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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7호
2012.4.30 (음 3.1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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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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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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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과 이해가 따르지 않는 "정직"은 정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敵意)이다. - 로즈 N.프랜즈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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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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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각득기소(各得其所)라는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으니 적재적소(適材適所)와 비슷한 뜻이기도 하다. 방송사의 피디(PD)는 피디 일을,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의 일을 해야 한다. 기자와 카메라 감독, 세트 디자이너와 시지(CG) 어루만지는 이들은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게 ‘각자의 몫’이다.
근데 요즘 제 몫을 제 뜻대로 제대로 못하는 이들이 있어 안타깝다. 통신사 기자는 한데 나와 농성하고 있고, 방송사 피디와 카메라 감독과 시지 디자이너는 거리를 누비며 유인물을 뿌리고 있다. <문화방송> 노조는 파업 100일에 즈음하여 ‘자선 주점’을 준비하고 있고, 취재처에 발 들이지 못하는 <국민일보> 기자는 생활고 해결을 위해 쇠고기를 팔고 있다.
‘국민일보 파업 기자들의 횡성 가는 길’(<한겨레> 4월21일치)을 읽고 난 뒤 ‘어쩌면 아나운서도 푸줏간을 차려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기 부위 이름을 떠올렸다. 부위를 떠올리며 하나씩 곱씹어 보니 ‘이름 참 맛있게 지었다’ 싶었다. 등심은 ‘등-심’이고, 안심은 ‘안(內)-심’이다. 소 등뼈에서 발라낸 연한 고기, 소갈비 안쪽에 붙은 살이라 각각 그렇게 부른다. 우둔살은 소 둔부에서 베어낸 것이니 쇠볼깃살이다. 방망이처럼 기다랗게 소 볼기에 붙어 있는 살코기는 홍두깨살이다. 마치 옷감을 감아 다듬질할 때 쓰던 홍두깨 방망이 모양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머리뼈 한복판에 붙은 차돌박이는 희고 단단함이 마치 차돌 같아 그렇게 부른다. ‘다리 사이’를 뜻하는 ‘샅’에서 온 게 ‘샅에 고기’ 곧 사태이다. 사태는 다시 앞사태, 뒤사태로 나눠 부르는데, 아롱사태처럼 야릇한 이름도 있다. 뭉치사태 속에서 아롱아롱하게 보이기에 아롱사태가 되었단다. 핏물 밴 쇠고기에서도 아롱거림을 찾아낸 조상들의 안목이 놀랍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바루기] 송글송글, 송긋송긋
불한당(不汗黨).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땀이 나지 않는 무리라는 뜻이다. '땀'은 날씨가 덥거나 몸에서 열이 날 때 분비되는 것이지만 몸과 마음을 다해 애쓰는 걸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정당한 노력 없이 남을 등치며 괴롭히는 사람들을 불한당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땀방울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땀을 흘리며 산다.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피땀'을 쏟기도 하고, 어려운 일 앞에서 '진땀'을 빼기도 한다. 무더위로 '비지땀'에 젖고, 몸이 쇠약해지면 '식은땀'도 난다.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는 '구슬땀'이 방울방울 맺히고, '방울땀'도 송송 돋는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선지 땀을 나타내는 말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표현이 있다. 살갗 등에 땀이 잘게 많이 돋아나 있는 모양을 '송글송글'이나 '송긋송긋'이라 하지만 모두 틀린 말이다. "산을 오르다 보면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뜨끈한 국물을 마시고 나면 코에 땀이 송긋송긋 솟는다"처럼 쓰고 있지만 '송골송골'이라고 해야 맞다.
의성어.의태어에선 양성모음은 양성모음끼리, 음성모음은 음성모음끼리 어울리는 모음조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오순도순.싹둑싹둑처럼 예외도 있지만 '송골송골'은 모음조화가 일어난 형태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우리말바루기] 다 되다, 다되다
우리말 바루기의 독자라면 띄어쓰기 하나로도 단어의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되다'와 '다 되다'는 띄어쓰기로 인해 의미가 180도 변하는 참 재미있는 낱말이다. '다'와 '되다'를 띄어 써서 '다 되다'고 하면 '모든 일을 마쳤다, 완성했다'는 의미가 되고, '다'와 '되다'를 붙여 써서 '다되다'고 하면 "이제 최 부잣집도 다된 집안이다" "이런 큰 뜻을 몰라 준다면 이젠 세상도 다된 거요"에서와 같이 '완전히 그르친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다'는 일반적으로 "올 사람은 다 왔어" "줄 건 다 줬어"에서와 같이 '남거나 빠진 것 없이 모두'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다'는 "벼락치기로 시험 공부를 하자면 잠은 다 잤다" "비가 오니 소풍은 다 갔다"에서처럼 실현할 수 없게 된 앞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반어적으로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다'와 '되다'를 결합해 만든 단어 '다되다'가 '다 되다(모두 되다, 즉 모두 완성되다/이루어지다)'와 의미가 많이 다른 것은 '다되다'는 합성어가 만들어질 때 '모두'라는 의미의 '다'가 아닌 반어적 용법의 '다'가 와서 '되다'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띄어쓰기라는 작은 차이 하나가 의미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의 세계는 복잡 미묘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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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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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 이기철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
우리가 죽을 때 세상의 빛깔은 무슨 색일까, 무성하던 식욕은 어디로 갈까, 성욕은 어디로 사라질까, 추억이 내려놓은 저 형형색색의 길을 누구가 제 신발을 신고 타박타박 걸어갈까, 비와 구름과 번개와 검은 밤이 윤회처럼 돌아나간 창을 달고 집들은 서 있다. 문은 오늘도 습관처럼 한 가족을 받아들인다.
이제 늙어서 햇빛만 쬐고 있는 건물들 길과 정원들은 언제나 예절 바르고 집들은 항상 단정하고 공손하다. 그 바깥에 주둔군처럼 머물고 있는 외설스러운 빌딩들과 간판들 인생이라는 수신자 없는 우편 행랑을 지고 내 저 길을 참 오래 걸어왔다.
내일은 또 누가 새로운 식욕을 되질하며 저 길을 걸어갈까, 앞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지우면서 내 이 길을 걸어왔으니 함께 선 나무보다 혼자 선 나무가 아름다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을 듯하다. 내 풍경 속에 천 번은 서 있었으니 생은 왜 혼자 먹는 저녁밥 같은가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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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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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 노인숙
한낮 지나 땀기 걷힌 밀가루 같은 가을 살결
새벽 기운 서늘한데 초록 지는 풀 벤 자리
밤하늘 흰 별 빛무리 쏘는 눈길 여름 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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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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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온 아침 - 임길택
밤 사이 내린 눈이 몽실몽실 강가의 돌멩이를 덮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을 텐데 어느 돌멩이도 똑같이 나누어 덮고 있었다.
