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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9호
2012.5.3 (음 3.13)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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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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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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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 걸어야 할 어려운 과정을 밟을 용기를 지닌 사람은 드물다. - 에리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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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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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바루기] 허리를 곧게 피다
앉아 있는 시간이 긴 현대인에게 앉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앉는 자세가 삐뚤면 척추까지 변형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면 엄마는 항상 "허리 좀 곧게 피고 앉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허리를 피다" "날개를 피다" "우산을 피다"처럼 얘기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피다'와 '펴다'를 혼동해 생기는 잘못으로 "허리를 펴다" "날개를 펴다" "우산을 펴다"와 같이 써야 맞다.
'피다'는 "개나리가 활짝 피다"에서와 같이 '꽃봉오리가 벌어지다'는 의미로 쓰이거나, "숯이 피다"에서처럼 '연탄이나 숯 따위에 불이 일어나 스스로 타다', "잘 먹어서 그런지 얼굴도 피고 보기 좋다"에서와 같이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지다'는 등의 의미로 쓰인다.
'펴다'는 "종이를 펴다"에서와 같이 '접히거나 개킨 것을 젖히어 벌리다', "얼굴의 주름살을 펴다"에서처럼 '구김이나 주름을 없애어 반반하게 하다', "어깨를 활짝 펴다"와 같이 '굽은 것을 곧게 하다'는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허리 건강을 염려할 때에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라!"고 얘기해야 한다. 허리 건강을 지키기 위해선 눕듯이 앉지 말고 의자 등받이에 엉덩이와 등을 붙이고 곧게 앉아야 한다. 또한 다리를 꼬고 앉는 건 금물이며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해 주는 게 좋다고 한다.
[우리말바루기] 수다
최근 한 취업사이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이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질병을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는 남성의 25%, 여성의 43%가 '수다를 떤다'고 답했다. 전문가들도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수다가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마음속에 들어찬 응어리를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가 치유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수다는 생활의 일부로,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수다가 이렇게 스트레스와 우울증 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은 뚜렷한 목적 없이 가볍고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수다'는 정식 대화와 달리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 관념이 없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수다'의 사전적 정의도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 또는 그런 말'이다. 요즘 한 통신업체가 자사 상품과 관련해 인터넷을 통해 '수다'의 사전적 정의를 바꿔 달라는 서명 운동을 하고 있다. 수다가 순기능을 갖고 있으니 긍정적인 의미가 사전에 추가돼야 하며, 서명운동으로 뜻을 모아 국립국어원에 청원하겠다는 내용이다. 벌써 6만 명 이상의 누리꾼이 서명했다. 그러나 이는 전제가 잘못됐다. '수다'가 스트레스 해소 등 순기능을 하는 것은 바로 '쓸데없이 하는 말', 즉 별다른 목적의식 없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목적의식이 있는 말이라면 그건 정식 대화이지 이미 수다가 아니다. 사전은 낱말을 정의하는 곳이지 그로 인한 순기능이나 치료 효과를 밝혀 적는 곳이 아니다. 낱말의 뜻을 바꾸더라도 상품 이름과 관련된 기업이 상업적 의도로 일반인을 끌어들여 왁자지껄하게 할 일은 아니다.
[우리말바루기] 소담하다, 소박하다
"이번 여행은 시엠리아프 공항의 소담함으로 시작됐다. 앙코르와트 여행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한 조그만 공항, 시골 역 같았지만 정감 있는 모습이었다." "청소역은 소담한 시골 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벤치 너비보다 조금 넓어 보이는 이 역에는 철봉으로 만들어진 출입구가 있는데 아직도 넓은 모자를 쓴 역무원 아저씨가 서서 펀치로 마분지 기차표에 구멍을 뚫어줄 것만 같다."
위의 두 글에는 '소담함' '소담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들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소담하다'라는 형용사는 '생김새가 탐스럽다' '음식이 풍족하여 먹음직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다. 첫째 글을 보면 시엠리아프는 소도시의 조그마한 공항이다. 규모와 시설이 시골 역 비슷하다. 이런 공항을 두고 '소담하다'는 표현을 사용했고 둘째 글의 경우도 아주 조그만 간이역에 대해 똑같은 표현을 썼다. 비유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면 두 예문에서는 '소담함' '소담한'을 '소박함' '소박한'으로 바꿔줘야 뜻이 정확히 전달될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살펴보면 이처럼 '소담하다'가 '소박(素朴)하다'나 '아담(雅淡)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다. '소담하다'는 "화성은 언제라도 걷기 좋지만 소담하게 눈이 내린 뒤에는 더욱 운치가 난다" "소담하게 핀 수국을 꽂은 꽃병도 하나 놓았다"처럼 쓰는 게 바른 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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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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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의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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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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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숲에 이르러 - 서공식
어디로 불어가나 숲을 흔드는 저 바람은. 지그시 눈을 감고 무거운 꿈을 끊어보면 숲밖에 혼란 있음이 믿어지지 아니하네.
잎사귀에 튀어나는 티 없는 햇살 자락 모였다가 흩어지길 끝없이 거듭하고 고요히 비운 깊이는 세월을 잡아매네.
