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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47호
2012.1.23 (음 1.1)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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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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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 토마스 바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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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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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철
사슴뿔이 달린 머리는 낙타 형상이다. 생김새는 돼지 코에 토끼 눈, 소의 귀를 닮았고, 몸통은 거대한 뱀과 비슷한데 비늘로 덮여 있다. 발은 호랑이 주먹 같은 게 네 개 달렸는데 발톱은 매의 발톱이다. 깊은 못이나 늪, 호수, 바다 같은 물속에 사는 이 녀석은 때로 하늘에 올라가 풍운을 일으킨다고 한다.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의 하나로 꼽히는 상상의 존재인 이것은 용이다.
용은 임금의 얼굴인 용안(龍顔), 임금이 타는 수레인 용거(龍車)처럼 임금이나 제왕같이 비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새해 들어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담은 용 얘기가 많이 나온다. 국회의원 선거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을 꿈꾸는 정치 신인들의 등용문(登龍門)이 될 것이고, 대통령 선거에서는 잠룡(潛龍)들이 맞설 것이다. 큰일 할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와룡(臥龍)들 또한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용의 형상과 기운에 기댄 상술도 눈에 띈다. 가발 회사는 ‘龍毛(용모)단정’ 행사를 내세워 손님을 끌고 있고, ‘달마도’는 ‘흑룡 달마도’로 변신해 팔리고 있다.
서울의 인사동을 비롯한 관광 명소에 가면 눈에 띄는 과자가 있다. 달큼한 반죽 덩어리를 실타래처럼 만든 ‘꿀타래’이다. 네 갈래씩 여섯 번 손으로 뽑아내면 1만6384가닥의 아주 가는 실처럼 되기에 ‘용수염’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가는 국수를 만들어 ‘용수면’으로 내놓는 식당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용수염’은 숲속 촉촉한 곳에서 자라는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을 가리킬 뿐이다.(표준국어대사전) 용의 수염은 그냥 ‘용수’(龍鬚)라고 한다. 용수는 명주실 타래처럼 곱고 부드럽지 않을 것이다. 용 그림을 뜯어보면 수염은 양쪽에 한 가닥씩 뻣뻣하게 나 있을 뿐이니까. 게다가 ‘늘고 주는 탄력이 있는 나선형으로 된 쇠줄’을 ‘용수철’이라 하기에 그렇다. 이틀 뒤면 임진년 진짜 설날을 맞는다. 용수철같이 탱탱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 바루기] 뭉기적거리다, 밍기적거리다
"침대에서 '뭉기적'거리거나 뒹굴대기 일쑤다." 그렇다면 나는 게으른가?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 문요한은 게으름이란 움직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계획만 세우다 허송세월하거나 선택의 순간을 늘 미루거나 결정권을 남에게 떠안기는 수동성이야말로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게으름이란 것이다.
할 일을 하면서 스스로 택한 휴식이라면 '밍기적'대는 것 또한 일상의 여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조금 큰 동작으로 자꾸 게으르게 행동하는 것 또는 몸을 조금 큰 동작으로 느리게 비비대는 것을 많은 사람이'뭉기적' '밍기적'을 써서 표현하는 건 수용할 수 없다. '밍그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뭉그적'을 어근으로 한 '뭉그적거리다' '뭉그적대다' '뭉그적이다'만 표준어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요일엔 늘어져 뭉기적거려야 재충전되는 기분이 들지 않아?"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밍기적대고는 있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어" "그는 고단했던 하루를 핑계 삼아 이불 속에서 눈만 겨우 꺼내 놓고 밍그적이고 있었다"는 '뭉그적거려야' '뭉그적대고는' '뭉그적이고'로 고쳐야 맞다.
'뭉그적'을 두 번 반복해 게으르게 행동하거나 몸을 느리게 비비대는 모양을 나타내는 '뭉그적뭉그적' 역시 '뭉기적뭉기적' '밍기적밍기적' '밍그적밍그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좀 더 작은 느낌의 말은 '몽그작몽그작'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우리말 바루기] 어머님 전 상서
어머님 전 상서.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진작 편지를 올리려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승리의 결과와 쌍방의 해결을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금껏 있었으나 쌍방의 해결은 고사하고 점점 험악하여집니다. 이후로 또 간간이 통지 올리겠사오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이만 아뢰옵나이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키기 1년 전인 1931년 어머님에게 보낸 편지다. 이처럼 부모, 즉 어머니.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어머님(아버님) 전 상서'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버이날인 8일 '엄마.아빠'라는 제목의 글을 이곳에 실었다. 글 마지막에는 "…어머니.아버지의 높임말은 '어머님.아버님'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은 '어버이'다."는 부분이 나온다. 많은 독자께서 살아계신 부모를 '어머님.아버님'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문의해 오셨다. 일반적으로 살아계신 부모를 '어머님.아버님'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편지에서는 존칭인 '어머님.아버님'이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어머님.아버님'이 '어머니.아버지'의 높임말이라는 사실관계는 맞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그렇게 나온다. 다만 어떤 경우에 사용하느냐가 문제다.
'어머님.아버님'은 주로 돌아가신 부모를 이를 때 쓰이지만 편지 글 등에서는 살아계신 부모에게도 사용한다. 그 밖에 '어머님.아버님'은 시어머니.시아버지, 장인.장모, 다른 사람의 어머니.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도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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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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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 송유미
차를 몰다가 엔진이 꺼져버리면 어떡하죠 알맞게 슬픔은 마이너스된 세상 슬픔을 주유하는 곳이 있다면 슬픔을 한 트렁크 담아오고 싶어요 언제였던가요 영안실 빈소 앞에서도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던 사막의 마음, 그 비정함 때문에 간간이 고지대 수돗물처럼 흘러나오던 참으로 비참하던 기억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죠 굳세고 단단한 무쇠여야 살아남을 수 있죠 살아남기 위해 단단히 열쇠를 채워두었던 슬픔의 창고 그 창고를 열고 싶어요 슬픔은 나약한 자의 것, 우울은 가난한 자의 것, 오감이 폐기처분된 세상은 플라스틱 가구처럼 깨끗하죠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 전 마네킹이 되어가죠
아 그리운 슬픔, 아 그리운 그리움 말라버린 나무를 보며 난 생각하죠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수인가를 슬픔을 주유하고 싶어요 입안 가득 슬픔의 잎새를 물고 필리리 필리리… 푸르르게 슬퍼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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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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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역 단상(斷想) - 유권재
플랫폼, 눈앞에 늘씬한 다리 길게 늘여 햇살에 반지르르 윤나는 것이 마치 뒷골목 유리 상자의 마네킹처럼 전시 된 윤락녀의 스타킹 씌운 다리 조명에 번질거리는 섹시 함이다. 이따금 그 위를 숨차게 지나는 열차. 아, 바라만 봐도 울렁거려
기다리는 열차시각은 아직 멀고, 무료함으로 신문 가판 대 앞을 서성이다 문득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궁금하지 도 않은 안부 몇 마디 나누고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전화를 끊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구급차의 사이렌이 살 같이 차도를 가른다. 건너편 플랫폼으로 열차가 숨을 몰 아쉬며 정차한다. 사정(射精)하듯 사람들을 쏟아내고 난 자를 향해 돌진하는 정자처럼 출구를 향해 몰려가는 사람 들. 생겨날 때의 치열함이 본능처럼 굳어있다. 이윽고 내 가 탈 열차가 도착한다. 내 좌석은 3호차 57호석. 사람들 이 몰려들고, 덩달아 부랴부랴 열차에 오른다. 모두들 자 리에서 연신 시계를 보며 재촉하는 표정들.
