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 빌헬름 바이셰델/옮긴이 : 이기상, 이말숙
4. 플라톤 - 플라토닉 러브
오늘날 일상적인 대화에서 플라톤의 이름이 거론되는 때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플라토닉 러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이다. 사랑의 여러 종류 중에서 이 사랑은 감성적인 욕망이 앞서는 것이 아닌, 연인의 인격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적인 애정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러한 사랑의 형태가 플라톤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플라토닉 러브"에 이 철학자를 끌어들이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작품을 읽어 볼 때, 우리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가 여자에 대해 특별히 존경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플라톤은 여자란 남자보다 덕에 있어서는 훨씬 뒤쳐지고 남자보다 약한 족속이며 잔꾀가 많고 교활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여자는 천박하고 쉽게 흥분하고 화를 잘 내며,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고 소심하며 미신을 잘 믿는다고도 한다. 플라톤은 정도가 지나쳐 심지어 여사로 태어난 것은 분명 저주임에 틀림없다고 확언까지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자제할 줄 모르던 남자, 비겁하고 의롭지 못했던 남자들은 그에 대한 벌로 죽은 후 여자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는 역시 결혼 생활에서도 부드러운 정신적 감동을 위한 여지를 가질 리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결혼을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공통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꾸려 나간다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오직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는 관점에서만 보았다. 남자와 여자를 결속시키는 것도 상호간의 이해가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유능하고 성품이 훌륭한 후세를 낳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 일을 위해 적당한 배우자를 찾아 결합시켜 주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남자에게 상으로 주어졌으며, 더욱 극단적으로는 남자들의 공동 소유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플라톤이 생각한 남녀간의 사랑은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이 전혀 아니다. 물론 당시 그리스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보다 더 섬세하고 에로틱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색다른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 든 남자와 미소년 사이의 관계였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관계를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플라톤 시대의 그리스에서는 정치가나 장군이 아름다운 청년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거의 유행이다시피 했다. 플라톤은 그의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그 비슷한 일을 전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부단히 미소년과의 교제를 추구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그가 두 대상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당시 아테네의 천재적인 신동인 알키비아데스와의 사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철학과의 사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은 아테네의 청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르미데스가 소크라테스 옆에 앉았을 때, 그는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전 같으면 아주 쉽게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나의 용기 따위는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젊은이들과의 관계는 세간에서 행해지는 그러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다. 플라톤이 이 사실에 대해 전하는 것을 보면, "플라토닉 러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진다. 그 이야기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젊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향연)에서 보고하고 있는 내용을 보자 그는 그 대화편에서 아테네의 지도급 지식인들이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거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을 위해 어떻게 축하연을 베푸는지 말해 준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들은 연설과 답변을 하면서 에로스 신을 찬미하였다. 그때 만취해서 피리부는 여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온 알키비아데스는 잔치의 무리 속에 끼여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해 보이는 분위기에 젖어서 여느 때 같으면 비밀로 간직했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당신들은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운 젊은이들과 사랑에 빠져 항상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에게 정신이 팔렸다고 보시지요. 그러나 사실 아름다움이나 부유함, 그밖에 세상 사람들이 찬미하는 그 어떤 명예도 이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무가치하며 우리 자신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여러분께 단언합니다. 사람들을 풍자하고 우롱하는 것, 이것이 그 분이 평생하고 다니는 일입니다.
