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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16호
2011.10.25 (음 9.29)/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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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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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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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문 제16회 신춘문예
농민신문사가 제16회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역량 있는 작가와 우수작품 발굴로 농촌문화 창달에 기여하기 위한 <농민신문> 신춘문예 작품 공모에 독자 및 문학 지망생 여러분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모집부문 및 원고료 -단편소설 : 당선작 1편(200자 원고지 70~80매), 500만원 -시 : 당선작 1편(5편 이상 제출), 300만원 -시조 : 당선작 1편(5편 이상 제출), 300만원
●작품 내용 및 응모 자격 내용은 제한 없으며, 기성 문인은 다른 장르에 응모 가능
●응모 요령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원고는 앞부분에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분량을 표시 △원고 말미에 이름(필명인 경우 본명 병기)·주소·전화번호·주민번호(앞자리 6자)를 반드시 명기 △겉봉에 ‘<농민신문> 신춘문예 ○○부문 응모작’이라 적을 것
●응모시 유의사항 △ 응모 작품은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품이어야 함 △ 당선작에 대한 모든 권리는 발표일로부터 3년간 본사가 소유함 △ 응모 작품은 일절 반환하지 않음
●특전 당선작은 <농민신문>에 게재하고 당선자가 신인인 경우 문인으로 대우
●마감 : 2011년 11월30일(마감일자 소인 유효) ●발표 : 2012년 1월1일자 <농민신문>
●보내실 곳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267 임광빌딩 15층 농민신문사 문화부 신춘문예 공모 담당자 앞(우편번호 120-705) ☎02-3703-6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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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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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한적한 일은 배를 타고 유랑하는 것과 술 마시고 장기나 바둑두는 것 등인데, 이 일들은 모두가 짝을 찾아야 하고 상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직 글 읽는 한 가지 일만은 한 사람 만으로 하루도 보낼 수 있고 1년도 넘길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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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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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학부형
아들이 졸업했다. 식장에 앉아 있는 아들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아니, 한자리에 있는 졸업생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갸륵해 보였다. 딸도 졸업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들어섰던 교문을 동무들과 조잘대며 함께 나서는 한결 슬기로워진 딸이 기특했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모들을 흐뭇하게 했던 졸업식. 거기에서 들은 노래는 부모 세대의 것이기도 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졸업식 노래’ 1절)
울음 꾹꾹 씹어삼키며 불렀던 이 노래의 노랫말에 나오는 ‘언니’는 누구일까. 대학을 갓 졸업한 여성에게 물었다. ‘남자들도 언니라고 하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고. “여중을 나와서…, 남자학교는 ‘형’이라 하지 않나….” 뜻밖의 답이었다. 언니와 형은 동성의 손위 형제를 이르는 말로서 본래는 남녀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졸업식 하객을 최소화해 달라는 가정통신문을 학부형에게 보냈다”는 뉴스(ㅇ케이블방송)의 ‘학부형’도 한번 생각해볼 표현이다. 학부형은 원래 학생(學)의 아버지(父)와 형(兄)이라는 뜻이니 ‘바깥일은 남정네가 하던 시대’에 좀더 어울릴 듯싶다.
이제 졸업 철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언니와 아우들의 앞날을 위해 학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쉐보레 유감
풍전(豊田)이 있다. 일본 사람 이름이고, 땅 이름이며, 자동차회사 이름이다. 창업자 이름은 도요다, 본사가 있는 지명은 도요타, 한국에 세운 회사 이름은 토요타이다. 왜 그럴까. 창업자 이름 도요다 에이지(豊田英二·とよだ えいじ)는 일본 글자를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적은 것이다. 이 사람이 세운 자동차회사가 있는 도시 도요타(とよた) 역시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적은 것. 일본어 ‘と’[to]가 어두에 오면 ‘도’로 적는다. 동경(東京·とうきょう)을 도쿄라고 쓰는 것과 같다. 토요타는 한국법인 이름을 영어(TOYOTA) 그대로 읽어 ‘한국토요타자동차㈜’로 정하는 바람에 생긴 표기이다. 도요다, 도요타, 토요타. 이름은 하나인데 상황에 따라 달리 써야 하니 헷갈린다.
