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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82호
2010. 8. 15 (음7. 6) / 발송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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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server@par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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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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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살림 문학상 및 살림 어린이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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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
현대시학은 신인작품을 다음과 같이 공모합니다. 역량있는 신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합니다. 현대시학은 이 땅의 시와 특히 새로운 시인들을 위한 정확한 향도를 자부해 오고 있습니다.
연 2회 공모에 의해서만 신인 등단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매년 1회는 3월 10일까지, 2회는 9월 10일까지 보내주신 작품에 한해 심사 선정된 작품(1~2명 각 5편 내외)만을 익월 각 4월과 10월에 발표 게재합니다.
작품은 10편 내외 직접, 또는 우편으로 현대시학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심사는 현대시학이 매회 새롭게 위촉하는 심사위원에 의해 엄정하게 실시합니다.
투고된 원고는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 110-776 서울 종로구 경운동 89-4 운현궁 SK 허브 101동 B-113호 . Tel : 738-7166 Fax : 738-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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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신라문학대상 공모요강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예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하여 새로운 민족문학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신라문학대상을 공모하오니 많은 응모 바랍니다.
1. 응모기간 : 2010. 10. 1 - 10. 31 (1개월간)
2. 부 문 : 가) 시(10편 이상) 나) 시조(10편 이상) 다) 소설(단편 200자 원고지 100장 내외) 라) 수필(5편 이상)
3. 상 금 : 가) 시 6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나) 시조 5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다) 소설 1,0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라) 수필 500만원 및 상패(당선작 1편)
4. 응모자격 : 국내외에 거주하는 동포로서 문단에 등단하지 않은 사람에 한함.
5. 응모요령 가) 응모된 작품 중 신라문화와 관계된 작품을 우선함. 나) 응모작품은 과거에 발표되었거나 현상 공모된 바 없는 순수한 창작이어야 함. 다) 응모원고 별지에 작가의 주소, 성명(필명일 경우 본명 표기), 전화번호를 명기하고 겉봉에 「신라문학대상 응모작품」이라 주서 할 것.
6. 당선자 발표 및 기타 가) 2010년 12월 중 일간신문에 발표하고 당선자에게 개별 통지함. 나) 당선작은 『월간문학』신년호에 발표하고, 한국문인협회가 인정하는 기성문인으로 대우함. 다)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당선작 발표일로부터 5년간 신라문학대상운영위원회가 보유하고 그 이후는 작가에게 귀속됨. 라) 응모작품 반환의 책임은 본회에서 지지 아니함.
7. 원고 접수 및 연락처 (우) 780-939 경주시 사정동 53-1 (서라벌문화회관 옆 예총회관 내) 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 사무국 ☎ 010-913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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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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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에 대한 공포는 위험 그 자체보다 천배나 무겁다. - P.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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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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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다
어떤 현상이나 상태가 이루어진다는 뜻의 ‘지다’. 보조동사일 땐 ‘-어지다’의 구성으로 쓰여 앞의 동사가 피동의 뜻을 갖게 한다. ‘말이 만들어지다.’ ‘여러 개로 나누어지다.’
동사의 동작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뜻도 갖게 한다.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처럼 믿어진다.’
형용사를 자동사로 만들기도 한다. ‘예뻐지다’ ‘슬퍼지다’.
‘넓다´와 ‘밟다´의 발음
넓다는 [널따], 넓고는 [널꼬], 넓지는 [널찌]로 발음된다. ‘넓-’ 다음에 자음으로 시작되는 어미가 오면 ‘ㄹ’ 발음이 난다. 모음 어미가 오면 연음이 돼 넓어[널버]가 된다. ‘짧다,여덟’에서도 이 규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밟다’는 뒤에 자음이 올 때 ‘ㄹ’ 대신 ‘ㅂ’이 발음된다. 밟고[밥꼬],밟지[밥찌]가 된다.‘밟아’는 [발바].
택도 없다.
새로 산 휴대전화를 부러워하며 농담 삼아 자기의 낡은 휴대전화와 바꾸자고 하는 친구에겐 어떤 말들을 할까. 아마 이렇게 응수하지 않을까. "택도 없어!" 이치에 닿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대꾸할 때 "택도 없다"는 말을 자주 쓰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턱도 없다"가 맞는 표현이다.
