿈과 유사한 특성을 가졌다는 것은 고전주의 시대의 한결 같은 믿음 중의 하나였다. 이 믿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래된 전통에서 기원한 것이다. 앙드레 뒤 로랑(Andre du Laurens)은 16세기 말엽 이 믿음에 대한 검증을 시도했다. 그는 꿈과 우울증을 동일한 기원을 갖는 것으로 그리고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연적인 꿈'은 전날 동안 감각과 오성이 경험한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꿈꾸는 주체의 기분에 따라 꿈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우울증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환자의 성향에서 기원하는 신체적인 증상이지만 환자의 마음에 따라 실제 사건들의 중요성, 가치, 다시 말해서 실제 사건의 분위기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우울증은 환자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게 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우울증은 초자연적인 개입에서 기원한다. 초자연적인 개입은 꿈꾸는 자의 정신이 현몽할 수 있게 하고, 미래의 일을 예견하게 하고 '이상한 사물'들을 보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17세기가 꿈과 광기간의 유사성을 믿는 전통을 유지한 것은 오히려 과거의 관계를 완전히 파기시키고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광기와 꿈은 각기 다른 기원을 가진 것으로, 기호로서의 긴급한 한 가치에 의해서 이해될 뿐만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광기와 꿈은 각각의 진행과정을 따라 각각의 본성 자체에 의해서 서로 만난다. 꿈과 광기는 이제 동일한 실체의 자격으로 등장한다. 양자의 메카니즘도 동일하다. 따라서 자키아스는 몽유병에서 꿈을 일으키는 운동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광기를 야기시키는 운동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잠에 빠지자마자 몸체로부터 어떤 어지러운 망상의 기운이 생겨나서 머리에까지 미치는데, 그 기운은 여러 가지이고 광포하고 진하다. 그 기운은 너무나 진해서 우리의 뇌에 어떤 형상도 형성시키지 못하고 단지 기운의 혼란한 움직임을 통해 신경과 근육을 동요시킬 뿐이다. 동일한 현상이 발작과 열광의 경우에도 빚어진다. 열광과 발작의 경우는 환각이나 거짓 믿음이 아니라 통제하기 어려운 강한 흥분을 야기시킨다. 수면의 진행을 계속 따라가 보자. 첫 번째의 광포함이 사라지면 망상의 기운은 뇌에까지 이르고, 그러면 그러한 망상은 보다 분명해지며 망상의 기운의 운동은 구체적이 된다. 이것이 환상적인 꿈의 시작이다. 그 꿈 속에서는 무수한 기적, 불가능한 일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꿈의 단계에 상응하는 광기의 단계는 정신분열(dementia)이다. 이 단계의 사람은 '실제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운의 동요가 모두 끝나게 된다. 수면중의 사람은 사물들을 보다 분명하게 보게 되고 안개 같은 기운도 맑아지며, 그 맑은 기운 속에서 실재와 부합된 전날에 대한 회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와 같은 회상은 기껏해야 한두 가지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울증이 한두 가지의 사실에 집착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집착은 '특별히 단지 마음이 산란한 것만은 아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우울증 환자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면의 진행과정 - 수면의 각 단계마다 특질적인 상상을 부과하는 요소들과 함께 - 과 광기 사이의 유비관계는 일관되게 성립한다. 왜냐하면 그 메카니즘이 같기 때문이다. 즉, 기운의 운동과 동일한 정신의 운동, 동일한 상상의 자유, 꿈의 현상의 물리적 특질과 감정의 도덕적, 심리학적 가치 사이의 대응, "수면상태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광기에서 해방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자키아스는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광기가 명확한 현상으로서의 꿈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는 잠과 꿈으로 이루어진 총체성과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즉 광기는 - 상상은 물론 - 환각, 예견, 수면 결핍, 관능의 밤, 인간에게서 깨어 있는 상태와 그 상태에서 얻어지는 진실을 빼앗아 오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의 복합체와 연결된다. 전통에서는 광인의 정신착란과 꿈 속에 등장하는 명료한 상상이 비교되었지만 고전주의 시대에는 정신착란은 상상과 정신의 일시적인 죽음의 복합체하고만 동일시되었다. 그리고 이 잠과 꿈의 복합이 명료한 깨어 있는 상태로 옮겨오면 광기가 시작된다. 이것이 고전주의 시대를 통해 인정되었던 광기의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상상과 수면의 복합으로서의 꿈은 거의 언제나 광기의 정의 속에서 긍정 혹은 부정의 기능을 했다. 