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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84호
2010. 8. 19 (음7. 10)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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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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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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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의정부 문학 공모전 개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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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파카 만년필 수필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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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인문주간 “내 마음 속의 역사드라마” 시청감상 공모
“내 마음 속의 역사드라마”시청감상 공모전은 역사드라마를 통해 우리 역사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우리의 역사와 인문학적 상상력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역사와 드라마를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가 바랍니다.
- 공모전명:“내 마음 속의 역사드라마”시청감상 공모전 - 주최: 한국연구재단 - 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 후원: 교육과학기술부 - 공모내용: TV에서 방영된 한국역사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을 감상문 형태로 공모. - 접수기간: 2010년 8월 10일 ~ 2010년 8월 25일까지 (마감 당일 17:00시 도착분에 한함) - 결과발표: 2010년 8월 31일 15:00시 이후 - 시상내역: 선정된 수기에 대해서는 감사의 표시로 문화상품권을 지급해 드립니다. - 공모분량: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A4 3장 내외) - 접수방법: 공모전 양식지에 작성하여 e-mail로 접수 (hweek@aks.ac.kr 내 마음 속의 역사드라마 공모전 담당자) - 통보방법: 수상자 개별 통보
♣ 유의사항 : 가. 제출된 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선정작에 대한 저작권은 주최측에 귀속됩니다. 나. 이미 발표되거나 표절이 인정되는 글, 대리 작성 작품은 심사대상에서 제외되며, 선정 후에도 취소됩니다. 다. 응모시에 이름, 주소 및 연락처(전화 및 메일)를 정확히 기재재 주시기 바랍니다. 라. 선정작은 9월 13일 인문주간 개막일 발표집에 수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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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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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 - B.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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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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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
산스크리트어로 ‘붓다’인 부처. 부처는 석가모니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을 뜻하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고 한다. 한데 우리 눈 속에도 부처가 있다. 바로 눈부처. 누군가의 앞에서 그의 눈을 쳐다보면 그 속에서 자신을 볼 수 있다. 이를 눈부처라고 한다. 눈 속의 형상을 왜 부처라 했을까.
준말들
얘는 ‘이 아이’, 쟤는 ‘저 아이’를 줄인 말이다. 아이는 ‘애’로 줄어든다. ‘가랬지’는 ‘가라고 했지’, ‘간대’는 ‘간다고 해’, ‘보재’는 ‘보자고 해’, ‘놀재’는 ‘놀자고 해’가 본말이다. ‘보자고 했다’를 줄이면 ‘보쟀다’가 된다. ‘-ㄴ대’는 ‘-ㄴ다고 해’, ‘-ㄴ대서야’는 ‘-ㄴ다고 하여서야’, ‘-ㄴ다니까’는 ‘-ㄴ다고 하니까’가 줄어든 말이다.
엉덩이와 궁둥이
‘엉덩이가 무겁다.’ 또는 ‘궁둥이가 무겁다.’고 한다. 엉덩이와 궁둥이는 같은 곳을 말하는 듯하지만 좀 다르다. 엉덩이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엉덩이에 뿔 났다.’ ‘엉덩이춤을 추다.’에서 엉덩이는 궁둥이로 대체되지 않는다. 엉덩이는 허벅다리 뒤쪽 위부터 허리까지를 가리킨다. 궁둥이는 앉을 때 바닥에 닿는 부분이다. ‘궁둥이를 지지다.’
아파, 아퍼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과 흩날리는 낙엽…. 지나간 아픈 사랑, 슬픈 사랑을 되새기기엔 가을이란 계절이 제격이다. "못 다한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퍼"와 "마음이 아파" 두 표현 중 어떤 게 옳을까. 한글 맞춤법을 보면 "어간의 끝 음절 모음이 'ㅏ, ㅗ'일 때는 어미를 '아'로 적고, 그 밖의 모음일 때는 'ㅓ'로 적는다"고 돼 있다. 이렇게 두 음절 이상의 단어에서, 뒤의 모음이 앞 모음의 영향으로 그와 가깝거나 같은 소리로 되는 언어 현상을 모음조화라고 한다. 모음조화가 느슨해지면서 요즘 ''아퍼''라고 쓰는 사람이 많지만 인정되지 않는 형태이며 "민호는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처럼 ''아파''라고 적는 게 옳다.
