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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800호
2010.10.18 (음 9.11)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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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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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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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불교청소년문학상 작품 공모
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회(이사장:박용열), 산하 한국불교청소년문학상운영위원회는 불교청소년 문학활동의 활성화와 문학을 통한 청소년 포교의 일환으로 불교청소년문학상을 제정하고, 아래와 같이 9개 문학장르를 선정하여 '제16회 불교청소년문학상 작품'을 공모한다. 제16회 청소년문학상 현상공모는 11월 20일까지 마감한다., 역량있는 문학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아 래
1.모집기간:불기 2554년 10월 1일-2554년 11월 20일 오후 5시까지 2.응모자격:(1)전국 중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과 근로 청소년, (2)주한 외국인 학생은 20세미만인 자로 한국어 사용이 가능한 자, (3)사이버 중등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평생교육과정에 재학중인 학생은 80세 미만인 자. 3.모집구분:1. 시. 시조 ,민조시 -5편이내 2. 희곡 (학교극, 청소년극, 인형극)-인형극은 15분 공연물,나머지는 50분 공연물-1편 3. 아동문학 (동요동시, 단편동화) -동요동시부문- 5편이상, -단편동화 부문 -2편 4. 청소년소설-2편 이상 4.원고매수 :(1)희곡부문 200자 원고지 50매-80매 내외의 창작품. (2)아동문학작품중 단편동화는 15매 내외의 창작품으로 2편이상 (3)청소년소설 은 70매 내외의 창작품 2편. (4)원고 겉봉투에는 응모부문과 연락처를 적어야 함 (5)응모원고는 한글 아래하 2007 ,12포인트로 타자하여 당회 이메일로 1차 전송하고, 2부를 출력하여 위원회로 보내야 함. 5.시상내역:각 부문별 당선작에게는 상패와 원고료를 지급함 6.원고접수처:138-879 서울 송파구 풍납2동 402 쌍용아파트 103동 1306호 불교청소년문학상운영위원회 위원장 7.심사발표:본 카페 공지란과 불교계 언론 매체. 심사위원은 본회 본부임원과 외부인사로 구성함. 2010년 12월 5일경 8.기 타 (1)모든 원고는 발표되지 않은 창작 작품이어야 함. (2)응모 원고의 반환은 책임지지 않음. (3)당선작의 저작권은 10년간 당회가 소유함. (4)작품의 표지에는 소속 학교, 학년, 집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를 함께 적음 (5)수상자로 결정된 자는 당회 청소년부 회원으로 반드시 입회를 해야하며, 12.13.14회 입상자는 청소년부 회원으로 입회한 사람만 재응모 할 수 있음 (6)부문별 당선작이 없을 경우 가작을 선정할 수 있다 불기2554년(2010) . 10 . 1 한국불교청소년문화진흥회 이사장 박용열 산하단체, 한국불교청소년문학상운영위원회 위원장 사무총장 곽 영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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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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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책으로 꽉 채우고, 화원은 꽃으로 메꾸어라. - 앤드류 랑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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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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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동갑
자치는 한 자쯤 되는 물건이다. 여기서 ‘차이가 얼마 안 되는 것’이라는 의미도 생겨났다. 동갑은 나이가 같다는 말이다. 자치동갑은 한 살 차이가 나는 동갑이라는 뜻이다. 위아래로 한 살은 나이 차이를 별로 못 느낀다. 그래서 동갑으로 대했다. 같은 말로 어깨동갑이 있다. 나이 차이가 적어 어깨 높이가 비슷한 동갑이라는 뜻이 담겼다.
안갚음
까마귀는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한다. 이러한 까마귀의 행동이 ‘안갚음’이다. 비슷한 뜻을 가진 말로 반포지효(反哺之孝)가 있다. ‘안’은 마음을 뜻한다. ‘안갚음’에는 마음을 다해 키워준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 있다. 자식이 커서 부모를 잘 받들어 모시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보복을 뜻하는 ‘앙갚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추격, 추적
미국의 이스라엘 영사관에 총알이 날아들었다. 이웃집 창문을 관통한 총탄은 그대로 벽에 박혔다. 테러범의 공격으로 추정한 미국연방수사국은 탄알이 노린 게 무엇인지 '추적'에 들어갔다. 총알이 박힌 곳에서 이웃집 창문을 향해 레이저 광선을 쐈더니 건물 몇 개를 지나 어느 공터에 멈췄다. 총알이 영사관에 날아든 시각, 그 공터에선 건물 경비원이 가방을 훔쳐 달아나는 범인을 '추격'하고 있었다. 결국 총알은 이 경비원이 쏜 것으로 밝혀졌다.
법의학서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에 나오는 실화다. 이 이야기에서 발사된 총알의 궤적을 더듬는 데는 '추적'을,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경비원이 쫓아가며 총으로 위협한 일에는 '추격'이란 용어를 썼다. 일상에서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처럼 그 쓰임새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추적(追跡)'은 도망하는 사람의 뒤를 밟아 쫓거나 사물의 자취를 더듬는 것으로 "경찰은 범행 현장에 남겨진 지문을 토대로 범인 추적에 나섰다" "검찰은 관련자들의 계좌를 추적했다"와 같이 쓰인다. '추격(追擊)'은 "은행원이 흉기를 든 강도를 추격해 격투 끝에 잡았다"처럼 뒤쫓아 가며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둘 다 쫓는다는 뜻이지만 '추적'이 보이지 않는 대상의 발자취 등을 쫓는 것이라면 '추격'은 대상이 보이는 상태에서 공격을 가하며 쫓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못미처, 못미쳐, 못 미처, 못 미쳐
다음 문장에서 틀린 부분을 고쳐 보시오.
