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883호
2012.7.13 (음 5.24) / 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우습지 않은가? 집시점장이를 비웃는 사람이 경제학자의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니. - 신시내티 인콰이어러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일제피해여성
“‘대동아전쟁’ 때 ‘국민학교’를 다녔고, 해방 이후에 ‘동란’을 겪고 나니까 ‘5·16 혁명’이 일어나며 세상이 바뀌는 걸 경험했으니 참 오래 살았지요. 현역 기자 시절 맞닥뜨린 ‘광주사태’ 때는 혼란스러웠고….” 얼마 전 만난 팔순의 한 언론계 선배가 혼잣말처럼 회고한 내용이다. 말 그대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그가 무심히 내뱉는 말 속엔 경험할 당시의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 시대에 맞는 공식 표현은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5·16 군사정변(쿠데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역사인식의 귀결은 개념과 용어의 명명으로 귀착되곤 한다. 사태, 항쟁, 반란, 폭동, 운동, 혁명…. 이 가운데 어느 것으로 호명되고 이해되느냐에 따라 한 사건과 그 사건에 연관된 사람들에 대한 사후적인 이해와 평가는 판이해진다.(<역사용어 바로쓰기> 179쪽) ‘한일합방’은 무력에 의한 침탈이니 ‘-병탄’으로, ‘을사조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니 ‘-늑약’으로 하자는 주장은 그래서 타당하다. 이런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게 ‘종군위안부’, ‘정신대’이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위안부’는 ‘강제된 성적 노예’로 표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군 위안부=강요된 성노예’ 미국 인식 맞다”(ㄷ일보), “‘종군위안부’ 아니라 ‘강제적 성노예’가 맞다”(ㅅ신문)처럼 사설에도 등장하면서 이 표현을 두고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정부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피해 당사자들의 정서적 측면을 고려해 ‘일본군 위안부’라 하지만 번역할 경우 의미를 제대로 담기 어렵기에 영어로 ‘성적 노예’라고 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불현듯 낮지만 단호했던 한 시청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종군’, ‘위안부’, ‘(결사대의 뜻인)정신대’ 그 무엇도 당시 피해자의 실체를 담아내지 못한다. 일본제국주의에 강제로 희생된 분들이니 ‘일제피해여성’이라 하면 어떨까.”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 '일제강점기피해여성' 이 더 낫다고 본다. 제국주의 뒤엔 항상 강점이 들어가야한다고 주장한다. - 윤영환
[우리말바루기] 똔똔 / 도긴 개긴
"영화 '디워'의 손익분기점은 1300만 명이다. 투자된 금액과 회수된 금액이 '똔똔'이 되는 지점이 1300만 명이라는 이야기다" "법정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입으로 매달 방세와 식대, 교통비를 제하면 간신히 똔똔이다"에서처럼 '똔똔'이란 말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똔똔'은 수입과 지출이 엇비슷해 그저 그렇고 그렇다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둘의 실력이 엇비슷하거나 팽팽하다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그러나 '똔똔'은 우리말이 아니다. '똔똔(とんとん)'은 득실이 없는 경우나 금전적인 것과 관련해 '본전'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똔똔이다' 대신 '본전이다' '손익분기점이다' '남는 게 없다' '팽팽하다' '대등하다' '막상막하다' 등 적당히 문맥에 맞는 다른 말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똔똔'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말로 '도긴 개긴'이 있다. "이전 작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도긴 개긴의 연기는 신선함을 떨어뜨린다" "결정적 이슈가 없이 선거를 치러야 하므로 여당이나 야당이나 도긴 개긴이다"처럼 쓰인다. '긴'이란 윷놀이에서 자기 말로 상대편의 말을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를 나타낸다. '도긴 개긴'은 도로 가는 길이나 개로 가는 길이나 대세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차이라는 뜻이다. '도길 개길' '도낄 개낄' '도진 개진' '도친 개친'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도긴 개긴'이 정확한 표현이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
|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갌산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러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어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한 잔의 인생 - 김민정
한 잔의 술을 마시고 한 잔의 인생을 마시고
강물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흘러가는
삶이여 너, 단단한 허무 껍질 깨고 피어나는.
(2004.3)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1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선물
미국 남부 지방의 한적한 도로를 버스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는 한 노인이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처녀는 고개를 돌려 노인이 들고 있는 아름다운 꽃다발에 자주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노인이 버스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처녀의 무릎 위에 불쑥 그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노인이 말했다. "아가씨가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주는 것이니 받구려. 내 아내도 아가씨가 이 꽃을 갖는 걸 기뻐할 거요. 아가씨에게 꽃을 선물했다고 내가 아내에게 말하겠소." 처녀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그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처녀가 바라보는 사이에, 노인은 버스에서 내려 길가에 있는 작은 공원 묘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베넷 커프
|
|
|
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
|
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2. 원시 시대의 가족
4)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원시 사회의 여성의 지위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여성의 모성이 존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생산과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반영이며, 또한 당시의 평등한 생산 관계의 반영이다. 즉, 생산이 다른 사람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 행해졌기 때문에 모성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동을 강요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출산은 언제나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로서 그것에 관한 많은 전통적 관례가 있으며 흔히 종교와 관련되어 있다. 원시 사회는 모성이 법과 관습에 의해 보호되고 신성한 대상으로 간주되며, 그녀 자신은 자신의 처지에 긍지와 행복을 느끼는 이상이 실현되는 사회였다. 말리토프스키에 따르면 멜라네시아의 여자들은 한결같이 자식에 대한 열렬한 갈망을 보여주며,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그녀의 느낌을 지지하고 그녀의 성향을 조장하는 동시에 관습과 관례에 의해 그것을 이상화한다. 관습에 의해 임신부는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되며, 이는 원주민의 실제적 행동과 감정 속에서 완전히 현실화되어 있는 이상이다.
