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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8호
2012.1.24 (음 1.2)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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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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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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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도움이 되는 책이란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 데오도르 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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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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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라고 / ~고
ㄱ. 진수는 "내가 세 시에 너희 집으로 가겠다"라고 말했다. ㄴ. 진수는 자신이 세 시에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ㄱ은 진수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따와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처럼 남의 말이나 글, 생각 등을 똑같이 옮겨 표현하는 것이 직접 인용이다. ㄴ은 진수의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 아니고 말하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 옮겨 전하고 있다. 즉 간접 인용 형식을 취하고 있다.
ㄷ. 그는 나에게 "너희 학교에 가보자"고 말했다. ㄹ. 친구는 선선히 "내가 그 책을 빌려 주마"고 했다. ㅁ. 진호는 "나 모래 공군에 입대한다"고 말했다.
ㄷ, ㄹ, ㅁ은 직접 인용 형식으로 쓰려 했는데 문제가 있다. 직접 인용을 하려면 인용문 뒤에 '(이)라고'가 와야 하는데 간접 인용문을 만들 때 쓰이는 '고'를 붙인 것이다. 이런 실수를 주위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위 예문들은 '라고'를 사용하거나 '그는 나에게 우리 학교에 가보자고 말했다/ 친구는 선선히 자신이 그 책을 빌려주마고 했다/ 진호는 그가 모래 공군에 입대한다고 말했다'처럼 간접 인용문으로 고쳐야 한다.
[우리말 바루기] 경구 투여
'경구 투여'. 두통약.소화제.감기약 등 알약류 사용 설명서에 등장하는 말이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에 아이는 물론 어른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경구(經口)'는 '약이나 세균 따위가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투여(投與)'는 '약 등을 남에게 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1회 2정 경구 투여'는 '한 번에 두 알씩 먹으라'는 의미다.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의약품 설명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뿐 아니다. 연고류의 의약품 설명서에는 대부분 '환부에 도포'라고 적혀 있다. 알기 쉽게 '상처에 바른다'로 바꾸는 것이 낫다. "~와 병용 투여 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구도 있는데 '병용 투여 시'는 '함께 먹으면'이라 고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지난해 말 식품의약품안전청은 '가역적'은 '회복 가능한', '골조송증'은 '골다공증' 등으로 의약품과 관련한 용어나 설명을 쉬운 말로 바꾸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으나 아직 제대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우리말 바루기] 체화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남을 가리켜 '육화(肉化)'라고 한다. 신이 인간의 육신을 받음으로써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육화'는 '육신으로 변화함'이란 뜻이다. '물화(物化)'는 '사물로 변화함', '귀화(鬼化)'는 '귀신이 됨. 또는 귀신이 되게 함'이란 의미다.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체화(體化)'라는 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짜인 단어로,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물체로 변화함. 또는 물체로 변화시킴'이라고 설명돼 있다. 이 정의는 글자의 뜻을 좇아 풀이한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실제 언어생활에서 '체화'가 이런 의미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한 작가의 작품을 오랫동안 꾸준히 받아쓰게 되면 그의 문체와 표현기법이 내 것처럼 체화된다" "허풍이 아니라 진실성이 체화돼 저절로 우러나오는 표현이어야 남을 움직일 수 있다" "그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연기 톤을 시종일관 유지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체화했다" 같은 예문을 보자. 이들 문장에서는 '체화'가 어떤 현상이 '몸에 뱀/익음' '충분히 익혀 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됨'을 뜻한다. '물체로 변화함/변화시킴'이란 뜻이 아니라 '체득(體得)'과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 훈민정음 국어사전(금성출판사)은 '체화'를 '어떤 능력을 자동적.무의식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몸에 익히는 것'으로 풀이했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체화'의 뜻이 사전에 추가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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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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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중 - 박해람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한 시절의 순정이 명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 무엇에다 명중시키기란 쉽지 않다는 것 저 하트 모양에 박혀 있는 화살처럼 깊이 박힌 다음에는 명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은 뒤쪽에서 덜 풀린 힘이 부르르 떨고 있는 여진의 날들이라는 것이지 또한 허공으로 날아간 것들 그 떠난 자리는 흔적이 없다는 것이지 다만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는 누구나 명중되어 있다는 것이지
기마족(騎馬族)들에게는 적에게 허점을 보일 때가 화살을 날릴 때란다 그 무엇을 과녁으로 삼을 때가 가장 방해받기 쉬운 때라는 것이지 숨 한 번 고르는 시간이 영원히 숨을 끊을 수 있을 때라는 것이지 내 몸이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아직 제대로 된 들숨 한 번 들이마시지 못한 시절인데 명중의 시절이 내게로 와 박히는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 부르르 떨리는 때가 있다 아직 깨끗한 과녁이 가끔 두렵다 그러나 이 부르르 떨리는 것들, 고통은 늘 뒤쪽에 있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더 이상 떨림도 없을 때가 내가 제대로 된 과녁이 되는 때라는 것이지 사내의 울퉁한 팔뚝에 박힌 그 화살처럼 누군가의 마음에서 푸릇하게 사라져간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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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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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꽃을 위한 노래 - 노인숙
노오란 발레옷에 하늘 자락 꽃춤을 추네.
먼 잠 속 비파 소리 바람결에 밀물지고
연두빛 발가락마다 상채기 딛고 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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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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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의 비닐 우산 - 윤동재
주룩주룩 비 내리던 월요일 아침. 학교 가는 길에 영이는 비를 맞으며 교문 앞 문방구 옆 시멘트 담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거지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 옆에 같이 잠들어 있던 쭈그러진 깡통엔 찬밥덩이 대신 빗물이 가득 고여 촐촐 넘치고 있었다. 짓궂은 아이들 몇이 할아버지 어깨를 툭 건드려 보고 지나갔다. 문방구 아주머니는 아이들에게 물건을 팔다가도 연신 밖으로 내다보며 "미친 영감태기 아침부터 재수 없게 또 우리 담벽에 기대어 늘어졌노." "영감태기, 영감태기 뒈지지도 않고-" 아침 자습을 마치고 영이는 다시 교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거지 할아버지는 여전히 비를 맞으며 잠이 들어 있었다. 영이는 누가 볼까 좌우를 둘러보며 아침에 가져온 비닐 우산을 할아버지 머리 위로 살며시 펴서 씌워 드렸다. 그날 오후는 다시 하늘이 말갛게 개었다. 영이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교문 앞 문방구집 담벽을 살폈다. 그곳엔 거지 할아버지도 찌그러진 깡통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영이가 씌워 드린 비닐 우산만 접혀져 담벽에 꼿꼿이 세워져 있을 뿐. 영이는 멍하니 서서 우산을 보고 있었다. 말갛게 개인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가져가셔도 좋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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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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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8장 가정의 즐거움
1. 생물은 생물답게
어떠한 문명도 그 마지막 가치가 어떤 것인가 하는 판단은 그것이 어떠한 모양의 남편이나 아내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에 있다고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이 극히 간단한 점을 건드리지 않고는 온갖 문명이 이룩한 사적, 다시 말해서 예술, 철학, 물질적 생활 같은 것은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으로는 온갖 문명이 이룩해 놓은 공적은 보다 좋은 남편이나 아내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들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90퍼센트까지가 남편이나 아내이며,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는 한, 또한 결혼과 가정이 인간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한, 보다 좋은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를 만들어 내는 문명은 보다 행복한 인간 생활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보다 높은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주위에서 살고 있는 남녀의 소질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들이 이룩하는 일보다도 훨씬 중대한 것으로, 어떠한 소녀라도 그녀에게 보다 좋은 남편을 얻게 해 주는 문명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문명이라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일은 상대적인 문제여서, 이상적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는 어떠한 시대나 어떤 나라에도 있다. 아마 우수한 남편이나 아내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학생일 것이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아내나 남편을 교육시키는 많은 수고를 덜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가정을 무시하고 가정을 열등한 지위로 내모는 문명은 보다 보잘것 없는 산물을 만들어 내기 쉬운 것이다.
