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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95호
2010.10.6 (음 8.29)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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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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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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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알이라면 예술은 알에서 깨어난 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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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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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점
중국 북송시대 왕안석의 ‘영석류시(詠石榴詩)’에서 유래한다. ‘푸른 잎 가운데 피어 있는 한 송이의 붉은 꽃(紅一點).’ 이 붉은 꽃은 돋보인다. 많은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녀는 우리 부서의 홍일점이야.” 반대말은 청일점이다. 여럿 속에서 오직 하나 이채(異彩)를 띠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탓과 덕분
‘탓’의 옛 형태는 ‘닷’이다. 유기음(거센소리)화를 겪어 ‘탓’이 됐다.
변화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난 까닭이나 원인을 뜻한다. ‘내 탓이다, 술이 과한 탓이다.’ 동사 ‘탓하다’는 핑계로 삼아 원망하는 일을 말한다. ‘운명을 탓했다.’ ‘덕분’은 긍정적일 때 사용된다. 은혜나 도움, 배려의 뜻이 있다. ‘형 덕분에 잘됐다.’
책갈피
갈피는 겹치거나 포갠 물건 하나하나의 사이다. 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이기도 하다. 책갈피는 말 그대로 책의 갈피다. 책장과 책장 사이를 일컫는다. 그러나 요즘은 읽던 곳이나 필요한 곳을 찾기 쉽도록 책의 낱장 사이에 끼워 두는 물건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쓰인다. 보람, 갈피표, 갈피끈, 가름끈, 서표 등을 대신해 사용된다.
어금니, 엄니
근래 들어 농촌 지역에서 멧돼지에 의한 피해가 늘고 있다. 애써 가꾼 농작물을 망치고 산소를 파헤치는 등 농민들로서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남도의 섬마을에서는 한때 멧돼지로 인해 괴물 소동이 빚어졌고, 충북 영동에서는 80대 노인이 멧돼지에게 받혀 숨지는 사건까지 있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사살된 멧돼지의 입 양쪽으로 15㎝가 넘는 어금니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때는 ''어금니''가 아니라 ''엄니''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어금니는 송곳니의 안쪽에 있는 큰 이로, 가운데가 오목하게 생겼으며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역할을 한다. "이제 아버지도 안 계시니 이 험악한 세상을 어금니를 악물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담배를 입속 깊숙이 어금니 쪽으로 문 채 손끝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호철의 ''님'')처럼 쓴다. 경상도 지방에서 어금니를 엄니라고도 하지만 이는 방언이다.
엄니는 크고 날카롭게 발달한 포유동물의 이를 뜻하며 "코끼리의 앞니는 길게 자라서 엄니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곧 상아다" "네스토르를 놓친 멧돼지는 참나무 둥치에다 그 엄니를 갈았다"처럼 쓰인다.
참고로 호랑이.사자.멧돼지 따위의 엄니는 송곳니가 발달한 것이며, 코끼리의 엄니는 앞니가 발달한 것이다.
망년회
연말 모임을 보통 '망년회'라 부른다. '망년회(忘年會)'의 '망년'은 망년지교(忘年之交) 또는 망년지우(忘年之友)에서 온 말이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벗을 망년지교(망년지우)라 한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서로 친구로 사귄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섣달 그믐께 친지끼리 모여 흥청대는 세시민속이 있었는데 '망년지교'에서 글자를 따 '망년(忘年)' 또는 '연망(年忘)'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망년회의 뿌리가 됐다. 하지만 '망년지교'의 '망년'과는 의미가 다르다. '망년회'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한 해(年)를 잊는(忘) 모임(會)'이란 뜻이다. 한 해를 잊는다는 의미가 우리에겐 친숙하게 와 닿지 않는다.
우리식으론 '송년회(送年會)'다. '송년'은 한 해를 보낸다는 의미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의 송구영신(送舊迎新)과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송년회'는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하는 자리라는 의미다. 먹고 마시며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뜻의 '망년회'와 확연히 다르다.