"나는 그 분이 진심으로 내 청춘의 꽃다운 아름다움을 얻으려 애썼으며, 또 나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신이 보내준 선물과 놀라운 행운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 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아름다움에 자신이 있었지요. 이렇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그를 방문한 적은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한 후로는 하인을 돌려보내고 언제나 혼자서 만났어요. ...그리고 그렇게 단둘이 있으면, 마치 연인끼리 이야기하듯 내게 말해 주리라 생각하여 나는 혼자서 좋아했어요.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그저 다른 때와 다름없이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지내다가는 그냥 돌아가곤 했어요. 그 후 나는 그 분에게 함께 운동 경기를 하자고 유인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하면 무엇을 좀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실제로 경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나와 체조를 했으며 때로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나와 경기도 벌였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요. 나는 이렇게 해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무 효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분에 더 강렬한 방법을 강구하여 한번 공격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또 일단 착수한 일을 단념하지 않고 끝까지 추궁하여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 분을 식사에 초대했으며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에게 하듯 그 분 뒤를 쫓아다녔지요. 오랫동안 그 분은 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설복했지요. 처음에는 식사만 마치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나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그냥 가게 했죠. 그러나 나는 다시 이 계교를 썼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밤늦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계속하였고, 그가 돌아가려 했을 때, 밤이 이미 깊었다는 핑계로 억지로 그 분을 머무르게 했습니다. 그 분은 내 곁에 있는, 그가 식사를 했던 침대에서 잠들었습니다. 그 방에서 자는 사람이라고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지요. ... 등불이 꺼지고 하인들이 물러갔을 때, 염치를 무릅쓰고 내가 생각했던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만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분을 흔들어대며 '주무십니까, 선생님 !'이라고 말했지요. '아니'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글쎄 뭔데?' '저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제가 사랑했던 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저에게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선생님은 저에게 한마디 말씀도 하시려들지 않는군요. 제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좀 들어보세요 저 자신으로서는 높은 덕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없으며, 또 그 일을 선생님보다 더 잘 도와주실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선생님 같은 분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말을 듣더니 그 분은 그 분답게 늘 하던 버릇대로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오오 사랑스런 알키비아데스, 자네는 흥정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로군. 만일 자네가 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정말이고, 또 내 속에 자네를 좀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정말로 있다면 말이야. 자네는 내 속에 자네 자신의 미모와는 구별되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일세 그려. 그렇지만 만일 자네가 그 아름다움을 나에게서 찾아내고 내 속을 떠보고 나를 부추겨 서로의 아름다움을 교환하려고 하면, 자네는 내게 어림없는 흥정을 하려는 게지. 자네는 가짜를 주고 진짜 아름다움을 받으려는 거야. 확실히 청동으로 황금을 바꾸려는 격일세 그러나 여보게, 주의해서 잘 보게. 그러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차릴 걸세 ...' 그 분의 말씀을 다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저에 관한 말씀은 그만하면 됐습니다. 저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을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선생님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제일 좋겠는지 좀 생각해 주세요.' '좋은 말이야. 그럼 후일에 이 문제에 대해서나 또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우리 두 사람이 제일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생각도 해보고 실행도 해보기로 하세.' 이런 말을 주고받으니, 마치 내가 쏜 화살이 그 분에게 맞아 상처를 입힌 듯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떡 일어나 그 분이 더 말할 새도 없이 내 외투를 그 분에게 덮어 드리고, 그 분의 다 떨어진 외투 속으로 기어 들어갔지요-그때는 겨울이었으니까요-그리고는 내 두 팔로 그 분을, 정말로 신 같은 그 분을 휘감고 밤새도록 사색에 잠겼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했지만 그 분은 태연 자약하여 아주 나를 무시하고 내청춘의 아름다움을 비웃었습니다. ... 나는 신들과 여신들께 맹세하여 다음과 같이 확언합니다. 나는 그날 밤을 소크라테스와 잤습니다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만일 알키비아데스가 단지 소크라테스의 사나이다움의 특이함만을 이야기했다면, 이 이야기는 특별히 상기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의 독특한 행동은, 그의 사랑이 완전한 헌신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정신은 뒤로 물러 나와 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플라토닉 러브"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살아가는 방식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또한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보여주었듯이, 플라톤이 철학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방법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은, 그리고 그 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하게 플라톤에로 소급해 올라가서 이해되고 있는 철학은 그 자체로 에로스의 한 방식이며 따라서 본질상 사랑이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와 가졌던 그 체험은 우선 철학적인 에로스가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감성적인 사랑이 단적으로 배척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로틱한 관계는, 단지 다른 유형의 사랑을 위한 출발점만을 형성할 뿐이다. 즉 플라톤이 그 안에서 철학함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 곳에로의 도약을 위한 출발점을 형성할 뿐이다. 이것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감성적인 사랑이 그 자체 안에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방탕으로 굳어 버려서도 안 된다 감성적인 사랑은 극복되어 앞에서 이야기한 높은 경지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감성적인 사랑에서 철학적인 사랑으로의 길이 도약이라는 묘사로 매우 인상깊게 표현되고 있는데, 플라톤은 대화편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그러한 묘사를 하고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만티네아의 여자 예언가인 디오티마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는 미상)의 비밀 계시로 체험한 것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엔게 에로스의 참된 본질이 무엇인지, 즉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름다움을 나타내려는 욕구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란 인간에게 있어서는 본래 영원하고 불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영속적이고 불사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랑에 속한다. 그러나 바로 이 불사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덧없는 아름다움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인 영원한 원형으로의 도약의 단계에서 실행된다.
