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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5호
2010.11.3 (음 9.27)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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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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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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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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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없는 백만장자가 되는니보다 차라리 책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거지가 되는 것이 한결 낫다. - 마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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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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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이 좋다
반죽은 가루에 물을 붓고 이겨 갠 것이다. 잘 개진 반죽은 부드럽고 차지다. 성격 부드럽고 유들유들한 사람과 비교된다. 이런 사람은 노여움이나 부끄러움을 타지 않고 조금 뻔뻔하다. 그래서 ‘반죽이 좋다’에 ‘노여움이나 부끄러움을 타지 않다’는 비유적 의미가 생겼다. ‘반죽’은 비위가 좋아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는 성미란 뜻도 갖게 됐다.
개발과 계발
개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중 ‘지식이나 재능 등을 발달하게 함’이라는 뜻도 있다. 계발은 ‘슬기나 재능, 사상 등을 일깨워 줌’이라는 의미다. 이런 측면에서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 관계에 있다. 따라서 어울리는 말에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는다. ‘자기 개발/계발’, ‘능력 개발/계발’, ‘역량 개발/계발’. 근본적인 뜻풀이 차이만 보인다.
먹거리
'먹거리'는 현재 비표준어다. 이러한 규범적 처리는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단어가 조어법을 어기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의존명사 '거리'는 명사 뒤나 동사의 관형형 어미 '-ㄹ/을' 다음에 오기 때문에('웃음거리, 입을 거리' 따위), 동사 어간 '먹-'과는 결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위의 규칙은 통사 규칙일 뿐이다. 조어는 얼마든지 통사 규칙과 무관하게 이뤄질 수 있다. 만일 조어가 반드시 통사 규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면 '늦가을, 뛰놀다' 같은 소위 비통사적 합성어는 성립할 수 없다. '먹거리'가 조어법에 어긋난다고 하는 주장은 '늦가을, 뛰놀다' 대신 '늦은 가을, 뛰어놀다'로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둘째, '먹거리'를 '먹을거리'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두 말이 매우 비슷하긴 해도 결코 똑같지는 않다. 가령, "그는 가게에 가서 먹을거리를 좀 사왔다"와 "나는 어제 향토 먹거리를 소개하는 방송 프로를 보았다"의 경우, '먹을거리'와 '먹거리'는 맞바꾸기가 어렵다. 물론 둘 다 먹는 대상물을 가리키지만, '먹을거리'가 장차 끼니나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반면, '먹거리'는 일반적으로 즐기거나 섭취할 수 있는, 어떤 부류의 것을 뜻할 때가 많다. 따라서 '먹거리'는 '먹을거리(사실 이 말이 하나의 단어인지도 의문이다)'와 별개의 말로 인정될 필요가 있다.
고백, 자백
#1. 1912년 애인을 목 졸라 죽인 혐의로 한 남자가 기소된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지만 그는 범행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톱에서 피해자가 쓰던 분홍색 분가루가 묻은 피부 조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2. 취조실에 용의자와 두 명의 경찰이 있다. 한 명은 용의자를 마구 윽박지르는 나쁜 경찰이다. 또 한 명은 나쁜 경찰을 나무라며 부드러운 말로 용의자를 타이르는 좋은 경찰이다. 처음에 나쁜 경찰에게 시달린 용의자는 이후 들어온 좋은 경찰의 한마디에 설득되며 자신의 죄를 순순히 밝힌다.
현대 과학수사의 길을 제시한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의 일화를 다룬 첫 번째 얘기와 경찰과 용의자 간 고도의 심리전을 보여 주는 두 번째 얘기에서 결국 범인들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밝힌다. 이 경우 '자백'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고백이란 말이 적합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자백'으로 써야 한다. '자백'은 자기가 저지른 죄나 허물 등을 남들 앞에서 스스로 털어놓는다, '고백'은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춰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한다는 뜻이다. 둘 다 털어놓는 것이지만 주로 상대방의 추궁이나 강요에 의해 이뤄지는 게 '자백'이라면 '고백'은 본인의 뜻에 따른 것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달콤한 사랑 자백" "형사의 추궁에 범행 일체를 고백한 범인"이라고 쓰면 어색한 문장이 된다.
속풀이
술을 마시되 덜 취하는 방법이라든가, 술을 많이 마신 이튿날 속을 빨리 푸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기사들도 술꾼들에겐 일과성 조언밖에 안 된다. 술을 안 마시는 게 상책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일찍이 현진건은 그 속내를 파악하고 '술 권하는 사회'를 써내기도 했다. 술을 거부할 수 없다면 숙취를 해소하거나 쓰린 속을 푸는 방법을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속을 푼다는 뜻으로 '속풀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속풀이'를 찾아보면 첫째 뜻으로 '분(憤)풀이'의 잘못이라고 나와 있다. 둘째 뜻으로는 '분풀이'의 북한어로 돼 있다. 이것으로 보아 '분풀이'의 뜻으로 '속풀이'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풀이'란 뜻으로 '속풀이'가 쓰이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속풀이'는 속을 푼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된다. "북엇국이 속풀이에는 최고야! 아니야, 콩나물국밥이 최고야!" "매운맛이 맞든지, 순한 맛이 맞든지 간에 속풀이 국물로는 재첩국이 제격이다." "속풀이에 좋은 북어와 콩나물로 우려낸 고급 라면, 코끝이 찡해지는 고추냉이와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날치 알이 담긴 삼각김밥, 이 두 가지로 속 편한 아침을 맞이하자."