''턱''은 ''마땅히 그리해야 할 까닭이나 이치''를 의미하는 말로 "그렇게 착한 영식이가 친구를 때렸을 턱이 없다"처럼 주로 어미 ''~을'' 뒤에서 ''없다''와 함께 쓰이거나, "돈 많은 그가 그런 허드렛일에 관심을 가질 턱이 있나?"처럼 ''있다''와 함께 반어형으로 사용된다. 또한 ''턱''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늘 그 턱이다"에서와 같이 ''그만한 정도나 처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턱없다''는 "그는 턱없는 거짓말을 자주 한다"에서처럼 ''이치에 닿지 않거나 그럴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우승에는 턱없는 실력"에서와 같이 ''수준이나 분수에 맞지 않다''는 의미로 쓰인다. ''턱도 없다''가 ''턱없다''와 동일한 의미라는 걸 기억하면 ''택도 없다''라고 잘못 표현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걸리적거리다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조상님 묘소 벌초하는 것도 여간 큰 일이 아니다.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것은 차치하고,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는 일이 없다 보니 산소로 가는 길이 우거져 걸리적거리는 덤불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이 예사다."
위 글에서 '거추장스럽게 자꾸 여기저기 걸리거나 닿다'라는 의미로 쓰인 '걸리적거리다'는 잘못된 표현이다. "호칭과 높임말이 거치적거려 대화에 문제가 있다면 단순화하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처럼 '거치적거리다'로 쓰는 게 옳다. 이와 관련해 "앞에서 걸리적대지 말고 좀 비켜 줘" "배낭 위에 얹은 막대기들이 걸리적걸리적 전진하는 발걸음을 방해했다"처럼 '걸리적대다' '걸리적걸리적'으로 쓰는 것도 '거치적대다' '거치적거치적'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 '거치적거리다' '거치적대다'와 비슷하지만 말의 강도가 약한 말로는 '가치작거리다, 가치작대다' '까치작거리다, 까치작대다'가 있다.
요즘 화장이 늘고 수목장.자연장 등 봉분을 만들지 않는 장례 제도가 생겨나고 있다. 몇 세대가 지나면 거치적거리는 덤불을 쳐내가면서 힘들게 성묘 가는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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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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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여자 - 김종미
오뉴월 땡볕에 붉은 털스웨터를 입고 거리로 나온 여자 ‘그녀는 미쳤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그녀는 불탄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의 생은 발자국 하나하나 모두 사랑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생은 발자국 하나하나 모두 사랑의 끝이었을 것이다 바짝 마른 그녀의 몸뚱아리는 심지처럼 붉은 털스웨터 안에 꽂혀있다
오늘은 불타오르기 좋은 날
사랑하는 그 사람과 일 분 일 초도 안 쉬고 키스만 해야 한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과 일 분 일 초도 안 쉬고 섹스를 해야 한다면 그리고 죽을 수도 없다면
사랑이라는 지옥 속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남용한 혓바닥이 타오른다 타오르는 붉은 스웨터를 감고 타오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
나는 내 몸의 서랍 속에 넣어 둔 오래되거나 새로 쓴 연서들을 여자에게 하나씩 던져버렸다 내 입 속의 차가운 혀도 던져버렸다 30년 만의 폭염이 만물을 흐물흐물하게 물고 빠는 거리 사람들이 일제히 흐느적거리며 제 몸의 서랍을 털어내는 거리 시계탑이 서서히 녹아 흘러내리는 거리, 그리고 불타는 여자, 재가 될 수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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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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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세계 - 원용문
유리알처럼 잘 닦은 창공 나는 헬리콥터 그 유리 깨지는 소리 가을 하늘 찢는다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광장의 비둘기 몇 마리.
그 아래 원 그리며 맴을 도는 독수리 무슨 원한 그리 커서 공격 기회만 노리나 세상은 선도 악도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 아래 무엇에 취해 춤을 추는 잠자리 물 없는 허공에 떠 자유자재로 유영(遊泳)하네 삼차원 세계에서 보면 인간이란 존재도 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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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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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 보고야 - 권태응
멀리 떠나 보고야 알았습니다. 어머니 품, 가슴이 그리운 것을.
머리 떠나 보고야 알았습니다. 오막살이 내 집이 그리운 것을.
멀리 떠나 보고야 알았습니다. 내 고향 옛동무 그리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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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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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윤성근 - 시간의 고문을 이기기 위하여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잦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하리. 내가 그대를 앉은 자리에서 편찮게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작은 증거 오늘은 이미 날도 어둡고 이 어둠의 그리움조차 길을 잃었지만 아아, 나는 거듭 거듭 이 말 하고 싶네. 기다려야 하네 먼 길 가야 하네 바람부는 데 몸 상한 갈대처럼 누워서는 안되네. 시름겨운 저 강물 위에 맨발로 서야 하네. 가야하네, 비에 젖은 전신 풀내음으로 물들이며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야 하네. 목젖 깊이 신음소리 내뱉으며 헐은 입천장으로 사람의 말 뱉아놓으며.