이런 일이 또 생겼다. 얼마 전 ‘한국지엠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꾼 회사의 일이다. 사명 변경과 함께 내놓은 브랜드는 ‘쉐보레’이다. 현재 우리나라 언론에서 ‘Chevrolet’와 관련해 쓰고 있는 표기는 두 가지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미국의 자동차 레이서이자 설계 제조자 이름은 ‘셰브럴레이’이고, 그가 설계한 자동차 이름은 일본을 거쳐 들어온 표기(シボレ-)를 관용으로 인정한 ‘시보레’이다. “영어 발음과 유사하게 바꾸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다”는 회사 쪽은 ‘쉐보레’에 [∫-] 소릿값은 없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쉐’ 발음은 [swe]로서 ‘쇠/쇄’와 다르지 않기에 ‘쇠(쇄)보레’와 구별되지 않는다.(표준발음법 4항 ‘붙임’) 표기법에 어긋나고 발음도 엉뚱한 쉐보레. 그럼에도, 브랜드 이름이니 그대로 쓰고 읽을밖에.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니, 네
-네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이것이 네 도끼냐?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는 위 문장을 발화할 때 '네'를 [니]로 소리 낸다. 현행 규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네'는 [네]로만 소리 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네]로 소리 내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니]로 소리 내는 사람은 압도적 다수이다. [니]는 어느덧 보편적 언어 현실이 되었다. 더 이상 [니]를 비규범적 발음으로 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모음 'ㅔ'와 'ㅐ'는 서로 다른 음소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발음상의 변별성을 잃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네]가 '네(2인칭 대명사)'인지 '내(1인칭 대명사)'인지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그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네]가 아닌 [니]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만일 발음 [니]를 규범으로 받아들인다면 다음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즉, 표기는 '네'로만 하되 [네]와 [니]를 복수 발음으로 인정하는 것과 '네'와 '니'를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다. 전자는 'ㅔ'가 'ㅣ'로 소리 나는 단 하나의 예라는 점이 부담스러우므로, 후자의 방법이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안상순 (사전 편찬가)
은폐, 은닉
미국의 부통령을 지낸 앨 고어가 출현해 화제가 됐던 '불편한 진실'은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다큐멘터리다. 미국과학자연맹이 정부 연구기관의 과학 보고서를 은닉하고, 과학 정보를 은폐해 환경오염을 외면했다고 비난해 온 부시 대통령은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언가를 숨기는 것을 '은폐' 또는 '은닉'이라고 한다. 둘 다 감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그 쓰임의 대상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은폐(隱蔽)는 '적에게 관측되지 않도록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인원.장비.시설 등을 숨기는 일'이란 군사 용어로 쓰일 때를 제외하곤 진실.사건.잘못.죄상 등 주로 추상적 개념과 어울려 '덮어 감추거나 가리어 숨긴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들 단어를 '은닉'과 함께 쓰면 부자연스럽다.
"부시는 지구 온난화가 이산화탄소 때문이란 확증이 없다며 기업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덜어 주는 등 과학을 정치도구로 이용하고 진실을 은폐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엑손모빌이 유엔 기후변화 보고서에서 지구 온난화의 해악을 은폐하기 위해 과학자들에게 1만 달러씩 주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처럼 써야 한다.
은닉(隱匿)은 "장물을 은닉하다" "불법 자금을 은닉하다" "수배자를 은닉하다"와 같이 주로 남의 물건이나 재산, 범인을 숨기는 데 국한해 쓰인다. 이때도 '은닉' 대신 '은폐'를 사용하면 어색한 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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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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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인 삶 - 김언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 내는 대지는 넓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3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 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는 주변 세계와 내부 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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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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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 최지향
해사랑 전복죽은 미좡에서 아침밥 소라 게 아구 낙지 공판장의 활어들 물건의 방조어부항의 나무숲은 아름다워.
창선교 멸치잡는 죽방렴은 진풍경 물따라 들어오는 자연산 고기잡이 사진을 찍으러 온 이들 사진작가 행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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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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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 권정생
북한땅 어디에서 난 쌀일까 평안도 어디쯤일까 큰우물골 연실이네 논에서 난 쌀일까 성근네 아바이가 일하는 협동농장이란 데서 난 쌀일까 '입쌀'이라고 찍힌 부대에 신기하게도 하얀 쌀이 담겨져 왔구나.
