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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99호
2010.10.16 (음 9.9)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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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 한자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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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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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한센사랑 자원봉사활동 수기 공모
한센인에 대한 자원봉사 참여를 확산하고 한센인에 대한 편견 해소 및 사회적 관심 고취를 위해, "제 1회 한센사랑 자원봉사활동 수기"를 공모하오니, 자원봉사자 여러분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 공모내용 : 자신이 체험했던 한센인 대상 자원봉사활동 사례(자원봉사자 기획, 관리 사례도 가능)
-응모방법 o 내용 : A4용지 2 ~ 5매 정도 분량(자원봉사활동 사진 및 본인 증명 사진 첨부) o 접수 : 내방, 우편, 이메일 접수 / *접수시 응모신청서 작성 * 주소 : 158-808 서울시 양천구 목2동 515-12, 5층 * 이메일 : ehanvit@ehanvit.org 또는 kjmkorea@naver.com ( 응모 신청서는 www.ehanvit.org 공고에서 다운로드)
-입상자 선정 및 시상 o 입상자 발표 : 2010.10월 중(홈페이지 www.ehanvit.org 및 개별통지) o 입상자 시상 : 2010.11월 '2010세계한센포럼' 또는 12월 '한센인 후원의 밤' 예정 o 시상내역 - 일반인, 대학(원)생, 청소년 부문 각 최우수상 1편, 우수상 1편, 장려상 2편
※최우수상(보건복지부장관상), 우수상(질병관리본부장상), 장려상(한빛복지협회장상)의 상장이 수여되며, 입상자 모두에게 수기집 등 소정의 기념품과 '2010 세계한센포럼' 또는 12월 '한센인 후원의 밤' 행사에 공식 초청. ※ 공모된 작품의 심사기준, 심사방법 등은 우리협회가 정하는 별도 기준에 의하며, 사정상 일정 등 공모내역에 변동이 있을 수 있음. ※ 입선작에 대한 일체의 저작권은 한빛복지협회에서 소유하며, 제출된 작품은 반환 안됨. ※ 입선작 전부와 응모자 중 선별하여 '제1회 한센사랑 자원봉사 활동 수기집' 발간 예정
※문의 : 한빛복지협회 (전화 02-2652-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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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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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모든 과거의 마음이 잠잔다. 오늘의 참다운 대학은 책을 모집함에 있다. -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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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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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타령
말에도 기성품이 있다. 어떤 말이 기성품이 되어 널리 쓰인다면, 대상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거나 부려 쓰기에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처음 그 말을 썼을 때는 그야말로 멋진 맞춤형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여러 사람이 가져다가 기성품으로 두루 쓰게 된 것이다. 문학 작품의 한 구절을 대중이 기성품으로 쓰는 예는 허다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잣대를 들이대는 교육청과 여기에 예산 타령만 하는 일선 학교의 의지 부족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학교의 급식 문제를 다룬 신문 기사의 한 구절이다.
누가 처음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산 타령만 한다”는 말은 매우 편리한 기성품 말이다. 그러나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래서 어떤 조직이든지 예산 확보에 목을 맨다. 예산이 없으면 일을 할 수 없고, 일을 하지 못하면 조직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위의 기사에서 예산 타령만 하는 일선 학교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산의 칼자루는 상급기관이 쥐고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으니 학생 급식에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예산이 없어 못한다는 걸 탓할 수는 없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편리한 기성품 말로 “예산 타령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학교에서는 예산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왜 예산이 없는가? 상급기관의 예산 책정은 적절했는가? 학교의 예산 확보 노력은 충분했는가? 이런 문제들은 덮어둔 채 편리한 말로 “예산 타령”으로만 치부해 버리면 학교로서는 매우 억울할 것이다.
우재욱/시인
딴전
‘딴전 피우다.’ ‘딴전 부리다.’ ‘딴전 벌이다.’ 어떤 일을 하다 그 일과 관계없는 행동을 할 때 이렇게 말한다. ‘딴’은 ‘딴마음’ ‘딴살림’ ‘딴판’의 ‘딴’이다. ‘전’은 물건을 벌여 놓고 파는 가게(廛)를 뜻한다. 즉 딴전은 ‘다른 가게’라는 의미다. 주된 가게 외에 별도로 마련한 가게여서 덜 중요시하게 된다. 여기서 ‘관계없는 행동’이라는 뜻이 생겨났다.
옹글다
물건이 조각나거나 손상되지 않고 본디대로 있다는 뜻이다. ‘전쟁 뒤에도 그 건물은 옹근 채로 남았다.’ 어떤 것이 조금도 축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옹근 사흘 동안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의 나이는 벌써 옹근 쉰이다.’ 매우 실속 있고 다부지다는 뜻이기도 하다. ‘옹골차다’와 비슷한 말이다. ‘나이는 어려도 형 노릇은 옹글게 한다.’
담배 한 까치, 한 개비, 한 개피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해 만든 담배인 '승리' 이후, 우리나라 담배 시장이 커지면서 국산 담배의 종류와 이름이 많이 늘어났다. 담배 가격을 아는지 모르는지가 간첩을 식별하는 요령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애연가가 아니면 담배 이름도 잘 모를 정도다. 다양해진 담배 이름만큼이나 알쏭달쏭한 담배 세기. 올바르게 쓰인 표현을 한번 골라 보자.