손에 쥔 내 차표에는 청량이-정동진이라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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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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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운이 - 윤동재
재운이는 일 년 내내 옷이 한 벌뿐이다.
지난번 운동회 총연습 때 일이다. 재운이는 그날도 한 벌뿐인 그 옷을 그냥 그대로 입은 채 깜둥 고무신 신은 발을 짚으로 동여매고 우리 5학년 계주 선수로 뛰었다.
재운이가 힘껏 뛰어 근 십 미터나 뒤지고 있던 우리 청군이 조금 앞서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무 그늘 밑에 책상을 내어놓고 팔장을 낀 채 앉아 보고 계시던 교장 선생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마이크 앞으로 가시더니 청백 계주를 중단시키고 "앞에 가던 아이 빨리 조회대 앞으로 와!"하셨다. 재운이가 뛰어가자 교장 선생님은 대뜸 재운이 볼때기를 힘껏 두 대 후려치셨다. 재운이는 눈물을 닦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우리 청군 응원석은 기가 죽어 더러는 또 재운이가 우는 걸 보고 따라 우는 아이도 있었다. 윗마을의 미애와 승숙이는 볼때기를 맞는 재운이보다 더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 너는 운동회 날 이런 꼴로 운동장에 돌아다녔다간 혼날 줄 알아. 학교 망신을 시켜도 분수가 있지. 머리도 좀 깎고 운동복도 하나 사고 운동화도 하나 사도록 해......
올봄에 교육대학을 졸업하셨다는 우리 선생님도 교장 선생님께 불려가서 우리 청군이 보는 앞에서 백군이 보는 앞에서 재운이가 보는 앞에서 꾸중을 참 많이 들었다.
우리 선생님이 자취하고 계시는 마을 아이들은 그날 저녁 선생님이 재운이를 데리고 가 손발을 깨끗이 씻겨 주고 머리도 감겨 주면서 우시더라는 것이었다. 정말 우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마을 아이들은 선생님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며 우리 선생님 별명을 울보라고 지어 부르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대구에 나가 재운이의 운동복, 운동모, 운동화를 사다주셨다. 그러나 재운이는 아직 한 번도 그 운동복을 입고 그 운동모를 쓰고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나온 적이 없다.
더욱이 재운이는 운동회가 열리던 날은 결석을 하고 말았다. 재운이가 결석했어도 백군을 이기기는 했지만 우리 학년 아이들뿐만 아니고 다른 학년 아이들도 모두 재운이가 계주 선수로 뛰지 못한 것을 몹시 서운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말이 달리듯이 껑충껑충 때로는 팔을 빙빙 휘두르면서 달리는 재운이의 달리는 모습은 약간 우습기도 하고 우리 5학년에서는 가장 잘 달리기도 했었는데......
재운이는 일 년 내내 옷이 한 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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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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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제7장 우유론 - 때로는 빈둥빈둥 놀며 지낼 필요도 있음을 논한 장
5. 운이란 무엇인가
한적을 사랑하는 성질을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노자 철학은 특수한 공헌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행운이니 불운이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위대한 노자의 가르침은 행위보다는 무위, 영달보다는 인격, 행동보다는 평정을 강조한 데 있다. 그러나 마음의 평정은 운명의 변동에 조금도 마음이 교란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위대한 노장파 철학자인 열자는 유명한 새옹의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변방인 요새에 사는 사람으로 마술을 잘하는 자가 있었다. 그 말이 까닭없이 달아나 호 나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달려와서 이를 위로 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어쩌면 갑자기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그 뒤 며칠이 지나 그 말이 호나라의 준마를 끌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또다시 와서 이를 축하했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다시 화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집에는 좋은 말이 많고 그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사람들이 모두 또다시 몰려와서 이를 위로했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이 갑자기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그런지 1년 뒤 호인이 크게 요새로 침입하니 젊은이들은 다 나가 싸웠다. 요새에서 죽은 사람은 열에 아홉이었다. 그러나 혼자 절름발이가 된 까닭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므로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어 그 변함은 끝이 없다.
이러한 철학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인생은 다소의 역운에도 참아 나갈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행운을 동반하지 않은 불운은 없다는 것을 믿는 데 있다. 메달 모양으로 인생의 비운에는 언제나 뒷면이 있다. 냉정을 유지하고 막연한 행동이나 공연히 소란을 피우는 것을 싫어하고, 성공 영달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개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에게는 개의할 아무것도 없다>는 철학이 있는 까닭이다. 성공욕은 실패한 두려움의 별명이라고 극히 총명하게 생각해 버리면 성공욕 그것은 소멸되고 만다. 크게 성공하면 할수록 사람은 실의의 경우를 생각하고 두려워한다. 명성에 대한 꿈이 일단 깨지면 커다란 도피의 이로움을 깨닫게 된다. 노자적 견지에서 보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선비란 성공을 성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패를 실패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반대로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겉으로 본 성공이나 실패가 절대로 참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저 불교의 노장 철학의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불교도의 목표는 일체 무욕이라는 점에 있고 노장 철학자의 그것은 누구나 나에게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는 점에 있다. 사회 대중으로부터 아무것도 요구 받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능히 무애무우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을 따서 노장파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인 장자는 너무 뛰어나게 훌륭해지지 말라, 너무 유능해지지 말라, 너무 남의 도움이 되지 말라 하고 경고하고 있다. 돼지가 잡혀 죽어 제단에 오르게 되는 것은 충분히 살이 쪘기 때문이며, 아름다운 새가 제일 먼저 포수의 목표물이 되는 것은 그 아름다운 깃털 때문이다. 장자는 이런 의미에서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보물을 훔치는 두 사나이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두 사나이는 죽은 사람의 앞 이마를 망치로 때리고 턱뼈를 깨뜨린 다음 이를 부순다. 그것은 모두 어리석게도 입속에 진주를 물린 채 파묻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고 방식을 좀더 진전시켜 가면 결론은 아무래도 이렇게 된다. 사람들이여, 어째 마음을 유유하게 갖지 못하는가.