- 시 "당신에게"전문
제이씨이, 처음으로 그대에 대한 글을 적기 위해 이런 제목을 달고 나니 실재했었고, 또 실재하고 있으며, 또 당분간(폐가 공기를 수용할 때까지)실재할 당신 혹은 너에 대해서 다소 불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시간은 그 홀로 완성되었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것은 흡사 4학년, 8학기를 마치면 그뿐이지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다시 대학을 다닐 수는 없는 것과 같지 않겠니. 하지만 그 무슨 호사취미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으랴. 다시 그 찢어진 필름을 이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아아 추억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을. 그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아는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고 나는 또 현재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전경 하나
그날 문리과 대학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신축교사의 무슨 상량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고 격앙된 사람들의 표정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그날 나는 당신 혹은 너를 보았다. 그러나 그저 보았을 뿐 사실 본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눌한 나로서는 그렇게밖에는 우리가 만난 순간을, 아니 정확하게 그대를 본 순간을 반추할밖에 없다. 하지만 그대를 본 순간이 어떤 하나의 영화 장면 같았을 리는 없고 그저 타는 봄볕과 진짜 영화의 몹신 같은 그런 허황한 어지럼증이 동반하는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알수 없이 휘몰아쳐 오던 1980년 초반의 정국을 닮은 것 같은 여러 학내 사정과 잦은 데모대로의 대오형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있었던가. 아, 나는 시청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었다. 그 위를 몇 사람의 발길이 지나간 후 겨우 대열에서 밀려났을 때 나는 당신을 언뜻 보았다. 처음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본다고, 그래서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당신은 또 당신대로 의경에게 두 팔이 거머잡힌 채 끌려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당신 쪽으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니고 퇴로를 찾으려다 어쩌다 당신과 함께 닭장차에 실려 경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물 위에 떠 있었어. 물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굽이치는 순환의 논리에 몸을 주고 엉켜서 비로 내리고 있었어. 구체적인 아스팔트를 구체적으로 적시며 그냥 숨죽여 있었어. 소탕당하지 않으려고 절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누워 있었어.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사람처럼 생각이 난 사람처럼 태어남은 죽음에 예비되어 있고 쓸쓸함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느껴졌던 것.
전경 둘
다시 그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목련 밑에 서 있었다. 그대는 자신의 어머니 말을 빌려 4월에 목련이 피면, 잎도 먼저 피지않은 것이 꽃이 먼저 벙근다고, 불길하다고 들려줬다. 그랬던 것 같다. 그래야 이 글을 계속 적을 수 있기에. 아마 처음으로 맞는 야유회에 주말을 낀 산행이었던 것 같다. '천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연일 신문들은 학살의 시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그리고 국방장관이 전방지역을 순시하다 지뢰를 밟았다던가 아니라던가 하는 소식이 숨가쁘게 들려오고, 그리고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그 여행의 한 끝에서, 그 치기와 불필요한 마음씀과 어둠과 그것들을 환히 찢어내는 캠프화이어의 불길 속에서 나의 사진은 인화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옷깃을 잡고 병나발을 불고 있고 또다른 한 손에는 보기 싫을 정도로 젖혀진 등산복 한 자락이 보이고. 다음날 나는 위벽을 날카롭게 갈라놓는 자각증상과 함께 눈을 떴다. 열려진 텐트의 한켠에는 그대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청춘의 날들이 거기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꿈 속에서 낯선 짐승이 되어 잘 모르는 도회의 한켠을 배회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함께 보고 있었다. 그 도시는 고관대작이 즐거운 도시오, 가진 배가 더 배부른 도시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갖지 못해 아우성치는 도시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 도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어(그 전부터 이미 되어) 우리는 어두워지는 성녘과 황혼의 거리를 예감처럼 술렁였다. 어쩌다 주머니에 두 사람분의 버스비만 있어도 행복했던, 적어도 행복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철 지난 바닷가를 걸었다. 가까운 항구도시의 어둠은 우리를 낯설게 감싸고 광포한 바다가 거기 있었다. 한 순간 해일이 일어 우리들의 가는 길을 막을 때 그때는 그 맞아섬이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이던지. 그래서 나는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워 물었던 것 같고 그런 나를 그대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눈으로 뜨악하게 올려다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손수건 한 장을 깔고 젖은 방파제의 한켠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서 나는 왜 그리 앞이 막막한 감정 속에 뒤척였던지. 아마 이럴 때 시인이라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배, 미쳐버린 바다 위를 떠도는 배 세상은 어두워져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리 사흘을 울고난 뒤, 나는 목이 쉬었다. 이해하라, 대책없는 삶을 그것이 비록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그래서 더 큰 어리석음을 부른다고 해도.