① 담배 한 개피 ② 담배 한 까치 ③ 담배 한 가피 ④ 담배 한 개비 ⑤ 담배 한 가치
아마도 ①, ②번을 정답으로 가장 많이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잘못된 표현으로, 정답은 ④번 '담배 한 개비'다.
'개비'는 "장작 두 개비" "향 네 개비" "성냥 다섯 개비"처럼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서 '가늘고 짤막하게 쪼갠 토막을 세는 단위'로 쓰인다. 이 '개비'는 독립된 단어이므로 '담배 한 개비, 두 개비, 세 개비…'처럼 앞에서 수량을 나타내는 말('한' '두' '세' 등)과는 띄어 써야 한다. 기억하기가 어렵다면 '성냥개비'를 떠올려 보자. '낱개의 성냥'을 '성냥개비'라 부르는 걸 생각한다면 '담배 한 개비'도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리숙하다, 어수룩하다
ㄱ. 어리숙한 시골 노인 ㄴ. 어수룩한 시골 노인
ㄱ과 ㄴ 가운데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가? 대부분 둘 다 자연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둘 다 모두 바른 말인가? 표준어 규범은 '어리숙하다'를 비표준어로 다루고 있다. 이는 두 말이 완전 동의어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자.
ㄷ. 세상이 그렇게 어수룩한 줄 알아? ㄹ. 그 팀은 수비가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
위의 경우에는 '어수룩하다'를 '어리숙하다'로 바꾸기 어려워 보인다. ㄱ과 ㄴ의 경우에는 두 단어가 '사람이 때 묻지 않고 숫되다'의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 반면, ㄷ과 ㄹ의 경우에는 '어수룩하다'만이 '사람 이외의 대상이 호락호락하거나 허술하다'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ㄱ과 ㄴ의 경우에도 찬찬히 뜯어보면 두 말 사이에 아주 미세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어리숙하다'는 어리석음의 어감이, '어수룩하다'는 순박함의 어감이 두드러진다. 가령, "난 내가 너무 어리숙했다는 걸 깨달았다"와 "우리 선생님은 어수룩하지만 인간미가 넘치신다"의 경우, 두 단어를 서로 맞바꾸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 두 말은 완전 동의어가 아니므로 복수 표준어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상순(사전 편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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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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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 채풍묵
이 나라 입시생은 인간이 아니다 다만 고3일 뿐이다 그래도 푸른 나이 문득문득 주체 못할 힘을 뿜는다 쉬는 시간 복도를 휘젓는 튼실한 줄달음질 바라보아라 식판에 산처럼 쌓인 밥 무너뜨리는 숟가락질 바라보아라 녀석들을 학교 뒷산 아차산 멧돼지라 부르기 넉넉하다 심지어 급식이 배달되는 통로를 향해 돌진한 친구도 있다 인류는 가장 먼저 개를 길들였다 가장 나중 말을 길들였다 오래 길들여진 애완견은 자기도 사람인 양 식구를 자청하고 기계화된 말들은 천리를 달리고도 말똥 누울 곳이 없는 지금 농경 목축 이래 길들여진 가축 중 가장 친근한 돼지는 그래도 누구에겐 동전을 누구에겐 자손 번성을 누구에겐 복을 준다 하지만 수업이 졸음에 겨워 시드는 복돼지가 늘어나는 학년 말 우리들의 야성을 위하여 우리들의 건강한 본성을 위하여 나는 길들여진 졸음을 회초리로 깨워서 너는 본래 멧돼지니라 너는 두고 온 선사 시대 들판을 찾아가라 내몰기 일쑤인 것이다 금년에도 멧돼지가 도심 곳곳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서울 호프집에 나타나 맥주를 어설프게 청하다 쫓겨났다더니 전화국 뒤 강변 도서관 앞 여학교 밖에서 킁킁거리기도 했단다 북한산 아차산 등지에 서식하는 멧돼지의 개체가 늘어나면서 내가 깨워 보낸 졸음들이 푸른 지구의 나이를 거슬러 가는 길에 좌충우돌 킁킁 세상에 숨겨진 고구마를 캐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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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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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배 - 이영지 - 새벽기도. 1535 -
바람의 앞마당을 댓비로 싹싹쓴다 바람배 남산만큼 불러서 종소리다 당풍이 땡그렁댕댕 햇볕마당 쓸면서
바람의 뒷마당에 몹시도 궁금하던 사람이 남산만한 그리움 종소리로 여기야 댕그렁댕댕 종소리로 울린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궁금하던 사람을 마당가득 놔주고 허리펴는 아침의 햇볕마당이 둥그렇게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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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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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지는 봄 - 신현득
앞뒤 밭에 냉이가 돋아나면, 엄마는 예쁜 아기를 낳는다 하고.
살구꽃 필 즈음에, 큰 암소는 귀연 송아지를 낳을 기고. (그 밖에도 병아리랑 또 있다.)