6. 미국인의 세 가지 결함
그러므로 <개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에게는 개의할 아무것도 없다>라는 훌륭한 철학을 갖고 있는 중국인과 미국인과의 사이에는 기묘한 큰 차이가 있다. 인생이란 정말 그와 같이 번거롭고 귀찮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할 만한 것일까. 중국인적 유유철학의 높은 정신성은 이것을 부정한다. 일찌기 내가 본 광고 가운데서 가장 미국 취미가 잘 나타나 있던 것은 어느 기계 회사의 광고였는데 <이만한 정도라면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Narly Rich Is Not Enough)>f라고 대서 특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 퍼센트의 능률을 바란다는 것은 거의 추한 느낌이 든다. 세상 모든 일이 대충 이 정도라면 이상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미국인의 고민인 것이며,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다시 개량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이만한 정도라면 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미국인에게는 세 가지의 커다란 결함이 있다. 능률, 정확, 공명성공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야말로 미국인을 현재와 같이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이 미국인으로부터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한적한 생활의 권리를 빼앗고, 유쾌하고 한가롭고 아름다운 대부분의 오후 시간을 사취해 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비극적 파국이라는 것은 없고, 사물을 완전히 수행한다는 훌륭한 기술 외에 이룩하지 못한 채 남겨둔다는 좀더 훌륭한 기술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체로 우리가 편지의 답장을 쓰는 데 있어서도 너무 지나치게 빨리 써 보내면 그 결과는 전혀 답장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 되고 만다. 결국 세상에는 아무일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다소 좋은 임명을 놓쳤다 하더라도 그 반면 불쾌한 임명에서 필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편지는 석 달쯤 서랍 속에 넣어 두면 대개 답장을 쓸 만한 일도 없는 것뿐이다. 석 달 뒤 이것을 읽으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일일이 답장을 쓰고 있었다면 꽤 시간을 낭비한 것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정말 죄를 짓는 일이라고 하겠다. 너무 편지만 쓰게 되면 결국 작가는 판매 외교원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며, 대학 교수는 능률이 높은 회사 중역님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우체국에 자주 왕래하는 미국인을 경멸한 도로우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일을 하더라도 솜씨 있게 해치우는 능률 그 자체를 논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인도제 수통 마개보다는 미국제 수통 마개를 믿는다. 왜냐하면 미국제 수통 마개는 물이 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또 인간은 모두 쓸모 있고 능률적이어야 한다느니, 모두 관리가 되어서 권력을 가져야 한다느니, 하고 옛부터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데 대하여 또 다른 사람들은 세상에는 바보가 남아 돌아가고, 언제나 쓸모 있고 바쁘고 권력을 갖고 싶다고 원하고 있으니 세상 일은 그럭저럭 잘 되어 갈 수 있을 것이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기들의 입장을 고집하며 말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오직 요점은 유유히 행동하는 사람과 아둥바둥 하는 사람과 어느쪽이 현명한가 하는 문제다. 능률을 논란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기 때문이 아니다. 능률은 생활을 즐기는 한가로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으며, 모든 일을 완전하게 수행하고 싶은 나머지 우리의 신경을 닮게 하여 시간을 훔치는 도둑이 되기 때문에 괘씸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편집자는 자기가 편집하는 신문 잡지에 오식이 하나도 없도록 뼈를 깎아 가며 애를 쓴다. 중국의 편집자는 그보다는 현명하다. 독자 스스로 다소의 오식을 발견하여 혼자 회심의 흐뭇함에 취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좀더 철저하다. 중국의 신문 잡지는 연재물을 싣는 것은 좋으나 싣다가 도중에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만일 미국에서 그런 짓을 하면 편집자는 그야말로 혼이 나는 판이겠지만 중국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이유는 다만 간단하다.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기사가 다리를 놓으려면 세밀하고 정확하게 숫자를 산출하여 양쪽 기슭에서 뻗어나오는 다리가 한복판에서 1인치의 10분의 1도 오차가 없도록 한다. 그러나 두 중국인이 산 양쪽에서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고 하면 양쪽이 다 제각기 파고 말 것이다. 중국인은 굳이 이렇게 믿는 것이다. 터널만 파고 있었다면 양쪽으로부터의 코오스가 어긋난다 해도 그게 무슨 큰 일이란 말인가. 하나가 될 것이 둘이 되었다 하더라도 통로가 둘이 된 것이니 더욱 좋지 않은가. 급하지만 않다면 터널이 둘이거나 하나이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파기 시작해서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끝내고, 기차가 그 속을 아무 일 없이 그럭저럭 통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중국인은 무언가 일을 하는 데 있어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아주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인은 설계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이 유장한 설계에 따라서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근대 산업 생활의 템포는 이러한 영광스럽고 위대한 유장함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러하 생활 템포는 중국인의 시간 관념과는 달리 시계 만능적인 시간의 관념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인간을 시계로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현장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20만 명의 노동자를 부리는 공장 따위가 그 좋은 예다. 20만 명의 노동자가 언제나 바쁘게 공장 문으로 드나드는 굉장한 광경은 그야말로 경탄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야말로 인생을 격심하게 만들며 열병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느 일정한 장소에 5시 정각에 어김없이 가 있어야 한다면 1시부터 5시까지의 오후는 아무 일도 못하고 만다. 미국의 어른들은 다 학생의 본을 따서 자기 시간을 조절한다. 즉 3시에는 무엇무엇, 5시에는 무엇무엇, 6시 반에는 옷을 갈아입고, 6시 50분에는 택시를 타고, 7시에는 호텔 어느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다면 정말 살아갈 맛이 나지 않는다. 이렇듯 미국인은 대개 이러한 슬픈 상태에 이르러 있다. 참으로 그들의 행동은 내일을 위하여 에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주, 아니 다음 달에까지 걸쳐서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3주일간이나 앞일을 지정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중국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행히 중국인은 무슨 초대장을 받았을 경우 가겠다고도, 못 가겠다고도 답장을 내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갈 생각이라면 <출>, 안 갈 생각이라면 <결, 다사> 하고 쓰는 것은 괜찮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다만 그저 <밍바이>라고 쓸 뿐이다. 그것은 초대의 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는 뜻이며, 참석하겠습니다 라는 뜻은 아니다.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이라면 상해를 떠날 때 1938년 4월 19일 오후 3시에 파리의 위원회에 출석하고, 5월 21일 7시 기차로 비엔나에 도착하겠다는 말을 전할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느 날 오후에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형 선고를 그렇게 미리부터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마음에 내킬 때에 도착하여 마음에 내킬 때에 출발하고 자유로이 여행하여 천하에 거리낌없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결국 미국인이 중국인처럼 유유히 생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사업욕과 행동하는 것을 살고 있다는 것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에 직접 유래하는 것이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걸작이라면 그 작품에 품격이 있을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에도 품격이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품격이라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술의 향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조용한 마음가짐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가는 것을 기다려야만 한다. 미국의 노인 남녀가 오늘날 보는 것처럼 자존심을 획득하고 또 젊은 세대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 활동하고 싶어하는 것은 동양인의 입장에 서면 실로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노인이 너무 지나치게 활동하는 것은 오래 되어 이끼가 낀 대사원의 지붕 위에서 재즈를 방송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노인들은 그저 나이를 먹었다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노인은 언제나 무엇인가 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중년자들이 유유히 생활할 수 없다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데 하물며 늙은 사람에 있어서는 인간성에 위배되는 죄악이다.
품격이라는 것은 늙어서 이루어진다고 할 만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품격이 갖추어지기까지는 시일이 필요한 법이다. 그것은 중년자의 얼굴의 아름다운 주름살과 같은 것이다. 그 주름살이야말로 그 사람이 풍기는 품격이 끊임없이 새겨져서 완성된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작년 형의 자동차를 버리고 새로운 형의 차로 바꾼다는 생활 방법으로는 품격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물건도 우리 자신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1937년에는 여자나 남자나 1937년 얼굴을 하고 있고, 1938년에는 1938년 얼굴을 하고 있다. 옛 사원이나, 오래된 은이나, 낡아빠진 사전이나 인쇄물을 우리는 귀중히 여기지만 노인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감상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컨대 아름다움이란 늙고, 무르익고, 그을은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예언자다운 환상에 잠기는 일이 있다. 그것은 저 밀레니움(예수 부활 후 1천 년간의 이상 시대)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으로 그때가 오면 과연 그 분주 다사하던 맨해턴 거리의 사람들도 유유히 거리를 거닐 것이며, 미국식 <저돌주의자>들도 동양식의 천천히 걷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꿈꾸는 것이다.