많은 원시 사회에서 월경 중이거나 출산을 맞은 여성들을 공동체 전체가 보호하고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부락내에 산옥을 두어 월경 중인 여자, 임산부들이 들어갔다. 월경 중인 여자는 8~9일, 산부는 50여일 정도를 여기서 지냈다. 이런 풍습은 모자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책임과 출산의 공동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월경과 출산을 존중하여 여자가 성장하여 '월경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씨족신의 축복을 받는 사건으로 여겼다. 몇 년전 일본의 오끼노시마에서 행해진 풍속 조사에서, 첫 월경을 한 딸을 집안과 마을에서 축복하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월경을 비밀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불결하게 여기게 된 것은 문명 사회 이후의 일이다. 문명 사회는 임신 역시 부끄럽고 사적인 일로 치부한다. 임신한 여성의 모습은 보기 흉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20세기 초 한 독일의 신사는 여자에게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주지 말자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의회의 연단에 선 임신부를 상상해 보는 것이 좋다. 얼마나 '비미학적' 인가." 그러나 인류 최초의 미술품에 속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문명 사회와는 상반된 원시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예술 작품의 하나인 이 여인상은 풍만한 젖가슴과 불룩한 배를 한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는 생명의 생산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숭배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태어난 아이에 대한 공동체의 공동 책임이라는 의식과 이를 강조하는 문화적 양식들도 발전했다. 일본의 민간 전승에는 '치오야'라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부락 내의 임산부의 동년배, 즉 같은 연령층의 여성이 태어난 아기에게 첫 젖을 먹이는 것을 말한다. 태어난 아기가 그 생모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속하는 것임을 표현하는 풍속이다. 출산과 수유 뿐만 아니라 양육도 공동화되어 있었다. 일례로, 일본에는 지금의 탁아소와 같은 전문 양육 시설이 있었다. 또한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집회소 제도와 상호 교육제가 있어서 여자 어린이와 남자 어린이는 각각 집회소에 들어가 각종 상호 훈련을 하고 어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함께 성인식을 치르고 어른 집단에 낄 수 있었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5) 아버지, 성실한 보모
대개의 원시 사회에서는 남성 역시 임신한 여성의 부양에서 양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역햘을 공유하고 있었다. 현대 유럽의 부계 사회와 멜라네시아의 원시 모계 사회에서의 아버지의 역할을 비교 분석한 말리노프스키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의 부계 사회보다 원시 모계 사회에서 아버지와 자식들이 훨씬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었다.(주28) 현대의 부계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권리가 확고한 데 반해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매우 소원하다. 이에 비해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하는 모계 사회에서의 아버지는 그 반대였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멜라네시아의 아버지들은 가장도 아니요, 그의 혈통을 자식에게 전승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생계의 공급자도 또한 아니다. 멜라네시아에서의 '아버지의 위치'는 순수한 사회적 관계다. 이런 관계에서 아버지가 맡은 역할은 어디까지나 아내의 자식에 대한 그의 의무일 뿐이다. 아버지는 '아이를 팔로 받기 위해' 존재한다. 트로브리안드의 전형적인 아버지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보모다. 그는 어린 아이가 아직 유아일 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보모이고, 그가 아동이 되면 그들과 놀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며 그들의 기호에 맞는 재미있는 오락이나 일을 가르쳐 준다. 사회적 전통은 이러한 일들을 아버지의 소명으로 부과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도 아버지는 언제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의무를 열심히, 그리고 기꺼이 수행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말리노프스키는 "일반적인 남성에 있어서 그들이 자식에 대하여 애정적이고 부드러운 감정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명백하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자식에 대한 아무런 특권이나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는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특권이 없음으로해서 그는 아버지로서의 본능을 자유스럽게 따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녀 양육게 대한 남편의 공동 책임이라는 의식은 이를 강조하는 다양한 문화적 표현들을 만들어냈다. 그 중 유명한 것으로 원시인들 사이에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쿠바드'라는 풍속이 있다. 이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그 남편이 '공동 책임'이라는 강력한 의식에서 같이 진통하고 같이 앓아 눕는 풍속을 말한다. 기록 영화 '몬도가네'를 보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가까운 곳에 있는 물 속에 들어가 진통의 괴로움을 같이 앓으며 고행하는 아프리카인의 모습이 나온다. 이런 풍속은 아프리카뿐 아니라 아메리카, 인도, 중국, 우리나라 등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인도에서 남편은 아내가 진통을 시작하면 여자의 옷인 '사리'로 바꿔 입고 머릿수건을 동여맨 채, 산실에 같이 누워 진통하는 흉내를 내는 습속이 있었다. 중국의 운남성이나 지주성에서도 남편은 한 달 내지는 40일간 산부와 함께 누워 산욕의 괴로움을 같이한다. 유럽의 피레네 산맥 지방에서도 이런 풍속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세계 공통적인 풍습이 발견된다. 평안도 박천 지방에서는 '지붕지랄'이라 하여, 산모가 진통을 시작하면 남편은 그 산실의 지붕위에 올라가 용마루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또한 '상투잡이'라는 풍속도 이와 같은 것이다. 산모는 아이를 낳을 때 삼신 끈을 붙잡고 힘을 주며 아이를 낳았는데, 이 삼신 끈으로 남편의 상투를 이용한 것이다. 남편은 산실의 문 밖에서 문기둥에 버티어 서서 창호지를 찢고 산실 안으로 상투를 처박는다. 산모는 이 상투를 쥐고 서서 힘을 쓴다. 필사의 안간힘일 것이니 오죽 아팠을 것인가. 혹 상투가 짧거나 늙어서 약해졌을 때는 '상투빌이'라 하여 가발로 된 상투를 빌어다가 야물게 턱을 걸고 산모로 하여금 붙들게 한다. 이 상투 삼신승 풍속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민요도 전해져 오고 있다.
우습세라 우습세라 젊은 각시 아날때는 제 남편의 상투쥐고 울콩불콩 낳는다고
또한 상투빌이에 관한 민요도 있다.
이집저집 다니면서 상투 상투 빌려 주소 아 낳으면 은공 갚아 천년만년 잊지않고 그 은공을 갚겠다고 앞길 바빠 뒷길 바빠
마루 위에 앉아서는 상투꽁지 길게 매고 문창구무 한구멍에 들이들이 밀었단다. 각시각시 상투 쥐고 이,이,힘 쓰면서 애를 쓰며 당기더니 상투머리 쑥 빠지자 당콩 같은 빨간 애기 말똥 말똥 빠져났네.
