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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69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19 (음력 6. 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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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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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전국 가사 시조 창작공모전
응모자격 ¯ 학생부 : 전국 초 중 고등학생 ¯ 일반부 : 전국 일반인, 대학생
응모분야 ¯ 가 사 : 학생부 1편, 일반부 2편 ¯ 시 조 : 학생부 2편, 일반부 3편
공모기간 : 2010. 7. 1 ~ 9. 30까지 (3개월간)
주 최 : 담양군(한국가사문학관)
주 관 : 전남도립대학 산학협력단
공모기간 및 접수처 ¯ 공모 장소(접수처) :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262 전남도립대학 전자우편(dysijogasa@hanmail.net) ¯ 문의 : 전남도립대학 문화관광센타(061-380-8663) 최한선(011-607-5675)
입상자 시상 및 장소 (입상자에게 개별 통지 및 담양군홈페이지 “문화행사란” 참조) ¯ 일 시 : 2010. 10. 22 (금) 10:00 ¯ 장 소 :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77번지 (한국가사문학관 영상실) ※ 입상자 발표(예정) : 2010. 10월초 응모요령 ¯ 응모 방식 : 전자우편(E-mail) ¯ 주제 : 자유 ¯ 발송용 봉투 앞면에 응모부(학생부,일반부)와 응모분야(가사/시조)를 구분표시하고, 원고 말미에 주소, 성명(본명),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기재, 재학생은 받드시 학교명과 학년 표기 ¯ 응모작품은 과거에 발표되었거나 현상 공모한 적이 없는 순수한 본인 창작품이어야 함. ¯ 응모작품은 일절 반환치 않음.
시상내역 ¯ 대 상 : 1명 (학생부,일반부 총괄) - 훈 격 : 문화체육관광부장관(300만원) ¯ 최우수상 : 2명(가사분야1, 시조분야1) - 상금 각 150만원 - 훈 격 : 전라남도지사, 조선대학교총장 ¯ 우수상 : 4명(각 분야별로 학생부1, 일반부1) - 상금 70만원 - 훈 격 : 담양군수(1),담양군의회의장(1)전라남도담양교육장(2) ¯ 장려상 : 20명(각 분야별로 학생부5, 일반부5) - 20만원 - 훈 격 : 담양군수 ※ 단, 상의 내용은 다소 변경될 수 있으며, 장려상의 경우 상금의 일부를 도서로 대체 할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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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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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마음이여, 침착하고 탄식을 멈추라. 구름 뒤엔 아직도 햇빛이 빛나고 있다. -롱페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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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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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대기
다른 단어나 어근에 붙어 새로운 단어를 구성하는 말을 ‘접사’라고 한다. 다른 단어나 어근의 앞에 붙는 것을 접두사, 뒤에 붙는 것을 접미사라고 한다. ‘풋과일, 맨발’에서 ‘풋-, 맨-’이 접두사이고, ‘부모님, 울보’에서 ‘-님, -보’가 접미사다. 접사는 형식형태소, 의존형태소로서 홀로 서지 못한다. 그러나 접미사가 홀로 쓰이면서 하나의 온전한 단어로 탈바꿈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 백이 벌떡 일어나 방의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중앙 일간지 기사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싸대기’는 ‘귀싸대기, 면싸대기’ 등으로 쓰이는 접미사다. 하지만 앞말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쓰였다. 사전들은 ‘싸대기’를 아직 명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접미사가 명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어엿한 명사로 사전에 오른 것으로 ‘끼, 꾼’이 있다. ‘끼’는 한자어 접미사 ‘-기’(氣)에서 왔다. ‘화장기, 기름기, 소금기’ 등으로 쓰이던 접미사가 ‘끼’로 형태를 바꾸어 “연예에 대한 재능이나 소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 또는 “바람기”의 뜻으로 사전에 올라 있다.
‘꾼’은 ‘일꾼, 장사꾼, 사기꾼’ 등으로 쓰이던 접미사가 “어떤 일, 특히 즐기는 방면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역시 사전에 올라 있다. 사전적 풀이로는 ‘속되게 이르는 말’ 또는 ‘낮잡아 이르는 말’이지만 실제 쓰임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싸대기’도 사전에 오를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우재욱/시인
한글
‘한글’은 조선조 세종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우리 글자의 이름이다. 세종 시대에 처음 이 글을 반포할 때는 ‘훈민정음’이라 했다. 그러나 조선 사회의 사대부들은 한글을 쓰는 것을 꺼린 나머지 이를 업신여겨 언문, 암글이라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통싯글이라 부르기도 했으니 조선 시대의 한글은 사람으로 치면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조선 말에 이르러 우리글에 ‘한글’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주시경 선생이다.
