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홍세화 에세이 (한국의 지식인에게)
프랑스에서 본 <제3의 길>
1. 혼돈의 시기와 '제3의길'
'책과 사회' 라는 관계에서 볼 때, 어떤 책은 담고 있는 내용보다 출간 배경과 그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제3의 길>이라는 책이 그런 것에 속한다. 한국은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고', ;세계 최신'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 같다. 영국인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라는 책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번역 출간되었다. 영어 다음으로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인데, 책의 제목인 '제3의 길'이 영국 수상 토니 블레어의 정책기조 이름으로 이미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초' 라는 그 신속성이 자못 놀라웠는데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이 번역에 참가했다는 사실도 나를 자못 놀라게 했다. 그 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 과정의 네 사람이 번역 일을 성심껏 도와주었다"는 옮긴이의 말 또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번역 일을 성심껏 도와주었다"는 얘기인지 그 속사정을 나로 선 알 수 없는 일이었고, 따라서 가뜩이나 집필을 대신 해주고 번역도 대신 해주는 풍조가 만연된 사회에서 정신문화연구원장까지 그런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는 것 같아 실로 답답했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은 '정신문화' 라는 무게로 보아서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그런 풍조에 반대하는 전범을 보여주어야 했다.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아직 프랑스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독일에선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서문을 쓴 독일어 번역판이 지난 3월에야 나왔다. 그 출판 기념일이 오스카 라퐁텐 독일 재무장관의 사임과 때를 같이 하였던 게 꼭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평판을 들었던 사회민주주의자가 제3의 길목에서 쫓겨난 셈이라고 말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심상치 않은 일에 대하여는 나중에 논의하기로 하고, 한국의 정신문화연구원장도 슈뢰더처럼 한국어판에 서문을 쓰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의 땅에 살고 있는 한낱 서생의 잘못된 판단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어 번역 작업에 누구보다도 빠졌어야 할 사람이 한국의 정신문화연구원장이었다. 한국의 '정신문화 연구'를 책임지는 사람이 할 일은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중에, "<제3의 길>을 한국 사회에 연관시켜 탐색해 보겠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서구 중심적 사고를 경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라고 썼다. 그런데, 세계 최초가 되게끔 번역을 서둘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서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자기모순, 혹은 거북스러움을 메꾸기 위함이었는지 한국어 번역본의 책 날개에서 앤서니 기든스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그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은 이미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우리 시대 유럽 지성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우리 시대 유럽 지성의 쌍벽이라. 추켜 세우기도 이쯤 되면 세계 최상이라 할만하다.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최근 4월호에 앤서니 기든스라는 이른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 이냐시오 라모네는 앤서니 기든스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보도 홈바흐(Bodo Hombach)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의 교주가 앤서니 기든스라면 슈뢰더가 추구하는 '새로운 중도(Neue Mitte)의 뒤에는 (라인베스트팔렌 주의 경제장관이며 '새로운 선택'이란 프로그램 책자를 쓴) 보도 홈바흐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 한국에서 <제3의 길>은 인기 있는 '상품'이 되었고 인기 있는 '길'이 된 것 같다. 프랑스에서 내가 들은 풍월에 의하면, '제3의 길'이란 고작해야 '인간의 얼굴을 한 대처리즘'이고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관철 형태일 뿐이라는데, 한국의 신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안 신자유주의와 대처리즘을 공박해 마지 않았던 비판적 지식인들까지도 쌍수로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제3의 길>은, "관용과 연대의 정신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 과감한 기획 정신"(교수 신문)이고, "혼돈의 시점에서 자기 혁신과 개혁의 에너지를 모아주는 희망의 담론"(성공회대 조희연교수)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한국을 위한 이념적 패러다임 모색에 대한 중요한 함의"(연세대 김호기교수)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그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총풍과 세풍, 그리고 지역풍 등 각종 바람과 관련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까지도 '제3의 길'을 말하고 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점인 게 분명하다.이냐시오 라모네는, '오늘의 우익'이 된 "사외민주주의는 이론적 공허함과 기회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를 귀화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받아들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공허함과 기회주의로 신자유주의의 귀화를 설명했는데, '제3의 길'로 신자유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앤서니 기든스가 들으면 실로 서운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라모네의 말이 옳다면, '제3의 길'에 매력을 느끼는 이회창씨가 '제3의 길'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보다 훨씬 더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한국의 교수사회의 코포라티즘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처럼 혼돈의 시기에 더욱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제3의 길'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제3의 길'에 대하여 프랑스에서 나온 얘기들은 한국에서 벌어진 것들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토론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에 있다. 즉, 이 글은 '제3의 길'에 대하여 내가 프랑스에서 읽고 들은 것을 대충이나마 그대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혼돈에 혼돈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토론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쓴 것이다.