그때에는 미국의 신사는 스커트와 슬리퍼 차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을 것이고, 또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브로드웨이의 인도를 한가롭게 걸을 것이다. 반드시 중국인 식으로 양쪽 소매에 손을 찌르고 걸을 필요까지는 없다. 경관은 교차로에서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대할 것이고, 운전수들은 잠깐 차를 세우고 서로 인사를 하면서 길 가운데서 할머니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또 자기 가게 앞에서 이를 닦으면서 한가하게 이웃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무엇인가 멀거니 생각하고 있는 학자가 부드러운 책을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돛처럼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식당 안의 주식 카운터는 없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자동 음식점의 부드럽고도 얕은 안락 의자에 편한 자세로 유유히 걸터 앉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방에서 대낮부터 저녁 때까지 멀거니 시간을 보낼 것을 생각할 것이다. 한 잔의 오렌지 주우스를 마시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 것이며, 술도 단숨에 꿀꺽 마셔 버리지 않고, 유쾌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천천히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병원의 환자 접수 명부는 쓰지 않게 되고, 비상 감시원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며 환자는 의사와 철학 이야기를 주고 받을 것이다. 기차는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달릴 것이고, 타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차를 세워 놓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그 기러기의 수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할 것이다. 이러한 맨해턴 거리의 황금 시대가 도저히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좀더 많은 한적한 오후가 있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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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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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15.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Die Krisis der europaischen Wissenscha ften und transzendentale Phanomenologie(1936) -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
포탄 속에서도 계속 강의한, 학문에 대한 열정 - 조광제(경남대학교 강사)
에드문트 후설은 일생을 학문이라는 외길을 따라 살다 간 철학자다. 그래서 누군가가 후설의 전기를 쓴다면 그 전기를 일반사람들이 많이 읽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후설의 일상사가 무미 건조했으니 따라서 그의 전기는 학문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후설은 학문 업적에 견주어 일반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후설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실존철학의 거장들,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 퐁티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설은 1859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접경지역인 모라비아의 프로츠니츠에서 태어났다. 1870년부터 1876년까지 올뮈츠의 리세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2년간 천문학 공부를 한 뒤, 1878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크로네커와 바이에르스트라스 지도 아래 1881년까지 수학을 전공한다. 그 뒤 후설은 비엔나 대학에서 1882년 "변수 계산론에 관한 기고"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수학 박사 학위를 얻는다. 1883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바리에르스트라스의 조교로 일하다가 결국 1884년 다시 비엔나를 찾은 후설은 거기서 재야 성직자이며 나이 들어 더 이상 교수도 아닌 브렌타노의 철학 강의를 접하고서 감동한 나머지 남은 생을 철학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브렌타노의 추천으로 1886년 할레 대학에 등록하고서 브렌타노의 초기 제자 스툼프의 지도 아래 1887년 6월 "심리학적 분석"이란 부제를 단 [수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얻는다. 브렌타노나 스툼프는 모든 인식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밑에서 지도를 받은 후설 역시 1891년 [산술철학 1]을 쓸 때까지도 심리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후설의 심리학적 글들은 수학의 기초 개념을 아주 상세하게 어떤 심리 과정에서 도출해 내려 한 것들이다. 심리 과정에서 수학의 논리적 개념을 도출해 내는 작업의 바탕에는 수시로 변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생겨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물음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학자들뿐만 아니라 범상한 우리도 논리 법칙, 가령 "A=A" "A=B이고 B=C이면 C=A이다"와 같은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후설은 이런 논리 법칙이 인간의 심리과정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리 법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심리 과정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 따라서 수학의 기초 개념을 심리 과정에서 도출해 내려 한 후설은 결국 이런 변하지 않는 논리 법칙을 언제나 변하는 심리 과정으로 바꾸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프레게라는 위대한 논리학자가 [산술철학] 속에 담긴 이런 심리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고, 20세기의 길목을 들어서면서 후설 스스로에게도 "A=A이고 B=C이면 C=A이다"는 식의 연역적 방법에 들어 있는 이성의 본질이 문제로 떠올랐다. 프레게에게 자극을 받은 결과 결국 후설은 변하지 않는 이성의 본질이 심리 과정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심리주의에서 본질주의 또는 이성주의로 전환하게 된다.
후설의 이런 이성에 입각한 본질주의는 그의 학문적 삶을 끝까지 지배한다. 이성주의로 전환한 결과 처음 나온 책이 그 유명한 [논리 연구](1901)였고, 이 책은 후설을 단번에 위대한 철학자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후설은 이성의 본질이 인간 주관과 무관하게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후설은 인간 주관에서 변하지 않은 본질적인 것이 있다고 보게 된다. 이를 정식화 한 것이 선험적 순수 의식 또는 선험적 주관성이었다. 그리고 본질적인 인간 주관이 있음을 알아내는 데 그가 사용한 방법이 유명한 현상학적 환원, 즉'에포케'라 불리는 판단 중지다. 판단 중지는 변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일단 무효한 것으로 보고,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지식을 찾으려는 사유 절차였다. 이렇게 해서 후설이 발견한 변할 수 없는 것은 선험적 순수 의식이었고, 그 선험적 순수 의식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지식을 모은 것이 선험적 현상학의 내용인 것이다. 후설은, 선험적 현상학의 내용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선험적 주관성이야말로 본질적인 대상들이 성립하게끔 하는 궁극적 주체라고 말하고, 선험적 주관성에 의해 성립하는 본질적인 대상들을 '노에마'('의미 부여된 것'이란 뜻)라 하여 선험적 주관성, 즉 '노에시스'('의미 부여한다'는 뚯)의 작용과 하나로 통일 된 것으로 보게 된다. 세계는 언제나 변하지만 변하면서도 일정한 본질적인 얼개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세계를 늘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얼개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후설은 세계 속에만 본질적인 얼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 속에도 그런 얼개가 있다고 보고, 우리 주관의 본질적인 얼개가 세계의 본질적인 얼개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데 우리 주관의 얼개가 세계의 얼개보다 우선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후설의 철학책이 모두 세 권으로 된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을 위한 여러 이념들](1913)이다. 그 중 특히 제 1권은 후설 형상학의 근본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설명 없이는 우리가 소개하려는 그의 마지막 철학책 [유럽학문의 의기와 선험적 현상학](1936)을 다룰 수 없다. 후설은 자신의 사상을 간명하게 다루고 있는 [데카르트적 성찰](1931)과 형식 논리학이 어떻게 선험 논리에 기초해 있는가를 다룬[형식 논리학과 선험 논리학](1929), 그리고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화](1936)을 생전에 출간했다. 사후에 나훈 책으로는 [경험과 판단](1939) [현상학의 이념](1907) [제1철학](1918-24), [현상학적 심리학](1925) [수동적 종합에 관한 분석](1918-26) [상호 주관성의 현상학을 위하여](1905-35) [사물과 공간](1907)등이 있다. 후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생각들을 미친듯이 속기로 써 내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쓴 글이 신문지 반 장만한 크기 종이로 자그만치 4만 장이나 된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학문에 대한 후설의 정열은 포탄이 쏟아지는 데도 제자들을 교실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강의했다는 일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만년에 이르러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으로 금족령을 받아 족쇄에 채이고, 심지어 엄청난 분량의 수고가 벨기에의 신부 반브레다의 극적인 구출 작업이 아니었으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한 위기도 겪는다. 후설은 1983년에 죽었다.