모든 사람은 "불사적인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은 여자에게로 향하여 거기서 자기 사랑을 실행해 자식을 낳아, 이로써 불사와 모든 미래의 추억과 행복을 영원 무궁하도록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 또한 없지 않습니다. ... 무엇이 정신에 어울리는 것입니까?...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때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잉태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을 수 있고 또 낳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서 자기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추한 것 속에서는 그가 절대로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으니까요. 생식력이 왕성한 그는 추한 육체보다는 아름다운 육체를 환영하며, 또 아름답고 고상하고 잘 자란 영혼을 만나게 되는 날이면 그 육체와 영혼을 한가지로 반갑게 맞으며, 또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덕에 관해서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속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여 그를 교육해 보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을 가까이 하여 함께 지냄으로써 그는 오랫동안 잉태해 오던 것을 출산하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곁에 있거나 없거나 그는 그 사람을 기억하며, 그 사람과 굳은 우정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육신의 자식보다도 더 아름답고 불사적인 자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이제야 비로소 에로스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철학적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디오티마로 하여금 계속 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게 한다. "오오 소크라테스, 이상은 사랑의 신비 가운데 몇 가지인데, 아마 여기까지는 당신께 털어 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옳은 길을 따라가야만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신비에 당신이 도달할 수 있을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군요. 그러나 내 힘이 닿는 데까지 가르쳐 드리지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잘 들어주세요.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이 일을 어려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또 아름다운 육체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맨 먼저 그가 올바르게 지도를 받는다면, 오직 한 육체만을 사랑하며 거기서 아름다운 언어를 낳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한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육체의 아름다움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할 때, 모든 육체의 아름다움이 결국 동일한 것임을 믿지 않는다면 무척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육체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여 그것이 지극히 적은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그 육체에 대한 강렬한 정욕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의 아름다움이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리하여 누구든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비록 용모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할지라도 만족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를 사랑하고 보살펴 주며, 자식을 낳고 또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해줄 만한 이야깃거리를 찾아 이야기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그는 더욱 우리의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게 되고 또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 하나의 연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되므로 육체의 아름다움이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기준이 설정된 후에 그는 새로이 지식의 아름다움을 탐지하기 위해 지식으로 접어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 그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의 다양한 형태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단지 하나에만 봉사하지 않게 됩니다. ... 오히려 그는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나아가 그 바다를 바라보는 가운데 풍부하게 사랑하는 마음에서 많고 아름답고 숭고한 연설과 사상을 낳아 마침내 이런 가운데 힘을 얻고 성장하여 하나의 지식, 즉 이제 내가 말하려는 바와 같은 아름다움에 관한 지식을 터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올바른 순서로 바라보면서 여기까지 사랑의 길로 인도되어 온 사람은 이제 그 궁극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데, 갑자기 그는 놀라운 본성을 지닌 하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오오 소크라테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모든 수고를 했던 것이지요. 첫째로, 그것은 영원한 것이요 생멸하는 것이 아니요 증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그것은 어떤 곳에서는 아름답고 어떤 곳에서는 추한 그런 것이 아니요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한 것도 아니지요. ... 오히려 그것은 독립 의존하면서 영원히 단 하나의 존재로 있을 것입니다. 한편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확실한 방법으로 이 아름다움에 참여합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소년을 올바르게 사랑한다면 이 여러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저 아름다움에로 올라가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는 마침내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또는 남의 인도를 받아 사랑의 오묘한 진리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이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에서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해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에서 두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두 아름다운 육체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에서 아름다운 일과 활동으로 나아가고, 그 활동에서 아름다운 학문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 자체만을 아는 것인 완전한 학문으로 나아가, 마침내 아름다움의 완성체를 알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아니 여기에서만, 아름다움 자체를 바라봄으로써만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토닉 러브"의 심오한 의미는 분명해졌다. 