2. 프랑스에서 본 <제3의 길>
<제3의 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우선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논쟁이나 신자유주의 대응에 관련된 논쟁 이전에 영국을 바라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눈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앤서니 기든스도 이런 시선을 느끼고 있는지 짧은 서문에서 언급하였는데, 유럽의 대륙인들에게, 특히 프랑스인들에게 영국인이 주창하는 '제3의 길'은 별로 새로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영국이 택하는 길은 언제나 '제3의 길' 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즉, 미국도 아니고 대륙(유럽)도 아닌 '제3의 길'이다. 영국은 유럽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여, 지리적으로는 유럽에 있지만 언어가 같고 또 같은 앵글로 색슨이라는 조건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미국에 더욱 가깝다. 신자유주의가 미국과 영국에서 함께 만발하여 제1세계 중에서 가장 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최근에 이라크를 폭격할 때에도 유럽에서 오직 영국만이 미국에 동참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영국은 지정학적 및 문화적 성격에 의하여 오래 전부터 유럽도 미국도 아닌, 또는 미국이면서 동시에 유럽이기도 한, 그런 길을 걸어 왔다. 이 점을 일찍부터 간파한 사람이 드골이었고, 그래서 그는, "영국은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의 목마"라고 갈파했다. 그의 말을 통하여 우리는 프랑스가 영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드골은 유럽연합의 전신이었던 유럽경제공동체 건설에서도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과 손을 잡았던 반면에, 연합국이었던 영국을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드골이 물러난 뒤에야 영국은 경제공동체에 가입할 수 있었는데, 영국은 영국대로 항상 양다리 걸치기, 즉 유럽 대륙과 미국에 한 다리씩 걸치는 영국식 '제3의 길'을 택해 왔다. 오늘도 영국은 유럽연합의 단일통화인 '유로' 가입을 보류한 채 눈치를 살피고 있다. 즉, 유로가 잘 나가면 가입하고, 아니면 가입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적인 '제3의 길'을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영국과 유럽 대륙 사이의 관계 위에서, 프랑스인들은 앤서니 기든스도, 토니 블레어도 영국민이라는 한계를 지니며 그들의 '제3의 길'이란 결국 유럽 대륙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니면서 기존의 영미식 신자유주의도 아닌 '영국의 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제3의 길'은 특히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신노동당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제3의 길'을 '인간의 얼굴을 한 대처리즘'이라고 말하고 있는 배경이 이것이다. 또 조스팽 수상이 서로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인 토니 블레어에게, "너의 제3의 길이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소련식)국가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것이라면 나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한 배경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한국어판 옮긴이의 말 중에 나오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제3의 길'을 표방하는 중도 좌파 정부가 집권한 상태"라고 쓴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적어도 프랑스는 그 리스트에서 빼야 한다. '제3의 길'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프랑스 좌파연합 정권의 그 누구도 드러내놓고 '제3의 길'을 표방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다. 프랑스에서 '제3의 길'을 말했던 사람이 있다면 우파의 자크 시락 대통령 한 사람 뿐이었다. 프랑스 민중은 신자유주의와 정면으로 투쟁하여 승리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1995년 당시 우파의 알랭 쥐페 수상은 사회보장 적자를 물이겠다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 공공부문노동자들에 대한 사회보장 감축 안을 내놓았다가 노동자들의 강한 반발과 시위에 부딪쳐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알랭 투렌, 자크 쥘리아르, 알랭 맹크 등 생 시몽 재단을 중심으로 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쥐페 안을 개혁안이라며 지지했었다. 반면에, "신자유주의가 유럽 문명을 파괴하고 있다"고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피에르 부르디와를 비롯, 비판적 지식인들도 들고 일어났다. 나중에 피에르 부르디와파는 쥐페 안에 동의했던 기득권 좌파지식인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든스가 <제3의 길>에서 프랑스의 사상가(?)라고 인용한 사람은 알랭 맹크 한 사람 뿐이다. 알랭 맹크는 사상가가 아니라, '행복한 세계화'를 주창했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이다. 이 점에서도 영국과 대륙 사이에 간극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앰서니 기든스는 알랭 투렌, 자크 쥘리아르 등의 기득권 좌파 지식인과 가까운 사람이며, 그의 '적극적 복지사외'등의 주장들도 이미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 앤서니 기든스 본인의 프랑스에 와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살펴보자. 일찍이 한국을 방문하여 대단한 환영을 받았고 같이 사진 찍고자하는 정치인들의 성화에 쫓기면서 즐거운(?) 비명마저 질렀다는 그가 영불해협 건너편인 프랑스에는 금년 2월 25일에야 왔다. 