학문의 위기가 곧 인간성의 위기
후설은 최후의 저작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앞으로는 그저 [위기]라 하자)에서 그의 현상학적 작업 전체가 철학사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말한다. 또 이 책에서 근대에 이르러 그리고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인간이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가, 그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다시 회복하거나 지향해야 할 인간성의 모범은 어떤 것인가를 묻고 대답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학문 일반이 인간의 존재에 무엇을 의미했고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인간에게 가장 문제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 아니겠는가? 철학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인간은 스스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다른가를 탐색한다. 참 독특한 존재다. 인간이 가장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탐색하는 작업이 바로 철학이다. 물론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탐색하고 규정하는가에 따라 인간 존재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와 세계를 어느 정도까지 탐색해 들어가는가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재가 얼마만큼이나 위대한가를 알려 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후설이 [위기]에서 학문의 위기가 곧 인간성의 위기라로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된다. 한 시대의 지배적인 학문 풍토가 어떠한가는 곧 그 시대 인간이 어떠한가를 측정하는 지표인 셈이다.
후설은 모든 학문이 인간의 삶에 기반하고 있고 따라서 삶의 의의와 밀접하게 관련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또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세계에 대해 자유롭게 태도를 취하고 또 그 환경 세계를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재 구성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그래서 후설은 정신적이고 역사적인 것을 포함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리와 규범과 이상을 그려 낼 수 있는 이성의 발현과 이러한 이성을 지닌 인간 존재의 발현을 학문의 모범이 되는 지침으로 본다. 그런데 후설은 당시 하계를 지배한 실증주의가 감각적 확인을 학문의 궁극적 기준으로 내세워 이런 이성의 영역을 포기하고 아울러 인간을 감각으로 확인되는 사실들의 한 조각으로 전락시켜 놓았다고 진단학 이를 '위기'라 한다. 실증주의가 득세하게 된 배경은 모든 것을 양화하여 모든 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근대 물리학의 성공과 그에 따른 문명 사회의 양적인 번영이었다. 후설이 제시한 학문의 이상은 어쩌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꼬리를 감춘 지 이미 오랜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은 후설이 진단한 현대의 위기가 그가 죽은 지 반 세기가 지난 오늘 기정 사실화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후설은 저 학문과 인간성의 이상향을 중세적 존재방식에 저항한 르네상스 시대에서 찾는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혁명적으로 회복하려 한 새로운 인간성을 고대의 '철학적 인간의 존재방식'이라 규정한다. 후설은 진정한 인간을 철학적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 이성에 기초한 원칙을 삶 전체에 스스로 자유롭게 부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면서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새롭게 구축하려 하는 인간이다. 순수 이성은 계산적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초시간적이고 제약 없는 이념과 이상의 이름이다. 반면 계산적 이성은 자기 자신의 당면한 이기적 과제를 해결하기위해 동원되는, 요모조모로 이익을 따지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계산적 이성은 그 과제가 실현될 좁은 영역을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인간적 또는 전세계적 안목을 지니지 못하고 또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철학을 역사의 무대에서 한낱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양적이고 계산적 이성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해 버린 탓이 아닐까? 후설은 이런 계산적인 방식의 인간성 즉 위기의 인간성을 낳은 실증주의적 과학관의 출처를 더듬어 추적한다. 그가 이 과학관의 시조로 꼽는 인물은 갈릴레이다. 갈릴레이는 자연을 수학화함으로써 비로소 물리학을 가능케 한 인물로 규정된다. 갈릴레이가 자연을 수학화했다는 것은 감각에 주어지는 자연의 모든 질적인 차이를 제거하고 자연을 순순기하학에 적중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갈릴레이는 자연을 온갖 형태의 깔끔한 기하학 도형들의 복합으로 바꾼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라이프니츠는 해석기하학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사실을 대수학적 사실로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열였다. 이제 자연은 기하학 도형들의 복합에서 수나 양의 복합으로 바뀐다. 이로써 자연의 양화 가능성이 완결된다.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학문이 곧 물리학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학문이 자연에 접근하는 정밀성은 한층 더 높아지고, 자연을 정밀하게 수학화하는 만큼 학문의 객관적 진리의 자리를 차지한다.
후설은 이같은 위를 둘러싼 세계를 수확화하여 객관화하는 것만이 참다운 진리를 획득하는 길이라는 주장을 객관주의 또는 자연과학주의라 일컫는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을 두 실체로 이원화한 이래 고전 물리학의 시기만 하더라도 자연을 수학화하는 객관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는 영역은 물질 영역뿐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객관주의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이제 정신 영역마저 수확화하고 객관화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달리 말해서 객관주의는 우리 인간 자신을 수학화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뿐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마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여기에다 이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은 모든 학문을 일종의 기술로 간주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에 우리 인간을 둘러싼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객관주의적 학문의 기술로써 처리될 수 있는 존재로 전략한다. 후설은 이런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이 자신이 자라난 토대를 망각하고 자신이 어떻게 잘못된 길로 빠져 들었는가를 전혀 반성하지 못하고 있고 또 본래부터 반성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후설이 내세우는 중요한 두 개념이 있다.'생활 세계'와 '선험적 주체성'이다. 생활 세계는 결코 양화된 생활 세계, 그속에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세계다. 양화된 생활 세계는 이미 생활 세계가 아니고, 자연과학적으로 이념화된 세계다. 여기서 '이념'은 '생활'과 대비되는 것으로 사유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극단화된 형태들이다. 수학화된 자면 즉 수학화된 생활 세계는 이미 그 형태들이다. 수학화된 자연 즉 수학화된 생활 세계는 이미 그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세계다. 과학은 생활 세계를 토대로 해서 나온 것이지만, 과학의 세계는 생활 세계를 바탕으로 사유에 의해 구성되어 나온 이차적이고 인위적인 세계다. 참다운 진리의 세계는 물리학의 세계가 아니라 생활 세계다. 생활 세계는 역사와 문화가 침전되어 있는 세계다. 우리의 생활은 역사와 문화를 떠나서 실 수 없다. 역사와 문화는 결코 수학화될 수 없다. 역사와 문화는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와 질적 결합으로써 형성되고 질적 연관에 따라 전승되기 때문이다. 잘못 양화된 세계와 잘못된 계산적 사유에 젖어 있는 자들은 역사와 문화가 자신의 삶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느낀다. 그들은 당장 양적으로 풍부한 것에 만족한다. 후설은 이제 과학적 사유방식에서 생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방법을 '생활 세계적 환원'이라 말한다. 생활 세계적 환원은 수학화되고 또 기술로 처리될 수 있는 '세계성'과 인간성을 버리고, 순수 이성의 힘으로 세계와 자신을 관통하고 있는 보편 이상과 규범을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전 존재를 실현해 갈 수 있는 인간성과 이런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세계성을 회복하는 방법이다.
