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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51호
2012.3.2 (음 2.1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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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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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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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만 미개한 민족은 별문제로 치고, 거의가 몇 권의 책으로 지배되어 왔다.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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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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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다 / 담그다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은 날마다 교실을 순시했다. 공책에 쓴 글씨가 반듯한지 검사하고, 느닷없는 질문으로 학생들의 발표력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김장철의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은 글월 하나를 보여주고 학생들에게 뜻을 구별하고 발음해보라 주문했던 적이 있다. 제시 문장은 ‘김치를 담그다(담다)’였다. ‘담그다’를 ‘담다’와 헷갈리거나 [당그다]로 잘못 발음했던 어린이는 눈물 쏙 빠지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바른 표현과 발음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얼마 전 한 일간지 주말판에 ‘빈티지 인삼주 빚는 교수’ 이야기가 실렸다. “DJ 서거날 담고(담그고), 결혼 20주년에 맞춰 담고(담그고)…, 술은 담은(담근) 날과…, 누군가 그런 술을 담아(담가)뒀다는 것…”의 표현은 괄호 안의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김치·술·장·젓갈 따위를 만드는 재료를 버무리거나 물을 부어서, 익거나 삭도록 그릇에 넣어 두다’(표준국어대사전)는 ‘담그다’이다. ‘어떤 물건을 그릇 따위에 넣다’는 뜻인 ‘담다’가 제자리 아닌 곳에 잘못 쓰인 이 기사는 내용의 유익함과 재미를 떠나 큰 아쉬움을 남겼다.
영국 방송 <비비시>(BBC) 편집자에게 “방송 문장의 품질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비비시 잉글리시’로 유명한 곳이니 ‘심의와 교열부서에서 오류를 걸러내고 바른 문장으로 다듬는다’는 게 정답? 아니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반문하며 “방송의 기본은 문장이다. 문장 구성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저널리스트가 되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어그러진 문장을 쓰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라 했던 한 언론인의 말도 떠오른다. 어긋난 문장구성과 맞춤법 오류는 기사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사실 여부를 따지는 ‘팩트체킹’이 기사 작성의 기본 줄기라면 문장을 바루는 ‘스펠체킹’은 그 뿌리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마탄의 사수
관악과 현악, 타악의 연주가 어우러진 베토벤과 브람스의 연주는 만듦새 좋은 정밀기계를 만지작거리는 만족감을 주었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이은 앙코르 곡도 훌륭했다. 엊그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 연주가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이 연주회를 마련한 신용카드회사가 내건 공연 제목은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 정명훈’. 대부분의 언론이 주최사가 내세운 표기를 따랐다. 아쉬운 대목이다. 주한 네덜란드대사관 관계자는 “‘콘서트홀’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발음은 ‘콘세흐트허바우’처럼 들릴 수 있지만 대한민국 어문규정에 따라 ‘콘세르트헤바우’로 적는다”고 밝혔다. 외래어표기법의 ‘네덜란드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Concertgebouw’는 ‘콘세르트헤바우’가 된다.
‘로열콘세르트헤바우’가 들려준 앙코르 곡은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전주곡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한 이에게 “‘마탄의 사수’는 ‘마법 탄환을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가” 물었다. 머뭇거리듯 아주 짧게 숨을 고른 그는 뜻밖의 답을 했다. “원제목인 ‘데어 프라이쉬츠’(Der Freischütz)는 ‘자유의 사수’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가 머뭇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유의 사수(自由-射手): 베버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 중세 독일의 전설에서 소재를 딴 낭만파 음악의 선구적 작품…’(표준국어대사전)처럼 ‘자유-’로 번역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마탄’, 그러니까 ‘마법의 총알’을 뜻하는 ‘디 프라이쿠겔’(Die Freikugel)에서 온 것으로 봐야 한다. 이 낱말의 접두사는 ‘자유’(frei-)이니 ‘자유롭게 날아가서 명중시키는 총알’이 되고, ‘백발백중하는 전설 속의 마법 총알’이 나오는 작품 줄거리를 바탕으로 보면 바른 번역은 ‘마(법이 걸린) 탄(환을 쏘는) 사수’라 하는 게 맞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표제어 ‘자유의 사수’는 그래서 재고해야 한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의사와 열사
‘의사와 열사의 차이는 무엇인가.’ 삼일절을 앞둔 어느 날 강의실에서 만난 이들에게 물었다. 시원하게 바로 대답한 이는 없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기억 조각을 짜맞추어 내린 결론은 ‘맨몸으로 저항하면 열사, 무력으로 항거하면 의사’였다. 강의를 마친 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열사(烈士):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의사(義士): 의로운 지사(志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국가보훈처가 2005년 10월에 발표한 자료에서는 “국가보훈처에서는 의사·열사를 구분하지 않고 ‘독립유공자’로 표기하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로 구분하고 있으며 법률적 용어는 아님”이라고 명시하면서 ‘(통용되는 기준은 아니지만) 의사와 열사를 민간이나 학계에서 통념적으로 구분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밝힌 의사와 열사의 차이는 이렇다. 의사는 ‘성패에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무력으로써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한 사람’으로 대표적 인물은 안중근 의사(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봉창 의사(일본 천황에게 폭탄 던짐) 등이며, 열사는 ‘직접적인 행동 대신 강력한 항의의 뜻을 자결로써 자신의 굳은 의지를 내보인 사람’으로 민영환 열사(을사늑약 체결반대 자결), 이준 열사(헤이그 밀사로 독립의지 표명 자결) 등이 대표적이라는 것이다.
은정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역사용어 바로쓰기>에서 “1980년대 이후 민주화·노동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이들을 ‘열사’라 호명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운동세력 스스로였다”고 말했다. 죽음으로 대의를 드러낸 이들을 ‘열사’로 일컫는 것은 특정 집단만의 일은 아니다. ‘독립유공자’, ‘순국선열’, ‘애국지사’를 뽑아 기리는 일도 정부의 몫만은 아닐 것이다. 삼일절을 보내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스러진 이들을 어떻게 부르며 우러를 것인가 곱씹어본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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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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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워리 비 해피 - 권혁웅
1. 워리는 덩치가 산만한 황구였죠 우리집 대문에 줄을 매서 키웠는데 지 꼴을 생각 못하고 아무나 보고 반갑다고 꼬리치며 달려드는 통에 동네 아줌마와 애들, 여럿 넘어갔습니다 이 피멍 좀봐, 아까징끼 값 내놔 그래서 나한테 엄청 맞았지만 우리 워리, 꼬리만 흔들며 그 매, 몸으로 다 받아냈습니다 한번은 장염에 걸려 누렇고 물큰한 똥을 지 몸만큼 쏟아냈지요 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한성여고 수위를 하는 주인집 아저씨, 수육을 산처럼 쌓아놓고 금강야차처럼 우적우적 씹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씹을 듯했습니다
2. 누나는 복실이를 해피라고 불렀습니다 해피야, 너는 워리처럼 되지 마 세달만에 동생을 쥐약에 넘겨주었으니 우리 해피 두배로 행복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어느 날 동네 아저씨들, 장작 몇 개 집어들고는 해피를 뒷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왈왈 짖으며 용감한 우리 해피, 뒷산을 타넘어 내게로 도망왔지요 찾아온 아저씨들, 나일론 끈을 내게 건네며 말했습니다 해피가 네 말을 잘 들으니 이 끈을 목에 걸어주지 않겠니? 착한 나, 내게 꼬리치는 착한 해피 목에 줄을 걸어줬지요 지금도 내손모가지는 팔뚝에 얌전히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덟살, 해피가 두살 때 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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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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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 노인숙
눈부신 저 햇살과 서늘한 나무 그늘 해진 뒤 날개 펴서 어둠 속 펼치려고 알에서 번데기까지 철에 맞춰 허물 벗어
갈라진 잔등에서 하얀 날개 돋아나고 내민 배 벌린 날개 온몸을 요동치며 한여름 꼭 울어야 견딜 쓰라린 울음소리
겹친 두 날개 사이 초록이 비껴가는 뜨거운 짝짓기가 쓸쓸한 한낮이면 씁쓸한 수액이 흐르는 소요산 기슭마다
지잉-맹 지잉-맹 지잉-맹 카타 카타 해 지기 전 한낮을 목청껏 불러놓고 삼생의 짓푸른 원업 땡볕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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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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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시간 - 김용택
교장선생님은 춥지도 않으신가 보다. 오늘도 조회 시간에 오래오래 말씀하신다. 좌특 통행 해라. 수상한 사람 신고해라. 의식개혁 하자. 자연보호 해라. 바람을 씽씽 불고 손발이 시려워 죽겠는데 차렷 자세로 우리는 움직일 수가 없다. 우리가 조금만 움직이면 차렷! 열중셧! 하시며 내가 일제 시대 학교 다닐 때는 이보다 더 추울 때도 팬티만 입고 어 있었다고 하신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이 시렵고 발이 시렵고 귀가 시렵고 재미도 없다. 선생님들도 추우신지 웅크리고 서서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신다. 선생님 발 밑 땅이 녹아 있고 선생님 코가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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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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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8장 가정의 즐거움