부정적인 기능에서는 깨어 있는 상태라는 개념이 광인과 수면중의 사람을 구분하는 유일한 개념으로 작용했고, 긍정적인 기능에서는 정신착란이 광기의 변형으로 규정되었고 깨어 있은 상태는 특별한 차이점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정신착란은 잠자지 않고 있는 사람이 꾸는 꿈이다." 꿈을 광기의 일시적인 형태로 규정한 고대의 개념은 전도되었다. 이성이 얼마나 훼손되기 쉽고 한계적인가를 보이기 위해 정신병으로부터 힘을 빌리는 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오히려 광기가 꿈으로부터 원초적인 본성을 빌려오고 꿈과 광기의 유사성을 통해 꿈이 현실의 어두운 밤에서 발휘되는 상상의 자유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꿈은 속인다. 꿈은 혼돈을 야기시킨다. 꿈은 환각적이다. 그러나 꿈은 오류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기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꿈의 변형이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꿈 속이나 상상을 통해서 '불가능한 일이나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다. 혹은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실재와 닮은 형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자키아스가 주장하듯이 "이러한 것들에는 오류라든가 광기와 같은 것은 없다." 광기는 꿈과 매우 유사한 상상이 오류의 원인이 되는 긍정이나 부정을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과사전"(Encyclopedie)은 광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유명한 정의를 제시한다. "이성을 따르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내게는 광기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전주의의 정의에서 '오류'는 꿈과는 전혀 다른 광기의 요소로서 언제나 광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17,8세기의 광인은 그렇게까지는 환상, 환각, 스스로의 정신의 동요에 희생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는 기만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한편으로 관인의 정신이 꿈과 같은 제멋대로의 상상에 의해서 유도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광인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오류투성이의 의식의 운동에 내맡긴다면, 소바쥬의 말대로 "우리는 실제로 이성이 결여되어 있어 몇 가지의 주목할 만한 오류를 계속하는 사람을 광인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광인이라는 범주를 특징짓는 것은 광인의 욕망, 판단, 상상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혼의 끊임없는 오류이기 때문이다." 광기는 인간과 진리와의 관계가 방해받고 암흑 속에 묻힐 때 시작된다. 그러나 광기는 이러한 관계의 파괴 뿐만 아니라 이 관계 자체를 통해서 광기의 보편적인 의미와 광기의 개별형태들을 상정한다. 자키아스는 참과 거짓의 구분 불가능이라는 특징을 광기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첨가한다. 당연히 이러한 구분 불가능은 부정적으로만 이해되겠지만, 이러한 불가능성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구조 때문에 광기는 고유한 형태를 부여받는다. 진리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에 따라 광기의 여러 유형이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리취톤(Chrichton)은 베사니아(vesania)의 순서에 따라 광기에 다음과 같이 등급을 매겼다. 정신착란(델리리아, deliria)이 첫 번째 등급을 갖는다. 이것은 지각적인 진리와 광기의 관계를 변형시킨다("병적인 지각내용을 실재인 것처럼 간주하는 일반적인 정신착란으로 지적 능력의 측면에서의 문제이다"). 두 번째 등급은 환각이 차지한다. 환각은 표상내용을 변형시키는 작용을 한다("환각은 일종의 정신 오류로서, 환각에서는 상상의 내용이 실재로 간주되거나 실재가 왜곡되게 표상된다"). 마지막 등급으로는 정신분열이 있다(정신분열에서는 진리에 접근하는 능력이 없어지거나 변화하지는 않으나 그러한 능력 자체가 약화되고 그 힘이 감소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광기의 분석을 진리 자체로부터, 그리고 진리의 고유한 형식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백과사전"은 '물리적 진리'와 '도덕적 진리'를 구분한다. "물질적 진리는 우리의 감각과 외부 대상간의 정확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어떤 광기는 이러한 물리적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 광기로 규정된다. 물리적 세계의 광기로는 망상, 환각, 지각 현상의 혼란 등이 있다. "광신자들처럼 천사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광인이다." 한편 '도덕적 진리'는 도덕적 대상들간의 정확한 관계 또는 도덕적 대상과 우리들 자신과의 정확한 관계의 성립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광기는 이러한 종류의 관계를 상실함으로써 야기된다. 그러한 광기로는 성격, 행위, 열정에 있어서의 광기가 있다." "이제 참된 광기는 모든 종류의 정신의 분열, 일체의 자기애의 망상, 맹목적인 열정이다. 이 맹목성이야말로 광기를 특징짓는 성격이다."