나는 여기서 프랑스와 앤서니 기든스가 어떻게 만났는지를 한국의 독자들이게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르몽드 3월 2일자 기사를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 기사는 르몽드의 경제면이 아니라 부록물의 하나인 경제 섹션면에 났는데, 그래서 나는 자칫 그가 프랑스에 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넘어갈 뻔했다. TV에서는 물론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의 길인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인가 (대륙의)조파들에게 토니 블레어는 황당하거나 성가신 존재이다. 어쩌다 매력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제3의 길', 그리고 실업율이 6%밖에 안된다고 우쭐대는 나라에서 시장과 사회정의를 화해시킨 기적적인 해법을 찾았다고 폼잡는 그의 모습이 대륙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케케묵고 경직된 사회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아직 우리들과 한 가족이긴 한 건가?", "이 이상한 동물을 어디에 분류해야 하지?"라고 대륙의 사회민주주의 동료들은 쑥덕거리며 자문하고 있다. 그래서 파리의 솔베리노 거리에 있는 프랑스 사회당사에는 '(프랑스)사회당-(영국)신노동당 비교를 위한 고찰 자료'라든가,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적 분석' 따위의 글들이 내부회람 형식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재들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구해준 사람은 희한하게도 프랑스의 기업가였다. 2월 25일 목요일 저녁에 영국 수상의 교주인 앤서니 기든스가 도버해협을 건너왔다. 1826년에 경제적 자유를 촉진시키기 위해 설립된 클럽인 저명한 <정치경제 협회>의 회원들 앞에서 '제3의 길'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엄선된 인사들로 구성된(그 중에는 시락대통령의 경제고문인 장 프랑수아 씨렐리도 끼어 있었다) 청중 앞에서 기든스는 제목조차 '제3의 길'인 최근 저작의 내용을 하나하나 요약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국가는? 국가는 기업에 적용되는 효용성의 기준에 따라 개혁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는 정부와 기업간의 대화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어야 한다. 경제정책은? 국가의 역할에 관한 논쟁에서 사기업화(민영화)/국유화에 관한 질문은 이미 과거의 얘기다. 시장견제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국가의 개입은 규제·탈규제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 또 예컨대, 외환시장의 최대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전세계적인 차원의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좌우의 충돌 마지막으로 복지국가에 대하여 : 이것은 현재까지 보험과 구제의 메커니즘으로써 고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회계약, 즉 각 개인이 희망하는 보장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감수해야할 위험 부담과의 관계를 고려한 계약을 설정해야 한다. 기든스는 (발표를 마치고) 총괄 비평을 맡은 첫 번째 토론자에게, "당신이 나를 산산조각 낼 것으로 생각되는군요"라고 말했다. "아니, 천만에요. 나는 당신의 책에 매료되었습니다." 첫째 토론자가 대답했다. 그는 다른 사람 아닌 프랑스 기업운동연합회(Medef,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의 부회장인 드니 케슬레르였다. 기대했던 좌·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예상했던 형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요, 앤서니, 나는 당신의 책이 마음에 들어요. 왜냐하면 그 책에서 당신은 경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든요. 정말로 당신은 행운아예요. 영국에선 이제 경제에 관해 더 이상 논쟁할 것이 없지요. 사기업화요? 당신들이 모두 사기업화 했지요. 재정 적자요? 전부 없앴어요. 세금요? 당신들을 위해서 보수당 정치인들이 이미 모두 줄였어요. 그래요, 거듭 말하지만, 앤서니,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아요." 급기야 드니 케슬레르는 다음과 같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런데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자본주의이지요. 앤서니, 당신의 '제3의 길'이 나는 좋습니다.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3의 길' 보다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주의' 라던가, 혹은 '감정을 가진 시장' 같은 슬로건이 어떨까요." 청중 속에서 좌파인사들은 해답을 얻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앤서니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로랑스 까라멜, <르 몽드>, 1999. 3.2. 경제섹션 2면 박스기사 완역) 이상과 같이, 앤서니 기든스는 프랑스땅에서 실로 기이한 좌우충돌을 경험했다. 그가 주장하는 중도 좌파나 급진적 중도라는 게 프랑스 기업가운동연합의 대표보다도 좌측은 아니었던 것이다. 드니 케슬레르가 지적했듯이, <제3의 길>에는 경제 현실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가 없다. 예컨대, 빈부 격차의 양극화와 대중의 궁핍화 현상에 대한 고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제3의 길>이 좋은 얘기들로 차 있는 듯하지만 결국 추상화된 담론으로 비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이탈리아의 마씨모 달레마 정권의 경제 고문인 니콜라 로씨조차도, "토니 블레어의 제안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아니다, 그것은 복지국가를 개혁하겠다는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 방안이 궁핍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을 노동시장으로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인지 우리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제3의 길>의 이와 같은 모호성은 <비참한 세계>라는 문제작을 내놓은 피에르 부르디외와 특히 구분되는 점이다. 