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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39호
2011.12.26 (음 12.2)/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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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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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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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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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인간의 심리나 도의를 따진 책이 많다. 그러나 그 책 속에서 독자에게 드리는 말, 추천사, 서문, 목차따위를 제외하고 나면, 책의 내용이 될 만한 페이지는 얼마남지 않는다. ─ 라 브르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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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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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as’
크리스마스는 성탄절과 한 뜻이다. 성탄절은 대부분의 기독교가 기념하는 최대 축일로서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예수 성탄 대축일’, ‘그리스도 탄신일’이라고도 하고 대한민국 법정 명칭으로는 ‘기독탄신일’이다(위키피디아). 크리스마스가 12월25일로 정해진 것은 4세기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X-mas’로 쓰기도 한다. 이 표기를 두고 “‘X-mas’의 ‘x’는 예수 탄생일을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붙인 ‘미지수를 나타내는 기호 x’”라며 그럴싸한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X-mas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그리스어인 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X’에 예배와 미사를 뜻하는 고대 영어 ‘mas’를 붙여 만든 표기이다. 그래서 ‘엑스마스’가 아닌 크리스마스라고 읽는다. 그리스도는 예수에 대한 칭호로 머리에 성유(聖油)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나 구세주라는 뜻이다(표준국어대사전).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역한 게 기독(基督)이고,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섬기며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개신교뿐 아니라 천주교(가톨릭교)와 성공회, 정교회 등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천주교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는 그리스어 ‘ΧΡΙΣΤΟΣ’(그리스도)에서 X와 P 두 글자를 따서 만든 모노그램(합일문자)이다.
이번 성탄절은 무척 추우면서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전한 기상청의 날씨 예보를 보니 거슬리는 대목이 눈에 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새벽에 서울, 경기, 강원 영서,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1~3㎝ 내외의 눈이 내릴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 문장은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새벽…’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브(eve)는 ‘명절이나 축제일 따위의 전날 밤’으로 크리스마스이브는 성탄 전야, 곧 24일 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우리말 바루기] 단추를 꿰매다
다음 중 바른 표현을 골라 보시오.
① 떨어진 양복 단추를 꿰맸다. ② 구멍 난 양말을 꼬맸다. ③ 틀어진 일을 꼬맸다. ④ 교복 허리에 단추를 다시 달았다.
언뜻 보면 모두 맞는 말 같다. 그러나 바른 표현은 단 하나다. 어떤 게 정답일까.
①번과 ④번부터 살펴보자. 단추는 꿰매는 걸까, 다는 걸까. '꿰매다'는 '옷 따위의 해지거나 뚫어진 데를 바늘로 깁거나 얽어매다'는 의미이고, '달다'는 '물건을 일정한 곳에 붙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추는 '달아야' 하는 것이지, '꿰매야' 하는 게 아니다.
다음으로 ②번을 보자. "구멍 난 양말을 꼬맸다"에서 '꼬매다'는 '꿰매다'의 강원도.경기도.경상도.충청도의 방언(사투리)이다. 따라서 "구멍 난 양말을 꿰맸다"가 바른 표현이다. ③번도 "틀어진 일을 꿰맸다"고 해야 한다. '꿰매다'는 '옷.양말 등의 해진 곳을 바늘로 깁거나 얽어매다'는 의미 외에 '어지럽게 벌어진 일을 매만져 탈이 없게 하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정답은 ④번.
[우리말 바루기] 하느라고, 하노라고
ㄱ. 바쁘게 일을 (하느라면/하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됩니다. ㄴ. 교실 청소를 (하느라고/하노라고) 집에 빨리 올 수 없었어요. ㄷ. 내 딴에는 열심히 (하느라고/하노라고) 했는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돛단배가 지나가는 푸른 바다를 보고 있느라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그 노래를 듣느라면 옛 친구가 생각난다"처럼 '-느라면'이라는 어미를 쓰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느라면'은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느라면'은 '-노라면'의 잘못으로 나온다. '-노라면'은 '…하다가 보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ㄱ을 비롯한 위 예문들은 '하노라면' '있노라면' '듣노라면' 등으로 써야 한다.
ㄴ과 ㄷ도 헷갈리기 쉬운 경우다. 어미 '-느라고'와 '-노라고'는 뜻이 다르다. '-느라고'는 앞에 나온 말이 뒤에 나오는 말의 목적이나 원인이 됨을 나타낸다. "그는 화를 참느라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중간고사 준비를 하느라고 잠을 못 잤다" 등이 제대로 쓴 예다. '-노라고'는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도나 목적 등을 나타낼 때 쓴다. "글씨를 예쁘게 쓰노라고 썼지만 어머니는 만족하지 않으셨다"처럼 쓸 수 있다. 따라서 ㄴ은 '하느라고'가, ㄷ은 '하노라고'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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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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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최승자
그 많은 좌측과 우측을 돌아 나는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다.
도처에서 물과 바람이 새는 허공의 방에 누워, "내게 다오, 그 증오의 손길을, 복수의 꽃잎을" 노래하던 그 여자도 오래 전에 재가 되어 부스러져내렸다.
그리하여, 이것은 무엇인가. 내 운명인가, 나의 꿈인가, 운명이란 스스로 꾸는 꿈의 다른 이름인가.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들이 넘치고,
살아 있음에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무엇을 더 보내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 일찍이 나 그들 중의 하나였으며 지금도 하나이지만, 잠시 눈 감으면 다시 닫히는 벽, 다시 갇히는 사람들, 갇히는 것은 나이지만, 벽의 안쪽도 벽, 벽의 바깥도 벽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 세계 벽이 꾸는 꿈.
저무는 어디선가 굶주린 그리운 눈동자들이 피어나도 한평생의 꿈이 먼 별처럼 결빙해가는 창가에서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의 나라 그 물빛 흔들리는 강가에 다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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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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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그 불변의 평화 - 유권재
아내의 머리모양이 슬며시 바뀌거나 사소함에 있어서도 목소리를 높이거나 모른 척 지나치기엔 불편하기 그지없는
때로는 따분하고 지겹기도 하겠지만 일상에서 불러대는 아내의 이름처럼 더러는 변치 않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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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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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공재동
즐거운 날 밤에는 한 개도 없더니 한 개도 없더니
마음 슬픈 밤에는 하늘 가득 별이다.