내 사고 방식이 생물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생물적이다. 그러나 모든 남녀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까 <생물답게 해 나가자>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싫든 좋든 간에 인간은 모두 생물답게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록 뚜렷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생물로서 행복하며, 생물로서 성을 내며, 생물로서 야심을 갖고, 생물로서 종교적이며, 또한 생물로서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생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났을 때는 갓난아기이며,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 결혼해서 다시 어린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애써 회피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대개의 남자는 일생을 통하여 모두 여자와 함께 살고, 또한 자녀들의 아버지인 것이며, 모든 여자도 또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대개의 여자들은 일생 동안 남자와 함께 살며, 또한 어린 아기를 낳는 것이다. 자기의 종자를 영원히 종속시키기 위하여 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을 거부하는 나무나 꽃이 있듯이 사람들 가운데도 부모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나무도 종자로부터 자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인생의 가장 원시적인 관계는 남녀와 그 아이와의 관게인 것이며, 어떠한 인생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이같은 본질적인 관계를 문제로 삼지않는 한 철학으로서 만족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철학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남녀간의 관계는 반드시 아기를 낳는 일에 귀착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떠한 문명도 아기를 갖는다는 권리를 남녀로부터 뺏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극히 진지한 문제이다. 결혼을 기뻐하지 않는 남녀가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고, 또 설사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이유로든지 아기를 낳는 것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건 남녀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라는 점이다. 만일 아기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몸에 있다면 그 몸이 어딘가가 잘못되어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면 생활비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만일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사고 방식의 표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면, 그 지나치게 높은 표준 자체가 나쁜 것이다. 그릇된 개인주의 철학 때문이라면 그 개인주의 철학이 좋지 않은 것이다. 만일 또한 사회 제도의 모든 기구에 그 원인이 있다면 사회 조직의 모든 기구가 좋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생물학이 좀더 진보하여 생물로서의 인간이 좀더 잘 이해되게 된다면 아마도 21세기의 남녀는 내가 말하는 바를 진실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거니와, 19세기가 자연과학의 비교론의 세기였던 것처럼 21세기는 생물학의 세기가 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예지를 좀더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뒤로 남자는 여자와 사는 것을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남자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여자 없이는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성을 너무 멸시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고 말할 수는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또한 딸로서 남자는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설사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윌리엄 워즈워드처럼 자기의 누이동생에게 의지해야 하며 또, 허버트 스펜스(영국의 철학자, 1820 - 1903)처럼 가정부에게 신세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어머니나 그 누이와 적절한 관계를 이룩할 수 없었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워즈워드의 영혼을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가정부와의 사이조차 적절한 관계를 만들 수 없었더라면, 신이여 스펜스에게 자비를 내리소서. 여성과 적절한 관계를 이룩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도덕적인 생활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고 안스러운 데가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조차도 <남자는 여자와 함께는 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 없이도 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인간의 예지는 힌두교 이야기의 작자와 20세기 첫 무렵에 살았던 오스카 와일드와의 사이에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힌두교의 창조설의 작자는 이미 4천 년 전 옛날에 본질적으로는 오늘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창조설에 의하면, 신은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 새의 노래 소리, 무지개의 빛, 산들바람의 입맞춤, 파도의 웃음, 양의 온순함, 여우의 교활함, 구름의 방종, 소나기의 번덕스러움과 같은 것들을 들어 그것들을 여성의 몸 속에 짜넣은 다음 아내로 삼도록 남자에게 주었다고 한다.
아내를 얻은 힌두교의 아담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땅 위를 뛰놀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며칠 뒤 아담이 하느님 앞에 와서 말하기를 <이 여자를 다른 데로 보내 주십시오.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하느님은 그 말을 듣고 그녀를 다른 데로 떼어 보냈다. 그러자, 아담은 쓸쓸해져서 역시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아담은 또다시 하느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제 아내를 다시 저에게 돌려 주십시오.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금 하느님은 그의 원을 받아들여 그에게 이브를 돌려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다시금 아담은 하느님 앞에 나타나 간청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이브를 제발 저에게서 데려가 주십시오. 맹세코 말씀드립니다만, 그녀와는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신으로서의 무한한 지혜로서 그것은 이번에도 들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아담이 네 번째로 찾아와서 여성의 반려가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노라고 호소했을 때 하느님은 아담을 향하여, 다시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좋건 나쁘건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할 것, 또 되도록 좋은 방법을 마련하여 이 땅 위에서 함께 살 것을 약속하게 했다. 이 광경은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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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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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6.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1907) - 베르그송 Henrie Bergson(1895-1941)
사는 것이 먼저요, 철학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 윤구병(충북대학교 교수)
베르그송은 1895년 10월 18일 태어났다. 아버지 미셸은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성이 베레크-손이었으나 프랑스로 이사 오면서 발음을 따라 베르그송으로 바꾸었다. 어머니는 영국 출신으로 캐더린 레비슨이었다. 베르그송은 문학과 과학에 동시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국 고등학교 경시 대회에서 라틴어, 프랑스어 논문, 수학에 일등상을 차지했다. 특히 수학과 기하학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사람들은 이과를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으나 고등사범학교의 문과에 들어갔다. 고등사범학교 시절에 스펜서의 [제1원리]를 읽고 과학철학을 하기로 마음 먹었으나 어느 날 스펜서의 철학을 뒷바침하는 기계론적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생각을 돌렸다. 고등사범에 다닐 때 별로 친구가 많지 않았으나 일어 등을 다루던 쟝 조레스와는 비교적 가까웠는데, 뒤에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당을 창당하고 중상층과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투쟁을 벌이다가 극우파의 손에 암살당했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베르그송은 앙제 고등학교와 끌레르몽폐랑 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운동과 지속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888년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서론]을 쓰고, 파리로 올라와 1889년 여름에 롤랭 고등학교에 취직되었다. 이 해 말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소 관념]응 써서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6년에 [물질과 기억]을 쓰고 1897년에는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고대 철학 담당교수가 되었다. 그 뒤로 1907년에는 [창조적 진화]를 쓰고 1928년에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문체가 인정을 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32년에 마지막 대작인 [도덕과 종교의 두 원칙]을 쓰고 1914년 1월 4일에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베르그송은 삶의 철학자로서 철학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문학계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내부의 자아, 심층 자아와 지속에 관한 베르그송의 이론은 시인 페기, 소설가 프루스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28)는 문학으로 표현된 베르스송의 사상이라는 평가가지 받고 있다. 위에 든 것 밖에 베르그송의 저서로는 [웃음](1900) [정신력](1919) [지속과 동시성](1922) [사유와 운동](1931) 등이 있다.