이런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의 출산 후의 어떤 부담을 공유하게 하거나 최소한 그녀를 동정하는 행위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회적 장치들이 모든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쿠바드는 물론 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히 불합리한 관습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깊은 의미와 필수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사람이 결합하여 인간 가족을 이룬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버지와 자식을 도덕적으로 매우 친밀하게 만들며 전통적인 관습과 규범을 통해 남성으로 하여금 자식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아이가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쿠바드는 또한 출산이라는 창조 행위에 동참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렬한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직접적으로 아이와 결부되어 있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자식을 낳는 과정에의 참여가 제한되어 있다. 원시 사회의 아버지들은 쿠바드를 통해 창조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아이와 아내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고, 태어나고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명백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쿠바드는 또 출산의 고통에 대해서도 문명 사회와는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이브가 죄의 대가로 출산의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성경 구절이 상징하듯이 문명 사회에서는 출산의 고통이 여성의 저주받은 표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쿠바드는 출산의 고통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모든 위대한 것의 창조에 따르는 필수적인 고통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자들은 자신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여성들이 임신출산에서 겪는 고통은 그들이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훨씬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만드는 소중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있기까지 그 어머니의 무한한 노고가 어려있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6) 우주 창생의 어머니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생산 노동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함께 당시의 지배적인 사회 조직인 친족 집단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원시 공산제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은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존경을 받았다. 여성이 가족 단체의 지휘자이며 선도자였다. 따라서 또 여자는 집안에서나 가족의 일과 종족의 일에서도 높은 존경을 받았다. 여자는 싸움의 중재자이며 재판관이고 또한 사제로서 예배의 일까지 맡았다.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 속에는 무엇인가 신성한 성질, 예언자적 성질이 숨어 있다고 독일 사람들은 믿는다. 그 때문에 그들은 여성의 충고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듣고 따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이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무속 신앙에 나오는 산신, 삼신, 풍신, 용신, 태양신 등과 신라의 일급 호국신인 나림, 혈예, 골화의 3산의 신도 여성이었다. 또 삼신 할머니, 청실홍실 할머니 등의 이야기는 원시 시대에 씨족 내의 대소사에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전해준다. 제주도에 전해오는 한 민담은 당신 사람들이 여성을 우주 창생의 어머니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옛날 선분대 할망이라는 키 큰 할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키가 컸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쳤다 한다. 이 거파는 '성산봉을 빨래 바구니로 삼고 소섬을 빨래돌 삼아' 빨래를 하고 치마 자락에다 흙을 담아 나르다가 흙이 새어 오늘의 소화산을 이루기도 하고 육지에 다리를 놓아주기도 하고 주먹으로 봉우리를 쳐서 움푹 패이게 하거나 오줌을 누어 흙이 떠내려 가 섬을 만들기도 하는 등 우주 창생의 어머니였다. 이런 설화들은 모계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어머니에 대한 친근감 있는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다. 모계 사회의 모권은 가부장제 사회의 부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는 폭력이나 강제, 부에 기초하지 않은 자연적인 권위를 가진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태내에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가져오는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
|
|
문학자료 → 철학 |
|
|
강영계 교수의 철학 이야기 - 탈레스에서 라캉까지
제1부 그리스 철학 이야기
일찍이 그리스인들은 강인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리스 영토가 산악이 많은 반도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강한 의지력으로 항해술을 발달시키고 상업에 몰두했다. 그들은 살기 좋은 지중해의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스 식민지는 소아시아 연안에서 이집트, 시실리, 이탈리아 남부까지 확장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전혀 다른 습관과 전통, 제도, 종교를 가진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산업과 무역을 발달시켰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들을 통해서 그리스인들은 새로운 체험을 했으며, 정치, 경제, 사회, 종교, 학문 등에 걸쳐서 풍요로운 문화 수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원래 지식욕이 강했고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예리한 감각이 있었으며 실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여 다른 민족의 문화에 접촉하고 무역과 산업을 통해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은 "물 만난 물고기"와도 같은 상황을 가져다주었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 문학의 처음을 장식한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남겼다. 두 작품은 웅장한 한편 아직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즐거움, 대담함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지녔던 특징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점차 사라졌다. 문학은 세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바라보았으며.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염세적인 성격과 주관성을 강하게 나타냈다. 기원전 6세기 시인들의 특징은 윤리적 반성에 있다. 이솝이나 솔론, 포킬리데스 같은 시인들은 인생이 무엇인지 예리하게 분석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삶을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교훈적인 시를 쓰게 되었다. 그들은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러한 정신은 후에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발달에 크게 공헌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그리스의 정치는 도시국가 중심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도시국가는 인구 2만 명 정도의 도시를 말한다. 도시는 계급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형태는 군주제도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재산을 축적하고 문화를 소유함에 따라서 군주제도는 귀족 제도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가진 2~3인이 세력을 소유하여 과두정치의 형태가 나타났다. 그 뒤 독재자들이 나타나서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시민들이 독재자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민주제도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스의 철학 사상은 이상과 같은 문학과 정치의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점차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이 가진 신앙은 그 사람의 생각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인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과 같은 열정과 감정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신들은 인간과 관계하여 자식까지 낳을 수 있었다. 또한 종교예배는 신비적이었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올림포스의 신들만을 숭배했으나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하여 트라키아의 신 디오니소스 숭배가 흘러 들어왔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으로, 데메테르는 곡식의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르페우스교가 디오니소스 신을 흡수하게 되었다. 비밀 예배는 오르페우스교의 금욕주의적 제도로 변했다. 오르페우스교는 영혼의 불멸과 순회를 믿었다. 이러한 특징은 후에 피타고라스 학파,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플라톤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 철학은 자연에 눈 뜬 사람들의 자연철학 시대, 인간 본성을 물은 인간 본성의 시대, 자연과 인간의 체계에 대한 생각을 확립한 체계의 시대, 종교와 윤리 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킨 윤리 , 종교의 시대 등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제1장 자연철학 시대 자연 세계의 근본 알맹이는 무엇인가
물 한 방울로 철학을 탄생시킨 탈레스