'속풀이'는 '살(煞)풀이' '원(怨)풀이' '한(恨)풀이' '화(火)풀이' '골풀이'와 같은 부류의 말이다. '분풀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인, '속을 푸는 일'이라는 뜻의 '속풀이'도 사전에 실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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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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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幸福) - 박인환
노인은 육지에서 살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시들은 풀잎에 앉아 손금도 보았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정사(情死)한 여자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때 비둘기는 지붕 위에서 훨훨 날았다. 노인은 한숨도 쉬지 않고 더욱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성서를 외우고 불을 끈다. 그는 행복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잠드는 것이다.
노인은 꿈을 꾼다. 여러 친구와 술을 나누고 그들이 죽음의 길을 바라보던 전날을. 노인은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쓰디쓴 감정을 억제할 수가 있다. 그는 지금의 어떠한 순간도 증오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죽음을 원하기 전에 옛날이 더욱 영원한 것처럼 생각되며 자기와 가까이 있는 것이 멀어져 가는 것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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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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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여인 - 이인웅
우수의 그림자 짓고 명상에 잠긴 여인
맑디 맑은 너른 호숫가 벤취에 앉아있네
볼수록 정감이 가는 한 떨기의 들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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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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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 오순택
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혼자 서서 생각하는 나무
새가 날아와 가지에 똥을 누고 가도 바람이 잎을 마구 흔들어도 말없이 서서 하늘 향해 기도하는 나무
나무의 몸에 가만히 등을 기대면 따스한 체온이 묻어나는 것 같고 입을 만지면 손은 온통 초록물이 드는 것 같은 나무
나는 나무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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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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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5장. 신나게 살고 싶은 욕망의 여울
스파게키 공장의 비밀 -스파게티 공장이라는 말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더운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세트하는 정도의 의미다.
그들은 나의 서재를 스파게티 공장이라고 부른다. '그들'이란 양 사나이와 쌍둥이 아가씨를 말한다. 스파게티 공장이라는 말에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더운 물의 온도를 조절하거나, 소금을 뿌리거나, 타이머를 세트하는 정도의 의미다. 내가 원고를 쓰고 있으면, 양 사나이가 귀를 펄럭펄럭 거리면서 찾아 온다.
"저어, 나는 아무래도 그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 "그래?"하고 나는 말한다. "왠지 모르게 건방지고, 공감이 안 가." "그래"하고 나는 말한다. 나도 상당히 고생하고 쓴 것이다. "소금이 조금 많이 들어갔어요"하고 쌍둥이 아가씨 중 208쪽이 말한다. "다시 만들어요"하고 209쪽이 말한다. "나도 도와 줄게"하고 양 사나이가 말한다. 아니, 괜찮다. 양 사나이가 도와 주면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너는 맥주를 좀 가져다 줘"하고 나는 208에게 말한다. 그리고 209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연필을 세 자루 깎도록 하고." 209가 과일 칼로 연필을 싹싹 깎는 동안에 나는 맥주를 마신다. 양 사나이는 말린 잠두콩을 씹고 있다. 뾰족한 연필이 세 자루 준비된 뒤에, 나는 딱 하고 손뼉을 쳐서 그들 세 명을 모두 서재에서 쫓아낸다. 일을 해야지, 일을. 내가 원고를 쓰고 있는 동안 그들은 뜰에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이런 노래다.
우리의 고향은 아르덴테(역주:잘 삶아진 스파게티 국수)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고 그 이름도 듀럼 세몰리나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 밀 봄 햇살이 그들 위로 쏟아지고 있다. 뭐라고 할까,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마이 네임 이스 아처 -내가 난생처음 사들인 영어의 페이퍼백 가운데 한 권이 로스 맥도널드의 마이 네임 이스 아처 라고 하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로스 맥도널드가 죽었다. 로스 맥도널드가 죽어 버림으로써 하나의 흐름이 끝났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지면서 죽어 간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의 훈장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만년의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높이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지중해의 사나이로 가장 크게 인정을 받았지만, 그 이후의 몇 권인가에 대해서는 "이런, 모두가 비슷비슷하잖아"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배경은 언제나 끈끈하고 하려함이 없으며, 대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로, 류 아처 탐정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영감스러워지고 화려한 액션도 없고 유머의 질도 챈들러 같은 사람에 비해서 빈약한 느낌이 든다. 그런 이유로 독자들은 로스 맥도널드 보다 좀 더 젊고 싱싱한 네오 하드보일드 쪽으로 눈을 돌렸다.그리고 레이몬드 챈들러라고 하는선배 작가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로스 맥도널드의 류 아처 시리즈는 전부 다 좋아한다. 로스 맥도널스 소설의 아름다운 점은 그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수줍음과 진지함 속에 있다. 물론 결점도 그 속에있다. 화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통틀어서 나는 로스 맥도널드의 소설을 좋아한다. 내가 난생 처음 사들인 영어의 페이퍼백 가운데 한 권이 로스 맥도널드의 마이 네임 이스 아처 하고 하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내 나이 열일곱 쯤으로, 그 무렵에는 호레이스 실버의 레코드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호레이스 실버의 레코드를 들으며, 열심히 마이 네임 이스 아처를 읽었다.