해가 뜨는 쪽의 것도 해가 지는 쪽의 것도 넓은 돌멩이는 넓은 만큼 좁은 돌멩이는 좁은 만큼 어울려 머리에 인 채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돌멩이들이 나직히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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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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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2 - 임어당
제9장 생활의 즐거움
6. 술과 술좌석 놀이에 대하여
나는 술을 잘못 마시기 때문에 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격은 하나도 없다. 내 주량이라고 해야 쌀로 빚은 소홍주 석 잔 정도가 고작이고, 맥주도 겨우 한 잔에 완전히 취해 버린다. 이것은 분명히 선천적인 문제로서 차를 즐겨 마시고,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성질은 아무래도 다같이 병행할 수는 없는 것인가 보다. 술을 잘 마시는 내 친구들 가운데 잎담배를 절반도 피우기 전에 벌써 머리가 핑 돌며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그와 반대로 나는 적어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하루종일 쉴새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영향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해서는 영 형편이 없다. 이쨌든 이입 옹 자신은 차를 굉장히 즐기는 사람이지만, 자기가 술꾼인 체하는 태도를 남에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술을 못하면 못한다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경애할 만한 중국인들을 많이 발견하는 것은 나로서는 더없이 큰 기쁨이요 위안이다. 나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그들의 편지와 그밖의 글에서 이러한 고백을 모아 보았다. 이입 옹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밖에 원매, 왕어양, 원중랑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비록 술은 많이 못 마시지만 취하는 기분은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술을 이야기할 자격은 없지만, 이 제목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술은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하여 위대한 공헌을 하였고 담배를 피우는 풍습이 생긴 뒤로는 술과 담배는 양쪽이 서로 마주 대하게 되었다. 크게 인간의 창조력을 돕고 상당히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공적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는 쾌감, 더욱이 중국 문학에서 언제나 보게 되는 이른바 <얼근히 취하는 미훈의 쾌감은 나에게 언제나 신비로운 것처럼 느껴졌는데, 상해의 어떤 미인이 얼근히 취한 상태에서 이른바 미훈(약간의 술냄새를 풍긴다는 뜻)의 공덕을 누누이 이야기한 것을 듣고서야 나도 비로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얼근히 취한 상태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지요.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답니다> 얼근히 취했을 때는 누구나 의기양양해지고 어떠한 어려움도 정복할 수 있는 자신이 넘치게 되고, 감수성이 매우 예민해져서 나아가 현실과 공상과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되는 창조적인 사고력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인 듯하다. 또한 창조적인 심경에 도달하려면 매우 필요한 자신과 넓고 큰 마음이 생겨나는 것 같다. 이 자신에 넘친 기분과 단순한 규칙이나 기술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예술 부문에 종사하게 되면 매우 분명히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차에 대해서 서양인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술에 관해서는 그와 반대이다. 중국 구석구석 어디를 가나 소홍주, 소홍주, 오직 소홍주가 있을 뿐이다. 다른 종류의 술이란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술집에 들어가면, 어려 가지 모양의 술병이며 가지가지 레테르가 붙은 술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그만 어이없이 어리둥절해지고 만다. 물론 중국에도 소홍주 외에 예닐곱 가지의 술이 있기는 하다. 몇 가지 약용 포도주 외에 옥수수에서 짜낸 고량주도 있지만, 중국술의 리스트는 이내 바닥이 드러나고 만다.
중국인 사이에서는 요리에 따라 다른 종류의 술을 내놓는다는 치밀한 접대 방법이 발달되지 않았다. 한편 소홍주의 보급은 굉장한 것이어서 그 이름이 생긴 소홍 지방에서는 딸을 낳게 되면 곧 술을 한 독 빚어 놓는다. 그리하여 그 딸이 시집갈 때는 20년 동안이나 묵은 오래된 술을 적어도 한 항아리는 폐백술로 반드시 가져갈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술의 본명인 <화조>는 그러한 데서 생긴 이름으로 단지 장식이 화려한 <꽃무늬>를 뜻하는 말이다. 중국인은 술의 종류가 적은 결점을, 술마시기에 알맞은 때와 환경을 특히 시끄럽게 주장하는 것으로 보충하고 있다.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마음은 본질적으로는 옳은 생각이다. 술과 차의 다른 점은 이런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차는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사는 사람과 비슷하고, 술은 말에 올라탄 기사와도 같다. 술은 좋은 우정을 위한 것이며 차는 조용한 유덕자를 위해 있는 것이다> 어떤 중국의 작가는 술을 마시기에 알맞은 심경과 장소를 분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거북하고 딱딱한 공식 석상에서 마시는 술은 천천히 한가하게 마음 놓고 마셔야 한다.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점잖게 낭만적으로 마셔야 한다. 병자는 적게 마셔야 하며, 마음에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정신없이 취하도록 마셔야 한다. 봄철에는 집뜰로 나가 마시고, 여름 술은 들로 나가서, 가을 술은 배 위에서, 겨울 술은 집 안에 들어 앉아서 마실 것이며, 밤 술은 달을 벗삼아 마셔야 한다> 또 다른 작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술에 취하려면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 꽃의 빛깔과 향기와 화합하려면 낮에 꽃을 바라보며 취해야 하며, 생각을 가다듬어 깨끗이 하려면 밤에 눈을 보면서 취해야 한다. 성공을 기뻐하며 취한 사람은 그 기분에 맞게 노래를 한 절 불러야 하며, 송별연에서 취한 사람은 기분에 곁들여 한 곡조 가락을 뜯어야 한다. 선비가 취했을 때는 창피를 당하지 않게끔 행동을 삼가야 하며, 무인이 취했을 때는 무용을 높이기 위해 많은 술을 가져오게 하여 더 많은 깃발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 누각 위에서 술을 마실 때에는 시원한 바람의 덕을 보기 위해 여름철이 좋으며, 강 위에서 베푸는 잔치는 확 트인 자유로운 느낌을 더하기 위해 가을철이 좋다. 이것이야말로 술을 마시는 사람의 심경과 경치에 알맞은 음주의 옳은 방법인데, 이 법칙을 어기면 술을 마시는 즐거움은 사라질 뿐이다>
중국인의 술에 대한 태도와 주연 중의 몸가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비난 받아야 할 점도 있으나 또한 칭찬해야 할 점도 있다. 비난해야 할 점은 더 이상 마실 수 없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시게 하고 좋아하는 습관이다. 유럽 사회에도 이런 습관이 있다거나 또는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나는 일찌기 들어 본 적이 없다. 혼자서 마시는 경우나 여럿이 어울려 마시는 경우나 단순한 주량보다도 술이 지닌 신비로운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술꾼들이 지키는 정칙이다. 물론 술을 억지로 권한다는 것도 유쾌하고 흉허물 없는 친밀한 기분에서 나온 행동으로 그 때문에 술좌석이 떠들썩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일어나고 술좌석은 혼란해진다. 그것이 또한 한결 주홍을 돋구게 마련이다. 너나 할것 없이 제 정신을 잃고, 손님들은 큰소리로 술을 더 가져오라고 재촉을 하고 자리를 떠나기도 하고 바꿔 앉기도 하여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분간을 못하게 된다. 이러한 장면은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연은 대개 어느 편이 더 많이 술을 마실 수 있느냐 하는 술마시기 내기로 떨어지게 되기가 고작이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굉장한 주량 자랑과 간사한 지혜와 책략과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를 항복시키겠다는 생각으로 서로 겨루게 된다. 누군가가 부정 행위를 감시하는 구실을 맡아서 상대편의 비밀 전술을 살피고 경계해야 한다. 여기서 느끼는 즐거움은 아마도 경쟁하는 정신 속에 있을 것이다.