이집트를 여행할 때 탈레스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나일강의 풍요와 만나게 된다. 그는 만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물이 만물의 근원적 물질이라고 보았다. 탈레스(625~545 B. C.)는 후계자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함께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로 일컬어진다. 그들이 밀레토스 섬 출신이기 때문이다. 탈레스는 상인 가문 출신으로 기하학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깊었고, 페르시아 정복 때 리디아 왕을 따라가 조언하는 등 정치적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스의 일곱 현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물은 세계의 원질이다 그는 이집트 여행 때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계산했다. 또 천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일어났던 일식을 미리 예언하기도 했다. 항구에서 배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으며, 작은곰 별자리를 북쪽 방향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기도 했다. 수학적 탐구에 열중했으며 뛰어난 과학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탈레스는 밤중에 별자리를 보며 걷다가 시궁창에 빠져서 하녀의 웃음을 사는가 하면, 올리브 기름 짜는 기계로 큰돈을 벌기도 했다. 풍년이 들 것을 예견한 탈레스가 미리 여러 곳에서 올리브 기름 짜는 기계를 비싼 돈을 주고 빌려두었던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풍년이 들자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탈레스에게 와서 올리브 기름을 짤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를 여행할 때 탈레스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나일강의 풍요와 만나게 된다. 그는 만물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물이 만물의 근원적 물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지구가 마치 나뭇조각처럼 물 위에 떠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탈레스가 말한 자연 세계 만물의 시초(아르케)는 원래의 재료, 곧 원질을 뜻한다. 그것은 시간적 시초가 아니라 논리적 시초이다. 닭과 달걀을 놓고 어떤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냐고 묻는다면 의견이 팽팽히 맞설 것이다. 그러나 닭과 달걀의 논리적인 시초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당연히 '생명'이다. 그 물음은 "닭과 달걀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탈레스가 물을 만물의 시초라고 한 것은 이와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탈레스는 눈으로 보이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상을 넘어서서 그러한 현상의 근원이 되는 원리 또는 원질을 생각했다. 즉 최초로 자연 세계의 근원을 추상적 사고에 의해서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 세계 전체의 근본 원리를 밝힘으로써 세계에 관한 체계적인 사색을 형성했다.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유인원에게도 가능하지만 추상적 사고는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능력이다. 추상적 사고는 사물의 구조와 본성을 밝혀 낸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지 눈으로만 설악산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산의 전체 형세와 구조까지 생각함으로써 산의 성질을 밝히고 나아가서 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이용할 것인가 까지도 생각한다. 즉 우리는 설악산에 관해서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탈레스에게서 우리는 추상적 사색의 시발점을 찾을 수 있다. 탈레스는 원질로서의 물이 생명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나라의 샤머니즘 또한 만물을 정신적이며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긴다. 산이나 바위 또는 큰 나무와 솥뚜껑마저도 혼백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외경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 자연철학 시대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원질을 생명과 영혼을 가진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일컬어 물활론 또는 물질영혼론이라고 한다. 탈레스의 철학 이론은 입으로만 전해지다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리되었다. 그의 이론을 정리하면, 우선 만물은 신들로 충만하며, 지구는 물 위를 떠다니는 평평한 나뭇조각과 같고, 물은 만물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 탈레스와 함께 밀레토스 섬 출신인 탈레스의 후계자들로 아낙시만드로스 (610~545 B.C.)와 아낙시메네스(588~524 B.C.)가 있다. 이들을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전통을 존중하고 비판 정신이 강하며, 사색에 의해 이론을 변화시킴으로써 독창적 이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그의 저술 <자연론>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최초의 산문 작품으로, 단편만 전해오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 최초의 철학적 저술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천문학, 기하학, 우주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최초로 세계지도를 구상했으며 해시계를 만든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우주를 계획된 체계적 전체로 이해했다. 또 최초로 물리학적, 합리적인 생각을 바탕 삼아 우주 발생사를 탐구했다. 또한 지구가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떠다닌다고 생각하는 한편, 생물은 수분에서 생긴다고 여겼다. 생물이 수분으로부터 건조한 것으로 변화함으로써 생명의 모습을 바꾼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가 주장한 물이 원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물은 너무 구체적이므로 그것보다 더 근원적이며 무엇이라고 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근본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무제한적이고 무한한 것이 원질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은 '무한정자' (토 아페이론: to apeiron)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아낙시만드로스가 감각적 인식을 넘어서서 순수하게 이성적,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은 영원히 자신이 생긴 곳으로 복귀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만물이 영원히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탈레스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을 자연 세계의 근원으로 보았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물보다 더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것, 곧 '무한정자'를 자연 세계의 근본 내지 원리라고 한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졌을 때 한 사람은 "사람의 근원은 유인원과 비슷한 원시인이다"라고 답하고 또 한 사람은 "사람의 근원은 이성이다"라고 답한다고 하자. 이때 후자의 답은 전자에 비해서 훨씬 더 철학적이며 추상적이며 순수한 사유를 반영한다.
사물이 생기는 원리를 생각한 아낙시메네스 아낙시메네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이오니아 산문으로 작성된 아낙시메네스의 글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몇 개의 단편에 불과하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를 비판했지만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둘을 조화시켰다. 아낙시메네스는 자연 세계의 근원을 '공기'로 보았다. 공기가 감각 경험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아낙시메네스는 아낙시만드로스보다 이성적 사고에서 한 걸음 퇴보한 감이 있다. 아낙시메네스는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결합시키는 공기인 것처럼 호흡과 공기가 전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지하 세계에서 환상이나 그림자로서 살아가는데, 인간이 죽을 때 공기나 숨은 인간을 떠난다고 믿었다.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의 '물'이 너무 구체적인 것이어서 그것으로부터 불이나 바위 등이 생길 수 없다고 보았다. 또 그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가 너무 추상적이므로 그것으로부터 구체적인 나무나 불이 생길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물'보다 추상적이지만 '무한정자'보다 구체적인 공기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탈레스와 아낙시만드로스를 비판하면서 종합하는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선배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원질(공기)로부터 어떻게 사물이 생기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어린아이는 처음에 '무엇'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것은 코, 이것은 손, 저것은 사탕" 등에 집착하지만 조금 더 크면 사물의 발생이나 생성에 관심을 보인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가"와 같은 물음은 사물의 생성에 관한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사물을 생기게 하는 근본 원리를 '농축'과 '희박' 두 가지로 보았다. 원질인 공기의 희박에 의해서 불이 생기고 그것의 농축에 의해서 물이나 흙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낙시메네스는 자연 세계의 근원 재료로서 공기를, 그리고 공기로부터 사물을 생기게 하는 원리로 '농축'과 '희박'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
|
|
문학자료 → 철학 |
|
|
광기의 역사 - 미셸푸꼬 / 인간사랑
제3장 광인들 (2/2)
광기의 동물성에서 기계론적 심리학의 관념과 광기의 구조가 동물들의 생존구조를 보여준다는 개념이 도출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17,8세기 동안에는 광기의 얼굴인 동물성 때문에 광기의 현상들에 결정론적인 외피를 씌울 수는 없었다. 반대로 동물성 때문에 광기는 예측불허의 자유, 즉 광포함이 날뛰는 자유의 영역에 자리잡았다. 결정론이 동물성에 미칠 수 있는 효과는 구속, 처설, 훈육의 형태를 통해서 만이다. 동물성에 의해서 광기는 자연 및 생명의 법칙과 연결되지 않고 수천 형태의 야수성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 야수성은 중세 시대의 유행했던 악의 상징적인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화된 야수성이다. 여기서 악은 더 이상 상상의 육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악의 극단적인 형태인 야수의 진실, 즉 내용이 없는 진실만을 파악할 따름이다. 악은 이제 온갖 종류의 상징적인 이야기로부터 벗어나서 야수의 총체적인 힘, 즉 발작만을 보존하고 있다. 잠복해 있는 동물성의 위험은 단번에 이성을 폭력에로, 진실을 광인의 발작에로 되돌린다. 실증적인 동물학을 이루어내고자 한 동시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기가 자연적으로 자리한 동물성이라는 강박관념은 고전주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지옥이었다. 바로 이 강박관념이 모든 감금의 관행과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되지 않는 야만성을 설명해 주는 온갖 상상들을 창출한 것이다.