한식 요리 띄어쓰기
김치.비빔밥 등 한류 바람을 타고 세계 속으로 파고든 한식 요리는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한식은 기본이 되는 밥.국.김치 외에 조리 방법에 따라 각종 무침.구이.볶음.찜.튀김.조림.찌개.전골.전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쌀밥.미역국.배추김치/ 시금치무침.생선구이.야채볶음.갈비찜.새우튀김.갈치조림/ 김치찌개.버섯전골.호박전' 등 그 재료가 조리법 앞에 붙어 요리 이름이 된다. 요리 이름 뒤에 붙는 조리법은 독립적인 한 단어다. 그러므로 띄어쓰기의 기본 원칙에 따르면 요리 재료들과 조리법은 띄어 써야 한다. 그러나 음식 이름이 될 때는 대부분 붙여 쓴다. 국어사전에 조리법 중 무침.구이.볶음.찜.튀김.조림의 경우 음식을 뜻할 때는 붙여 쓰라고 돼 있지만, 국.찌개.전골.전 등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이 경우 사전에 없는 단어는 띄어 써야 하나, 붙여 써야 하나? 예를 들면 소고기로 끓인 국을 '쇠고깃국/ 쇠고기 국' 중 어떤 표기가 옳은가? 또 사전에 한 단어로 돼 있지 않은 '야채 찌개, 김치 전골, 버섯 전, 쇠고기 산적, 김치 부침개, 오징어 데침, 두부 지짐이' 등은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국어사전에서 요리에 관한 통일된 띄어쓰기 원칙이 아쉽다.
두껍다, 두텁다
얼굴에 철판을 깐 듯 뻔뻔한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라고 한다. 출세에 눈이 멀어 권력자에게 온갖 아첨을 서슴지 않았던 중국의 왕광원이란 사람을 두고 "그의 낯가죽은 열 겹 철갑처럼 '두텁다'"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욕을 먹고 채찍질을 당하고도 웃어넘겼다는 왕광원의 얼굴처럼 '두께가 보통의 정도를 넘는다'고 할 때 '두텁다'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될까? 이때는 "낯가죽이 두껍다"고 해야 한다.
"모세혈관이 발달한 두꺼운 입술은 열대 지역에서는 체온 조절에 적합하지만 추운 지방에선 열 손실을 증가시킨다"처럼 물리적 두께를 나타내는 경우엔 '두껍다'를 쓰는 게 적절하다. '두텁다'는 "신임이 두텁다" "친분이 두텁다" "우정이 두텁다"와 같이 신의.믿음.관계.인정 따위가 굳고 깊다는 뜻이다.
"두터운 옷 하나를 걸치는 것보다 얇은 옷을 여러 개 겹쳐 입는 게 더 따뜻하다"처럼 '두껍다'를 써야 할 자리에 '두텁다'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두껍다는 "구름층이 두껍다" "지지층이 두껍다"와 같이 층을 이루는 사물의 높이나 집단 규모가 보통보다 크다, 어둠.안개.그늘이 짙다는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심정(心情)적 관계가 깊음을 나타낼 때는 '두텁다'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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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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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연어 - 박이화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하여 온 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기꺼이
射精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날 내 생에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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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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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 원용문
명함을 꺼내 보면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사람의 이력서가 석자[三字]속에 갇히고
보름달 떠오르듯이 떠오르는 얼굴 하나.
버리면 휴지 조각 간수하면 보물 상자
기억이 희미해진 안개 속을 헤맬 때
스스로
제 몸을 태운
외등처럼 빛을 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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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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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씨 - 최계락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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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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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홍결 - 그녀들은 예뻣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였나보다 지느러미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물속을 그렇게 유영하다가 낯선 바위틈에 몸을 누이고 뻐끔뻐끔 소리없이 세상을 부르네. 아가미 사이로 물방울들 내 뿜을 때마다 그 속에 갇히는 몸뚱아리 바라보며 그렇게 화석으로 굳어버린 물고기였나보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로 살아 깊은 잠, 깊은 어둠을 열고 이른 새벽 이슬처럼, 때론 안개처럼 슬며시 깨어나는구나. 지느러미 가득 세상을 품고 비늘에 부딪히는 아픔으로 흐느적거리며 취해가는 길, 취한 세상 속을 향하여 화덕 위의 뜨거운 불길에 온몸을 퍼득거리는구나
- 시 "길, 그렇게 살아가는구나"전문