연장을 만들려면 머리를 굴려야지 뭐
나는 지금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멀리 겹겹이 포개진 산자락들이 뒤로 갈수록 색깔이 열어지면서 물러선 위로 흰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 보이고, 앞쪽으로는 왼켠에 숲이 오른켠에 풀밭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풀밭 너머로 강물이 흐른다. 풀밭에는 소가 풀을 뜯고, 강가에서는 그물을 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 사진이다. 나는 지금 이 사진을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베르그송의 사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참이다. 우리 지도 교수는 연구실에 우리를 불러다 놓고 가르치시는 동안에 걸핏하면 "자네들 이론이 옳다고 생각하면 어디 그 이론으로 여기 놓인 이 안경을 설명해 보게. 제대로 된 이론이라면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것까지 다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야. 눈에 보이는 가장 흔한 것조차 설명 못 하는 이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걸세." 만일 내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이론으로 이 풍경 사진 하나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내 공부가 신통치 않아서 베르그송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베르그송 이론이 틀려 먹었거나(아무래도 내 탓이 더 크겠지). 베르그송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이 풍경 사진을 그럴 듯하게 설명해 내야겠는데, 제대로 될지 두고 볼 일이다. 먼저 이 풍경 사진에 나와 있는 여러 모습 가운데 산 것을 가리키는 것부터 살펴보자. 풀과 나무, 소, 사람이 있다. 풀과 나무는 다 아는데로 식물이다. 식물은 살아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화학자다. 제 몸을 써서 무기물을 유기물로 합성해 내는 생물은 식물밖에 없다. 식물은 살려고 먹이를 찾아서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가 없다. 식물의 운동은 성장과 증식 운동을 빼고는 대체로 몸안에 머물러 있다. 이렇게 제자리에서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물은 그 때문에 운동의 영역이 제한되어 있고, 살아가는 데 특별히 예민한 감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머리 쓸 일도 없기 때문에 감각도, 의식도 잠들어 있다. 베르그송의 표현에 따르면 '혼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소의 경우는 나무나 풀처럼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형편이 못 된다. 살려면 먹이를 제 몸 밖에서 찾아야 하고, 먹이가 늘 코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먹이를 찾아야 한다. 살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것이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 하나다. 나는 지금 이 조그마한 사진 속에서 풀을 뜯는 소밖에 볼 수 없지만, 사진 왼켠에 있는 숲 속에는 그 밖에도 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 손에 길들어 왔음에도 소가 갓 태어나서부터 엄마에게 어떤 풀은 먹어도 되고 어떤 풀은 먹어서 안되고 하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풀과 못 먹을 풀을 가려서 먹듯이, 숲 속에 사는 다른 동물들도 저마다 타고난 본능에 의지해서 서로 다른 삶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배추벌레고치벌은 침으로 배추벌레의 어느 부분을 찔러서 마취시켜 산 채로 잡아다가 그 위에 알을 낳는데, 알에서 깨어난 고치벌 새끼는 마취되어 배추잎을 먹지 않고도 오랫동안 살아남게 된 그 배추벌레의 생살을 파먹고 자란다. 그런데 배추벌레고치벌은 배추벌레의 몸 어느 부분을 찔러야 마취가 되는지를 누구한테서도 배운적이 없다. 그것은 타고난 앎이고, '본능'이라고 불리는 힘이다.
저 사진 속의 강가에서 그물을 들고 있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본능에만 의지해서는 살 수가 없다. 사람은 다른 동물에 견주어 여러모로 살기 힘들게 생겨 먹었다. 발가벗은 몸뚱이를 추위나 물것이나 상처로부터 지킬 수 있는 털도 두꺼운 가죽도 없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억센 발톱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원숭이나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아니고, 사슴이나 노루처럼 잘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존에 필요한 기능이나 연장을 본능이나 유기체 안에 갖추고 있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약점을 보완하는 길은 연장을 만드는 것이다. 열매를 따려고 손에 든 장대는 늘어난 팔이다. 손에 든 도끼는 날카로워진 발톱이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는 걸음이 빨라진 발이다. 그리고 사진 속의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그물은 정교한 펠리컨의 주둥이라고 할 수 있다. 배추벌레고치벌이 지니고 있는 침이나, 그 침을 쓰는 힘은 배추벌레고치벌이라는 유기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저 사람이 들고 있는 그물은 저 사람의 몸과 떨어져 있고, 그 그물을 쓰는 방법도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이다.
사람은 어쩌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본능에 의지해서 사는 길 대신에 머리를 쓰면서 사는 길을 택하게 되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하고 규정한 뒤로 서양의 학자들은 사람의 라틴어 학명을 '호모 사피엔스'로 붙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왔다. '슬기 사람' 곧 머리 쓰는 힘이 두드러진 동물이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지금 땅 위에서 어정거리는 우리들의 직접 조상을 '슬기 슬기 사람'이라고 하여 머리 쓰는 일을 되풀이 하여 강조하고 있을까. 그러나 '골치 아프게 머리는 왜 쓰지?'하고 물으면 신통치 않은 대답으로 얼버무리기 일쑤다. 베르그송한테 물으면 대답이 시원하다. '연장을 만들려면 머리를 굴려야지 뭐.' 사람이 다른 동물에 견주어 시원찮은 몸매에다 타고난 지식도 보잘것없어서 살 길이 막막하다 보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궁리는 결국 효율적인 연장을 만드는 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니, '슬기 사람'은 '쟁이 사람'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베르그송의 주장이다.