4. 중국인의 가정이상
저 창세기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시 고쳐 써야 한다고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한다. 중국 소설 <홍루몽>을 보면 주인공인 귀공자 가보옥 소년은 다정다감하고 나약한 소년으로 매우 여자 친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사촌누이들에게 몹시 마음을 불태우지만, 자기가 아직 나이 어린 소년임을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물로 만들어진 것이고, 남자는 흙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모두 사랑스럽고 정숙하고 영리한 데 비해 그 자신이나 그의 남자 친구들은 모두 못생기고, 머리가 나쁘고, 성미가 괴팍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쓴 작자가 이 가보옥 소년이어서 그가 말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면 창세기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은 한줌의 흙을 집어들어 사람의 모습으로 빚은 다음 콧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고 했다. 이라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담은 이내 부서지기 시작하여 끝내는 가루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물을 길어다가 흙을 개었다. 아담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이브라고 불리어진 것이었다. 즉 이브라는 이름의 물을 몸 속에 간직하게 됨으로써 아담은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결혼이라는 것의 성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성은 물이요, 남성은 흙이니 물은 흙 속에 스며들어 형태를 이루게 된다. 또 흙은 물을 머금고 물에게 자기의 물질을 제공하고, 물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서, 물의 물다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인의 사회와 중국인의 생활은 가족 제도 위에 조직되어 있다. 이 제도가 모든 중국인의 생활 형태를 결정하고 또한 이에 빛을 주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이상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와 반대로 외국인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가족 제도를 온갖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기본이라고 했으며, 이에 철학적인 기초를 세워준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온갖 인간 관계의 기본으로서 부부관계나 효도, 조상의 무덤에 해마다 성묘하는 일, 조상 숭배 또는 가묘의 제도 따위를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중국인의 조상 숭배는 이미 몇 사람의 논자에 의해 종교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나도 우선 이 설이 거의 옳다고 믿고 있다. 그 가운데서 종교적이 아닌 점은 중국의 조상숭배가 초자연적인 요소를 몰아내고, 또는 그것을 몹시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생각한다면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상 숭배는 기독교, 불교, 회교이 있어서의 신불에 대한 신앙과 병존할 수 있다. 조상 숭배 의식은 종교의 모습을 취하지만 생각컨대 온갖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상징과 형식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상의 이름을 새긴 한 자 너댓치의 네모진 나무로 만든 위패에 중국인이 바치는 존경은 영국의 우표 딱지에 임금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에 비하여 보다 종교적이라고도, 보다 종교적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위패도 우표나 같은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러한 조상의 영혼은 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으로 생각되고 있어, 이 세상에서 늙었을 때 자손들이 보살피고 받들었듯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보살피고 받드는 것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하여 무언가 달라고도 하지 않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고, 또한 소중히 받드는 쪽과 소중한 대접을 받는 편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신불의 은혜로 얻어지는 공덕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둘째로는, 이 조상을 소중히 받드는 식전은 다만 그럴 만한 일정한 날에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세상을 떠난 조상이 살았을 때 가족들에게 베풀어 준 일을 추억하고 기뻐하며 고인에 대한 경건한 추상에 잠기는 하나의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고작해야 고인 생전의 생일 잔치 대신쯤 되는 것이지만 그 근본 정신에 있어서는 어버이의 생일 축하나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머니 날>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가족 제도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하나하나의 개인주의 이상과는 철저하게 대립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완전한 고립 생활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러한 하나의 개인이라는 사고 방식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다. 여기에 한 개인이 있다고 할 경우, 아들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같은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추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의 머리는 생물답게 사물을 생각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간의 생물적인 관계를 맨 먼저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인간 생활의 자연적인 생물 단위가 되고 결혼 그 자체도 하나의 가족 안에서 생기는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며, 개인적인 사건은 아닌 것이다. 내가 먼저 <내 나라 내 국민>에서 이와 같은 가족지상주의가 가져오는 폐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생각컨대 그 가족지상주의는 확대된 이기주의 형태가 되어 나라에 손해를 끼치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은 인간 사회의 온갖 제도에 모두 있는 것이며 중국의 가족제도에 있다면, 서양의 개인주의에도 국가주의에도 있을 것으로, 모두가 인간성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보다는 위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가족보다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된 일은 없다. 왜냐하면 가족을 떠나서는 인간은 참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 있어서의 개인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하여 중국에는 가족 관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은 하나의 개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커다란 가족 생활의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유전설인 것이다. 인류 생활을 전체로서 생각하면 여러 가지 종족으로 구성된 생명의 흐름이라고 생각되지만, 인간이 직접 사물을 느끼고 직접 사물을 보는 것은 가족이라는 생명의 흐름에서인 것이다. 중국인도 서양인도 똑같이 말하는데, 그 말에 의하면 그 <가족의 나무>라는 말이 있으며, 인간의 일생은 모두 이 나무의 한 마디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지는 큰 줄기에 붙어서 무성해지고 가지의 힘에 의하여 본 나무를 더욱 무성하게 하여 영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아무래도 하나의 발전 또는 계속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며,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모두 가족사 가운데의 한 구실이나 한 대목을 맡아 출연하여 가족 전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가족 생활에도 치욕이나 영광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가족 생활에는 매우 심원한 변화와 명암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어린 시절, 청춘 시절, 성년 시절, 그리고 노년을 이 가족 안에서 보낸다. 우선 태어나면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어 가족들을 보살피고, 늙게 되면 또다시 가족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다. 우선 가족들에게 복종하고 가족들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하여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복종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경 속에 여성들이 있으면 더욱 생활의 묘미는 늘어간다. 몇 대나 계속되는 이같은 가족 생활에 있어서 여성은 장식물도 장난감도 아니며 또한 본질적으로 아내의 자격으로 끼어드는 것도 아니다. 여성은 가족이라는 나무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인 것이며, 이같은 여성이 있음으로써 가족 생활이 오래오래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족의 하나하나의 나뭇가지가 얼마나 강해지는가 하는 것은 그 집에 시집온 여성과, 그 며느리가 가족의 후손에게 주는 핏줄이 어떤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다. 접목하는 정원사가 좋은 종류의 나무를 고르려고 애쓰는 것처럼, 현명한 가장은 혈통이 좋은 며느리를 고르는 데 어지간히 신중하다.
누구나 상당히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일이지만 남자의 일생, 특히 그 가정 생활은 아내가 어떤가에 따라 어떻게도 되는 것이어서, 장래의 가족 전체의 성격은 그녀에 의하여 결정이 되는 것이다. 손자의 건강이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받게 될 가정 교육이 어떠냐 하는 것은(중국에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완전한 며느리 자신이 받아온 가정 교육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막연한 형태 없는 우생제도이며, 유전의 신념에 의하여 흔히 가문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데, 어떠한 경우라도 부모나 조부모의 눈으로 보아서 며느리가 건강하고 아름답고 좋은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났기를 바라는 심정이 표준이 되는 것이다. 대체로 부지런하여 일 잘하고 예의 범절이 좋아야 한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에 맞는 가정 교육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유럽인이 좋은 가문에서 며느리를 데려 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때로는 데려온 며느리가 예의 범절도 모르는 보잘것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며느리의 친정 부모들의 가정 교육이 나빴음을 은근히 원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딸이 시집가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예의범절을 잘 가르쳐야 할 의무는 오로지 친정 부모에게 있는 것이며, 이를테면 딸이 시집을 가서 음식을 만드는 법도 모르고, 설날에 먹는 맛있는 푸딩을 만드는 방법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큰일인 것이다.