너는 또 의젓하여 구름 끝에 앉아 있고 일찍이 마음 한번 열어 뵈지 않았건만 머물러 고요한 중에 숲과 같다 이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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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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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생각해 봤어요 - 이성인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우리들 희망을 물어 보시는데 아이들이 저마다 대통령 장군 과학자 사장 축구 선수 프로 야구 선수 하고 발표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벼논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일은 누가 하고 농사는 누가 지을까, 하고 허수아빌 보면서 그냥 한번 생각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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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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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8. 양복의 비인간성
양복은 현대적인 터어키인, 이집트인, 인도인, 일본인, 중국인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고, 전세계의 외교관의 공식적인 옷차림으로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구식 중국옷에 집착을 가지고 있다. 많은 친구들이 어째서 양복을 입지 않고 중국옷으로만 지내고 있느냐고 곧잘 묻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을 내 친구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러한 질문을 하려면 차라리 어째서 자네는 두 다리로 서 있는가 하고 묻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 까닭을 설명할 생각이지만 이 두 가지는 우연한 상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내가 세계에서 오직 하나인 <인간적>인 옷을 입고 있는 이유를 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태어난 나라의 옷을 입고 파자마와 슬리퍼로 지금 이렇게 집 안팎을 돌아다니고 있는 인간이, 숨막힐 듯한 칼라, 조끼, 혁대, 멜빵, 양말대님 등의 일습 속에 꼼짝도 못하게 갇히고 마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수한 포함이나 디젤 엔진을 연상한다는 사실 외에 양복의 명성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양복은 심미적, 도덕적, 위생적, 또는 경제적인 논거에서 옹호할 수는 없다. 그 우월성은 순전히 정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옷과 양복과의 배후에 있는 철학의 다른 점은 양복이 인간의 형태를 나타내려고 하는 데 반하여 중국옷은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본디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에 보통 경우는 그다지 드러내 놓지 않을수록 좋은 셈이다. 그러기에 헝겊 하나만을 걸치고 있는 간디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양복을 입고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미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뿐이다. 완전한 인간의 자태란 좀처럼 없다고는 누구나가 하는 말이다. 만약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누구라도 좋으니 코니아일랜드(뉴우요오크 항구의 피서지)에라도 가서 참된 인간의 자태란 어떤 것인가를 잘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양복은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허리 둘레가 32인치인지 38인치인지 알아 맞힐 수 있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인간은 내 허리 둘레는 32인치입니다 하고 세상에 대고 왜 공언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우연히 정상을 벗어난 일일지라도 왜 본인은 그것을 사사로운 일로 덮어둘 권리가 없는 것일까.
양복은 20세부터 40세까지의 젊은 여성의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적인 육체적 리듬이 아직 문명적 생활 형태에 지배받지 않은 모든 어린이들에게는 적당하다고 내가 믿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남녀에 대하여 공중 앞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라고 요구하는 것과는 자연히 이야기가 다르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점잖은 부인은 동양의 재봉사 따위는 도저히 꿈도 꾸어 보지 못한 기막힌 매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한편 영양 과다와 수면 과잉으로 보이는 40대의 귀부인들이 오페라 공연의 첫날에 금빛 찬란한 복스에 파묻혀 앉아 있는 꼴을 보는 수가 많은데 이것 또한 서양이 발명해 낸 눈에 거슬리는 것 중의 하나이다. 중국옷은 이러한 양복보다 눈에 거슬리는 점이 적다. 중국옷은 죽음처럼 크고 작음과 아름다움과 추함을 모조리 한결같이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중국옷은 양복보다 민주주의적이다. 심미적 고찰은 이 정도로 하고, 이번에는 위생과 상식면에서 본 반대 이유를 말하련다. 적어도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교황청 추기관인 리슐리외나 월터 로올리 경 시대의 유물인 칼라가 건강상 좋은 것이라고는 설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서양에서는 다소라도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거듭 칼라에 대해 반대해 왔다. 서양 여성의 옷은 목둘레에 관해서는 이전에는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해방의 쾌감을 이제는 충분히 획득하고 있는 셈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남성의 목은 아주 보기 흉하고 부도덕하고 공공연히 남의 앞에 내놓지 못할 물건이므로, 허리 둘레만큼은 남의 눈에 띄게 해야겠지만 목만큼은 감춰 두어야만 한다고 아직 서양의 유식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악마적 견해의 결과 여름에는 적당한 통풍이 없고 겨울에는 적절한 방한법도 마련할 수가 없어, 4계절을 통해서 올바르게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칼라에서부터 그 아래쪽은 인간의 상식을 사정없이 짓밟아 온 한 편의 애사다. 네온사인과 디젤엔진을 발명할 만큼 현명한 서양인에게는, 현대인의 체내에서 자유로운 부분은 오직 머리만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칠 만큼의 상식도 없다. 살에 딱 들러붙어 자유로운 통풍을 방해하는 내의라든가, 상체를 자유자재로 구부릴 수 없게 하는 조끼라든가, 영양 상태가 다르면 거기에 따라 으례 서로 달라야 할 터인데, 그러한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멜빵이니 허리띠니 일일이 다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조끼라는 물건이다. 나체의 자연적인 자세를 연구한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똑바로 선 자세가 아니면 인체의 등의 선과 전면의 가슴의 선의 길이가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 뻣뻣한 앞단이 붙은 와이샤스를 입어 본적이 있는 사람은 몸을 앞으로 굽힐 때마다 단단한 앞단이 앞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에서 알고 있다. 그러나 조끼는 이 두 면의 길이가 언제나 같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여 디자인된 것이기 때문에 조끼를 입은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완전히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도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조끼의 아래쪽이 튀어나오거나 주름살이 잡히거나 하여 몸을 압박하게 된다. 비만증의 사나이의 경우에는 조끼의 아래쪽은 반드시 일그러진 선을 그리며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다. 그 틈새로 바지와 허리띠의 안쪽의 둥그런 선이 삐져 나오게 된다. 적어도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서 이 이상 그로데스크한 것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저 나체주의 운동이 인간의 몸을 이렇듯 그로데스크하게 싸버린 것에 대한 항의 반동으로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인류가 지금도 아직 네발짐승의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허리띠에도 다소의 존재 이유는 있다고 하겠다. 즉 말에 안장띠를 매는 식으로 졸라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벌써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데도 허리띠는 인류가 지금도 여전히 네발짐승이라는 가정하에서 만들어져 있다. 해부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복근이라는 것은 모든 체중을 등뼈로 지탱하는 네발짐승에 알맞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두 다리로 똑바로 서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 비참한 결과로서 인간의 어머니는 동물에는 없는 유산이나 조산의 재앙을 짊어지게 되었고, 남자의 허리띠는 중력으로 해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경향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흘러내리지 않도록 힘껏 단단히 허리띠를 졸라매는 길밖에는 없겠는데 그렇게 하면 창자의 모든 자연적인 운동을 저해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야 한다. 