그녀들은 예뻤다. 그렇다. 내 첫사랑은 복수였다. 첫사랑의 당혹감은 언제나 내 사랑을 늪에 빠뜨렸고, 그렇게 나의 사랑은 운명지워졌는지 모른다. 아마 철 지난 가을이었을 것이다. 이화여고 강당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공연을 단체로 관람하고 버스를 탔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만 음악감상실 구석에서 상념에 빠지며 시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 왠지 어색한 감정으로 일단의 여고생들 틈에 끼여 콩나물 시루처럼 버스에 뒤얽혔다. 얄궂은 설렘과 비릿한 냄새들, 그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그 틈바구니에서 무심결에 가방을 맡기고 이리저리 밀리며 봉긋하게 솟은 어느 여학생의 가슴을 느끼며 몇 정거장을 지나 한꺼번에 우리 남학생들이 내릴 때였다. 그때는 만원버스일 경우 창문으로 가방을 내려줄 때였으니까. 버스에 내려 가방을 건네받고 차는 출발하고, 우째 이런일이, 내 가방대신 남은 가방은 붉은 여학생 가방이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열고 확인할 수 밖에. 여학생의 가방을 열어보는 그 야릇한 감정이란. 무어랄까, 떨림보다는 황홀한 들킴이랄까. 가방속은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노트 몇 권, 도시락과 수건, 필기구와 한켠에 손수건에 말려져 있던 생리대. (이때의 추억이랄까 상처랄까 이후로 나는 생리대만 보면 자유를 휴대케 하는 성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수첩을 보았다. 그리고 연락,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하고 근처 제과점에서 나는 여학생 가방을 들고 그녀는 남학생 가방을 들고 우리는 그렇게 가방을 교환하기 위하여 만났다. 만남은 늘 그렇게 예측도 없이 예고편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시를 좋아하나 봐요." 그랬다. 당시 치기어린 문학소년의 가방에야 시집 몇 권과 책들뿐.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만났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작은 우산을 받쳐쓰며 빗물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던 날 왜 그리 가슴은 콩당거리는지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다시 쓰면서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하던 날들. 첫눈이 내리던 날, 수천 수만의 하얀 나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첫눈이 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만났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려 손을 맞잡고 구석으로 구석으로 사람들을 피해 우리들의 은밀한 공간을 찾아 배회했다. 문득 사랑의 공간을 찾아 헤매던 전후 독일의 연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내 청춘의 상상력은 그렇게 자라났다. 어둠에 쌓인 공원의 미끄럼틀 밑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그러다가 포옹과 짧았던 입맞춤. 입맞춤만으로도 세상은 그토록 눈부시게 나를 눈뜨게 했고, 그녀의 머리칼 위로 떨어지던 순백의 눈송이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사랑은 그 눈송이가 녹듯이 두 사란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어갔다.
추송웅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사보이 호텔 골목으로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돌아오던 겨울밤이었다. 열연하던 추송웅의 떨림을 가슴에 품고 걸어오던 밤길, 저며오는 기쁨에 쭈뼛거렸던 것은 비극을 향한 예감이었을까. 불현 듯 극장 입구에서 엄마의 치마끝자락을 잡고 칭얼대던 작은 계집아이(지금은 배우가 된 추상미이다.)와 봉숭아물을 들인 엄지발가락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렇다. 내 '복수의 첫사랑'은 그렇게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의 한켠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녀가 교복을 입고 다소곳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가방을 앞으로 모은 채 얼굴을 한쪽으로 향한 채 서있는 여학생의 모습. 아,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이제 중년의 나이에 서성이면서도 그런 정경과 마주칠 때면 술이 깬다. 아무튼 나는 그때 놀래켜줄 요량으로 슬쩍 뒤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세차게 감싸 안았다. 그런데 철썩, 불시에 따귀를 얻어맞은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할밖에. 더불어 경솔한 나의 행동이여! 그녀는 분명히 나의 첫사랑, 그리고 지난 몇 달간 나를 지탱해준 소영이였다.
"소영아, 나라구." "어머, 저는 미영이예요. 그런데 우리 언니를 어떻게 알아요?" "언니라니요?" "소영이는 내 쌍둥이 언니거든요." "뭐라구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당혹스러움으로 나는 미영이와 만났다. 밤길을 걸으며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그랬다. 어쨌든 나는 그녀와 똑같은 육체와 입맞춤까지 한 사이가 아니던가. 쌍둥이지만 미영이는 소영이보다 더 쾌활하고 재치가 있었다. 소영이가 수줍게 핀 패랭이꽃이라면 미영이는 코스모스 같았다. 그날밤, 명동성당 앞 언덕길을 몇 번이나 되풀이 오갔던가. 오랜 기다림의 만남처럼 우리는 그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비밀 하나를 만들었다.
"소영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일요일에 만나요."