중국의 가족 제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인생유전에 따르면 영생 불사라는 것은 거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작은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누구나 다 정말 자기가 어린이가 되어 이 세상에 또다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어린의의 손을 만져 보고 그 뺨을 꼬집어 보고는 자기 자신의 혈육이 거기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자기의 생애는 <가족의 나무>의 한 마디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흘러가는 가족이라는 큰 생명의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음으로써 기꺼이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나 딸들이 어엿하게 결혼하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 부모들이 몹시 보고 싶어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죽은 뒤에 묻힐 묏자리나 훌륭한 관을 고르거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중대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이나 딸들이 어떤 모양의 처녀와 젊은이들과 결혼할 것인가 하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자식들이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며느리나 사위가 매우 만족하고 있는 것 같으면 아무런 여한도 없이 눈을 감고 기꺼이 죽음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결과 무슨 일에나 깊이가 있는 관찰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생은 개인이 나고 죽는 것과 함께 나고 죽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센터나 퀘터백이 패했더라도 경기는 계속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성패는 또다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중국인이 목표로 삼는 생활 이상은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살며, 또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갖는 데 있다. 중국의 관리는 관직을 떠남에 있어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아들이 있으니 모든 것이 흐뭇하고 관직에서 떠나니 몸이 가볍도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가장 나쁜 비운은 아마도 <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도 없고, 가족의 재산조차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어리석은 아들을 갖는 일일 것이다. 백만 장자인 아버지도 방탕한 아들을 갖게 되면 일생 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은 재산도 이미 다 써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들이 실패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즐거움을 장래에 걸고 있는 과부는 다섯 살쯤 된 훌륭한 아들만 있으면, 빈곤, 굴종, 때로는 박해까지도 몇 년이고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다. 중국의 역사는 문헌을 죽 훑어보면 온갖 궁핍과 박해를 견디어 가면서 자기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 한 집안을 이루게 되기를 기다리거나, 또 어떤 경우에는 훌륭한 시민으로 출세하는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는 많은 과부를 볼 수가 있다. 과부들이 대개는 남자보다, 현실적인 여성 특유의 감각으로 어린이들에게 충분한 성품 교육이나 도덕 교육을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때때로 생각하게 되는데 아버지라는 것은 어린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과부란 맨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기에 그 웃음이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가족 제도에서 인생을 이런 모양으로 안배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의 생물적인 여러 면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참으로 좋은 일이다. 공자가 주로 말하려고 한 것도 결국 이것이다. 공자도 생각했듯이 위정자의 궁극적인 이상은 이상스럽게도 생물적인 것이었다.
인을 이루면 늙어서는 화평을 즐기고 젊어서는 정절을 배워, 안에는 원녀가 없고, 밖에는 광부가 없다.
이것이 공자의 말 가운데 가끔 나오는 말안데, 단순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의 최종 목표를 나타낸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의의는 자못 큰 바가 있다. 이것은 대경, 즉 <본능의 충족>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주의적인 철학이다. 공자는 인간이 지닌 온갖 본능이 우선 나무랄 데 없이 충족되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만족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정신적인 평화만이 참된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이상이다. 대개 그것은 인간성에 깊이 뿌리를 박고 흔들리지 않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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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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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9. 인식과 관심 Erkenntnis und Intresse(1968) - 하버마스 Jurgen Habermas(1929~)
라디오 앞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경험하다 - 김재현 (경남대학교 교수)
1920년대 말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의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운동은 호르크하이머(1895-1973), 아도르노(1903-69), 마르쿠제(1898-1979)등이 대표한다. 이들은 더 나은 사회,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추구라는 이념으로 모인 사람들로서, 루카치를 통해 마르크스의 초기 사상인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고 인간 해방을 목표로 하면서 현대 사회를 총체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혁명 후 전체주의로 치닫는 소련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가 등장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약했는데,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50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사회연구소'를 재건하여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마르크제는 미국에 남아 대학교수 생활을 계속한다. 그뒤 마르쿠제가 60년대 반체제학생운동의 사상적 지도자가 되면서 이 학파에 대한 지식인층의 관심과 기대가 커졌다. 비판 이론은 현재까지도 철학, 사회학, 정치학, 미학, 문화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비판자이자 계승자로서 비판이론 2세대의 대표자이다.
하버마스는 1929년 비교적 유복한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쾰른근처 굼머스바하에서 성장했다. 파시즘의 등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 시절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나치 소년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그는 파시즘의 몰락을 체험했으며 뉘른베르크의 재판(전쟁범죄자 재판)으로 상징되는 당시 정치혼란파, 2차 대전 뒤에 나온, 강제 수용소와 대학살에 대한기록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정치 의식을 갖게 되었다. "열대여섯 살쯤 됐을때 나는 라디오 앞에 앉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토론되는 것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무서움에 충격을 받는 대신 재판의 정당성, 절차문제, 사법권의 문제를 논박하기 시작했을떄, 그것은 내게 첫번째 단절의 경험이었다. 내가 많은 내 부모들처럼 그만큼 집단적으로 일어난 비인간적 사실들(집단적 정신착란)을 회피하지 않은 것은 단지 내가 그 떄 감정적으로 매우 예민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거와의 단절을 직접 겪은 것은 어린 그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박정희때부터 노태우, 전두환의 군사독재과정에서 일어난 황당한 사건들, 예를 들어 광주학살, 평화의 댐 사기 등에 대한 당시 해석과 오늘날의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데 독일의 경우는 이런 비교가 훨씬 극심했다. 그래서 전후 지식인집단에서는 왜 독일 사람들은 이 엄청난 집단적 광란상태에 더 강하게 저항하지 못했는가, 칸트부터 마르크스에 이르는 독일문화는 왜 이런 야만적 현상에 무기력했는가, 독일 문화와 전통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같은 문제들이 중요하게 제기 되었다. 그 뒤 하버마스는 독일사상과 문화를 다시 생각하면서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뿐 아니라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에게 이성, 자유, 정의는 단순히 연구해야 할 이론적 주제만이 아니라 실현해야 할, 그리고 이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참여해야 할 실천적 과제였으며 이는 곧 독일 문화의 편협성과 지방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전후 '탈나치화(나치가거청산)'의 혼란스런 실패, 즉 현실 정치에 대한 실망이 그에게 좌파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하버마스는 대학시절 루카치를 통해 '청년 마르크스'를 알게 되었고 특히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충격적인 지적 감동을 받았다. 괴팅겐, 본,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 문학, 역사학뿐만 아니라 경제학, 심리학 등을 공부한 뒤 저널리스트로 잠깐 활동하다가 1956년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아도르노의 조교가 되면서 비판 이론의 정통계승자로서 길을 가기 시작한다. 1961년 부터 부터 1964년까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을, 1964년부터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정교수로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하버마스는 60년대 초 서독 사회학회가 주관한 '실증주의 논쟁'에 참여하여 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변증법과 비판이론을 옹호하면서 하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실증주의 비판과 비판이론옹호는 사회 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60년대말 유럽사회 특히 서독은 복지국가 체제가 확립된 상태였으며, 노동자 계급은 체제 저항세력이기보다는 체제의 번영과 안정에 이바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에 기초한 과학, 정보, 기술의 발달이었고 과학과 기술은 곧 체제 유지의 합리적 수단으로서 정치적으로는 기술 관료조직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실증주의 비판은 사회 비판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노동자 계급이 지닌 혁명의 잠재력이 복지사회가 정착함에 따라 억제 희석 완화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해방의 잠재력으로 그가 주목한 세력은 비판적 지식을 갖춘 집단이었다. 교육제도가 혁명을 주도할수는 없지만 해방을 향한 감수성과 잠재력을생산해 내고 사회에 전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60년대 후반 독일 대학에서 '신좌파(뉴레프트)'가 나타났을때 하버마스는 신좌파 운동이 대변하는 철저한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독일 학생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 추앙받았지만, 학생운동이 급진하되면서 현실 진단과 대안 처방에 점점 사이가 벌어져 서로 대결하는 사태가 생겼다. 마침내 급진파 학생들은 비판 이론의 본거지인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조사 연구소'에 침입했고 이에 경찰이 개입하여 사태가 확산되자,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비난과 갈등 속에서 얼마 뒤에 사망했고 하버마스는 '좌파파시즘'의 위험을 공개 비판했다. 하버마스는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교수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뮌헨 근처 스타른베르크에 있는'과학-기술세계의 삶의 조건을 연구하기 위한 막스 플랑크 연구소'로 옮겼다. 1971년부터 1983년까지 막스 플랑크 연구소 소장을 한뒤 1983년에 다시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철학 교수로 취임, 현재 64세로 아직 강의를 하고 있다. 80년대 중반에 보수적 역사학자들이 히틀러 정권(제3제국)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자 이런 맹목적 민족주의 경향을 단호하게 비판하여 일부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독일 공산당의 대변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공산주의라기보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고 여기서 나오는 합의로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급진적 참여민주주의로 볼수 있다. 그는 사회 민주주의가 한때 가진 유토피아적 에너지가 소멸되었다고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사회민주당에 투표할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독일 통일 후 최근의 '네오 파시즘'또는 '신인종주의'경향에 대해서도 '이성'에 기초한, 의사소통과 합의에 기초한 휴머니즘과 사회 발전을 강조하면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하튼 그는 현대 독일이 배출한 가장 저명한 사회철학자, 사회사상가로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학생과 정치'(1961)'공론의 구조변화'(1062)'이론과실천'(1063)'사회과학의 논리'(1967)'인식과 관심'(1968)'이데올로기로서 기술과 과학'(1968)'후기자본주의의 정당성문제'(1973)'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1976)'의사소통행위의 이론1, 2'(1981)'현대에 대한 철학적 논의'(1985)'사실성과 가치'(1992)등이 있다.