① "내소사 입구 천왕문 못미쳐까지 600m가량의 전나무 숲길에 쌓인 낙엽과 가을 풍경이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② "이싸빅 선수를 제친 모따 선수가 페널티 지역 못 미쳐에서 슈팅했으나 골대를 빗나가고 말았다."
'못미쳐' '못 미쳐'는 어떻게 쓰는 것이 맞는가. 문맥을 따져 봐서 알맞은 표현을 골라 맞춤법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예문①의 '못미쳐'와 ②의 '못 미쳐'는 둘 다 틀렸다.
①과 ②에서 '못미쳐' '못 미쳐'는 '일정한 곳까지 채 이르지 못한 거리나 지점'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므로 모두 명사인 '못미처'로 바로잡아야 한다. 또 '못미처'는 한 단어이므로 '못 미처'로 띄어 써선 안 된다.
'못 미쳐'는 어떤 상황에 쓰이는가. "명수는 ○○대학 입시에서 합격선에 못 미쳐 떨어졌다" "내 성적은 선생님께서 지목한 아이들의 그것에 훨씬 못 미쳤다"에서 보듯이 동사 '미치다'(공간적 거리나 수준 따위가 일정한 선에 닿다)를 부정할 경우에 사용된다. 즉, '못 미쳐'는 '미치지 못해'의 뜻이다. '못미처'는 명사로서 한 단어이므로 꼭 붙여 써야 하고, '못미쳐'로 적으면 틀린다. '못 미쳐'는 동사 '미치다'의 부정이라는 점과 띄어 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본때없다, 본데없다, 본떼없다, 본대없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임 여성 1인당 출산율은 세계 최저인 1.08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6명보다 현저히 낮다. 자녀 수가 적은 까닭에 아이들을 귀하게 키우다 보니 공공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무시하는 아이가 점점 늘고 있다. 정책으로 출산을 제한하는 중국에서도 '소황제'라 불릴 만큼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외동아이들이 사회 문제가 된 지 오래됐다. 이처럼 버릇없이 행동하는 것을 나타낼 때 '본떼없다, 본대없다' 란 말을 많이 쓰지만 이때는 '본데없다'가 바른 표현이다.
'본데없다'란 '보고 배운 것이 없거나 행동이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데가 있다'는 뜻으로, "빨리 한술 뜨고 그 자리를 면하는 게 수다 싶어 본데없이 보이건 말건 어른이 수저도 드시기 전에 밥을 먹기 시작했다"처럼 쓸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본때(가) 있다, 본때를 보이다'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본데없다'와는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이 표현은 '본보기로 할 만한 데가 있다'라는 의미로, "그 사람은 본때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우리도 남들처럼 본때 있게 살아보자"처럼 쓰인다. '본때를 보이다'는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아니하거나 교훈이 되도록 따끔한 맛을 보이다'라는 뜻으로, "어린 녀석이 버릇없이 굴어서 본때를 보여 주었다"처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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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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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빨래공식 - 이기헌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분 헹굼 세 번 탈수 삼분 후에 다시 헹굼 한 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든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법칙엔 밟아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거나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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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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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섬 - 이영지 - 새벽기도. 1536 -
장미의 섬입니다 웃음의 보조개를 옴폭폭 뿌려놓아 바다의 물결들을 무더기 구름다발로 유혹하며 웃어서
장미의 섬입니다 등이며 허리까지 한바탕 씻어내어 하체를 잠근후에 프르른 이야기만을 조건으로 내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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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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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되던 날의 교실 - 신현득
그 소식을 듣고부터 필통 안 컴퍼스가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연필도 제가 필통을 열고 나오는 것이었다.
교실은 책상들까지 덜컥거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나라 지도를 다 그리고 신의주 가는 찻길을 그려 놓고, 백두산까지 달리는 바람이 구름 밀고 가는 걸 내다보았다.
뒷벽 그림 속의 꼬마들도 그 바람에 모두 튀어나와 떠들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도무지 그림 속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 통일이 됐다. 나누어져 있기 싫어 통일이 됐다. 교실 귀퉁이서 지구본이 돌면서 떠들어 댄다.
--- 이제부터 더 열심히 조약돌은 조약돌 노릇을 하고 소나무는 열심히 산에 서서 푸르고 그럼 컴퍼스도 그만 필통 안 네 자리에 들어가거라.
