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813호
2010.12.19 (음 11.14)/발송인: |
|
(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문예소식 |
|
|
|
|
|
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
|
가장 간단한 저작이 항상 가장 우수한 저작이다. ─ 플라톤
|
|
|
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12바늘을 꿰맸다
의존명사 중에 ‘단위명사’라는 것이 있다. 수효나 분량 등의 단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를 이른다. ‘돼지고기 한 근, 두부 한 모, 사과 한 접’에서 ‘근, 모, 접’이 단위명사다. 단위명사는 매우 다양하다. 일반명사라도 무엇을 세는 단위로 쓰일 수 있으면 단위명사가 될 수 있다. ‘상자, 병, 가마니’ 등도 단위명사가 될 수 있다.
곡식의 분량을 나타내는 단위명사로 ‘말, 되, 홉, 작’ 등이 있고 연탄의 수량을 나타내는 ‘장’이 있다. 길고 가느다란 물건이 한 줌에 들어올 만한 양을 ‘모숨’, 조기를 한 줄에 열 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을 ‘두름’, 북어 스무 마리를 ‘쾌’라고 한다. 신발에는 ‘켤레’, 직물 두루마리에는 ‘필’, 과일에는 ‘접’이 쓰인다. 외래어인 미터/킬로미터, 그램/킬로그램, 리터/데시리터, 아르/헥타르 등도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단위명사다. 단위명사를 정확하게 사용하면 말맛이 살아난다. 연탄을 ‘한 개’라고 해도 통하지만 ‘한 장’이라고 하면 말이 착 달라붙는 느낌을 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6일 농구 시합 중 상대 선수의 팔꿈치에 입술을 부딪혀 12바늘을 꿰맸다.” 중앙 일간지 기사의 한 구절이다.
상처를 꿰맨 단위로 ‘바늘’을 썼다. 실을 꿴 바늘로 한 번 뜬 자국을 ‘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2땀을 꿰맸다’고 해도 괜찮을 법하다. 사전은 이런 뜻의 ‘바늘’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언중은 상처를 꿰맨 단위로 ‘땀’을 쓰지 않고 ‘바늘’로 통일해 쓰고 있다. 사전이 ‘바늘’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우재욱/시인
부딪치다와 부딪히다
‘부딪치다’는 능동형, ‘부딪히다’는 피동형이다. 그러니까 ‘부딪치다’는 행동의 주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상황을 나타내고, ‘부딪히다’는 행동의 주체가 다른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길을 걷다 가로수에 ‘부딪쳤다’는 능동, ‘부딪혔다’는 피동에 초점을 둔 것이다. 행동의 주체가 둘이면 ‘부딪치다’가 된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부딪쳤다.’
전송과 배웅
떠나는 사람을 위해 얼마큼 함께 가다 떠나보내게 된다. 상황에 따라 전송 또는 배웅이라고 한다. 비슷한 뜻을 가졌지만 쓰임새가 좀 다르다. 전송은 역이나 터미널, 공항까지 나가는 일을 주로 가리킨다. 배웅은 집 앞이나 차 타는 곳까지 나갈 때 주로 사용된다. 전송에 비해 비공식적, 비격식적인 느낌을 준다. ‘대문 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변죽
얼마 전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 결과 제이유그룹과의 부적절한 돈거래 의혹이 제기됐던 고위 공직자들이 모두 무혐의 처분돼 논란이 일었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이 "이번 검찰 수사는 의혹에 대한 면죄부만 준 변죽 수사였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변죽 수사'라는 말을 가끔 쓰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럴 땐 '변죽을 울리다' 또는 '변죽을 치다'는 관용구를 써 '변죽만 울린 수사' '변죽을 친 수사'라고 써야 맞다.
'변죽'이란 그릇이나 세간, 과녁 따위의 가장자리를 의미하는 말로 "소반은 혼자 들어 나르기에 편하며 변죽이 자연스럽게 도드라져 그릇이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는 젓가락으로 상의 변죽을 두드리며 흥을 돋우었다"처럼 쓰인다.
그러므로 '변죽을 울리다(변죽을 치다)'는 말은 그릇의 가장자리를 쳐서 소리가 나게 하듯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빙 둘러 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알아차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곁가지만 건드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와 여당이 또다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으나 이번에도 공급 확대와 거래 활성화라는 핵심은 외면했으니 변죽만 울린 꼴이다" "가치와 시가총액이 낮은 기업들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변죽만 울리는 셈이다"처럼 쓸 수 있다. '변죽'과 같은 뜻으로는 '언저리' '시울' '가두리' 등이 있다.