수만 개일까. 수십만 갤까.
울고 싶은 밤에는 가슴에도 별이다. 온 세상이 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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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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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1 - 임어당
5. 삶을 사랑하는 자 - 도연명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와 소극적인 견해를 적당히 융합시킴으로써 조화있는 <중용>의 철학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활동과 활동하지 않는 것의 중간에 산다는 것을 뜻하며, 성급하게 마음을 죄며 헛되이 애쓰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며, 세계의 온갖 철학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러한 사고 방식이야말로 가장 건전하고 행복한 처세 철학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조화시키면 조화 있는 개성을 기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조화된 개성이야말로 인간이 갖추려고 하는 온갖 교양, 그리고 교육의 목표로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목해야 할 일은 이 조화된 개성에 의하여 우리는 인생의 기쁨과 사랑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면 어떤 우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진실로 삶을 사랑한 인물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편이 편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문화가 낳은 최대의 시인이며, 최고의 조화적인 소산인 도연명은 중국 예술의 전역사를 통하여 가장 완전하게 조화된 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인격자였다고 해도 중국에서는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별로 높은 벼슬을 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세나 사회적인 공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남아 있는 저술이라고 해 보았자 불과 몇 편의 시편과 두 서너 가지의 논문이 있는 데 지나지 않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수백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도연명 그는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빛이며, 후세의 군소 시인이나 문인들에게 최고의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상징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샐활을 보면 그가 지었던 시풍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맛이 스며 나와 있어 그보다는 혈기 왕성하고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에게 주어진 지위는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맞은 전형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경우는 속세의 욕망에 반항한다고는 하지만 전혀 그 욕망에서 도피하지도 않고, 관능을 잊지 않는 생활과 잘 조화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약 2백 년 동안에 걸쳐서 문학적인 낭만주의, 한적한 노래 부르며 찬양하는 노장열, 즉 유교에 대한 반역이 유행했지만 마침내는 유교 철학과 협력하여 도연명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화적인 성격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도연명의 사상을 살펴 보면 사물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가 있기는 있지만 그 어리석은 자기 만족의 경지에서 벗어났으며 회의 철학은 본디 지녔던 그 준열한 반역성을 버리고(도로우에게조차 아직 그 냄새가 가시지 않아 미숙한 느낌이 든다) 인간이 지닌 예지가 비로소 관대한 해학의 느낌 속에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이야말로 저 현묘하고 특이한 중국인적인 교양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애착과 고답적인 정신, 금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정신성과 유육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유물론의 불가사의한 결합인 것이며 거기서는 관능과 정신이 하나의 조화 속에 병립되고 있다. 짐작컨대 이상적인 철학자란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은 이해하나 아례를 잃지 않으며, 인생을 깊이 사랑하기는 하나 스스로 절도를 잃지 않으며, 속세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다같이 허망함을 깨달아 세상 일에 초월하여 대관은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속세를 적대시 하지 않는 선비를 말하는 것이다. 도연명은 정신면에서 성숙해진 결과 이와 같은 참된 조화의 경지에 이른 것이며, 거기에는 내적인 정신면에서의 상극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가 남긴 시와 같이 자연스럽고 솔직한 것이었다. 도연명은 기원 4세기 말에 어느 뛰어난 학자이며 관리이기도 했던 사람의 빼어난 증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였던 분은 분주한 것을 즐겨한 사람으로 언제나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한 무더기의 기와를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오후가 되면 다시 먼저 있던 곳으로 다시 옮겨 놓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연명은 그 청년 시대에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보잘것 없는 공직에 있었던 일이 있으나 머지 않아 그만 두고 전원으로 돌아가 하나의 농부로서 스스로 밭을 갈았으나 마침내 병을 얻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친척과 친구들에게 묻기를 <논과 밭을 유지하기 위하여 방랑 시인이 되어 돈을 벌며 돌아다니는 것이 내 성미에 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 가운데한 사람이 애쓴 보람이 있어서 구강에서 가까운 평택의 태수 자리 하나를 얻어 주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술을 몹시 좋아한 점이었다.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손님과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술만 있으면 비록 상대하는 주인과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또한 그밖의 경우 자기 자신이 주인인 경우라도 자기가 먼저 취하게 되면 언제나 이렇게 손님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취해서 자고 싶으니, 여러분들은 모두 돌아가시오>
그는 현악기인 금을 한 틀 가지고 있었는데, 줄은 하나도 없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악기로서 굉장히 느리게 쳐야 하며, 마음이 조용히 맑게 가라앉았을 때에야 비로소 제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술을 마신 뒤에 음악적인 감흥이 일어나면 이 무현금을 어루만지며 흥취를 풀곤 했다. <이제 금의 진미를 맛보았거늘 어찌 줄 당기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 보냐> 겸허하고 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품을 지녔던 그였으므로 사람들과 사귀기를 몹시 귀찮게 여기곤 했다. 도연명을 숭배하던 강주의 자리 왕흥은 간절히 그와 친히 사귀기를 바랐으나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명은 매우 순진하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혼자서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는 것은 본디 성품이 사교 생활에 맞지 않기 때문이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집에 있는 것이오. 세상 일에 뛰어다니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더욱 더 아니오> 그 무렵 연명이 그 기슭에서 살고 있던 대려산의 산 속에는 선종에 속하는 고승들의 훌륭한 종단이 있어 대학자였던 승장인 혜원법사가 연명을 초청하여 그들의 종단 백련사에 가입하게 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연명은 산에서 사는 사람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는데 그가 술을 마셔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불교도의 금주계를 깨뜨려도 상관 없다면 가겠다고 하여 그는 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단원으로서 이름을 적어 넣으려는 단계가 되자, 그는 이맛살을 찡그리고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 승단은 사령운과 같은 대시인까지도 가입하려다가 못했던 것이다. 연명이 도망쳐 돌아온 뒤에도 승장은 여전히 호의를 보여 어느 날엔가는 또 하나의 노장과 친구인 유수정과 함께 연명을 술자리에 초대했다. 이리하여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승장은 불교를 대표하고 연명은 유교를 대표하고 육수정은 도교를 대표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혜원법사는 날마다 산책할 때 호계교를 결코 건너지 않았다는 규칙을 엄히 지켰는데 그날은 친구와 함께 연명을 전송하느라고 걷다가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넋을 잃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었다. 이 세 노인이 크게 웃는 모습은 호계 삼소도라고 해서 중국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무 데도 구애됨이 없으며 근심 또한 없는 경지에 도달한 세 명의 현인들의 환담하며 기쁨을 즐기는 상징이며,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류의 교의가 유우머이며 감각으로 통일되었음을 말해 주는 그림이다.