선생님은 조용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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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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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소피의 선택>과 브루클린 다리 -시대 고증을 머리 속에 넣고 영화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일론이 원작을 영화화한 <소피의 선택>은 매우 뛰어나고 참으로 볼 만한 영화였다. 나는 <입맞춤>과 <콜 걸>이래의 앨런 J.파큘러의 가장 괜찮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를 지나치게 기교적으로 만들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한 소재를 가지고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관잭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유태인 청년 네이선 랜드 역이 케빈 크라인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탁월하다. 이러한 영화에는 좀처럼 관객이 들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관심이 있는 분은 꼭 한 번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중에 네이선이 주인공인 작가 지망생 청년의 새 출발을 축하하면서, 브루클린 다리 위에서 샴페인 병을 터뜨리는 대목이 있다. 이 영화의 무대는19940년대 후반의 브루클린이기 때문에, 브루클린 다리는 이 장면 이외에서도 몇 번씩이나 나온다. 과연 한 세대 전의 뉴욕의 분위기를 풍기는 다리다. 네이선의 대사에도, "옛날에 하트 크레인이 이 다리를 건넜어"라는 것이 있는데, 크레인은 그 다리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다리에 바친다>라는 시까지 썼다. 할렘 태생의 작가 아서 밀러는 수천 번이나 이 다리를 건넜고, 그리고 브루클린 다리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서 다리로부터의 조망 을 썼다. 브루클린 다리가 놓여진 것이 1883년이니까 금년으로 꼭 100년째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해서 아서 밀러가 라이프 지에 브루클린 다리에 얽힌 추억담을 쓰고 있다. 1950년대 초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성공한 아서 밀러는, 그 돈으로 녹색의 스튜드베이커를 샀었는데, 어느 날 밤, 브루클린 다리위에서 교통 사고를 내서 그 차를 박살내고 말았다. 앞쪽에 정차해 있던 차를 피하려다가 미끄러져서 한바퀴 돌아 뒤에 따라오던 차와 정면으로 충돌을 해버린 것이다. 밀러의 얘기에 의하면, 당시의 브루클린 다리의 차도는 폭이 차 한 대하고 반 정도가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 더구나 목재 블록을 깔아 놓아서 안개 같은 것이 끼면 노면이 마치 버터처럼 미끄러웠다고 한다. 그러한 시대 고증을 머리 속에 넣고 영화를 보면,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다.
에게 해 2 대 1 -"그들은 호텔과 카페의 손님들 앞에서 보란 듯이 드러내 놓고 섹스를 했습니다"
서른 살이 넘으면 여름이 섹스의 계절이라는 말 따위와는 별로 관계 없이 혼자 무료하게 맥주를 계속 마셔댈 뿐이지만, 아쨌든 여름은 성적으로 고양되는 계절인 모양이다. 특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든는 여름의 에게 해 같은 곳은 그야말로 성의 도가니 같아서, 아베크 족이 대낮부터 길 한가운데에서 위장까지 닿으라는 듯이 진한 키스를 펼쳐 보인다. 아무래도 좋지만, 그러한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로 '육식을 하는 짐승'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개트워트 공항에서 단체로 밀려나오는 영국 펑크족 소년 소녀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벌써 성기가 백팩킹하고 로큰롤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리스는 관광국이라서 여행자들의 볼썽사나운 대부분의 품행은 눈감아주리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물론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넘어 서면 역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게 된다. 7월 23일자의 아테네 뉴스 지에 의하면, 시로스라는 에게 해의 섬에서 두 명의 영국인 여행자와 그리스계 프랑스 여자 한 명이 여러 사람 앞에서 성교한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두 명의 남자는 모두 스물두 살로, 벨파스트에서 온 기계공과 실업자였다. 여자는 스물여섯 살로 파리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부둣가의 혼잡한 오픈 카페 옆에서 성교를 끈낸 후에, 격앙된 섬 주민에 의해 붙잡혔다고 한다. "그들은 호텔과 카페의 손님들 앞에서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섹스를 했습니다"하고 호텔 주인인 이야니스 쿠즈피스 씨가 증언했다. 세 사람은 "산토리니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술을 너무 마셔서 그만 "하고 변명했지만, 법정은 상고권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형을 선고했다. 그리스라고 하는 나라는 종교가 상당히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라라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벌이 다소 엄하다. 또 그리스의 교도소는 소문에 의하면,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고, 어쨌든 형편없는 곳인 모양이다. 그 진위의 정도는 확실치 않지만, 현지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식사 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사입이 없는 죄수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될 수 있는 한 교도소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얘기다. 그게 정말이라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 그리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섹스를 하고 싶으면 적당한 장소에 가서 하는 것이 일단은 이 세상의 상식이다.