잭 스마이트가 감독한 불후의 명작, <움직이는 표적>이 공개된 것도 이 무렵으로, 나는 이 영화를 당시 세 번인가 네 번 보았다. 영화속에는 폴 뉴먼이 류 아처 역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선 류 하퍼라는 이름을 썼다. 왜 아처가 아니고 하퍼인간 하면, <허슬러> <해드>에서 이름을 날린 폴 뉴먼이 이왕이면 'H' 시리즈로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 워너 브라더스 영화의 제목은 <하퍼>가 되었다. 엉터리라면 엉터리 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 무렵 폴 뉴먼은 정말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이 <움직이는 표적>의 원작도 초기의 로스 맥도널드의 특징이 느껴지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나는 중기의 줄무늬의 경구차라든가, 칼튼 사건 같은 것을 더 좋아한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 보아도, 인간이 살아 가는 데서 빚어지는 안쓰러움을 억제된 필치로 잘 그려 낸 걸 엿볼 수 있다. 등장 인물은 모두 검은 모자를 쓴 것 같은 느낌이고, 각자가 불행으로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아무도 행복하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걸어가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로스 맥도널드는 계속 외쳐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캘리포니아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부주의한 인간만이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라고 어떤 소설 속에서 그는 쓰고 있다. 나는 로스 맥도널드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쌍둥이 마을의 쌍둥이 페스티벌 -쌍둥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은 게 나의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양옆에 똑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가 한 사람씩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이 엄청나게 편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까?
나는 옛날부터 쌍둥이에게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한 번이라고 좋으니까, 쌍둥이 아가씨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 나의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양옆에 똑같은 얼굴을 한 아가씨가 한 사람씩 있으면, 여러 가지 일이 엄청나게 편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제 않을까? 미국의 클리브랜드 시의 교외에 쌍둥이 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의 기초는 1812년 모제스 윌콕스와 아론 윌콕스 형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마을의 역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엄청나게 똑같은 쌍둥이였는데, 자식을 낳고 줄곧 같은 곳에 살았으며, 죽을 때도 같은 병에 걸려 몇 시간 차이로 죽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을 기념하여 마을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쌍둥이 마을에서는 매년 상둥이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금년에도 스물여섯 개 주에서 수백 명의 쌍둥이가 이 마을로 모여들었다. 페스티벌의 정식 목적은 "쌍둥이들끼리 만남으로써 쌍둥이에게만 있는 특유한 문제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모여서 떠들어대며 게임 같은 것을 즐긴다. 탤런트 콘데스트 등도 열리는데, 그 대부분이 듀엣 코러스 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까지도 없다. 이 페스티벌에는 수많은 '더블스'도 참가한다. '더블스'라고 하는 것은 쌍둥이와 쌍둥이가 결혼한 쌍을 말한다. 그리고 '더블스'가 되길 원하는 쌍둥이들도 찾아온다. 그러니까 쌍둥이가 쌍둥이를 헌팅하는 셈인데, 이것은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넌 저쪽을 맡아라. 나는 이쪽을 맡을 테니까"하는 식으로 미리 의논을 하고 나서 "헤이, 걸스!"하고 말을 걸겠지만, 누가어느쪽을 맡을 지는 도대체가 어떤 근거하에서 정마는 것일까? 나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를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이야 말로 명실상부한 더블 데이트라는 느낌이 든다. 페스티벌이 열린 지난 이틀 동안 조그만 쌍둥이 마을은 문자 그대로 쌍둥이로 가득 찼었다. 그런 연유로 페스티벌에 끼여들게 된 '비쌍둥이'는 자신이 쌍둥이가 아닌 것에 대해서 굉장히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 같아. "정말이지 나의 반쪽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하는 것이 그들 '비쌍둥이'의 감상이다. 며칠 전에 신문을읽다 보니 다케노코족(역주:괴상한 옷을 입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소년 소녀)에게서 돈을 뜯어내던 쌍둥이 폭력배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 쌍둥이 폭력배라니 어째 으스스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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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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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먹고 마심에 대하여
그러자 이번에는 여관 주인인 한 노인이 말하였다. 먹고 마심에 대해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이 대지의 향기로만 살 수 있다면, 마치 빛으로 살아가는 기생식물처럼. 그러나 그대들이 먹기 위해 죽어야 하고, 갈증을 달래기 위해 어미의 젖으로부터 갓난 것을 떼내야 한다. 그러므로 그 행위를 하나의 예배가 되게 하라. 그대들의 식탁을 제단으로 하고, 그 제단 위에 숲과 평원의 순수한 것들을 인간 속의 보다 더욱 순결한 것을 위한 제물이 되도록 하라. 그대들이 짐승을 살해 해야 할 땐 마음 속으로 속삭이라. 살해하는 똑같은 힘으로 나도 역시 살해당하며, 나 역시 먹히리라. 나의 손아귀 속으로 나를 인도하리라. 그대의 피와 나의 피는 하늘의 나무를 키우는 수액에 불과할 뿐인 것. 그대들이 이로 사과를 깨물 땐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라. 그대의 씨앗은 내 몸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그대의 미래의 싹은 나의 심장 속에서 꽃을 피우리. 그리하여 그대의 향기는 나의 숨결이 되어 우리 함께 온 계절을 만끽하리라. 그리고 가을이 되어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그대들의 포도밭에서 포도알을 딸 땐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속삭이라. 나도 포도밭과 같으니, 나의 열매 또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거두어질 것. 그리하면 나 역시 새 포도주처럼 영원의 항아리 속에 담겨지리니. 그리고 겨울이 되어 포도주를 따를 때면, 포도주 잔마다 하나의 노래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따르게 하라. 그리하여 그 노래 속에 가을날과 포도밭과 포도주 짜던 추억을 간직하게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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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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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 법정