중국인이 술 마시는 데 있어서 칭찬할 만한 점도 그 요란스레 떠드는 점에 있다.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으면 마치 축구 경기장에 가 있는 느낌이 든다. 그 많은 소리들이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축구 시합에서 일어나는 갈채와 함성과 같은 아름다운 리듬의 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것은 분명 <알아맞히기 놀이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적과 자기편이 동시에 몇 손가락씩 내밀고 적과 지기편의 손가락 수효의 합계를 큰소리로 맞추며 노는 놀음이다. <1. 2. 3. 4. ...> 등의 수는 모두 시적인 음절이 많은 말로 표현이 된다. 이를테면 <칠성>(북두칠성의 별자리)라든가, <팔준>이라든가, <팔선도해>니 하는 종류이다. 적이나 자기편이나 완전히 가락에 맞추어서 동시에 손가락을 내미는 동작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수를 나타내는 말은 자연히 일정한 음악적인 박자, 또는 소절을 취해야만 하게 되므로 그 가운데 여러가지 다른 음절을 압축해 버려야 한다. 숫자를 세는 소리가 끝나고, 다음 차례로 옮기는 사이에는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일정한 귀절이 들어가 그것이 또 다른 소절을 이루게 된다. 이리하여 어느 편이든 제대로 맞히게 될 때까지는 노래는 끊임없이 리드미컬하게 계속되게 마련인데, 이 게임에서 진 편은 미리 약속한 바에 따라서 큰 잔이건 작은 잔이건 철철 넘도록 가득히 부어서 두 잔이고 세 잔이고 단숨에 마셔야 하는 것이다. 손가락 수효를 맞히는 것은 아무렇게나 짐작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이 계속해서 같은 수를 내놓거나 어떤 순서로 수효를 바꾸는가 하는 버릇을 잘 알아내어야 하기 때문에 약간 머리를 재빠르게 활동시킬 필요가 있다. 이 놀이의 재미와 진행은 놀음에 참가한 사람들의 속도와 일관된 리듬에 달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연의 개념의 핵심에 도달한 셈이다. 이것을 잘 이해함으로써 중국의 연회가 얼마 동안이나 게속되며 요리의 수효, 서어비스의 방법 따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인이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단지 마시고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차례차례 다른 음식이 들어오는 사이사이에 이야기도 나누고, 농담도 주고 받으며, 여러 가지 문학적인 수수께끼 풀이라든가, 시짓기 놀이를 하는 것이다.
5분마다 또는 7분이나 10분마다 식탁 위에 놓여지는 한 접시의 요리에 좌중의 손님들은 한두 번 젖가락을 대기는 하지만 좌중은 오히려 요리 접시가 들어올 때마다 이야기 놀이를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식사법에는 두 가지의 효과가 있다. 첫째는 입씨름의 소란스러움에는 몸 안에서 알코올 성분을 발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게 틀림없고, 둘째는 한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는 연회가 끝나기까지는 먹은 음식의 어느 부분은 이미 소화되었기 때문에 먹으면 먹을수록 오히려 배가 고파지게 된다. 식사하는 동안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의 악덕이라 하겠다. 위생적이 아니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이다. 중국인은 한편 라틴 민족적인 명랑함이 있는 유쾌한 국민이지만, 그런 사실에 지금까지도 의문을 품고 중국인은 무뚝뚝하게 침착하기만 하고 감정이 없는 인종이라는 선입감에 아직까지 사로잡혀 있는 중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 모름지기 중국인들이 먹고 마시고 할 때의 광경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야말로 중국인이 타고난 본디의 성질을 마음껏 나타내고 있을 때이며 도덕적인 완성이 완전한 경지에 도달해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인으로 태어나서 음식을 먹는 동안 유쾌하게 보낼 수 없다면 도대체 언제 즐길 수 있겠는가. 중국인의 주연이 두 시간쯤 금방 지나가고 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식사를 하는 목적은 단순히 마시거나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쾌한 즐거움 속에 흠뻑 잠기어 마구 소리를 지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근히 취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술꾼이라고 하겠다. 현이 없는 악기를 켜면서 즐긴 시인 도연명과 같이, 애주가에게 있어서는 그 정서가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정서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글자는 한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시취를 알고, 기도 한마디 드릴 줄 몰라도 종교심이 있고, 한 방울의 술도 마실 수 없더라도 취한 정취를 알며 암석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몰라도 그림에 대한 정서를 가진 사람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시인, 성자, 애주가, 화가와 한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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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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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8. 아우구스티누스
죄의 유용성
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은 이 현세주의자가 교부가 되리라고는, 더구나 서양의 가장 위대한 교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번거로운 세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가 학교에서 억지로 그리스어를 배웠고, 남의 정원에서 배를 훔쳐 먹은 사실은 그냥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고작해야 도덕 군자인 체하는 모호한 부류의 사람들과 구별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수사학을 공부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갔을 때에는, "혁명가"로 자처하는 난폭한 학생 집단과 우정을 맺는다. 비록 그 자신은 몹시 주의를 해 밤중에 무고한 행인을 덮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희곡을 쓰는 일과 여기저기 잡다한 연애 사건에는 매우 열심이어서 낮이나 밤이나 그 속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좀더 안정된 지위에 이르렀을 때에도, 즉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 선생으로 있을 때와 마지막으로는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가 되었을 때도, 결코 깨끗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때에도 결혼하지 않은 채 애인과 동거한다.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고백을 통해 알고 있듯이 그는 이 여자를 깊이 사랑했고 더구나 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저하고 있었다. 훗날 성녀 모니카로 높이 칭송받은 그의 어머니도 아들의 그러한 망설임을 거들었다. 왜냐하면 추측하건대 그녀가 도의상 격분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들이 신분에 걸맞는 합법적인 결혼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여자 친구는-두 사람 모두 눈물을 흘리기는 했지만-이렇게 버림을 받고 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 훌륭한 가문의 처녀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약혼 기간이 너무 길어지자, 그는 부리나케 새 애인을 구한다. 한마디로 말해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원후 4세기경의 전형적인 후기 로마 사람이다. 당시는 고대 로마의 엄격한 덕이 사라져 가고, 적당한 방탕을 남자의 이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후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갑작스런 개종을 통해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향락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헤매던 생활을 떨쳐 버린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는다. 그는 밀라노에서의 명망 있는 위치를 버리고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뜻맞는 몇몇 사람이 모여 은둔 생활을 하며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종의 평신도 수도원을 세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조용하게 보낼 운명은 아니었다. 그곳과 인접한 도시 힙포에서 주교 보조를 선발할 때, 집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가 알려지자 강제로 떠밀려서 그의 의지와는 달리 관직에 임명된다. 훗날 그는 힙포의 주교 자리를 떠맡게 된다. 이 직분은 강론과 사제직이라는 성직자의 정신적 의무뿐만 아니라, 교회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성가신 일도 맡아서 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서의 활동에는 단지 약간의 시간만을 할애할 뿐이었다. 그 밖의 시간에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수많은 신학과 철학 분야의 책을 쓴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에 정열적으로 참여한다. 그는 62세에 공적인 활동에서 물러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리자 그는 완전히 고독과 적막 속에 몸을 숨겨 마침내 430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젊었을 때 그렇게도 그를 격정적으로 사로잡았던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명을 달리한 것이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젊은 시절을 회고해 볼 때, 그에게는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죄악의 연속인 것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그는 단지 눈에 띄는 몇몇 불미스러운 행위들을,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책임감 없이 벌였던 일시적인 연애 관계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웅변술로 거드름을 피워 보는 지나치게 건방진 공명심 등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 겉보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까지도 죄라고 여겼다. 