그리스의 여름 밤과 야외 영화관 -야외에서 연극을 보고 나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그리스에서 영화를 구경하는 것은 간단할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어렵다. 왜 어려운가 하면, 그리스의 영화관은 대개 여름이면 밤 아홉 시쯤 되어야 개장을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늦은 시간에만 상영을 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영화관에 지붕이 없기 때문이다. 지붕이 없게 때문에 주위가 완전히 깜깜해지지 않고서는 여화를 상영할 수 없다. 굉장하지 않은가? 그 느낌은, 옛날에흔히 학교의 교정 같은 데서 상영하던 야외 영화를 떠올리면 거의 비슷하다. 테니스 연습을 하는 판을 새하얗게 칠한 것 같은 스크린에, 파이프 의자를 흙 바닥에 늘어놓았을 뿐이다. 엉터리라고 하면 엉터리지만, 요금도 200엔 정도니까 턱없이 싼 거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리스의 여름 밤은 굉장히 시원하고 상쾌하며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아서, 지붕을 씌우거나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고, 그래서 자연히 지붕 없이 상영을 하기로 정해진 것이다. 그리스라는 나라는 아무튼 지붕 없는 시설이 많은 곳이어서, 극장도 콘서트 장도 레스토랑도 모두 지붕이 없다. 덕분에 영화관 주변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은 매일 밤 공짜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일본 같으면 소음 공해라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겠지만, 그리스 인은 그러한 것에는 대단히 무신경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아기 테오도리라고 하는 해수욕장의 영화관에서, 앨런 J. 파큘러 감독의 <컴즈 어 호스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2부작이어서 전편과 후편 사이에 예고편이 상영되었다. 코린토스의 영화관에서는 놀랍게도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버스의 창으로 흘끗 포스터를 보기만 했기 때문에 잘은 모르는데, 도대체 그리스 어로 제목이 어떻게 붙여져 있는지가 궁금했다. 리카비토스 산꼭대기의 원형 극장에는 사가와 유키오가 연출하고, 히라 미키지로가 주연한 연극 <메디아>를 보았다. 이 연극은 참으로 재미있었고, 사실 아테네에서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럴 것을 보면, 역시 그리스의 연극은 야외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정말로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으니 말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헤로데스 아티코스 음악당은 아테네 국립 교향악단의 파업 소동으로 들어가 볼 수 없어서 유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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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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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2. 예언자 - 칼릴 지브란
배가 오다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받은 자, 또한 시대의 새벽이었던 그를 올펄레스 시에서 열 두해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태워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마침내 열두 해째 되던 해, 수확의 달 이에룰 초이렛날에 그는 성벽 밖의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성벽 밖의 한 언덕에 올라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그의 배가 안개에 싸여 오고 있는 것을. 그의 마음의 문이 열리고 기쁨은 바다 저 멀리로 날아갔다. 그는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고요한 영혼으로.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자, 그는 갑자기 슬퍼졌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어찌 슬픔도 없이 평화로이 떠날 수 있는가! 아니, 영혼의 상처 하나 없이, 결코 나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으리라. 내가 여기 성벽 안에서 보낸 고통의 낮들은 너무 길었고, 고독의 밤들 또한 너무도 길었으니, 어찌 아무런 후회 없이 이 고통, 이 고독과 이별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거리에 뿌린 수많은 영혼의 조각들, 벌거벗은 채 이 언덕들 사이로 헤매다니는 수많은 내 갈망의 아이들, 내 진정 근심과 고통 없이 이들을 떠날 수는 없다. 내가 오늘 벗어던지는 이것은 옷이 아니라, 바로 내 두 손으로 찢어낸 살. 또한 뒤에 남기고 가는 이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니라, 갈증과 기아로 더욱 부드러워진 하나의 심장인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부르는 바다가 날 부르니, 이제 배에 올라야 한다. 왜냐하면 머문다는 것은, 비록 밤새도록 시간이 불타오를 지라도, 굳고 결정되어 하나의 고정된 틀에 묶여버리는 것이므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갈 수 있다면...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목소리란 자신을 날려 보내는 혀와 입술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것, 오로지 홀로 창공에 이르러야 한다. 한 마리 독수리도 홀로 태양 저편으로 날아갈 수 있는 것.
언덕 기슭에 이르자 그는 다시 한번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배가 고향사람들인 선원들을 뱃머리에 싣고 항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영혼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오랜 어머니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얼마나 자주 나의 꿈 속을 항해하였는지. 그런데 이제 내가 깨어나려 하니 찾아오는구나. 그러나 이것은 더 깊은 꿈. 물론 떠날 준비는 되어 있다. 나의 갈망은 돛을 활짝 펴고 바람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 고요한 대기 속에서 오직 한 번만 더 숨을 쉬면, 오직 한번만 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면, 나는 뱃사람 중의 뱃사람인 그대들 가운데 서게 되리라. 그리고 당신, 광활한 바다, 잠들지 않는 어머니여! 홀로 강과 시냇물에 평화와 자유를 주시는 이여! 오직 한 번만 굽이치면 이 시냇물은 이 숲속의 빈터에서 한번 더 속삭이며 흐를 것을... 그리하면 나는 당신에게로 가리라. 끝없는 바다에 끝없는 물방울로.
그는 걸으면서, 저 멀리에 있는 남녀들이 밭이나 포도밭을 떠나 성문을 향해 서둘러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의 외침은 그의 배가 가까이 오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중얼거렸다.
이별의 날이 곧 만남의 날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나의 저녁은, 사실 나의 새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 밭에 쟁기를 버려둔 이에게, 또는 포도주 짜는 기계의 바퀴를 멈춘 이에게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내 가슴이 주렁주렁 열매를 단 나무가 되어 그 열매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그러면 나의 갈망은 샘과 같이 넘쳐 흘러, 그들의 잔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신의 손길이 퉁기는 하프, 또는 신의 숨결이 내 가슴으로 스치는 피리인가? 나는 침묵의 탐구자, 하지만 침묵 속에서, 어떤 보물을 찾아내어 그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오늘이 바로 나의 수확의 날이라면 어느 들에, 어느 계절에 씨를 뿌렸단 말인가! 실로 지금이 등불을 켜들 시간이라 해도 저기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나의 불꽃이 아닌 것을... 나는 오로지 공허와 암흑으로써 나의 등불을 켜리라. 그러면 밤의 파수꾼이 나의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워 불밝혀 주리라.