도연명은 이와 같은 일생을 보냈다. 아무것에도 걸리는 것 없고, 근심 없는 한 가난한 농사꾼 시인, 현명하고 명랑한 늙은이로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술과 전원을 노래한 조그만 시집이나 그때그때 지은 두서너 편의 수필이며, 자손에게 보낸 한 편지, 희생자적 마음이 넘치는 세 수의 기도문(그 중 하나는 그 자신에 대한 글이었다), 또는 그의 후손에게 남긴 몇 가지 교훈들을 음미해 보면 완전무결한 자연스러움에 이르렀으며, 일찌기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는 조화적인 생활에 대한 정감과 재능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기원 405년 11월, 태수의 자리를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정했을 때 그가 지은 귀거래사에 실려 있는 것은 것은 그가 지녔던 이 위대한 인생에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
귀거래사
돌아가리라, 내 전원이 거칠어져 가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내 마음이 육신의 종이 되었거니, 어찌 헛되이 홀로 슬퍼만 하리오. 기왕에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닥칠 일을 바로 쫓아야 함을 아리로다. 진실로 길 잃음이 아직 멀지 아니하였으니, 오늘의 생각이 옳고 어제 일은 모두 그릇되었음을 깨달음이라. 배가 가볍게 물에 떠돌고, 바람은 산들산들 옷깃을 날리는도다. 지나는 길손에게 길을 물으니 새벽빛 희미함이 한스럽구나. 곧 초라한 내 옛집 지붕을 바라보고 기쁜 걸음 재촉하노라. 하인들이 반겨 맞고 어린것들은 문 앞에서 기다려 주네. 정원의 오솔길은 거칠어졌으나 아직도 국화와 소나무는 남아 있구나! 한손에 어린것 손잡고 방으로 드니 술 있어 통이 가득 차고야! 술병 당겨 손수 따라 얼근히 취해 앞 나무 보니 얼굴 펴이네. 남창에 기대어 편히 앉으니 방은 좁으나마 무릎 펴기에 이토록 편하고 쉬운 것을. 날마다 거닐어 정원 정취는 익어가고 있으되 언제나 닫혀 있나니. 늙은 몸 지팡이에 실어 고요히 거닐다가 때로 머리를 들어 먼 곳 바라보다. 구름은 무심코 산 후미를 돌아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돌아갈 것을 아는도다.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배회하네. 돌아가리라! 모든 인연 깨끗이 끊으리라! 세상도 나도 모두 잊었으니 나 어디에 무엇을 찾으랴. 친척들과 나누는 정담을 기뻐하며 금과 서로써 시름을 없애리. 농부가 나에게 봄을 알리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도 생기리로다. 때로는 포장한 달구지도 몰고 때로는 작은 배에 노도 젓노라. 때로는 조용한 못을 찾고 때로는 험한 산도 찾는도다. 나무들은 기꺼이 무럭무럭 자라고 샘물은 졸졸졸 흐르기 시작하네. 만물이 때를 얻었음을 좋아하는데, 내 인생은 장차 쉴 것을 느끼는도다. 두어라! 내 몸을 이 세상에 두기를 얼마나 하겠기에, 가고 머무름을 마음대로 못하고 어찌 한가로이 어디로 가려는가.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며, 권도는 기약할 바 아니다. 좋은 때에 홀로 생각에 잠겨 거닐며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밭도 갈리라. 동고에 올라 마음껏 외치고 깨끗한 시냇물에 나아가 시도 읊으리. 애오라지 조화에 따라 살다 다하면 돌아가리니, 그 천명을 즐기매 또 무엇을 의심하리.
도연명을 '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가 피하려고 한 것은 정치였을 뿐, 인생 그 자체는 아니다. 만일 그가 교리를 존중이 여기는 인물이었다면 불교의 승려라도 되어 인생으로부터도 동시에 도망쳐 버릴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대한 인생애가 있었으므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내나 아이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진실한 존재였다. 전원이며, 자기 집 뜰 안에 뻗은 나뭇가지며, 마음에 든 언덕 위의 외로운 소나무에는 모두 너무나도 애착을 느꼈으며, 이론가가 아니라 생각이 보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또 인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지닌 교양의 특징인 인생의 조화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에 대한 적극적이지만 사려 있는 태도 때문이었다. 인생과의 조화에 가장 위대한 중국의 시가 솟아나온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결의는 인생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를 생각하며 홀로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를 한 옆에 세워놓고 잡초도 뽑고 밭도 간다>는 것이었다. 도연명은 단지 전원과 가족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구한 것은 조화였지 반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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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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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명저 20
6. 니코마스 윤리학 Ethica Nicomachea -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기원전 384-322)
아테네 시민들이 철학자에게 두 번 죄를 짓지 않게 하겠다. - 한석환(강릉대학 교수)
'(아카데미아)학원의 정신'이니 '책벌레'니 하는 별명의 주인공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사람들의 정치 생활의 고전적 형식인 독립 도시국가들이 몰락해 가던 때의 사람이다. 그가 살던 때는 그러니까 아테네가 그 주변 일대에서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 노릇을 하던 이른바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433~429)가 막을 내린 한참 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칼키데케반도(그리스북부)에 있는 스타케이로스라는 작은 도시에서 기원전 384년(이하 '기원전'표기 생략) 후반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뮌타스 3세 (알렉산더 대왕의 조부)의 시의였으며 어머니 또한 의사 집안출신이었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여읜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록세노스라는 친척 속에서 자라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18세가 되던 해(367) 프록세노스는 그를 아테네로 보내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진학시킨다. 당시 이 학원은 공공교육 기관이기도 했지만 내로라 하는 여러 나라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모여들던 소문난 국제적 교육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색다른 지적분위기 속에서 학업을 시작할 무렵 플라톤은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의 학원은 이제 막 30세 된 에우독소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플라톤이 언제부터 어떤 경로로 자신보다 44세나 어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무해 동안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거기서 배우고 익히며 연구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강의를 맡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학구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서의 폭도 넓어 그가 알고 있던 것은 플라톤과 그 제자들의 저작만이 아니었다. 스코스트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과 의술인들의 저술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와 서사시, 그리고 극작품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방면에 정통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은 결코 아니었다.