예를 들면 그가 학생 시절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한것, 또는 구구단 외우기에 열중하기보다는 트로이의 화재 이야기를 더한 것, 혹은 극장에 자주 가곤 한 것 등도 모두 죄라고 생각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더 나아가 젖먹이 때 젖을 달라고 너무 보채며 큰소리로 울었던 일조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정도이다. 말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 그의 젊은 시절에 일어났던 일들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볼 때, 우리도 역시 그러한 바람에 동의를 해야 할까? 만일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부터, 나중에 회개를 한 다음 비로소 그렇게 된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그가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 또는 그러한 성인이 되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즉 그는 더 인간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넘어설 수 있고 실제로 넘어선 가능성의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합당한 근거로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도 통렬히 한탄해 마지않는 젊은 시절의 바로 그 방탕이 없었다면 결코 직접 체험해 볼 수 없었을 그 가능성을 그의 방탕이 알게 해주었다고 말이다. 그에게 덜 인간답다는 것이 오히려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실이 인간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함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이 사상가가 신학과 철학적 사유의 영역에서 이룩한 것이 그에게 독특한 사유의 강도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전의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곧 생생하게 자기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나 자신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생에 대해 아무런 변명없이 솔직하게 고백하여 진정한 의미의 자서전을 쓸 수 있었던 최초의 인물인 것이다. 이 자서전이 바로 그 유명한 (고백록)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만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모든 사건에서 어떻게 그가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밝히려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발견한 특징을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계기로 파악한다. 그를 철학함으로 내몰고 철학함 속에 붙들어 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그의 근본 신념은,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 향한 시각속에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삶의 생동감 속에서 인간의 내면성을 발견한 위대한 인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대는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 가라.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실현한 이 내면성으로의 전환과 더불어 철학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는 대부분의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인간을 우주의 구성원으로 고찰하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와 그 추종자들처럼 공동 생활을 하면서 행위하는 자로 간주하지도 않았고, 또한 신플라톤 주의자처림 세계 안에 산재된 신성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각에 자신을 내어 보이는 그러한 본질 규정을 가진 인간이며 스스로를 자기 경험에서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처음 발견한 것은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부조화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젊은 시절의 방탕을 회상해 보고 바로 그 점을 간파한다. 즉 인간에게는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인간은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그가 잘못된 생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혼란과 갈망, 이 두 상태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가 비롯되는데 그것은 바로 불안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성찰을 다음과 같은 간결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하다." 우리가 이 문장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읽는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지평이 확실해질 것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여 만드셨나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품에 안길 때까지 편안할 수 없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비록 그것이 철학적인 말의 형식을 띤다 해도-단순히 인류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한 철학적 신학자로서 이야기한다. 이 점에서 그는 진실로 그 시대의 자식이다. 다시 말해 그렇듯 강력하게 인간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체험하였기에, 인간을 신성 안에서 감싸려고 내면적으로 그렇게도 애썼던 후기 고대라는 시대의 자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특히 그리스도교의 사상가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는 키케로의 절충주의를 통해 철학에 이르게 되며, 자신의 악한 경험으로 인해 마니교의 암울한 세계 해석에 빠진다. 마니교에서는 모든 현실을 선한 원초적 원리와 악한 원초적 원리와의 투쟁이라고 해석한다. 그 후 그는 철저한 회의주의의 극에까지 이르게 된다. 마침내는 신플라톤주의와 거기서 주장하는 내세가 참된 세계라는 그 근본 사상이 자기에게 알맞는 철학함의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그가 그리스도교 사상에 이르는 데는 단 한 걸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인간 해석과 비슷하게 인간을 완전히 신성과 연관지어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그리스도교로 향하는 그때에 이미 철학적 신학자였다. 이러한 개종과 더불어 그는 서양 세계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된다. 그의 그리스도교 철학에는 인간에 대한 물음과 신에 대한 물음,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중대한 문제로 결합된다.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신과 영혼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그것말고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이러한 사상의 관점에서 볼 매, 아우구스티누스가 출발한 인간의 본질적 오류는 그 숙명적인 성격으로 전면에 부각된다. 왜냐하면 그 잘못된 점이 신과 연관지어질 경우 그것은 죄로 파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그가 젊은 시절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부단히 무거운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죄 많은 부조리가 현존재의 시작부터 인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바울의 원죄설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죄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인간은 그 후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을 전혀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죄의 상태에 빠져 있다. 이로써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본질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 사상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 된다. 그리스 사상에서-누구보다도 소크라테스가 매우 명백하게 말하고 있듯이-인간은 본래 선하다. 그래서 인간은 실제의 행위에서 선을 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의 본래적인 선함을 성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혼란스런 인간 본질의 문제를 원죄설을 끌어들여서 해결하고자 할 경우, 이것은 매우 어려운 사유의 벽에 부딪치게 된다. 원죄라는 인간의 죄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인간은 그가 잘못 행위하는 데 대해 근본적으로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는 그 자신의 책임과 자유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죄라는 것은-만일 이 개념이 완전히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지 않는다면-죄책감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죄책감이란,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때에만 다시 말해 그가 자유로운 존재로서 이해될 때에만 고려될 수 있다. 이렇듯 원죄와 자유에 대한 사상은 인간에 대한 물음에서 서로 현저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문제를 모든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초기 저서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자기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그는 나중에 의문을 갖는다. 신의 전능함을 철저하게 사유할 경우, 인간의 자유는 분명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예정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예정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행위와 운명은 애당초부터 결정되어 있다. 우리로서는 헤아릴 길 없는 신의 결정에 따라 신이 의도하는대로 구원받기도 하고 단죄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말년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온갖 정열을 기울여, 그가 생각하기에 인간에게 너무나 많은 자유를 부여해 인간에게 과분한 명예를 돌리고 있는-그래서 동시에 신의 영광을 축소시키고 있는-그 사람들과 대항해 싸운다. 신에 대해 끝까지 일관적으로 사유할 경우, 우리는 오직 신에게만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신의 신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지막 결론이다.