한 그루의 나무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근래 종교인들끼리의 모임이 활발해지면서부터는 종래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 이전의 상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그러니까 뭣보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만나지 않고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만남은 일종의 개안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인식의 들녘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영역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라, 같은 대지에 맺어져 있는 불가분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인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있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요한의 첫째 편지-4장 12절)
(기독교사상, 1971.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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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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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장 로마 공화정
공화국으로 이행한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공화정 시대에 접어든 로마를 다룬 (로마사) 제2권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유를 얻은 로마인이 평화시와 전시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로마는 해마다 선거를 통해 뽑히는 자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개인보다는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로까지 끌고간 공로자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왕을 추방한 직후에 브루투스 '포로 로마노'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으며,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해마다 민회에서 왕을 대신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2명을 선출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초대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역사에 이따금 등장하는, 선견지명과 실행력을 겸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왕의 누이니까, 왕과 브루투스는 외숙부와 생질의 관계다. 브루투스라는 성도 원래 조상한테서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바보를 뜻하는 말에서 생겨난 별명이다. 그는 '바보'로 멸시당하면서 제멋대로 전횡을 휘두른 타르퀴니우스 시대를 참고 견디어 은인자중해 왔다고 한다. 그 별명이 결국에는 성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보 취급을 받아도 왕의 조카인 이상 그는 권력 주변에 있게 마련이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관찰할 기회가 많았을 게 분명하다. 또한 정보도 풍부했을 것이다. 그런 브루투스였기에, 이제 로마는 비록 효율적이기는 하나 왕이라는 한 개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제도는 버려도 될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개혁의 주도자는 흔히 신흥세력보다 구세력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된다. 이런 제도가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권위와 함께 권력도 갖는 안정된 기관이 필요하다. 브루투스는 왕정 시대부터 존재한 원로원을 강화했다. 로물루스 시대에 100명이었던 원로원 의원이 제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는 두 배로 늘어났고, 부루투스는 이것을 다시 300명으로 늘렸다. 새로 임명된 원로원 의원에는 신흥세력에 속하는 유력한 가문의 가부장이 많았다. 원로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다. 또한 1년 임기로 교체되는 집정관을 배출할 수 있는 기관은 사실상 유력 가문의 가부장 집단인 원로원 밖에 없다. 권위와 권력도 원로원이라면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민회가 있었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는 원래 로마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었는데, 공화정 로마에서는 왕이 집정관으로 바뀌었을 뿐, 권력의 삼각 구조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것을 직역하면 '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가 되는데, 이 호칭이 관용구가 된 것은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부터다. 부루투스의 개혁으로 많은 신참자가 원로원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원로원 의원과 신참 의원을 구분해서 부르는 방식은 얼핏 보기에 구제할 수 없는 폐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꽤 교묘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파트레스'라고 말하여 구세력을 먼저 대우한다. 그런 다음 신흥세력을 언급하는데, '신참자들이여' 라는 호칭을 계속하는 한, 신참자가 새로 들어올 가능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로마 원로원은 사실 원로원이라는 우리말 번역에서 연상하기 쉬운 완고한 노인들의 집단은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의원들이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그러는 동안 원로원의 문호를 신참자에게 개방하는 데 대한 저항감도 누그러진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말의 힘이라는 것도 그렇게 얕볼 것은 아니다. 그렇게는 하지만, 250년 동안 익숙해진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것은 역시 대변혁이었다. 변혁기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변혁이 또 다른 변혁을 부르기 때문이다. 기원전 509년에 탄생한 로마 공화국도 이 역사의 관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로마의 유력 가문에 속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 가지 불만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좋다. 원로원의 의원이 아니었던 사람까지 의원으로 임명되고, 집정관이 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생겼으니까, 그런데 젊은이들은 어떤가. 집안의 가부장이 되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려면, 가부장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왕정 시대에는 달랐다. 왕의 기분에 따라 젊은이들이 발탁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은 공화정으로 바뀐 결과 자기들이 활약할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느꼈다. 그게 불만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한 젊은이의 집에 은밀히 모여, 추방된 왕 타르퀴니우스를 도로 불러들이기로 결의했다. 왕정복고를 결의한 것이다. 각자가 피로 서약한 서약서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이 집의 노예 하나가 자초지종을 엿듣고는 집정관에게 밀고해 버렸다.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 당장 체포되고, 증거물인 서약서도 압수되었다. 