그는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에는 미처 못다한 말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보다 깊은 비밀은 그 스스로도 말할 수 없었으므로. 그가 도시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그를 만나려고 그에게 몰려와 일제히 소리쳐 말했다. 도시의 원로들은 앞으로 나와 말하기도 하였다.
우리 곁을 떠나지 마시오. 그대는 항혼 속에서도 한낮의 빛이었고, 그대의 젊음은 우리를 꿈에서 꿈으로 인도하였으니... 그대는 우리에게, 타인도, 손님도 아니오.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자일 뿐이오. 그러니 그대의 모습을 그리는 우리의 두 눈을 괴롭히지 마오.
그러자 사제들도 그에게 말했다.
바닷물결이 우리를 갈라놓게 하지 마소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보낸 나날들을 기억하소서. 그대가 우리들 사이에서 늘 한 정신으로서 거닐었고, 그대의 그림자는 우리 얼굴에 비치는 빛이었음을 기억하소서. 우리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우리의 사랑은 말이 없었을 뿐. 그렇다. 베일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랑은 큰 소리로 외치며 그대 앞에 서리라. 사랑이란,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기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
그러나 다른 이들도 나와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숙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들은 보았다.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는 것을. 그와 사람들은 사원 앞에 있는 광장을 향해 나아가지 시작했다. 그때 신전에서 알미트라라고 불리워지는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예언녀였다. 그는 다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이 도시에 온지 하루밖에 안되었을 때, 제일 먼저 그를 찾아와 믿은 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환영하며 말했다.
신의 예언자이시며, 끝을 찾아 헤매는 분이시여, 당신은 당신의 배를 찾아 먼길을 헤매셨군요. 이제 배가 왔으니 당신은 떠나야 합니다. 추억의 나라와 보다 큰 욕망의 땅을 향한 그대의 갈망은 깊으니, 우리의 사랑으로 당신을 얽어맬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요구로 당신을 만류할 수도 없으리.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당신의 진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전하여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오. 당신은 고통과 고독 속에서도 우리의 날들을 지켜 주셨고, 잠들지 않고 늘 깨어 있어 우리 잠 속의 눈물과 웃음에 귀 기울여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당신이 보았던 모든 것을 말씀해 주소서.
그에 그는 대답했다.
올펄레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영혼 속에서 지금도 떠돌고 있는 것, 그것 외에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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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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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사고의 기준
사고의 기준을 세워 놓아라. 양쪽 다리가 움직이는 콤파스가 원을 그려 내지 못하듯이, 간에 가 붙었다 쓸개에 가 붙었다 하는 사고로는 자신을 지켜 내지 못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고의 기준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배가 파도에 넘어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무게 중심이 명확히 잡혀 있기 때문이고, 콤파스가 원을 그리는 것은 콤파스의 한쪽 침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듯, 사고의 기준이 명확히 서 있어야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고 의지대로의 삶도 펼쳐 나갈 수 있다. 평소에는 느슨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쯤은 양보해 가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좋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 때야 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하지 않을 수 있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래야 불의에 아부하지 않을 수 있고 달콤한 유혹에 말려들어 피해를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중용의 길이 안전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중용의 길만을 걷는 것은 문제가 된다. 확고하게 결정을 내려 주어야 할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 주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결단력 부족을 드러내는 흠이 되고 만다. 더욱이 사고의 기준을 세워 놓지 않은 상태에서 중용만을 고집하는 것은 의지 부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정적인 흠이 되고 만다.
약속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신용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약속 깨지는 소리와 신용 깨지는 소리는 애석하게도 동시에 나니까. 약속을 할 때는 신중히 하고 일단 해 놓은 약속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 만사를 제쳐 두고서라도 약속을 지켜야 신용을 보전할수 있고 책임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관심 있는 일(약속)이라면 더욱더 철저히 지켜야 한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약속을 어겼다 하더라도 상대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어겼다고 속단해 버린다. 약속을 어기면 신용이 꼭 수난을 당한다. 약속과 신용은 배와 노의 관계처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어서 약속을 어기는 순간 신용 없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약속은 또 사람의 신용을 시험한다. 약속을 지키는 태도를 보고서 그 사람의 신용의 정도를 평가하고, 그 사람이 책임 있는 사람인가 무책임한 사람인가도 평가한다. 그러므로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 아예 약속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약속을 해 놓고서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아예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신용을 보전하는 으뜸의 지혜이다. 예상치 못한 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할 중대한 사정이 생겼을 때는 사전에 알려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한 배려 하나가 신용을 지켜 주고 인격을 지켜 준다.