살짝궁, 살짜궁 / 살짝이, 살짜기
-영호와 수희는 단둘이 {살짝궁/살짜꿍} 데이트를 했다.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연구원 편찬)에 따르면 위 문장에서 '살짝궁'은 옳고 '살짜꿍'은 그르다. 그러나 이러한 처리는 뭔가 석연찮은 데가 있다. '살짝궁'은 '살짝'과 '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살짝'은 부사이고 '-궁'은 접사이다. 문제는 부사 뒤에 접사가 결합했을 때 부사의 원형을 밝혀 적는가이다. 한글 맞춤법 제25항에 따르면 부사에 접사 '-이'가 붙어 역시 부사가 되는 경우에 원형을 밝혀 적는다고 되어 있다. '곰곰이, 더욱이, 일찍이'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외의 접사와 결합할 때에는 어떠한가? 아쉽게도 맞춤법에 그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없다. 그런데 사전에서 부사가 '-이' 이외의 접사와 결합하는 예를 찾아보면 대부분 원형을 밝혀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일찌감치(일찍+-암치), 갸우뚱(갸웃+-둥), 짝짜꿍(짝짝+-궁) 등은 원형을 밝혀 적지 않고 있다. 따라서 표기 원칙의 일관성을 위해 '살짝+-궁' 역시 '살짝궁'이 아닌 '살짜꿍'으로 적어야 합리적이다. 참고로 한마디 부언한다면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살짝이 옵서예'가 맞는다. '살짝이'는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 누락되어 있다.
|
|
|
문학나눔 → 우리나라 |
|
|
내 사랑 - 전윤호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봉긋한 가슴을 눈 여겨 봐두었지 날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파먹어야 하니까 난 당신에게 생살을 찢기는 아픔밖에 줄 게 없어 지금은 사방이 막힌 빙하기 당신의 늑골 속에 숨어 단잠을 자다가 심심하면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지 참나무 숲과 얼지 않은 강 멈출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내 사랑 당신은 나의 무덤이야
|
|
문학나눔 → 현대시조 |
|
|
민들레 - 최지향
잔디 위에 피어오른 노오란 민들레꽃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잎사귀는 바닥에 바싹 엎디었지만 너무나 알고 싶고 궁금해서 꽃대를 기린처럼 내어 밉니다.
열 네 개 꽃받침을 든든히 받치고 별처럼 흩어지는 수많은 꽃수술 안테나 샛노란 희망을 품고 봄하늘 아래 피어납니다.
|
|
문학나눔 → 동시 |
|
|
꼿꼿하게 - 김녹촌
산이 굳건하게 치솟아 푸르르듯 나무도 꼿꼿하게 위로 위로 치솟는다.
거친 바람에 떠밀려 비뚜로 쓰러져도 웅지머리는 꼿꼿하게 하늘로 하늘로
곧게 자라고 싶은 곧은 마음 꼿꼿하게 일어서고 싶은 곧은 마음 때문.
머리털 같은 상추며 강아지풀 새싹도 다부진 무 배추 떡잎도 흙덩이 밀치며 꼿꼿하게 꼿꼿하게.
소나무 미루나무 새순도 민들레꽃 오랑케꽃 꽃자루도 꼿꼿하게 꼿꼿하게.
오로지 곧은 마음 착한 몸짓 때문에 가슴 펴고 활짝 웃어도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라.