인식비판은 오직 사회 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
하버마스의 중요한 관심은 해방된 사회 속에서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이런 '해방된 사회'의 실현에 우리의 지식과 학문이 어떻게 관련되고 그 자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이론과 실천을 어떻게 통일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때문에 인간의 삶과 여러 지식형태(과학)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 내고 더 나아가 '인간해방'을 위한 학문을 세우려 한다. 인식비판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인식론에서 '관심'의 개념을 근본 범주로 설정함으로써 순수지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깨뜨리고 인식의 사회적 연관성을 밝혔다. 여기서 '관심'이란 "무엇을 위해서 알려고 한다."는 '무엇을 위해서'라는 관심이다. 우리는 흥미, 이해, 관게, 지배, 이해, 해방등을 위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고 그 결과 여러 종류의 학문이 성립했다고 볼수 있다. 그는 '인심과 관심'(1965.6.28 프랑크푸르트 대학 취임 강연)에서 인간이 가지는 세 가지관심을 구분한다. 첫째는 환경 속에서 자연을 조절하고 지배하려는 '기술적 관심'이고, 둘째는 일상적 삶과 전통, 타인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 관심'이며, 셋째는 왜곡된 의사소통과 억압된 권력에서 자유로워지려는 '해방적 관심'이다. 세번째 관심은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자기를 반성하며,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결정하려는 인간의 능력에 뿌리를 둔다. 첫번째 관심에 의해 분석적이고 경험적 방법을 활용하는 실증주의적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탐구된다. 이는 자연과 사회 현실을 지배하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관심 즉 자연 통제와 사회공학에 대한 관심에 따라 이루어지며 '노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두번째 관시에 의해 역사적 지식과 해석학적 지식이 탐구된다고 볼수 있는데 하버마스가 이를 실천적 관심이라고 하는 이유는 '언어'를 통한 '이해'(의미이해)라는 인식작용이 우리의 역사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변혁한다는 마르크스적 의미에서가 아니고 의사전달의 상호주관성을 유지하고 확대한다는 일상생활의 삶과 실용성을 가리킨다. 세번째 관심에 의해 비판이론(비판적 사회과학)이 탐구된다고 볼 수 있다. 하버마스는 기존의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을 '행위과학'으로 구분하고 이들이 경험 분석적 자연과학처럼 사회의 법칙적 지식을 탐구하지만 '비판적 사회과학'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데올로기 비판'과 함께 '해방적 관심'을 추구한다고 한다. 즉 이 비판적 과학은 인간은 모든 '지배'와 강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인간이 자율성과 책임을 갖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이 세번째 관심이 철학이 '비판'으로서 곧 비판적 사회과학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다. 철학의 역할은 인간역사에서 대화를 끊임없이 왜곡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폭력의 발자취를 이제까지 논의한 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과의 관계 2. 과학 3. 관심 4. 인식 5. 사회적매개 순 1. 자연 2. 자연과학 3. 기술적관심 4. 기술적인식 5. 노동 1. 역사 2. 역사적정신과학 3. 실천적관심 4. 실천적인식 5. 언어 1. 지배체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등) 2. 비판적 사회과학(비판이론) 3. 해방적관심 4. 해방적인식 5. 지배
1968년에 하버마스는 교수취임강연과 같은 제목인 '인식과 관심'이라는 책을 내면서 앞서 전개한 주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 책의 주요관심은 실증주의 비판과 함께 실증주의가 무시해온, 인식에서 주체의 역할 즉 자기 반성적 '비판적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식비판이란 곧 인식 주체의 반성(성찰)능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실증주의는 자신의 인식론적 입장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과 입장을 유일한 과학으로서 절대화함으로써 오류에 빠진다. 그러므로 과하그이 자기반성, 디시말하면 과학이 인식론적 기초를 구체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앞의 도표에 나타나듯이 학문을 '자연과학''정신과학''비판적사회과학'이라는 세가지로 분류함으로써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을 넘어서 '비판적 사회과학'과 '비판이론'의 반성적이고 비판적 역할을 강조한다. 이런 구분의 주요의도는 실증주의적 자연과학과 해석학적 정신과학은 억압과 왜곡에서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적 관심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험적이고 분석적인 과학의 대표적 예인 자연과학과 기술은 자연의 힘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정치사회적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으며(원자탄, 핵무기사용 등), 역사적이고 해석학적 과학도 역사와 인간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어느 정도 인간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반면, 왜곡된 이해와 억압적 의사소통을 통해 잘못된 권력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될 수 있다.(일종의 한국사왜곡,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왜곡과 대중조작 등). 따라서 자연과학적 인식과 해석학적 인식은 인간 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러므로 좋은 삶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해방적 관심은 뿌리 깊은 인간학적 근원을 가지면서 앞의 두 관심을 가치있는 방향으로 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인간해방의 문제와 관련해서 하버마스가 주목하는 사람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인간해방의 과정으로 보면서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인간의 해방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노동에 의한 물질적 생산과 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인 생산관계를 중시하면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인 계급투쟁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철저한 인식비판은 오직 사회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 하버마스의 통찰도 이미 마르크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즉 마르크스가 독일 관념론(칸트, 피히테, 헤겔)에서 인식 주체 개념을 계승했으나, 인식 주체가 노동으로써 물질적 세계를 변형한다는 이론은'노동'과 '상호작용'을 포괄하는 인간의 '실천'을 도구적 행위, 즉 노동으로 환원하고 만다고 한다. 그때문에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자연과학적 인식론이 된다고 본다. 즉 사회적 노동을 통해 마르크스가 정립한 유물론적 종합개념은 인류의 자기 창조행위를 노동에만 한정함으로써 실증주의적 과학으로 변형되고, 그럼으로써 인식의 자기 반성을 위한 철학적 기반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이론에 내재해 있는 두가지 차원을 구분하다. 바로 '도구적 행위'와 '의사소통적 행위'의 구별이다. 외적 자연력에서의 해방은 노동과정 즉 기술적으로 유용한 지식의 산출(자연과학이기술로 변형되는 것을 포함하여)다시 말해 도구적 행위인 노동에 의존한다. 내적자연(본성)의 강제에서 해방되는 것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결부된 사회적 교류의 조직이 권력제도를 소멸시키는 정도에 따라, 즉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영역의 확장에 따라 이루어진다. 권력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한 자기반성(성찰)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에서는 이러한 자기 반성, 자기성찰의가능성이 상실되었다고 본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를 보충하기 위해 프로이트를 끌어들인다. 하버마스가 추구하는 비판적 과학의 모델은 프로이트가 발전시킨 정신분석학이며 정신분석학은 학문 가운데 방법적 자기 반성을 구체화하는 유일한 보기다. 정신분석의 과정은 의사와 환자의 일상언어차원에서 일어나는 자기 반성과정인데 이때의 자기반성은 고독한 작업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의 언어적 교제, 상호주관성에 결합되어 있다. 환자는 자신의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환자는 의사와의 대화를 통해 억압된 무의식을 인식함으로써, 자기성찰을 통해 왜곡된 자아의 모습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올바른 자기의식에 도달함으로써, 억압에서 자유로워질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의사와 환자(분석자와 피분석자)의 치료적 대화에서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이 극복되어야 할 상황인것처럼, 사회의 경우에는 집합 행동과 전체사회 체제의 병리나 이데올로기적 왜곡으로부터 사회구성원들이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사회 이론가는 사회구성원으로 하여금 사회적 세계에서 그들의 상황(억압되고, 왜곡된 상황)을 이해하여 자기 성찰을 통해 잘못된 의식에서 벗어나 해방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곧 이데올로기 비판이며 이를 통해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도달할 가능성이 주어진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곧 자기 성찰이며, 자기성찰과 자기형성(도야)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해방되고, 사회적 해방도 가능해진다. 이처럼 왜곡된 의사교환이 자유로운 대화가 되는 정신분석적 관계는 해방적 사회변혁의 모델이 된다. 결국 해방적 자아성찰 이론은 도구적 인식과 실천적 인식에서 결여되어 있는 반성적(성찰적)인식을 되찾음으로써 오늘날 과학주의의 지배에 따른 비인간화와 가치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한다.