1984년 9월 큰물이 지나간 마을에 북쪽에서 구호물 쌀이 왔단다. 영애네도 한 부대 장식이네도 한 부대 그토록 멀고먼 북한에서 쌀아, 너희들이 어떻게 왔니?
가시철망 겹겹이 막혔다는데 총칼을 멘 군대가 지키고 있다던데 지뢰가 묻혀서 무섭다는데 사람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쌀 없으면 그 누구도 살아가지 못하는 쌀 금보다도 귀하고 은보다도 귀하고 피아노보다 텔레비보다 장관님보다 대통령보다 성경책보다 더 귀한 쌀.
그런데 동근이네는 그 쌀을 그토록 소중한 쌀을 먹지 않았단다. 할아버지를 끌고 가 죽인 공산당 나라에서 왔다고 동근이네는 쌀부대를 태질쳐 버렸단다. 그러나 하천둑 금옥이네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쌀부대를 껴안고 울었단다. 이북 고향에서 온 쌀이라고 고향의 바람을 쐬고 고향의 물을 마시고 자란 쌀이라고 금옥이네는 고향에 두고 온 할머니를 모시듯 쌀을 쓰다듬고 얼굴에 비비며 울었단다.
북한 어디쯤에서 자란 쌀일까 샘골 달수네 논에서 자란 쌀일까 하얗게 반짝이는 달수의 귀여운 얼굴 같은 쌀 남쪽 아이들이 그러듯이 샘골 달수네도 가을 벼논에서 - 후여! - 후여! 참새를 쫓았겠지 여름 가뭄에 물이 말랐을 땐 양수기로 밤을 새워 물을 펐겠지.
못자리를 하고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할 땐 온 마을이 아저씨 아주머니들 함께 떠들며 막걸리도 마시며 모를 심었겠지 한 포기 한 포기 모를 심었겠지.
그 쌀을 동근이네는 부대째 태질쳐 버렸단다. - 원수놈의 쌀, 공산당의 쌀......
쌀아, 이 노릇을 어떻게 하니? 너는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쌀을 다만 농사꾼이 가꾸는 것 손마디가 굵고 얼굴이 검게 탄 우리들의 농사꾼이 가꾸는 것인데 농사꾼은 나라가 달라도, 생각이 달라도 얼굴색이 달라도 말씨가 틀려도 농사꾼의 손은 한결같이 어질고 착한 것을.
동근이네 아버지 손에 태질쳐진 쌀아 어떻게 하면 좋지 너에겐 아무 죄가 없는데 어떻게 하면 너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손발이 닳도록 빌면 되겠니? 너는 고난당하는 한국의 백성처럼 슬픈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구나.
태질쳐야 할 것은 네가 아닌데 가시철망을 헤치고 지뢰 묻힌 원한의 휴전선을 간신히 간신히 헤치고 온 너인데 쵀 너를 태질쳐야만 했겠니?
쌀아, 너는 알고 있을 게다. 진정 태질치고 욕하고 미워해야 할 것은 네가 아니라는 것을 휴전선을 만든 것도 네가 아니잖니 뭣이 민주주의고 뭣이 자유이겠니,
너를 가꿔 준 함경도 아저씨 황해도의 아주머니 샘골의 달수와 큰우물골의 연실이 투박한 사투리를 쓰는 성근네 아바이 그 착한 사람들이 가꿔 준 쌀인데,
누가 미워서 너를 태질치니? 무엇이 미워서 너를 태질치니? 동근이 할아버지를 죽인 건 쌀이 아닌데.
쌀아, 정말 미안하구나 너를 가꿔 준 성근네 아바이한테 너를 가꾸느라 애쓴 황해도 아주머니한테 샘골의 달수한테 큰우물골의 연실이한테 미안하구나.
쌀아, 너는 알아주겠지 너를 어루만지며 쓰다 듬으며 고향 사람들을 만난 듯 눈물짓는 이들 수재민이 아니어서 쌀을 얻지 못한 다른 이웃들이 - 한 되만 바꿔 주세요, 다른 쌀 한 말 드리겠어요 - 열 곱, 스무 곱 드릴 테니 북한쌀 바꿔주세요 그렇게 소중스레 너를 반겨 준 사람들을.
그러나 쌀아, 그 누구보다도 가장 불쌍한 사람은 역시 너를 밉다고 태지친 동근이네 아버지가 아니겠니? 그토록 피맺힌 원한을 죄없는 너에게 왜 앙갚음을 했을까.