광기에 대한 지각을 야수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도해와 연결시키는 것은 물론 서구문화에서는 본질적인 현상이어 왔다. 서구문화는 처음에는 동물 또한 자연의 풍요, 자연의 지혜, 자연의 질서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관념은 나중에 형성되었으나 오랫동안 서구문화의 표면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관념은 그 당시에는 서구문화의 상상의 심층에 깊이 침투되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상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동물은 오히려 반자연(anti-nature)에 속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동물은 자연의 질서를 위협하고 그 광포함으로 자연의 긍정적인 지혜를 훼손한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분명해진다. 로트레아몽(Lautreamont)의 작업은 그 증명이 된다. 왜 서구인이 2,000년 동안 이성적 존재라는 정의에 입각하여 살아왔다는 사실이 서구인이 이성과 동물성 양자에 공통된 질서의 존재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해야 하는가? 왜 서구인은 이러한 정의에 의해서 자신을 자연의 실증성에 끼워넣는 방법을 필연적으로 고안해내야 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무관하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없을까? 즉, 서구인에게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이성이 비이성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이성이 대립항을 발견함으로써 비이성을 떼어내는 방식의 척도로 작용했다는 가정은 불가능한 것일까? 바로 이 순간부터 철학은 인간학이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의 풍요함 속에서 인식하고자 했고, 동물은 부정의 힘을 상실하고 자연의 결정론과 인간의 이성 사이에서 진화의 실증이 되어야 했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식의 의미는 완전히 변했다. 모든 가능한 이성의 근원으로 제시되었던 비이성은 사라졌다. 그 때부터 광기는 동물성 그 자체로서의 인간, 즉 자연적 존재로 인식되는 인간이라는 결정론에 복종해야 했다. 고전주의 시대의 과학적, 의학적 분석-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이 광기를 이러한 자연의 메카니즘에 삽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광인에게 실제로 행해진 감금의 관행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즉, 광기는 여전히 동물성이라는 반자연적인 폭력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여하튼 광기의 동물성 때문에 감금은 미화되었고 동시에 감금을 통해 비이성적 존재가 가진 불명성은 은폐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에 광기와 여타의 비이성간에 형성된 거리가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광기와 다른 비이성은 동화되거나 동일시될 수도 있다. 비이성의 전영역은 침묵하도록 강요받음에도 불구하고 광기는 자유로이 스스로의 언어로 자신의 추문을 떠벌릴 수 있다면, 다른 비이성은 전달하지 못하지만 광기만이 특별히 가르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다른 수감자의 -어쩌면 보다 감각적인 - 담화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어떤 의미를 광인의 광포함은 가지고 있었는가? 어떤 점에서 광기는 보다 특별한 의미를 가졌는가?
17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비이성은 더 이상 교휸적인 가치를 갖지 못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토록 가깝게 경험되었던, 이성이 가진 위험스러운 전도성은 잊혀졌고 그 추문은 사라졌다. 십자군 시절에 나타났던 광기에 대한 위대한 견해들은 얀세니즘이나 파스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견해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적인 경험에 속한 것이다. 오히려 그 견해들은 존속했으나 그 의미는 변화했고, 다소 역전되었다는 것이 옳은 생각이다. 자기 희생이라는 위대한 비이성에 스스로를 내맡기기 위해서 이성이 긍지와 확실성을 포기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전주의 시대의 기독교가 광기에 대해서 말한 것은 거짓 이성을 경멸하고 진리의 영원한 빛에 영광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신(God-in-man's image)의 광기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비이성적인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지혜일 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이 세계의 수치이며, 예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무지와 광기로만 보였다." 그러나 세계가 기독교화되었다는 사실과 신의 질서가 역사의 우여곡절과 인간의 광기를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은 "예수가 우리의 지혜의 극치"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의 치부와 기독교인의 굴욕은 비록 파스칼이 아직도 그 생기와 계시로서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더라도, 이제 기독교 사상에서는 단 한 가지 의미밖에는 갖지 못했다. 즉, 십자가라는 치부는 이러한 더럽혀진 정신들 앞에서 많은 맹목적인 영혼을 드러낼 뿐이다 : "너를 위하여 세계를 정복해 주신 주의 십자가가 아직도 당당한 영혼들의 치부나 광기로 남아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적인 비이성은 이성의 변경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이성을 체화된 신의 지혜와 동일시했다. 포르 로얄(Port Royal) 이후로 2세기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기다려서야 인간은 그리스도의 광기에 영광을 드리우고 그의 치부에 게시로서의 힘을 회복시켜 줄 수 있었으며, 또한 비이성이 더 이상 이성의 공공연한 수치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이성이 오랫동안 자신의 일부였던 광기를 자신으로부터 제거시킨 바로 그 순간에 광인은 이성의 소멸과 동물성의 발작을 통해서 예증이라는 고유한 힘을 획득했다. 그것은 마치 신과 신의 현현과 연결된 초인적인 영역에서 추방된 치부가 풍부한 힘과 새로운 가르침을 가지고 자연과 동물성의 영역에 새롭게 나타난 것처럼 여겨졌다. 가르침이 적용되는 지점은 광기라는 보다 저급한 영역에로 옮아갔다. 십자가는 더 이상 치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회복된 병, 용서받은 죄, 영원한 부를 약속받은 빈곤을 신성시했듯이 광기 또한 신성시했고 찬양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뱅샹 드 폴은 광인 수용소의 간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 주님이 이곳의 규칙이다. 그분은 언제나 광인들, 마귀들린 자들, 타락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계시고자 하셨다." 비인간적인 힘에 지배된 이들은 영원한 지혜의 구현이신 사람의 아들의 대변자들 주위에서 언제나 영광의 계기가 되어 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부정하는 지혜의 주위에 있으면서 바로 그 지혜를 영광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지혜이신 주님에게 굴욕거리를 제공했고 또한 지혜는 은총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는 단지 광인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인간의 온갖 비참함을 체험함으로써 광인들에게 또한 광인으로 보여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광기는 십자가의 구원과 실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인간화된 신의 최종 단계이며 궁극적인 형태가 되었다. "오 우리의 구세주시여! 