'망년회' '망년 모임' '망년 술자리' '망년 등반' '망년 여행' 등은 '송년회' '송년 모임' '송년 술자리' '송년 등반' '송년 여행'으로 바꿔 써야 한다. '망년회'는 어감도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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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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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진 - 원구식 -행자를 위하여
내 꿈은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유난히 잘한다. 그저 무심히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은 저절로 살아진다. 주위에선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훈수하며 타이른다. 신문지 몇 장으로 노숙의 찬 서리를 견딜 수 있겠느냐? 네 영혼이 과연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그래, 나도 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단 밥을 먹어야 하고 가정을 무시해야 하며 알량한 직업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도 쓰지 말고 생의 목적도, 연애도, 사랑도, 증오도 피식! 한 방의 코웃음으로 날려보낼 철학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판단력이 흐려져 머리도 감게 되지 않고 매사가 귀찮아지며, 품었던 생각마저 사라지게 된다. 친구도, 처자도, 부모도 모두 지쳐 떠나고 자잘한 세속의 인연마저 모두 끊어져 마침내 정신이 파탄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불쌍하도다, 나여! 무일푼이 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드러누울 땅 한 평 없으니 마침내 온 우주가 네것이로구나. 내가 끊어버린 세속의 인연들아. 이제야 겨우 아무런 이유없이 인생을 헛되이 써버릴 준비가 되었으니 나를 너무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라. 나는 난봉꾼도, 노름꾼도, 파락호도 아니다. 나는 앵벌이도, 뽕쟁이도, 양아치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는 오늘밤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탕진이여,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여, 새로운 시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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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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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와 구름과 - 이영지 - 새벽기도. 1520 -
구름을 한 아름씩 안고서 걸어간다 가벼워 몽실몽실 살아서 싱그럽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졸랑졸랑 꼬리로
꼬리를 도리돌돌 돌리며 살랑살랑 하늘봐 나를 봐 봐 하늘을 꿈구는 법을 하얀구름 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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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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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유경환
어릴 적 손뼉 치며 보던 달 오늘도 산 위에 멀거니 떴다
언니는 군인 되어 전장에 갔고 누나는 먼데로 시집을 갔고
굽은 마을 길 달만 환하게 비추는데
어머닌 소나무에 기대어 달을 보며 몰래 울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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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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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4장 꿈이 서린 계절의 회상을 위하여 -《scrap(그리운 1980년대)》
8월 7일 (화)
오늘은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처박혀서 소설을 썼다. 제대로 된 소설을 쓰는 것은 8개월 만이고, 장편을 쓰는 것은 2년 반 만이다. 즐겁다. 밤 아홉 시쯤 피곤해서 위스키를 마시려고 작업실 근처에서 바 같은 것을 찾아보았으나, 제대로 된 집은 한 집도 없었다. 어느 술집이나 문을 열면, 가라오케 세트가 눈에 들어와서 황급히 문을 닫곤 했다. 나는 싫으니 싫으니 해도, 가라오케처럼 싫은 게 없다. 가라오케로 노래하는 것도 싫도, 가라오케로 노래하는 인간을 보는 것도 싫다. 가라오케라는 명칭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I♡하라주쿠'라는 배지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근처의 술집에서 위스키와 얼음을 사가지고 와서 혼자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I♡하라주쿠' 와 좋아해요, 홋카이도' 중에서 어느쪽이 더 불쾌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둘 다 똑같이 불쾌했다.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나는 본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재주를 부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으로, 그때 부른 노래는 <강아지 순경>이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불쾌한데 나에게 <강아지 순경>을 부르게 한 사람은, '생활 향상 위원회'라고 하는 재즈 그룹에 있던 하라다라는 술 버릇이 고약한 피아니스트였다. 하라다가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며 나에게 강제로 <강아지 순경>을 부르게 한 것이다. 재즈 연주가와 상종해서 그다지 재미를 본 적이 없다. 내가 노래한 <강아지 순경>에는 멋진 율동이 있기 때문에 그걸 부르면 굉장한 인기를 끈다. 그러나 너무 인기가 높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 쓰긴 했는데 전혀 올림픽과는 관계가 없다. 정말로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8월 10일 (금)