누가 그들의 손을 난폭하게 만들었니? 누가 그들의 눈을 멀게 했니? 쌀아, 너는 알겠지 알고 있겠지.
휴전선을 넘어 가시철망을 넘어 지뢰 묻힌 원한의 울타리를 헤치고 온 쌀아 쌀을 무엇이든 알고 있겠지. 이 슬픈 나라 백성들의 눈물을 그 눈물의 씨앗을 그 원한의 시작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쌀은 알겠지.
하얗게 반짝거리는 한줌 쌀 속에 평안도 샘골 마을 우리들의 동무 달수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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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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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뉴스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때 -특별히 내용 때문에 철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말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멍하니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다 보면, 이따금 정말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특별히 내용 때문에 철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운서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속 도로 1호선의 어느 인터체인지 부근 하행 차선에서 트럭의 '니쿠즈레(살이 까짐)'가 있어서 3킬로미터나 정체"라는 식으로 말하면, 한 순간 '어째서 트럭의 살이 까질까?'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이것은 '니 구즈레(짐이 무너져 내림)'다. 트럭이 껍질이 까지거나, 오토바이가 무좁에 걸리거나 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어제 일본과 소련의 '지간큐(시간급)' 협의가 행해져서"라는 뉴스도 있었다.'어째서 일본과 소련이 시간당 급여에 대해서 협의를 하게 된 것일까?' 하고 싶이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자세히 설명을 들어 보니까 '지칸큐(차관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동음 이의어가 많아 잘못 알아듣는 일이 많다.
왠지 우스워서 택시 뒷좌석에서 빙글빙글 웃고 있었더니, " 손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죠?"하고 운전사가 물었다. "네? 아닙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이러한 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우스꽝스러움이라는 것은 사람을 꽤나 즐겁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상당히 오래 된 일인데, 시보를 두 차례나 잘못한 아나운서가 있었다. "일곱 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여덟 시입니다. 아니 실례했습니다. 아홉 시입니다. 아홉 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이어서, 나는 그 방송을 듣고 한참 동안 혼자 큰 소리로 웃은 적이 있다. 그 아나운서는 나중에 틀림없이 상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일곱 시, 여덟 시, 아홉 시의 아무개'라고 별명을 동료들이 붙여 주고,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은 놀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좀 불쌍하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우습다. 이른 유의 사건이 하루에 한 번 꼴로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상당히 인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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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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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가르침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교사 한 사람이 말했다. 저희에게 가르침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어떤 이도 그대들이 깨달음의 새벽에 이미 반쯤 잠들어, 누워있는 것 외엔 어떤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들에 둘러싸여 사원의 그늘 밑을 거니는 스승이라면 그대들에게 신념과 사랑을 줄 순 있을 지언정 지혜를 줄 수는 없는 법이니. 그가 진정 현명하다면, 그는 그대들에게 자기의 지혜의 집으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지는 않으리라. 그보다 그대들로 하여금 그대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인도케 하리라. 천문학자는 그대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말해 줄 순 있을지라도, 자기의 깨달음을 말해 줄 수는 없다. 