서양인이 비이기적인 방면에서 앞으로 한층 더 진보했을 때, 언젠가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층 더 시간을 짜내게 되고 또 옷차림의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상식을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서양 여성은 일찌기 부인복의 간소화의 상식을 얻었는데 반하여 남자는 옷차림 문제에 관하여 보수주의에 빠져 혁신을 두려워한 벌로서 지금 막대한 벌금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삼 십 년 후의 일이 아니라, 몇 세기나 먼 장래의 일을 생각한다면 서양 남성들도 부인복이 본보기를 보이고 있는 것처럼 결국에 두 다리로 똑바로 서기에 알맞는 합리적인 옷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허리띠나 멜빵과 같은 귀찮은 물건도 차츰 없어지게 되어 몸에 꼭 들어 맞는 우아한 모양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어깨에서 흘러 내린 듯한 옷을 연구해 낼 것이다. 속에 솜을 넣은 어깨라든가 뒤로 꺾어 넘긴 옷깃이라든가 하는 그러한 쓸데없는 것은 없어지고 오늘날의 디자인과 전혀 다른 실내복의 자켓 따위와 비슷한 매우 상쾌한 모양의 옷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장래의 남자옷과 부인복의 커다란 차이는 다만 남자는 바지를 입는 데 반하여, 여자는 스커트를 입는다는 것뿐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상반신에 관한 한 오로지 입기 편하고 입어서 상쾌해지도록 근본적인 고려를 하게 될 것이다. 여자의 목처럼 남자의 목도 해방되고, 그에 따라 조끼도 없어지고, 마치 오늘날의 부인들의 코우트처럼 자켓이 사용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부인들이 코우트 없이 지내고 있는 것처럼 대개는 자켓 없이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샤쓰에 관한 오늘날의 사고 방식의 혁명을 의미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 샤쓰는 안에 입는 것이 아니라 빛깔이 진한 천으로 겉에 입는 것이 될 것이다. 재료는 계절에 따라 가장 가벼운 비단으로부터 가장 무거운 양모에 이르기까지 사용하지만, 되도록 보기 좋기 재단될 것이다. 그리고 입고 싶을 때 언제나 그 위에 자켓만을 걸친다. 그러나 이 샤쓰 하나만을 걸친다는 장래의 옷차림이 어떠한 자리에 나가도 실례가 될 리는 없을 테니까, 자켓을 입고 안 입고의 예의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날씨를 고려해서 정하면 된다. 견디기 어려운 허리띠나 멜빵을 없애 버리기 위해서는 샤쓰와 바지가 함께 붙은 일종의 컴비네이션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여성 드레스처럼 머리에서 뒤집어 써서 입도록 되어 있으며 모양을 보기 좋게 하기 위해 체제상으로나 실제상으로도 허리 둘레를 적당히 늘이거나 줄이거나 한다. 허리띠나 멜빵의 폐지안은 현재 식의 양복을 입은 채 이제라도 금새 실행할 수 있다. 전체를 규제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옷의 중량을 평균적으로 분산시켜 어깨에 매달리게 하는데 다만 밀착과 마찰과 압력만으로 하복부의 수직면에 졸라맬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자의 허리를 병 모가지 역할에서 해방하여 헐렁한 내의 한 벌을 실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조끼가 없어지는 진보의 도정에 오를 경우 남자는 오늘날의 아이들의 옷차림 샤쓰와 바지를 단추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얼마 뒤 속옷이었던 샤쓰가 겉에 입는 옷이 되는 시대에는 샤쓰는 지금보다 더 좋은 감으로 만들어지고, 어쩌면 바지와 같은 색으로 동질의 천, 또는 조끼를 양복에 필요한 부분으로 그대로 남겨 두는 방향으로 개혁해 간다면 현재의 형을 그대로 남긴 채 조끼와 바지를 한 가지 천으로 만든 컴비네이션으로 만들어 조끼의 등은 간단히 두 개의 대각선의 끈으로 해버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바지의 단추가 걸리는 단추 구멍을 낸 여섯 개의 작은 부가물 앞에 넷, 뒤에 둘, 이러한 식으로 조끼 안쪽에 붙여두기만 하면 현재라도 허리띠나 멜빵을 폐지하는 것은 문제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조끼는 바지 밖으로 나오게 될 것이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날 입고 있는 조끼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일단 양복을 개혁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양복의 재단이 우주와 더불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남성이 깨닫게 된다면 이 컴비네이션 옷을 오우버롤(내리닫이로 된 노동복)보다 보기 좋게 만들어-단 원칙은 어디까지나 다를 것이 없다-조끼 그 자체를 서서히 바꾸고 고쳐서 드디어는 폐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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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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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10. 토마스 아퀴나스
세례받은 지성
철학자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은 육체에 깃들인 정신이 육체를 거의 완전히 소모시켜 버려 양볼은 수척하고 움푹 패였으며 신체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을 떠올린다. 아마 임마누엘 칸트가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의 유명한 사상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칸트와는 정반대인 사람이어서 그의 외모를 눈앞에 그려 볼 경우,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체격을 지녔다. 그의 책상은-이것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그가 앉아서 공부할 수 있도록 둥글게 홈을 파 놓아야 할 정도였다. 우리는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이 점을 언급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토마스 자신도 그 자신의 엄청난 체구에 대해 가끔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방식도 그의 엄청난 외모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그를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과묵했던 까닭은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과묵함은 오히려 주의를 끌지 않으려는 바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처신 속에 신학 혹은 철학의 일반적인 대가보다 더 많은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어떤 우연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한 동료 학생은 이 둔중한 학우에게 보충 수업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토마스가 그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어느 유명한 교수보다도 더 문제를 잘 설명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 학우에게 이 일을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여기에 토마스의 성격상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자신의 인간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때로는 도가 아주 지나쳐 부적절한 상황에서도 그는 생각에 잠겨 그의 주변 세계를 완전히 잊어 버릴 정도였다. 이 점을 잘 나타내 주는 일화가 있다. 토마스가 프랑스의 루드비히 국왕의 연회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습관대로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마니교와 같은 이단과 논쟁을 해야 합니다." 궁신들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이 순간에 진정으로 미래의 성인답게 처신했다. 왕은 서기를 불러 토마스가 방금 생각했던 마니교도의 교의에 맞서는 논쟁을 기록하게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잊어 버리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슈타우펜 황제와 친척 관계임을 자랑으로 삼았다. 이렇듯 토마스에게는 가장 화려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가족들은 막내아들인 그에게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결정했다. 그 당시 그는 적어도 훌륭하고 명망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탁발 수도승들에게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그때 막 세워진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외적인 화려함 대신에 청빈이라는 이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새로운 운동의 금욕적 특징, 즉 배가 불러 만족해 하는 그리스도 교인들의 한가운데에서 복음에 따라 생을 영위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 당시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사람들을-이 중에는 토마스도 속한다-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잡아 끌었다. 물론 이러한 탁발 수도원에 소속되는 것은 많은 극기의 의무를 필요로 한다. 토마스는 여러 차례 나폴리와 로마를 거쳐 파리까지 여행했는데 모든 여행을 걸어서 다녀야만 했다. 또한 수도원에서는 그에게 그가 저술하기 위한 충분한 종이마저 주지 않아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종종 자신의 생각을 작은 종이 쪽지에 기록해야만 했다. 게다가 새롭고 혁명적이라고 받아들여진 이 운동은 즉시 보수 세력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토마스 자신도 이러한 종류의 저항을 몇 번 받았다. 그 유명한 파리 대학은 토마스를 교수로 채용하는 것을 거절하고 학생들이 그의 취임 강연을 듣는 것도 금지했다. 이와 비슷한 보수 세력의 적대감은 이미 그가 도미니크 수도원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결심한 순간에도 나타났다. 가족들은 가문의 명예에 대한 먹칠이라고 기겁을 하였으며, 형들은 토마스를 도중에 낚아채 외딴 섬에 가두어 버리기까지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의 계획을 단념 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 이때 그들은 아우의 결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그러한 수단까지 동원했다. 형들은 그에게 예쁘게 차려 입은 젊은 여자를 들여보냈다. 즐거운 시간을 기대했던 이 젊은 아가씨는, 몸집이 거대한 젊은 남자가 벽난로에서 끄집어 낸 불 붙은 장작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다가오자 기겁하고 말았다.