로버트 B.파커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읽어 버렸다), T.E.로렌스의《지혜의 일곱 가지 기둥》을 읽고 있다. 상당히 재미있는 책이지만, 엄청나게 난해하고 해독이 불가능한 문장이 차례차례로 등장하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게 된다. 가령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무튼 부하들이 그 의지의 자동성의 위축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든지 곧장 직속 상관의 직무를 물려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어서, 완전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는 약한 가설과는 무관하게, 또한 위대한 계급 조직 속을 원활하게 옮겨 다니다 마침내는 두 명의 잔존 병사가 상관에게 인계되는 지휘의 효과 등과는 무관하게, 우발적인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런 식의 문장은 내가 머리가 나쁜 탓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두세 번 읽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긴 열 번쯤 되풀이해서 읽으면 대강 그 의미는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공포영화 팬이라서, <더 키프>를 보러 갔다. <13일의 금요일>의 최종편과 동시 상영되고 있었다. <13일의 금요일>시리즈는 언제나 머리가 나빠 보이는 여자가 잔뜩 나와서 마구 옷을 벗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살해당해 버린다고 하는 똑같은 패턴이기 때문에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으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일단 끝까지 보았다. 여전히 형편 없었지만, 이번만은 쌍둥이 자매가 나오는 섹스 장면이 있어서 용서를 해주었다. 나는 쌍둥이가 나오면 두엇이든지 얼른 용서해 버린다. 그러나 꽥꽥 악을 쓰고 도망 다니는 머리 나쁜 아가씨들을 부지런히 살해해 나가는 제이슨 씨를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마지막에는 동정심조차 느끼게 된다. 꼭 한 번 하라주쿠 근처로 초대하고 싶다. <더 키프> 쪽은 의도는 나쁜지 않았으나, 트릭이 밝혀진 심리극 풍의 과장된 대사와, 20년 전의 도호 영화와 같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 어설픈 괴물이 흥을 깼다. 그리고 괴물을 봉쇄하는 정령같은 아저씨(<라이트 스터프>에서의 세퍼드 중령을 맡았던 사람)가 인간인 아가씨를 보고 "한 번 해보고 싶어서"라고 하면서, 의미도 없이 강간한 것은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8월 11일 (토)
나는 언제나 호쿠토샤라는 곳에서 만든 원고지에다 글을 썼는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문화 출판국용 원고지에다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마 때때로 기분을 바꿔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출판사의 200자 원고지라면, 나는 가쿠가와 출판사의 《더 텔레비전》잡지의 것을 좋아한다. 선의 색깔이 펠리컨의 로얄 블루 잉크와 잘 어울리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교적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쓰는 성격인 것 같다. 문화출판국의 것은 선이 녹색이라서, 그런 의미에서는 약간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쿠가와 출판사의《더 텔레비전》집지를 들춰 보니까, 올림픽의 남자 마라톤 중계를 13일 아홉 시부터 한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마라톤 중계는 오다큐센 게이도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그렇긴 해도 대학 때 친구니까 벌써 서른여섯이다)의 집에 가서 보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침 일찍 중계를 하니까 통근 시간에 전철을 타고 지바에서 게이도까지 일부러 가기가 어렵다. 그런 연유로 근처의 전파사까지 찾아가서, 빌려 주는 텔레비전은 없느냐고 물어 보았다. "물론 있구말구요"하고 대답하길래 신바람이 나서 돌아왔다. 이것으로 준비는 완벽하다. 남은 것은 세코 선수가 분발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180도로 달라지는데, 월터 힐의 <스트리트 오브 파이어>의 포스터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판의 꺼끌꺼끌한 목판과 풍의 포스터는 굉장히 좋았는데, 일본판은 고상하지 않은 뒷골목의 로큰롤 영화 같았다. 그 영화는 만화같긴 했지만, 꽤나 재미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니시야마에게서 <고스트버스터>를 못 봤다고 하는 엽서가 왔다. 진지하게 취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8월 12일 (일)
오늘은 한꺼번에 편지를 다섯 통이나 썼다. 나는 정말로 편지를 쓰기 싫어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편지가 아직 열다섯 통 정도나 남아 있다. 죄송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이 일인지라 담배 한 대 피우고 편지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은 좀처름 들지 않는 것이다. 편지 쓰는 것보다 게임 센터에 가는 쪽이 더 즐겁고, 기분 전환도 된다. 그런 까닭으로 써야만 하는 편지가 자꾸만 쌓이게 된다. 예전의 유명했던 작가들은 대개 서간집을 내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 교양과 여유가 있었고, 게임 센터가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요소가 전부 거꾸로 된 것이 내 경우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며칠 내로 다시 헌꺼번에 편지를 써야겠다.
답장을 아직 못 받으신 여러분,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더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제비우스 게임 20만 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오락게임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오카 미도리 씨, 냉모밀 국수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기노시타 요오코 씨, 갓난아기는 건강합니까?
그런데, 드디어 올림픽이 하루밖에 안 남았다. 올림픽에 관해서 거의 언급하지 못한 채, 이 올림픽 일기가 끝나 가려고 한다. 그러나 내일은 대망의 남자 마라톤 대회가 있다. 올림픽에서 다른 종목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남자 마라톤은 중요하다. 텔레비전은 제대로 나오도록 세트되어 있으며, 차가워진 캔 맥주도 냉장고에 가득하고, 조깅화도 베갯머리에 갖다 놓았고(이것은 거짓말), 이것으로 준비는 오케이다. 말할 수 없이 기대가 크다. 내일 기다릴 수가 없어서, 저녁때 근처 운동장을 15킬로미터 정도 뛰었다. 내가 뛰는 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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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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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된 뒤 내각 구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선택할 때, 비서관에게서 어떤 사람을 추천받았다. 그 사람 이름을 듣자 링컨은 당장에 거절했다. 이유를 묻자 링컨은 말했다.