전경 셋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헤어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목죄여 왔고 우리가 결국 마지막 만나던 날. 나는 뒤돌아선 그대를 쫓아가다 차에 치일 뻔했고. 그때 대형 트럭에 치이지 못한 내 가슴은 더 큰 상처가 되어 오래 나를 불면으로 빠뜨렸고. 그날의 일들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잘 기억해낼 수도 없이 오래된 기억들을. 적어도 무슨 눈물바람을 하고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현실은 적어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오래 다니던 다방의 종업원은 먼저 차를 한 잔 가져왔고, 나는 자랑스럽게 '신동아'에 실린 내 시 한편을 꺼내 보였고. 빌어먹을, 무슨 무슨 말 같지 않은 말들과 그것보다 더 하잘것없는 오해가 증폭되어 나왔고, 고성이 오갔고, 상대에게 서로 상처줄 만한 말들을 찾으려는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의 순간들이 흘렀고 그리고 기어이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발화되었고, 물잔이 엎질러졌고, 그 물잔을 주으려다 찻잔을 쏟았고, 또 전화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걸려와서 잠시 불편한 침묵의 순간이 연장되었고, 그리고 나는 서울로 왔다. 그러나 마지막의 순간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이지. 어둠의 한갓진 곳을 태워 대지는 불타오르고 우리가 누으면 천장이 코 끝에 다가오던 최후의 야시장터 같은 그곳 해변의 집. 우리들의 몸을 간지르던 모래알들 사기그릇 같은 너의 가슴을 찌르며 쏟아지고 천국을 딛고 선 느낌이었지. 성냥곽 같은 해변의 집.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고 해가 뜨자마자 빨래를 내다걸었지. 우리들의 머리카락은 알맞게 소금향기를 풍기고 먼길 떠났던 사람들은 몸져 돌아오곤 했지. 아, 그러나 그대 눈떠 보면 지금은 '잔혹'이 불을 뿜는 시절 습지에선 앓아누운 풀들의 신음소리 로켓탄이 하늘에 시위를 매기는 이곳에서 나는 바라본다. 그리운 해변의 집, 그 모든 것.
전경 넷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 하나의 만남과는 무관한 삽화 하나를 제외하고는. 하숙집에 전화를 쓸 수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곧잘 S대학 구내의 공중전화를 이용하려고 저녁이면 외출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 삽화는 그날 이뤄진 것이다. 첫 번째 통화는 불발이었다. 그날 두 번째 통화는 아주 늦은 시간에 이뤄졌다. 지금 나는 술을 먹든 안 먹든 그것 때문에 별반 실수를 잘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아마 그대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은 것 같다. 그분은 내가 80년대초 어느 성당에 숨어있던 그대의 옛애인을 고지했다고 지금까지도 오해하고 있는 바로 그분이다. 상당히 고압적인 말들이 오간 후, 내 마음에도 이렇게까지 할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든 후에도 나는 무어라고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취직도 아직 못한 '나'는 그 무엇엔가에 상당히 양분해 있었던 것인데. 어찌 어찌 되어 당신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꼭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말들과 행동들이었다. 자신을 떠난 후 다시 나를 바라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고백하지만 그러고도 다시 통화가 이뤄지지 않은 전화를 몇 번이고 술에 취해 걸었던 건 나였다. 또 두서없이 씌어진 편지들은 어쩌구. 그때 나는 열병을 앓는 환자였고 당신은 나를 고쳐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여러 증상이 혼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를 고쳐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의사였다. 하여튼 몇 번이고 나는 수화기를 들고 아직도 직장을 구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쳤는데 어눌한 내 목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 을지로에서 정릉을 넘어가지 못하고(비끼어 가고)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영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다. 눈이 형편없이 나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전화도 편지도 쓸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사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또 그것이 내 자신이었으므로.
이제 나는 그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 잘 지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시절의 유일한 생존자다. 싫든 좋든 나는 귀환했고 이제 다시는 그대와의 지난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그대를 그날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현재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 모른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나는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지난 시절들이 점차 더 완벽한 형태로 잊혀져 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이라니, 그건 겪어보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고, 그 정도는 정직하다. 이제 이 글은 끝났다. 가슴이 얼얼한가, 아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윤성근 196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리 사는 세상', '먼지의 세상', '소돔성 1990', '나는 햄릿이다'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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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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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인간의 마음
옛날 중국의 위나라 임금은 미자하라는 소년을 특별히 귀여워했다. 어느 날 밤, 궁궐에 머물고 있는 미자하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다. 미자하는 일의 앞뒤를 생각할 여지도 없이 임금님의 명령이라고 속이고는 임금이 타고 다니는 마차를 타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그 당시 위나라 법에는 임금의 마차를 몰래 탄 자는 월형(발을 자르는 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전해들은 임금은 미자하의 효심을 기특하게 여기며 <미자하는 진정 효자로다. 어머니를 위하느라 발을 잘리는 벌도 달게 발을 각오였구나>하고 칭찬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미자하는 임금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면서 복숭아를 먹고 있었는데 맛이 어찌나 꿀맛이던지 다 먹지 않고 반을 남겨 임금에게 드렸다. 임금은 탄복하면서 <참으로 귀여운 녀석이구나. 맛이 좋은 것을 저혼자만 먹으려 하지 않고 내게도 나누어 주다니, 미자하는 어리지만 참으로 고운 마음씨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미자하의 귀엽던 얼굴빛이 시들고 임금의 총애도 날로 쇠퇴해 갔다. 어느 날 미자하는 아주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임금은 심히 노여워 하면서 미자하를 꾸짖었다. <너는 본래가 그런 놈이다. 일찌기 나의 마차를 내 명령이라고 속여 탄 일이 있었는가 하면, 네가 먹다 남은 복숭아를 감히 내게 먹인 일도 있었다> 그리고 임금은 미자하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을 명령했다.