이 몸짓에서 나타나듯이, 자신의 결심에 온몸을 내던져 몰입하는 그의 정열은 토마스의 전 생애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에게 제공된 나폴리의 대주교 자리도 거절하였다 그에게는 그의 일에 완전히 몰입하기 위한 내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의 일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토대를 새롭게 마련하려는 시도이다. 그가 이 과제에 쏟아 부은 그의 확신은-비록 그의 생존시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결국에는 그가 이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획득하게 해주었다. 토마스 외에는 1000년 전에 아우구스티누스만이 그러한 권위를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젊은 토마스에게서 이러한 미래의 중요성의 싹이 보였다. 어쨌든 위대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그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이 일을 꿰뚫어 보듯이 예감하였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학생들의 조롱에 대해 이렇게 응수했다. "너희들은 토마스를 벙어리 황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말하건대, 이 벙어리 황소가 한번 울부짖으면, 그 소리의 진동은 전 세계에 가득 울려 퍼질 것이다."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은 분명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그러한 사상가를 진정 필요로 하였다. 토마스가 살던 시대는 정신적 위기의 시대로서 특히 신학과 철학은 매우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모든 논쟁을 거쳐 여기에 이르러, 앞서 간 시대와 일종의 일치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철학이 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 정신과 그리스도교 근본 경험과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교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력하고도 위력적인 사상에서 그 최초의 거대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나중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 이르러 완전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그리스도교 철학은 자연적인 이성과 믿음의 종합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신앙의 아래에 놓이게 되는데, 이는 물론 신앙에 대한 봉사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전개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균형잡힌 그리스도교 철학의 체계 안에 이미 토마스 시대 훨씬 이전부터 방해의 요소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자연스립게 들어맞지 않는 하나의 철학을 가까이 접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에 반해 아랍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지식을 넘겨 받았는데, 이제 이것이 서양 사상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일종의 정신적 혁명이 꾀해질 만큼 위협적인 상태로 몰고 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신학의 보조 수단이 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세계 해석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 해석은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제시되며, 그 체계는 사물에서 시작하여 인간을 넘어서 신까지 모든 실재를 자신 안에 포함한다. 이 세계 해석이 그리스도교 철학에는 하나의 위험스러운 일이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에서는 믿음의 진리 외에도 순수한 세속적인, 즉 순전한 지성의 진리가 주장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두 진리의 공존 가능성이 진지하게 고려되었는데, 그것은 더욱이 어떤 시시한 괴짜 학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학문의 중심지인 파리 대학의 저명한 교수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토마스가 파리 대학에 신학 교수로 재직하던 당시, 파리 대학의 교수이자 유명한 사상가인 브라방의 지거는 믿음과 이성의 이중적인 진리에 대한 학설에까지 근접해 갔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에 대해 그 두 가지를 모두 진리라고 주장할 경우, 그것은 인간 정신을 구제 불능의 균열로 몰고 갈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토마스와 같은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자 동시에 파리 대학의 신학 교수이며 토마스의 친구이기도 한 보나벤투라는 성 예로니모의 꿈을 지적하면서 경고하였다. 꿈에서 예로니모는 최후의 심판에서 젊었을 때 키케로의 철학을 탐닉한 것 때문에 채찍질을 당한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인간 정신의 단일성마저 극도로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된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싸움터에 들어선다. 그는 이 두 개의 모순적인 세계관을 서로 화해시키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는다. 이때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자신의 권한을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는 신앙의 진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도 적당한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물음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가며 연구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시대가 요구하는 종합을 이루어 낸다. 그 종합을 그는 방대한 저서에 수록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신학 대전)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더 강도있게 철학적으로 정리된 것은 (이교도 반박 대전)이다. 이 방대하게 기획되고 신중하게 정리된, 또한 깊은 생각을 거친 이 저서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은 가장 중요한 중세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즉 1000년 이상을 이어오며 시련을 거친 믿음과 15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철학적 노력이 융합하게 된 것이다.