"나는 그 사람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이유였다. 그래서 비서관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 삶을 자신의 얼굴 생김새에는 책임이 없지 않습니까? 얼굴이야 부모가 만들어준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링컨이 말했다. "아닙니다. 뱃속에서 나올 때는 부모가 만든 얼굴이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얼굴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링컨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마흔 살이 넘으면 그대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얼굴은 그대가 살아오고, 사랑하고, 걱정해 온 모든 것의 종합이다. 그대가 행동해 온 방식, 관계해 온 것들이 얼굴에 모두 나타나 있다. 얼굴은 바로 그대의 자서전이다. 따라서 나이 사십이 넘으면 마땅히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예!
사람들은 하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새롭게 일어나게 된다. 또한 먹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먹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부정적으로 흐른다. 아니 마음의 가장 큰 기능은 아니오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을 주시해 보라. 하루에 예, 아니오라고 몇 번이나 긍정하고 부정하고 있는지를 헤아려 보고, 그 수를 늘려 가거나 줄여가라. 그러면 머지않아 조금씩 아니오에서 예로, 예에서 아니오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예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몇 번이나 아니오라고 말했는지 헤아려 보라.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계속한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밖에 나가 놀아도 되요?"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즉각 "안돼."라고 말한다. "밖에 나가 놀면 왜 안돼요? 뭐가 잘못이에요?"하고 아이가 고집을 부리고 짜증을 내면 그제서야 "그래, 그럼 나가 놀아라."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예라고 말할 수 있었는데, 예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나타나는 최초의 것은 아니오이다. 예는 거의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예라고 말해야 할 때에만 예라고 말한다. 주시하라! 우리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아니오는 떨쳐 버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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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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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9장. 다시 여는 내 인생
처세
다급하거나 화가 났거나 술에 취했을 때는 그 상황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때에 함부로 행동했다가는 그 상황을 면하고 나서 후회하게 된다. 다급할 때 (화가 났을 때, 술에 취했을 때 포함) 처신을 잘해야 한다. 사람의 진면목은 그 때에 드러난다. 우정은 시련에 의해서 시험받고, 인격은 다급함에 의해서 시험받는다. 다급할 때 이성을 잃지 않고 처신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진정한 인격이다. 다급한 상황을 슬기롭게 넘겨서 수많은 날 동안 얻어놓은 인격을 고스란히 보존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인격자이다. 다급하다고 해서, 화가 났다고 해서,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내가 다급하다고 해서 타인들도 다급한 것은 아니고, 내가 이성을 잃었다고 해서 타인들도 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실수로 말하고 행동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보는 타인들은 실수로 받아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본심이라 믿어 버린다. 평소에 인격을 닦아 놓아야 다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바르게 처신할 수 있다. 평소에 이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자제심과 본성(성질)을 짓누를 수 있는 인내심을 길러 놓아야 다급함의 시련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평소에 인격을 닦아 놓지 않으면 그 피해는 다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받는다. 다급한 상황이 닥치면 허망한 추태를 부려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만다.
삶의 자세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타인들을 가르치려 하지 마라. 내가 가르쳐야 할 지식보다도 그들로부터 내가 배워야 할 지식이 더 많은 것이 세상 일이다. 좋은 삶을 사는 방법 중의 하나는 평생을 학생 신분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을 한 단계 낮추고 타인들로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늘 배운다는 자세로 살아갈 때 매끄러운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다. 어설픈 지식으로 타인들을 가르치려 하고 훈계하려 하면 그들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타인들보다 나은 것도 없고, 타인들보다 가르칠 것도 없으면서 그들을 가르치려 하고 훈계하려 하는 데서 눈꼴 사나운 일이 벌어지고, 잘난 것도 없으면서 항상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는 꼴같잖은 행위를 하려 하는 데서 삿대질과 비난이 가고 오고 한다.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비난의 화살도 날아들지 않는다. 그에게는 언제나 타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 모여든다. 모르는 것을 성의껏 가르쳐 주기 위해서 모여들고, 친구가 되어 동행해 주기 위해서 모여든다. 하지만 자신을 높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여지없이 비난의 화살이 집중된다. 그의 주위는 도와주려는 사람들보다 헐뜯으려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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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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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 - 유시주
9. 신화와 역사 사이 - 미노타우로스와 에게문명
신화를 발굴한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발명이나 발견 또는 학문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우리는 뜻밖의 진실과 만나게 된다. 비전문가, 다시 말해 아마추어들이 빼놓을 수 없는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기를 발견한 갈바니와 에너지 보전의 법칙을 발견한 메이어는 의사였고 무선 부호를 창안한 모르스는 화가였다. 직업적인 전문가들은 잘 다니려 들지 않는 잡초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신천지를 발견하는 이런 열정적인 아마추어들을 마르틴루터는 일찍이 "이 세상의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이라고 표현했다. 그들로 하여금 전인미답의 오솔길을 헤매게 만드는 것은 돈도 밥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알고 싶어하고 밝혀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순수한 열정 이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이러한 위대한 아마추어 가운데서도 마땅히 첫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북부 독일 메클렌부르크 주위 자그마한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슐리만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신화와 전설, 동화같은 것들을 곧잘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가운데서 특히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트로이전쟁과 그것을 승리로 이끈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같은 뭇 영웅들의 모험담이었다. 일곱 살 나던 해인 1829년 크리스마스 때 그는 아버지한테서 <그림으로 본 세계사>라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그책에는 아이네이아스가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등에 업는 채, 불타고 있는 트로이 성을 빠져나오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어린 슐리만은 책속에 그려진 트로이의 거대한 성벽과 성문에 눈길을 빼앗긴 채 물었다.