- 인간의 마음은 이렇듯 수시로 들끓는다. 물에 바람이 닿으면 출렁이듯, 하늘이 개었다 흐렸다 하듯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 모두가 인간의 병든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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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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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8장 행복 무지개
대가
귀염을 받고 싶으면 먼저 귀염받을 행동을 하라. 얼굴이 예쁜 사람보다 귀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귀염을 받는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기 전에 내가 상대방을 이해해 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하기 전에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해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은 곡식만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도 마찬가지다. 받고 싶은 만큼 내가 행할 때 그 대가를 돌려 받는다. 상대방이 칭찬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상대방이 신임해 주기를 바라기 전에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상대방이 관심 가져 주기를 바라기 전에 관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면 그에 맞는 대가를 받는다.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도 있고,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내가 먼저 어떤 행위를 베풀어 주어야 상대방도 움직여 준다. 마치 내가 뛰어오르고 싶으면 상대를 먼저 뛰어오르게 해야 하는 널뛰기처럼,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하고,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면 상대방은 보너스를 추가해서 그 대가를 되돌려준다.
돈 씀씀이
돈 씀씀이를 가지고 흠잡지 마라. 돈을 물쓰듯 쓰는 것은 그만큼 쉽게 벌었기 때문이고, 돈을 지독하게 아껴 쓰는 것은 그만큼 어렵게 벌었기 때문이니까. 돈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돈 씀씀이도 크고, 돈이 적다고 해서 반드시 돈 씀씀이도 작은 것은 아니다. 돈 씀씀이를 결정하는 것은 돈의 상대적인 가치, 다시 말해서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돈을 버는 데 밴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액수라도 노력없이 얻어진 돈은 물처럼 흥청망청 쓰여지는 것이고, 많은 액수라도 땀이 듬뿍 밴 돈은 피처럼 금쪽처럼 아끼고 아껴서 쓰여지는 것이다. 돈 쓰는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돈 버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 등으로 노력없이 번 돈이나 정당한 땀을 투자해서 번 돈이냐에 따라서 돈의 가치는 차이가 나고, 당연히 돈 쓰는 방법도 달라진다. 졸부들이 돈을 물쓰듯 쓰며 사치 행각을 벌이는 것은 전자의 경우이고, 자수 성가한 이들이 수전노 소리를 들어가며서까지 돈을 아껴 쓰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쉽게 번 돈은 반드시 쉽게 쓰여지고 어렵게 번 돈은 반드시 어렵게 쓰여진다. 한 벌에 몇 백만 원하는 외제 옷을 선뜻 사 입는 사람들은 분명히 불로 소득자들이다. 피땀 흘려 돈을 번 사람들은 절대 그런 옷 사 입지 않는다. 사 입으라고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낸다 해도 절대 사지 않는다. 자신의 피와 땀이 밴 돈(노력)을 헛되이 하려고 하는 바보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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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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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 -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그람시가 옥중에서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에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가장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의 하나다. 외부로부터의 차단, 가혹한 감시, 자신의 건강상태 악화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그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실천활동인 지적 탐구를 계속해간 그람시의 글들은 그후 출간되어 현재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단했던 혁명가의 삶
잠시 타오르는 불꽃처럼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주역, 또 훗날 유로코뮤니즘이라는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창조적 사상가로서, 이른바 전쟁중에 활동한 유럽 공산주의 이론가 중 가장 두드러진 봉우리를 이룬다. 생애를 통하여 그를 지배했던 일관된 관념인 혁명운동은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함께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서 전체성의 개념을 강조한 루카치와 맥이 통한다. 그람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실로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으나,무엇보다 가장 치열한 초점은 선진 자본주의 내의 혁명과정에 맞춰졌으며 여기서 특히 이념적 투쟁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그람시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나뉜다. 제1기인 1918년까지의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사회원(PSI)의 당원으로서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사고를 성숙시키는 시기였다. 제2기는 1919~1920년간에 걸친 이른바 붉은 해 (red year)의 시기로서 튜린 시 공장위원회운동을 주도하며 (신질서) 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다음 1921년 말부터 26년에이르는 제3기는 그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한 후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당의 정책노선을 설정하고 코민테른과의 교섭에 바빴던 시기다. 다음 제4기는 1926년부터 37년 그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로서 옥중에서 어려움을 맛보며 그의 사상을 (옥중수고)에 옮겨 적는다. 그의 주저이자 네오 마르크시즘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은 이렇듯 그의 생활체험과 사상적 편력을 집약한 노작이다.