생명의 진화는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창조성에서 비롯은 것이다.
이제부터 베르그송의 이야기를 좀금 더 귀담아 들어보자. 베르그송에 따르면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 우리의 상식은 이렇게 속삭인다. "애초에 '움직이는 그 무엇'이었고, 그것이 움직였다고 해야 맞는거 아냐.?" 그러나 베르그송은 고개를 흔든다. "애초에 움직이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움직임이 이었다구. 움직임!" "움직이는 것이 없는데 움직임이 있었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렇다 뚱딴지 같은 소리다. 그러나 이 뚱딴지 같은 소리 속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의 알맹이가 들어있다. 진화? 진화론? 아, 다윈의 그 유명한 적자생존의 원리 말이지? 알지.알고말고. 진화론에 대한 일반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 테두리 안에 머물 것이다. 이 테두리를 그대로 인정하면 다윈이나 스펜서의 진화론은 이해할 수 있을지언정 베르그송의 창조적진화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것이 자연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되는 현상은 설명할 길이없어지고 만다.
베르그송은 플라톤식의 관념론이나 근대 과학의 바탕을 이루는 기계적 유물론을 동시에 배척한다. 이 두 이론은 다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 불변한 것, 정지해 있는 것을 더 앞세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현상들만이 진짜로 '있는 것'이고, 현상계에 있는 것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있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없는 것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있는 현상계에서는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 바뀌는 것은 참된 앎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 대상이 순간순간 바뀐다면 무슨 수로 어떤 것을 그것이라고 가르켜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참된 앎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 세계에 있는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정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풀라톤의 생각이다.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어떤 것이 있어서 이것이 모든 운동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마치 떡갈나무가 먼저 있어서 도토리로 하여금 자라서 떡갈나무가 되도록 이끌듯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신적인 것이 있어서, 변화하고 운동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다른 모든 것들로 하여금 불변하는 순수 형상인 자신을 지향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세계에서는 모든 운동은 일정한 목적이 있다.
근대의 기게적 유물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바탕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목적론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기계론적 유물도 움직이는 것이 있고, 변화와 운동은 스스로는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이 최소의 물질적 단위(원자라 해도 좋고, 쿼크라고 해도 상관없다)가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고 다시 배열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보는 점에서 플라톤의 관념론과 비슷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것이 기계론자들의 구호다. 이 사람들에게 열역학 제1의 법칙은 신주단지다. 우주의 총량은 불변이다. 있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바뀌지 않고,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겨나지도 않으므로 우주를 채우고 있는 에너지는 일정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호언장담을 늘어놓는다. "만일에 내가 지금 이 순간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물질 단위들이 놓여 있는 자리와 그것들이 서로 미치는 힘의 방향을 완전히 알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기초로 해서 10만 년 전의 과거나 100만 년 후의 미래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돌일킬수 없다'는 뜻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공간화된, 토막토막 쪼개질 수 있는 등질적인 시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시계에서 확인하는 시와 분과 초로 나누어지는 시간이 있을뿐이고, 앞에 있는 시간과 뒤에 있는 시간이 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으므로 이 시간은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타임머신은 공상의 산물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 '백 투 더 패스트, ' 이것은 스필버그의 세계관만이 아니라, 뉴턴의 세게이고, 라플라스의 세계다.
다시 사진으로 말머리를 돌리자. 강가에 그물 들고 있는 사람은 고기 잡는 이 연장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를 썼다. 이 그물은 반두리라고도 하고 독대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쪽에 대가 있다. 이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이 독대를 만들었을까? 대를 베고, 손으로 땄을 것이다. 대가 대숲에 자라고 있을때, 목화가 밭에서 다래를 달고 있을 때, 둘 다 살아 있는 것이었다. 톱으로 대를 베고, 손으로 솜을 뜯어서 씨아에 넣고 물레질을 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것들은 묵어 있는 물질이 되었다. 어떤 솜이나 실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실로 그물을 짤 수 있다면 다 같은 솜이고 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손에 잡기 쉽고, 고기를 잘 몰수만 있다면 대 마디가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든 열 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물질은 크기를 지니고 있어, 자를 수 있고, 잘라진 부분들을 다시 꿰어 맞추거나 엮을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머리, 지성은 이런 저런 경향을 지니고 있는 여러 운동의 흐름을 응축시키고 고정시켜서 공간화된 사물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해서 '운동' 대신에 '운동하는 것'들의 세계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다. 고정된 이것 저것이 있으면 그 사이에 관계가 생기고, 이 관계가 이런 저런 측면에서 되풀이되면 법칙이 생겨난다. 모든 법칙 가운데서 기계적 유물론자들이 가장 높이 떠받드는 법칙은 인과의 법칙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모든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 짐재된 형태로 들어 있었던 것이고, 모든 원인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결과 속에 현실화한다. "창조? 원인 없는 결과? 자발성? 그런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기계적인 필연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공간화시키고, 분해하고, 조합하여 삶에 필요한 이런 저런 연장과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지성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그러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전혀 다른 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는 "모든것이 주어져 있다"는 주장을 모조리 거부한다.플라톤의 이데아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도, 스피노자의 자연도, 자연과학의 인과적 우주론도 단호히 틀렸다고 한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생명의 운동을 보아라. 생명의 본질은 지속하는 운동이고, 자발성이다. 자발성은 자기가 있기 위해서 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족적인 존재이고,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본질과 같으나, 다른 것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능동적으로 저됨(자기동일성)을 단단히 다진다는 점에서 본질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윗길이다. 자족적인 존재인 생명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이어 가고 확신시키려고 시간을 낳는다. 따라서 시간성은 본질주의의 견해와는 달리 불완전함의 빌미가 아니라 완전하고 절대적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우주는 지속한다." 다시 말하면 우주 자신이 살아 있는 운동이다. 태초에 우주적 생명의 추진력이 있었다. 삶의 도약! 이 추진력은 물질의 저항을 뚫고 무수히 많은 생명체로 진화 이론을 거부한다. 다윈의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설은 이미 없어져 버린 생명체들이 왜 지금 살고 있지 않은가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새로운 종의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우주에 처음 생명이 시작될 즈음 그 어디에 자연선택의 계기가 있었겠는가? 