향상
날로 향상하고 있는 자신을 보라. 그것이 얼마나 뿌듯한 보람인가! 사람은 향상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삶에 대한 실망이 가장 크다. 더 향상하고 발전하고 싶으면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 능력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정신력으로는 발전하지 못한다. 현 상태를 벗어나 더 발전하기 위해서 발버둥칠 때 능력은 향상된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퇴보하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도 타인들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 뒤로 밀리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일이 끊임없이 향상하기를 바란다면 현 수준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현 수준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향상도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 수준에 대한 불만은 더 향상하기 위한 충동이 되고 채찍이 된다. 현 수준을 불만스럽게 생각해야 다시 도전할 힘도 생기고 요리조리 머리도 짜내게 된다. 목표로 삼았던 일이 달성되었다고 해서 주저앉지 말아야 한다. 홀인원이 골프를 망치고, 홈런이 야구를 망치고, KO가 권투를 망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고 자만하기 때문이듯, 목표에 도달했다고 해서 만족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자만심이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능력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자만심과 함께 몰락해 버리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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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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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1장 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어느 민족이든 전승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뿌리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소망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해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은 과학적인 해명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의 논리성과 그들의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있으면 된다. 로마인에게 그것은 트로이 함락과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소아시아 서안의 풍요로운 도시 트로이는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아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공방전도 드디어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변에 서있는 거대한 목마를 발견한 트로이 사람들은 그 목마를 그리스군이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남긴 선물로 오해하고, 10년 동안이나 지켜온 트로이 성 안으로 목마를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한 트로이 병사들이 깊이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한 사람씩 땅으로 내려왔다. 화염과 아비규환에 휩싸인 트로이는 그날 밤에 함락되고 말았다. 왕족도 서민도 가차없이 살해되고, 목숨을 건진 자는 노예가 되었다. 이같은 참극 속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이아스만이 일족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인간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데, 아프로디테는 자기 아들이 그리스 병사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이네스아스 일행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불타는 트로이에서 탈출했다. 이들의 편력은 그리스의 여러 섬에서도 카르타고에서도 끝나지 않고, 신들이 이끄는 대로 이탈리아 서해안을 북상하여, 로마 근처의 해안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다. 그 땅의 왕이 아이네이아스에게 반하여 딸을 아내로 주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떠나 떠돌던 유민들은 드디어 정착할 땅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네이아스가 죽은 뒤에는 그와 함께 트로이에서 탈출한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스카니오스는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알바롱가라고 이름지은 새 도시를 건설한다. 이것이 뒷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였다. 이때부터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때까지 오랫동안 많은 건설적인 왕들이 잇따라 등장하지만, 그 사연을 일일이 기술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하겠다. 낯선 이름을 나열하여 독자를 따분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인이 억지로 꾸며낸 대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로마인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국한 것은 로물루스이고, 그 로물루스는 트로이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네이아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리스와 교류를 갖기 시작한 뒤, 로마인은 트로이 함락이 기원전 13세기 무렵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400여 년의 공백을 메울 필요에 쫓겼지만, 그래도 별로 난감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전승과 전설의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것보다 오히려 황당무계한 것이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전설은 그 공백기를 적당히 소화한 다음, 한 왕녀의 등장을 맞이했다. 알바롱가의 왕이 죽자, 동생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카인 왕녀를 처녀인 채 신을 섬기는 무녀로 만들어 버렸다. 왕녀가 아들을 낳으면,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난처한 입장에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을 섬기는 틈에 잠깐 강가에서 잠이 든 왕녀한테 군신 마르스가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르스는 하늘에서 내려와 왕녀와 사랑을 나눈다. 왕녀가 잠에서 깨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니까, 이런 것을 두고 신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왕녀는 그 쌍둥이에게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숙부는 격분했다. 왕녀는 감옥에 갇히고, 쌍둥이는 바구니에 담긴 채 테베레 강에 띄어졌다. 갓난아기가 든 바구니는 테베레 강 어귀까지 떠내려가, 강가의 갈대숲에 걸려 멈추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늑대가 안에서 나는 젖먹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두 아기에게 젖을 물려 굶주림에서 구해준 것은 바로 이 어미 늑대였다.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젖을 먹고 자랐다면 곤란하게 되었겠지만, 늑대 다음에는 양치기가 쌍둥이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가서 길렀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양떼를 자주 볼 수 있지만, 2천 800년 전에는 양떼가 그 지역의 주인공이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성장하여 그 일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과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차츰 세력권을 넓혀간 것이다. 세력권이 넓어지면 새로운 정보도 들어오게 마련, 이리하여 형제는 자신들의 출생에 얽힌 비밀도 알게 되었다. 형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알바롱가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싸움에 이겨서 왕을 죽였다. 어머니는 이미 옥중에서 죽은 뒤였다. 그러나 형제는 알바롱가에 머물지 않았다. 산지에 있는 알바롱가는 비좁고,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발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두 사람이 자란 곳은 테베레 강 하류였다. 곧 로마라고 불리게 된 그 땅에 두 사람은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알바롱가의 왕을 처단한 뒤에는, 그때까지의 부하들 외에 부근의 양치기와 농민들까지 이들 형제를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무너뜨린 뒤, 형제 사이가 나빠졌다. 쌍둥이였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고, 이런 난점이 둘 사이가 나빠진 원인이었다. 형제는 분할 통치를 하기로 하고, 로물루스는 팔라티누스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누스 언덕에 각각 세력기반을 두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싸움은 곧 재발한다. 