신은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어둠 속에 가리워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통찰이다. 그는 신플라톤적 사상의 영향 아래 이 같은 통찰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이 사상을 견지하였다. 신은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으며", "가장 깊숙이 은닉해 있다." 신은 근본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확신은, 그가 그 확신을 부정적인 신학의 의미로서, 역설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때 특히 인상적으로 두드러진다. 신에 관한 한 "인간의 영혼에는 어떠한 지식도 없다. 단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신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단순한 철학적인 고찰, 즉 자연적인 이성으로는 결코 신에 대한 확실한 앎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신에 대한 앎은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며, 인간은 단지 믿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함은 신에 관한 진리의 문제에서 끝이 난다. 그의 철학함은 믿음의 신학으로 합류한다. "단순한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하기에 우리는 너무 약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성서의 권위가 필요하다."
사유에 대한 믿음의 우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항상 말하듯 믿음은 지적 통찰을 필요로 한다는 말로써 역전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한 지적 통찰이란 믿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찰은 믿음을 전제로 하며 통찰이란 원래 믿음 속에서 포착한 진리를 사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통찰은 자기 자신 안에 확실함을 지니지 못하고 단지 믿음의 은총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확실히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성을 믿음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확실한 결론을 항상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초기에 철학적인 사유에 너무나 깊숙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철학적인 사유를 간단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성의 원초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이성이 신을 파악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물론 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란 믿음과 비교해 볼 때 몹시 불충분하다. 철학적으로 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조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끔 신에게로 가는 상승의 단계에 대해 말하며, 그 최고의 단계에서 신이 관조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때 그때의 생각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스스로도 말년에 가서는 그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철회한다. 그는 모든 저서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조한다기보다는 단지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그는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과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고찰하고 난 뒤 비로소 만일 인간과 세계의 존재가 신의 혜택을 입고 있다면, 그 신은 어떻게 사유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제 어쨌거나 이런 식의 방법을 통해 자연적인 이성으로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입한 신존재 증명은, 예컨대 후대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유한한 세계의 실재는 그 자체 안에 근거를 둘 수 없고 그래서 창조주인 신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특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그의 사상의 근본 경향에 상응해 인간의 자기 경험에서 신존재 증명을 얻는다. 이 증명은 자기자신의 내면으로 눈길을 돌려 거기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과연 이성이 진리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주어져야만 한다 이성이 그 판단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척도는 이보다 더 높은 존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성을 넘어서고 있는 것은 신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의 척도인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비록 희미한 윤곽으로나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인식이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여기에서도 다시 자기 경험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어떠한 회의로써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분명한 확실성이다. 그런데 신은 다른 모든 실재처럼 우리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또 존재하도록 유지시켜 주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따라서 신은 최고의 존재자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 외에도 우리는 우리자신 안에서 우리 마음의 본성상-인간을 특징지어 주는 그 불안 속에서도-선을 추구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선을 추구한다. 이러한 선의 추구도 신에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신은 가장 최고도로 추구되는 것, 모든 동경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어야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사유의 길을 통해 신에 대한 이런 식의 가장 보편적인 본질 규정의 인식을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특별한 방식의 인식이 필요하다. 그는 이 인식 방식을 유추에 의한 통찰이라고 특징짓고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식으로 그 인식 방식을 전개시킨다. 여기에서도 그는 인간에서부터 출발한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는 자신을 피조물로서 파악해야만 하고 그것도 그리스도교 전통이 주장하듯이, 신의 모습을 꼭 닮은 피조물로 파악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실재도 신의 의도대로 창조된 피조물로 이해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식으로 창조된 것은 창조주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실재 안에서, 특히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 그 존재자를 암시하고 있는 징표를 찾아 나선다.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일정한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에서 즉 신의 작품을 통해 이 작품의 주인을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유비의 방법에 근거해서 이런 식으로 신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특히 다음과 같은 결실을 맺었다. 즉 자연적인 통찰의 길을 통해, 예컨대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가르치듯이 삼위 일체인 신에 대한 어떤 것을 파악하려고 하는 데에서 풍부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적인 사유가 능히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인간이 스스로를 고찰해 볼 때, 그는 자신의 본질이 삼중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삼중의 본질은 기억과 의지와 통찰이다. 다른 모든 실재도 역시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개개의 모든 사물은 하나이면서 다른 사물과 구별되고 또 동시에 다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본질에서 보이는 이러한 삼위 일체가 유비의 도움을 받아 신의 흔적으로 이해될 경우, 우리는 적어도 그 안에서 삼위 일체의 신을 그 기본 구성틀에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믿음에서가 아니라 이미 자연적인 개념 파악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신에 관한 철학적 진술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모든 가능성에는 인간과 그 밖의 모든 실재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상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사상에 대한 근거를 다시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은 세계의 창조자이고 세계는 신의 창조물이라는 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사상뿐만 아니라 철학적 사상의 기본을 이루는 제I의 전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창조의 사상을 일찍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그러한 철저한 근원성을 갖고 파악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경우 신은 혼돈을 정돈하며 형태를 부여한 세계의 제작자이다. 따라서 혼돈은 신에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럴 경우 신의 권능이 손상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바로 이 신의 권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신의 권능이 제한되지 않게 생각하려면 신의 창조적 의지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 존립하고 있는 혼돈도 있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창조는 진정 무에서의 창조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대 사유의 극도로 역설적인 이러한 사상을 통해 절대적 권력으로서의 신의 표상은 절정에 이르게 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 대해 숙고할 때마다 항상 이 표상에 부딪치게 된다.