347년 초 플라톤이 80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뜨자 아카데미아의 원장자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플라톤의 조카이자 유산상속인이었던 스페우시포스가 물려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난 것은 공교롭게도 이 무렵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일찍부터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자연히 원장자리에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불만때문이었다는 등 추측도 무성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후계자 결정은 당시 유효한 상속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를 떠난 것은 정치적으로 신변에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민권이 없는 거류외국인이었던 그로서는 반마케도니아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던 아테네에서 점점 궁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테네를 떠난 이후 열 두해 동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편력기이다. 그는 먼저 크세노크라테스를 비롯해 아카데미아에서 동문수학하던 몇몇 동료와 함께 역시 친구이자 동창인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그가 통치하던 앗소스를 방문한다. 그 곳에서 그는 나중에 그의 제자가 되어 함께 일하게 되는 테오프라스토스를 만난다. 그는 헤르미아스의 질녀이자 양녀였던 피티아스와 결혼도 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같은 이름의 딸 하나를 얻는다. 첫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동향의 헤르필리스와 재혼해서는 니코마코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는데 이 아들이 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편찬한다. 345년 헤르미아스가 죽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태 동안의 앗소스 체류를 청산하고 레스보스섬의 미텔레네로 간다. 그의 해양생물학에 관한 경험적 연구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다. 343-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의 요청에 따라 당시 13세 된 왕세자 알렉산더의 교육을 맡는다. 추측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부 노릇은 두세 해 동안 지속된 것 같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글에는 그 유명한 제자 얘기가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알렉산더가 아시아 원정에 나설 준비를 하자 334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열두 해 동안 리케이온이라 불리는 공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의 제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그가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했던 것 같지는 않다.
323년 알렉산더가 바빌론 원정의 진중에서 뜻하지 않은 열병으로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자 아테네의 정치분위기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결국 그는 일찍이 소크라테스에게 씌워졌던 신을 욕되게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자 323년 다시금 아테네를 떠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때 그는 플라톤의 표현대로 "당시 살아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올곧았던"소크라테스의 운명을 떠올리며 자신은 아테네 시민들로 하여금 철학자들에게 두번씩이나 죄를 짓는 잘못을 저지르기 않게 하기 위해 아테네를 떠나노라고 했다 한다. 아테네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이우보이아섬의 칼키스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채 못되어 이승을 하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을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유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쓴 글들도 플라톤의 경우와는 달리 썩 잘 보존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은 대체로 두 부류, 즉 광범위한 일반독자를 위해 집필된 것과 리케이온의 강의를 목적으로 집필된 것으로 나뉜다. 그러나 전자는 일부만 토막글 형태로 전해질 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전거로 오늘날 흔히 인용되는 저작의 대부분은 후자이다. 남아있는 저작들 대부분이 이처럼 출판을 위한 원고가 아니라 강의노트들이기 때문에 강의실 냄새를 짙게 풍긴다. 이를테면 다른 것으로 바뀐 문안들이 삭제되지 않은 채 함께 들어와 있는가 하면 갑자기 끼여 들어와 문맥을 끊어놓는 부분도 눈에 뛴다. 물론 수정과 증보도 있었을 터이다. 여러 해에 걸쳐 강의를 한 데다 같은 문제를 다양한 방면에서 다양한 공략 수단을 동원하여 요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집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배열 순서상 맨 처음 나오는 것은 논리학적 저작들이다. (범주록), (명제론), (분석론), (오류론), 등이 그것이다. (범주론)에서는 명사들, 즉 명제를 이루는 요소들이 다루어지고, (명제론)과 (분석론)에서는 명제들과 그것들로 구성되는 삼단논식들이 각각 다루어진다. 논리학적 저작들 다음에는 자연에 관한 다양한 글들이 상당히 길게 이어진다. (자연학), (천체론), (생명-소멸론), (영혼론), (동물지), (동물부분론)과 같은 글들 말이다. 그 뒤를 잇는 것은 '제 1철학'에 관한 글들, 즉 14권으로 된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시학) 등 '실천적인' 주제의 저작들로 채워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젯거리나 답안을 알뜰하게 담아내는 부러워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 너무 빠듯하게 논술되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지만 그의 명쾌한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곰곰이 되씹어 보도록 부추긴다. 한편 그는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의 말들을 전문용어로 다듬어 쓰기도 했는데 일상언어에 대한 그의 세심한 주의는 그의 글에 견실성을 부여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중용을 발견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의 몫이다
확실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을 문제 삼았던 최초의 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윤리학을 독립된 분과로 여긴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학은 탐구대상과 목표에서 다른 부분들과 다르다. 윤리학이 탐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윤리학은 자연철학 같은 것과는 달리, '원인'이 자기 자신속에서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의 결단에 놓여 있는 것들을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즉 영원한 것, 불변인 것, 늘 똑같은 양태를 취하는 것들은 윤리학이 문제로 삼지 않는다. 윤리학의 관심사는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그러나 윤리학이 도달할 수 있는 엄밀성의 한계를 시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취하는 기본입장에 따르면, 과학들 가운데는 고도의 정밀성과 고도의 확실성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그럴 수 없는 것들도 있는데 윤리학이 그 한 예이다. "정밀성을,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의 본성이 허용하는 만큼만 요구하는 것이 학식있는 사람의 징표이다. 수학자에게 그저 개연성밖에 없을 뿐인 추론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웅변가에겐 논증적 증명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 윤리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이 아니라 실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윤리학의 테두리 안에 인식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윤리학은 '인간적인 것'을 고유의 인식대상으로 하는 독립적인 실천과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현상들을 논하는가 하면 통용되는 도덕론들을 저울질해 보기도 하고 도덕과 관계된 개념들을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별도의 어떤 목적이나 효용에서가 아니라 바로 인식하는 것 자체때문에 수행되는 것이 이론 철학인데 반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종사하고 있는 철학의 부분(윤리학)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순수이론적인 것이 아니다.우리가 궁구하는 목적이 그저 덕이란 무엇인가를 깨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우리가 유덕하게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런 철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에, 즉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도덕철학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행동(프락시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먼저 다른 동물들의 몸놀림과는 달리 사태를 머리로 헤아려 본 다음 단안을 내리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동에는 합리적 선택의 계기가 들어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칭찬이나 책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행동은 제작(포아에시스)이라는 인간의 몸놀림하고도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에 따르면 "실천적 사고는 제작적 사고를 다스린다." 