|
|
|
|
문학자료 → 수필 |
|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6장. 작지만 확고한 행복을 나는 원한다
UFO를 못 본 하루키는 바보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UFO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허어, 그래?" 하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라는 영화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영화가 잘못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다만 내가 UFO라는 것에 대해서 흥미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서는 비교적 재미있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흥미가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중국 만두를 싫어하니까, 만일 중국 만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있다면 그 작품에 대한 점수는 상당히 인색할 것 같다. 제멋대로라고 할 지 모르지만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UFO의 경우는 중국 만두와 달라서 유달리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다만 흥미가 없을 뿐이다. UFO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믿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말하면 '있을까?'하고 생각하고, 없다고 하면 '없을까?'하고 생각한다. 자연체라고 할까, 아무튼 어느 쪽이라도 좋은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UFO를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허어, 그래?'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대개의 경우 상대방은 "자네는 믿지 않는군!"하고 화를 낸다. 나는 UFO의 존재를 특별히 믿지 않는 것은 아니고, 다만 흥미 없는 일에 대해서 양자 택일을 강요당하는게 싫을 뿐이지만, 그러나 나의 심정을 설명해도 좀처럼 이해를 해주지 않는 일이다. 골치 아픈 일이다. 지난번에는 어떤 아가씨에게, "하루키 씨는 UFO도 보지 못했으니까 틀렸다구요!'라는 의미가 담긴 말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소설가로서 일을 해 나가려면, UFO 한 개쯤은 보아 두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UFO나 유령 같은 것을 한 번 보아두면, 예술가로서 관록이 붙을 것 같다. 술집에서 화젯거리로 꺼낼 수 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는데, 편의적으로 UFO나 유령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예술가' 라고 정의하고, 경험이 없는 소설가는 '예술 방면 활동가'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누군가가 UFO에 대한 화제를 들고 나왔을 때, "아, 나는 소설을 쓰고 있지만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 방면 활동가'니까, UFO 이야기는 못합니다"하고 분명히 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그런가. 이 사람은 '예술방면 활동가'니까 이런이야기를 해도 헛일이겠군' 하고 생각해 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나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수수께끼에 휩싸인 고양이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대로의 유아 체험이 있고, 청춘기의 뜨거운 상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일까?
인간도 여려 부류가 있겠지만, 고양이의 부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나는 대체로 한가한 생활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들 고양이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는 일이 없다. 열 마리의 고양이가 있으면, 거기에는 열 가지 다른 개성이 있고, 열 가지 다른 버릇이 있으며, 열 가지 다른 생활 방식이 있다. 그런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니까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뿐이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여러 갖 불가사의한 일이 많다. 그것 참 이상도 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하루 해가 저물어 버리곤 한다. 우리 집에는 열한 살 된 암컷 샴과 네 살 먹은 수컷 아비시니언이 있는데, 성격이 복잡한 점애서, 나이를 먹은 샴 쪽이 역시 앞선다. 우선 첫째로, 그 고양이는 밥을 주어도 얼른 입에 대지 않는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흥, 밥이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다른 곳으로 가서, 한참 동안 꼬리를 핥고 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에 다가와서, '어디 먹어 볼까?'하는 식으로 밥을 먹는다.어째서 그런 짓을 일일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먼저 세 번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버릇이 있다. 우선 이불 속으로 들어와 드러누워서 잠깐 동안 생각하고 나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하는 느낌으로 쓰윽 밖으로 빠져 나간다. 이것이 세 차례 계속되고, 네 번째야 겨우 자리를 잡고 깊이 잠이 드는 것이다. 그 의식에 대충 10분에서 15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완전한 시간 낭비다. 고양이 쪽도 번거로울 테고, 나도 간신히 잠이 들려고 하면 고양이가 들락날락 거리니까 상당히 신경이 곤두선다. 세상에는 "삼고(삼고)의 예(역주:중국 촉한의 임금 유비가 제갈 양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 간청하여 드디어 제갈양을 군사(군사)로 맞아들였다는 고사)"라는 것이 있지만, 고양이가 한밤중에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따금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런 버릇이 고양이의 머리 속에 각인된 것일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있다.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대로의 유아 체험이 있고, 청춘기의 뜨거운 상념이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걸일까? 그리고 그러한 경로를 거쳐 거기에 한 마리의 고양이로서의 아이텐티티가 생겨나서, 겨울 밤에 정확히 세 차례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을까?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자유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한 연설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자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성문 옆이나 그대들의 집 난롯가에서, 나는 그대들이 엎드려 자기 자신들만의 자유를 비는 것을 보았다. 마치 압제자 앞에 스스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설사 자기를 죽일지라도 찬양해 마지 않는 노예들과 같이. 그래, 나는 보았다. 사원의 뜰이나 성채 그늘 밑에서 그대들 중의 가장 자유스러운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나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그 때 나의 내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왜냐하면 그대들 자유에의 욕망이 그대들에게 재갈을 물릴 때만이, 또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기쁨이라고 떠들기를 그만둘 때만이 진실로 그대들이 자유로울 것이므로.