아버지는 앞들에서 제일 좋다는, 선돌 옆 두 마지기 논을 산다 하고,
오빠는 이층집 읍내 중학교에, 까만 양복에 까만 모자 쓴 중학생이 된다 하고,
엄마랑 아버지는 요즘 밤 곧장 이야기가 길고, 누무시지 않는다.
나도 오빠도 자는 척은 하지만, 엄마 아버지 하시는 얘길 다 듣는다.
그리고 오는 봄의 좋은 일들을 꿈꾸듯 그려 본다.
--- 아기를 업고, 송아지를 몰고, 그렇게 바닥이 좋다는 선돌 옆 논이랑, 까만 양복에 중학생이 된 오빠 모습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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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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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 -나는 얼마 전에 담배를 끊었으나, 꿈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입에 물고 있다
나는 얼마 전에 담배를 끊었으나, 지금도 이따금 담배를 피우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배에 불을 붙여 가지고 입에 물고 있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고 생각은 하지만, 피워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그대로 피우고 만다. 끊고 나서 5개월이 지났는데오 아직도 이런 꼴인 걸 보면, 담배라는 것은 상당히 끈질긴 물건이다. 외국 잡지에 실리는 담배 광고는 상당히 자극적이다. 일본과는 달리 담배를 나라에서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가 각기 독특하다. 그래서인지 보고 있기만 해도 무의식적으로 담배에 손이 가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말보로 담배 광고인데, 광고 모델은 전원이 카우보이고, 카피는 언제나 단 한 줄, "말보로의 세계로 오세요"다. 피터 예이츠의 영화 <영 제너레이션>에는 이 말보로 광고에 미쳐 버린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젊은이가 나오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말보로의 광고를 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담배(물론 말보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윈스턴이 있다. 이 담배 광고의 모델은 대개가 육체 노동자다. 카피는 "아메리카 베스트"인데, 분위기는 <디어 헌터>의 세계에 가깝다. 타르가 어떻게 니코틴이 어떻고 하는 것은 남자답지 않다는 느낌이다. 카멜도 마찬가지다. 모델은 탐험가고, 카피는 "사나이가 있어야 할 곳"이다. 완전한 헤비 듀터의 세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세 개의 광고에 대해서 심하게 반발을 느끼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이 세 개의 광고를 보고 있으면 그 반발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담배가 피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니코틴 냄새가 발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혀끝으로 이빨 안쪽을 핥고 만다. 그것에 비해서 "울트라 로우 타르지만 맛이 좋아요(켄트 3)"라든가, "모두 함께 깨끗한 셀럼 스피릿(셀럼)"이라든가, 재즈맨을 모델로 한 쿨의 "연주하는 데는 이것밖에 없다"시리즈처럼 따문한 광고는, 보고 있어도 특별히 담배를 피워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일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담배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남성다운 것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일 때문에 선사에 갔는데 수행승 중에 골초들이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부러 산에 틀어박혀서 수행을 하고 있으니 담배 따위는 끊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담배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골치 아픈 물건이다.
두 손으로 피아노 치는 아빠의 모습 -손가락 하나하나가 차례로 마비되어 가는 잔혹한 병에 도전. 10년 투병 끝에 재기한 감동에 찬 이야기
내가 처음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산 것은 열여섯살 때로, 피아니스트는 박하우스도, 캠프도, 제르킨도 아닌, 레온 프라이셔라고 하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젊은 피아니스트였다. 지휘는 조지 셀이었다. 프라이셔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값이 쌌기 때문이다. 네 장이 한 세트로 바겐세일해서 단돈 3,000엔이었다. 가난한 고등 학생으로서는 반할 만한 가격이었다. 연주로서는 품격이라든가 예리함은 결여되어 있었어도, 그 나름대로 느낌이좋은 레코드였다. 그런데, 며칠 전에 라이프 지를 읽다 보니 이 레온 프라이셔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최근에 프라이셔에관해 듣지 못한 것 같아서 읽어 보니, 프라이셔는 오른손의 건소염으로계속 연주가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건소염이라는 것은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는 직업병과 같은 것이어서, 옛날에 로베르트 슈만도 이 병에 걸려서, 피아노를 단념하고 작곡가로 전업했던 것이다. 우선 새끼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게 되고, 다음에는 약지가 말을 듣지 않게 되며, 결국에는 손 자체가 마비되어 버린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회목될 가능성이 없다. 잔혹한 병이다.