성북역 대합실로 향하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자꾸 흘러내리는 배낭을 추스렸다. '처제와의 사랑'이랄까. 그런 상념으로 미영이와 나는 경춘선 열차에 올랐고, 객차 사이에서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부르고 어느 틈엔가 손을 맞잡고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사랑이 깊어갔다. 우리는 오랜 연인처럼 산을 올랐다. 함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면서 사랑은 그렇게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아니 같이 살기 위한 또는 같이 사는 것처럼 흉내내는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하고 느꼈다. 소주를 한 잔 마신 탓이었을까. 우리는 서로가 용기를 내어 나뭇등걸에 기대어 포옹을 하고, 길고 긴 입맞춤으로 서로의 만남이 불륜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었노라고 스스로에게 강변했다. 팔장을 끼고 걸어오면서 어깨 가득 쏟아지던 그녀 젖가슴의 체온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쌍둥이와의 사랑. 그 은밀한 날카로움의 끝에 서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었다. 몰래 훔쳐피는 담배처럼 두근거리는 떨림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방황해야 했다. 그리고 소영이에게는 '롯데', 미영이에게는 '테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 갈등의 바다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봐야 했고, 나누었던 말들과 약속들을 일기장에 적어가며 지속했던 만남은 운명처럼 짜릿했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예견되었던 파국, 나의 아련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었던 사랑의 넘침 때문이었을까. 전화를 걸 때에도 변성의 목소리를 사용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도 소영이에게는 펜으로 미영이에게는 타자로 쳐서 보내야 했고, 무엇 하나 작은 선물을 할 때에도 거의 비슷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소영이는 미영이에게 "내 남자친구 하고 니 남자친구는 취향이 비슷한가 봐. 그래서 우린 쌍둥이인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던 나날들 중 다음 해 겨울, 무려 1년이 넘는 줄타기 사랑의 끝은 미영이가 다니던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였다. 미영이의 권유로 나가던 교회. 철길 건너 언덕 위에 솟아오른 그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고등부 연극의 무대가 올랐다. 그랬다. 한편의 연극처럼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났다. 그야말로 연애를 하기 위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시간마다 곤혹스러웠던 나는 크리스마스 행사에 그 동안의 죄를 사하고자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하느님께 죄를 빌었다. '우리 구주의 힘과 주의 위로를 빌라.' 늘 이 소리를 읊조리며 어설픈 연극을 준비하고 드디어 막은 올랐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니 평생토록 (미영이의 교회 다니기 10여년 동안) 교회에 관심도 없던 소영이가 입시가 끝난 해방감과 그 지겹게도 많았던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작은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키우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을까. 소영이가 쌍둥이 언니의 무대출연을 축하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팸플릿과 교회 여기저기 붙어 있던 포스터에 박혀 있던 내 이름을 보았다. 그랬을 것이니 그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교회 한켠에 앉아 눈물로 그 연극을 보았을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으로 불행했던 아픔을 감싸려 했을 것이고 언니와 나를 용서해 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내가 미영이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다른 배우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연적들이 다정하게 맞잡은 손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격해졌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모두가 주의 찬양을 외치던 밤에 가출을 했다. 작은 메모를 남긴 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잊으려 합니다. 한때는 방금 전까지 사랑했던 사람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해야 할 미영에게' '그 여자는 이 한 마디 남겨두고 떠나갔다네, 무기들아 잘 있으라'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는 머리를 깍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싶었을까. 그녀가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친구에게 알렸고, 발칵 뒤집힌 그녀 부모의 집요한 탐문 끝에 그녀는 다시 집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대로 법당에서 의식으로 치르지 못했으나, 그녀의 완고한 아버지에 의해 머리를 잘렸다. 그랬다. 그 잘린 머리카락들처럼 우리들의 첫사랑은 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그날 밤 미영이는 나와의 짧은 통화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장난으로 시작했던 만남이 너무 큰 아픔이 되었어요.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소영이를 쳐다볼 수 조차 없어요."
그래 나 역시 어찌 더 만날 용기가 남아 있으리. 하지만 머리를 잘린 채 무너진 억장을 추스리고 있을 소영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진정코 내게는 사랑이었노라고. 다만 줄타기에 흔들렸던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그리고 언제 까지나 그 상처가 아물고 그래서 다시 나에 대한 사랑이 거듭날 수 있다면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진정이었다. 사랑의 경험이 없는 첫사랑의 실수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날을 기다리던 끝에 나는 소영이와 만났다. 그 제과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어색하게 물잔을 바라보며 곰보빵의 우둘투둘한 표면이 달이 아닐까, 저 달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렇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소영이를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나는 환영처럼 미영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에서 흔들리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이별의 말도 위로의 말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와 다시 실연의 아픔이야 있겠냐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그렇다. 이제 그녀들은 내 취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그렇게 남아 있다. 음치인 내가 최백호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들과 걸었던 길들, 그리고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그녀들의 입술 속에 나는 취한 몸을 이끌고 걸어간다. 그래서 언제나 내 사랑은 항상 흔들렸다.
홍결 - 196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학과를 다녔으며 '보는 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의 혁명'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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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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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사랑은 싸움?
구약시대에 유명한 노아의 방주에서 배 안에 있는 동안 사랑의 행위가 금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홍수가 끝나고, 온갖 동물들이 방주에서 쌍쌍이 줄을 지어 나갈 때, 노아는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수코양이와 암코양이가 나왔는데, 그들 뒤로는 수많은 새끼고양이들이 뒤따라 나왔다. 노아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자 수코양이가 말했다.