음악가는 그대들에게 이 세상 어디에나 있는 리듬을 노래해 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 리듬을 포착하는 귀마저, 그것을 울려내는 목소리마저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수학자도 질량과 길이의 세계에 대하여 말할 수는 있을 지라도 그대들을 그리로 인도할 수는 없는 법. 왜냐하면 인간의 상상력이란 타인으로부터 그 날개를 빌릴 수는 없는 것이기때문에. 그리하여 누구나 혼자서 신을 깨달아야 하듯이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와 떨어져서 혼자 신을 깨닫고 홀로 대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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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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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낙서
풀같이 끈적끈적한 안료를 손에 듬뿍 적셔서 판자나 종이 위해 문질러 그림 그리게 하는 유아 화법이 있다. 연필이나 크레파스로 그리는 그림보다 훨씬 재미있고 창조 의욕이 발휘되며 기술 연마에도 퍽 좋다고 인정되어, 오늘날 유아 미술 교육에 많이 쓰이고 있다. 이 화법을 창안하게 된 계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창안자인 이탈리아의 루스 쇼우 여사는 학교에서 어느 날 한 어린이가 손을 다쳤기에 옥도 정기를 바르라고 목욕실로 보냈다. 그런데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목욕실에 가보니 거기에 놀랄 만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그 어린이는 옥도 정기를 손에 칠해서 목욕실 문짝에 마구 문질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쇼유 여사에게 그 순간 한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떠올랐다. 왜 이제까지 어린이들의 손에 듬뿍 칠해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화구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에 이런 자료가 있었다면, 어린이들이 자기 내부의 용솟음치는 힘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이런 표현으로 어린이의 충동, 불안, 갈등들을 해소시켜 교육적 효과도 컸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현재 우리의 형편은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핑거-페인팅은 고사하고 크레파스나 연필, 백묵이라도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여 한껏 용솟음치는 표현욕을 발휘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표현욕이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억압만 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어린이들은 자기 표현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가 종이 조각이라도 얻어 그려볼라치면 크게 위험시하여 연필이든 크레파스든 모두 탈취 당하고 만다. 집안에서 무엇 하나 그려볼 수 없게 되면 아이들은 밖에 나와 담벽, 전주, 판자 등에 그려볼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낙서투성이의 담벼락을 대하곤 한다. 이러한 낙서판들은 우리로 하여금 항시 눈살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 어린이들이 선천적으로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어 그런 짓을 한다기보다는 원래 가지고 있는 자기표현의 욕구를 엄격히 억압당하고 있어 이 욕구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 그런 낙서벽으로 전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수긍하게 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가을 대한교련(현 한국 교원단체 총연합회)이 주최한 일선 교사들의 연구 발표회에서 충북의 이우영 교사가 발표한 낙서에 관한 연구이다. 이 교사는 학교 내에 낙서가 심해서 낙서 방지를 목적으로 일부러 마음껏 낙서할 수 있는 낙서판과 낙서장을 몇 군데 설치해 두었더니 학교 내에서의 낙서 흔적이 60%나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는 정당한 표현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이들이 자기 표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낙서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판자, 담벽, 전주 등 도처에 낙서가 없는 데가 없고, 산에도 구질구질하게 하찮은 글씨로 이름자를 암벽에 새겨 놓아 등산객의 빈축을 사는 일이 많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 혹은 일일이 가르칠 수 없도록 자녀가 많아서 자녀 교육에 소홀하기 때문일까. 낙서하면 불쾌감을 느끼지 않고는 못 견디게끔 학교, 가정, 거리 등에서 끊임없는 교육적 훈련이 절대 필요하다고 본다.