당신은 기꺼이 유대인들에게는 수치거리요 이방인들에게는 광인으로 보여지길 원하셨고, 주님이신 당신은 스스로가 미치고자 하셨다는 복음서의 기록대로 기꺼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고자 하셨습니다...Dicebant quoniam in furorem versus est. 주님의 사도들은 때때로 주님에게서 분노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주님 또한 그들에게 그렇게 보이시고자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도들은 주님이 인간의 온갖 허약함과 비참함을 겪기 위해, 또한 이러한 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자신에게서 본성이 타락한 인간의 상태와 바로 그 상흔을 보는 것에 동의했다. 즉 빈곤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긴 순례의 길을 따른 것이다. 그 길은 또한 열정과 잊혀진 지혜, 광기의 길이었다. 그리고 광기가 순례의 한 형태-어떤 의미에서는 죽음 다음으로 궁극적인-가 되었으므로 광기는 이제 광기로 인해 고통받은 자들에게 존경과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광기를 존중한다는 것은 광기를 피하고 싶은 불가항력의 병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의 최저한계, 부차적이지 않고 본질적인 한계로서의 광기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시간의 영역에서의 인간의 삶의 한계이듯이 광기는 동물성의 영역에서의 인간의 삶의 한계이다. 그리고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신성화되었듯이 가장 야수적인 본성을 갖는 광기 또한 신성화되었다. 1654년 3월 29일 뱅샹 드 폴은 교회조합주의자인 쟝 바로(Jean Barreau)에게 자신의 아우가 생 나자르에 광인으로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포박하고자 했을 때 'quoniam in furorem versus est'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은 스스로 신성을 부여하신 사람들이 당신이 처했던 것과 똑같은 처지에 있을 때 그 상태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광기는 신이 자신의 인간화를 통해서 감수한 인간성의 최저단계이다. 신은 그러한 감수를 통해서 인간에게 있는 어떤 비인간적인 것도 회복되거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최악의 타락이 신성의 현존에 의해 영광을 얻은 것이다. 17세기 내내 모든 광기는 이 사실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다른 형태의 비이성은 세심한 주의에 의해 은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기라는 치부만이 찬양된 이유를 알아보자. 전자는 단지 일탈과 부도덕의 확신만을 가져오지만 광기는 인간에게 타락(Fall)이 인간을 어는 정도까지 동물성과 근접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신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할 때 어느 정도까지 신의 은총이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기독교에서는 비이성과 비이성의 치부가 갖는 교훈적 가치는 전부 인간의 형상을 한 신(예수)의 광기에 자리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신의 육화 자체는 더 이상 광기가 아니다. 광기는 야수의 형상을 한 인간에게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 인간은 타락의 극점에서 보여지는 죄의 가장 명백한 상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신이 은총을 내린 최후의 대상으로서 보편적인 용서와 순결의 복구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광기가 가르치는 모든 교훈과 그 가르침의 힘은 이 모호한 영역에서, 인간성의 최저한도에서 찾아야 한다. 거기서 인간은 자연과 이어지며, 거기서 인간은 최악의 타락과 절대적인 무구를 동시에 보여준다. 교회는 생 뱅샹 드 폴과 그의 교회조합, 자선의 형제회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광기를 겨냥하면서 광기를 세상에 드러낸 모든 종교적인 질서에서 볼 수 있듯이 광기에 대해 염려해 왔다. 그러나 이 염려가 교회가 광기에서, 어렵지만 본질적인 가르침을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회는 인간에 깃든 동물이라는 유죄의 결백성이라는 교훈을 발견했을까? 이것이 인간 야수의 발작을 찬양하는 광경에서 보여지고 이해되어야 할 가르침이다. 역설적으로 인간 야수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은 광기가 자연의 사실로서 인정될 순간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고전주의 시대의 자연은 언제나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한 영역은 아니었고, 인간의 궁극적인 진실인 동시에 인간의 포기가 되는 광기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 모든 현상들, 광기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상한 관행들, 광기를 징벌하는 동시에 광기에게 영광을 부여한 이러한 행위들은 광기를 동물성에로 환원시켰다. 그러면서 동시에 광기로 하여금 구원(redemption)을 가르치게 했으며, 광기를 비이성 전체와 관련시켜 볼 때 이상한 위치에 있게 했다. 감금의 장소에서 광기는 광기를 포함하여 광기의 가장 일반적인 규정이 되어주는 모든 형태의 비이성들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광기는 격리되었고 특별한 방식으로 취급되었으며 그 자신의 고유성을 보였다. 마치 광기가 비이성의 영역에 속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운동에 의해서 광기 자체를 벗어나 광기의 가장 역설적인 극단, 즉 이성에로 나아가면서, 즉 순결을 복수하면서 비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 같았다. 오늘날의 우리는 광기를 결정론적으로 파악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결정론에서는 자유는 점진적으로 억압되며 따라서 광기는 광기를 야기한 원인들, 광기의 추론적인 진행형태들과 함께 결정론이 주장하는 자연적인 규칙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는 광기는 야수와 사물의 황폐한 세계, 그들의 억압된 자유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일종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17,8세기의 광기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자연의 지평에서가 아니라 비이성이라는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광기는 하나의 메카니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동물성이라는 괴물의 자유스러운 발작을 드러낸다. 오늘날의 우리는 더 이상 비이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단지 형용사의 형태, 즉 '비이성적인'(unreasonable)이라는 표현만을 이해하고 있다. 이 형용사는 행위나 담화에 붙여지며 세인의 눈앞에 광기와 광기의 온갖 병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는 비이성적이라는 것은 광기의 한 현상형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전주의 시대의 비이성은 규범적인 가치를 가졌다. 비이성은 일종의 실제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광기는 비이성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비이성은 광기의 버팀목이었다. 혹은 비이성이 광기의 가능성의 자리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인간에게 광기는 자연적인 상태도 비이성의 심리학적인 혹은 인간적인 근원도 아니었다. 광기는 비이성의 경험적인 형태였다. 그리고 광인은 동물적인 발작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타락을 체험하면서 비이성이라는 기저 영역을 드러냈다. 이러한 비이성은 인간을 위협하고 - 엄청난 거리에서 - 모든 형태의 인간의 자연적인 실존을 둘러쌌다. 결정론에로 빠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어둠에 가려지는 것이다. 어떤 다른 종류의 합리론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심지어는 우리 시대의 실증주의보다도 훌륭하게 고전주의 시대의 합리론은 절대적인 자유의 공간을 위협하는 비이성의 위험을 포착하고 막을 줄 알았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赤子之心(적자지심) 赤(붉을 적) 子(아들 자) 之(-의 지) 心(마음 심)