이성과 믿음의 그러한 종합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이 두 가지가 그 자체로 충분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토마스는 이때 두 가지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믿음은 초자연적인 진리와 관계가 있다. 믿음은 세계 사물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서는 탐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에 반해 자연적인 이성은 바로 이 현실 세계에 일차적으로 눈을 돌린다. 토마스는 이러한 현실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진행된다고 가정한다. 여기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사상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계 인식의 출발점은 오히려 접근 가능한 모든 감각적 경험이며, 그것의 진리 여부에 대한 척도도 이성적 통찰력이다. 물론 자연적 이성이 초감각적인 것의 파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연적 이성은 일정한 한계 안에서 신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한계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영향을 받은 중세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넓지는 않다. 인간은 계시와 신앙의 도움 없이는 삼위 일체도 원죄도 그리스도의 강생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와 신의 본질에 대한 몇몇의 가장 보편적인 규정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인식이 세계 현실에서 출발할 때만 가능하다.
토마스가 이렇게 이성과 믿음을 서로 분리했을 때, 그 역시 이중적 진리를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정신을 그렇게 분열시키는 위험에서 성공적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상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신은 믿음을 창조했고, 다른 한편으로 신은 또 한 자연적 이성의 창조주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는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의 관계에 서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성은, 그것이 스스로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에 모순되는 어떠한 것도 가르칠 수 없다. 이러한 종합에서 물론 믿음이 일종의 우위를 차지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토마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믿음의 진리는 자연적인 이성의 진리보다 더 완전하다. 자연적 이성의 진리는 믿음의 진리 아래에 놓인다. 자연적 이성의 진리는 "믿음에 대한 예비"를 함축하고 있다. 비로소 믿음은 이성에 처음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은총은 자연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
철학 사상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토마스의 사상에서는 세계 현실이 자연적 인식에게 가장 폭넓고 자유롭게 제공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이 사상가가 전통의 수호자로 보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 눈에는 모험적인 개혁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근본 경향이, 즉 이교도의 철학 사상이, 그리스도교 사상 안에서 계속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그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유래해 온, 아직도 여전히 기준이 되는 그 신학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것은 토마스가 철학에 제시하고 있는 주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토마스에게도 신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위대한 그리스 철학과 다름없이 철학의 가장 고귀한 대상이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다음으로 중요한 주제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세계로부터 고양된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 사상가들의 주제처럼 세계이다. 인간의 영혼은 적어도 한 부분으로서 이 세계에 속해 있다. 토마스는 이미 그리스인이 보았던 것처럼, 세계를 그것이 감각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충만한 형태에서 고찰한다. 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토마스의 "세계성"이라고 칭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이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사물에 대해 다양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로서 토마스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는 자신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것처럼 사물에서 질료와 형상을 구별하여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 한다. 토마스는 질료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질료는 그것에 의해 형상이 개별적인 형태로 각인되는 바로 그 요소라는 점에서만 중요할 뿐이다. 이에 반해 그는 형상 안에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한다. 그렇지만 물론 그것은 형상이 한번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토마스에게 형상이란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로, 그것은 사물들 속에서 생동력 있게 스스로를 전개시키고 있는 한에서 사물의 본질이다.
이제 형상 또는 본질은-토마스는 이 점에서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한다-원래 신의 정신 안에 이데아로서, 흡사 창조의 앞선 구상으로서 존재한다. 철학이 현실에서 본질을 끄집어 낼 때, 이것이 바로 세계 인식에서의 철학의 과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신이 세계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뒤좇아 사유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의 정신에 관여하는 유시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마스가 인간 인식의 진리성을 위해 내 놓고 있는 변론이다. 동시에 이 변론에는 인식의 한계에 대한 깊은 통찰도 깔려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그의 세계상을 자유롭게 기획 투사할 수 있다는 중세 말기나 근세 사상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그는 인간의 인식은 신이 이데아에 따라 창조한 실재의 존재 구성틀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세계에 대한 신의 생각을 충분히 생각해 볼 때, 토마스에게 세계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전체로서 나타난다. 개개의 모든 실재 영역은, 그 안에서 형상이 질료보다 훨씬더 고상하면 할수록 더 높은 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죽은 사물은 가장 낮은 존재 단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형상은 순전히 밖에서 질료에 밀어 붙여 각인되었을 뿐이다. 이보다 높은 단계로는 식물이 있다. 식물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형상을 식물의 영혼으로 가지고 있다. 동물은 이보다 높은 단계이다. 동물의 영혼은 식물의 영혼에 감각적인 능력, 즉 지각까지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도 비교적 낮은 단계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도 역시 식물과 동물처럼, 그의 영혼 안에 식물적인 능력과 감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해 주는 것은, 그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정신적이며 그래서 불멸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생명에는 영혼은 물론이고 육체와 결합된 정신적 부분도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순수한 정신, 즉 천사는 인간보다 더 높은 단계를 이룬다. 그러나 천사 역시 완전하지는 못하다. 천사는 비록 순수한 정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조된 정신이다. 따라서 창조되지 않은 정신, 즉 신은 모든 것 위에 우뚝 솟아 있다. 이것이 토마스가 구상한 실재의 구도이다. 이 구도는 그것이 갖는 단일적인 체계와 그것이 포괄하고 있는 충만함 때문에 매혹적이다.