반론과 대답
이 책은 당시 사회과학계와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실증주의와 분석철학적 경향이 확산되던 때에 이에 대한 비판이 체계적인 철학사적 해석을 통해 제기되었으므로 집중적이고 광범위한 토론이 있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반론이 나왔는데 그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인식을 이끄는 관심, 즉 인식관심이란 핵심개념이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학문을 세분야로 나누는 것이 어느정도 타당한지에 대한 반론도 많이 나왔다. 또한 마르크스해석에 대한 반론으로서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을 단순히 노동으로 축소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리고 정신분석의 모델을 사회집단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나왔다. 정신 분석에는 환자의 고통과 치유되고 싶다는 욕망이 해방적 관심으로 작용하지만 사회이론에서는 사회구성원이 자신이 환자임을 모르는 경우도 많으며, 또 억압받고 고통받는 것을 안다 해도 정신 분석에서 의사 같은 파트너는 없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1973년에 '후기'를 첨부하여'인식과 관심'에 대한 여러 반론에 대해 말하자면 자신의 연구 목적이 '과학주의 비판'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과학과 기술이 생산력을 발전시켜 인류를 기아와 곤궁에서 해방시켰지만(기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후진국의 처지에서 볼때 이런 견해는 선진 자본주의 중심의 관점일수밖에 없다.) 이 해방이 똑같이 정치와 사회의 예속과 굴종에서 해방시키지는 않았음을 하버마스는 강조한다. 생산력의 발달이 생산관계(인간의상호관계)의 발달을 가져 올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해방된 사회란 인간존재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더 깊이,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이므로, 인간 스스로 자기성찰, 자기형성을 통해, '이상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을 모두 실현해야 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이조건들은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책을 통해 '반성'과 '해방'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면서 실천철학의 인식론적 기초와 규범적 기초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고 이후 사회인식론에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현대사회에서'의사소통행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하버마스는 '해방'에 대한 논의를'의사소통행위의 이론1, 2'에서 수정해 발전시켰고 이 책은 '인식과 관심'과 함께 이미 현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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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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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넷째 묶음 - 성숙 인격
이 충무공의 인격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서 쓰러져 가던 나라를 침략자의 말발굽에서 건졌거니와 공의 인격 또한 높이 평가되어 우리 민족의 대표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그러면 공의 인격의 위대성은 무엇일까. 일찍이 이식(1584-1647)은 공의 사람됨을 "법도 있는 몸가짐, 지극한 충성심, 전략과 용병의 지혜, 사무를 통괄하고 결정짓는 조직력과 판단력에서 견줄 자가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설의식(1901-1954, 언론인)은 "꾸준한 예비심과 치밀한 조직력, 크고 넓은 포용성과 드센 통어책으로 보천 욕일 (만천하에 큰 공이 있음)의 대공을 세웠거니와 천생으로 문무와 지용, 충효를 겸하여 미치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는 민족의 태양이시다"라고 찬탄하였다. 그러면 공의 사람됨을 오늘날 성격 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할까. 공의 사람됨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현실적인 의의를 찾게 한다.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성격상 몇 가지 특징을 생각해 보자.
먼저 지적 측면을 살피면, 공은 사태 파악과 상대의 의중을 통찰하는데 뛰어났던 것 같다. 흔히들 성숙 인격의 주요 특질로서 내세우는 것은 혼돈 되고 애매한 현실 상황을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는 점이다. 이는 비단 우수한 지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경성 경향, 욕구 불만, 환상 등에 지나치게 치우쳐서 합리적인 인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확한 현실 파악은 성격적인 성숙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1952년 4월 30일 조정에 올린 "부원경상도장"에서 임진왜란 초전에 왜적이 불과 10여일 만에 서울까지 육박하게 된 사태를 공은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 즉 해전으로 바다에서 응전하지 않고 적을 바로 상륙시킨 점, 여러 성이 있었는데도 제대로 수비하지 않고 그대로 도망쳐 버린 점, 정확한 병법도 없이 전법이 제멋대로 였다는 점 등을 실패의 원인으로 들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평범하고 상식적이지만 당시 패전 상황의 정곡을 파악한 것이라 생각된다. 실전에서도 공은 착실한 상황 판단으로 대처해 나갔다.
임진(1592) 6월 당항포 해전 후 송진포를 떠나 천성, 가덕 등지를 수색할 때이다. 공은 도망간 왜병을 쫓아 부산으로 가 그들을 섬멸하고 싶었으나, 연일 큰 싸움과 오랜 선내 생활로 군사들이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양식은 동나고 부상자도 많아서 그동안 도망가 쉬고 있던 적들과의 대전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양산강의 어구가 좁아서 배가 드나들기 어렵고, 적들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진을 친 채 정면으로 싸우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 보았다. 또한 부산으로 가게 된다 해도 앞뒤로 적을 맞게 되리라 여겨 더 나아가지 않고 회군하였다. 이는 승승 진격하는 용장이라기보다 여러 조건을 면밀하게 계산해 착실하게 싸우는 지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듬해인 계사년 6월 진주가 함락되고 7월초 진양이 함락된 후 왜군이 전라도로 넘어온다는 풍설과 함께 광양에서 왜군들이 관청과 창고를 태우고 식량을 약탈해 간 사건이 있었다. 이때 공은 왜군이 전라도로 넘어올 리는 만무하다고 판단해 염탐해 본 결과 영남 피난민들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광양에서 분탕질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정유년에도 있었다. 앞 바다에 진치고 있을 때 어부들이 피난민의 소를 잡아먹으려고 왜선이 내습한다는 헛소문 내는 것을 통찰하고 범인을 색출해 처형하였다. 갑오년 7월에는 영의정 유성룡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공은 이것이 반대파가 조작한 소문임을 간파하고 통분하는 대목이 있다. 갑오년 9월 조정이 진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적이 교묘하게 소굴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덮어놓고 진격한다는 것은 경솔한 짓이라고 하며 어리석은 조신들을 한탄하는 대목이 일기에 나타나 있다. 요컨대 공은 현실 사태를 직감하고 이를 분석하는 데 날카롭고 정확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지능의 우수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의 성숙성에서 이룩되는 것이라 하겠다.
매슬로우는 자기의 천분, 역량, 재능의 충분한 인지와 이의 개발을 자기 완성이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자기 완성의 특질로서 문제 중심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 로톤(미국의 심리학자)은 성인이 문제에 직면하여 이를 회피하는 방식을 찾는 데 몰두하지 않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공격을 꾀하는 것을 성인의 특질로 지적한 바 있다. 즉 어떤 일이나 문제를 맞이하라 때 그것이 문제 해결의 성패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를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자체의 성취와 문제 해결을 위주로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나 위인들의 태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직면하는 문제들도 자연히 공동 이익의 관점에서 문제삼고 해결하려 한다. 일에 대한 공의 태도에서도 이같은 문제 중심성이 여실히 보인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공은 왜적을 격멸시키되 왜의 머리를 베는 데 관심을 두지 말라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목적이 왜적을 섬멸하는 데 있지 머리를 많이 베어 공세우는 자체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혹시나 머리를 베는 데 급급해 본 임무인 작전을 그르칠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투보다는 공세우는 데 급급해 싸움이 끝나면 죽은 왜적의 목을 베러 혈안이 되어 다니는 원균을 몹시 못마땅해 했다.