가정에서 제대로 사랑 받지 못하고 주위로부터는 구박, 조소, 멸시만을 받게 되며, 심리적 불안감은 점점 굳어져 남의 주의를 끌어 보려고 공연히 애쓰거나 늘 못마땅해 하며, 반감과 공격성은 커져 남을 비방하고 때려 눕히려고만 한다. 많은 범죄자의 사람됨이 바로 이런 반 사회적인격 유형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남의 집의 다 큰 호박에다 나무 못을 박아 주인이 화내는 것을 보며 즐기는 사람, 세워 놓은 자동차에 흠을 내는 사람, 붙여 놓은 선거 포스터를 보고 그 속에 있는 사람의 눈을 도려내는 일, 깨끗하게 칠해 놓은 남의 대문에다 크게 낙서하는 짓 등등 모두가 이러한 공격적 경향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낙서는 나쁘다는 교육도 받고 또 그만한 지각을 있을 법한 나이에도 여전히 낙서하게 되는 경우는 이같은 성격상의 공격적 행동으로 생각해 볼 만하다. 이러한 공격적 행동으로서의 낙서는 대개 어느 특정인을 비방하는 내용이 많다. 사회화가 덜 되어서 하게 되는 낙서는 그 내용이 단순하고 단어나 개별적인 그림으로 나타나지만, 공격적 성격의 발로로 나타나는 낙서의 내용은 필치가 강경하고 문장화되어 있으며 특정 대상의 인물을 문제삼아 욕하는 형식을 취한다. 과거 자유당 시절에는 공중변소 등에서 흔히 통치자에 관한 욕설이 보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러한 유형이다. 학교에서는 좀 심하다 싶은 교사가 낙서의 대상에 많이 오르게 마련이다. 공중변소에서 많이 보이는 낙서 중에는 성적 내용을 다룬(외설적인) 것이 많다. 즉 남녀의 성기를 그린 그림이나 글 또는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많은데, 이는 단순한 자기 표현이나 공격성의 표현이 아닌 독특한 측면이라고 하겠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사춘기부터 성적 충동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제약은 이러한 충동을 통제하고 제멋대로의 행동에 제재를 가한다. 성적 충동이 있고 또 이를 철저히 억제하는 외적인 제재가 있으며 갈등 상태에 놓여 결국 외적 제재에 굴복해 버리지만, 자아는 이 굴복을 인정하지 않고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듯이 스스로의 성 충동을 망각하거나 없애 버린다. 이른바 억압이 나타난다. 홀어머니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아들이 성적 불능이 되고, 고약하게 구는 부모의 자녀가 효자가 되며, 세뇌 공작으로 충성스러운 당원을 만드는 따위가 모두 이런 억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경우 본래의 욕구가 억제로써 완전히 상실되고 적대하던 욕구로 감쪽같이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불완전하게 억제되어 본바탕의 욕구가 들먹거리기 일쑤다. 마찬가지로 성 충동의 경우도 그 욕구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고 약간 변모되어 들먹거리는데, 이것이 노출증, 절시증, 낙서벽 등으로 나타난다. 즉 성적 대상을 보고 성행위로써 직접 그 욕구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만을 드러내 보이거나 이성의 나체를 몰래 보는 것 또는 성행위의 그림이나 말로써(낙서로) 대상적 충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대상적 충족 행위는 의식하지는 못해도 우리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다 하고 있다. 스트립 쇼나 반나체의 무희를 보고 즐기는 것, 또는 조각이나 회화에서 나체가 많이 취급되며 수많은 상업 광고에 나오는 제품이 여인의 나체와 함께 제시되는 것 등은 결국 이 절시증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성 행동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예년에 비해 훨씬 완화되었으며, 또 상업 광고가 성욕의 대상적 충동을 많이 공급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공중변소에 그전처럼 해괴한 성적 낙서가 많지 않은 편이다.
끝으로 산악 낙서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레크레시션 붐이 시작되었다. 등산도 처음에는 학생층에서 유행하더니 이제는 일반 대중에게도 대단한 인기다. 좋은 계절이나 휴일만 되면 서울 근교 경승지는 거의 시장통 같이 붐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산으로 출동(?)하게 되니 자연히 탈선 행위도 많게 되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에 거슬리는 것은 조악한 글씨로 바위나 암벽 등에 이름자를 쪼아 놓는 행동이다. 물론 장엄한 경치에 도취하여 그대로 돌아오기가 허전해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고도 싶으리라.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분들의 발자취를 새긴 글씨가 보이니 자기도 그 분들과 동일시해 보고자 무의식중에 이름자를 새기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자기가 감상했던 경치를 크게 해쳐 놓는다는 사실과 아울러 이런 식으로 이름을 길이길이 산에 새겨 남긴다면 후에 오는 사람들의 빈축도 두고두고 살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아야 한다. 산은 우리에게 대자연의 영원성과 신비성을 엄숙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가 산을 즐겨 오른다는 것은 이러한 엄숙하고 신비로운 대자연 속에 파묻혀 오염된 자기를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좋은 산을 자기 것으로 한다든지 이름을 남기려는 행위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다.