신은 역사에 대해서도 막강한 권한이 있다. 이 점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자연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무엇보다도 역사의 세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철두철미하게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비역사적인 이성 존재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간으로 해석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상에서 출발하여 역사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이 해석이 그를 서양 최초의 위대한 역사 신학자와 역사 철학자로 만든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신의 왕국과 세계의, 악마의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투쟁의 싸움터이다. 역사는 이 투쟁의 단계를 서술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신의 영역으로까지 향한다. 역사는 인간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악한 천사들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된다. 역사는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최후의 심판에서, 즉 악인을 심판하고 신의 왕국을 완전히 실현함으로써 끝이 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것에서 결정적인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의지이다.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는 그가 접하는 모든 물음에서 언제나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전체를 덮고 있으며, 그는 인간에서 출발하여 신적인 것에 대한 통찰에 이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가 이렇게-그 이전에는 거의 아무도 하지 못했던-신의 신비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인간의 신비가-그 이전의 어느 사상가도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스스로 그 깊이를 열어 보인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신비는 그 자신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인간다움을 갖춘 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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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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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사랑은 싸움?
구약 시대에 유명한 노아의 방주에서 배 안에 있는 동안 사랑의 행위가 금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홍수가 지나 온갖 동물들이 방주에서 쌍쌍이 줄을 지어 나갈 때, 노아는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코양이와 암코양이가 나왔는데, 그들 뒤로는 수많은 새끼고양이들이 뒤따라 나왔다. 노아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수코양이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 사랑은 일종의 싸움이다. 사랑은 곧 싸움이다. 싸움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바로 싸움 속에서 싹튼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싸움이나 투쟁만은 아니다. 사랑은 그 이상이다. 사랑은 싸움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싸움은 사랑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지만, 사랑은 싸움없이 존재할 수 없다.
위조 지폐
어떤 사람이 돈을 지불하는데 위조 지폐를 사용했다고 고소 당했다. 피고는 심문받는 도중 그 돈이 가짜였다는 것을 몰랐다고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도록 강요당하자 이렇게 자백했다. "그것은 훔친 것이기 때문이지요.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면 돈을 훔쳤겠습니까?" 판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결정을 내려서 위조 지폐의 죄목을 기각시키고 새로운 죄목, 즉 절도죄로 대치시켰다. "분명히 저는 그것을 훔쳤습니다." 피고는 순순히 자인했다. "그러나 위조 지폐는 법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훔친 것이 어떻게 범죄가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의 논리에서 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석방되었다.
- 그러나 삶에는 이러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실제 그렇다면 그렇게 쉽게 석방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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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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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풀어쓴 한국사 강의록 - 김기섭
제1장 우리는 왜 국사를 배워야 하는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일기와 기록
여러분은 요즘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쓴다면 얼마나 솔직하게 쓰나요? 혹시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순간적으로 둘러댄 일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쓰나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정확하기는 한 겁니까? 요즘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시다. 일기장을 매일, 혹은 일 주일에 한번씩 선생님께 검사받던 그 시절 말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희미한 기억뿐이라면 여드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사춘기를 떠올려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아주 정직하게 그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던가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일기장이 거짓말 투성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일기장을 읽었을 때 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도덕성에 심각한 흠을 남길 수 있겠다 싶은 대목만 아예 빼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시절 일기장에는 남이 알아도 조금밖에 상관없는 저의 고민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저는 다른 사람의 일기에 대해서도 자주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특히 책으로 출간된 일기류를 읽다 보면 마치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기미와 주름살을 감춘 여인을 만난 듯 연민의 정부터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기는 비밀을 전제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진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가장 솔질한 고백록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공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는 이기심과 자기보호본능이 작용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왜 그토록 심하게 화를 내었는지, 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심지어 어떤 사실은 아예 의도적으로 은폐할 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비밀스러운 일기가 그럴진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읽게 될 기록을 남기는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행히 자기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져서 어는 정도 객관적일수 있겠지만, 이제는 사건을 보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격이 문제됩니다. 같은 일을 겪고서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순한 목적에서 어느 한쪽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말과 기록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겪고 생각한 바를 사심없이 이야기하는데도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향후 대책 등 의견이 많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시중심적인 사고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기혹을 통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가의 기록과 평가를 맹신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주관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가호극 신봉하는 역사가의 분석... 평가 역시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나면, 이제 우리의 눈은 달라집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의가 단순히 단답형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록과 역사
우리는 지금 역사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사라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되살려 요즈음도 많은 대학에서 역사학과라는 명칭 대신 사학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본래 '기록하는 사람'을 뜻하는 상형문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태사공기'('태사공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태사공서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기'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한다. 태사공은 사마천을 가리킨다.)를 출인 것이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글자의 뜻은 조금씩 변해 '사람'보다는 '기록'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쓰여졌습니다. 그 결과, 기록하는 사람을 뜻할 때에는 가나 관 같은 글자를 덧붙여 가가 혹은 사관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역사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역'의 뜻은 '지나다'이므로, '역사'는 '지나간 일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 셈이 되는데, 사실 이것은 의미가 중복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굳이 역사라는 용어를 새로이 쓰게 된 데에는 서양의 Historyfksms 단어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번역어라는 것이지요. History의 어원은 라틴어의 Historea입니다. Historea는 '쓰다'라는 뜻의 Hi와 '이야기'를 뜻하는 Storea를 합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쓰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사와 같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를까요?