"당신은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 사랑은 일종의 싸움이다. 사랑은 곧 싸움이다. 싸움이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에너지는 바로 싸움에서 싹튼다. 그러나 사랑이 반드시 싸움이나 투쟁만은 아니다. 사랑은 그 이상이다. 사랑은 싸움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초월한다. 싸움은 사랑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사랑은 싸움이 끝난 후에도 살아남지만, 사랑은 싸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빈 배
헨리 포드가 영국에 갔을 떄의 일이다. 그가 공항 안내소로 가서 영국에서 가장 싼 호텔을 묻자, 안내원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헨리 포드는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유명함 사람이었다. 바로 전날 그가 온다는 기사와 함께 신문에 그의 사진이 크게 실렸었다. 그런데 그가 낡은 코트를 입고, 가장 싼 호텔을 묻고 있는게 아닌가! 안내원은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혹시 당신은 헨리 포드씨가 아닌지요? 나는 잘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사진을 보았거든요." "맞습니다." 안내원은 매우 놀랐다. 그래서 안내원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매우 낡은 코트를 입고 가장 싼 호텔을 찾고 계십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이곳에 온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는 최고급의 값비싼 옷을 입고 일급 호텔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헨리 포드가 말했다. "맞습니다. 내 아들은 아직 완숙해지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값비싼 일류 호텔에 묵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묵든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가장 값싼 호텔에서도 나는 헨리 포드이며, 그런 것이 나를 다시 만들어 내진 않습니다. 내 아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값싼 삼류 호텔에 묵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이 코트는 나의 선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입니다. 나는 새 옷이 필요없습니다. 내가 어떤 옷을 입든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또 내가 벌거벗고 서 있다 해도 나는 헨리 포드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 그대의 내면 세계가 진정으로 부유하다면 그대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교회에 갔을 때, 그대의 기도소리는 다름 사람들보다 조금 더 클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쇼맨쉽은 에고의 일종이다. 무엇을 겉으로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겉으로 드러내어 보여주기를 원한다. 그러면 거기 에고가 있고, 그대의 배는 비어 있지 않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빈 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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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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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목표 성취
목표 성취에만 골몰하여 과정을 소홀히 하지 마라. 행복은 종착역보다도 종착역으로 가는 도중에 더 많이 숨어 있다. 목표 성취(성공)에만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삶(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은 목표 성취만이 모든 고통을 보상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의 성취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목표 성취가 차지하는 부분은 그것의 성취를 위한 과정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목표를 성취한 후 환희의 시간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고통의 시간에 비하면 순간에 불과하다. 목표 성취가 곧바로 삶의 최종 목적인 행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모든 행복이 목표 성취 속에만 몰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좀더 자극적이 행복이 있기는 하지만 삶을 지탱해 주고 이끌어 주는 일상의 행복은 과정(일상 생활)속에 더 많이 숨어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전전하는 그 자체가 행복이고 보람인 것이다. 행복을 좀더 많이 느끼고 싶으면, 인생의 맛을 좀더 많이 느끼고 싶으면 과정에 좀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집을 사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면 돈을 버는 과정 자체를 행복하게 생각해야 한다. 행복은 집을 장만했을 때보다도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과정 속에 더 많이 숨어 있다. 열심히 번 돈이 저금 통장에 차곡차곡 쌓일 때가 정말로 행복한 것이다.
결혼
물질에 예속되어 결혼하지 마라. 부족한 것 없이 살면서 으르렁대고 끙끙대는 것보다는 좀 부족하게 살더라도 아기자기하고 화목한 것이 낫다. 사람 자체가 싫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결혼은 외모, 학벌, 재산, 가문 등의 조건이 좋다 해도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사람 자체가 싫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도 없다 사람 자체가 싫으면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도 지겹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겹고, 좋은 노래를 불러도 즐겁지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이 나지 않는다. 사람 자체가 좋아서 결혼하면 거의 실패가 없다. 사람 자체가 좋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즐겁고, 라면을 끓여 먹어도 꿀맛이다. 또 옆에 있으면 더욱 좋고, 떨어져 있으면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그런 결혼은 권태가 일 시간이 없고 언제나 신혼 기분으로 살아간다. 살아가는 형편이 문제될 리는 더욱 없다. 사람 자체가 좋으면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자도 불평 불만이 없다. 한집에서 살다 보면 정이 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조건에만 얽매여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정이란 붙는 정이 있고 떨어지는 정이 있어서 보면 볼수록 좋아지고 정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면 볼수록 싫증나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불행하게도 결혼 후 정이 들지 않는다면 그 결혼은 이혼을 위한 전주곡을 울린 셈이 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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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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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저자 : 슘패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
이책은 자본주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명제하에 자본주의는 기업가의 혁신에 의해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자본주의는 바로 그 발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되며, 사회주의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민주주의와 양립이 가능한 체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은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내용이 다르며, 오히려 슘페트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책의 장을 열고 있다.