세력권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해 로물루스가 판 도랑을 레무스가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권리에 대한 침해 행위였고, 로마인이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건설자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로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때는 기원전 753년 4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는 북국과 남국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북국의 이점과 남국의 이점을 둘 다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이점은 상호작용으로 증대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한복판에 자리잡은 로마의 지리적 이점은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신기와도 같은 인간의 지혜가 이렇게 유리한 지세와 온난한 기후의 혜택을 받은 이 땅에 로마인의 도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지 800년 뒤인 제정로마 초기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도시계획 전문가의 눈으로 위와 같이 말했다. 듣고 보니, 과연 로마의 입지조건은 매우 훌륭하다. 국가 발전의 가능성을 지닌 수도 건설지로서 이탈리아에서는 로마를 따라갈 곳이 없다. 로물루스는 장군의 재능만이 아니라 도시 설계자의 재능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솟아난다. 로마가 도시 건설지로서 이만큼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왜 로물루스 이전에는 이곳에 도시를 세운 사람이 없었을까.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조잡한 무덤과 주거지가 발견되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도시라고 부를 만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땅에 주목한 최초의 사람은 역시 로물루스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물루스가 전설상의 인물이고 실존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면,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살았던 아무개라고 해도 좋다.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 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두 개는 존재했다.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 그렇다. 그런데 이 두 민족은 로마에 대해서는 전혀 욕심을 내지 않았다. 당시 로마는 일곱 언덕을 제외한 저지대는 모두 습지대였지만, 에트루리아인은 간척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하건대, 기원전 8세기 중엽뿐 아니라 그후에도 꽤 오랫동안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에게는 별로 매력이 없는 땅이었던 것 같다. 그리스인은 통상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해양민족이었다. 바다에 면한 항구를 도시의 필수요건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들에게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닿을 수 있는 로마는 도시 건설지로는 부적격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대표적인 식민도시는 시라쿠사이(오늘날의 시라쿠사)와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및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인데, 이 도시들은 모두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에트루리아인도 산업과 통상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지만, 도시 건설에 관해서는 그리스인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높직한 언덕에 도시를 건설한다.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도 배후에 언덕이 없는 땅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른 경고한 도시를 세워 거기에 틀어박히고 평지에는 살려고 하지 않는 그들의 성향은 피렌체만 보아도 분명하다. 피렌체는 에트루이아인에게 기원을 둔 도시지만, 그들이 거주한 곳은 피에솔레 언덕이다. 아르노 강 연변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피렌체 시가지는 로마인이 건설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에트루리아인이 보기에, 로마의 일곱 언덕은 한결같이 너무 작고 너무 낮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나쁜 점은 일곱 언덕이 서로 너무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에트루리아인은 꼭대기가 널찍한 언덕들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재해 있는 중부 이탈리아 지방에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에도 중간 정도의 도시로 건재해 있는 시에나, 볼테라, 페루자, 키우시, 오르비에토는 모두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에 기원을 둔 도시들이다. 그래서 열차역에 내려도 금방 시
- 이하 게시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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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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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타지마할
타지마할의 반대편에 가면 또 다른 타지마할의 기초 토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비가들을 불러 타지마할을 완성했던 황제가 생각했다.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각지에서 신비가들을 초청하는 데에 많은 비용이 들었었다. 이제 훌륭한 모델도 있고 하니...'
타지마할을 완성하는 데는 1천 명의 예술가들이 30년 걸렸던 것이다. 그는 그들을 돌려보낸 다음에 뉴델리의 건축가들에게 명령했다.
"이제 타지마할이 완성되었으니 강 건너편에 똑같은 모양의 궁전을 하나 더 지으라."
첫 번째 타지마할은 그의 아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 건축된 것이었다. 그 명칭도 그녀의 이름인 '뭄타지 마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궁전을 지어 그 자신의 무덤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건축가들은 말했다.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강 건너편에 똑같은 궁전을 짓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의했다. "이 궁전이 흰색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으니, 두 번째의 것은 검은색 대리석으로 하면 훌륭한 조화를 이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 검은색 대리석의 타지마할을 완성하지 못했다. 황제 자신이 아들의 손에 의해 감옥에 갇혔으며, 아들은 궁전 따위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초 토대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 복사품의 허점은 금방 발견될 수 있다. 그들은 보름달과 흰색 대리석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검은 대리석은 보름달 속에서 아무런 아름다움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흰 대리석처럼 그대의 내면에 존재의 빛을 일깨울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이 그것을 완성시켰다 해도 그것은 오리지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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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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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48. 일본원정과 고려의 고뇌 - 2차 일본원정(1274, 1281년)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16살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보다 약 700년 전인 1274년, 마산부두에서는 일본정벌을 떠나는 900척의 군단이 출정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은 1219년, 평양성까지 쫓겨온 가란족을 함께 물리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고려인들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며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는 몽고사신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1225년 교만한 몽고사신 저고여가 공물을 싣고 귀국하던 중,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 몽고는 이를 문책한다는 빌미로 고려 침략을 개시했다. 1231부터 1258년까지 몽고는 6차에 걸침 대전투 외에도 크고 작은 침탈을 끈질기게 계속했고, 그에 맞선 고려인민들의 30년 항쟁은 세계 역사상 매우 드문 것이었다. 몽고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전국의 국토는 남김없이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속에서 황룡사 목탑 등 귀중한 문화재인들 안전할 수가 없었다.