이게 바로 트로이의 모습이에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지금은 모두 어디 있어요? 글쎄, 아무도 모른단다. 내가 어른이 되면 트로이와 왕의 보물들을 꼭 찾아내고 말거예요.
일곱 살 난 아들의 맹세에 가난한 아버지는 그냥 빙긋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슐리만은 호머의 서사시들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 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 위대한 아마추어답게 그는 오로지 순수한 열정에 의지해 자신의 믿음을 향해 돌진했다. 슐리만은 열네 살 때 식품점 점원으로 취직해 5년 반 동안이나 청어와 우유, 소금 같은 것을 팔았다. 그런데 미국을 여행하게 된 서른 살 때는 미국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대상인이 되어 있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3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되기까지의 고난과 시련이 어떠했는지, 또한 그것들을 이긴 그의 신념과 투지와 재능이 얼마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과 찬사를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가 모국어인 독일어를 합해 12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쓰고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슐리만은 1863년 드디어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매혹시켜 왔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에서 은퇴 하였고 몇 년간의 답사를 거친 뒤 1871년 마침내 트로이의 폐허 위에 첫 삽을 꽂았다. 그 곳은 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는 뉴일리엄이라는 마을이었다. 백 명의 인부를 동원해 3년여를 파들어간 끝에 슐리만은 원시 시대의 두 도시를 포함해 모두 9개의 도시를 발굴해 냈다. 폐허 밑에서 한 도시가 묻혀 있었다. 슐리만은 그중 밑에서부터 세 번째 층에서 불탄 흔적이 있는 견고한 성벽과 거대한 성문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는 그곳이 트로이의 유적이라고 확신했으며 실제로 거기서 왕관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금붙이들을 발견했다. 바로 그 유명한 프리아모스의 보물 이었다. (슐리만이 죽기 얼마전에 이 보물은 트로이 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시대의 것임이 밝혀졌으며 트로이 유적은 제 7층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하인리히 슐리만은 고고학사의 맨 첫장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에게 문명의 실마리, 황소 그림
신화를 역사로 편입시켰다는 점에서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 밖에 미케네 왕국의 왕묘를 발굴한 것도 슐리만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슐리만의 진짜 위대한 업적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슐리만은 트로이, 미케네에 이어 1884년 티린스를 발굴했는데 이 발굴에서 그는 미케네와 티린스 나아가서는 크레타와 그리스 동부 해안지역, 키클라데스 제도를 하나로 잇는 어떤 공통된 문명의 그림자를 감지했던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다스리던 황금의 도시이고 티린스는 헤라클레스가 탄생한 곳이다. 슐리만은 티린스에서 그때까지 발견한 것들 가운데 가장 웅대한 궁전의 기초벽을 발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궁전의 유적에서 발견된 도기와 벽화들이었다. 티린스의 도기들은 미케네에서 발견한 것들과 비슷한 특징들은 에게해의 다른 섬들, 특히 크레타에서 다른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도기들과도 비슷했다. 오리엔트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리고 티린스 궁전의 벽들에는 파란색과 노란색 띠로 둘러쳐진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푸른색 바탕에, 사나워 보이는 둥근 눈을 부릅뜨고 등에는 붉은 점이 있는 황소가 꼬리를 치켜들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황소 위에서는 한 남자가 뿔을 붙잡고 무용수가 도약할 때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티린스 발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 황소 벽화에 대해 슐리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일리아드 속에 나오는 유명한 마술사처럼 묘기를 보여주는 벽화를 보고 저는 그 황소의 등에 탄 남자가 안장 없이 타는 사람이거나 황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슐리만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이 황소 그림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유럽 최초의 문명-에게 문명으로 가는 문을 활짝 열어제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화를 발굴함으로써 스스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던 하인리히 슐리만은 1890년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아서 에번스의 크노소스 발굴
슐리만이 그 흔적만을 얼핏 보았을 뿐인 에게 문명을 완전히 알리는 데 성공한 사람은 영국인인 아서 에번스였다.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슐리만과 대조되는 사람이었다. 슐리만이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아마추어였다면 에번스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전문자였다. 그는 옥스퍼드와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고대의 상형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상형문자 해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크레타를 방문하게 되었다. 크레타의 자갈더미와 폐허를 돌아다니다가 그는 상형문자 해석에 대한 이론은 전으로 미루어 두고 삽을 잡았다. 크레타 총독의 표현을 빌리면 여기 저기 쑤시고 다닌 슐리만과는 달리, 에번스는 그후 25년 동안을 한 장소만을 팠다. 끈질긴 삽질 끝에 그는 마침내 버킹검 궁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크노소스 궁정의 유적을 발굴했다.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궁저의 1층 평면도가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그것은 미케네와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미케네나 티린스에 있는 궁전들에 비해 훨씬 크고 당당해서 크레타가 본거지이고 다른 두 지역의 성들은 그에 종속된 식민 도시의 수도였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궁전은 각 층마다 방과 복도, 홀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있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스 왕의 이야기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미로 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전문가인 에번스도 제우스의 아들인 미노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 둔 미로의 궁전을 발견했다는 다소 슐리만적 인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유물과 벽화가 계속 발굴되었다. 그런데 벽화 가운데 슐리만이 티린스에서 발굴한 그림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바로 두 처녀와 한 청년이 황소와 놀고 있는 듯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이었다. 미궁과 황소, 이 두 가지야말로 신화와 역사 사이에 놓인 가파른 사다리였다.