"196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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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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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시계
언젠가 이상한 사람이 내게 시계를 하나 선사했다. 그는 내게 시계를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에게 아주 이상한 시계를 하나 주겠습니다. 이 시계는 수선을 하거나 태엽을 감아줄 필요도 없답니다. 또 이 시계는 바늘도, 숫자판도 없답니다." "그럼 시간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야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 그래서 계속 시간을 물어야 한다. 질문을 던지고 나서 나는 매번 위쪽을 쳐다본다. 그때 나는 신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신답지 못한 것, 즉 시계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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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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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64. 한족 최후의 저항 - 삼번의 난(1673년)
이자성군의 군격을 받아 북경이 함락되고 자금성이 반란군의 발길 아래 놓이게 된 것이 1644년이었다. 이자성은 대순왕의 칭호로 성대한 북경입성식을 거행했다. 중국 천하는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에 의해 장악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성은 법을 공표하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해갔고, 대세가 이미 이자성에게로 기운 것으로 판단한 지방 세력들은 이자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자성군에게 가장 거치적거리는 상대가 중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오삼계였다.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국의 최후 관문으로 만주족의 중국침략을 저지하는 데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고, 그곳에는 50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 지역의 책임자가 바로 오삼계였다. 그는 이자성군의 북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던 중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태종이 죽은 후 8세 된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삼촌인 다이곤이 대신 통치했다. 청은 중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중국으로 침략해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거쳐야 했다. 이 산해관은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가 지키고 있었다. 오삼계는 명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양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아끼던 여자를 잡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에게로 기울 듯하던 그의 마음은 삽시간에 바뀌어 이제 이자성을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치기로 결정하고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오삼계의 오청은 청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산해관이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천연의 요새인 산해관의 오삼계가 도움을 청해왔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청은 오삼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군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청으로서는 중국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을 동시에 약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청나라가 격파해야 할 두 적대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빠진다면 청나라는 간단히 중국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는 청군을 뒤에 두고, 산해관에 다가와 있는 이자성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이자성군을 대파했다. 이자성군은 크게 패한 뒤 한걸음에 달아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자성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월 29일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자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청의 막강한 철기군이 북겨으로 쳐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자성군은 지레 겁을 먹고 북경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날 이자성군은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피했고, 그 다음날 청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입성한 청은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북경에 들어오면서 "폭력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구하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북경을 장악한 청나라는 명의 숭정제를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명나라 때 관료를 지냈던 모든 사람을 간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관청 사무에는 만주문자와 더불어 한자를 게속 사용하도록 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직도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내심 청나라에 대항하는 명나라의 옛 장수들이 있는 한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볼 수 는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오삼계군, 그리고 공유덕, 상가희, 겅중명 등이 있었다. 특히 오삼계는 이자성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부흥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영력제를 추적, 미얀마 에서 죽인 공을 세웠던 자이다. 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쪽지방에 이들을 왕으로 봉했다. 운남, 귀주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회, 복건의 경중명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을 삼번이라고 한다. 청왕조는 명의 남은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이 세력을 이용했으나, 이제 명을 따르던 세력도 어느 정도 제압했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정왕조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된 강희제 때에 이르러 세 왕의 세력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게 된다.
세 왕들은 청조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보고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대표적인 세력이었던 오삼계는 운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을 혼인시켜 청조와 결혼관계를 맺고, 티베트와 교역, 광산개발 등으로 만만치 않은 경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1673년 11월 오삼계는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다른 두 왕인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인 상지신이 오삼계의 군사동원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 세력은 일시에 군대를 모아 양자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오삼계는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청나라의 군대와 싸웠으나, 힘이 분산되어 전세는 오삼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오삼계군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자 다른 두 왕은 오삼계와의 연합을 풀고 청나라에 굴복하려 했다. 오삽계는 전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돌이기 위해 그의 권위를 높일 필요를 느꼈고 그리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주'로 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5개월 여 만에 죽고 말았다. 오삽계가 죽은 후 그의 군대는 곧바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청나라에 총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눈치를 보려 이 세력 저세력에 옮겨다니며 붙던 두 왕도 역시 청왕조에 의해 제거되고, 이후 약 250여년간 중국대륙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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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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蒲柳之姿(포류지자) 蒲(부들 포) 柳(버들 류) 之(-의 지) 姿(맵시 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에는 진(晉)나라 간문제(簡問帝)였던 사마욱(司馬昱)과 유명한 화가인 고개지의 부친이자 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의 관직을 지내게 될 고열(顧悅) 사이의 대화가 실려 있다.