우리가 제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것에 의존하여 또 그것을 통해 설명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윤리학이 따르는 행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제작하기 위해 수행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활동과는 달리 노련하다거나 노련하지 못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때문에 수행되는 것들이자 그 자체때문에 평가되는 것들이다. 착하거나 좋은 사람이 용감한 행동을 하거나 친절을 베푸는 것은 상을 타기 위해서도 아니요, 무슨 꿍꿍이속을 갖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또 나중에 잘 살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그것은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인데 이것이 그가 내심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문제의식은 인간이 구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에우다이모니아)은 어떤 삶인가에 집약되어 있다. 상하관계속에 놓여 있는 다양한 욕구의 목표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가 실로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 말이다. 일련의 논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은 답안은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덕을 드러내 보여 주는 행동의 삶이 곧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 덕(아레테)이란 무엇보다도 정념(파토스)과 고리지어져 있는 것이다. 분노, 공포, 연민 같은 정념과 관련하여 잘잘못이 문제 되잖는가 말이다. 그러나 정념 그 자체가 덕이 있고 없는 것이 아니다. 덕이 있고 없음은 정념이 어떤 식으로든 현실로 표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로 덕은 위에 시사되어 있다시피 활성태에서 문제되는 것이지 능력의 차원에서 가려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능력의 속성은 전혀 똑같은 것이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다함께 수용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전혀 똑같은 사람이 질병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도 있고 건강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할 수도 있다. 또 전혀 똑같은 사람이 기쁨을 느낄 수도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덕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덕과 악덕은 서로 배타적이다.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은 성품의 상태이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덕은 좋은 방향으로 굳어진 성품의 상태이고 악덕은 나쁜 방향으로 굳어진 성품의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인간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버릇이나 습관의 문제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라왔다고 해서 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단 하루만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길들여지느냐에 따라 좋은 성품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고 나쁜 성품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중용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고 나쁘다는 것은 양극단에 서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정념이나 느낌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함으로써 꾸지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컨대 "덕은 중용에 터잡혀 있는 성품의 상태이다." 그러나 중용이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와 장소와 시간과 사안들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심지어 '극단'이, 즉 전부 또는 전무가 적도가 되는 특수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중용은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 그것은 실천적 지혜(후로네시스)의 몫이다. 실천적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개의 정황속에서 어떤 것이 공정한 것이고 어떤 것이 친절한 것이며 또 어떤 것이 너그러운 것인가를, 한 마디로 말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은 어떤 것인가를 헤아려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실천적 추리나 숙고는 당사자로 하여금 문제가 되고 있는 여건에서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 가장 좋은가를 알아차릴 수 있게끔 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 선택과 절도 있는 행동으로 마무리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통상의 경우 문제의 인물은 그 일을 수행한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뒷전으로 미뤄 두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름대로 내린 최선의 판단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아크라시아)말이다. 아크라시아에 빠져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한 일과 관련하여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자. 어떤 일에 대해 누구를 책망하고 징벌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책임의 조건들은 무엇이며 못된 짓을 저지른 데 대한 책망이 희석될 수도 있는 변명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행동하는 조건들을 밝혀 내려는 이들은 결국 행동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물음과 대결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날마다 입에 올리는 말에서 철학을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겔처럼 자신의 사유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빈틈없이 잘 짜여진 철학을 구상했던 것으로 보이거니와 자신의 철학이 그리스적 사유일반이 노렸던 것 전부를 담아 낸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바꾸어 말해서 그는 철학적 사유가 그 자신에게 와서 마침내 발전의 한 단계를 매듭짓게 되었다고 보았던 듯 싶다. 어떤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적 전적들을 다룰 때에 과거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을 본질적으로 오늘의 시각에서 읽어 내려고 하는 현대 철학자들과 견줄 만하다. 그는 많은 현대 철학자들처럼, 자기보다 앞서 철학했던 사람들도 물론 썩 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을 했다고 상정했던 것 같다. 그는 그에 앞서 철학했던 사람들과 체계적으로 대결한다. 그는 그 어떤 논구에서든 첫머리에 이전 철학자들의 견해부터 검토하곤 한다. 무릇 이전 사람들이 품었던 생각들 속에는 진리의 요소가 얼마쯤 담겨 있기 마련이며 이전 철학자들이 서로 합의를 보지 못했던 쟁점들은 후대사람들이 풀어야 할 문젯거리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전 철학자들을 자기 자신의 개념과 물음에 비추어 가면서 읽으며 그들의 입장을 자기 자신의 생각과 멀고 가까움의 차원에서 그려낸다. 후대의 철학적 논의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일례로 그가 정성들여 빚어 낸 개념적 도구들은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작업현장에 투입되었거니와 오늘날까지도 그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철학이 잘 짜맞추어진 이설들의 덩어리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의 이른바 철학체계는 스승 플라톤의 것에 견주어 덜 단정적이다. 그의 체계는 특히 그것이 끼친 영향의 역사를 훑어볼 때 플라톤의 것보다 덜 경직되어 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저작집에서는 이따금 반성과 회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또 문제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대목도 더러 눈에 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작들이 증언하듯이 다양한 문젯거리들을 장기간에 걸쳐 검토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체계에 들어 있는 난점들은 그로 하여금 다양한 해결책들을 모색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답안이 그의 최종 입장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냐는 독자들이 판가름할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열려 있다. 그것은 입론적이지, 독단적이지 않다.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쏟는 이유도 바로 그런데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가운데서도 특히 그의 윤리학은 예로부터 철학적 사유의 무궁무진한 원천이자 보고였으며 철학적 훈련의 흔치않은 도장이었다.