맹목성 :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의 하나이다. 맹목성이라는 단어는 광기의 상상이 만발하는 가수면 상태의 밤을 지칭한다. 이 밤이야말로 고독한 광인의 상상들에게 보이지 않는 지배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맹목성이란 단어는 잘못된 근거를 갖는 믿음, 오류의 판단, 광기와 분리될 수 없는 오류의 토대를 지칭한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착란이라는 근본적인 담론이 비록 형식에 있어서는 이성의 담론과 유사하며 그 의미에 있어서는 이성의 담론만큼이나 엄밀하다 할지라도, 이 정신착란의 담론이 얼마나 이성의 담론과 다른가를 알 수 있다. 정신착란의 담론은 말한다. 그러나 밤의 맹목성을 통해서 말한다. 정신착란의 담론은 꿈의 텍스트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꿈의 텍스트는 혼간되고 치밀하지 못한 것에 불과하지만 정신착란의 담론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착란의 언어가 단지 오류 명제들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꿈의 텍스트 이상의 것이지만 정신착란의 담론은 꿈이 갖는 것과 같은 모호성에 완전히 빠져 있기 때문이다. 광기의 원리로서의 정신착란은 꿈의 일반 구문론을 통해서 형성된 오류 명제의 체계이다. 광기는 확실히, 그리고 분명히 꿈과 오류가 만나는 지점이다. 광기는 광기의 여러 변형형태를 통해서 광기와 꿈이 만나는 지점의 표면, 광기와 꿈이 연결되고 분리되는 지점과의 표면을 통과한다. 광기가 오류와 공유하는 것은 비진리라는 점과 긍정과 부정을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꿈과 광기의 공유점은 끊임없이 분출하는 상상과 환각 대상의 분명하고 화려한 현존이다. 그러나 오류는 내용이 없는 단순한 비진리이고, 꿈은 긍정 부정의 판단을 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광기는 오류의 빈 내용을 상상으로 채워주고 환각으로 하여금 오류를 진리로 인정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광기는 충실성이란 속성을 가졌다. 왜냐하면 광기는 밤의 모습들에게 낮의 힘을 갖게 해주고 환상의 형식을 깨어 있는 정신의 활동과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광기는 어두운 내용에 밝은 형식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서는 찾아지지 않는 공허한 상상의 정점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충실성이 아닐까? 상상의 내용은 단지 맹목성의 찬미자인 환각을 제시할 뿐이며, 실재세계와 동떨어진 수면중의 형상들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의 형상들이 아무리 분명하고 아무리 확고하게 신체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형상들은 무(nothingness)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결국 이러한 형상들이 나타내는 것은 무이기 때문이다. 오류의 판단이라는 것도 결국 피상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무를 진리 또는 실재라고 판단하는 것은 결코 판단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비존재의 오류에 빠진 것일 뿐이다. 통찰력과 맹목성, 환각과 언어, 상상과 판다, 수면과 깨어 있음, 낮과 밤을 연결시킴으로써 광기는 궁극적으로 무가 된다. 왜냐하면 광기는 이들을 통해서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기는 무라는 이 역설이야말로 광기 자체를 분명히 보여주고 기호, 말, 행위에 있어서의 발작을 야기한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질서와 무질서가 확고하게 통합되어 있고 사물의 이성적인 존재방식과 광기라는 무가 불가분리적이라니. 광기가 무라면 광기는 광기 자체로부터의 이탈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고, 또한 이성 속에서의 출현을 상정해야만 광기는 광기로 보일 수 있다. 광기는 광기 자체로 있어서는 광기가 아닌 것이다. 광기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립해야만 광기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에 관한 경험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했다. 광기는 언제나 부재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현상적이거나 실재적인 성격을 독립적으로 갖지 못한 광기는 스스로가 접근해 갈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후퇴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기는 동시에 광인이라는 하나의 자명성 속에서만 현존하며 나아가 완전한가시성을 획득한다. 광기라는 무의미한 무질서는 우리의 고찰에 의하면 질서정연한 분류, 영혼과 육체의 엄격한 메카니즘, 분명한 논리에 따라 전개되는 언어적 행위를 보여줄 뿐이다. 비록 광기 자체는 이성의 부정일지라도 광기가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모든 것은 단지 이성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광기에 대한 이성의 지배는 언제나 가능하고 또 필연적이지만, 그것은 광기가 비이성인 한에서이다.
이러한 경험을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 비이성(unreason)이다. 이성과 가장 가까우면서 동시에 이성과 가장 동떨어진 비이성, 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공허하면서 동시에 가장 완결되어 있는 비이성, 낯익은 구조를 통해서-지식, 나아가 과학의 실증성을 허용하면서-이성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비이성, 이성으로부터 벗어나 접근 불가능한 무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후퇴해 가는 비이성. 이제 우리가 고전주의 시대의 비이성에게 비이성과 꿈의 관계, 비이성과 오류와의 관계라는 가치 이외의 본질적이고 당연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비이성을 이성의 질병이나 이성의 상실과 소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이성은 현혹당한 이성, 즉 이성의 혼미상태이기 때문이다. 혼미상태에서는 백주에도 밤이 존재한다고 여기며, 빛이 분출되고 있는 중심에서도 어둠의 지배를 믿는다. 혼미스러운 이성은 태양을 향해 눈을 뜨고 있지만 보는 것은 무이다. 즉 보지 않는 것이다. 혼미 속에서 대상은 밤의 어두운 깊이에로 후퇴해 감으로써 즉각적으로 통찰 자체에 대한 억압이라는 반대급부를 획득한다. 혼미스러운 이성이 대상을 보는 그 순간 대상은 빛의 비밀인 어두운 밤에로 사라져 가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사라져 가는 순간의 대상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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