원초적인 생명력을 놓고 따진다면 고등동물보다 하등동물이, 동물보다 식물이 훨씬 더 우월하다. 그런데도 왜 생명은 최초에 달성한 성공적인 적응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날이 갈수록 더 복잡하게 진화해 왓을까? 쇼펜하우어가 말하듯이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때문에? 천만에! 그렇지 않다. 생명은 적의에 가득 찬 이 세상에 살아남겠다고 발버둥치는 보잘것없는 미물이 아니다. 생명의 진화는 물질이 쳐 놓은 필연의 법칙이라는 덫을 벗어나서 자신의 자유와 창조성으로 온 우주를 가득 채우려는 삶 그 자체의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초의 적응에 안주하지 않고 온갖 역경을 뚫고 미생물에서 식물로, 식물에서 동물로,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고등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행되어 온 진화의 과정은 생명 운동이 물질의 저항을 뚫고 쟁취해 낸 위대한 승리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다시 사진을 본다. 이 사진 속에 들어 있던 것들 가운데 지금 본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덧없는 구름 이미 흘러 갔고,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마따나 같은 강에 흐르는 물도 옛 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물질 세계의 변화보다 더 큰 변화가 풀과 나무숲,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온갖 동물들과 지금쯤 툇마루에 걸터앉아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는 고기 잡던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이 사진 속에 있는 사람에게 별다른 큰 사고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살아남아 삶을 지속하고 있을 것이고, 그이의 과거는 이 사진이나 영사기에 걸려 있는 필림의 한 토막처럼 조각조각 나뉘어져 길게 연결되어 있는 대신에 살아 있는 기억으로 현재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삶을 지속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물질의 운동은 열역화 제2의 법칙에 따라 순식간에 이완되어 들질적인 공간에 가까워진다. 크기를 가진 것, 질적으로 같은 것은 우리가 실꾸리에 잠겨 있던 실을 자르고 다시 엮고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물질성과 공간성과 지성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렇다고는 해도 물질이 완전히 공간화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흐름이 물질을 꿰뚫고 유기체를 구성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물질이 완전히 공간으로 바뀌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기계론에 바탕을 둔 과학적 인식이 물질 세계를 설명하는 데 완전히는 들어맞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지성적 인식의 한계는 생명 현상을 대상으로 삼을 때 더 두드러진다. 생명은 공간성을 거스러는 데에서 성립한다.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며 생명과 물질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어떤 불변하는 운동의 방향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참여하는 운동의 방향으로 구분된다. 생명 운동은 믈질 운동과는 달리 능동적으로 미래에 스며들면서 그 시간의 내용을 자기 내부에 보존하는데, 베르그송은 생명의 이 보존 능력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진다." 이것은 바로 생명의 세계요, 창조적 진화의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는 공간에서 성립하는 모든 규정성을 벗어나는, 어떤 합리적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성적 우주관의 전형이 기계적 유물론인데, 공간적 사고를 하는 지성은 유기적인 것을 비유기적인 것으로 분해함으로써 창조적 진화를 이해할 수 없다. 철학의 궁극 목적은 자속하는 우주의 생성, 곧 내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생명 현상의 근원에 '영혼 전체로' 하나가 되는 데 있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생각이다. 저 사진의 풍경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내 앞에 바뀌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저 사진이 공간화된 것, 움직이지 않는 것, 생명이 빠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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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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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대학의 자유
근 3개월 간에 걸쳐 불었던 거센 바람이 이제 겨우 잠잠해진 것 같다. 4.27대통령 선거와 5.25 의원 선거를 앞두고 "교련 반대", "학원의 자유 수호","민주 수호", "공명 선거" 등의 구호를 외치며 수십 차의 가두 데모가 있었다. 급기야는 이로 인해 3명의 학생이 구속되기까지 했다. 이후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데모가 연일 계속되면서 학원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여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학생들의 현명한 자성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4.19 이후 학생들이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왕성해져 나라의 정치적 전환점에서 으례 대학은 큰 진통을 겪어 왔다. 한, 일 국교타결에 관련해 64년과 65년에 휴교 사태가 빚어졌고, 67년에는 선거 부정을 규탄하면서 조기 방학이 있었으며, 69년에는 개헌을 반대함으로써 또 휴교 사태가 있었다. 작년에는 다행히 강의를 제대로 마쳤으나, 이번에는 총선거에 관련해 또다시 큰 소동을 겪었다. 여러 해에 걸친 이같은 경험은 대학의 자유와 학생들의 현실 참여의 타당성에 관해서 깊은 반성을 하게 한다.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장래 인류 역사의 지도적인 전문적 직업인이 될 수 있게끔 기술과 인격을 도야하는 곳이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소임을다하기 위해서 사회는 대학을 현실 격리적인 분위기 속에서 특권적 자유를 허용하고 대학 자체가 자율적으로 대학을 운영하게끔 하고 있다. 물론 현실과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내용은 모두 다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바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먼 안목에서는 인류 사회나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 대학은 사회를 개조 발전시키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사회에 대한 기여가 직접적인 참여보다는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대학이 갖는 사회 공헌의 특유성이라 하겠다. 대학인은 특권적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한다. 대학인의 이러한 자유는 어디까지나 학문 연구에서 주제를 자유롭게 택하고 자료를 무제한 사용하며 자유로운 입장에서 결론 내릴 수 있는 연구의 자유이다. 그렇다고 이 특권적 자유는 사회 생활에서 무제한의 권리를 행사한다는 행동의 자유는 아니다. 대학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연구자로서 연구 기관 속에서의 특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마음대로 행동하고 표현하는 자유는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현실 참여적인 입장에서 대학인은 일반 사회인과 똑같은 입장에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대학이 현실격리적 분위기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려면, 대학의 운영조차도 자율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대학의 자치가 계속 실천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학의 자치는 권리에서의 특권이라기보다는 대학인의 인격적인 성숙에 기초하여 이룰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닌지. 대학의 자치는 특히 대학인의 성숙에 따라 자연적으로 성취되었으면 한다. 대학의 자유를 성실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학인의 인격이 아닌지. 그러면 대학의 자유를 유지하는 대학인의 인격 요인은 무엇인가.
첫째, 엄격한 자제력, 주체성, 도덕성에 입각하여 연구의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 연구 활동이나 그 발표에서도 자기를 주장하는 입장보다는 다수 의견의 종합과 진리 파악에 신중성을 보이며, 현실의 직접적 특수문제보다는 긴 안목에서의 근본적 원리 문제에 치중하는 학구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둘째, 대학인의 인격은 심사숙고하는 면을 지녀야 한다. 현실 사회에서는 그 현실에 참여하고 적응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략과 술수 또는 자기 변장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수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목표의 정당성이 없는 속임수는 용납될 수 없고, 이 경향이 지나치면 정신병 환자로 취급된다. 더군다나 진리를 문제삼고 인격 도야를 과업으로 하는 대학인에게는 목표와 방향이 더욱더 올바르고 이를 위한 수단과 행동이 합치하는 성실성이 요구된다. 원리적인 것을 추구하고 성실성과 순수성을 지니며 이론이나 인격을 지도해 가는, 내면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어야 대학의 참된 자유는 유지된다.