레온 프라이셔는 그래도 버텨 내면서,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유일한 레퍼토리로 피아니스트 활동을 계속해 나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곡만을 치면서 살아 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근육 치료 아래서 피나는 투병 생활을 했다. 근 10년 넘게 훈련을 한 끝에 가까스로 정상적인 피아니스트로 재기한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고 있노라면, 정말로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라이셔는 첫 번째 재기 콘서트에서 프랑크의 <교향 협주곡>을 연주했다. 리허설에는 프라이셔의 아이들도 참석했다. 그들은 두 손으로 피아노를 치는 아빠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프라이셔는 심각해지지 않고, 갑자기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쳐서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들었다. 유태인의 유머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터프함을 지니고 있다. 이 원고를 쓰면서 프라이셔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듣고 있는데, 그리움이 밀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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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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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이름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을 때 아담으로 하여금 만물에 이름을 붙이도록 했다고 한다. 신은 사자를 데리고 와서 아담에게 물었다. 이 동물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겠느냐? 또 그는 코끼리를 데리고 와서는 물었다. 이 동물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 부르겠느냐? 그래서 아담은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였고, 그 이후로 사람들은 만물에 이름을 붙여 왔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표기된 것,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대가 누둔가에게 이 꽃을 압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는 말할 것이다. 네 알구말구요. 그 꽃은 장미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이름일 뿐이다. 그대는 그밖에 무엇을 알고 있는가? 장미라는 이름을 안다는 것만으로 장미를 진정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이라는 말을 아는 것으로써 그대가 신을 아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말을 아는 것으로써 그대가 진정 사랑을 아는 것인가?
배꼽
친구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친구가 말했다.
"난 나의 어머니만은 절대로 버릴 수가 없어. 어머니는 날 낳아 주셨고, 내 생명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거든. 내가 지금 가진 것 모두를 전부 버릴 수는 있어도 어머니만은 절대 버릴 수 없어."
또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버릴 수 없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주어진 것이지만, 내 아내는 내가 직접 선택했거든. 나는 아내에게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다른 사람은 다 버릴 수 있어도 내 아내만은 절대 버릴 수 없다네."
어떤 친구는 자기 집만은 절대 버릴 수 없다고 했고, 또 어떤 친구는 자기가 경영하는 회사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뮬라 나스루딘이 자기가 말할 차례가 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배꼽만은 버릴 수 없네. 배꼽 없이는 살 수가 없거든."
친구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배꼽이라니! 친구들이 그에게 설명하기를 재촉했다. 그러자 나스루딘이 말했다.
"나는 일요일이면 푹신한 소파에 편히 기대앉아 감자를 먹는다네."
친구들이 일제히 합창하듯 말했다.
"그런데 그게 배꼽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감자야 어느 누구든 먹을 수 있는 흔한 음식이 아닌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군. 배꼽이 없으면 소금 놓을 것이 없어지거든."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란 모두가 다 이렇게 어리석은 것이다. 그대의 내면의식 외에는 모든게 다 버려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비운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오쇼 라즈니쉬 약력
1931년 12월 11일, 인도의 마드햐 플라데쉬에서 쟈이나 교도인 한 소박한 직물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7세가 될 때까지 그의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1938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인구 2만의 읍인 그라데 와라로 가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1946년, 14세 때 라즈니쉬는 처음으로 사토리를 경험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명상실험은 깊어져 갔고, 그의 영적 탐구의 강렬함은 그의 육체적 건강을 손상시킬 정도였다. 1952년 3월 21일, 21세의 라즈니쉬는 인간의식의 최고정점인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의 외적 전기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삶의 내적 규율을 갖고서 일체성이라는 무아의 경지에서 살아왔다. 외면적으로는, 사우가 대학교에서 학문을 계속하여 1956년 졸업할 때는 철학 부문의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인도 토론대회의 우승자이며, 졸업반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1957년, 라즈니쉬는 라이퓨어 시의 산스크리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1년 후 그는 자발퓨어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1966년 그는 현대인에게 명상 기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렸다. 1968년, 그는 봄베이에 정착해 살며 가르침을 계속했다. 그는 주로 고원의 피서지에서 정기적으로 명상캠프를 열었다. 그는 거기에서 혁명적인 다이나믹 명상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먼저 카타르스를 시도함으로써 상념의 정지를 돕는 기법이었다. 1970년부터 그는 애정적, 개인적 지도로써 사람들을 자기탐구와 명상으로 들어서는 길인 네오 산히야스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 라즈니쉬의 명성은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에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1974년, 그의 깨달음을 기리는 스물 한번째 기념일에, 푸나에서 아쉬람이 열렸다. 그의 영향력의 범위는 이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동시에 그의 건강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80년, 설법중인 라즈니쉬를 암살하려 한 기도가 어떤 전통적인 힌두파의 일원에 의해 일어났다. 동양과 서양의 공적인 종교, 교회들은 그를 반대했지만, 그때까지 라즈니쉬는 전세계에 25만명이 넘는 제자를 갖고 있었다. 1981년 5월 1일, 라즈니쉬는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됨에 따라 육체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가슴과 가슴의 침묵의 교감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갔다. 1984년 10월, 라즈니쉬는 자신의 저택에서 소수의 그룹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그는 라즈니쉬 만디르에서 매일아침 수천명의 구도자들에게 공개설법을 하기 시작했다. 1985년 9월 14일, 그의 개인비서와 공동체관리를 담당하던 몇명의 구성원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들에 의해 자행된 모든 비합법적 행위의 유형들이 밝혀졌다. 라즈니쉬는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조사하기 위해 미 당국자들을 시로 불렀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이 기회를 공동체에 반대하는 싸움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이용했다. 10월 29일 라즈니쉬는 노오스 캐롤라이나 주의 사로트에서 영장없이 체포되었다. 그는 12일 동안 감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는 40만 달러의 벌금을 물 것, 미국을 떠날 것, 5년 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을 명령받았다. 그래서 인도로 가서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1985년 12월, 라즈니쉬는 비서와 반려자, 의사는 인도에서 떠날 것을 명령받았고, 그들의 비자는 취소되었다. 그는 네팔의 카트만두로 떠나 그곳에서 강의를 재개했다. 1986년 7월 29일, 라즈니쉬는 인도의 봄베이로 갔다. 그는 그곳의 친구집에서 은둔하며 매일 강의를 계속했다. 1987년 1월 4일, 라즈니쉬는 1970년대의 대부분을 보냈던 푸나 아쉬람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푸나의 경찰서장은 시의 평화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문제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같은 날 봄베이의 고등재판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8월, 자유세계의 정부들이 사실상 연금상태로 라즈니쉬를 고립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명의 제자들은 다시 한번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해 푸나로 향하곤 했다. 1990년 1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인도의 푸나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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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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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극한점