미노스와 미노타우로스
티로스의 왕 포에닉스에게 에우로페라는 외동딸이 있었다. 어느날 에우로페가 바닷가에서 시녀들과 놀고 있는데 잘생긴 황소 한 마리가 다가와서 에우로페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 황소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 에우로페가 등에 올라타자 마자 황소는 그녀를 크레타 섬으로 납치해 버렸다. 황소는 다름아닌 제우스였다. 이 둘 사이에 생긴 아들이 바로 미노스였다. 미노스는 장성한 뒤 의붓형제들과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가 제우스의 아들로서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니 부디 황소를 한 마디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반드시 신께 제물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청을 받아들여 흰 파도를 가르고 황소를 한 마리 보내주었다. 든든한 뒷배경을 과시한 덕에 미노스는 무사히 왕위에 올랐고 나라는 융성했다. 그러나 미노스는 그만 과욕을 부리고 말았다. 포세이돈이 보낸 신성한 황소를 다시 제물로 갖다 바치는 게 못내 아까와서 다른 소를 그 황소인 것처럼 속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 포세이돈이 미노스의 잔꾀에 속을 리 없었다. 진노한 포세이돈은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로 하여금 문제의 황소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둘 사이에 괴물이 태어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괴물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미노타우로스였다. 미노스로서는 차마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포세이돈이 또 무슨 형벌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노스는 할 수 없이 지상의 헤파이스토스 라고 불리는 장인 다이달로스를 불러 한 번 들어가면 신들도 나오기 어려운 미궁, 만든 사람도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미노타우로스는 그 미궁에 같혀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미노스왕의 애물단지인 이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사람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였다. 어느날 미노스의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열린 운동 경기에 참가했다가 황소의 뿔에 받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노스는 이를 빌미로 아테네를 공격했다. 그리고 평화를 맺는 조건으로 매년 7명의 처녀와 7명의 총각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던져주기 위해서였다. 아들 딸을 둔 아테네의 부모들은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때가 오면 자기 자식이 뽑혀갈까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때 왕자인 테세우스가 공물로 바쳐지는 다른 처녀 총각 사이에 섞여 크레타로 가서 그 괴물을 처치하고 오겠다고 나섰다.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반한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실 한 꾸러미를 주면서 자신이 실의 한 쪽끝을 잡고 미궁 앞에 서 있을테니 실을 풀어 가며 미궁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신화와 역사
슐리만과 에번스가 발견한 <황소와 춤추는 사람>은 사실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진 제물이었을지 모른다.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미궁의 유적은 미노스 왕의 신화에 일말의 역사적 진실이 묻어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B.C 5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테스는 미노스가 강력한 함대를 거느리고 오늘날 그리스에 속한 해역의 대부분을 제압했으며 키클라테스 제도 전역에 신민지를 건설한 전설적인 인물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실제로 에번스는 크레타에서 함대의 흔적을 찾아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발굴은 B.C 3000년부터 그리스가 성립한 B.C 1000년까지의 2천여 년간 지속된 에게 문명의 전모를 상당 부분 밝혀주었다. 에게 문명은 지리적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선진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 세계로 전승해 주었으며 그 중심은 크레타와 미케네였다. 크레타는 특히 B.C 16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에게해를 주름잡았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해 놓은 함대의 지휘자이며 바다의 통치자 였던 미노스라는 왕이 살았던 시기는 바로 이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크노소스 궁전 역시 이 시기의 것인데 크레타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50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궁전은 하수고와 환기 장치, 난방 장치, 호사스런 목욕탕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크레타는 B.C 1500년경 미케네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미케네는 B.C 1900년경 북방에서 내려온 인도 유럽어족인 아카이아인들이 세운 공동체였다. 미케네는 크레타와 교역하면서 그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나중엔 크레타를 제치고 에게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B.C 1200년경 철기 문화를 가지고 남하한 도리아인들(이들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다)에게 크레타와 더불어 멸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수수께끼