한편 후설은 생활 세계와 통일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주체성을 선험적 주체성이라 이름 짓고 이 선험적 주체성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으면서 또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엮어 낼 수 있는 공동적 주체성이라고 규정한다. 이 선험적 주체성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성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다. 후설은 [위기] 이전에 많은 책들에서 이러한 선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누차 제시했고 그 내용을 서술했다. 이제 [위기]에서 후설은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자세히 말한 바 있는 '현상학적-심리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을 써서 선험적 주체성에 이르고자 한다. 한마디로 이 방법은 물리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심리 고유의 영역을 드러내고 자아의 주체성이 여기서부터 어떻게 세계 속의 온갖 실재를 형성해 내는가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설의 [위기]는 한마디로 자연과학적이고 객관주의적인 사고에 맞서는 철학적 투쟁이다. 철학적 투쟁은 철학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위한 투쟁이다. 이 투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 과학에 의해 첨단으로 치닫는 기술과 그 기술 탓에 폐허가 되어 가는 자연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 가운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한다. 그 염려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술에 의해 철저히 지배받지는 않을까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 상황에서 많은 학자들이 후설이 제시한 생활 세계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가령 위르겐 하버마스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상황을 생활 세계가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 식민화된 가운데 사회 상황이 전반적으로 왜곡되고 인간 관계가 정의롭지 못하게 잘못 설정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탈식민화를 주창한다. 우리의 삶은 계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그저 우리의 희망사항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많은 경우에 계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후설이 염려해 마지 않았던 인간성의 위기가 이제 우리에게 현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후설 현상학이 관념론의 색채를 띠고 있어 우리의 삶을 너무 이상적인 방향으로 끌고가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신에 우리의 삶이 결코 그 어떤 객관적인 과학으로도, 그 어떤 기술로도 처리될 수 없는 것임을 밝힌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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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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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셋째 묶음 - 대학생의 소외감
대학생의 소외감
요즈음 학생들은 심각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학생들 스스로 이를 소외 의식이니 세대간의 단절감이니 하는 말로 곧잘 표현한다. 세대간의 단절감이니 하는 말로 곧잘 표현한다. 세대간의 단절감을 논의하는 학생 잡지 좌담회에서 3-4년 전 졸업한 선배는 학생들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선배들은 그래도 항일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반독재 투쟁이라는 확고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명분이 옹호되는 어떤 한쪽의 분위기도 갖지 못한 채 목표가 없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후배들을 보면 우리들보다도 더 불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근대화되어 생활 향상이나 경제 발전은 잘 되어 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정신면에서 볼 때 이처럼 불우한 시대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요즘 사회를 '대중화 사회'라고 하는데, 이 대중화 사회의 특성과 대중 문화가 뿜어내는 독소가 지성인에게 상당한 소외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대학 사회 속까지 대중화 사회의 물결이 흘러 들어와 대학생이 '외로운 방랑자'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최소한 우리가 다닐 때는 무엇인가 가치관을 설정해 보려는 풍토가 미력하게나마 있었고, 그것을 추구해 나가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을 나온 후 후배들을 바라볼 때, 대학생들은 문제 의식이 없고, 문제의 제기도 없고, 책도 안 읽고, 대화를 해보면 참 얄팍한 냄새만 나서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재학생 측은 이를 수긍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적인 무엇을 추구하려고 해도 대중 사회의 광란을 심각한 것을 지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두운 골방에서 얼굴을 찌푸려 가며 원서를 읽기에는 이 사회 분위기가 너무 환락적이고 요란합니다. 또 제가 느끼는 가장 근본적인 불행은 국가나 사회가 우리에게 '너희들의 제일의 적은 누구냐?'라고 이야기하는 그 적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대학생을 부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세대차를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가 불안정해 가뜩이나 소시민적으로 되어 가는 학생들의 요구가 더욱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방황 속에서 '실존주의'니 '허무'니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면 퇴폐적인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사회자께서는 우리에게 확고한 문제 의식이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저로서는 처절한 방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그 무엇을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고만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단절감이란 목표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목표가 있어도 다른 세대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어딘가 불안하고 자기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데서 오는 기분이라 생각된다. 다른 세대의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학생의 역할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 학생들이 역사의 주역 노릇을 하게 될 때는 10년 후이며, 지금은 그때의 준비 과정일 뿐이라는 선배의 주장에 대해 학생들은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신 선배가 하신 말씀에 대해 불만인데요. 왜 젊은이를 미래적 존재로 못박아서 사회와 유리시키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완전히 성인으로서 사회에 발언할 수 있는 권한, 아니 주동적인 역할을 할 사람으로 인정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 과정으로서의 학생 시기임을 자인하면서도 충동적으로 행동을 취하게 된다고 실토한다.
"우리는 지금 내부로 침잠해 들어가서 스스로 자아를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여건이 가만히 두질 않더군요. 정부에 대해 압력 단체 역할을 하는 것은 언론이나 군부인데, 이미 그 역할을 상실해 버렸어요. 남은 것은 학생 뿐인데, 가만히 정국을 보자니 너무나 참을 수 없어 뛰쳐나가게 됩니다"
학생들만이 더럽혀지지 않은 유일한 존재로서 궐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행동만이 남겨진 과업이며 그 행동만이 소중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학생들이 현실에서 단절감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에서 자기를 찾으려는 발버둥은 청년기에 으례 있는 성인으로부터의 독립 요구로 규정될 수도 있다. 이를 학생들이 직면한 현실 상황과 관련지어 검토하기 위해 일찍이 소외 문제를 다룬 에리히 프롬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프롬은 소외감을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경험 방식"이라고 정의하였다. 자기 자신은 자기 생활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자기 활동의 주체자가 아닌 것처럼 느끼고, 다만 자기의 활동과 그 활동의 효과만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한다. 다만 감각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사물을 지각하듯 자기나 타인을 볼 따름이다. 즉 자기를 객체화한다. 그들은 현실을 주체적으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사랑과 이성이라는 생산적 힘을 지닌 주체로서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을 천대하고 미천하게 볼 때 소위 우상 숭배가 나타난다. 자기의 애정, 힘, 사상을 타인에게 투사시켜 그를 초월적 존재로 여기고, 그 사람에게 몰입하여 충족하는 것이 우상적 애정이다. 이러한 소외 인간이 정치 지도자, 국가, 계급에 자신을 투사시킬 때 영웅 숭배, 국가주의, 특수계급 지배 이론이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은 비합리적 격정에 사로잡힐 때 타인이나 자기와의 관계에서 우상화의 소외 현상을 보인다. 권력에 열중하면 스스로 권력욕의 노예가 되어 권력자를 우상화하고, 돈에 지나치게 이끌리면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려고까지 한다.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부분적 힘에 쫓겨 본래의 자기와 유리되고, 이에 따라 스스로가 낯설고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또한 자기 밖의 힘에 의존하려 하고 자기를 투사시켜 그것에 열중한다. 원래 인간은 불안한 존재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주체 의식뿐이다. 즉 자기 자신을 독립된 실체로 의식하고,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자신 에 대해 의의를 느끼고 사는 경우 불안감은 극복된다. 그러나 소외된 인간은 특 정 개인이나 집단에 동조해서 그들에게 인정받아 불안감을 극복하려고 한다.