모든 것에 극한점이 있듯이 삶에도 극한점이 있다. 겪을 것 다 겪고, 실패할 것 다 실패하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일만 남는다. 무한정 열을 가한다고 해서 온도가 무한정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온도에 도달하면 온도는 더 이상 오르지 않고 멈추어 버린다. 이처럼 우리 삶에도 극한점이 있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못되어도 무한정 못되어지지는 않는다. 겪을 고통 다 겪고 실패할 것 다 실패하면 자신의 처지가 극한점에 몰려 있다면 앞으로는 더 좋아질 일만 남게 된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어중간하게 위기에 몰려 있는 것보다는 낫다. 어중간한 위기에 몰려 있으면 더 못되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해 떨어야 하지마,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면 더 못되어질까 봐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고, 또 끝에 서 있으니까 발길을 옮겨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때에 맞게 배짱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일이 잘 안 되어 극한 상황으로 몰리면 좌절하고 위축되기에 앞서 여기서 못되면 더 못되겠느냐 하는 두둑한 배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덤벼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는 데는 더 좋은 힘을 발휘해 주고, 더 못되어질까 봐 불안해 떨 때보다도 성공률이 월등히 높아진다.
지혜
지혜를 많이 얻어 놓아라. 지혜는 결코 가치 없는 땀을 흘리게 하지 않는다. 지혜가 없는 자는 어느 일에든 땀을 투자한다. 지혜로워야 한다. 똑똑하지는 못하더라도 지혜로워야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필요한다. 지식을 보태는 것은 삶에 더하기 효과를 가져다 주지만 지혜를 보태는 것은 삶에 곱하기 효과를 가져다 준다. 하나의 지식은 하나의 이론적인 것을 깨치지만 하나의 지혜는 또 다른 지혜를 낳아 삶에 연쇄적인 도움을 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식보다 지혜가 더 요긴한 것은 그것이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지식은 책 속에 있는 이론을 귀로 들어서 습득하지만 지혜는 삶의 현장에서 몸소 겪어 보거나 어떠한 현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는 가운데 얻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삶과 괴리될 수 없고 그래서 여과 없이 삶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나이 어린 사람보다 지혜롭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지혜는 그것들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 것으로서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지혜가 모자라고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미련한 것은 아니다. 지혜의 근원지는 세상(삶의 현장)이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고 지식이 짧아도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풍부한 지혜를 담을 수 있다.
절망
절망에 빠졌다고 해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인생의 끝은 절망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희망을 버리고 자포 자기했을 때 보인다. 위기에 몰렸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절대적인 위기란 없다. 사방 포위된 상태가 사방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되듯이 위기가 오히려 호기가 될 수 있다. 절망이 곧 인생의 끝은 아니다. 절망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종착역은 새로운 시발역도 되듯이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절망에 빠지면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야 한다.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면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묵묵히 걷다 보년 뛰어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게 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어떻게든 길이 나타난다. 절망에 빠지면 한꺼번에 극복하기 위해서 발버둥치지 말아야 한다. 절망을 한꺼번에 극복하려고 결정적인 기회를 노리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절망으로 빠져들게 한다.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작은 희망을 가지는 일이다. 촛불 한 자루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주듯이 작은 희망이 깊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돌파구를 찾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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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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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13. 내 운명은 나의 것 - 시지프스
위대한 의식의 순간
야근을 끝내고 돌아오는 캄캄한 밤,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또는 간간히 책장 넘기는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 독서실 한구석에 앉아 시험 공부를 하다가 돌연히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는가?, 내 삶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에 따라선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느닷없이, 또 강렬하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그것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아니라 습격 이라고 해야 온당할 정도이다. 내 삶의 의미를 묻는 그런 회의에 습격당하면 이제까지 너무나 익숙하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나 전철을 향해 뛰는 그 분주함도, 수험서의 중요한 대목에다 밑줄을 긋는 손길도, 질탕한 술자리의 그렇고 그런 소란도, 승진을 향한 피말리는 경쟁도, 밤늦은 귀가 때의 종종걸음도... 요컨대 똑같은 리듬으로 월·화·수·목·금·토 계속되는, 이제까지는 아주 자연스럽고 수월하던 그 모든 일상이 갑자기 무의미해 보이고, 지루하고, 역겨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바깥 세계가 마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정물처럼 서먹서먹해지고 나아가선 두렵기까지 하다. 내 삶은 무의미한 일상의 궤도를 습관적으로 따라 돌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에 아득바득 쫓기며 살아온 이제까지의 자신이 그저 우스울 뿐이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를 성큼 떼놓고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세계로 찾아든 이방인처럼 만들어 버리는 이 돌연하고도 비참한 순간을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위대한 의식의 순간이라 칭했다.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고 생의 부조리에 눈뜨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란 다른 말로 무의미함, 허망함을 뜻한다. 