에게 문명의 주역이였던 미노아 문명(크레타 문명을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 흔히 이렇게 부른다)를 둘러싸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몇 가지 고고학적 숙제가 남아 있다. 그 첫 번째는 그토록 한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크레타 섬의 원주민들은 대체 어떤 종족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미노스가 그리스인이었다고 적어 놓았고 헤로도토스는 그렇지 않다고 적어 놓았다. 소아시아에서 온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지중해인으로 불리는 종족과 소아시아인의 혼혈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첫 번째의 의문을 풀어 줄 단서가 있긴 있으나 그 자체가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에번스는 크노소스에서 독특한 선상문자가 가득 쓰여진 조그만 점토판을 2천 개가 넘게 발굴했다. 1953년 영국의 건축가 마이클 벤트리스가 선상문자 중 일부가 그리스어의 초지 형태임을 밝히고 상당 부분 해독을 해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시 크레타인에 비해 훨씬 미개했던 그리스인의 언어가 어떻게 크레타에서 사용되었을까 하는 또다른 의문을 던져 주었다. 그 의문을 파헤쳐들어가기에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벤트리스는 불행히고 4년 뒤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미노아 문명의 최후를 둘러싸고도 아직 견해가 분분하다. 오랫동안 평화롭게 번영를 누렸던 미노아 문명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또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새로운 정복자가 침탈하더라도 대개는 기존의 문명 위에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기 때문에 앞선 문명이 하루 아침에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크노소스의 유적은 난폭한 가장이 내던진 밥상처럼, 짧은 순간에 박살이 난 형국을 하고 있었다.이를 두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무기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크레타인들보다 미개했던 도리아인들이 그 야만성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지진에 의한 몰락설인데 발굴자인 에번스는 후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크노소스의 유적지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과 비슷한 갑작스런 죽음 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미처 끝내지 못한 예술작품과 작업 중에 갑자기 중단된 듯한 현장, 그리고 밥을 짓다 파괴당한 부엌들이 그런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크레타 섬은 지진대 위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거나 간에 미노아 문명이 몰락한 이후 4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 고대 문명이 탄생했다. 4세기 동안의 이 암흑기는 왜 생긴 것일까? 미궁과 같은 이 의문점들을 속시원하게 풀어 줄 아리아드네의실은 어디에 있을까. 열정과 투지의 실타래를 들고 아무도 가지 않은 역사의 미궁으로 접어들 위대한 아마추어를 고대하며 그 첫걸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는 경구를 한 구절 읽어 본다.
인간으로서의 겸양을 배우고자 할진대 굳이 하늘의 별을 쳐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수천 년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수많은 문화 세계로 눈을 돌리면 족하다 - C.W. 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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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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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고문
두 명의 부인이 서점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봐요, 저기 "당신의 남편을 고문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다른 한 부인도 그것을 바라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그것이 필요없어요. 나는 내 자신의 체계를 갖고 있으니까요."
-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고문하는 자기 자신의 체계를 갖고 있다. 오직 고문과 파괴를 통해서만 사람은 사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
만수르라는 성자는 평생을 거지로 살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만수르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엔 그의 스승도 있었다. 이 스승은 깨달음을 얻진 못했지만 매우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사람들이 만수르에게 돌을 던지자 그 스승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뭔가를 던져야만 했는데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하고 장미꽃을 던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돌을 맞으면서도 울지 않던 만수르는 장미꽃을 맞자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돌로 치는 것보다 장미꽃으로 치는 것이 더 아프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 대중들은 살아 있는 부처를 존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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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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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43. 화약, 나침반, 인쇄술-심괄의 (몽계필담)(11세기 말)
송대의 3대 발명품으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꼽는다. 이슬람 세력을 통해 서양에 전해진 이들 과학적 발명품들은 서양의 근대사회를 재촉했다. 화약은 중세의 기사계급을 몰락시켰고, 나침반은 지리상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쇄술은 새로운 문화를 시민계급의 손에 쥐어주는 역할을 했다. 송대의 중국은 분명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문명국이었다. 자연과학, 인문과학 할 것 없이 과학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하고, 그것을 뒷받침으로 해서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다. 화약은 초석, 유황, 목탄 등을 혼합하여 만들어지는데, 이미 당초의 어느 도사는 이들의 배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물론 폭발력이 있는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한 연금술의 과정에 있었을 터이지만. 