(옥중수고)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논의에 앞서 튜린에서의 공장위원회 운동에 투신하던 그 당시까지의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1891년 이탈리아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의 하나인 사르드니아에서 유복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말단 공무원으로 있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가 3살 되던 해 우연한 사고로 꼽추가 되었고, 키도 작아 152cm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잡혀가는 불행이 겹쳐 외롭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다. 허약한 몸, 가난한 집안형편 등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는 놀라운 정열로 독서에 열중했고, 튜린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한다. 이어 1916년 당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세계에 투신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서서히 대두되는 공장운영회 운동에 모든 정열을 불사른다. 당시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노동자을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므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노동조합에 불신을 표명했다. 그의 눈에 비친 노동조합은 관료적이며 엘리트 중심적일 뿐만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틀 속에서 움직이는 비혁명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혁명적 전환을 꾀하려는 그로서는 그 대신에 공장위원회를 중심개념으로 잡았다.
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노동자 대중의 의존적 태도를 보다 주체적 입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행정적, 기술적 기능을 비축하고 진정으로 생산과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노동자 국가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그는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람시는 공장위원회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축소판으로 인식한 것이었다. 그가 공장위원회 개념에 심취한 것은 실제로 이 조직 속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상화된 모습을 찾고자 한 것이었으나,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소비에트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뒤늦게 알면서부터 점차 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1920년 말 튜린의 위원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점차 파시즘의 위협이 높아지자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사회당을 떠나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건의 주역이 된다. 1922년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를 강화하면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당은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최악의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지도자는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의원인 자신까지 체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소 안이한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어 20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이 녀석의 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야 한다." 담당 검사의 말이었다. 1929년부터 그는 (옥중수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1935년 감옥에서 로마의 퀴시사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구하기엔 너무 늦어 1947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극한상황에서 집필된 옥중서신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살면서도 나는 무언가 몰입할 수 있고, 자신의 내적인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어떤 영원한 것을 쓰고자 한다."
그는 감옥에서 처형에세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주저인 (옥중수고)는 1929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동안 옥중에서 씌어진 것으로, 이 글에는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집필된 원고여서 전체적인 완결성이 부족하고 생략된 부분이 적지 않으며, 내용 또한 모호한 부분이 많아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이 애매한 것은 검열의 어려음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풀이된다. 이 책의 주요한 주제는 지식인의 역할, 헤게모니의 개념, 동서의 상이한 혁명전략으로 집약된다.
지식인
그람시의 사상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은 항상 중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종종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불린다. 마르크스가 지식인의 개념을 수공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에 준거하여 협의로 정의하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는 데 반하여, 그람시는 이 개념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개개의 사회계급은 그 자체로서 유기적으로 하나 혹은 둘 이상의 지식계층을 창출하는데, 이에 의해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계급의 동질성이 공고해지며 계급의식 또한 투철해진다." 고 설명한다. 좀더 부연하면 그는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구별한다. 전자는 스스로 사회계급과 무관하며 사회정치적 변동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역사적 계속성을 체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류로서, 문필가, 예술가, 철학자, 성직자 등을 일컫는다. 이들 전통적 지식인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산물인 데 반하여, 유기적 지식인은 보다 사회학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어떤 지식인이 얼마나 유기적인가를 측정하는 척도는 그가 속한 조직이 그 조직이 대표하는 사회계급과 얼마나 가깝게 연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유기적인 지식인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영역에서 그들 계급의 집단적 의식을 표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 그람시의 관심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이른바 성공적인 혁명운동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지식인과 그들의 계급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전자는 노동계급의 체험으로부터 그 자산을 얻어내는 동시에 후자에게 이론적 의식을 심어준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은 부르주아 계급에 비하여 매우 불리하다. 때문에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가 정말로 그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해내는 시기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에게 당은 계급과 가장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지식인의 조직이며, 따라서 집단적 지식인의 의미를 가진다. 당은 그 안에서 집단적 의지가 구체적 형태로 옮겨지는 유기체이자 사회의 복합적인 한 요소로 이해된다.