이들을 심문한 2명의 집정관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젊은이들 모두가 잘 아는 사람인데다, 그들이 모인 집은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친척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정복고를 모의한 젊은이들 중에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장 소집된 민회에서 젊은이들의 서명이 들어 있는 서약서가 낭독되었다. 이들 가운데 국가반역죄로 고발된 것에 반박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것을 제안했다. 또 한 명의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사형이 아니라 추방형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정관의 결정이라 해도, 두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이 반대하면 효력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루투스는 이때 집정관으로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생살여탈권까지 인정받고 있는 로마 가문의 가부장으로서 행동했다. 부루투스는 피고석에 서 있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티투스! 티베리우스! 네놈들은 왜 너희들에 대한 고발에 대해 자신을 지키려 하지 않느냐?" 두 젊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버지의 질문이 세 번 되풀이되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브루투스는 경비병들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일은 그대들 몫이다." 형집행은 그 자리에서 당장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선 주모자라는 이유로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옷을 벗기우고 두 손을 뒤로 결박당했다. 채찍질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이 잔혹한 광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브루투스만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한 두 젊은이는 한 사람씩 끌려가서 도끼로 목이 잘렸다. 거기까지 입회한 뒤에야 비로소 아버지는 자리를 떴다. 브루투스의 태도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것과는 반대로, 또 다른 집정관인 콜라티누스의 태도에는 의혹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그가 재판정에서 흘린 눈물까지 의심했다. 콜라티누스 자신도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정절을 지켜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정관에 선출된 콜라티누스는 이 변화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집정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가족과 함께 이웃 나라로 망명했다. 로마에는 자진해서 망명한 사람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석이 된 집정관 자리에는 유력자이긴 하지만 선왕 타르퀴니우스와 혈연관계가 없는 발레리우스가 선출되었다.
브루투스가 단지 가부장의 권한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걱정하고 있었고, 그 걱정이 적중한 것이다. 선왕 타르퀴니우스는 왕위에 복귀하겠다는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망명지인 에트루리아 지방의 여러 도시를 정력적으로 돌아다니며, 병력을 빌려 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에트루리아 세력이 소탕된 것에 가장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타르퀴니아와 베이였다. 그런만큼 추방된 왕에게 지원을 약속한 것도 이 두 도시였다. 병력을 가졌을 때 타르퀴니우스가 무장으로서 얼마나 뛰어난 수완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왕위에 있을 때 이미 증명된 바 있었다. 명문 집안의 젊은이들이 왕정복고를 꾀하다가 실패한 것을 알게 된 타르퀴니우스는 이제 힘으로 왕위를 탈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를 맞아 싸울 로마군은 집정관 2명이 지휘를 맡는다. 기병대는 브루투스가 이끌고, 보병군단은 발레리우스가 지휘하게 되었다. 양군은 로마 성벽에서 하룻길 떨어진 곳에서 만났다. 산재하는 숲 사이에 좁은 평지가 있는 곳이어서 전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브루투스가 이끄는 기병대가 앞장서 나아가고, 발레리우스가 이끄는 보병군단은 좀 더디게 행군하고 있었다. 에트루리아군 기병대는 타르퀴니우스의 맏아들 아룬테스가 지휘하고 있었다. 로마 기병대를 알아본 아룬테스는 말을 타고 아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로마 기병대를 향해 지휘관끼리 일 대 일로 겨루자고 제안했다. 브루투스도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사촌 형제끼리의 싸움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작전 따위가 없었다. 있는 것은 분노와 환멸뿐이었다. 아룬테스에게는 자기들을 추방한 장본인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브루투스에게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자에 대한 환멸이 있었다. 대장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싸움은 지켜보는 양군 병사들 앞에서 잠시 계속 되었다. 둘은 실력이 막상막하였다. 두 사람의 창이 거의 동시에 상대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둘은 창을 가슴에 꽂은 채 공중제비를 돌아 말에서 떨어졌다. 이것이 양군 병사들의 전의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대장의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적군을 행해 돌진해 갔다. 전투는 기병대만이 아니라 뒤따라온 보병군단 사이에서도 벌어졌다. 발레리우스가 지휘하는 로마 보병에 맞서 에트루리아 보병대를 지휘하는 것은 선왕 타르퀴니우스였다. 보병도 세력이 막상막하였다. 전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날 밤 자기 영토로 후퇴한 양군 진영에서 기묘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로마군 전사자보다 에트루리아군 전사자가 한 사람 많고, 싸움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난다는 풍문이었다. 병사들은 그것이 신의 목소리라고 믿었다. 이튿날 아침 로마군은 전쟁터로 돌아갔지만, 에트루리아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우스는 브루투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로 개선했다. 브루투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로마 여인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사람들의 질시와 의심과 중상모략을 받게 마련이다. 발레리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화정의 창시자 브루투스의 장렬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 로마 시민들은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살아남은 집정관 발레리우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선 발레리우스가 네 마리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긴 뒤의 개선식은 로물루스 이래 로마의 전통이었지만, 개선장군의 전차를 끄는 말을 네 마리 모두 백마로 한 것은 발레리우스가 처음이었다. 그가 엄청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시민들에게는 그의 왕족 취향이 드러난 것처럼 여겨졌다. 