계사년부터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공은 전선 제작과 군량 자급책을 위해서 각 고을에서 목수들을 모아 배를 만들고, 또 산전을 개간하고 어로와 제염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계사년에서 갑오년에 이르는 그 무서운 전염병의 만연을 치루고도 병신년에는 확고부동한 군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 해에 이원익(1547-1634) 제찰사는 선조에게 한산도에는 통제사의 노력으로 군량이 많이 쌓여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것을 그 이듬해 정월에 원균에게 통제사 사무 인계를 할 때 한산도에만 군량미가 9.900여 석, 화약 4.000근, 총통 저장량이 300여 개였다는 사실이다.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문제 중심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정유년 4월에 출옥한 후 바로 모친상을 당하고도 미처 장례를 치루지도 못한 채 백의 종군하는 데서도 보여진다. 이때 공은 틈틈이 장례에 쓸 제물을 구해 손수 가공까지 해서 아산 본가로 보내곤 하였다. 백의종군한 처지라 반죄수 취급을 받으면서도 시간만 나면 장례에 쓸 물건을 만들어 보내곤 했다는 것은 일을 좋아하고 또 어떻게든 일을 성취하려는 성격적 특징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정유년 7월, 공이 8년여에 걸쳐 피땀으로 건설한 수군이 원균의 손아귀에서 하루아침에 전멸된 후, 공은 다시금 통제사로 임명되어 이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불과 몇 달만에 8,000여 명의 군사와 10,000여 석의 군량미를 확보하고 전선과 총포 제조에 박차를 가하여 옛 한산도의 성황을 이루었다며 이덕형과 유성룡은 공의 비범한 재량을 경탄하였다. 이것 역시 비범한 지략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성격상의 문제 중심성에서 이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충무공이 대소 수십 번의 전투에서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승전을 거둔 것은 공의 신속 정확한 사태 파악 성향과 이 문제 중심성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말한 문제 중심성과도 관련 깊은 것이지만, 공의 성격상의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위대성은 그가 확실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인간으로서 도리에 맞게 살아가려고 한 점이라 하겠다. 부귀를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관오리들 속에서 공은 어려서부터 습득한 유교적 세계관을 실천하고 달성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 추구에 열중함이 강인했기 때문에 공은 대인 접촉에서 너무 심하다는 오해를 받거나 부하 통솔에 강박적 처벌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패된 사회에서 그나마 군 규율과 조직을 유지하고 수군의 소기 목적을 달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공의 이같은 확고한 목표 의식의 실천 의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공을 충성심이나 효성 그리고 부인이나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고 우러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공의 통일된 세계관과 교양의 표시이고 성실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수도자적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이라 생각된다. 공은 이처럼 확고한 목표 의식과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도 도의 어긋나고 이에 맞지 않는 것은 하지 않으려 했다. 동성 동본인 율곡이 만나자고 해도 그가 이조판서의 직책에 있는 한 만나지 않겠다고 자리를 피한 일화라든가, 병조판서가 그를 신임하여 서녀(첩의 난 딸)를 주려 해도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라든가, 발포 지역의 만호(벼슬 이름)로 있을 때 좌수사가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자 "이 나무는 관청 물건이라 개인적으로 가질 수 없다. 게다가 다 큰 나무를 함부로 벨 수 있느냐"며 이를 나무라는 것 등은 공의 인생관의 뚜렷함을 그대로 나타내는 예라 하겠다. 하급자로서도 도리에 어긋날 때는 절대로 굽히지 않았으며, 또 상급자가 잘못이 있을 때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송사'를 읽고 난 후 쓴 글이나 담종인 도사에게 쓴 편지 답사에서 보이는 적극적인 참여 의식이나 주체성의 발로도 따지고 보면 공의 확고한 인생관과 자기 주체성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공의 성격의 위대성의 핵심은 인간 도리를 깨달아 이 도리에 철저하게 맞추어 나가며, 자기 역할을 찾아서 자기를 마음껏 주장하면서 살았다는 점이라 하겠다. 또 하나 공의 성격 특징으로서 지적해야 할 것은 정서적 통제에서의 성숙성이라고 본다.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 혹은 후천적으로 얻어진 정서적 흥분이나 표출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순화된 성격일수록 이같은 정서적 격동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승화시키고 적절하게 통제하여 표출할 때 표출하고 억제할 때 억제한다. 이와 같은 정서적 통제는 개인의 이 세상에 대한 태도 여하에 많이 좌우된다. 자기나 타인 자연을 주어진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할 때, 부질없는 정서적인 흥분, 열등감, 불안감 등으로 고민하게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서적 안정감은 근본적으로는 자기 인정, 자기가 놓여진 상황에의 긍정에서 온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자기 인정 또는 상황의 긍정은 수도자의 목표이며 심리 치료나 상담 치료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성룡이 어릴 때의 충무공을 회고하는 글에 보면, 공은 동네에서 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활로 그의 눈을 쏘려 해서 사람들이 공의 집 앞을 지나다니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또 정유년에 백의종군하면서 구례에서 하동을 지나 6월 2일 비맞으며 삼가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그 곳 현감은 권율 도원수가 있는 산성에 가서 없고 이방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충무공 일행에게 식사 대접도 않고 밥을 지어먹으라고 박대했다. 그러자 공은 부하들에게 볼기를 치고 얻어다 먹은 밥쌀을 배상하게 했다. 얼마나 괘씸스럽고 분해서 이렇게까지 자학적으로 분풀이했을까 짐작이 간다. 또 원균과의 관계에서도 공은 내심 굉장히 분해하며 괘씸해 하는 것을 일기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공은 어려서부터 공격적이고 정서적 흥분이 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공이 이러한 공격적 불안정감을 대인 관계에서 그대로 표출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지각없이 구는 장수나 조신들을 접할 때면 분통이 터져 나오지만, 이를 가소롭게 웃어넘기고 스스로가 때를 못 만났음을 자인하며 자기 객관화 내지 자기 인정을 통해 정서적 흥분을 제어하였다.
공은 또 술을 좋아하면서도 과음이나 주정을 조심해 실수한 일을 찾아 볼 수 없다. 이같은 조심은 매사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원익이 이순신은 명령에 불만이 있어도 억지로라도 복종하지만 원균은 화를 펄펄 내더라고 선조에게 술회한 것, 유성룡이 공의 됨됨이에 대해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아담하고 삼가하여 마치 참한 선비 같으나 속에는 대담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고 술회한 것, 또 김응남(1546-1598)이 공을 평하면서 종용적중(조용하고 알맞은)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 것 등에서 볼 때, 공은 굉장히 삼가고 단정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공은 어느 정도 불안정감과 공격성은 있었지만, 대적 전투에 공격성을 집중시키고 자기 인정과 수양을 통해 이를 승화 극복하여 정서적인 안정성을 유지해 나갔다고 생각된다. 대인 관계에서의 공의 모습을 보면, 앞서 말했듯이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이를 몸소 실천했던 공은 고생하는 부하나 백성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 한두 밤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이었기에 통제사 재임명을 받고 순천에서 보성으로 가는 길에 촌 노인들이 길가에 열지어 술을 바치며 격려하고, 또 고음도에 유배될 때는 백성들이 공을 믿고 몰려들어 불과 3-4개월 만에 옛 한산도 시절과 같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공이 전사했을 때는 이 소식을 듣고 우리 군사나 명나라 군사나 모두 제 아비를 잃은 것처럼 통곡하였으며, 운구할 때는 곳곳에서 백성들이 제사를 차리고 행렬을 따르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는 다 공이 부하나 백성에게 가졌던 마음에 대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료나 상급자에 대한 대인 관계에서는 좀 사정이 다르다. 친밀하게 지냈던 상대가 몇몇 뿐이었기 때문이다. 식견, 성실성, 범절에서 뜻이 맞지 않으니 깊은 친교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제한되게 마련이다. 공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믿던 사람은 유성룡과 선거이(1550-1598, 임란시 전라병사 부원수), 정도는 다르나 이원익 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게 보면 냉정하고 거만한 것 같으며, 어느 한두 사람하고만 친밀하게 지내니 미숙하게도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매슬로우는 자기 완성적 인간의 특질로 초월성을 내세웠는데, 공에게서도 이런 초월성을 지적해 낼 수 잇다. 보기에는 고독한 것 같지만 고독한 사람이 뼈저리게 느끼는 고민이나 불안이 있는 것도 아니요, 친구가 적고 혼자만의 생활을 은밀히 즐기지만 스스로 잘난 척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고 이들이 친구나 정답게 지낼 만한 상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로 뜻이 맞는 사람과는 깊은 유대를 갖는다. 아마도 공의 대인 관계에서나 내면 생활에서도 이같은 초월적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시정의 우상이나 무반서적 동조 경향에 의해 살아간다기보다 독자적이며 뜻있게 삶을 살아가려는 생활 태도가 이러한 대인 관계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공은 좋은 경치 특히 월야의 해경을 좋아해 달이 뜨는 밤이면 이에 도취되어 잠 못 이룰 정도로 들뜨는데, 이것의 새로운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난중일기'에 달이 떠 있을 중순이 기록되어 있는 날이 50개월인데, 이 중 달밤의 정취를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18개월이나 되며 기록된 날짜는 23일 이상이 된다. 이는 단순히 감상주의나 불안 증세로만 보기는 어렵다. 매슬로우는 그의 연구에서 위인들은 신비적인 경험을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신비적 경험이란 종교적, 초자연적 현상의 경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경험적인 느낌을 말한다. 즉 신비적 경험이란 시야에 무한한 수평선을 느끼며 전보다 힘이 더 충만된 듯하면서도 무력감이 곁들여져 황홀, 경이, 외경의 감정이 합쳐진 상태이다. 말하자면 금새 큰 일이 날 듯 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흐뭇한 감정적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기도 하지만, 위인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뚜렷하고 빈번하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몰자아적이고 초월적이며 자기 향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위인들의 성격이 성숙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하겠다. 유교에서 수양의 궁극에 이르면 도달된다고 말하는 호연지기니 광대지기상이라든가, 선불교에서 터득하려는 견성의 경지와도 상통하는 성숙된 성격의 정적 기조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공이 밤바다에서 달을 바라보면서 즐기는 경우, 그의 정적 기조는 근심과 슬픔이 지배적인 것 같다. 단순한 감상적 기분인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웃음과 즐거움을 초월하고 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 슬픔은 어떤 높은 경지에의 몰입 융화되어 주어진 상황과 자기의 위치를 슬퍼하면서도다시 이를 긍정했으리라. 성찰의 도장이 고요한 밤이며, 고뇌를 정화시켜 주고 자기를 찾게 하는 것이 바다와 달 곧 교교한 자연이다. 이러한 경치 이러한 경험에서 공은 필경 본래의 자기, 성성적적한 자기의 진면목에 직면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197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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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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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교통 신호등
붐비는 어느 거리에서 정신병과 의사가 한 부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건너편에 남자가 보이죠?" 그녀가 속삭였다. "그 남자가 제 남편이에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는 자신이 교통 신호등이라고 생각해요. 밤새도록 남편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깜빡, 깜빡...하거든요." 그 의사는 끄덕이며 말했다. "건너가서 그와 이야길 해봐야겠습니다." "아니예요. 기다리세요." 부인은 소리쳤다. "신호등이 지금 꺼져 있어요."