헤게모니 개념
그에 의하면 지식인의 주된 기능의 하나는 이념의 정당화 작업을 통하여 그들의 계급이 전체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 유지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다른 모든 세력, 특히 농민세력에 대하여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어 이들을 내적 갈등이 없는 동질적인 정치경제적 역사적 블럭으로 결집시키는 과정으로 활용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사회적 내지 이념적 제세력들이 사회변혁을 위한 잠정적 통일체와 연결이 되는 이른바 역사적 블럭은 그람시에 있어 가장 의미있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에 있어 역사적 블럭은 단순한 연합전선의 의미 이상의 것으로 이때 지배집단은 구체적으로 추종집단의 일반이익과 조정을 꾀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그람시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광의로 해석하여 지배계급이 그들의 군림을 위해 추종집단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을 그 안에 포함시킨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의 세계관이 지식인에 의하여 크게 확산되어 전체 사회에 상식화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통하여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살아남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왔다. 그는 이들 세계에서 힘과 동의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현상에 유의하며, 부르주아 언론기관(신문이나 결사체)을 통하여 문화적 헤게모니를 계속 행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한다. 부르주아가 어떻게 강제력 대신에 동의를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시킬 수 있는지 그는 분명 이 문제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을 꾀한 최초의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내재하는 경제결정론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며, 노동계급의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반 헤게모니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특히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경시하는 레닌주의적 전략은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통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꾀하기 전에 스스로의 주된 역할을 교육기관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하여 시민사회의 여러 영역에 반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를 손에 넣지 않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실로 무모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람시가 강제력을 전혀 경시한 것은 아니나, 그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에 의한 투쟁과 변증법적으로 연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서의 혁명전략
그람시는 동서간의 상이한 혁명전략을 비교하며 기동전과 진지전을 그예로 삼는다.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 적용할 수 있는 혁명전략은 진지전이며, 기동전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에 한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된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 관한 팜플렛을 통하여 서방세계에서 이론적으로 기동전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잘못이라고 공박한다. 경제적 위기가 혁명으로 치닫는 일반적 위기를 창출할 것으로 판단한 그녀의 관점을그는 경제결론적이며 자연발생적 관점이라고 공박한다. 더욱이 그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레닌의 기동전 전략을 서방세계까지 보편화시키려는 시도는 오류라고 설명한다. 그는 기동전과 진지전간의 차이와 연관하여 유기적 위기와 국면적 위기간의 개념분화를 시도한다. 예컨대 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불가능한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경우, 즉 유기적 위기의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동전은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국면적 위기상황에 몰입되는 서방 선진 산업사회의 경우 기동전은 고려될 수 없으며, 참호 속에서 장기전을 펴는 진지전만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적 계급 상승
이 책에는 통일국가 형성까지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지식인이 한 역할을 고찰하고 부르주아 지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여러 철학을 비판하며,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 피착취 계급의 의식 속에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서 그에 대치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그람시의 사상이 담겨 있다. 여기서 제시된 그람시의 지식인관, 헤게모니 개념 및 진지전의 전략은 이후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지적 유산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공산당이 기독교 민주당과의 화해를 꾀한 1972년의 이른바 역사적 화해 의 이론적 바탕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은 특히 모든 유로코뮤니즘의 이론가들에세 결정적 영향을 미쳐 스페인 공산당 당수인 카릴리오에 의하여 1978년 출간된 (유로코뮤니즘과 국가)의 내용 또한 그 본질적 맥락에서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재판에 불과한 것이다. 몇 년 전, 국가보안법이 젊은 자유와 이성을 구속하는 포승줄로 작용할 때만 해도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모택동의 (실천론) 등과 함께 금서의 목록에 끼어 있었다. 실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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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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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떨쳐버리는 방법
뮬라 나스루딘이 일곱 살 난 그의 어린 아들에게 소녀에게 접근하는 방법, 춤을 청하는 방법,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지, 어떻게 그녀를 유혹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나갔다가 삼십 분 후에 돌아와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그녀를 떨쳐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 불러들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떨쳐버리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기억하라. 쓸모없음은 그 자체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대가 쓸모없음 때문에 그토록 곤란을 받았다면 그대는 이제 지나치게 그 반대쪽으로 이동해 갈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대의 균형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은혜
몇 사람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아마 장마철이었던가 강은 홍수가 지고 범람해서 아주 위험했다. 그런데 작은 배가 위험 속에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들은 아주 아주 지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이 배가 우리를 구해 주었다. 우리가 이제 이 배를 버리고 간다면 우리의 구조자를 버리는 것이며 은혜를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배를 그들의 머리에 이고 마을로 가져갔다. 누군가가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배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이 배를 들고 다녀야만 할 것입니다. 이 배는 우리를 구해 주었고 우리는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그 지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실은 아주 우둔한 인물들일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머리 속에 수많은 형태의 배를 나르고 있다. 그대의 머리 속을 들여다 보라. 사닥다리들, 배들, 길들, 차들... 이것이 그대 머리의, 그대 마음의 내용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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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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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30.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 - 무주혁명(688년)
신라와 연합,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앞에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다른 하나, 무후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씌어 있지 않다. 이 비가 '무자비'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도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의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석들은 현재 섬서성 박물관의 비림 - 비석의 숲 - 에 옮겨져 있는데, 고종비는 여러번 부러져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후의 비는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측천무후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은 없다. 그녀는 현종의 할머니로 '개원의 치'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며, 무엇보다도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였다.