기술혁신의 숭배자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슘페터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에서 출생했다. 그의 생은 만년의 18년 동안의 하버드 대학 교수생활을 제외하고는 굴절이 많은 인생이었다. 또 케인스와는 달리 초학파적인 연구성향 때문에 자신의 학파를 남기지도 않았다. 4살 때 부친을 잃은 그는 어머니가 오스트리아 군사령관과 재혼하는 바람에 일찍부터 귀족사회에서 생활했다. 빈 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한 후 처음에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학으로 전환하여 벰바베르크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개화기로서 비저, 필립포비치, 벰바베르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오히려 로잔 학파의 발라스의 영향 아래 골격을 형성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2세 연상의 영국 부인과 결혼하여 이집트의 카이로에 왕실고문 변호사로 부임했다. 이 결혼은 얼마 안 가 곧 파탄에 빠져 이혼하게 된다. 제1차 대전 직후에 오스트리아의 재무장관과 민간 은행장을 지내고, 1925년에 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2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7년에는 젊은 경제학자인 미국여성과 세번째 결혼했는데, 그녀는 깊은 이해와 따뜻한 애정으로 그를 뒷받침하여 슘페터의 만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저술활동으로는 25세 때 처음으로(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내용)을 집필했다. 무명의 슘페터는 이 저작의 발간으로 일약 오스트리아학파(빈 학파의 선구)의 젊은 세대 중의 선두주자로 부각되었다. 이 처녀작 발간에서부터 4년 후인 1912년 그의 창조적인 구상의 성과가 불후의 명저(경제발전의 이론)으로 나타났다. 이는 종래의 경제학을 정태적 순환의 이론으로 보고,그 위에 동태적 발전이론을 수립하고자 하는 획기적인 역작으로,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서의 기업가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특징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 발전의 담당자인 기업가가 도입하는 새로운 방안 즉, 기술의 진보, 생산조직의 개선, 신제품의 개발, 새로운 판로의 개척 등이 경제 발전의 동력이고,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것이 은행에 의한 신용창조라 했다. 이러한 중심적인 구상은 (경기순환론)에서도 계승되는데, 새로운 방안의 도입에 따른 창조적 파괴 가 경기순환을 일으키는 원천이라고 보고,이론적, 역사적, 통계적 분석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는 경제사회적인 고찰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기업가 기능이 쇠퇴하는 것과, 정부의 개입이 증대함에 따라 민간부문의 활력이 약화되는 요인도 함께 고려하여 독특한 자본주의 붕괴론 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사회주의가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비교체제론적인 분야에까지 시야를 넓혔다. 미국 이주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의 훌륭한 스승으로서 젊은 학도들에게 열정적인 지도를 아끼지 않았고, 경제학계의 지도자로서 바쁜 삶을 살다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슘페터의 지적 배경
슘페터는 케인스와 함께 근대 경제학의 최고봉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케인스의 이론이 거시체계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을 낳은 반면,슘페터의 경제학은 그 전모가 파악되지 않은 채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먼저 그의 저작이 다방면에 걸쳐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실 슘페터는 단순한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광범위한 사회과학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이전의 모든 학설과 이론을 계승, 종합하여 독자적인 이론을 창조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뵘바베르크, 비저를 출발점으로 하여 발라스의 일반균형 이론체계를 근본적 기초로 삼고, 마샬 빅셀의 보다 앞선 분석용구를 섭취해서 광범한 일반균형 체계를 이룩했다. 살아 있는 경제학의 권위자인 미국의 새뮤얼슨은 슘페터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고 말했다. 그는 광범한 문헌지식과 모든 학설이나 사상을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판단하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풍부한 역사감각, 그리고 훌륭한 예술적 감각 등을 완비한 그는 경제학사에 족적을 남긴 개개인에 대한 평전을 담은 (학설사 및 방법론사의 제시대)를 저술했는데,이는 독일어로 씌어진 이 분야의 역저다.그의 사후 편찬된(10대 경제학자)도 역시 경제학자의 평전에 관한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 이후 이론경제학계에서 그의 높은 지위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생애가 다할 때까지 항상 새로운 경제이론을 탐구하는데 소홀하지 않았고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파악함으로써 경제학 발전의 미래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론경제학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연구범위는 사회과학의 전반에 걸쳤으며 하버드 재직시 순수이론의 기수로서 계량경제학에서 수리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론에 적극적으로 대결했다. 그 당시의 성과가 다름아닌 필생의 대저 (경기순환론)이었다. 그것은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 자본주의 과정의 이론적, 역사적 통계적 분석 이며 그 안에는 그때까지의 그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의 성과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보다 대중적인 저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 예견서
본서의 핵심은 자본주의는 기업가의 혁신(inovation)에 의해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자본주의는 바로 그 발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몇몇 조건이 충족된다면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 사회로 형성될 수 있다 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러한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과 유사하게 보이나 사실은 크게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1부를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주요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학설비판
예언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분리되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경제체재이며,바로 그 때문에 생산력은 향상되나 생산관계는 악화되어 자본주의는 저절로 붕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마르크스의 논리는 자본주의 붕괴과정을 현실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빠진 것 같지만 또 다른 발전의 여지를 자체 내에서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야먈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는 부단히 발전해왔다. 철도와 발전소의 건설, 자동차나 제철공업 등 모든 새로운 생산활동은 카네기, 록펠러와 같은 기업이 끊임없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반복한 결과다.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자본주의,특히 미국의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이 없지는 않지만 발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물론 이런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독점기업이 생겨나며 이 독점의 경향은 흔히 동맥경화증 같은 증상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독점의 경향은 생산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이같이 자본주의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으나 결국은 붕괴될 체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있다. 첫째는 기업가 무용론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기업은 자본가의 천재적인 영감보다는 경영전문가의 전문성에 따라 운영된다.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은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둘째는 자본주의 수호계층의 몰락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중소기업은 파멸하게 되며, 이들은 자본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사유재산제도와 자유시장경제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부르주아 정당보다는 사회주의 정당을 선호하는 등 정치세력의 분포에서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셋째,소유와 경영이 분리됨으로 기업의 중역도 자신이 고용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기업가는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이윤을 배당받는 소유자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기업가들은 자본주의적 기질을 잃고 자본주의를 사수하려는 정열을 잃게 된다. 그러나 과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대체 가능성