춘추와 춘추필법
현존하는 동양 최초의 사서는 춘추입니다. 봄과 가을을 책의 이름으로 삼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추는 춘추시대 제후국의 하나인 노나라와 관련된 각종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전하는 말로는 공자의 저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는 역사서라기보다 일종의 경전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오경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춘추가 씌어질 무렵에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나무를 알맞게 깎고 그곳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춘추는 매우 간단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좌씨춘추전과 같은 주석서가 후대에 필요해진 이유도 춘추의 글이 너무 짧은 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하튼 몹시 제한된 지면 탓에 춘추는 그저 보고 들은 사실을 짤막하게 가감 없이 기술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읽더라도 똑같은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주나라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각지에서 왕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던 봉건제후들이 왕실의 권귀를 공공연히 부시하던 패자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쿠테타와 같은 하극상이 빈번히 일어나고, '실리'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각종 타협과 야합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를 살면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정명과 존왕양이였습니다. 정명은 명분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고, 존왕양이는 왕을 높이 받들고 도전세력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춘추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적는다'라는 춘추의 편찬 방침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도덕한 이들의 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포폄(포상과 폄하. 포는 칭찬, 폄은 비방을 뜻함.)을 보이지 않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은 셈이지요. 따라서 춘추에서는 은연중 감상의 윤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춘추는 마치 사실과 도덕의 결합체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춘추의 서술방식을 우리는 흔히 춘추필법이라고 하는데, 춘추필법은 중국의 송나라 때 성리학을 주도한 주희를 통해 크게 강조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명분론이 횡행하던 조선 후기에 맹위를 떨쳤습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정부의 관료가 역사 기록과 역사서 편찬을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관직 중에는 그 일을 전담하는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맡아 일하는 사람을 흔히 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전문직이었습니다. 춘추가 일종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전문적인 역사서는 못 됩니다. 그래서 춘추의 편찬자라고 하는 공자를 일반적인 역사가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사기와 정통역사서
전문적인 역사가, 곧 사관이 쓴 최초의 역사서는 사기입니다.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아버지 사마담의 작업을 이어받아 태초부터 한나라 당시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지요. 사기는 당시로서는 정말 특이한 형태의 역사서였습니다. 본기.표.서.세가.열전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는 제왕의 사적을 시대순으로 기록한 곳이며, 표는 제왕과 제후의 출생.즉위.중요 활동 등을 요약 기재한 곳입니다. 서에는 예법.형법.음악.경제 등 시대별 사회상을 적어놓았고, 세가에는 제후에 관한 사항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열전은 신하와 백성 중 특기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이러한 체제의 역사 서술방식을 우리는 보통 기전체라고 부릅니다. 본기과 열전으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지요. 풍부한 정보를 수록한 사기의 체제.구성과 분향은 이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역사서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기전체는 정치 중심의 역사의식을 철저하게 반영한 서술방식입니다. 맨 앞을 차지하는 본기라는 단어에서도 짐작되듯이, 제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들의 활동을 전하는 일에 모든 촉각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신하들의 각종 행위를 기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제왕과 신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각종 정치적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본분이요 역사서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역사서란 일종의 정치 자료...기록인 셈이지요. 서기 8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라를 거쳐서, 서기 25년에는 광무제가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를 이전의 한나라와 구분해 보통 후한이라고 부릅니다. 후한의 반고가 아버지 반표를 이어 전한의 역사를 사기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한서입니다. 한서는 본기.표.지.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 범엽이 지었고, 후한이 멸망한 뒤 전개된 삼국시대의 역사서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라는 사람이 편찬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멸망하고 나면 왕조가 앞선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이처럼 국가가 주도해 만든 공식 역사서를 보통 정사라고 합니다. 정사는 모두 기전체로 되었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전체는 사안별로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편찬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읽어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체제와 분향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책이 나오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송나라 때의 사마광은 읽기 편한 역사서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자치통감입니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이른바 편년체의 역사서이지요.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는 역사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군자의 정치적 교훈서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치통감은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교훈적이기에 다분히 도적 지향적입니다. 그러면서도 편찬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즉, 사실 지향적이지요. 앞서 말한 춘추필법의 영향일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역사 개념
지금까지의 거론한 역사서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은 이를 본뜬 후대의 동양 역사서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성격입니다. 이제 그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와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입니다. 춘추, 사기, 자치통감 모두 위정자를 대상으로 했거나 그들을 위해 만든 책입니다. 또 한서, 후한서, 삼국지, 수서, 당서 등에서 보듯이 한 왕조를 단위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다라서 당연히 정치사 중심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동양의 역사서에서 평민에 관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둘째, 술이부작 정신이 서술의 원칙이었다는 점입니다. '술이부작'이란 '(듣고 본 대로)기술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쓰는데 자기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태도는 역사서를 지금 당장 이용하기보다 후손들이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알고 평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가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싶으면 사론을 이용했는데. 사론은 역사가의 생각을 논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평론과 유사합니다. 셋째, 유교적 역사관이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동양의 역사서는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이른바 춘추필법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역사서는 그 자체로 교육용 도덕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크지 않아서 서양의 역사개념과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리스의 역사서
서양에서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히스토리아(Historia)가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입니다. 히스토리아는 서기전 492~480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Persia) 전쟁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Greece) 소도시연맹이 페르시아 대제국을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이를 위해 헤로도투스는 전쟁이 절어진 곳의 지형과 풍물.기후 등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그 책에는 페르시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실증적인 역사 서술태도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문학적 설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시대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서양 사람들은 헤로도투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높이 기린답니다. 헤로도투스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으로는 투키디데스(Tukidides)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를 알면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서 히스토리아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투키디데스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전쟁사를 주로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싶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서기전 431~404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Sparta)와 아테네(Athene)가 벌인 전쟁입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화와 전설을 배격하고 합릭적으로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것입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는 역사 사실을 초자연적인 사실과 구별하려고 한 최초의 과락적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경제적인 면을 도외시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Rome) 제국의 폴리비우스(Polybius)는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교훈의 원천으로 인식해 역사 지식을 인간 행위의 귀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서양 역사에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헌비판학과 근대사학
서양 역사에서는 서기 4세기 말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이후를 중세로 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서양의 중세는 봉건제와 농노제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사회.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유럽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락이 신학에 예속되었다고나 할까요?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기준을 둔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이 신에 기준을 둔 신학의 영향하에 있었으니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제약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조금씩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 된 각종 사건과 믿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사료를 수비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한쪽에선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은 19세기에 독일의 랑케(Ranke : 1795~1886)와 그 제자들이 주장하고 추구하던 것입니다. 랑케는 사료를 경시한 18세기의 계몽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사료를 비판적으로 분석.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17세기의 사료 수집.정리 경향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콩트(Conte : 1798~1857)의 실증주의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역사서 이외에도 회고록.일기.편지.외교문서 등을 사료로 채택함으로써 사료 부족의 골을 메우려 했습니다.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말을 남겼는데, 그중 "그것이 본래 있는 그대로"와 "사실의 엄격한 제시는 역사 서술의 최고 법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끊임임없이 연구해 63권의 저작을 남긴 랑케를 서양 사람들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서양에서의 역사 개념
위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서양의 역사학은 동양과 달리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구명하고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 그리고 폴리비우스에게서 확인되듯이 그들의 역사서 편찬은 개인의 호기심이 학문적으로 확대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서는 다분히 분석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양처럼 당시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기능을 소홀히 했고, 그것이 오늘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둘째, 문헌비판적 역사학이 발달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에 입각한 중세의 기독교사관은 종래의 순환가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개인적 탐구열에 입각한 자유로운 분석.연구의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14세기경에 이르러 사람들의 생각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던 각종 서적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 대 그 활기에 대한 반작용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결국 19세기 이후에는 과학적 서술을 역사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문헌비판학이 역사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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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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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家之狗(상가지구) 喪(죽을 상) 家(집 가) 之(-의 지) 狗(개 구)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정(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문(東門)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말을 듣고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라고 했다.