욕망도 슬픔도 없는 밤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찬 낮에, 또한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그대들의 삶을 구속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이 이 모두를 벗어던지고 해방되어 이들 위로 일어설 때만이 실로 그대들은 자유로우리라. 그리하여 그대들이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쇠사슬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들이 낮과 밤 저편으로 일어설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실로 자유라 부르는 것은 이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인 것이다. 비록 그 고리가 햇빛에 반짝이고 눈을 어지럽게 할 지라도.
그리하여 그대들이 자유로와지기 위해 버리려 하는 것은? 그대들 자아의 파편 외에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대들이 버리려는 법이 부정한 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대들의 이마에 그대들의 손으로 씌어진 것. 그대들이 아무리 법전을 불사른다 하더라도, 재판관의 이마를 씻고 바닷물을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그대들이 내쫒고자 하는 자가 폭군이라 한다면, 그대들 내부에 있는 그의 옥좌가 무너져 있는가를 우선 보라. 아무리 폭군이라 할지라도 자유 속에 일말의 포악함도 깃들어 있지 않고 긍지속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자유인과 긍지인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그대들이 벗어버리려 하는 것이 근심이라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대들이 선택한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없애려 하는 것이 공포라면, 공포의 자리란 두려운 자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 실로 모든 것은 그대들 존재 내부에서 반쯤 엉켜 버린 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갈망하는 것과 두려운 것, 불쾌한 것과 그리운 것, 추구하는 것과 벗어나고 싶은 것들이. 이것들은 그대들 안에서 한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채 움직인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이상 보이지 않을 때면, 남은 빛은 또다른 빛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그대들의 자유도 자기의 족쇄를 잃어버릴 때 비로소 보다 큰 자유의 족쇄가 되는 것이다. |
|
|
문학자료 → 수필 |
|
|
생활 속의 심리 - 김성태
첫째 묶음 - 생활 속의 심리
점과 여성
점장이나 무당을 찾는 손님은 대체로 남자보다 여자가 많고, 또 무슨 답답한 일이 있거나 역경 속에서 헤매는 사람은 물론, 이상하게도 아주 잘사는 층이 많다고 한다. 그저 수수하게 살아가는 중간층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경향이다. 무슨 답답한 일이 있거나 위태로운 상황 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것저것 많은 생각으로 결심이 안 서면 혹시나 하고 점도 쳐보겠지만, 별 근심거리가 없어 보이고 잘사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많이 찾아간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들 역시 남모를 근심 걱정이 있는가 보다. 지금 당장 절박한 근심이야 없다지만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에 떨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는 좀 잘산다지만 행복감이라는 것과는 동떨어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벼락부자가 되었거나 실속 없이 출세하고 못할 짓을 해서 잘살게 되었을 때 그 불안은 더욱 심할 것이다. 투기적인 실업가, 대중의 인기에 목을 맨 정치가나 배우, 그리고 손님들의 기분에 좌우되는 이른바 물장수들이 점쟁이에게 단골이 되는 수가 많다는 사실이 바로 이를 뒷받침한다. 직업의 불안정성이나 심리적인 불안정 등이 점치는 동기가 된다고 하겠다. 점치지 않고서는 행동을 결심할 수 없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한다. 자유당 시절 어느 장관은 날마다 점치는 선생님을 문안드렸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알 바 아니지만 점을 어느 정도 좋아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얼마나 정치적 식견과 행정적 수완이 없었으면 점으로 정치를 하였을까 생각되니 한심스럽다.