현대도 예외는 아니어서 윤리학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성과들을 놓고 볼 때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그에게 신세지고 있는 예는 꽤나 많다. 일례로 책임의 조건들과, 잘못을 저지른 데 대한 징벌이 줄어들 수 있는 변명의 조건들을 보자.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와 법정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 구체적으로 말해서 '모르고서', '우연히', '본의아니게', '마지못하여', '강박당하여'와 같은 변명용 표현들의 통상적 쓰임새를 주도면밀하게 분석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간다. 영국의 J.L.오스틴 역시 마찬가지이다. 1956년에 발표된 "변명을 옹호함"이라는 논문의 제목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채택하고 있는 기본접근법의 출처는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3권)이다. 오스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 고취되었던 것인데 더 정제된 그의 논변은 새로운 구별들을 담고 있다. 미국철학자 D.데이비드슨의 연구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연상시킨다. (행동과 사건에 관한 논총)에 수록된 그의 논문들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재기했던 물음들을 다룬다. 행동과 사건간의 차이, 한 행동의 원인과 근거 사이의 연관, 나름대로 내린 최선의 판단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내놓은 답안들도 대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을 비롯한 현대 철학자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그를 이해하려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에게 관심의 초점은 그가 붙들고 씨름했던 철학적 난문들 중 몇 가지라도 더 낫게 이해하려는 데 있다. 그리스말의 쓰임새와 그리스 사람들의 사고관행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세계에 대한 이해의 본질적 거점을 마련해준다. 그가 개진했던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생각들 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입에 올리곤 하는 것에 대한 논의로부터 전개된 것이 많다. 그의 철학 속에서 열쇠노릇을 하는 개념들 가운데에도 일상언어에서 전용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한계일 것도 같다. 전혀 색다른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에게 동일한 세계가 전혀 딴판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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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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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둘째 묶음 - 자학과 사회 도피
패러다임 유감
평생에 걸쳐 우리의 구비 전설을 수집하신 한 노심리학자를 얼마 전에 찾아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우리의 신화는 신들의 서열이 없이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활동하는 이른바 함께 존재하는 다신론이며, 우리의 전설은 지극히 현세주의적일 뿐 환상적이지 못하다는 대목이 있었다. 요즘의 세태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퍽 흥미 있게 들었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를 이렇듯 민족성의 탓으로 단정짓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큰 변동을 가정하고, 이러한 변동 속에서 개개인의 소임이 정착되지 못해 이러한 혼돈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는 현재 큰 변동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개혁을 수행하고 있다. 표면적인 변화나 지엽적인 개정만이 아니라 근원 혹은 그 뿌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달라져 가고 있는 뿌리란 결국 과학 이론에서 많이 논의되는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학문은 어느 분야든 일관성 있게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여 사상들 사이의 관계를 명제화 시키고, 이들은 더욱 광범위 하게 묶어 체계 있게 이론화 시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학문 연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디디고 서야 할 관점 또는 불가피하게 지녀야 할 조작 방식이 "패러다임"이다. 물리학에서는 갈릴레오와 뉴튼의 역학 개념이 오랫동안 이 학문 연구의 패러다임 역할을 하였으나, 이후 아인슈타인의 새 모델이 나오면서 이를 패러다임으로 하는 새로운 물리학의 연구 분야도 생겨나게 되었다. 사실 연구자들이 패러다임을 그때그때 의식하면서 연구 활동을 벌이는 것은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일정한 패러다임 위에 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이 패러다임은 시대성을 반영하고 학파를 달리하게 하며 이론 체계의 차이도 가져온다. 그러므로 상반되는 논쟁에서 상호간의 패러다임의 차이를 조심스럽게 검토함으로써 쟁점이 되는 마디를 풀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또 이제까지 그 위에 서서 연구해 온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더욱 적절한 패러다임 위에서 연구를 벌여 학문의 혁신을 가져오게 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관한 고려는 비단 학문 연구의 세계에서만 중시되어야 할 것이 아닌 듯싶다. 일상생활의 생각, 계획, 판단, 가치관에까지도 적용시켜서 검토해 볼 만하다. 모든 생각이나 결정에 디디고 서 있는 받침돌과 같은 기본 가정이나 전제 조건이 꼭 있을 것이나 말이다. 요즘의 세태를 바라보면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남들의 주장이나 활동을 평가할 때 그 자체가 디디고 서서 주장하는 기반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며 자기를 더욱 객관화시켜 여러 가지를 두루 배려하게 하는 신중성을 기대할 수 있다. 생각하고 활동하면서 그 생각 그 활동의 패러다임을 따져 분명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경이 파밭 매는 격이 되지 않으려면, 이런 노력이라도 하는 길밖에는 없을 것 같다.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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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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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비켜서라
어느 학교의 교사가 일학년생들에게 묻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집에서 어떻게 식구들을 도와주지요?" 한 작은 소년이 말했다. "저는 접시를 닦아요." 그리고 계속해서 이야기들을 했다. 그때 그 교사는 쟈니라는 작은 소년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쟈니, 너는 무엇을 하니?" 쟈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주로 저는 비켜서요."
- 비켜서라. 그것이 전부다. 나와 그대의 사이로 들어오지 말고 다만 비켜서라. 한순간만 그대가 비켜서도 깨달음은 일어날 수 있다. 낡은 것은 죽고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다.
실체와 예측
두 절이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두 절의 주지에게는 심부름을 시키는 작은 소년이 하나씩 있었다. 두 소년은 시장에 가서 주지에게 필요한 채소 등의 물건을 사오곤 했다. 이 두 절은 서로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소년들은 역시 소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잊어버리고 길에서 만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놀곤 했다. 사실은 서로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상대편은 적이어야 했다. 어느 날... 한쪽 절의 소년이 돌아와서 말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시장에 가다가 저쪽 절에 있는 애를 만나게 되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는 중이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저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그의 대답이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그 절의 주지가 말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절의 사람은 누구나, 설사 하인까지도 저쪽 절의 사람들에게 져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너도 그 아이에게 이겨야만 한다. 내일 만나거든 다시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물어봐라. 그 아이가 '바람 부는 대로'라고 대답하면 너는 말해라. '바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니?'라고." 그 소년은 밤새 잘 수가 없었다. 그는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여러 번 되새겼다. 그가 물어보고 상대편 소년이 대답하면 그때 그는 준비한 질문을 할 것이다. 다음날 그는 길에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 소년이 왔고 그는 물었다. "어디 가는 중이니?" 그 소년이 대답했다. "발 가는 대로." 그는 다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대답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대답은 예측할 수 없다. 그는 매우 침울하게 돌아와서 주지에게 말했다. "그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바뀌었고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주지가 말했다. "내일 그 아이가 '발 가는 대로'라고 하면 너는 '네가 절름거리게 되거나 발이 잘려지면 어떻게 할래?' 하고 물어라." 다시 그는 잠들 수 없었다. 그는 일찍 나가서 길에서 기다렸다. 그 소년이 왔을 때 그가 말했다. "어디 가는 중이니?" 그러자 그 소년이 대답했다. "시장에서 야채를 사 오려고!"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져서 돌아와 주지에게 말했다. "그에게는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는 계속 바뀌고 있어요."