인간은 또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연에서 벗어나 초월하기 위해 사랑한다. 건전한 인간이라면 자기의 본래 모습과 개별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상대와 자기를 결합시켜 참된 의미의 자기 발전을 도모한다. 서로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상대를 결합시킴으로써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즉 소외 인간은 맹목적 사랑이나 우상적 사랑으로 안전감을 얻으려 한다. 인간은 이성과 사랑으로 생산적인 인생을 살아갈 때 행복을 느끼고 현실의 밑바닥을 통찰하게 된다. 자기의 개별성과 타인과의 동일성을 발견할 때, 세계와 자신과의 생산적 관계에서 증진하는 생의 에너지를 느낄 때 역시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이러한 생의 에너지가 마비됨을 느낄 때 권태감이 생긴다. 소외 인간은 이 권태감을 생산적인 생의 에너지의 촉진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쾌락과 소모 활동을 추가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권태감을 회피하려고 한다. 요컨대 주체적 인간은 생산적인 사랑, 이성, 신념에 살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존경한다. 그러나 소외 인간은 스스로를 천시하며 자기라는 존재를 하찮은 주사위쯤으로 여겨 타인에 의해 쉽사리 조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외 인간은 주체성이 없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흔히 불안스러워 하고 공포에 떨며 열등감이 심해 타인의 인정과 동조를 얻으려고 애쓴다. 프롬은 현대 미국 사회의 불건전성에서 생겨난 소외 인간을 다루었는데, 이 이론이 우리 사회에 그대로 들어맞을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해 주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학생들은 몹시 불안정하고, 사회와 단절감을 느끼면서도 어떤 목표에 열중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마도 프롬의 소외 인간 증후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 이러한 소외의 요인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학생들로 하여금 비합리적 격정에 열중하게 해서 자기 소외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학생들의 독립 운동, 민주주의 운동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빛나는 전통은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도 이같은 운동의 선봉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게 한다. 학생들은 학생으로서의 정상적 역할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이와 같은 사회개혁 운동 담당자로서의 학생 역할에 지나치게 열중하다 보면 자기 소외와 우상화에 빠져 이데올로기적 광신과 급진적 경향에 빠지게 싶다. 둘째, 학생들이 단절감, 소외감을 느끼게끔 하는 것은 현실 사회체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발전 모형에 따라 현대 학생들은 과거처럼 엘리트로 대우받기보다는 고용 후보자로 취급당할 심각한 압력을 느끼므로 자기 평가에서도 심한 열등감을 느낀다. 더욱이 국내 대학의 불신성과 대미 협조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 구성 비율에서는 외국 유학생 비율이 높다. 또한 특수 연구소에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데 대학은 황폐화되다시피 버려져 있다. 이러한 사회와 대학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스스로의 취약성을 실감하며 자기 소외에 빠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셋째, 학생들이 대학 생활 중 자기 방향의 정립에 극심한 방황을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교육 제도와 교육 실태에도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다. 최근 각 대학에서 교양 학부를 설치하고 교양 과정에 더욱 주력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 입시 준비에 지나치게 주력하고 있는 나머지 청년기에 이룩해야 할 자기 발견과 가치관 정립에 밑받침될 교양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러한 결함을 대학에서라도 고쳐 보려는 노력이 바로 이 교양 학부 방안이다. 그러나 이미 대학이나 과 선정이 무책임하게 이루어진 뒤라 이를 수정하기는 어렵고, 학생들이 당면하는 여러 문제들은 대학 공부에만 열중할 수 없게 하는 요인들을 지닌다. 이 때문에도 학생들은 심각한 고민으로 마음의 방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넷째,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학생 세력의 움직임에 관련된 학생들의 고민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단편적으로 들어오는 외신만 보더라도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이 자기들의 존재를 크게 선양하고 어떤 세력을 형성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이에 우리 학생들도 자기네 역할에 대해 뭔지 모를 중요성을 절감하며 이제야말로 학생들이 역할 할 시대라고 자처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덮어놓고 대학 당국이나 사회에 반항하고 하찮은 권리 주장을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다.
외국 학생들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문제 의식이나 논점이 있듯이 우리 학생들도 현상황에 절실한 요구를 내세워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이같은 문제 파악이나 자기 역할의 발견에는 폭넓은 교양과 사색의 힘이 요구되므로 교양이 부족한 학생들은 문제 파악에 아무리 안간힘써도 신통한 해결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여기에는 문제 의식도 없고, 문제 제기도 없고 그저 무엇을 찾으려는 발버둥만이 있게 된다. 이같은 지성의 빈곤이나 문제 제기로 향한 발버둥과 학생 스스로의 존재를 내세우려는 지나친 격정은 외부 정치 세력을 우상화하게 하고 그들의 유혹에 말려들어 가는 과오를 범하기 쉽다. 한마디로 자기 나름대로의 학생 운동을 하지 못하는데 자기 비하 내지 자기 소외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소외감, 단절감을 해결하는데 도움될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 학생들은 너무 자기 주장, 명성, 인정 요구를 앞세우지 말고 참된 현실 이해에 입각해서 자기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과 사색을 통한 인생관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 발견이 이루어질 때 대학 생활은 충실해질 수 있으리라. 둘째, 우리 사회의 빛나는 전통이라고 믿고 있는 학생의 사회 개혁에서의 선봉 역할이 참된 의미에서 빛나는 전통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준비 과정에 있는 학생이 뛰어나와야만 할 긴급성이라는 것과, 새싹만이 가능성 있고 기성은 완전히 쓸모 없는 존재라는 식의 상투적 주장에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셋째, 사태 파악이나 사고를 하는 데서도 학생들이 지나치게 이분법과 실무율을 따르려는 것이 문제다. 4.19의 교훈이 보여주듯 부정에 대립되어 있는 것 모두가 정의는 아니며, 어떤 것이든 일률적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현실은 객관식 시험 문제처럼 '예''아니오'로만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197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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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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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힘
한 어린아이가 정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주위에서 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커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네 힘을 다 사용하고 있지 않구나." "아니에요. 저는 모든 힘을 다 쓰고 있는 걸요.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청하지 않았잖니? 그것도 역시 너의 힘이란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데도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더구나. 그것이 네 힘을 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 테크닉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에너지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신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테크닉만을 갖고 명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고릴라 잡는 방법
한 고릴라 수집가가 고릴라를 더 많이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아프리카로 갔다. 그는 백인 사냥꾼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한 마리 잡는데 얼마입니까?" 수집가가 물었다. "내 몫으로 500달러, 저기 총을 들고 있는 키가 작은 피그미 몫으로 500달러, 그리고 내 개 몫으로 500달러를 받습니다." 수집가는 왜 개가 500달러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1,500달러면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여 분배 방식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서 백인 사냥꾼은 나무 위에 올라가 감시하고 있다가 고릴라가 밑에서 올라오면 고릴라의 머리를 때렸다. 고릴라가 땅에 떨어지면 개가 달려가서 이빨로 성기를 물어서 고릴라가 꼼짝못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에 사냥꾼은 나무에서 내려와 우리를 가지고 와서 고릴라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수집가는 놀라서 사냥꾼에게 말했다. "정말이지 멋있군요! 이런 방법은 내 생전 처음 봅니다. 당신은 확실히 500달러 값을 하는군요. 그리고 저 개도 대단하군요. 그렇지만 총을 들고 있는 저 피그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군요." 사냥꾼이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걱정마십시오. 그도 제 몫을 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고릴라를 계속 한 마리씩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고릴라를 만났다. 사냥꾼이 나무에 올라가 막 고릴라의 머리를 후려갈기려고 하는 순간, 고릴라가 몸을 돌려 먼저 그를 후려갈겼다. 사냥꾼은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피그미에게 고함을 질렀다. "개를 쏴! 개를 쏴!"
- 이것은 테크닉 지향적인 마음이다. 모든 가능성에 대해 준비를 해두고 체제에 허점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인 인간은 그렇게 계획적으로 살지 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신이 들어올 수 있는 많은 허점을 남겨둔다. 종교적인 인간이란, 사실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인간이다. 우리가 어떻게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계획을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한계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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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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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94. 수정주의 대 교조주의 - 중, 소의 이념대립 (196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60년 / 4, 19 학생의거 1961년 / 5, 16 군사혁명 1962년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성안
중국공산당은 1921년 공산당의 창립 때부터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계속 받았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직후에도 모택동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국제사회에서 벌언권을 강화해나가면서 점차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특히 소련과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1950년대 미국에 대한 입장이었다. 중국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가능하면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그외에도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는 12개국이 참가한 공산당 회의가 열렸다. 모택동은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이회의에 참석, 미국과의 핵전쟁도 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한다. 58년 2월 3일 (인민일조)는 다음과 깉이 말하고 있다.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각국의 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국제환경은 의연히 자본주의 제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지본주의 집단들은 우리들을 전복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소련이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평화를 원하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는데에 대해 중국은 아직도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에 대한 공격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은 소련이 사회주의의 순수성을 포기한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는 데 비해 소련은 중국이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지않고 사회주의의 원칙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교조주의라고 비판한 것이다. 서로 간의 대립은 중국으로 하여금 소련에 의존하지않는 국방력 건설, 스스로의 힘에의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하도록 했다. 그러한 중국의 독자적 군사력 강화계획은 결실을 맺어 1964년 최초의 원폭실험에 성공했으며, 67년에는 수폭실험에도 성공했다.