남자보다 여성들이 점치러 더 많이 다닌다면 여성이 그만큼 심리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남자와 결혼할 것인가, 현재는 미관 말직이지만 언제쯤 남편이 출세할 것인가,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인가, 사업이 잘 되어 살림이 좀 펴질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여성들이 도맡아 근심하는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한다. 여성이 자신의 직업 없이 남성에게 의지하며 살아왔으니 어린이가 정서적인 불안정을 갖는 것처럼 그들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이같은 여자의 불안정성은 선천적 특질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들을 길러 온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조건 탓임에 틀림없다. 여성들이 더 많이 점치러 다닌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또 하나의 가설은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기준이 저급한 데 기인한다는 이론이다. 어엿한 신사며 지식인의 신분으로서는 어느 남자든 자기가 언제 어떻게 점쳤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꺼려한다. 대장부(?)로서 점치러 다닌다는 것은 수치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인들은 그것을 수치로 느끼는 것 같지 않다. 물론 부인들도 점복술을 꼭 믿어서 치는 것은 아닐 게다. 하도 답답하니까 가고, 장난 삼아 가기도 하고, 또 반신반의한 태도로 가는 경우도 많다. 흔히 말하듯이 "의원과 점쟁이는 인연이 있어야 병을 집어내듯 맞추고 고친다."는 것은 전적으로 점을 믿으려는 것이 아님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이를 부끄러워하고 여성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둘 다 똑같이 점을 백 퍼센트 믿지 않으면서 왜 한쪽은 갔다 와서 그것을 비밀로 하고, 왜 한쪽은 그것을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여성은 미천하니까 그까짓 짓을 해도 좋지만 남자는 그럴 수 없다는, 말하자면 남존여비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못난 짓을 해도 미천한 여성이라 너그럽게 봐주니 이같은 창피한 관용(?)에 재미 붙여 여성이 더 많이 점치러 가는 것은 아닐까.
인생 고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우리의 인생 항로는 순탄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이 물밀듯이 닥쳐온다. 이러한 불행 중 완전히 우연적인 것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런 불행 중 완전히 우연적인 것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런 불행을 초래하게 하는 소지를 그 당사자가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자기 불행의 소지와 조건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불행은 연속적으로 계속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행의 소지와 조건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그 불행을 우연적인 것처럼 여긴다. 이런 우연적인 불행이 두세 번 자주 반복되면 자기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기며 그러한 불행이 연속된다고 단정하게 된다. 이쯤 되면 운명론자가 된다. 인간은 또 자아를 지키거나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자기의 불행을 자기 잘못으로 보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부과된 운명의 탓으로 여기려고 한다. 그리하여 실패를 거듭하고 불행한 상황에 놓인 사람일수록 운수가 나빠 실패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일쑤다. 이를 따지고 보면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자기 방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운명론자 중에는 인생에 성공해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실패를 거듭하고 불행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본다. 젊은 청년들보다는 고생을 많이 한 노인 층에 운명론자가 많다. 남성들보다는 여성들 중에서 팔자 타령이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 동양인 중에 운명론자가 많은 것도 동양의 지리, 풍토가 삶을 크게 좌우하고, 또한 이런 거센 자연 조건은 전제 정치를 불가피하게 해서 백성들이 시달릴 대로 시달려 운명론자를 많이 만들었을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더욱이 이러한 역사 속에서 짓눌려 살던 여성의 지위는 더욱 낮아서 거의 완전히 주체성을 잃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운명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주체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가 보다. 일정한 과정의 운명이 있어 그대로 살아간다면 완전한 체념 속에서 무한히 살아가겠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운명을 미리 알아보고 싶어해서 -나쁜 운명에 미리 대비하려 하고 그 운명을 전환시키려는 것인지-운명을 점치려고 한다. 근심이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운명이 이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궁금해 한다. 이 고생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주 영구적인지, 또 이 길로 가야 좋을지 저 길로 가야 좋을지 자기의 운명을 보았으면 한다.
점괘에서 잘살고 운수 대통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위안과 희망을 얻어 현재의 고생을 달게 받을 수도 있고 마음이 사뭇 평온해지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점괘가 계속 고생할 운명이라 해도 그리 불안해 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고생이 운명 탓이지 자신의 탓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점괘가 좋든 나쁘든 이럭저럭 위안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데 인생관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된생활이나 질서 있는 행동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 형태야 어떻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인생관을 좇아 살아가는데, 다만 그 인생관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한 보람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관으로써 자기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이를 원숙한 인격이라고 한다. 이렇게 과학적 인생관의 틀을 잡아 살아갈 때, 사소한 실패나 손해, 고민 등은 크게 문제가 안 된다. 쉽게 웃어넘길 수 있다. 오히려 거시적 안목에서 볼 때, 사소한 고민을 하는 그 자체가 우습기 짝이 없다. 훌륭한 인생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풍부한 유머로써 일상 생활의 번뇌를 웃어 넘기면서 인생의 중심적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안정되고 착실한 생활을 한다. 이들에게는 운명론도 필요 없고 점쟁이도 쓸데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성이 점을 좋아한다면, 이는 그들이 착실한 인생관을 지니지 못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근본적인 가치와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공연히 불안하고 고통스러워 점쟁이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리라.