플라토닉 러브는 단순히 관능적인 욕구를 억눌러 억압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체적 욕구에 제한된 권한만을 인정해 준다. 그 사랑은 이 욕구를 고양된 형태의 욕구로 넘쳐 들어가게 한다. 육체의 아름다움, 영혼, 품행, 그리고 인식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얻으려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해하는 에로스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그것에 관여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형을 추구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의 이데아를 향한 지향이다. 이렇게 해서 "플라토닉 러브"가 플라톤의 위대한 사상의 업적으로서 서양 정신의 의식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이데아에 대한 그의 사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물론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에 도달하게 되는 여정은 우선은 철학적인 도약의 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환멸과 또한 어느 곳에서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는 도시 국가의 몰락에 대한 환멸을 통해서였다. 젊은 귀족 플라톤은 석수장이 소크라테스를 만나게 된 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갖고 있던 비극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정의에 대한 물음에 부딪쳐 정열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플라톤은 불의와 타락이 곳곳에 성행하고 있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장 분명하게 이것을 경험한 것은 덕과 정의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도 관심을 쏟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국가 존재가 붕괴되는 마당에서 최고의 책임감을 지닌 사람마저도 죽어야 한다면, 국가의 존재는 그 뿌리에서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플라톤은 결론지었다. 이 경우 국가의 기초에 대한 철저한 반성 이외의 다른 구제책이란 없다. 다시 말해 정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 이외의 다른 구제책이란 없다. 플라톤은 이러한 통찰로 철학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정의 그 자체에서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며, 또한 다른 형태의 올바른 행위들, 즉 용기, 신중함, 경건함, 지혜 등은 어떠한가를 묻는다. 플라톤은 그러한 고찰에서 인간은 정의가 무엇이며 그 밖의 다른 덕들이 무엇인지 원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안에 이 모든 올바른 행동의 원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원형은 인간의 행동을 규정할 수 있고 또 규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어떻게 이 원형을 추적해 나가는지는 다음의 두 고찰이 도움을 준다. 어떤 행동은 정의로운 데 비해, 또 다른 어떤 행동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 더 나아가 어떤 행동이 다른 행동보다 더 정의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의의 원형 그 자체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과 이데아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오직 인간적인 행동의 영역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나무의 원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가 무엇인지 안다. 전체 현실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 안에 존재자의 원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원형을 보고 인간은 이것은 나무이고 저것은 동물이며, 이것은 나쁜 행동이고 저것은 선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모든 실재가 그 실재의 원형에 참여하는 한 그리고 그 원형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하는 한, 그것은 현재의 실재 자체임을 의미한다. 이래서 나무는 가능한 한도 내에 최대한으로 나무가 되려 하고, 인간은 가능한 한 인간이 되려 하고, 정의는 가능한 한 정의가 되려 한다. 모든 것은 현실적으로 있는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데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이렇듯 플라톤은 부단히 완전함을 갈망하는 장소이며 이데아를 사모하는 에로스의 장소로서의 세계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얻어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플라톤은 고유한 존재자는 사물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은 다만 원형에 참여함으로써만 사물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원형, 이데아는 원초적인 실재가 된다. 사물은 단순히 이데아의 복제품이며 열등한 정도의 실재성을 띠고 있다. 실재 안에 있는 본래적인 실재는 깊은 곳에 있는 실재성이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더 추가된다. 사물이 덧없이 소멸한다는 사실, 즉 사물은 생성되고 변화하고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은 그 사물의 존재 방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의의 이데아는 항상 그것 자체로서 남아 있고, 나무의 이데아도 마찬가지이다. 디오티마는 이렇게 말했다. 저 아름다운 것 그 자체, 즉 아름다움의 원형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고 증가되지도 감소되지도 않으며 그대로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초의 실재는 모든 무상함에서 벗어나 있다. 전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추구에, 모든 에로스에 이 점이 해당된다. 무상한 것은 영원성을 추구한다. 플라톤이 볼 때 바로 이것이 실재성이 안고 있는 신비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통찰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원형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유래하는지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가 실재를 인식할 때, 이 원형을 항상 이미 눈앞에 갖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인간은 원형을 그 스스로 만들지도 기획하지도 않는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이 원형을 그의 시간적인 현존재에서 얻는 경험에서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의로운 행동을 정의로운 것으로서, 한 그루의 나무를 나무로서 경험할 수 있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정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무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미 정의와 나무의 원형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앎은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새로운 물음이 생겨난다. 