일찍이 중국사에서 들먹여지는 여성들은 대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혹은 (여자와 술은 가까이하면 안된다)는 식의 유교적 여성관에 적용되는 경우였다. 그녀들은 조비연처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라갈 듯이 가녀린 모습이거나, 양귀비처럼 풍만한 모습이거나 상관없이, 빼어난 미모로 왕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정치를 어지럽게 했다. 급기야 은이나 서주 같은 나라의 몰락 뒤에는 달기와 포사라는 여인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얘기되는 것이다. 때로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했던 여후나 서태후 같은 여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 아들의 뒤에서 섭정이라는 형식을 취해 왕의 후광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실력자로 부상, 고종과 함께 '2인 천자'로 불리었던 유례없는 예우에도 만족치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라 이름을 '주'로 정하고, 아들 예종도 자신의 성 '무'씨를 따르게 했다. 이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 그녀의 아버지는 고조의 거병에 협력했던 지방의 목재상이었다. 그녀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이름없는 궁녀로서 궁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타고난 미모와 총기, 당당한 자태로 곧 태종의 눈에 들어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뒷날 고종이 된 태종의 9째 아들 이치는 일찍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아버지 태종이 죽은 다음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었다가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했다. 소의가 된 그녀는 소숙비, 왕황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가 32세. 말단의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측천무후였다.
고종은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극히 평범한 인물로 왕의 재목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는데, 바로 이 점이 구귀족들의 눈에 들어 황제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신구귀족의 균형 속에 강력한 황권을 구사했고, 구귀족들은 항상 이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황후 소생의 세 아들 중, 첫째는 동성애를 이유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태종을 닮아 매우 유능하고 야망에 차 있던 둘째를 제치고 이치가 바로 범상하는 이유 때문에 즉위하게 된 것이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의 지병인 간질병을 이유로 정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정치력으로 차츰 고종을 능가하여 최고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구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감행했고, 과거출신의 능력있고 한미한 가문의 개인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 국력을 신장시켰다. 최근 낙양의 당 유적을 복원하던 중, 성 밖의 함가창성 유적에서 수백 개의 땅 속 움막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곡물 저장창고로, 낙양은 대운하를 통해 들어온 강남의 미곡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비축곡량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의 집권기였다. 이것으로 중국 역대왕조의 숙원 사업이었던 고구려의 정벌도 이루어졌으리라.
그녀가 말년에 다른 남성 황제처럼 이성 편력도 하고, 도가에 기울어지는 등 혼미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황제로서의 그녀의 역량은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폐위시킨 그녀의 야심을 추하게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폐출 시키려 했던 고종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권신들도 속수무책, 그녀가 빨리 노쇠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705년 재상 장간지 등은 와병중인 그녀를 핍박, 중종을 다시 복위 시킴으로써, 다시 당왕조는 복귀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82세. 이후, 중종의 황후인 위씨 등이 그녀를 흉내내어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으나, 그 꿈은 다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여황제의 군림은 전통적 한족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 당 제국의 황실에 유목민족의 혈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수 양제나 당 고종이 아버지의 비를 취한 것, 도용에 보이는 기마 여인상, 나아가서 제국의 개방적인 문화등도 이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실제로 수, 당의 황실은 북조의 명가 출신으로 순수 유목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관농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천진을 동향으로 하고 관농지방, 즉 위하 유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 무천진은 선비족의 왕조였던 북위의 토착 엘리트들의 거점인 6진의 하나였다. 이들 관농 집단의 시조격인 인물은 서위의 우문태로, 그의 자는 흑달(검은 수달), 선비화한 흉노계의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문각은 마침내 정권을 탈취, 북주를 창건했다. 재미있는 거은 우문태의 협력자로 선비족 최고의 명가를 이룬 독고신이란 존재인데, 그는 장녀를 우문태의 장남에게, 4녀를 북주 최고의 명가인 이병에게, 7녀를 대장군 양충의 아들 즉, 수 문제 양견의 황후로 줌으로써, 북주, 수, 당 3대에 걸친 외척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병의 아들 이연이 바로 당 고조이니,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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