58년 7월 모택동과 흐루시초프 사이에 중, 소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중소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극동의 방위체제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련이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의 핵을 소련의 통제아래 두고자 하는 의도였다. 중국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소련은 이에 대응, 원자폭탄의 견본과 생산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약속을 무효화시켰으며, 소련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59년에는 티베트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인해 중국과 인도가 대립하게되자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고 나섰다. 당연한 결과로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대립은 대규모 전쟁으로 번졌고, 소련은 인도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한다. 대외정책 면에서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50년대 60년대 초까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소련은 이러한 나라들에 대해 무장투쟁보다는 정치적압력과 협상에 의한 독립을 권했고, 신흥독립국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속박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경제원조 정책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소련은 지역적인 분쟁이 확대되어 미국 등이 개입하는 핵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혁명과 같은 방법이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민족해방의 모범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세력들을 적극 지원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 독립국들 상당수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이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양진영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새로운 제3세력의 중심국가로 역할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중국은 이제 소련을 더 이상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노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수정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소련을 제국주의 미국이 공모자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이제 중국은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파악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만 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전쟁의 위혐을 내세우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제국주의를 실천함과 동시에, 초강대국 두 나라 사이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공모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도 제국주의이지만 소련 역시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지도자들은 이 두나라를 제1세계로 보고 그보다 국가의 힘이 좀 약한 서유럽과 일본 등을 제2의세계고 파악했다. 중국으로 볼 때 이 제2세계는 각국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면 미국과의 관계를 약화기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나라들은 제3세계로 파악한다. 제3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국으로 끊임없이 제국주의에 의해 군사적인 의협과 아울러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는 나라들이다. 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을 '세계인민의 적'으로 지칭했으며 소련을 미국의 공모자로 불렀다. 따라서 중국의 대외정책은 이 두 나라에 적대하면서 제2세계 일부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노력하는 것 되에 주로 신생독립국들과 비동맹권을 형성하는 데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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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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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鏡高懸(명경고현) 明(밝을 명) 鏡(거울 경) 高(높을 고) 懸(매달 현)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함양(咸陽)궁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들 가운데, 너비가 4척, 높이가 5척 9촌으로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臟)이 나타났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환부가 나타났으며, 이 거울은 사람의 나쁜 마음까지도 비춰 보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보았다.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던 혼란속에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明鏡高懸(a clear mirror hung on high) 은 진경고현(秦鏡高懸) 이라고도 하며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 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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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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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5. 스칼렛은 배꼽티를 좋아했다
바지 때문에 탄생한 옷은?
패션사 연구가는 허리춤에 넣어 입는 근대의 와이셔츠는, 스커트에 맞추어 블라우스가 탄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바지에 맞추어서 탄생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전에는 남성용이든 여성용이든 '셔츠'란 몸 전체를 덮는 것으로서 무릎 또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허리를 벨트로 조였다. 바지와 뒤이어 나온 스커트의 등장으로, 허리 밑까지 내려가는 셔츠는 천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었고 결국 새로운 의상이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남성 와이셔츠가 1500년대의 서유럽에 나타났다. 이것은 속옷을 따로 입지 않고 바로 입을 수 있었다. 1800년대가 될 때까지 표준적인 복장으로서의 속옷(언더셔츠)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블라우스가 나타난 것은 그보다 훨씬 늦은 19세기 후반이다. 넉넉하고 옷깃은 높고 팔이 길며 팔목은 단단히 조인 스타일이었다. 여성들이 블라우스를 즐겨 입게 되자 훗날에는 블라우스와 함께 입는 옷인 카디건(스웨터)이 등장한다. 앞에 단추가 달리고 옷깃이 없는 울 카디건은 제7대 카디건 백작인 제임스 토마스 블루덴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을 지휘하고 있던 블루덴넬은 1854년 10월 25일, 그 유명한 경장비 여단을 이끌고 싸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이 사건은 테니슨이 시로 써서 불후의 이야기가 되었으나, 오늘날 제7대 카디건 백작은 자신이 입어 확산시킨 울 니트 카디건으로만 이름이 알려져 있다.
1890년대에 영국의 폴로 경기자가 입는 표준적인 복장은 흰색 린넬 바지, 흰색 울 스웨터에 긴 팔의 흰색 와이셔츠였다. 와이셔츠에는 크고 반듯한 옷깃이 붙어 있어서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바람에 날리거나 말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폴로 경기자는 옷깃이 펄럭이지 않도록 뒤를 고정시켜 달라고 언제나 재봉사에게 주문하곤 했는데, 두 개의 단추를 달아 고정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00년 브룩스 브라더스 의료품 회사 설립자의 아들인 존 브룩스는 이 버튼다운 칼라에 주목했고 '폴로 칼라'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모양의 와이셔츠를 브룩스 브라더스의 상품 라인에 집어넣었다. 이 모양은 이제 고전적인 스타일로서 '버튼다운 셔츠'라는 말로 정착했다. 메리 아가시의 단편소설인 "버튼다운 셔츠를 입은 남자"에서는 원래의 뜻 그대로 사용되고 있고 코미디 작품집인 "The Button-Down Mind of Bob Newhart(돌대가리 봅 뉴허트)"에서는 제목이 나타내듯이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옷깃의 이름은 로드바일런 칼라, 피터팬 칼라, 네일 칼라등처럼 그 옷깃을 확산시킨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폴로 칼라는 버튼다운(옷깃을 버튼(단추)으로 고정시켰다)이라는 기능 때문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폴로 경기가 존 브룩스에게 버튼다운 셔츠를 제작하게 만들었듯이, 보스턴 가방 가게의 쇼윈도에 장식되어 있던 악어 가죽 옷가방은 프랑스의 인기 테니스 선수인 르네 라코스테에게 악어 마크가 붙은 셔츠 제작을 착안하게 만들었다. 1923년 프랑스의 데이비스 컵 팀과 함께 미국 원정 여행을 갔던 19세의 라코스테 선수는 한 가게의 쇼윈도에 있던 악어 가죽 옷가방을 보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의 시합에 이기면 저 비싼 가방을 살 것이라고 팀 동료들에게 말했으나 결국 시합에 져서 가방을 사지 못하게 된다. 팀 동료들은 그를 놀렸고 그 후로 라코스테는 '악어'라고 불리게 된다. 르네 라코스테는 1929년에 테니스계를 은퇴한다. 4년 뒤에 테니스 셔츠를 디자인하기 시작한 라코스테는 자신의 별명이었던 '악어'를 상표로 만들어 등록했다. 오늘날 그의 제품을 '악어(앨리게이터) 셔츠(alligator shirts)'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실 이것은 잘못 부르는 말이다. 라코스테는 자신이 트레이드 마크로 삼은 파충류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했다. 라코스테가 셔츠 상표로 만든 코가 긴 악어는 같은 악어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악어목 악어과에 속하는 크로코다일(crocodile)이며, 앨리게이터는 코가 그다지 길지 않은 악어목 앨리게이터 아과의 악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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