둘째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그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이것도 역시 시민들에게는 왕의 궁전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집정관 자리 하나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음에도 발레리우스는 그 자리를 빨리 메우려 하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발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왕위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아차린 발레리우스는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숴 버렸다. 그는 땅값이 싼 로마 성벽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짓게 하고, 출입문을 항상 열어두었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발레리우스는 민중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성싶은 법률을 차례로 제정했다. 왕정 시대에 왕이 관리했던 국고를 앞으로는 재정관이 관리하도록 규정한 법률도 그런 법률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와 군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도 국가 재정에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이 법률은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또 하나는 로마 시민의 항소권을 규정한 법률이다. 이 법률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도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인권을 중시한 이 법률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중요한 법개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발레리우스가 제정한 법률 중에는 여론에 영합한 나머지 양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도 없지 않았다. 그 전형적인 예가 "누구를 막론하고 왕위를 노린 자의 생명과 재산은 신들의 것이 된다."는 법률이다. 왕위에 야심을 품은 자를 죽이더라도, 피해자가 왕위를 노렸다는 증거만 있으면 가해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법률을 제정한 것은 발레리우스로서는 너무 경솔한 짓이었다. '증거만 있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이런 경우에 그 증거가 어느 정도나 객관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단순한 의혹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증거가 될 위험도 없지 않다. 이 법률도 오랫동안 로마인을 속박하게 된다. 이런 법률을 차례로 제정한 뒤에야 비로소 발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를 소집했다. 선출된 것은 정절을 지켜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아버지였지만, 고령 때문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빈 자리는 곧 메워졌지만, 이번에 새 집정관으로 선출된 호라티우스에게는 일을 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집정관은 항상 2명을 한꺼번에 선출하고, 임기 도중에 선출된 경우에도 임기 만료일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해에 제정된 몇 가지 법률 덕택에 이 법률의 입안자인 발레리우스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다. 사람들은 발레리우스를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508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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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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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왜?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쇼 무대에 진출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나는 런던 극장 협회에 가서 일자리를 얻을 거야." 하고 그녀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 친구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못생긴 얼굴과 볼품없는 머리, 매끄럽지 못한 몸매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째지는 음성과 허름한 옷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부드럽게 말했다. "다리가 좋지 않으면 가봐야 소용없어." "왜?" 그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거긴 엘리베이터가 없어?"
-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지적해도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자신에 대해 마약에 중독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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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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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53. 영락대전이 완성되다
명을 건국한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두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한가지 방법은 백성들의 경제와 행정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으며, 다른 또 하나는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공이 많은 측근 신하들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문신을 우대하고 중용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에 대해 무신들이 불만을 갖게 되자 그는 "세상이 혼란하면 무가 나서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문이 다스려야 한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가 황제에 머무는 동안 여러차례의 숙청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를 도와 명을 건국하고 원을 밀어내는데 공이 큰 역적의 노장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는 그의 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마련해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더 이상 무인들이 황제의 주변에 많이 모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던 그의 큰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자 그는 자신의 황제 자리를 계승할 사람으로 그의 손자를 지칭했다. 그러나 손자는 아직 나라를 이끌어나갈 만큼 성장하지 않아 태조는 주씨 황실의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숙청은 더욱 가혹하게 행해졌다. 홍무제의 숙청이 하도 잔인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는 그의 손자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간언을 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날 손자를 조용히 불러 가시 많은 나무를 맨손으로 잡아보라고 했다. 손자가 가시 돋힌 나무를 집어드는 것을 주저하자 태조는 손자를 향해 말했다. "가시가 있으면 손을 찌른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가시들을 모두 없애 너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숙청을 위해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던 태조 주원장의 내심 이었다.