묘사된 단계 구조는 물론 그리스도교 철학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단계 구조를 그의 세계관의 밑바탕에 깔았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사의 자리에 천체의 정신을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토마스가 단계 구조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만물은 형상화되지 않은 질료에서 벗어나 형상이 되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가능태와 현실태의 도움으로 설명된다는 점이다. 질료는 형상화될 수 있는 단순한 가능성이다. 형상을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그만큼 더 현실적이 된다. 이렇듯 이 세계 전체에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가 일어나고 있다. 실재는 질료가 아니라 형상 안에 존립한다는 이러한 사상을 고대 사상과 중세 사상의 결합인데, 이 둘은 근세의 관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지평에서 토마스의 신개념을 보아야 한다. 만일 전체 세계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르려는 끊임없는 추구라면,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은 어떠한 가능태도 배제된 순수 실재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추구의 최종적인 완성 즉 신이다. 그 다음 여기서부터 신에 대한 그 밖의 본질 규정이 추가된다. 이 신이 순수한 형상으로서 어떠한 질료적인 것과도 관계가 없기에 그러한 신은 순수한 정신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도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밀착하게 됨으로써 철학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을 퇴색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이제 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 사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세계 사건 자체의 한 부분으로서는 아닐지라도, 그를 향해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는, 그러나 그 자신은 움직여지지 않는 최고의 원리로서 세계사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범신론적인 신개념과 유사하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식의 신개념은 토마스 시대에 아랍 혹은 서양 철학의 특정한 사조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그러한 범신론을 받아들였다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이 절대적으로 고귀하다는 사상은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적 신개념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토마스의 고유하고 독특한 고도의 종합에 대한 기술이 드러난다. 그는 범신론적 귀결을 피하기 위해 창조 사상으로 되돌아간다. 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듯이 세계 안에서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추구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창조자로서 모든 사건의 시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토마스는 이것을 더 이상 철학적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세계가 그 근원을 신 안에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통찰한 듯이 보였다. 왜냐하면 모든 실재는 절대적인 실재인 신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여는 역시 범신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의 사상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은 자연적인 이성의 방식으로는 결코 밝혀질 수 없다. 이렇듯 창조 사상은 토마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취하고 있는, 그리고 오직 신앙의 길을 통해서만 참됨이 증명될 수 있는 하나의 전제이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이 전제를 일단 인정한다면, 그때부터 토마스가 주장하듯이 신의 존재는 자연적 이성의 방법으로 통찰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 유명한 토마스의 신증명이 전개된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존재 증명처럼 영혼 안에 있는 진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오히려-이것이 또한 토마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세계의 실재성에서 단초를 잡는다. 토마스의 신존재 증명은, 유한한 세계는 그 근거를 자신 안에 가질 수 없으므로 자신의 창조자로서의 신에게로 그 근거를 소급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예를 들면-토마스는 이렇게 논증을 전개한다-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그런데 이 원인은 다시 더 높은 원인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토마스가 주장하듯이, 원인의 사슬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다. 따라서 최초의 원인이 존재해야만 하는데, 이것이 곧 신이다. 그런데 토마스는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본질도 어느 정도는 자연적인 길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여기서도 세계의 실재에서 출발점을 취한다. 여기서는 유비의 방법을 이용한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자신의 어떤 본질을 알려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정도는 피조물에서 창조자를 추론해 낼 수 있다. 예컨대 인간의 선함에서 우리는 신의 선성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토마스는 물론 극도로 신중을 기해 논증한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 사이에는 너무나 엄청난 거리가 있는데 유비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이 동시에 부정되고 고양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신의 선은 인간의 선함과 유비적이다. 그러나 신의 선은 동시에 인간의 선함과는 완연히 다른 것이고 인간의 선함을 훨씬 초월한 무한한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유비의 방법으로 신의 본질에 관해서 어떤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희미한 윤곽 안에서만 가능하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믿음은 완전한 통찰이 아니다. 인간은 저 세상에 가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것과 비교해 보면 모든 철학적 인식과 신학적 인식이란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최고의 지식이란, 우리가 신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신은 초월해 있다는 것을 아는 그것 뿐이다." 이 점을 토마스는 그의 삶의 종말에서 직접 체험하였다. 그는 그의 위대한 저서 (신학 대전)이 완성되기 전에 펜을 내려 놓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본 것에 비교해 볼 때, 내가 쓴 것이란 모두 한낱 조악한 위조풍처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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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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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변명
두 회사원이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시내의 바에서 술을 마셨다. 그중 한 사람이 한 잔만 더 마시자고 했다. 그러나 친구는 집에 돌아가 아내에게 변명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뭐라고 변명할 텐가?" 친구가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겠나? 아직 집에 가지도 않았는데."
- 어떠한 설명이나 이론이나 합리화도 필요하지 않다. 체험 자체가 자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떤 바보
약간은 유식하고 현학적인 주정뱅이 영감이 소란을 피운 죄로 시내의 법정에 끌려 나왔다. "그대는 술에 취해 소동을 저지른 죄로 고소되었다." 판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판결을 선고하는 데 이의가 있는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비인간적인 행동은 수많은 비극을 낳았노라." 죄수는 도도하게 웅변을 시작했다. "나는 포우만큼은 타락하지 않았으며, 바이런만큼 난봉꾼도 아니며, 키츠처럼 배은망덕하지도 않고, 번즈처럼 과격하지도 않으며, 테니슨처럼 겁쟁이도 아니며, 세익스피어처럼 저속하지도 않으며..." "그만!" 판사가 중단시켰다. "9일을 선고한다. 그리고 사무원, 이 사람이 말한 다른 이름들을 적어서 그놈들도 잡아오도록. 그놈들도 이 사람만큼이나 나쁜 놈들이군."
-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며 피고는 모르고 있으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바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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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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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1장 우리는 왜 국사를 배워야 하는가?