강화의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고려왕실은 몽고에 굴복, 이후 약 100년간 우리는 몽고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몽고의 공주와 결혼하여 몽고왕의 사위가 된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던 고려왕의 이름 앞에는 '충'자가 붙여졌다. 엄청난 공물이 요구되고, '결혼도감'이 설치되어 고려의 여자까지 몽고에게 공물로 부쳐졌다. 왕은 몽고옷을 입고, 머리 주위를 둥글게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땋아 길게 늘어뜨린 변발을 했다. 몽고의 풍습은 상류사회에 먼저 유행, 시간이 흐른 뒤에는 민간에도 깊이 침투, 전통문화는 크게 변질되었다. 족두리도 몽고의 풍숩이었고, 목마장이 설치되었던 제주도에는 몽고어의 잔재가 지금까지도 크게 남아 있다. 몽고의 수탈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죽음이 그를 제약할 때까지 평생 정복전쟁을 계속했던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계획했고, 그 방법은 몽고의 전쟁방식, 피정복민을 방패막이로 삼는 대리전이었다. 몽고는 고려를 기지로 삼아 일본원정을 감행했고, 이 대리전을 통해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졌다. 1274년 1차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는 9백 척의 병선, 무기, 군수품등 모든 물자를 담당해야 했다. 이때 병선 공사의 감독관은 홍다구. 그는 고려인들의 증오의 표적이었으며, 때문에 그는 더욱 악랄하게 고려인들을 채찍질했다. 그의 아버지 홍복원은 구려 국경 수비대장으로 몽고의 침입 때 가장 먼저 항복,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몽고군 2만과 고려군 5천으로 구성된 일본원정군은 마산항을 출발, 대마도와 이키를 소탕하고, 하카타 만의 이마즈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정벌군은 화약으로 만든 대포, 석화시 등 신예무기를 동원, 일본무사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이윽고 밤이 되고, 야습을 걱정했던 원정군은 함선에 올라 아침을 맞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원정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1281년 2차 원정이 감행되었다. 이번에도 고려는 9백 척의 병선제조를 강요받았다. 몽고군 10만과 고려군 4만은 다시 하카타 만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다시 몰아닥친 태풍으로 정벌군은 일본땡에 상륙도 못한 채 퇴각했다. 2차에 걸친 원정으로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갔고, 일본으로부터는 침략자의 난인이 찍혔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폭풍우를 '신풍' 즉, 가미가제로 부르면서 스스로를 '신의 보호'를 받는 국민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일본인들을 구해준 것은 베트남, 자바 등지에서 벌어진 끈질긴 대몽항쟁이었다. 3차 일본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일본으로 향할 병력을 이쪽으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과 북에 각기 점성국과 대월국이 있었다. 1283년 원군은 해로로 점성국을 함락시켰으나, 그 선단은 폭풍으로 괴멸되었다. 다시 증원된 선단도 역시 폭풍으로 괴멸, 원군은 대월에 대해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84년 말부터 4년간 계속해서 대군을 증파, 역시 순식간에 수도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남아의 무더위와 저습지에서는 몽고의 날랜 기병도 힘을 잃었고, 베트남 인은 고향의 익숙한 산천지리를 적절히 이용, 끈질긴 저항을 펼친 끝에 마침내 원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저항군을 지휘했던 이가 왕족 진흥도, 그는 오늘날 까지 민족적 영웅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계속된 원정에 반대하는 소요, 카이두 계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이어 1292년에는 자바가 입공을 거절하고 나섰다. 자바에 사륙한 원군은 역시 쉽게 왕도를 점령했으나, 민간의 끈질긴 항쟁 속에 아무 전과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패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쿠빌라이는 1294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나라와 일본, 중국은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다. 그 문화의 원류는 중국에서 시작한 것이 많고, 우리 나라나 일본은 중국의 문화를 각기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중국의 실력을 항상 피부로 느끼며 생활해왔던 것이 비해,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좀더 여유있게 중국의 문화를 조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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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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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만들어낸 호랑이 - 三人成虎(삼인성호)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에는 위나라 혜왕(惠王)과 그의 대신 방총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방총은 태자를 수행하고 조(趙)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신을 중상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위 혜왕에게 몇 마디 아뢰게 된다. 만약 어떤이가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위 혜왕은 그걸 누가 믿겠는가? 라고 하였다. 방총이 다시 다른 사람이 또 와서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왕은 그렇다면 반신반의하게 될 것이네. 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방총이 세 사람째 와서 똑같은 말을 한다면 왕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라고 하자 왕은 곧 과인은 그것을 믿겠네. 라고 하였다. 이에 방총은 시장에 호랑이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三人言而成虎). 라고 말하면서, 그는 자신을 중상모략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않기를 청하였다.
三人成虎 란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진실처럼 들리게 되어버린다 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의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말들이 혹시 진짜 호랑이를 만들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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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말] 시호(市虎). [동의어]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유사어] 증삼살인(曾參殺人), 십작목무부전(十斫木無不顚). [출전]《韓非子》〈內儲設〉,《戰國策》〈魏策 惠王〉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
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龐蔥)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 방총 :《韓非子》에는 방공(龐恭)이라고 되어 있고《戰國策》에는 방총(龐蔥)이라고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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