이제 큰바람은 지나가고, 대학은 다시금 고요히 학문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같은 고요 속에서 대학의 자유와 소임의 완수를 위해 대학인 모두의 깊은 반성이 있어야겠다. 특히 이번에 경험한 정치적 회오리의 반복을 근본적으로 제거하고 대학의 참된 자유와 소임을 발휘하는 데 이같은 장해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준엄한 반성과 각오가 요구된다.
"1971년 6월"
학생들의 부적응 문제
학내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부적응 행동을 일으키는 학생들을 문제 학생으로 간주하고, 이런 학생의 예방과 교정이라는 입장에서 이들 문제 행동의 원인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정신 장애자에 관한 정확한 통계 숫자는 얻기 힘들지만, 정신병의 으뜸인 정신 분열증은 전인구의 약1%로 보고 있다. 이 비율대로라면 대학생 1만 명 중 약 1백 명 전후에게 분열증 경향이 있으며, 다른 유형의 정신병도 이와 비슷한 숫자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경증도 대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서 약20% 전후로 추정된다.
1978년도의 신입생 실태 조사에서 보면 정신적인 고민이나 신경성 질환으로 입원 치료한 경험이 있는 학생이 0.9%이며, 입원까지는 아니지만 외래 진료를 받은 학생의 수가 2.7%이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9.5%나 된다. 이렇게 볼 때 약 10% 이상의 학생이 심리적으로 문제되는 학생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병적 행동을 예방하고 교정하는 심리 치료적 조치는 크게 세 수준으로 나누어 적용한다.
1. 원인 제거 조치:병적 행동 발생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을 제거하거나 수정하는 노력을 말한다. 2. 초기 발견 치료 조치:병적 행동을 나타내더라도 아직 만성화하지 않고 심각해지기 전에 발견하고 치료해서 문제성을 극소화시키는 노력을 말한다. 3. 재활 조치:병적 행동 자체는 소대지 못하고 그것으로 유발되는 손상 효과를 극소화시키면서 일단 나타난 결과의 원상 회복과 재적용을 지도함을 말한다.
첫째의 원인 제거 조치를 적용하는 데는 몇 가지 가설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진다. 우선 가설을 열거해 보기로 하자. 첫째 가설은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욕구에 대한 충족 결여로 이상 행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둘째 가설은 환경적 결여가 선천적 조건의 발달 과정에 영향을 주어 병적 행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셋째 가설은 환경적 결함을 교정하고 개인의 기능이 전달되지 않는 것을 수정함으로써 문제 행동을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설에 입각하여 욕구를 적절하게 충족시키고 나쁜 환경을 보충하며 건전하고 생산적인 환경 조건을 조성하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 행동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의 초기 발견 치료 조치에서는 조기 발견과 정확한 진단이 특히 강조된다. 부모, 교사, 의사와 기타 관련자들의 적절한 예비 지식과 노력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셋째의 재활 조치는 시설의 결함을 극복하여 적절하게 교정하고 재적응시키며 일시적인 책임 면제와 노력으로 부담을 감소시켜 주면서 점차 원상 회복으로 이끌어 나가는 방안이다. 대학에서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의 지도에서도 이상의 세 가지 수준의 조치가 그대로 적용된다. 이제 이 세 조치를 합해 대학에서 특히 문제되는 것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즉 경제적 곤란과, 원하는 학과로의 전과가 안 되어 불만 상태에 있는 것, 대인 관계의 부적응, 가치관의 부적응, 그리고 대학 생활의 부적응 등 다섯 가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고 이를 극복하느라 애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생 스스로 해결해 나가면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할 때 여러 가지 문제 행동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1975년과 1976년의 신입생 실태 조사에서 보면, "학비 사정이 매우 곤란하다"는 학생이 약 10%, "다소 곤란하다"는 학생이 30%나 된다. 1978년 11월에 2학년 학생만 조사한 것에서도 "아주 곤란하다"가 9%, "다소 곤란하다"가 25%로 나와 있다. 이들의 부직 유무를 조사해 보면, 부직을 계속 갖고 있는 학생이 19%, 때때로 갖는 학생이 24%, 전에 가진 것이 있는 학생이 34%다. 이러한 자료로 미루어 보아 대학생의 10% 내지 20%가 학비 사정에 어려움이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가 심하고 또 오래 지속될 때 좋지 못한 결과가 오리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태가 학업의 방해 요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풍요롭게 생활하는 동료나 정상인에 대해 대립 의식이 생기고, 이 경향이 심해지면 거부증과 심한 낭비벽을 보이기도 한다. 학생 지도에서 이러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지도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대학이나 학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옮기고 싶으면서도 전학과 전과가 쉽지 않아 고민에 쌓이는 것도 학생들의 욕구 불만의 하나다. 1976년에 고대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보면, 가능하면 전과하겠다는 학생이 전체의 33%나 되었다. 1978년에 2학년만 대상으로 조사한 경우에도 가능하면 전화하겠다는 학생이 29%로 나와 있다. 이들은 계열별로 입학해 그 계열 내에서는 자유롭게 과 선택이 허용되었던 학생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로 문제나 전과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을 잘 살펴보면, 성격적 결함을 지니는 경우도 많다. 성격적인 부적응이 원인이 되어 과 선정을 잘 못하고, 또 그리 잘못되지 않은 현학과에 공연한 불만을 집중시키는 경우도 있다. 현학과에 열중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불평, 불만만 내세우는 경우도 많다. 1977년부터 우리 대학(고려대)은 계열별 입학 제도가 도입되어 2학년이나 3학년에서 구체적으로 학과를 선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제도에서 학생 각자의 무지각과 신경증성이 극복되지 못할 때, 학생들은 안일주의와 유행에 빠져 학과 선택을 잘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에서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가족, 친구, 교사와의 인간 관계에서 불화와 부적응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학생은 의외로 많다. 1978년도 신입생 실태 조사에서 당면하고 있는 9개 문제 중 3개만 고르게 했더니 약 50%의 학생들이 이 문제를 내세웠다. 성별로는 남학생 48%에 비해 여학생은 67%가 이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1975년도와 1976년도의 신입생 실태 조사에서 약 20%의 학생은 가족 중에 불화 대상이 있어서 속썩이고 있다. 특히 부모나 동기간과 원만하지 못해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자녀간에는 세대의 차가 있고 가치관의 차이가 심하다. 그러므로 서로 이해하고 잘 어울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더욱이 청년기 특유의 반항성과 독립성이 가세하면서 웬만큼 너그럽고 성숙한 부모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대의 차와 가치관의 차이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대립도 그리 심하지 않거나 장기화되지만 않으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불화는 그 책임이 부모에게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자녀가 지니는 성격적 결함 특히 의존성과 정서 불안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의존성과 불안정성 때문에 부모나 형제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얻지 못할 때는 기대한 만큼 불만이 생기고, 또 이 때문에 불화도 초래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과 성격적 성숙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인 관계에 장애가 심해서 사람과의 접촉을 꺼려하고 무표정한 경우, 또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늘 불행감에 젖어 못마땅해 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청년기에 해당하는 대학생들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기성 사회의 가치관을 습득하고 스스로 이를 토대로 삼아 자기 나름의 건실한 인생관을 확립시켜 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엔 성인 사회의 가치관을 이미 낡아서 타당성이 적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대학생들이 상당히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에 대치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체계 있고 확고하게 정착시켜 놓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취약성은 행동에 추진력 부족 현상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나라는 현재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 모형을 좇아 현대화에 열중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에는 신, 구 체제가 공존하므로 학생들의 가치관과 인생관도 과도기적이다. 즉 불안을 느끼고 기성층과의 단절감을 지니며 스스로 소외된 듯 고민하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사회는 끊임없이 신체제로의 발전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대학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부적응 또한 커다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학생들이 부적응의 핵을 이루는 자기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은 착실한 현실 참여를 통한 자기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과 인생관의 확립을 중시하는 기풍이 조성되어야 하리라.