3) 종말론의 비밀-필연과 우연
기독교의 종말론 20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니까 요즘 인류의 종말에 관한 주장 등이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거의 모든 종교에는 종말에고나한 교리가 잇고 그것이 가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종말에 가까우면 세상은 악의 세력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악마의 세력들이 그리스도가 이끄는 천사의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악마의 세력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선과 악이 충돌해 선이 영원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죠, 이러한 줄거리는 이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어 있으므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진행 방향을 필연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결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필연으로 점철되어온 셈입니다. 삼국 통일은 신라가 이룰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겠지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남북 분단 등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전쟁의 시발점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마치 우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의 마차가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시민에게 발각됨으로써 루이 16세의 망명이 실패했고, 그것이 결국 일개 장교에 불과하던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으로 까지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사건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이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과 우연을 가늠케 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무심코 들은 아이의 방 침대 밑에서 수 개월이 지난 아들의 빵점자리 시험지를 발견한 뒤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1년 전에 끊은 담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가게 앞에서 그 동안 소식을 모르던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근처 술집에서 친구과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남자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단횡단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많은 대목에 우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개월이나 지난 시험지가 왜 하필 그때 거기 떨어져 있었는지, 그 날따라 아내의 신경은 왜 곤두서 있었는지, 어쩌자고 그 차는 시내에서 과속을 했는지 등등......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의 죽음을 숙명으로 여기고 앞서의 과정을 빈큼없이 짜여진 프로그램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필연 - 역사의 법칙성 만약 필연을 믿는다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대해 일종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가증합니다.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5백 년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반복된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전통 깊은 사관을 우리는 흔히 순환사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 반복으로 보느냐, 아니면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순환으로 보느냐에 따라 순환사관을 다시 둘로 나누기도 하지만, 역사행로를 생명체와 동질시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순환사관은 신국으로의 단선 진행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한 기독교 사관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 역사는 6시대로 구분되는데, (1)아담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2)노아의 홍수부터 아브라함가지 (3)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4)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5) 바빌론 유수부터 그리스도 탄생까지 (6)그리스도 탄생부터 최후 심판가지라고 합니다. 그때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진보주의사관이 등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로 퇴보했지만 다시 근대로 진보했으며 앞으로는 계속 진보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진보.퇴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정신활동과 관련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문학.예술분야에서 진보라는 용어는 매우 어색하다고 하겠습니다. 진보사관을 수정.발전시킨 것이 발전사관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인데,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대표적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란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로웠던 반면, 중세에는 귀족들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그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기준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구분점도 모호합니다. 보다 분명한 기준은 없을까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기준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생산수단에 기준을 두어 (1)원시공산체사회 (2)노예제사회 (3)봉건 농노제사회 (4) 자본주의사회 (5)공산주의사회 등으로 도식화했습니다. 여기에서 (2)노예제사회는 고대, (3) 봉건 농노제사회는 중세, (4)자본주의사회는 근대와 각각 대응한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를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파악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류 역사의 핵심을 정확하게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양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한국.중국 등의 동양 역사에 적용한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는 그리스.로마의 경제체제와는 달라서 노예가 기본적인 생산을 담당하지 않았으며, 중세 역시 봉건영주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양의 고대를 '아시아적 생산양식' 그리고 중세를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라고 명명함으로써 동서양간의 차이를 봉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서양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해 서양은 전형, 한국들의 동양은 변형이라는 자기비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사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결국 지구상의 인구 중 절반을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논리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역사학은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은 다만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또한 시기구분이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4) 국가를 왜 배우는가? 구사란 자시 나라의 역사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돈 길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분노, 성공과 좌절, 진취와 시련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만족, 성공과 진취만 골라내어 가슴 뿌듯해 해서는 안됩니다. 또 슬픔과 분노, 좌절과 시련 등을 은폐해서도 안되며, 오히려 과장시켜 분한 마음을 갖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해를 가리는 일과 같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김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어어야 합니다.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언제나 충분한 사고와 냉철한 판단으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해야 나주에 후회가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말입니다. 자신의 결정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최선이 무엇인지를 정화가게 판단해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국사는 역사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같습니다. 내 얼굴에 흉터가 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또 거울의 흉터 부분을 가린다고 해서 얼굴의 흉터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깊은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흉터가 왜 생겼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분석을 충실히 한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흉터마저 잘 치료해 깨끗한 얼굴, 밝은 얼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사는 차가운 머리로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초 위에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자신의 희망대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려야 현대의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세 가장 필요한 덕목은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을 은연중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확한 좌표를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단답형 사고는 금물입니다. 이완용 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당시의 많은 문제들을 호도할 수 있는 부정확한 판단입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상 그리고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문제에 답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국사를 배우는 데에는 따듯한 가슴도 필요합니다. 국사는 남의 나라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입니다. 내 얘기인 것입니다. 내 얘기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만 하지만, 때론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국사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는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족 눈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 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놓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남다른 여건 속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자랑하고, 남다른 자식 사랑을 자랑하며, 음식 솜씨를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짙은 화장으로 화사하게 멋을 낸 다른 사람의 어머니와 비교할 때, 눈이 성하지 못하고 다리가 성하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남부럽잖은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온 사실을 자못 반복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부심이 깊은 사람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련해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나라'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국사를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나라'는 그 자제로 왕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아래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고,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기 댐문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개인의 소유화된 영역, 개인의 노예화된 백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 개인의 소유로 인정될 수 있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코 존해해서도 안됩니다. 