홍무제는 1398년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황제의 자리는 그의 손자에게 계승되었다. 바로 명의 제2대 황제인 건문제다. 그러나 건문제 통치시기 황제의 자리를 위협한 것은 태조 주원장이 염려했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황실 내부에 있었다. 태조에게는 26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 혈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 가장 야심만만한 사람이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며 나중에 영락제가 되는 주체였다. 태조의 큰아들인 주표가 일찍 죽은 후 제위가 주표의 아들에게 돌아갔으니, 주체는 2대 황제 건문제의 삼촌이 되는 셈이다. 주체는 원래가 야심만만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를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당나라 건국자 이연의 아들로서 나중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당태종 이세민,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었다가 왕자의 난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은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성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태조 주원장도 넷째 아들인 주체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며, 큰아들이 죽자 주체에게 황제의 자리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태조 홍무제는 못내 아쉬워 통곡했다고 한다.
22세에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건문제는 지방의 번황으로 임명된 황족들을 눌러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번'이라는 것은 황제가 관장하지 않고 황족이나 혹은 그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일종의 지방 자치지역이다. 번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중앙의 황제의 세력이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분열된 세력을 통합한 후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할 때 번의 왕은 보통 자기들의 세력 근거지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저항을 하게 된다. 한나라 무제 때의 '오초 7국의 난'이나 청나라 때의 '3번의 난'이 그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문제가 첫 번째로 제거하려 했던 것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 그러니까 건문제의 막내 삼촌으로 주왕에 본해진 주수였다. 주왕 주수는 체포되어 운남지방에 유배되었다. 이어서 제왕 주부, 대왕 주계가 번왕의 직위에서 쫓겨나 평민이 되었고 상왕 주백은 자살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넷째 황자 연왕 주체는 건문제가 결국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건문제는 주체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쉽사리 제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문제가 연왕 주체의 체포를 명했을 때 주체는 순순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남경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고 있는 간악한 신하들을 처단하여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군대와 연왕 주체의 군대는 맞붙어 싸우게 되었고 그 싸움은 4년 여를 끌었다. 군대의 숫자나 여러 가지 면에서 황제의 군대가 유리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았다. 이미 태조 홍무제가 황실의 안전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거의 숙청, 처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초반에 승리하던 황제의 군대는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 등으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연왕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무장들을 제거하여 황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홍무제는 결국 자기 꼬임에 넘어간 꼴이 된 것이다. 마침내 주체의 군대는 남경의 성곽에 도달했다. 전세가 연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수도 남경의 수비대 내부의 불안은 커졌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연왕 주체와 내통하여 빠져나감에 따라 남경 주비는 더욱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경의 성문이 연왕과 내통한 내부인에 의해 열리고 군인들이 미구 성안으로 쏟아져들어오고 있을 때 황제 곁에 남아서 황제를 끝까지 지키려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연왕의 군대가 남경을 함락하여 군대들이 밀려들자 건문제는 궁성에 불을 질렀다. 주체는 건문제를 찾기 위해 궁성의 샅샅이 뒤졌으나 불탄 황후의 시체밖에 찾을 수 없었다. 건문제는 중의 복장으로 변하고 성을 탈출, 잠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경을 함락하여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홍무제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바로 성조 영락제이다. 그는 여러 차례 몽고지역에 원정하여 그들의 침략의 근거지를 도려내려 했으며, 안남을 거쳐 수마트라 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안으로는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썼으며,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서대전), (오경대전), (영략대전) 등이 그의 통치시기에 정리되었다. 특히 (영락대전)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2천여 명의 학자들이 약 3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시킨 것이다. 이 책은 천문, 지리, 역사, 사상,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의학이나 연극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중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총정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권책 수만 하더라도 22937권 10109책 4뎍자 가량에 이른다. 그러나 이 책은 1900년 서양세력이 청나라에 침입했을 때 상당 부분 불타거나 외국에 유출되어버리고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00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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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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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을 튼튼한 기둥 하나 - 一木難支(일목난지) 一(한 일) 木(나무 목) 難(어려울 난) 支(지탱할 지)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편(任誕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위(魏)나라 명제(明帝)의 사위인 임개(任愷)는 가충(賈充)이라는 사람과의 불화로 그만 면직당하고 말았다. 그는 권세를 잃게 되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임개의 친구인 화교(和嶠)에게 말하길 당신은 어찌 친구인 임개의 방탕함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좌시만 하는거요? 라고 물었다.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던 화교는 임개의 방탕은 마치 북하문(北夏門)이 무너질 때와 같아서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쳐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非一木所能支). 라고 대답하였다.