- 삶이란 그 소년과 같다. 실체는 고정된 현상이 아니다. 그대는 현재에 존재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 오직 그때의 반응만이 실체와 부합할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대답이 미리 고정되어 있다면 그대는 이미 죽은 것이며 이미 놓친 것이다. 내일이 오면 그대는 내일을 맞지 못한다. 그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 어제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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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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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6. 항일 통일전선 - 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1936-37년)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4년 / 진단학회 설립 1935년 /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대장정을 마무리한 공산당은 1년여의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또한 1936년 국민당 정부에 대해 국공간의 대립을 중단하고 항일투쟁에 일치하여 나서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내의 여론도 더 이상 국내의 세력다툼에 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의 공산당 탄압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공비토벌 작전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장개석은 외국기자에게 중국(국민당)에 있어서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를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안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장학량인데, 그는 만주 지방의 실력자로 일본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밀려나 북경을 근거로 국민당군에 합류하고 있었다. 장학량의 군대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의 지시로 공비토벌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장학량은 같은 중국인들끼리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두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공산당의 주장을 더 옳다고 보고 있었다. 1936년 장학량군과 홍군 사이에는 비밀협정이 맺어져 적대적인 싸움이 중지되었다. 그해 12월 장개석은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에 주둔하고 있는 장학량 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장학량은 서안에 찾아온 장개석을 감금했다. 장개석은 잠을 자다가 장학량군에 의해 공격받았는데 다급하게 도망치면서 그의 의치까지 빼놓고 달아날 정도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한 다음 8가지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글을 전국에 공표했다.
"...동북지방을 잃은 지 5년, 국가의 주권은 쇠퇴했고 영토는 축소되었다. ...최근 국제정세가 바뀌어 몇몇 세력들이 짜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이 중요한 때 중앙의 지도자는 마땅히 군대와 인민들을 북돋아 거국적인 항전에 나서게 해야 하는데... 장개석 위원장은 소인배들에게 둘러싸여 민중의 지지기반을 잃고 국정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크다. ...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장개석 원수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그 안전을 보장하면서(감금된 상태) 반성을 촉구하기로 했다. 서북의 군과 민은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남경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책임을 질 것 2. 모든 내전을 정지할 것 3. 상해에서 체포된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민중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6. 민중의 집회, 결사 등 모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언을 확실히 실행할 것 8. 구국회의를 즉시 소집할 것
발기인 장학량, 양호성"
결국 장개석은 공산당의 주은래와 담판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25일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8개항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장개석은 이 약속을 문서화하자는 주은래의 말에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문서화하는 데는 끝까지 거부했다. 1937년 3월 국민당은 대회를 열어 서안사건 이후의 정책변화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다. 이 대회 앞으로 공산당은 다음과 같은 3개항목의 제안서를 보내왔다.
1. 내란을 중지하고 국력을 집중하여 외적에 대항할 것 2.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각당 각파의 대표자회의에 의한 공동구국의 실시
국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그 골격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울러
1. 홍군의 해체 2. 소비에트 정부 해체 3. 적화전선 중지 4. 계급투쟁 중지 5. 삼민주의 복종을 내세웠다.
마침내 장개석은 공산당을 합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항일투쟁에서의 단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제 2차 국공합작이 완결되었다. 장개석은 그렇게 오랫동안 뿌리뽑으려고 노력했던 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 되고 있었고, 이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이 국민들로부터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섬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홍군부대를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편했으며, 다음해 1월에는 양자강 하류의 공산당 분견대를 신 4군으로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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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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徒勞無功(도로무공) 徒(헛될 도) 勞(힘쓸 로) 無(없을 무) 功(공 공)
장자(莊子) 천운(天運)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가 서쪽의 위(衛)나라로 유세(遊說)를 떠났다. 스승인 공자의 여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안연(顔淵)에게 사금(師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물길을 가는 데에는 배가 가장 좋으며, 육지를 가는 데에는 수레가 최고이지. 그런데 만약 배를 육지에서 밀고 간다면 평생 걸려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네. 옛날과 지금의 차이는 물과 육지의 차이와 같으며, 주나라와 노나라의 차이도 이러한데, 공자께서 주나라에서 시행되었던 것을 노나라에서 시행하려는 것은 배를 육지에서 미는 것과 같아 애만 쓰고 보람은 없으며(是猶推舟于陸也, 勞而無功), 틀림없이 몸에 재앙이 있을 걸세 .
徒勞無功(Toil in vain) 은 도로무익(徒勞無益)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음 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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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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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4. 고대엔 남성들도 화장을 했다.
멋쟁이의 필수품, 생선 등뼈
머리를 손질하는 대표적인 도구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온 빗과 머리핀을 들 수 있다. 게다가 현대에 들어서는 헤어 드라이어도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필수 품목이 되었다. 가장 오래 된 빗은 대형 생선의 등뼈를 건조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빗은 현재도 아프리카 오지의 원주민들이 쓰고 있다. 빗 특유의 모양은 '빗살 무늬'를 뜻하는 영어 'comb'의 어원인 고대 인도, 유럽어 'gombhos'가 '이(치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사람이 만든 가장 오래 된 빗이 6000년 전의 이집트 묘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교묘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반듯한 이가 한 장인 것과 두 장인 것이 있는데 한 장짜리가 두 장짜리보다 눈금이 촘촘하고 긴 것도 있다. 이집트의 남녀들이 화장대에 아주 평범하게 갖추고 있던 빗은 머리카락을 빗는 것과 특정한 머리 형태를 보존하는 빗 두 가지였다. 고고학자들은 모든 고대 문명이 실제로 각각 독자적인 빗을 개발하여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문명 가운데 브리튼인은 제외된다.