카뮈는 그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적 에세이<시지프스의 신화>를 이렇게 시작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곧 철학의 근본 문에에 대답하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 문제 에 대한 카뮈의 결론은 이렇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얼핏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이 두 문장 사이에 가로놓인 긴 사유의 과정을 알고 싶은 사람, 실존을 자각해 본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해 본 사람은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러자면 그에 앞서 시지프스에 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가장 현명한 인간 시지프스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인간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한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뜻찮은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 찍힌 존재였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형인 아폴론의 소를 훔쳤다고 한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는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웠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를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이 완전 범죄를 망쳐 놓은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시지프스였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지프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임을 일러바쳤던 것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지프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여하튼 신들의 일에 감히 인간이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가뜩이나 눈밖에 나 있던 차에 뒤이어 시지프스는 더욱 결정적인 괘씸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어느 날 시지프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잠시 궁리한 끝에 시지프스는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신 아소포스를 찾아갔다. 딸 걱정에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소포스에게 시지프스는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 준다면 딸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노라 했다. 시지프스는 그때 코린토스를 창건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엇다. 그러니 코린토스에 있는 산에다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게 시지프스의 청이었다. 물줄기를 산 위로 끌어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쨋거나 딸을 찾는 게 급했던터라 아소포스는 시지프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시지프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휘치를 가르쳐 주었고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냈다. 자신의 떳떳찮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어바친 자가 다름아닌 시지프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신 타나토스(죽음)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 오라고 명려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보복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리고 있던 시지프스는 타나토스가 당도하자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졌다. 명계의 왕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게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섰다간 온 코린토스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지프스는 이번엔 순순히 항복했다. 그런데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가면서 시지프스는 아내 멜로페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일렀다.
영겁의 형벌
저승에 당도한 시지프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읍소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프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영생불사하는 신이 아니라 한번 죽으면 그걸로 그만인 인간인 그로서는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도 소중했던 것이다. 하데스가 몇 번이나 타나토스를 보내 을러대기도 하고 경고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시지프스는 갖가지 말재주와 임기웅변으로 체포를 피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후로 오랫동안을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다 한들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마침내는 시지프스도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명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명계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 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시지프스는 바위보다 강하다
다시 굴러 떨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 끔찍하지 짝이 없다. 언제 끝나리라는 보장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시지프스의 무익한 노동 앞엔 헤아릴 길 없는 영겁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카뮈는 시지프스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인 까닭이 바로 다시 굴러 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노동이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알면서도 수백, 수천, 수만 번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에 있다고 갈파했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가장 절망스럽고 참혹할 듯한 순간-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 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시지프스가 자신의 운명을 이기는 승리의 순간 이다. 시지프스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돌아오는 동안이고 멈춰 있는 동안이다. 바위 곁에 있는 기진맥진한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시지프스가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을 알지 못하는 고뇌를 향하여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처럼 어김없이 되돌아오는 이 휴식의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영역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그 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지프스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시킬 수 있다. 자신의 노동이 헛되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위안 삼을 헛된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슬픔과 비탄에 빠지지 않고-말하자면 신들이 정해 준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굴러 떨어질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 카뮈는 그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불안하고 가파른 실존을 대면하는 인간의 응당한자세를 읽어낸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철학적 조류이다. 실존주의를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명제는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데, 이 말 속에는 실존주의의 특징뿐만 아니라 실존주의를 잉태한 20세기 전반적인 사회 상황이 그대로 녹아있기도 하다. 18·19세기는 신념과 희망의 시대였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며, 이성의 빛에 따라 사회와 역사는 진보·발전해 간다는 낙관적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일찍이 없었던 위기와 혼돈, 불안과 동요에 빠지게 되었다. 근대 시민 사회의 모순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세기말의 혼랑과 뒤이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이제까지의 믿음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증오와 투쟁, 무의미한 전쟁과 대량 살육,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야수적인 면모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따위의 본질은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맞닥뜨린 불안·허무·두려움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처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삶, 즉 실존이었다. 