화약이 무기로 처음 사용되었던 것은 당말이었으며, 그 제작과 사용법이 널리 발달한 것이 송대였다. 1161년 남경 부근까지 남하한 금군과의 전투에서 폭발력이 강한 화약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는 종이로 만든 용기에 화약을 담아, 점화한 다음 손으로 던졌으나, 13세기에는 철제 용기가 출현하고, 통 모양의 용기에 넣고 정확히 조준 발사하는 장치가 발명되니 명중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화약은 13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에 출정한 십자군에 의해 유럽에 전달되었고, 유럽은 14세기 전반부터 화약을 제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중국에 나타난 서양인들의 손에 들린 화약무기는 옛 중국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위력이 강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자석의 원리를 알고 있었으며, 11세기에는 자침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것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는 송대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나침반의 제작을 이끌어냈다. 낮에는 태양, 밤에는 별을 기준삼아 원시적인 항해를 해왔던 항해기술이 급격히 진전, 원양항해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인쇄술이 급격히 발전했다. 송대에는 산업의 발달에 따라 문화층이 확대되고, 과거제가 정착, 수험용 참고서 등 서적의 수요가 크게 증대되고 있었다. 중국에는 일찍이 제지술이 발달하고 있었고, 제지업이 발달한 곳은 따라 인쇄업도 발달했다. 서적이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당말부터였다고 한다. 현존 최고의 목판인쇄물로는 우리 나라의 석가탑에서 발굴된 (무구정광 다라니경)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에 말들어졌다. 목판에 글자를 새긴 다음 반복해서 찍어내는 목판 인쇄술은 이처럼 불경이나 혹은 유가의 경전의 대량보급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한대 이래의 탁본의 원리에서, 혹은 도장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41년, 필승이 찱흙을 아교로 굳혀 최초로 움직이는 활자를 만들었다. 목판으로는 다른 책을 인쇄할 수 없는 데 비해, 활자는 철판 위에 글의 순서대로 배열하여 인쇄를 한 다음, 다른 책을 찍을 때는 또다시 배열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 글자의 수가 무수히 많다 보니, 활자가 널리 사용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송대에는 각 분야의 서적출간이 매우 활발히 일어나는 등 신기원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구양수의 (신당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있다. (신당서)는 (구당서)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 기전체의 전술이고, (자치통감)은 사마광이 19년간 편찬한 통사로, 편년체로 되어 있다. 송대에는 역사서술에서의 새로운 방법, 즉 사건의 본말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이른바 기사본말체가 출현했다. 금석학이 새로이 개척되어 구양수의 (집고록), 조명성의 (금석록) 등이 발간되었으며, 각종 지리서적들도 활발히 출간되었다.
송대의 과학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심괄이다. 11세기 왕안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그는 중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몽계필담)이라는 저술을 통해 당대의 천문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성과를 깊이있게 일괄하고 있다. 그는 자연관찰을 통해 고대에 있어서의 기후의 변동과 해륙의 변동을 추정해냈고, 각종 천문기계를 제작했다. 태양력의 사용을 주장했으며, 자침이 정남북을 가리키지 않는 것에 유의, 입체 모양의 지도와 천하도를 만들었다.
11세기 말의 소송은 의상대를 건설했다. 그 5층에 혼천의가 설치되고, 28수를 비롯한 각 성좌를 배치한 천구의를 설치했는데, 이들은 모두 수차와 물시계로 움직였다고 한다. 두헌이 나타나 수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당 중기에 등장했던 곱셈법이 발전했고, 0 이 발명되었다. 송자는 검시법, 사상의 판별을 포함한 당시까지의 법의학 지식을 총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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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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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 - 西施?目(서시빈목) 西(서녘 서) 施(베풀 시) ?(찡그릴 빈) 目(눈 목)
莊子 <천운편天運篇>에는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나온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서시가 가슴을 앓아 눈을 찡그리고 있으니, 그 마을의 다른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와서 역시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렸다(西施病心而 ,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 ). 그 결과 어떤 이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 이 이야기는 공자의 제자인 안연과 악관(樂官)인 金이라는 사람이 나누는 대화중에 나온다. 장자는 당시 주(周)왕조에서 이상정치를 재현하려는 것을 서시의 찌푸림을 본받는 추녀의 행동같은 것으로서 사람들의 놀림받는 쓸데 없는 짓이라 여겼던 것이다. 西施?目(서시가 눈을 찡그리다) 이란 아무런 비판 없이 남을 흉내 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며, 효빈(效? :눈쌀 찌푸림을 흉내내다) 이라고도 한다. 맹신(盲信)과 맹목적 추종은 그 추녀다운 사고 방식이다. 중요한 것은 유행에 민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주관(主觀)과 합리적 비판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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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말] 효빈(效?). [동의어]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 [출전]《莊子》〈天運篇〉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곧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의 비유,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本質)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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