"197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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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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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최소한
뮬라 나스루딘이 죽어가고 있을 때 아들을 불러, 그의 곁에 가까이 오도록 했다.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물론 나는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을 듣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여자를 너무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혹은 너무나도 컸기에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생 동안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었단다." 나스루딘은 아홉 명의 여자와 결혼을 했었다. 코란에서 허용하는 최대한도였다. 나스루딘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옥을 자초한 것이었다. 사실 굉장히 괴로웠다. 나는 네가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이제 떠나면 너에게 말해줄 기회가 없으므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가 틀림없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네 아비의 말이니 최소한 이 한 가지만은 명심하거라. 내 아들아, 한 번에 한 여자만, 한 번에 한 여자만을 사랑하거라. 적어도 그것만은 지키도록 해라."
- 한 번에 하나만. 네가 한 번에 두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너는 이중인격자로 보일 것이다. 너는 결국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네가 한 번에 세 여자를 사랑한다면, 너는 세 사람이 될 것이다. 네가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는 여자의 수를 세어 봄으로써 너는 네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세어볼 수 있다. 그것은 너의 내부에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도 손쉬운 기준이다. 네가 오직 한 여자만을 사랑한다면, 너는 단일체로 통일되며 완전해진다. 갈등이 없으므로 너는 건강해진다.
바람둥이
신랑, 신부가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예쁜 엘리베이터 걸이 신랑에게 말했다. "안녕, 내 사랑." 신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리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저 바람둥이 같은 여잔 누구죠?" "아직 당신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 않소?" 신랑은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그녀에게 당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건지 생각만 해도 걱정이 태산같단 말이야."
- 여자에 대한 사랑은 육체적이거나 기껏해야 정신적인 것이므로 영혼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것이므로, 네가 두 스승을 사랑한다면 네 영혼은 분열될 것이다. 너는 완전히 조각조각 분해되기 시작하여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형상과 형태와 통일성을 모두 잃어버릴 것이다. 한 명의 스승과 함께 있다는 의미는 '통일에 도달하는 것'이다.
도둑
경찰서장이 화가 나 있었다. "자네는 이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한 사람도 잡아내지 못했어." 그는 순찰 경관에게 호통쳤다.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 어떤 놈이 데이비스 선생 댁 사과를 훔쳐가고 있다. 가서 그 도둑을 잡아 와!" 그래서 경관은 그곳으로 갔다. 한밤중에 그는 과수원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도망치려는 복면의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쫓아가 붙잡았다. 그가 보따리를 풀자 거기엔 값진 은화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보따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실수했군요. 이것이 사과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 지식은 결코 당신에게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장님으로 만든다. 지식은 당신을 눈 멀게 한다. 앎은 통찰이며 투명하고 순수하다. 지식은 낡은 것이다. 앎은 언제나 새롭고 젊다. 앎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지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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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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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5. 중국대륙을 휩쓴 광기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96년 / 제2차 경제개발 5계년 계회규의결 공포 1996년 / 1, 21사건 발발, 김신조 생포. (국민교육헌장)
1959년 6월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은 인민일보에 (해서, 황제를꾸짖다) 라는 비유적인 수필을 발표했다. 명나라 때 해서라는 관리가 황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그 수필의 한 부분은 (과거의 당신은 매우 조금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말할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마음은 혼미하고 독단적이어서 편견에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여겨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당신의 결점은 셀 수 없이 많다 ... )는 비판이 나온다. 이 비판은 과거 황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모택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모택동은 어느 정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스스로 책임을 많은 핵심당원이 모인 확대 중앙공작회의에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반동세력의 잔존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그들에 대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 이미 전복된 반동계급이 다시 부활을 기도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다시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전체에걸쳐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여, 그 계급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고 격렬하게 전개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모택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가 이러한 비판세력들을 누르면서 중국을 광기의 사회로 몰아가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조짐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그림은 문화대혁명 포스터.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지도에 따라 문화대혁명 사업들을 추진하는 것을 그렸다. 손을 들고 있는 붉은 책은 모택동 어록집.'
61년 1월 북경에서는 오함의 (해서면관)이라는 작품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모택동은 그전에 해서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 연극은 모택동을 지지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요문원의 (해서의 면관을 평한다)는 글이라고 한다. 그 글은 모택동에 비판적인 내용의 글인 북경 부시장 오함의 (해서면관)을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이 바로 모택동을 신격화하는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6년 5월 청화대학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조직되었으며 6월, 10월 (인민일보) 사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1966년 6월 모택동은 북경대학장을 비난하는 하나의 대자보를 널리 공개하기로 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를 비판하는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8월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을 제정하고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숨어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물, 당내의 자본주의적 실권파를 공격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 선봉대를 혁명저인 청소년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 청소년이란 바로 홍위병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년 노동자, 대학생, 중학생, 심지어 소학교 학생 등이 가담한 홍위병 단체가 무수히 만들어지면서 모택동의 외침에 호응하여 일제히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100만인 집회가 열렸으며 모택동은 이러한 광기를 동원하여 유소기, 등소평 등을 자기비판하게 하여 실각시켰다.