실존주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무의미하게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신의 소명을 받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 어떤 심오하고 아름다운 본질을 실현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본질이라거나 의미 같은 건 애초에 없다. 그러면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도 원래부터 주어진 정답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기자신일 뿐이다. 일단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자기를 의식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들은 우연적이며 부조리하다. 나무나 돌은 자신의 생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장하고 소멸할 따름이다. 하지만 인간은 의식이 있는 존재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만아니라 자기 자신도 의식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런데 선험적으로 주어진 의미 따위는 없다. 결국 인간은 주어진 상황, 주어진 순간 속에서 스스로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삶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듯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운명은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본질이라는게 있다면 그것은 자유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유가 인간의 존재 양식 그 자체임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이기를 선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으며, 자유 안에 던져져 있다.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실존주의는 이처럼 개개인의 철저한 자각과 창조적인 주체성을 강조하고 그 역할을 한껏 높이 샀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한 개별적인 존재 조건뿐만 아니라 넓게는 사회·역사적 상황도 마찬가지로 깨어 있는 개인의 적극적인 선택과 행동에 따라 변화되는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인간을 자기 운명과 역사의 유일무이한 주체로 세웠다. 실제로 카뮈와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비롯해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사회·정치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자평에 하등의 이의를 달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철학과 이론, 주장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또한 한계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선택은 수많은 사회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전후좌우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고, 그의 내면에는 이미 자기화된 사회적과 도덕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의 선택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으며, 나의 판단 은 어떤 기준과 근거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은 역사로부터 물려받거나 사회로부터 배운 것이기 십상이다. 사르트르도 이 점을 인식하고 어떤 개인도 그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완전히 자유로운 실존을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구원은 불가능하다 고 고백하였다. 본질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힘들 듯이 실존만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실존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관계 속에 놓인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삶과 역사의 주체로서 끊임없는 선택과 실천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실존주의의 명제는 거역할 수 없이 아름답다. 굴러 떨어진 돌을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처럼. 더구나 사르트르의 다음과 같은 말까지 듣고 나면 인류의 일원으로서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게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져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무게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내 어깨 위에 놓인 전세계라니, 참을 수 없는 실존의 무거움이여!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고 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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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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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모조품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1백 만 달러에 팔렸다. 그림을 산 귀부인은 그것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감정받기를 원했다. 한 미술 비평가가 말했다.
"이 작품은 진품이 틀림없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친구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므로, 이것이 진품이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귀부인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피카소를 직접 찾아가 말했다.
"나는 이미 이 그림을 샀으므로 그것이 모조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단지 정말로 이것이 진품인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했다. 그 미술 비평가도, 그와 동거하던 애인도 그 곳에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닙니다."
그러자 피카소의 애인이 말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은 이 그림을 그렸어요. 뿐만 아니라 이 비평가 선생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했다.
"내가 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은 오리지널이 아니오. 나는 과거에도 그와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소.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던 것이오. 오리지널은 지금 파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소.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사본에 불과하오. 누가 그 사본을 만들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소. 설사 내 자신이 그 사본을 만들었다 해서 사본이 진품이 되진 않는 것이오. 나에겐 첫 번째 그림만이 오리지널이었소. 왜냐하면 그것은 내 존재의 침묵으로부터 탄생된 것이기 때문이오. 그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무심의 경지여서 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소.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릴 때는 그렇지 않았소. 이것은 마음의 산물이지만, 첫 번째의 마음을 초월한 곳에서 탄생하였던 것이오."
- 그대의 침묵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름다움과 진실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본에 불과하다. 무지한 자들에게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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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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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 원 왕조의 성립(1271)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하나 남겨졌다.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잔인한 정복자에서 고도의 지배자로 변신시켜, 고도의 문명국들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몽고족은 초원의 목동이자 전사였고, 정복민인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몽고족은 숫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엇다. 그 과제는 참으로 오랜 전통 끝에 달성되었으나, 또한 그것을 몽고족의 건강한 풍습을 해쳐 마침내 제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순수 유목민인 몽고인들에게 중국의 농경문화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생소한 것이었다. 오고타이가 지배하던 어느 날, 이렇게 진언하는 몽고의 중신이 있었다.