사람마다 똑같은 조건의 환경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비길 데 없이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생 속에서 태어난다. 이러한 천부의 조건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기 능력과 자기 역할을 자각하여 새로운 환경을 건설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람있는 자기 인생을 형성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이나 성인은 모두 이러한 분이다. 자기를 알고 사회를 일단 받아들여 그 사회의 모순 결함을 고쳐 나감으로써 자기 자신을 향상시킨다는 관점에서 살아갈 때, 쓸데없는 허영이나 사소한 마음의 고통 또는 공연한 불안들은 해소될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성들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선인들의 가르침에 귀기울여 인생관을 더욱 수준 높게 확립한다면, 그래서 유머와 교양을 풍부하게 지니게 되면 점보려는 유혹은 자연히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1962년 10월"
|
|
|
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
|
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수행
어떤 사람이 한 선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종교적 수행을 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의 수행 방법은 일상 생활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질문한 사람은 어리둥절해져서 말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군요."
선사가 말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아직도 질문을 한 사람은 혼란스러워 또 물었다.
"그러나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선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너는 먹을 때 다른 많은 것들을 같이 하고 있다. 너는 먹으면서 생각하고 꿈꾸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있다. 너는 단순히 먹기만 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먹을 때 단순히 먹기만 한다. 거기에는 먹는 것만이 존재할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하다. 너는 잘 때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너는 자면서 꿈꾸고 싸우고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나 내가 잘 때는 단순히 자기만 할 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이 존재할 때는 오직 먹는 것만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걷는 것이 존재할 때는 오직 걷는 것만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걷는 것이 있을 때 나는 그저 걷기만 한다."
- 일상적이되, 일상 생활 안에 깨달음을 끌어넣어라.
|
|
|
문학자료 → 세계사 |
|
|
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61. 자명종과 세계지도-선교사들의 활동(17세기 초)
중국에 서양의 크리스트 교가 들어온 것은 당대였다. 그러나 그때의 크리스트 교는 정통 카톨릭이 아닌 이단의 한 파였다. 정통 크리스트 교가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명대 후반기 부터다. 명나라 때 중국에 크리스트 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제주이트 교단이다. 이 교단은 중국에서는 '야소회'로 불렸다. 제주이트 교단은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성립한 카톨릭 포교단체다. 이 교단이 창립되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카톨릭 교단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로서, 루터나 칼뱅의 종교 개혁이 이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주이트 교단은 이런 분위기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카톨릭의 자기혁신 및 교세확장 운동의 하나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중심사업은 이교도 지역에 대한 카톨릭 포교활동이었다. 1542년 제주이트 교단의 창설자의 하나인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인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에 카톨릭이 들어오는 시초다. 그는 중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중국 카톨릭 전파의 가장 큰 공로자는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였다.
그는 1583년 광동을 통해 중국에 입국했으며 1598년에는 북경에와 황제를 만나 북경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는 없는 자명종(시계), 세계지도 등을 가지고 왓으며, 서양 문물 및 서양 실정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절대적인 목표는 카톨릭 전파였다. 그는 북경 근처에 포교당을 짓고 주로 중국의 고위관리들과 친교를 맺은며 그들을 카톨릭에 들어오게 해싿.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 명의 고위관리들이었다. 고위관리들을 중심으로 카톨릭을 소개하는 것은 제주이트 교단의 포교활동 지침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는 중국어를 익히는 등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싿. 유학자들의 복장을 했으며 관리들에게 망원경, 자명종 등 신기한 물건들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또한 중국인들에게 카톨릭을 소개하는 책을 중국어로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천주실의)다.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탄생하게 하는 촉매열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실의)에서는 크리스트 교는 불교보다는 유교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국인들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는 1610년에 사망햇는데, 당시 중국의 카톨릭 신자 수는 약 2,500여 명이었다. 그의 사후 교세는 더욱 확대 되어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약 15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청대에 들어오면 중국의 카톨릭 선교활동에 변화를 보이게 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명대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유교와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카톨릭의 내용을 상당부분 유교에 맞추려고 던 점이다. 크리스트 교의 신과 유교에서의 상제가 같다고 하여 공자의 제사나 조상숭배 등도 인정햇던 것이다. 