맹자 이루장구하(離婁章句下)에는 대인이란 그의 어린 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 라는 대목이 있다. 赤에는 붉은 색 이라는 뜻이외에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 옷을 걸치지 않고 몸을 드러냄 이라는 의미가 있다. 적빈(赤貧) 이란 극빈(極貧)을, 적수(赤手) 란 맨손을, 적지(赤地) 는 불모지를 뜻한다. 순자(荀子)는 참되고 정성스런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적심(赤心) 이라고도 하였다. 赤子란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색깔이 붉은 색이라는 점에서 갓난 아이 를 가리키는데, 서경(書經)에서는 赤子를 백성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맹자는 순진 무구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이를 대인(大人)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니, 赤子之心(a child's heart) 이란 어린 아이의 마음, 즉 어린 아이 때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 을 뜻한다. 이는 곧 사람의 마음이 선량하고 순결함 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권에는 모 인사의 월북사건으로 적색(赤色)경보(?)가 발령중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만사 제처두고 색깔 가리기에 정신들이 없다. 그들은 赤子 같은 마음으로 좋은 정치만을 기대하고 있는 국민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
|
|
|
문학자료 → 과학 / 예술 / 교육 |
|
|
생물의 다살이 - 권오길
22. 등치고 간 빼먹는 기생말벌
내 고향 경남 산청이나 제주도, 전라도 일부에서는 아직도 뒷간을 통시라 부르는데 나름대로는 그 말이 '시하는 통' 정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아마도 이 변문화는 모든 삶의 정도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한 잣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풀 나뭇재를 모아뒀다 대변과 섞어버리는 발 얹는 큰 돌 2개가 모두인 회치장(깊은 산골에는 지금도 있다)에서 시작하여 사랑방 구석에 큰 항아리를 묻어 세우고 항아리 아가리와 반반하게 황토로 덧칠을 하고 나서 삼방위 흙돌담을 쌓고 위에 비스듬히 서까래를 얹고 적당히 이엉을 이어 얹으니 그것이 바로 통시다. 이 통시에 기와를 얹는 것은 천석꾼이나 되야 했으니 농담으로도 "다음에 부자 되면"을 통시에 기와 얹으면"이라고 했다. 양옆과 뒤만 흙돌담을 쌓고 앞은 그대로 두어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벌을 관찰하기도 했다. 우리집 통시는 통시뿐만 아니라 비료공장 몫까지 했으니 다목적 화장실이라 해야 맞다. 통시 앞옆에는 소변 항아리가 있어서 요소를 모아 남새밭 푸성귀에 뿌렸으니 기생충학 강의가 따로 필요 없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변에는 기생충의 충란이 묻어나오지 않고 모두 대변으로 나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얼갈이에 소변을 줘도 기생충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보리밭에 그놈을 뿌려야 하니 겨울 통시에 일부러 물을 부어 휘휘 저은 다음 똥장군으로 퍼날랐다. 그것도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끄무레한 날에 줘 비가 와서 희석시켜 땅에 배게 한다. 보통 날에 주면 진한 비료라 보리도 말라 죽는다. 퍼낸 항아리에는 다시 7할 정도 허드렛물을 채워 붓고 지푸라기를 집어넣어서 물이 튀는 것을 예방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못해서 변덩어리가 떨어질 때마다 물 튀김을 하니 그것을 피해서 궁둥이를 하늘 똥구멍까지 들어올렸다 내리고를 반복한다. 절간의 해우소나 우리집 통시도 같아서 물에 풀도 넣고 대소변을 섞어 썩히는 곳이 바로 통시였다. 오래 곧추 앉아 있으면 종아리 뒤꿈치가 아파오지만 그래도 그곳은 분명히 근심 걱정을 푸는 곳이었다. 무던히도 어려운 한 시대의 이야기다. 이제는 경험해보기 힘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먹는 것은 별게 아니였으나 그래도 그에 맞춰서 배설을 했으니 그때는 통시로 갔고 거기가 나의 중요한 연구실(관찰실)이 되었으니 결론부터 말하지만 그런 통시가 있었기에 말벌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렇게 깡촌놈으로 자란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 가난했기에 말벌을 관찰했노라고 큰 소리를 쳐본다. 통시에 들면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도 눈은 구석으로 가서 꼬마벌 한 마리가 토담벽에 황토 흙을 씹어 뱉아 굴집을 짓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예의 구부정한 흙집을 지어놓으면 짓게도 손끝으로 부수기를 여러 번 한다. 그래도 그 말벌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 자리에 집을 짓는다. 하루는 이놈이 곰작거리는 연두색 배추벌레 한 마리를 물고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게 아닌가!
기생충에 기생하는 생물의 세계 여기 곤충행동학자 이반(Evans) 등이 15년 동안 연구한 미국산 땅말벌. 20종의 연구결과를 묶어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는 검정말벌, 노랑말벌, 땅말벌, 장수말벌, 호리병벌 등의 말벌이 살고 있는데 땅을 파서 그 속에 집을 짓는 땅말벌, 고목 줄기 속에 종 모양의 집을 짓는 장수말벌(사람이 그 집을 따다 강장제로 먹는다), 작은 나무에 조롱박 닮은 흙집을 지어 매다는 호리병벌 등 모두가 집 짓는 습성은 다 다르나 그 집에 곤충의 유충을 잡아와서 그것들에 알을 낳는다는 점은 모두 같다. 이들이 관찰한 땅말벌(beewolf wasp)의 집짓기는 땅을 파서 집을 짓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 말벌과(Sphecidae)의 놈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20종의 공통 특징은 흙을 파서 집을 짓고, 지하의 여러 개의 작은 집에 곤충을 잡아 물고 와서 유충 살갗에 산란을 해서 붙여두는데 알은 이틀 후에 부화하여 유충이 되며 그놈은 먹이유충을 먹고 7~10일이면 다 자라서 고치를 만들고 그 따뜻한 지하에서 월동을 한다. 다음해 늦봄이나 여름에 고치를 뚫고 나와 성체가 되는데 반드시 수놈이 며칠 먼저 나와서 풀섶에서 터를 잡고 암놈이 그 영역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이들 성체들은 다른 곤충들이 다 그렇듯이 지구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3~4주 안에 짝짓기, 집짓기, 먹이잡기, 알낳기를 모두 끝내야 하기에 바쁘게 서둘지 않을수가 없다. 암수가 만나 10분간의 교미가 끝나면 암놈은 제일 먼저 땅바닥에 큰 굴을 파고 들어가서 몇 군데 작은 집을 차례로 파놓고는 첫 사냥을 나간다. 그리고 땅말벌의 학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학명은 Philanthus인데 이 이름이 그리스어로 phil(좋아하다), anthus(꽃) 라는 뜻으로 '꽃을 좋아한다'라는 뜻이다) 이 땅말벌은 꽃의 꿀을 먹고 산다. 새끼들은 친구 곤충의 유충을 먹지만 어미는 꽃의 꿀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참새들도 어미는 주로 곡식을 먹지만 크는 새끼는 거의 벌레로 키우고 사람도 젖먹이들은 주로 단백질 젖으로 키우는 것은 어느 동물이나 크는 놈들에게는 단백질이 중요한 것이라 그런 것이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어미와 새끼가 서로 먹이를 달리함으로써 '먹이경쟁'을 피하는 것으로도 해석한다. 식성이나 서식장소가 유성세대와 성체세대가 다른 것은 <먹이경쟁을 피하는 유충과 성충의 지혜>에서 설명한 것처럼 다형질화되어 먹이다툼을 피한다니 멋들어진 생물계의 한쪽이라 하겠다.