"몽고제국에 있어서 한인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차라리 한인들을 모두 그들의 농경지에서 쫓아내고 그곳을 초원으로 만들어 소와 양을 방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몽고인들의 중국 지배관을 바꾸어놓은 이가 야율초재. 그는 거란 황실 출신의 금나라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로, 몽고가 금나라로부터 얻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오고타이 때까지 30여년간 재상으로 활약했다. 그는 몽고인들에게 농토와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토지가 생산해내는 풍부한 생산물을 세금으로 확보,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외국인이었다. 1259년 몽케가 남송 정벌 도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대권을 두고 쿠빌라이와 아릭부게 간의 4년 여에 걸친 대립이 있었다. 몽고의 전통귀족들의 대부분은 아릭부게를 중심으로 결집했으나, 소수파에 불과했던 쿠빌라이가 중국대륙의 광대한 힘을 기반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문화와 접촉했던 중국통으로, 그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되는 몽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몽고인들은 전통의 고수와 중국화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것은 쿠빌라이와 오고타이의 아들 카이두의 항쟁으로 지속, 그들은 죽을 때까지 20여년간에 걸쳐 대립항쟁했다. 실제로 4칸국 중에서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구가 건설한 일 칸국만 제외한 모든 칸국들은 카이두를 지지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고의 전통 도시 카라코룸을 두고, 제국의 근거지를 중국 내지로 옮겼다. 수도는 금의 수도였던 대도 북경으로 옮겨졌고, 1271년에는 국호를 '시초', 혹은 '근원'이라는 뜻의 '원'으로 정했다. 이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서 자구를 딴 것이다. 남송 정벌의 대장정이 다시 결행되고, 1279년에는 마침내 남송을 멸망, 몽고족은 중국민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원제국은 중서성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국식 중앙관제를 약간의 손질을 가해 그대로 운용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을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의 고위 관직자들은 몽고인 제일주의에 의거, 반드시 몽고인으로 충당되었으니, 과거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몽고인으로부터 외면당해 단기적 실시에 그치게 마련이었다. 지방의 행정기구로는 예전의 주현제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부, 로를 설치했는데, 각 단위에는 다루가치라는 몽고인 감독관을 파견했다. 전지역은 10여 개의 지역으로 묶여지고, 각각 행중서성을 두었는데, 그 뜻은 중서성의 파견기관 정도의 의미이다. 이를 줄여서 행성, 더 뒷날에는 성으로 불리어졌다. 중국에서 성이 지방 행정구획으로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은 백성들을 크게 4개의 신분으로 구별, 철저한 차등을 두어 다스렸다. 물론 최고의 신분은 몽고인. 몽고인 제일주의는 다수의 문화민인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제2신분은 색목인. 색목인이란 '여러 인종이 섞여 복잡하다'는 뜻으로, 서역 계통의 제종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원의 제국 확장이나 중국 통치에 일찍부터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해왔다. 몽고인들에게는 이들이 중국문화와는 아주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뛰어난 상업, 재정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을 거이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이들도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대상로가 확보되고 상업상의 이득이 확대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몽고의 지배 속에서 가장 커다란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제 신분인 한인과 최하신분인 남인으로 구별되었다. 한인은 금의 지배하에 있던 화북의 중국인들로 말단의 관직에 봉직할 수 있었으나, 최후에 정복된 남송 지배하의 강남의 중국인들, 즉 남인에게는 그것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재야에 묻혀 시짓기를 즐기거나, 잡극이라는 새로운 문학분야를 개척, 민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한편 단지 몽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애에서의 모든 영화가 보장되었던 몽고인들은 점차 유목민족 특유의 강건한 기풍, 용맹한 군사력을 상실해갔다. 칸의 계승권 다툼은 갈수록 심화되어 성종에서 마지막 황제 순제 사이의 26년간에는 무려 8인의 제왕이 교체되었다. 게다가 황실의 라마교 신봉은 원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라마는 '높은 이'라는 뜻이다. 라마교는 티베트의 토착신앙과 결합한 불교의 변종으로, 주술과 예언을 중시하는 밀교다. 라마교의 최초의 신자는 쿠빌라이로, 그는 티베트 원정에서 라마 승려 파스파의 설법에 감동하여 그의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티베트 문자를 변형, 제작한 파스파 문자는 몽고의 공문서에 사용되었으며, "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이를 욕하는 자는 그 혀를 자른다."는 법령까지 재정되었다. 수백 회에 이르는 빈번한 라마교의 불사, 라마교의 방중술에 빠진 황실의 퇴폐적인 생활은 재정난을 더욱 악화, 지폐가 남발되니, 인플레의 격정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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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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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보다 더 미지근한 얼음(?) - 靑出於藍(청출어람) 靑(푸를 청) 出(날 출) 於(어조사 어) 藍(쪽 람)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첫 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된다.
군자가 말하길, 배움은 그쳐서는 아니된다. 푸른색은 쪽풀에서 취하였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며,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라고 하였다(學不可以己.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성악설을 주장한 전국시대의 학자 순자는 남풀과 청색, 그리고 물과 얼음의 비유로써 교육에 의한 인성의 교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고 이(利)를 탐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므로, 스승의 가르침과 예의로써 이를 교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藍이란 본시 그 잎으로 남색 염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식물의 이름이다. 남풀 에서 챙색을 추출하는 과정이나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곧 교육을 비유한 것이니, 靑出於藍 이란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변화된 것을 일컫는 말이다. 出藍 이라는 표현도 같은 뜻이다.
진정으로 남풀과 물의 역할을 하는 스승, 챙색과 얼음으로 변화된 제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靑出於藍 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스승의 날 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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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전국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 성악설(性惡說)을 창시한 순자(荀子)의 글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學不可以已(학불가이이)]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靑取之於藍(청취지어람)] 쪽빛보다 더 푸르고 [而靑於藍(이청어람)]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氷水爲之(빙수위지)] 물보다도 더 차다 [而寒於水(이한어수)]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끊임없이 발전과 향상을 목표로 하여 노력해야 하고 중도에서 그만두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한 걸음씩 완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여기서 '푸름과 얼음'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학문과 마차가지로 그 과정을 거듭 쌓음으로써 그 성질이 더욱 깊어지고 순화되어 가는 것이다. 스승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행함으로써 스승보다 더 깊고 높은 학문과 덕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이 너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를 능가하기는 어렵다.
【준 말】출람(出藍) 【동의어】출람지예(出藍之譽), 출람지재(出藍之才), 후생각고(後生角高), 출람지영예(出藍之榮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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