고열은 간문제와 같은 30대의 나이였지만 머리가 먼저 희어졌다. 간문제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경은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는가? 라고 물었다. 고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은 송백(松柏)과 같아서 설상(雪霜)을 겪으면서도 더욱 무성해지지만, 저는 물버들과 같아 가을이 되면 곧 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
고열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지나치게 공무에만 몰두하여 침식(寢食)을 소흘히 하였던 까닭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蒲柳 란 물가에서 자라는 버들을 가리키며 수양(水楊), 포양(蒲楊) 이라고도 한다. 蒲柳之姿는 蒲柳之質(포류지질)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蒲柳의 잎이 일찍 떨어지듯 일찍 노쇠(老衰)하는 체질 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 등을 비유한 말이다. 빈둥거리며 살찌는 사람보다는 아직은 열심히 일하는 고열같은 이들이 많아 정말 다행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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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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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2. 나폴레옹은 검은 고양이를 싫어했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다
검은 고양이가 앞길을 가로질러 가면 불길하다는 미신은 미신치고는 좀 새롭다. 까마득한 옛날, 기원전 3000년쯤 이집트에서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고양이는 숭배받는 동물이었다. 물론 검은 고양이까지도 모두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고양이를 해치거나 죽이거나 하면 법을 어겼다 하여 처벌받았다. 고양이 숭배는 절대적이었으며,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죽기라도 하면 온 가족이 상복을 입고, 부자나 가난한 집 할 것 없이 그 시체를 썩지 않도록 처리한 다음에 고급 린넨 천으로 감싸고, 값비싼 청동제나 목제 관에 안치했다. 나무가 귀한 이집트에서는 나무관 값이 매우 비쌌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굴된 고양이들의 묘지에는 검은 고양이의 미라도 많이 있다. 이집트인은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몇 번씩 떨어져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것을 보고 고양이에게는 아홉 개의 목숨이 있다고 믿었다. 고양의 인기는 아주 빠르게 다른 문화권으로 퍼져나갔다. 2000년 전에 범어로 쓰여진 책에는 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의 고양이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으며, 기원전 500년 중국에서는 공자가 고양이를 애완동물로서 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또 600년경 예언자 마호메트는 고양이를 팔에 안고 설교를 했다고 하며, 그 무렵 일본에서도 성스러운 경전을 쥐가 갉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양이를 절 안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시대에는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그것은 틀림없는 길조였다. 고양이, 그 중에서도 검은 고양이를 유럽 사람들이 혐오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영국에서는 특히 심했다. 그 무렵 대도시에서 고양이 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탓도 있었지만 속박을 싫어하고 말을 잘 안 들으며 소리도 없이 걸어다닌다는 고양이 특유의 성질이 고양이의 지위를 떨어뜨렸다. 떠돌아다니는 도둑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로는 으레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할머니를 떠올렸는데 유럽에서 마녀 소동이 일어나자 흑색 마술을 부리고 있다고 해서 제일 먼저 의심을 받은 것이 바로 집 없는 할머니들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의 친구인 고양이도(특히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공범자로서 생포 당했다. 고양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잘 나타내주는 다음과 같은 영국 전설이 있다. 1560년대 잉글랜드 동부의 링컨셔에서의 일이다. 달도 없이 캄캄한 어느날 밤, 시내에서 서둘러 길을 가던 부자는 뭔가 작은 동물이 눈앞을 재빨리 가로질러 가기에 깜짝 놀랐다. 그 동물이 좁은 곳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돌을 던졌더니 상처 입은 검은 고양이가 황급히 뛰어나와서 근처에 있는 어떤 집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도망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가 도망친 곳은 평소에 거리 사람들이 마녀가 살고 있다고 수군덕거리는 집이었다. 그 이튿날이었다. 부자가 길을 걷고 있으려니까 맞은편에서 문제의 여자가 다가왔다.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팔에는 붕대를 감고 더구나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링컨셔에서는 검은 고양이는 모두 마녀가 밤에 변장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훗날에까지 계속 전해져 미국에서 세일럼의 마녀 사냥이 있었을 때도 마녀가 거리를 떠돌아다닐 때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고양이로 둔갑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때 그처럼 숭배 받고 소중히 여겨지던 고양이가 지금은 두렵고 혐오스런 존재로 변해 버렸다. 중세 말기에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고양이가 절멸의 위기에 빠졌다. 마녀에 대한 공포는 이상하리만치 높아지고, 많은 무고한 여자가 무고한 애완동물과 함께 화형 당했다. 어떤 갓난애는 눈빛이 이상하고 얼굴이 교활해 보여 갓난애답지 않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장차 악령이 달라붙어서 낮에는 마녀, 밤에는 검은 고양이로 둔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630년대에 들어서서 루이 13세가 이 수치스러운 행위를 금지시킬 때까지, 매달 수천 마리의 고양이가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검은 고양이는 전 유럽에서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 학살당했다. 그래도 검은 고양이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다. 고양이의 목숨이 정말로 아홉 개가 있다면 얘기는 또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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