그런데 뒤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 등은 제주이트 교단의 이러한 유교와의 타협이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주이트 교단이 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햇던 데비해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는 탁발수도회의 전통대로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에서의 제주이트 교단의 활동은 로마 교황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청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1706년 강희체 대 마테오 리치의 입장을 인정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중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싿.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인 카톨릭 교도가 유고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옹정제 때에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크리스트 교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선교사 중의 몇몇은 궁중내의 기술자나 황가 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크리스트교 선교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 크리스트교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쩨2차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과 프랑스에 패한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에서다.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활동은 카톨릭 전파 말고도 서양의 학문이 소개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게 하여 선교활동에 활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활동 과정에서 이런 자연과학 지식의 일부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의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이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중화의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세계의 위치와 각 지역의 여러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알레니의 (직방외기)는 중국인들에게 중국 밖의 또다른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선교사에게 청나라의 영토와 주변 속국들의 위치를 실제 측량하여 그리게 한 (황여전람도)가 작성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의 수학지식을 서관계가 정리한 (기하원본)은 유클린트 기하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달력에 관한 것, 무기 특히 화포 만드는 기술 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
|
|
문학나눔 → 고사성어 |
|
|
越俎代?(월조대포) 越(넘을 월) 俎(도마 조) 代(대신할 대) ?(부엌 포)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요(堯)임금과 기산에 숨어 살았다는 은자(隱者) 허유(許由)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요임금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이야기 하며 허유에게 천하를 맡아줄 것을 권유한다.
"일월(日月)이 밝은데 횃불을 계속 태우면, 그 빛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때 맞추어 비가 내리는데 여전히 물을 대고 있으니 그 물은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부디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이러한 요임금의 권유에 허유는 뱁새와 두더지를 비유로 들며 다음과 같이 거절의 뜻를 표한다.
"그대는 돌아 가시오. 내게 천하란 아무 소용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못 만든다고 할지라도 시동이나 신주가 술단지와 고기그릇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오( 人雖不治 ,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越俎代? 란 자신의 직분을 넘어 타인의 일을 대신하는 것 을 말한다. 越俎之嫌(월조지혐) 이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꺼리다 라는 뜻이다. 일 처리가 썩 훌륭하지 않더라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
|
|
|
문학자료 → 이글저글 |
|
|
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신의 머리에 떨어지는 새똥을 막아라
기독교 회화에서 몇 세기 동안 그려진 성인 등의 머리 주위에 나타나 있는 둥근 바퀴 모양의 찬란한 빛, 즉 후광은 원래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라 이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후광은 왕관의 기원이기도 하다.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신을 그릴 때 대개 머리 주위에 후광을 그렸다. 고대 인도, 그리스, 로마의 그림 속 신의 머리에는 모두 후광이 그려져 있다. 고대의 왕들은 신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자기를 신격화하기 위해 이 후광을 자기 머리에 붙이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것이 바로 깃털이나 보석, 금으로 만든 관이다. 로마의 역대 황제는 신성시되었기 때문에 관을 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운 것은 신의 나라 왕이라고 말한 그를 조롱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교의 상징이 그리스도 교회의 중요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초기 카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후광이 원래 이교의 상징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한동안은 종교 화가에게 가능한 한 이것을 그리지 말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삽화가 들어 있는 중세 때 책을 보면 이것이 모두 지켜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역사가에 따르면 그리스도 교회가 처음 후광을 받아들인 것은 7세기 때라고 한다. 애초에 그것은 실용적인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우산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바깥에 있는 성인의 동상이 비나 새똥을 맞지 않게 하고 녹스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머리에 나무나 놋쇠로 만든 접시를 얹었던 것이다. 그 접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처음에는 후광(halo)이라고는 불리지 않았다. 어원학자는 할로라고 하는 말은 이교의 신이나 기독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한다. 할로는 그리스도 탄생보다 천년 이상이나 앞선 농민들이 탈곡하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의 농민들은 탈곡할 때 우선 곡식 다발을 딱딱한 땅위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려 그 위를 몇 마리의 소로 하여금 걸어다니도록 하였다. 소가 한가운데서 차츰 원을 그리며 걸었으므로 탈곡 후에는 원형이 되었다. 이것을 그리스인들은 원형 탈곡법, 즉 할로스라고 말하였다. 16세기 와서 천문학자는 천체 주위에 보이는 무리를 후광이라고 불렀고 또한 신학자는 성인의 머리 위에 있는 동그란 모양의 광채를 가리켜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
|
|
|
바탕화면 |
|
|
|
『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