- 자기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남이 미쳤다는 것을 알기는 매우 쉽다. 남에 대해서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고자의 미친 마음에서 연유한다.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
어느 곡마단에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큰 사람이라고 말하던 지배인이 있었다. 그는 9피트 가까이나 되었던 것이다. 한 신문 기자가 그를 찾아갔다. 왜냐하면 그가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는 자연스럽게 일요일을 택했다. 일요일 아침이 그에게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곡마단에 가서 천막 앞에 일광욕을 하며 누워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의 키는 9피트에 전혀 못 미쳤지만 그의 얼굴 생김새는 바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큰 키를 가졌다고 한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기자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찌된 일이죠? 당신 키는 5피트 5정도도 안 될 것 같은데." 그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오." 그리고 그 남자는 덧붙였다. "지금은 일요일이고 내 휴일이오. 당신이 만일 9피트 키를 보고 싶다면 평일에 찾아와야 합니다."
- 도덕은 분열을 일으킨다. 내면은 진실을 감추게 되며 외면은 허위를 표명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이다.
폭스테리어
한 남자가 정신병원에 있었던 친구를 만났다. "자네 좀 어떤가?" 그가 물었다. "좋아." 친구가 말했다. "몇 달 동안 나는 내가 한 마리의 폭스테리어라고 생각했었지. 역시 그 분석은 나를 도왔어." "그럼 이제 완치되었나?" 그가 물었다. "확실하지는 않네." 친구가 대답했다. "사냥하는 차를 쫓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
-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누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순진한 관념일 뿐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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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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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8. 오뚜기 정치인생 - 등소평의 집권 (1980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79년 / 박정희, 피격 사망 1980년 / 광주민주화항쟁 발발 1983년 / KAL기 소련기에 피격, 미얀마 아응산 묘소 폭발사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실권자는 등소평이다. 그는 작은 거인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뚜기라고 이컬어지기도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정치역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150cm 남짓된다. 키가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면 키가 큰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된다) 라는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고 한다. 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한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였으며, 생모는 일찍죽고 계모 아래서 태어났다. 신문화 운동과 5.4운동이후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무렵 등소평도 1920년 16세의 나이로 그 무리에 가담한다. 나중에 영원한 동지가 되는 주은래도 그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만났다. 프랑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학습 그리고 공산당 조직이라는 힘겨운 과업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무공장, 자동차공장 등에서도 일했다.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의 이념은 퍼져 있었으며 주은래는 이미 1921년에 프랑스에서 중국인의 공산주의 소모임을 만들었다. 1922년 유럽 중국소년 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등소평도 여기에 가입했다.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주은래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등소평은 주은래의 뒤를이어 공산당 파리지부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20년대 말부터 모택동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30년대 초 모택동이 밀려났을 때 등소평도 모택동의 지지자로 여겨져 그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것이 그가 맛본 최초의 정치적 패배였다. 그러나 장정 도중의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노선이 인정받게 되어 그도 모택동과 함께 다시 핵심요직에 들어갔다.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항일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마지막 국공 내전시 황하 주변지역의 작전에 참가,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의 나이 45세 때인 1949년 북경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는 중앙인민정부 의원회 및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52년에서 54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54년에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으로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삼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시기에 모택동, 유소기 등을 이어 중국 공산당의 서열 6위에 있었다.
50년대 중반부터 전개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서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설립 등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판명되자 등소평과 유소기, 주은래 등은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고자 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은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이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그의 유명한 발언이 나오게 된다. 즉, 국민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면 어느 것이든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문화대혁명의 미친 바람속에서 유소기와 등소평의 실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66년 가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68년 10월 2년 만에 열린 중앙전회에서 국가주석 유소기는 당내의 직위와 아울러 당원자격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 혁명주의로 나가고자 하는 반역자이며 노동자의 적으로 매도되었고, 69년 폐렴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등소평은 유소기만큼 중죄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홍위병들이 발행했던 소책자에 거론된 그의 죄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의 총서기로써 월권행위가 있었고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모택동의 권위를 깍아내렸으며, 농업정책에서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의 주장을 했다....) 또한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의 놀이인 브리지게임을 했다는 것도 비판의 주요한 항목이었다. 그의 아들은 북경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죄상을 밝히려고 했던 홍위병들이 그에게 아버지의 죄목을 자백하기를 강요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않자 그를 3층 옥상에서 집어던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등소평은 2년여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69년경 감금된 곳에서 그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화동지방의 강서시에 가서 재교육을 받으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들은 남창 교외의 한 보병군사학교의 교장관사로 쓰이던 2층 석회석 벽돌건물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3년을 보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들의 생활은 3년 내내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것이었다. 아침에는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고, 점심때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방송을 듣고 신문을 보았으며, 오후에는 마당의 채소밭을 가꾸었다. 노모는 바느질을 했다.
71년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엇던 임표가 반란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비행기 착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표가 죽은 후 등소평은 1973년 중앙에 복귀했다. 73년이후 등소평의 위치는 강하되어 75년 에는 당부주석, 인민해방군 총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75년 이래 생산활동을 향상시키는 경제정책을 적극 추천했다. 그의 정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기위해 노동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가게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등이었다. 그러나 1976년 그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주은래가 죽으면서 그는 또 시련을 겪게된다. 주은래는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등소평은 그를 스스럼없이 '영원한 형님' 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런 주은래가 죽자 이른바 4인방이라고 불리는 그의 반대파들은 등소평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 4월 5일, 이날은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비는 중국 전통의 청명절이었다. 주은래의 죽음을 추도하는 인파가 인만혁명기념비 주변에 모였고 주은래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화환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나 당국은 화환을 치워버렸다. 이것은 군중들을 분노케했다. 군중은 경찰차를 전복시켜 불을 질렀고 경찰 전망대를 불질렀다. 천안문 광장의 군중은 강제해산 되었으며, 등소평은 4인방에 의해 천안문 광장에서의 반혁명적 폭력을 선동한 혐의로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76년 9월 모택동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고 화봉국이 주석에 취임했다. 그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가주석에 취임한 화봉국은 4인방들이 그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국방부장 섬검영의 옹호아래 4인방을 체포했다. 4인방이 제거된 뒤 76년 10월 등소평은 화봉국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면에나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했다. 등소평은 1977년 7월 당부주석, 총참모장 및 국무원 부총리의 지위로 복귀했다. 이것은 그가 화봉국에 이어 당 서열의 2인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등소평과 화봉국의 노선은 달랐다. 화봉국은 문화대혁명의 전통을 계승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대외개방을하고 적극적으로 경제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 11월 3중 전회 준비대회에서 등소평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 전진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는 화봉극의 노선이 잘못되었음을 자아비판하도록 요구했다. 76년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과시켰고, 12월 3중 전회에서는 팽덕회, 유소기 등이 복권되었다. 이는 등소평이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80년 9월 마침내 화봉국은 사임했다. 4인방은 재판정에서 피고의 위치가 되었다. 11월 호요방이 국가주석이 되었고,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 였다. 그는 외국의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련을 당했을 때의 그의 생각에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치명타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낙관주의자라서 절망을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정치란 넓은 바다 속의 파도와 같아서 사람들은 파도위에 있을 때도 있으나 때로는 파도밑에 깔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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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腐蟲生(물부충생) 物(만물 물) 腐(썩을 부) 蟲(벌레 충) 生(날 생)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곧 유방은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 는 뜻이다. 불건전한 사회와 부패한 정치는 곧 범죄와 비리(非理)의 무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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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6. 마리 앙투아네트와 패션 민주화
예쁜발 경연대회
옷 가운데에는 몸을 보호할 목적으로 태어난 것도 있지만 먼 옛날부터 대부분의 여러 가지 옷들은 지위나 계급,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색이나 모양이나 천 등으로 고승과 평신도, 입법자와 위법자, 지휘관과 사병 등을 구별했던 것이다. 옷은 문화의 중심적 인물을 기타 대중으로부터 돋보이게 했다. 실제로 지금도 옷만큼 사회적 계급을 직접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는 수단은 달리 없다. 소박한 옷차림을 명령한 검약령 등은 옷이 태어난 시점에서는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영향이 옷에 뚜렷한(가끔 특이한) 각인을 주게 되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구두도 매우 실용적이면서 옛날부터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장식품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신발은 샌들이다. 파피루스를 엮어 만든 신발이 기원전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의 묘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후가 따뜻한 지역의 고대인들이 신었던 샌들에는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었으며 모양도 아마 지금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다양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의 가죽 샌들인 '크레피스'는 여러 가지 염료로 염색하고 장식을 박고 금박을 씌운 것이다. 로마의 '크레피타'는 바닥이 두텁고 옆면은 가죽이고 발등 부분에 끈을 건다. 고르인은 뒤가 높은 '캠퍼구스'를 좋아했고 쿠어인은 마와 아프리카에서 나는 풀들을 가지고 그물 모양으로 짠 샌들인 '아르파르가타'를 신었다. 고고학자들은 묘지나 고대의 회화에서 실로 여러 가지 모양의 샌들을 발견하고 있다. 샌들은 고대의 가장 대표적인 신발이었지만 그 밖의 신발도 있었다. 샌들 이외의 신발로 기록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가죽을 묶어 신은, 뒤축이 없는 모카신 형태의 구두다. 생가죽 끈을 다리에 감은 것으로 기원전 1600년 무렵의 바빌로니아에서 애용되었다. 그것과 비슷한, 발에 딱 맞는 구두를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그리스의 상류 계급 여성들도 신기 시작했는데 당시 흰색과 빨간색 구두가 유행하였다.