喪家之狗 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며, 연말 대선에서 패배한 용들의 모습 또한 이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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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 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廐廐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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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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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운동화 혁명
우비의 역사는 옷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오래 되었다. 먼 옛날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납질의 잎이나 풀을 짜서 수지를 바른 길고 가느다란 짐승 가죽 조각과 함께 봉제하여, 물을 튀겨내는 외투나 머리에 쓰는 것을 장만하고 있었다. 물을 튀기기 위한 코팅재는 문화에 따라서 여러 가지다. 예를 들어서 고대 이집트인은 린넬에 납을 바르거나 파피루스에 기름을 바른 것을 사용했고, 중국인은 종이나 실크에 왁스나 래커를 발라서 사용했다. 그렇지만 편리하고 가볍고 정말 효과적인 고무제 우비를 개척한 것은 남아메리카의 인디언이었다. 16세기 신대륙으로 온 스페인의 탐험가는 원주민이 외투나 모카신에 이 지방에서 나는 고무 나무에서 채취한 우유 같은 수지를 바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하얀 수액을 응고시켜 말린 다음 옷에 바르면 옷이 튼튼하고 부드러워진다. 스페인인은 이 물질을 '나무의 우유'라고 불렀고 인디언의 수액 채취 방법을 흉내내서 이것을 코트나 케이프, 모자, 바지, 그리고 부츠의 바닥에 발랐다. 그런데 비를 효과적으로 튀겨내는 데 효과가 있는 이 방수재는 한낮의 더위에 녹아서 끈적거리기 때문에 건조한 풀이나 쓰레기, 고엽들이 달라붙고 밤이 되면 또다시 경직되고 딱딱해져 버렸다.
수액이 유럽으로 들어오자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들은 수액의 특성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1748년에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프랑소와 플레느는 수액을 소재에 도포 하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접착성은 없어지는 과학적인 방법을 발견했으나 이것에 이용되는 화학 첨가물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또 하나의 실패로 끝난 이 실험은 단지 수액에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공헌했다. 1770년에 영국의 대화학자이며 산소의 발견자인 조셉 프리스틀리는 이 우유 상태의 수액의 개선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는 응고한 수지가 흑연 자국을 지운다는 (rub out)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고무는 영어로 '러버'(rubber)라는 이름을 달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고무제 우비로의 길이 열릴 때까지는 57세의 스코틀랜드 화학자인 찰스 매킨토시에 의한 1823년의 획기적인 발견을 기다려야 했다. 글래스고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고 있던 매킨토시는 천연 고무가 석유의 분별 증류로 생겨나는 휘발성이며, 유상의 액체인 콜타르 나프사(휘발유와 케로신의 중간으로 비등 분류하는 유분)속에서 쉽게 분리하는 것을 발견했다. 나프사 처리한 고무의 혼합액을 천에 발라 굳어지게 함으로써 매킨토시는 고무 냄새 외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방수성 코트를 만들었다. 이것이 일반인들에게 '매킨토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나프사 처리된 고무로 만들어진 신발은 '갤로쉬'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은 목이 긴 부츠에 이미 정착한 이름이지만 원래는 무거운 가죽끈이 달린 고르인의 샌들에 로마인이 붙인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갤로쉬는 장딴지의 중간까지 오는 십자형 교차의 랩식 구두로서 '고르인의 신발'이라는 뜻에서 '갤로릭 소레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갤로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한 켤레쯤은 가지고 있는 운동화의 바닥이 고무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일대 기술 혁신이 필요했다. 발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스니커'(몰래 걷는 사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고무 바닥의 운동화는 1860년대에 찰스 굿이어가 개발한 고무의 가황법 덕택에 탄생할 수 있었다. 굿이어는 고무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고무가 따뜻할 때는 녹아서 끈적이고, 차가워지면 딱딱하게 굳는다는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고무는 황과 섞으면 건조하고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는 물질이 된다. 1800년대 후기에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고무제 복식품인 우천시의 오버 슈즈처럼 고무는 신발에 가장 적당한 소재가 된다.
1800년대 말에는 고무가 신발의 바닥에도 붙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1900년대에 들어서자 캔버스 천의 신발 바닥에 가황 고무 바닥을 아교로 붙인 신발이 나온다. 제화업자가 운동화의 혁명이라고 못박은 신발이 등장한 것이다. 1917년 U. S. 로버 사가 처음으로 시장에 내놓은 운동화 '케즈'가 선을 보인다. 이 이름은 '키즈'(아이들)를 연상시키면서 '발'의 라틴어 어원인 'ped'에 음을 맞춘 것이다. 이 첫 운동화는 전체가 흰색이거나 검은 캔버스 천에 흰색 바닥을 붙인 것이 아니라, 바닥이 검고 캔버스 천은 다갈색인 얌전한 색상이었다. 이것이 신사용 가죽 구두의 일반적인 색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는 운동화의 기본적인 디자인에 거의 변화가 없다. 그러다가 한 대학의 전 육상 선수와 코치의 우연한 발견으로 신발 바닥이 요철 모양을 한 현대 운동화의 시대를 맞게 된다. 오리건 대학의 1마일 주자였던 필 나이트는 미국제 운동화보다 유럽제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다른 육상 경기에서도 선수들이 질 좋은 운동화를 신으면 좀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이트와 그의 코치 빌 바우먼은 1962년에 운동화 회사를 세워 최고급 일본 제품을 수입하기 시작한다.
신발이 가벼워진 것은 무척 커다란 이점이었지만, 바우먼은 특히 운동 선수들의 커다란 관심사인 접지 때의 마찰력 부분에 좀더 개선할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우먼은 어떤 신발 바닥 모양이 가장 좋은지를 몰랐다. 많은 제화업자들은 자동차 타이어용으로 개발된 얕은 요철 모양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부엌에서 와플 구이틀을 손에 들고 있던 바우먼의 머리에 번뜩이는 것이 떠올랐다. 그는 당장 고무를 구이틀 안에 부어 가열했고 깊은 와플 형태의 신발 바닥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곧 전 세계의 대표적인 신발 바닥이 되었다. 이 새로운 운동화는 신발 바닥뿐만 아니라 그 밖에 세 가지 획기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었다. 웨지(선저형)힐,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식의 중간 바닥, 그리고 그때까지의 캔버스 천보다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나일론 천을 채용한 점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날개를 가진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나이키스'라고 이름 붙인 이 와플형 신발 바닥의 나일론제 운동화를 선전하기 위해 나이트는 1972년에 오리건 주 유진에서 열리는 올림픽 예선 주자들을 주목했고 장거리 주자 몇 명에게 특별히 디자인한 신발을 신고 달리도록 했다. 그리고 "결승에서 이긴 일곱 명 가운데 네 명이나" 그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고 광고 기사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물론 1위, 2위, 3위 선수가 신은 신발은 서독의 아디다스 사 운동화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러 가지 브랜드의 와플형 신발 바닥 운동화는 판매가 엄청나게 늘었고 1970년대 말에는 바닥이 평평한 캔버스 슈즈는 먼지 속으로 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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