67년에 접어들어 각 지역에서 호위병을 중심으로 한 문혁세력은 당과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을 빼았기 시작했다. 67년 1월 (인민일보)는 프롤레탈리아 혁명파로 하여금 자본주의 조선의 실권파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것을 부추키는 사설을 실었다. 상해에서는 당과 정부관리를 밀어내고 호위병 중심의 상해인민공사를 만들기도했다. 이것은 모택동이 생각한 제2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정부는 문혁파들에 의해 탈취된 권력을 하나로 모아 혁명의원회로 통일시켰다. 68년에 이르면 임표가 이끄는 해방군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성립한다. 그러나 홍위병들의 활동은 68년에 접어들어 서서히 약화되고,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점차 사그러드는 양상을 보인다. 모택동은 더 이상 홍위병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 는 말로써 문화대혁명을 진정시켰다. 68년 12월에는 도시 청년, 간부 지식인들을 농촌에서 일하게 하는 하방이 제창되었다. 이제 모택동은 자기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나 인물을 어느 정도 정리했기 때문에 홍위병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문화혁명은 69년에 와서 끝을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표의 해방군이가장 부각되었고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문혁 이전까지 관료층으로서 실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은 밀려났고 문화계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약70만 명이 문혁기간 동안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홍위병에 가담하여 열성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청소년들에게도 마지막 남은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증오, 공포, 그리고 부모나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비탄의 심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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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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弱肉强食(약육강식) 弱(약할 약) 肉(고기 육) 强(굳셀 강) 食(밥 식)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 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 는 뜻이다. 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도 이 말은 전투수칙(?)이나 생존법칙(?)처럼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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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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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턱시도의 어원은 '늑대'
현대 남성들은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재킷과는 색이나 소재가 다른 바지를 입는데 이런 복장은 결코 양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현대적인 정의로 양복이란 웃옷과 바지, 그리고 때로는 베스트가 갖추어진 옷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래 양복이라고 부르던 옷의 정의는 아니다. 또한 양복은 비즈니스용 복장도 아니었다. 신사용 양복의 전통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소재, 모양, 색이 다른 웃옷, 베스트, 바지를 착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아주 넉넉하게 재단하여 벗기에 가깝고 형식을 따지지 않는 컨트리웨어로 만든 옷으로 이른바 '라운지 수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자 전체를 똑같은 천으로 만든 양복이 유행하게 된다. 컨트리 라운지 수트는 승마용으로 입었다. 재봉사는 흔히 재킷 뒤에 슬릿(자락을 튼 곳)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이것이 현대 양복의 '백 슬릿'의 시작이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태어난 특징으로 또 하나가 있다. 라펠 홀(옷깃 구멍)은 실제로는 단추구멍으로, 추운 날 라운지 수트의 옷깃을 세워 단추에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장식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들은 라운지 수트가 매우 착용감이 좋다는 것을 알고 외출복으로도 입기 시작했다. 재봉사는 재단 방법을 개선했고, 1890년대에는 레저용이었던 라운지 웨어가 훌륭한 비즈니스 수트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엽인 이 무렵, 멋쟁이들의 정장인 연미복에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요즘엔 결혼식이나 파티, 야회복용으로 일반화해 있는 턱시도의 출현이 그것이다. 턱시도가 지금부터 100년쯤 전에 턱시도 파크라는 한 마을에서 데뷔하던 날 밤, 이 옷은 정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옷이라고 비난받아야 할 차림이었다.
1800년대 영국 멋쟁이들에게서 태어난 정장으로 당시의 상식이 되고 있던 블랙 타이와 연미복으로 보자면, 연미가 없는 이 상의는 분명히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의는 사회적인 명성과 지위를 갖고 있던 집안 사람이 디자인하고 입었기 때문에 시민권을 얻었다. 턱시도 이야기는 1886년 여름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인 뉴욕 주의 턱시도 파크에서 시작된다. 프랑스계 명문 출신으로 뉴욕인이며 롤리라드 타바코의 후계자였던 피에르 롤리라드 4세는 정기적인 가을 무도회에서 입는 연미복보다 좀더 간소한 옷을 궁리하고 있었다. 롤리라드는 재봉사에게 의뢰하여 당시 영국에서 여우 사냥 의상으로 인기가 높던 새빨간 승마복을 모방하여 뒤에 붙는 제비 꼬리 모양의 연미가 없는 상의를 몇 벌 만들게 해보았다. 롤리라드가 이것을 생각해낸 것은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에드워드 7세가 영국의 황태자로서 인도를 방문했을 때 너무 더워서 상의의 연미를 잘랐다는 얘기에 자극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무도회 날 밤 피에르 롤리라드는 갑자기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갈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롤리라드 대신 그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 몇 명이 검은 연미가 없는 그 디너 재킷을 입고, 영국의 승마복에서 힌트를 얻은 새빨간 베스트를 입고 참가했다. 정장에 대해 매우 엄한 격식을 따지던 1880년대에 새빨간 베스트 차림은 그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토지를 롤리라드 일족이 소유하고 있던 마을에서 일어난 일인 데다가 더욱이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이 롤리라드였고 그 아들이 입었다는 점 때문에, 시선을 끄는 이 의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롤리라드 집안이 갖고 있는 권위 때문에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이 이 약식 의상을 흉내내게 되었고 결국에는 표준적인 야회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메리카 포멀 웨어 협회는 롤리라드 집안이 모반이 거액의 부를 벌어들이는 산업을 탄생시켰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1985년에 턱시도와 그 부속품의 판매 및 대여료는 모두 5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 턱시도 대여의 80퍼센트는 결혼식용이었지만 다음으로 많은 것은 고등학교의 댄스 파티용이었다. 결혼식과 댄스 파티용 턱시도로는 폭이 넓은 사슈벨트의 '카마밴드'가 표준적인 부속품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인도 정장의 일부였다. 힌두어로 '카마르밴드(kamarband)'라는 이 말은 '허리의 밴드'라는 뜻으로 신중함을 나타냈는데 그 전에는 배 밑쪽에 매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리 위치까지 올라갔는데 이것을 영국 사람들이 흉내내면서 호칭도 영국식으로 '카마밴드'라고 바꾸었던 것이다. 턱시도는 물론 그것이 태어난 마을의 이름에서 따왔다. 오늘날 '턱시도'라는 말은 형식적인 느낌과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말은 현재 턱시도 파크라고 불리는 지역에 한때 살던 아르곤키안 인디언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개척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아르곤키안 족의 추장 이름이 '늑대'를 뜻하는 '턱시트'(P'tauk-Seet; 'P'는 발음하지 않는다)였다. 이 추장에게 경의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인디언들이 이 지역을 턱시트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인디언의 말을 귀로 들은 그대로 글자로 옮겼으므로 1765년에 실시한 토지 조사 기록을 보면 'P' tauk-Seet'를 Tucksito'로 쓰고 있다. 피에르 롤리라드의 조부가 이 부근의 토지를 손에 넣기 시작한 1800년 무렵에 그 이름은 이미 턱시도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턱시도'는 이것을 입는 남성이 모두 늑대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별도로 치더라도 인디언 말의 '늑대'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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