사회주의란 생산수단과 생산과정의 운영권을 중앙당국이 쥐고 있는 체제로,경제 각 부분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시장경쟁의 메커니즘을 갖추지 못한 사회는 합리적인 경제운영이 불가능하고 모순 없는 정책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에서도 합리적인 경제운영이 가능하다. 사회주의에서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배재함으로써 비용의 낭비를 없애고 과잉생산 부분을 후생 부분에 이용할 수 있으며, 수입 원천을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조세를 폐지할 수 있다는등 자본주의보다도 유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 해도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가에 따라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은 큰 차이가 있다. 영국과 같이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여 사회주의화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어 있을 경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헌법개정이라는 점진적, 평화적 방법을 종원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반면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회를 통한 점진적, 평화적 방법보다 혁명적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이 경우로, 여기서는 노동지도자가 정부관청을 점령하고 강력한 혁명군을 동원, 사회주의를 이룩하게 된다.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점진적, 평화적 방법이 혁명에 의한 것보다 사회주의의 장점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장점이 많지만 이 장점은 비민주적 사회주의가 실제 존제함으로써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역사를 돌아볼 때 비민주적 사회주의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정치적 영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자유경제를 의미하며, 민주주의 자체가목적일 수는 없다. 즉 일종의 정치방식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반드시 최상의 방법이 아닐수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필요하며, 이런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이상화, 절대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수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체제를 철폐하고 (인민에 의한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도기에 한해서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는데, 바로 이 과도기가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회피할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도 근대 시민사회 이래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고 싶겠지만, 실제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관이 없다. 사회주의에서도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으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자본주의는 죽었는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의 소멸과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했던 슘페터가 오늘날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그의 사상으로 보아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첫째, 공산주의, 특히 스탈린 주의가 망한 것이지 사회주의가 망한 것은 아니다. 둘째, 아직도 자본주의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승리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내가 말했지 않는가. 이런 문제를 논할때는 긴 안목으로 보아야 하며 50년도 단기간에 불과하다고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논리다.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기업가의 기술혁신 이라는 창을 통해서 설명한 슘페터의 견해는, 자본주의 발전을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사망선고를 내린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물론 슘페터의 결론 역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멸망이지만. 그는 자본가들이 열정적인 기사처럼 행동하는 동안에만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는 체제로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추진력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감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그는 보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올수록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은 경제발전 자체까지도 자동 기계화하여 발전의 추진력인 기업가의 창조적 정신을 무색하게 만든다. 결국 그는 기업가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의욕을 잃게 되며, 그들의 관심도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게 되어 체제의 수호자들을 잃게 된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 체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이은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양자가 결합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그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장래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슘페터가 예견한 사회주의는 사회제도로서는 흥망이 있을 수 있으나,하나의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긴 생명력을 가지며 오히려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주의를 도울 수 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창조적 파괴의 끊임없는 강풍에 의하여 발전하는 경제체제이며 그 강풍이 멎으면 살아남기가 어렵게 된다. 그 강풍은 끊임없는 자유경쟁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는 안온한 체제가 아니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비정적인 체제다. 강자에게는 너무 많은 포상이 주어지고 약자의 몫은 너무 적게 주어지는 제도다. 따라서 이 제도는 어떤 다른 제도보다도 불평등을 가시적으로 만들어내는 체제다. 또 이 체제하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금전이기 때문에 황금만능의 천민적 가치관이 자리잡기 쉽다.이 두가지, 즉 강자와 약자 사이의 지나친 불평등과 건전한 가치관의 마모가 자본주의 약점이라 할수있다. 자본주의가 건전한 발전을 하려면 항상 이 두 가지가 시장원리에 보완되어야 한다. 불평등이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인 이념이 필요하며, 가치관 마모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철학이 자본주의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하거나 자본주의에 의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일종의 방부제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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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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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정리
뮬라 나스루딘이 죽었다. 누군가가 오후의 차를 마시고 있던 그의 아내에게 알리러 갔다. 찻잔은 반쯤 비워져 있었다. 그 사람은 말했다. "당신의 남편이 버스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물라 나스루딘의 아내는 계속해서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말했다. "세상에! 당신은 어쩌면 차 마시는 일을 멈추지도 않습니까? 당신은 내 말을 듣습니까? 당신의 남편이 죽었다구요. 그런데 당신은 한마디 말조차 않는군요." 그 아내가 말했다. "우선 차 마시는 일을 끝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서 나는 통곡을 할 테니 잠시 동안만 기다려요."
- 마음은 전시적이다. 그녀는 얼마 후에 통곡할 것이다. 다만 잠시 동안만 그녀에게 그것을 정리하고 계획할 시간을 주라.