구두 가게의 길드(동업 조합)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기원전 200년 무렵 로마인이다. 이 프로 구두 기능공들은 구두 가게에서 두 발에 맞춘 구두를 최초로 만들었다. 로마인의 신발은 모양과 색으로 사회 계급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 신은 것은 발을 덮는 형태의 구두로 대개 흰색이나 빨간색, 특별한 경우에는 녹색이나 노란색이었다. 신분이 낮은 여성들은 색을 칠하지 않고 발이 보이는 가죽 샌들을 신었다. 원로원 의원은 갈색 구두를 신었는데 네 개의 검은 가죽끈을 장딴지 중간까지 매고 두 번 묶었다. 집정관은 흰색 구두를 신었다. 브랜드 따위는 아직 없었지만 어디 어떤 길드의 기능공이 만든 구두는 특별히 고급스럽고 발에 딱 맞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싶어했는데 당연히 그런 기능공의 구두는 값도 비쌌다.
구두를 나타내는 말도 구두의 모양과 마찬가지로 차례차례 변화했다. 영어권에서 'shoe'의 철자는 열 일곱 번이나 바뀌었고 복수형은 적어도 서른 여섯 종류가 있었다. 가장 최초의 앵글로색슨어는 '덮다'를 뜻하는 'sceo'였는데 이것이 복수형으로는 'schewis'가 되었고 이어서 'shooys'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shoes'가 된 것이다. 14세기 초까지는 문명이 발달한 유럽의 어떤 사회에서도, 설령 왕족일지라도 규격 사이즈의 구두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주 값비싼 맞춤 구두라도 각 기능공의 사이즈 측정 방법이나 실력에 따라서 한 켤레 한 켤레의 사이즈가 달랐던 것이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1305년이다. 당시의 영국왕인 에드워드 1세는 상거래의 정확한 기준으로 보리 세 알의 길이를 1인치로 하라고 포고했다. 영국의 구두 기능공들은 이 도량법을 채택하여 처음으로 규격 사이즈의 구두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보리 열세 알 분량의 길이인 아이들 구두는 사이즈 13이라고 불렀으며 그렇게 지정하여 주문을 받았다. 또한 로마 제국 쇄망 후에 보이지 않던, 좌우 구분이 있는 신발이 14세기 영국에서 또다시 만들어지게 된다.
14세기에는 새로운 모양도 등장하는데 앞이 매우 길고 뾰족한 구두다. 그 길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는 발끝에서 2인치 이상 튀어나온 구두를 금지하는 법령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이 법률을 따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1400년대 초에는 발끝이 18인치가 넘는 '크라코우'라는 긴 구두가 나타났다. 그것을 신은 사람은 걸핏하면 발이 걸려 넘어졌을 것이다. 크라코우는 르네상스를 낳은 독창적인 분위기 속에서 나타났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이런 모양이 유행했다가 다른 모양이 유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예를 들어 이상하게 발끝이 뾰족한 구두의 유행 뒤에는 발끝이 아플 정도로 뭉툭한 모양에다가 폭은 발이 두 개라도 들어갈 정도로 헐렁거리는 재미있는 사각형 구두가 유행했다. 17세기에는 영국의 학술 도시인 옥스퍼드의 구두 기능공들이 앞부분에 끈을 묶는 쇠고리가 세 개 또는 세 개가 넘은 송아지 가죽의 편상화인 '옥스퍼드'를 만들어 냈다. 당시 미국은 구두 디자인에서 한 걸음 뒤져 있었다. 식민지에 최초로 등장한 구두 가게에는 '스트레이트형'이라는 단 한 종류의 구두형밖에 없었으며, 좌우 구분이 없는 구두였다. 그 때문에 부자들은 영국제 수입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구두 종류가 많아지고 가격이나 착용감이 개선된 것은 미국 최초의 구두 공장이 매사추세츠에 생긴 18세기 중반의 일이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구두는 대량 생산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가죽의 재단이나 바느질도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집에 있는 여자나 어린이가 약간의 수공비를 받고 봉제한 것을 공장에서 완성 가공한 것이다. 구두 제조의 완전한 기계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량 생산은 꽤 오랫동안 실현되지 않았다. 영국의 노샘프턴 맨필드 제화 회사가 규격 사이즈의 질이 좋은 구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기계를 처음으로 도입한 1892년의 일이다. 구두가 대중화하면서 편리하고 좋은 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건강에 좋지 않은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 발에 생긴 물집이나 티눈 그리고 평발이 더욱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 최초로 티눈과 발바닥 물집용 패드를 발명한 인물이 구두 가게에서 일한 사람이라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윌리엄 숄은 부모님이 경영하는 미국 중서부의 낙농장에서 일하던 10대 무렵부터 구두와 발 손질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82년에 열세 형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태어난 윌리엄은 소년 시절에 스스로 생각해낸 튼튼한 밀 실로 대가족을 위해 구두를 기웠다. 한 집안의 전문 구두쟁이로 멋진 솜씨와 발명에 재능을 보이자 그의 부모님은 윌리엄이 열 여섯 살 때 그를 구두 가게 조수로 내보냈다. 1년 뒤에 윌리엄은 다른 구두 가게에서 일하기 위해 시카고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구두를 파는 일을 하는 동안 윌리엄 숄을 발의 물집이나 티눈, 평발이 얼마만큼 손님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발은 주인에게 무시당하고, 무시당하는 발에 대해 의사나 어느 구두 가게 주인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윌리엄은 그 일을 스스로 떠맡기로 했다. 낮에는 구두 판매를 하면서 시카고 메디컬 스쿨의 야간 학과를 졸업했다.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1904년에 이 스물 두살의 의사는 처음으로 만든, 발바닥의 장심을 받쳐 주는 '풋이저'로 특허를 얻어냈다. 윌리엄이 만든 구두 깔창의 인기가 솟자 풋케어(foot-care) 제품 산업이 탄생하게 되었다. '풋이저'를 팔려면 올바른 풋케어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윌리엄은 구두 가게 점원들을 위해 발 치료 통신 교육을 시작했다. 또 컨설턴트를 모아 그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올바른 발 치료에 대한 의학적이고 일반적인 지식을 설명하도록 했다. 윌리엄은 건강하지 못한 발이 미국에 넘치고 있는 것은 미국인 50명 가운데 한 사람밖에 올바른 걸음걸이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발부리를 똑바로 앞으로 내밀고' 하루에 2마일씩 걸을 것을 권장했으며 하루에 두 켤레의 구두를 신을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하면 한 켤레씩 번갈아 가며 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발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의사들을 대상으로 "사람의 발, 그 해부학, 기형, 치료"(1915)를 냈고, 좀더 일반적인 입문서로 "발 사전"(1916)을 출판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고 선전한다'는 윌리엄의 신조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맨발을 내보인 광고에 물집용 패드를 붙인 것과, 깔창에 얹은 발을 공공연히 보이는 것은 외설이라는 항의가 쇄도했다.
1916년에 윌리엄이 후원자로 나선 '신데렐라 발 콘테스트' 덕분에 발에 대한 의식이 전국적으로 높아졌다. 가장 완벽한 발을 노린 수만 명의 여성들이 구두 가게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참가자의 발은 윌리엄이 발명한 장치로 정밀히 검사되고 계측되어 족형이 떠졌다. 발 전문가로 이루어진 심사 위원단이 신데렐라를 뽑았고, 국내의 주요 신문과 잡지에 수상자의 족형이 실렸다. 윌리엄이 기대했던 대로 많은 미국 여성들이 자신의 변변치 못한 발과 미국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발을 비교하며 앞다투어 그의 제품을 사러 왔다. 전국의 약국, 백화점, 그리고 잡화점에서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된 닥터 윌리엄 숄의 상품이 미국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윌리엄 숄은 1968년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잊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윌리엄은 일생을 통해 한 번 본 발은 잊지 않는 것을 최후까지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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