기든스는 '적이 없는 민주국가'를 말했는데,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은 민주국가의 적으로 보지 않음인가. <르 몽드> 3월 31일자에는 영국의 궁핍 현상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다. 인구의 25%가 빈곤층이며 30%의 아동(독일 13%, 프랑스 12%)이 궁핍 속에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6%라는 비교적 낮은 실업율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이런 현상이 나온 것은 신자유주의의 관철 양태인 부분노동, 저임금, 유연노동이 불러온 이른바 '일하는 빈곤층'(working poor)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겠는데, 또한 6%라는 숫자도 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편모 가정의 빈곤 문제는 특히 심각한데 그들 중에 단 40%만이 일자리를 갖고 있다(미국 60%, 프랑스 80%). 그런데, 기든스에 의하면,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제3의 길' 정치는 우파가 제기한 일부 비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혜택 배분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주장하며 "책임 없이 어떤 권리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임의식조차 잃게 하는 배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이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과연, '가난한 사람들은 일하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프랑스의 월간지 <대안적 경제>(Alternatives Economiques)는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1997년대 10만이 넘는 최소적응수당(RMI) 대상자들이 고용연대계약(CES)을 받아들였다. 일 하지 않고 수당을 받는 최소적응수당 수혜자들이 거의 비슷한 수당을 받으면서 일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앞에 말했듯이, 오스카 라퐁텐은 제3의 길목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에서 그가 사임하게 된 배경이 잘 설명되고 있다. 기든스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대개 기회주의적인 이유를 들어 중도를 향해 이동해 왔다."라고 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라퐁텐의 왼쪽은 없어졌다. 흔히 말하는 보수, 진보의 양당 정치체제 아래서 그 동안 좌가 좌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사회주의권이 존재하여 왼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기든스의 "시민권과 복지 정책은 국가들이 국민들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할 때에 주로 형성되었는데, 이 현상은 냉전 기간을 통해 지속되었다"라는 지적은 정확한 것이다. 라퐁텐은 자신보다 더 좌가 없어졌을 때 재빨리 스스로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의 신념은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더 선>)이 되어야 했고, 결국 기든스 등이 말하는 구사회민주주의자라는 올가미를 쓰고 '새로운 중도'에 밀려났던 곳이다. 그가 물러나자마자, 유럽의 주식시장은 활기를 띠었고 유로의 가치가 올라갔다. 2년전에 영국의 <더 선>지가 의외로 노동당을 지지한다고 나섰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왼쪽으로 간 게 아니라, 토니 블레어가 우리 쪽으로 온 것이다"였다. 그 뒤 2년이 지났다. 영국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 토니 블레어는 계속 '제3의 길'을 외치고 있다.
오스카 라퐁텐과 토니 블레어라는 상반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제3의 길'을 거칠게 단순화시킨다면, 이냐시오 라모네가 시사한 것처럼 결국 기회주의자들의 면죄부용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른바 '좌우를 넘어서' 슈뢰더가 '새로운 중도'를, 그리고 토니 블레어(앤서니 기든스)가 '급진적 중도'를 주장하는 것은 구체적 사회 현실의 요구라고 하기보다는 중간파들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즉, 진정한 개혁을 통하여 보다 더 개선된 사회를 향한 요구에서 온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양당제도의 허점을 이용한 득표 전략의 요구에서 온 것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는 앞으로 20년 도안 '제3의 길' 정치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 한해서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따라서 미국 주도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은 강력한 노조가 있다는 점에서 영국과 다르고, 프랑스는 정치적 지형이 영국과 다르며 또 공화주의 전통이 있다는 점에서도 영국과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에서는 집권 사회당보다 더 왼쪽인 정치세력(녹색당 포함)이 국민 25%의 지지를 얻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차이는, '영국의 자존심'이 앤서니 기든스라는 것에 비해. '좌파의 좌파'를 주장하는 피에르 브르디외가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와 쌍벽을 이루지는 않더라도)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표적 지성이라는 것으로도 상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끝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기로 하자. '제3의 길'은 한국이 갈 길도 아니고 또 갈 수 있는 길도 아니다. 뛰어넘을 구사회민주주의 경험도 없고 또 뛰어넘을 구좌파 정치 세력도 없다. 실업자가 200만을 넘나드는 상황임에 '제3의 길'을 말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저항하면서 사회안전망을 확보하는 게 더 시급한 것이다. (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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