비문
한 사내가 공동 묘지의 무덤 앞에 이르렀다. 그 무덤 앞에는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만든 비석이 서 있었다. 그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여기 위대한 법률가이며 연인이었던 사람이 잠들다' 그는 그 비문을 읽고는 소리쳤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두 사람이 한 무덤에 묻힐 수 있지? 연인? 위대한 법률가? 이건 말도 안 돼!"
- 사랑과 율법? 두 말은 그 자체에 모순이 있다. 율법은 결코 사랑일 수 없으며 사랑 역시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사랑은 자유이다. 반면 율법은 구속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될 수 없다. 그 둘을 함께 묶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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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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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2. 이백과 두보 - 귀족문화의 절정(8세기)
대당 제국의 영화와 몰락을 상징하는 시점에 현종이 서 있다. 그의 지배기에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장안은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모인 인종 전시장과 같았으며 당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제국 몰락의 서곡인 안사의 난이 일어났으며 당의 국력은 다시는 전과 같은 영화를 회복할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사랑과 그 비극적 말로를 주제로 삼아 몰락하는 제국의 쓸쓸한 황혼은 즐겨 노래했다. 현종의 이름은 이융기. 예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씨의 황실은 할머니 측천무후가 시작한 새로운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야망에 가득찬 여성들-중종의 비인 위황후, 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과 그들 뒤에 버티고 선 명문 구세력과 과거로 진출한 신흥 세력간의 갈등 등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마침내 위황후는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했다. 이때 25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예종을 복위시킨 실력자가 바로 현종이다. 황위를 계승한 현종은 실력자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타고난 총명과 정성으로 힘써 정부를 돌봐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번영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즐겨 시를 짓고 서역의 음악까지 흡수하여 음악을 작곡하는 등 에술적 감각과 재능 또한 뛰어났던 현종은 점차 정치에 싫증이 났다. 그는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정치를 도맡긴 채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비의 칭호다. 그녀는 백낙천의 (장한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구름 같은 머리카락, 꽃 같은 얼굴에, 눈동자를 돌려 한 번 웃으면 백 가지 사랑스러움이 생기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 궁중의 그녀의 경쟁자가 '뚱뚱보 계집'이라고 불렀다 하니, 그녀는 당삼채 도용에서 보는 것처럼 풍만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서는 고아 출신이었다고도 하고, 이백의 시에도 등장하듯이 당시 장안에는 서역의 미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니 그녀 또한 서역 계통이 아니었겠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본래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였는데, 현종은 그만 그녀의 미모와 훌륭한 가무에 정신을 빼앗겨, 급기야 그녀를 여도사로 만들었다가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고, 화청궁에서 환락에 젖은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시성 두보는 길을 지나다가 화청궁에서 벌어진 이들의 향락적인 주연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두보의 뇌리에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민중의 고달픈 삶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장안 네 거리에 굶어 얼어죽은 시체가 연상되었다. 그는 이를 (부자집엔 술 고기 썩어나는제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 널렸네)라는 당 두 줄의 세련되고 생동적인 시어로 표현했다. 또한 부의 원천이 농민들의 노동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궁궐에서 나눠주는 그 바단필은 가난한 여인들 짠 것이건만)
중국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는 모두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태백이라는 자로 더 유명한 이백은 두보보다 10살 위였고, 두 사람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삶과 시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명승지를 주유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던 시절을 서로 그리워했다. 두 사람은 모두 조국의 웅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했으며,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애국적 열망을 갖고 관계에 진출하여 조국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말단의 이름뿐인 관직에 올라, 백성들의 고통 치유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부패한 정계를 목도했을 뿐이다. 어느 날 이백은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회에 궁정시인의 자격으로 불려와 작시를 요구받았다. 굴욕감과 분노에 가득 찬 그는 당대의 유력한 권신인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백이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드높이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에 침잠하여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이백이 두보의 표현대로 '한 말 술을 마시면 곧 백 편의 시'를 짓는 격렬하고낙천적인 성품으로, 인생과 자연의 불가사의를 즐겁게 노래하는 도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는 데 비해, 두보는 '티끌만한 유감도 남길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전에는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 엄정함을 지닌 유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다. 흔히 이백을 시선으로, 두보를 시성으로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백이 부유한 상인의 가계에서, 두보가 빈궁한 관료의 가계에서 자랐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달과 술과 노래'로 지칭되는 이백의 삶은 사람들에게 그가 받아 온 사랑만큼이나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낳았다.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그의 사망에 대한 전설은 그의 이러한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보는 조국의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사실주의적 시안에서 그의 민중과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탁월한 시어와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와 함께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그는 귀족시인들에게 민중들의 처절한 삶과 사회적 모순에 관심을 쏟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이백은 구비문학과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온 낭만주의의 흐름을 급격히 고조시켜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립했으며, 두보는 시경과 악부 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장하여 사실주의의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당나라를 중국 시문학의 황금시대로 인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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