영국 제도 연안에 살고 있던 브리튼인들은 전혀 손질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용 기술이 발달한 로마인의 점령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빗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789년 데엔인의 침입 뒤의 일이다. 800년대 중반까지 데엔인들은 영국 전역에 정착했다. 연안의 브리튼인들에게 머리를 깨끗이 빗질하는 것을 가르친 것은 그들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머리를 빗는 일은 종교 의식의 일부로 발을 씻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적으로 행해졌다. 만과를 앞에 두고 사제가 성구실에서 머리를 빗을 때의 올바른 방법을 나타내는 자세한 법도가 있었다. 기독교 순교자들이 초기 기독교도의 지하 피난소인 카타콤에 빗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곳에서 상아나 금속제 빗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종교사 연구가는 빗에 어떤 시기의 뭔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면서 중세 시대 교회의 가장 오래 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에 빗이 분명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빗에는 마력도 따라다니고 있었다. 1600년대 유럽 각지에서는 납으로 만든 빗으로 자주 머리를 빗으면 백발이 원래의 색깔로 되돌아간다고 널리 믿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무척 작은 양의 부드럽고 질이 나쁜 검은 납이 머리카락에 붙어 조금이나마 검게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납으로 만든 빗을 사용하고 있던 사람이 염색을 해서 그것을 빗의 탓으로 돌렸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타당한 듯하다. 이 추측을 지지하는 것으로 1600년대 말 20~30년 동안 '납빗'이라는 말이 '그는 납빗을 사용하고 있다'는 용법으로, 백발을 염색한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받아 들여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빗의 디자인에 본격적인 변화가 나타난 것은 1960년, 가정용 첫 전기 스타일링 컴이 스위스에서 고안된 해였다. 길고 반듯한 장식용 핀 '보드킨(머리를 묶는 핀)'은 그리스와 로마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묶는 데 사용했다. 고대인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형태와 기능을 갖고 있는 핀을 현대에도 많은 미개 민족들이 사용하고 있다. 몸이 작은 동물의 뼈나 엉겅퀴의 줄기를 그대로 모방한 것들이다.
고대 아시아의 묘지에서는 뼈, 철, 청동, 은, 금으로 만든 머리핀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대부분은 단순한 것이지만 장식이 멋진 것도 있다. 아무튼 1만년 동안 머리핀의 형태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애용한 머리핀은 길이 17센티미터의 상아제로 보석이 박혀 있었다. 로마인은 머리핀 속을 비게 만들어 독을 숨겼는데, 클레오파트라가 독으로 자살할 때 이용했다는 핀과 똑같은 디자인이다.
반듯한 머리핀이 200년에 걸쳐서 U자형의 보비핀으로 변신했다. 17세기 프랑스의 궁정에서 가발이 크게 유행했는데 그 가발을 쓰려면 자신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든가 핀으로 단단히 붙여야 했다. 그렇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짧게 해야 가발을 보기 좋게 쓸 수 있었고 만약 벗겨지는 경우에도 흉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긴 스트레이트 핀이나 U자형 머리핀 모두 '헤어핀'이라고 불렀으나 이어 18세기 영국에서 '보비핀'으로 바뀌었다. 강력 와이어에 검은 래커를 칠하고 다리가 두 개인 작은 핀이 19세기에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고 스트레이트 핀은 실질적으로 물러났는데 이것이 '보비핀'의 이름을 독점하게 되었다.
현대의 전기 헤어 드라이어는 전기 청소기와 믹서라는, 전혀 관계없는 두 가지의 발명품으로부터 탄생했다. 탄생지가 위스콘신 주 라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전기 헤어 드라이어의 최초의 두 기종인 '레이스'와 '사이클론'은 1920년에 데뷔했다. 위스콘신 주에 있는 회사인 라신 유니버설 모터 사와 해밀턴 비치 사 제품이었다. 머리카락을 말리는 아이디어는 전기 청소기의 초기 광고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는 제품의 다기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통례였다. 전기가 사상 최고의 동력원으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전기 제품은 더욱 그런 경향이 있었다. 이 판매 작전이 판매량을 늘렸고 소비자는 다기능 제품을 기대하게 되었다. 전기 청소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흔히 공기 청소기라고 부르는 전기 청소기의 초기 광고에는 화장대 앞에서 청소기의 배기구에 연결된 호스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여성을 그렸다. "왜 당신은 온풍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하는 식의 광고 문구는, 청소기가 앞부분은 쓰레기를 빨아들이고 뒷부분으로 '배기구에서 청결하고 신선한 바람'을 내뿜는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확실히 알게 만들었다. 초기에 청소기의 수요는 그런 대로 높았으나,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청소기를 어떤 식으로 최대한 활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해 머리를 말리는 아이디어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손으로 들고 말리는 전기 헤어 드라이어의 개발이 늦어진 것은 발명가들이 '분마력 모터'라고 부른 효율이 좋은 소형의 저출력 모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믹서가 등장한다. 위스콘신 주의 라신은 최초의 밀크 셰이크용 전동 믹서의 고향이기도 하다. 믹서의 특허 취득은 1922년의 일이지만 믹서를 작동하기 위한 분마력 모터의 개발 노력은 이미 1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는데 특히 라신의 유니버설 모터 사와 해밀턴 비치 사가 힘을 쏟고 있었다. 이렇게 원리상으로는 전기 청소기와 배기 온풍과 믹서의 소형 모터가 합체되어 현재의 헤어드라이어가 탄생했고 라신에서 제조되었다. 초기의 핸드 드라이어는 모습이 이상하고 에너지 효율도 나빴으며 조금 무겁고 과열되는 일이 잦았으나 그래도 머리 손질에는 전기 청소기보다 편리했다. 그리고 이것이 뒷날 시대의 유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1930~1940년대에 개량이 되자 온도나 속도의 조절 기능이 붙었다. 포터블 홈 드라이어의 독특한 신제품이 1951년 추동판 시어즈 카탈로그에 등장했다. 정가 12.95달러의 이 제품은 핸드 드라이어와 핑크 색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뚜껑 부분은 드라이어의 배기구와 연결되어 여성들이 완전히 뒤집어쓰는 구조였다. 헤어드라이어는 데뷔한 해부터 여성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으나, 남성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경이었다. 이 무렵부터 남성이 장발을 했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손질하는데 어려움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헤어드라이어 시장은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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