잡아온 먹이를 썩지 않게 보관하는 땅말벌 다시 땅말벌 이야기로 돌아와서 수놈은 유전물질만 암놈에게 전해주면 모두 끝나나 암놈은 지금부터 무척 바빠져 첫 사냥에서 잡아온 놈을 굴 입구에 차례로 눕혀 놓고 (아직 알을 낳지 않음) 약 20마리 정도가 잡히면 이제부터 작은 집을 판다. 집집으로 한 마리씩 끌고 가서 알을 낳고 진흙으로 입구를 막고, 또 기웃이 내려가 집을 파고 알 낳고 입구 덧쌓기를 차례로 계속한다. 나비 나방 유충 한 마리에 알 한 개씩을 낳는다. 그리고 작은 굴집 하나에 한 마리씩 집어넣는다. 그런데 잡혀 온 먹이가 말벌 유충이 다 자랄 때까지 약 10일간 패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벌써 어떤 기작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유추하게 되는데 앞에서 필자가 어릴 때 통시에서 관찰한 그 잡혀 온 배추벌레가 곰실거리고 있었다는 것은 암놈 말벌이 그 먹이를 바로 죽이지 않고 독으로 적당히 마취시켜 놨기에 그런 것이다. 참 교묘한 말벌 삶의 지혜라 아니할 수가 없다. 죽여 버리면 썩으니 마취를 시켜 둔다! 그래서 제 새끼에게 싱싱한 먹이를 준다. 말벌들이 나비와 나방이의 유충을 잡아 굴로 날아드는 것을 볼 때는 애벌레를 길바닥에서 쉽게 주워온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방이 유충들이 어떻게 이 거센 말벌의 공격을 피하는가 보자. 나방이의 알떼에서 개미새끼 같은 애벌레들이 까여 나오자마자 이놈들이 입에서 실을 쏟아내어 잎 가장자리를 잡아당겨 실그물을 얽어나간다. 그래서 조무래기 나방이 새끼놈들이 힘찬 말벌의 턱에서 자기를 보호받게 되니 본능의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실이 철사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가 몰랐을 뿐 말벌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말벌들은 실을 쉽게 걷어내고 잡아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나방이의 새끼들(유충)이 말벌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둘레에 몇 겹의 그물 같은 실을 쳐서 몸을 보호한다는 말이다. 나비 유충들은 보호색으로 잡힘을 피해나가고 이렇게 다들 생존방법이 특이하고 다르다. 그래서 말벌이 유충 한 마리를 사냥하는 데는 젖먹은 힘까지 다 쏟고 남다른 꾀를 부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과 관심을 더욱 끄는 것이 있으니 말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말벌이 잡아온 먹이를 탐내는 기생파리나 기생말벌이 있더라는 것이다. 똥이 있는 공에 똥파리가 날아드는 것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영어로는 이를 크레프토파라시트(cleptoparasite)라 하는데 우리말로는 '도둑기생'으로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기생파리와 기생말벌은 모두 다 누에에 알을 낳는 쉬파리(영장파리)처럼 암놈이 알을 낳는 게 아니라 새끼(구더기)를 직접 낳는다. 알이 이미 어미의 생식관에서 부화되어 나오는 일종의 난태생을 한다. 작은 기생파리놈은 땅말벌이 곤충의 유생을 물고 오면 잽싸게 달라붙어 거기에 쉬를 슬려고 하지만 말벌은 곡예비행을 하여 그놈들을 따돌리고 둔덕진 곳의 굴로 쏙 들어간다. 그런데 기생말벌은 한수 더 떠서 입구에 여러개의 가짜(부속) 입구를 만들어놨는데도 귀신같이 먹이 있는 굴을 열고 들어가 이죽이죽 웃으며 이미 땅말벌이 산란한 먹이에 산란을 한다니 등치고 간 내어 먹는 놈보다 더한 놈이다. 그런데 기생말벌 유생은 말벌 유생보다 식성이 더 좋아 먹이를 빨리 먹어치우는 것은 물론이고 먼저 산란된 땅말벌의 알이나 유생을 찾아내어 먹어 치워버린다니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 해두자. 기생충에 기생하는 생물의 세계가 사람 사는 세상에도 버젓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한편 두렵기도 하다.
별볼일 없는 수놈 여기 별볼일이 없다는 말벌의 수놈 이야기를 보태보자. 터를 잡아 한 마리의 암놈에게 10분 동안에 정자를 넘겨준 뒤에도 죽지 않고 다시 제자리로(풀잎으로) 돌아가 달라붙어서 다른 암놈이 세력권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2~3주간 영역을 지킨다. 계속해서 풀잎에 배를 문지르면서 페로몬을 분비하여 암놈 유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번 짝짓기를 한다는 것이다. 수놈만이 갖는 턱샘에서 성페로몬을 분비해서 암놈을 유인한다고 하는데 그 페로몬의 주성분은 지방산, 에틸에스터(ethylester), 케톤(ketone)의 혼합물질이고 고등, 하등에 관계없이 수놈호르몬 만드는 데는 지방이 으뜸 물질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여기 연구의 대상인 말벌들이 꿀벌을 공격해서 굴로 잡아간다는 점인데 산란기에는 1마리 말벌이 하루에 100 마리의 꿀벌을 죽인다고 한다. 양봉업자들에게 이 땅말벌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도 이 연구 결과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학자들은 이 말벌을 사람과 동물을 쏘아 죽인다는 '살인벌'을 잡는 데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여운을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 같이 살인벌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벌은 1956년 브라질에서 수입한 아프리카산 꿀벌인데 놈들이 계속 북상하여 1990년 10월에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어왔으며 1993년에는 아리조나까지 북상했다고 한다. 이 벌은 화가 났을 때 사람이나 가축에게 집단적인 공격을 하는데 화를 잘내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종으로 실제로 남미에서 35년 동안에 10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을 살생한 벌이다.
미국에서는 이 북상하는 공포의 벌을 연구하고 관찰해 일단 멕시코를 넘어오면 다 잡아죽인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결국은 그들이 국경을 침입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들이 북상하면서 여왕벌이 남미의 다른 유럽종의 수펄과 교미하여 반종(튀기)을 생산하면서 도리어 병과 기생충에 강하고 성질도 온순해지는 결과를 가져와 지금은 별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사람들은 벌레 한 마리도 인간에 이익되게 키우고 길들이는데 이것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아닌가 싶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동물이라서 그렇다. 고작 한해살이하는 땅말벌 한 마리의 생태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놈들도 다사 다난한 일생을 산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