플라톤은 그것은 인간의 시간적 실존에 앞서, 즉 인간이 탄생 이전에 영위해 왔던 그 삶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답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떤 한 사물을 인식할 때 그리고 이 경우에 그에게 그 사물의 원형이 한순간 반짝 빛난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그는 그의 시간적 현존재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는, 그가 근원적으로 본 적이 있는 그 원형을 상기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다시 상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데아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영혼의 선재성이라는 가정으로 이끌려지며, 거기서부터 영혼의 불사 불멸의 확실성이라는 가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이 그 삶(존재) 속에서 이데아를 직접 보았다는 시간적 실존 이전의 인간의 현존함에 대해 플라톤은 엄청난 비유를 끌어들여 인상깊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어떻게 영혼이 천궁 위에서 신들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며, 이때 거기서 모든 실재하는 것의 원형을 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늘의 위대한 군주인 제우스가 맨 처음으로 그의 날개 달린 수레를 몰면서 출발한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 정돈하고 모든 것을 배려한다 그의 뒤를 신들과 다이몬의 무리가 따른다." 그들의 뒤를 인간의 영혼도 따른다. 한 사람의 마부가 두 마리의 말을 끌면서 따른다. "그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그들은 그 꼭대기를 넘어서 천궁의 등성이에 들어선다. 그들이 그곳에 멈추어 섰을 때, 하늘의 순환 운동이 그들을 둘러싼다 그리고 그들은 천궁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본다." 자기에게 알맞은 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그러한 영혼의 정신은 "가끔씩 존재를 본다. 정신은 참된 것을 사랑하고 바라보며, 하늘의 순환 운동이 끝이 나고 시작한 그 자리에 돌아올 때까지 참된 것으로 양식을 삼아 그것을 향유한다. 순환 운동 중에 정신은 정의 그 자체를 관찰하고, 신중함을 관찰하고, 인식을 관찰하고 ... 그 밖의 다른 참된 존재자를 관찰하고 그것으로 상쾌해 한다. 그 다음 영혼은 천궁의 밑부분에 다시 도달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부는 말들을 구유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암므로시우스(신들의 양식)를 던져 주고, 또 넥타(신들의 음료) 를 마시게 해준다."
인간에게 그의 영혼의 선재 중에 허락되었던 이 관조는, 그에게 그의 일생을 거쳐 꺼지지 않는 동경으로 남는다. 인간은 그가 유래한 그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바로 이 열망 때문에 인간은 감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되려 하고, 이 지상의 생활에서 사물을 바라보면서 이미 이데아 자체의 관조에 이르려고 애쓰는 노력이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아름다운 것은 하나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플라톤은 이것에 대해 대화편 (파이드로슨)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참된 것(진리)을 상기할 때 그는 날개를 달게 되며, 그렇게 날개를 달고 그가 날아오른 곳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그는 새처럼 아래에 있는 것은 등한시한 채 위만 바라본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 중에도 가장 멋있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모든 개개의 영혼이 그 최초의 시작에 참된 존재를 관조하였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개의 영혼이 사물을 보고 그러한 것을 다시 상기하는 일이 모두에게 쉽지는 않다. 그 당시 그곳에서 아주 짧게 관찰한 영혼이나 또는 추락할 때 불행한 사고를 당한 까닭에 이제는 옳지 못하게도 불의하고만 교류하는 영혼 그리고 그곳에서 관조하였던 성스러움을 잊어버리는 그러한 영혼에게는 쉽지가 않다. 오직 소수의 영혼에게만 충분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혼들이 그곳에서 보았던 것과 유사한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이 지상의 생활에서 벌써 본질적인 것을 다시 순수하게 직관하게끔 되는 바로 그 환상적인 도정이 플라톤에게는 곧 철학함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철학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신들이 죽어야 할 종족에게 희사한 또는 희사하게 될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훌륭한 선물이다." 철학은 이데아로 향하는 에로스의 가장 완전한 완성이다. 철학은 인간을 일상적인 생활에서 낚아채 그를 원형에로 몰고 가기 때문에 그것은 광기와 비슷하다. 플라톤은 이러한 종류의 광기에 대해, 그 광기는 어떠한 사려깊은 지성보다도 더 멋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려는 인간 자신에게 그 근원을 두는 데 반해 이데아로 향하는 에로스의 광기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아가 플라톤은 마침내 에로스는 본질상 철학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는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 만일 에로스가 로직 아름다운 것만을 뒤좇아 가는 것이라면, 바로 이 지혜는 본질적인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반드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철학함을 의미한다. 이렇듯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자에게도 해당된다.
"본래 철학자는 존재를 위해 노력한다. 철학자는 사람들이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그 많은 개별적인 것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철학자는 오히려 앞으로 계속 나아가서 존재하는 그 모든 개개의 본성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실망하지 않고 에로스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 그가 참다운 존재자에 다가가 그 존재자에 자신을 결부시켜 이성과 진리를 얻게 되면 바로 그때 그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는 참된 삶을 누리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토닉 러브"와 연관이 있다. "플라토닉 러브"는 철학하는 사람의 정열이고, 그 정열이 없이는 영원을 향한 진정한 추구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의 철학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철학이라는 루소의 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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