一木難支 는 一柱難支(일주난지) 라고도 하는데, 이는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 을 비유한 것이다. 개인의 경우 방탕함으로 얻게되는 최후의 결과는 망신(亡身)이고, 나라의 경우에는 망국(亡國)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방탕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 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충실한 기둥을 하나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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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티를 입은 문화 - 문화의 171가지의 표정
1. 약탈혼이 정당하던 시절
신부를 약탈하던 풍습
여자와 남자가 사랑으로 결합하는 결혼. 하지만 결혼에 사랑이나 합의가 필요 없었던 시대도 있었다. 2세기의 북유럽, 게르만인의 고트족 남자는 자기 부락에서 결혼할 여자가 없으면 근처 마을로 가서 신부를 약탈해 왔다. 예비 신랑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를 찾아내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약탈했던 것이다. 신랑 들러리의 관습은 이 무장한 2인조에 의한 약탈혼의 흔적이다. 친구를 도와서 신부를 약탈하는 중요한 임무는 들러리가 아니면 안 될 일이었다. 이 약탈혼은 문자 그대로 신부를 약탈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를 안고 신방에 들어가는 풍습도 역시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200년경의 신랑 들러리가 휴대하고 있던 것은 결혼 반지만이 아니었다. 신부의 가족이 그녀를 되찾으려고 언제 들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무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들러리는 신랑 옆에 서서 결혼식이 올려지는 동안 내내 무장한 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신랑 들러리는 신방에까지 가서 감시를 서는 일도 있었다. 신부의 가족은 신부를 되찾아 가려고 결혼식 장소에 들이닥쳤다. 그 증거로 고대의 많은 민족(훈족, 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의 교회 제단 밑에는 곤봉이나 칼, 창 따위의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신부가 신랑의 왼쪽에 서야 하는 전통도 단순한 관례가 아니다. 로마인이 말하는 '북유럽의 야만인'은 신부 가족의 갑작스런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왼손으로는 약탈해 온 신부를 안아야 했고 오른손은 무기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혼 반지도 일설에 의하면 약탈된 신부가 남자의 집에 매어져 있던 때의 족쇄의 자취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반지 교환 관습은 남녀평등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설은 실제로 결혼식에 반지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에 주목하고 있다. 처음으로 결혼 반지가 나타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의 이집트 제3왕조이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리는 영원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결혼의 징표로서 반지를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부유한 이집트인이라든가 후기 로마인이 귀중하게 생각한 것은 금반지였다. 폼페이의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반지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에는 훨씬 뒤 유럽이나 1960~70년대 히피 시대의 미국에서 유행한 독특한 디자인의 반지도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우정의 반지'라고 불리는 황금 결혼 반지로 두 손이 악수를 하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로마 청년은 결혼으로 인해 무일푼이 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2세기에 쓴 책에는, '대부분의 여성은 자기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결혼 반지 이외에 금 따위는 본 적도 없다.'는 글이 있다. 평범함 주부의 경우, 밖에서는 자랑스럽게 금으로 된 결혼 반지를 끼고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벗고 대신 무쇠 반지를 꼈다는 것이다. 고대의 반지 디자인에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많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반지에는 작은 열쇠가 붙어 있는데, 남편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등 로맨틱한 이유에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따른 혼인 계약의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내는 결혼과 함께 남편 재산의 절반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밀이건 옷감이건 남편이 갖고 있는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갖는 이러한 권리는 한 번 상실되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무려 2000년이 걸렸다. 결혼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는 서양의 관습은 어디서 유래하는 걸까. 고대 헤브루인은 결혼 반지를 검지에 끼었고, 인도인은 엄지에 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왼손 약지에 끼는 관습은 그리스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유래는 그리스인의 잘못된 인체해부학의 지식에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때 그리스 의사는 '사랑의 혈관'이라는 혈관이 약지에서부터 곧바로 심장까지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상징하는 반지를 약지에 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인의 인체해부도를 도용한 로마인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약지에 결혼 반지를 끼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 끼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결혼 반지를 끼는 손가락은 '제일 작은 손가락의 옆 손가락'이라고까지 씌어져 있다. 또한 의사들도 약지로 약을 조제하였는데, 약지의 혈관이 심장에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조합한 약에 어떤 독성이 있게 도면 환자에게 주기 전에 의사의 심장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결혼반지는 왼손의 약지에 끼었지만 사랑의 혈관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랑은 신부의 집게손가락에 반지를 살짝 끼우고, '인자하신 신과'라고 말한 다음 이번에는 가운뎃손가락에 끼우고,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기도를 한 다음 약지에 끼웠다. 이것을 삼위일체 방식이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교회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결혼 공고는 프랑크왕, 카를 대제의 칙령으로 정착되었다. 카를 대제는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에 황제의 왕관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되고 신성로마제국의 기초를 쌓았다.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게 된 카를 대제에게는 결혼 공고를 철저하게 해야 할 의학상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 빈부를 불문하고 혼외정사가 다반사였던 이 나라에서는 부모가 분명하지 않은 아이들이 상당수였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복 형제 자매와 결혼하게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근친 결혼과 그에 따른 기형아 출산이 점점 많아지자 위태롭게 생각한 대제는 드디어 결혼 공고를 의무화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에 따르면 결혼하고자 하는 남녀는 적어도 7일 전에 그 사실을 공고해 자기들이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해야만 했다. 즉 두 사람이 실은 형제라든가 이복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이 기간 중에 신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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