단지 시간적.공간적.부문적으로 제한을 받는 '정권'이 있을 뿐입니다. 정권은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일할 때 비로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입니다. 그런 점에 볼 때, 이제 우리에게는 '통치'하는 사람도, '통치받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정권에 대한 사랑을 나라 사랑과 혼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애국심 곧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멀리 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국사 공부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애국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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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心同德(동심동덕) 同(한가지 동) 心(마음 심) 同(한가지 동) 德(덕 덕)
상서(尙書) 태서(泰書)에는 단결을 호소하는 주(周) 무왕(武王)의 외침이 기록되어 있다. 상(商)나라 말기, 주왕(紂王)의 포학무도한 정치는 제후(諸侯)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제후들 가운데, 주나라 문왕(文王) 희창(姬昌)의 아들인 희발(姬發)은 아버지를 이어 무왕으로 즉위한 후, 곧 제후들을 이끌고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주나라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맹진(孟津)이라는 곳을 통해 황하를 건너, 상나라의 도읍인 조가(朝歌)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가성의 남쪽 들에서 진군의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상나라 주왕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밝히면서 정벌군의 협심과 단결을 외쳤다. 억조의 평범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으나 마음이 떨어지고 덕에서 떠나 있고, 나는 다스리는 신하 열 사람이 있으나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고 있소(予有亂臣十人, 同心同德). 비록 친한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어진 사람만 못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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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죄를 씻으면 병도 낫는다
옛날 사람들은 병이란 신이 내리는 벌이며 죄를 씻으면 병도 낫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약과 종교와는 몇 세기 동안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면 병에 걸리고 심신을 깨끗이 하여 신의 심기를 풀어주면 병도 낫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고 식은 영어의 'pharmacy'(약학)의 어원이 '나쁜 것을 없애 깨끗이 한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 'pharmakon'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아도 분명하다. 기원전 3500년까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수메르인들은 사실상 현대 투약법의 모든 것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치질약, 흡입제, 좌약, 관장, 습포, 코로 흡입하는 약용 분말, 탕약, 주사, 환약, 정제, 바르는 물약, 연고, 그리고 경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무렵 무명의 수메르인 의사가 최초의 약 목록을 써 놓고 있다. 한 장의 점토판에 설형 문자로 쓰여 있는 목록에는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는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약 이름이 들어 있다. 양치질약에는 소금물. 일반적인 상처 소독약으로는 시큼해진 와인. 수렴제에는 오줌 속의 질소를 포함한 노폐물에서 채취한 초산칼륨. 그리고 해열제에는 아스피린과 같은 약효가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분말로 한 것. 거기에다가 이집트인이 고대의 약장 내용물을 늘렸다. 기원전 1900년 무렵 독일인 이집트 학자 게오르그 에벨스의 이름을 붙인 두루마리로 된 에벨스 고문서에는 옛날 이집트 의사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해서 얻은 노하우가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변비에는 가루로 만든 센나(열대 지방에서 나는 콩과의 키 작은 나무. 잎은 설사약으로 씀) 열매나 피마자유로 통하는 약으로 치료했으며, 소화 불량에는 박하 잎을 씹는다든지 탄산염(오늘날에는 제산제로 알려져 있다)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를 뽑을 때 통증을 줄이기 위해 이집트 의사들은 에탄올로 잠시 환자의 신경을 마비시켰다. 또 이 고문서를 보면 약품 조합에 대한 고대 사회의 진기한 계층 제도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약품 조합 사장'은 주임 약사에 해당하는데, 추출물을 포함한 광물이나 약초를 모으는 야외 작업자인 '약 채취자'를 감독했다. '조합 기사'(기술자)는 재료를 건조시킨다거나 가루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그것을 '조합사'가 처방에 따라 조합했다. 그리고 '약품 보존자'가 각 지방에서 수집하거나 수입한 광물이나 약초, 동물의 기관 같은 재료를 보존하는 창고를 관리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미 그리스인들은 의료에 대해 앞선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는 과학적인 틀 속에서 병의 물리적인(인체의) 원인을 진단하여 치료에 애씀과 동시에 그 병이 지닌 초자연적인(마음의)요인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고대 그리스의 의사는 병에 대한 전체요법적인 접근을 중시했다. 설령 병의 심리적인 요인을 스트레스나 우울증이라고 진단하지 않고 노한 신들의 저주라고 해석했다 한들 어쩌랴. 어쨌던 의료의 주신인 아폴로와, 인간을 위해 천국에서 불을 훔친 거인족인 프로메테우스가 모든 약의 조합을 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리학의 근대사는 16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화학분야에서 초기의 커다란 발견이 선도자가 되었다. 약품이 몸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효과를 거두는 것인지를 알면 의학에서 마술이 크게 제거되기 때문이다. 같은 세기에 또 한 가지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1546년에 독일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약전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수백 가지의 의약품이 실렸으며 조제 방법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딸려 있었다. 그때까지 농도가 크게 달라 성분조차 각양각색이었던 약이 이 책으로 엄밀히 규정되었다. 이 약전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영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다.
약은 과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으나 과학적인 사실이 미신과 교체되기까지는 그로부터 몇 세기가 걸렸다. 첫번째 이유는 의사가 병의 원인인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거짓된 미신을 병의 원인으로 날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화학 약품이 생겨도 병 치료에 대한 효능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었다. 새로운 약이 효험이 있더라도 어째서 효험이 있는지 진정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어떻게 효과가 있는 것인지는 더욱더 몰랐다. 약장 안에 있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약도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서 생겨난 것이다. 병과 사람의 생화학적 조성이 너무 복잡하므로 의학의 커다란 진보가 축적된 현대의 우리 약장에 최근 추가된 신약에서도 우연히 발견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약장 안에 놓여 있는 수많은 약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을 들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스피린이다. 고대의 의사는 열이 날 때 버드나무 껍질에서 만든 가루를 권했다. 오늘날에는 버드나무 껍질에 아스피린과 관계가 있는 세리틸산화합물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스피린만큼 효과도 없으며 위장을 더욱 자극하고 출혈시킬 가능성도 높다. 아스피린, 화학명 아세틸살리실산은 이 옛날 치료약의 인공적 변종이다. 아스피린은 현대에 통증과 염증을 멈추게 하는 약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1853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뒤 40년 동안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독일의 화학자가 관절염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좋은 약을 찾고 있을 때 가까스로 재발견했던 것이다. 알자스로렌의 과학자 샤를르 프리드리히 폰 게르하르트는 1853년에 자신의 실험실에서 처음으로 아세틸살리실산을 합성했다. 그러나 그가 한 한정된 실험 결과만으로는 그 약이 당시에 인기 있던 세리신(버드나무 껍질과 장미과의 하야초 추출물)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스피린은 무시되었으며 발열과 염증, 관절염 환자는 여전히 세리신을 계속 복용했다.
1893년에 독일의 젊은 화학자로 바이엘 제약 회사에 근무하던 펠릭스 호프만은 아버지의 만성 류머티즘을 조금이나마 낫게 해주려고, 알려져 있는 모든 약을 하나도 남김 없이 조사하여 세리신의 합성 형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1회분을 조합하여 아버지에게 시험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 인공 합성약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증상을 완하시켰으며 통증을 거의 완벽하게 물리쳤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바이엘 사의 화학자들은 호프만이 중요한 신약을 발견한 것을 알았다. 하야초(spiraea ulmaria)에서 합성물을 제조하기로 한 바이엘 사는 아세틸 기(acetyl)에서 'a'를, 라틴어인 'spiraea'에서 'spir'를 취했으며 약품의 접미사로 인기가 있던 'in'을 붙여'aspirin'이라는 상표를 만들었다. 1899년에 분말 형태로 시장에 내놓은 아스피린은 즉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이 되었다. 1915년에 바이엘 사는 아스피린 정제를 팔기 시작했다. 독일에 본거지를 둔 이 바이엘 사가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당시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연합국측은 상표권도 전쟁 배상의 일부로 요구했다. 1919년 6월의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그 상표권을 프랑스. 미국. 소련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 후 2년 동안 각 제약 회사는 아스피린의 이름을 자기 회사 것으로 만들려고 서로 다투었다. 그리고 1921년의 유명한 재판 판결에서 재판장인 래너드 핸드가 이 약은 아스피린으로 이미 세계에 알려져 있어서 어떤 회사도 그 이름을 소유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사용료를 낼 수도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고유명사였던 아스피린이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거의 1세기에 걸쳐 아스피린을 사용하고 실험해 왔으면서도 과학자들은 어째서 이 약이 진통제. 해열제. 염증 억제제로서 갖가지 기능을 발휘하는지 완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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