“우리가 한글보다 과학성이 뒤떨어진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폭넓고 수준 높은 지식, 즉 콘텐츠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한글 경쟁력을 높이는 번역’이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에서 잘라온 구절이다. 칼럼에서는 한글과 영어를 대비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한글과 영어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한글은 글자이고 영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글의 비교 대상은 알파벳이고, 영어의 비교 대상은 한국어이다.
‘한글’을 ‘한국어’와 동일시하는 경우를 더러 볼 수 있다. 잘못된 일이다. 이런 잘못은 한글 전용이냐 한자 혼용이냐 하는 글자 사용 논쟁을 순우리말 사용이냐 한자어 사용이냐 하는 어휘 사용 논쟁과 뒤섞어 버림으로써 논쟁의 초점을 흐리기도 한다.
설령 ‘한글’을 ‘한국어’와 같은 의미로 썼다고 하더라도 납득할 수 없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과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한국어가 영어보다 뛰어난 언어라는 데는 고개가 저어진다.
우재욱/시인
‘-다랗다’
주로 크기와 관계있는 형용사 어간에 붙는다.‘그 상태나 정도가 꽤 뚜렷함’을 나타내는 뜻을 더한다.‘가느다랗다, 굵다랗다, 좁다랗다, 커다랗다, 높다랗다.’ 어간의 끝 음절 받침이 ‘ㄹ’일 때는 탈락하거나(기다랗다) ‘ㄷ’으로 바뀐다(잗다랗다). 받침이 ‘ㄼ’일 때는 ‘ㅂ’이 탈락하면서 ‘-다랗다’가 ‘-따랗다’가 된다. ‘널따랗다, 얄따랗다.’
부수다와 부서지다
‘돌을 부수다, 문을 부수다.’ 단단한 물체를 여러 조각이 나게 깨뜨린다는 뜻을 가진 ‘부수다’. 옛 형태는 ‘브스다(ㅅ은 반치음)’였다. 이 말의 피동 형태는 ‘브서지다(브스+어지다)’가 된다. 현재 ‘부수다’의 피동 표현으로 ‘부서지다’가 쓰이는 이유다. 이미 ‘부서(브서)지다’가 ‘부수(브스)다’에 대한 피동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 존재했던 것이다.
하모, 갯장어, 꼼장어, 아나고, 붕장어
장어는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기운을 돋우기 위해 잘 먹는 식품이다. 민물고기인 뱀장어가 대표 격이지만 그 외에도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 많고 이름도 헷갈린다.
남쪽 바닷가에 가면 여름 한 철 잠깐 먹을 수 있는 '하모 '가 있다. 회로 먹으면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경남 지역 방언으로 '아무렴'을 '하모'라고 하는데 회로 먹는 '하모'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때의 '하모(はも.)'는 일본어다. 우리말로는 갯장어라고 부른다. 뱀장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양턱이 튀어나왔고 큰 송곳니가 있으며 2m 정도까지 자란다. 갯장어를 경남 방언으로는 참장어라고도 한다.
횟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아나고(あなご.穴子)'. 이 명칭도 역시 일본어이며 우리말로는 ''붕장어, 바닷장어''라고 한다. 붕장어도 뱀장어와 비슷하지만 입이 크고 이빨이 날카로우며 측선을 따라 흰 구멍이 줄지어 있다.
더위가 숙어지는 저녁 무렵 포장마차에서는 안주거리로 ''꼼장어''또는 ''곰장어''가 인기를 끄는데 이들의 정확한 명칭은 먹장어다. 먹장어는 턱이 없고 입이 빨판처럼 생겼으며 껍질이 부드럽고 질겨서 지갑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침착하고 명확하게
공적인 글을 쓸 때 흥분하지 말고 감정을 다스려 차분하게 써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다음은 어떤 신문 기사의 일부다. "감사를 통해 드러난 사학 비리 유형을 살펴보면 이곳이 과연 신성한 학교인지, 불법영업을 자행하는 악덕기업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비리를 저지른 사립학교를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사학도 교육사업에 투자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사업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사학에 종교단체와 같은 '신성함'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치다고 본다. '신성한'을 빼든가, 아니면 '정상적인' 정도로 눅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 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써서는 안 된다. 명확하게 표현해야 독자가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음은 어떤 기사의 일부다.
"…(그는) 최근 중국 관련 사업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에 변명에 급급했던 테리 세멜 야후 사장, 청중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경영자의 전형을 보인 로버트 아이거 디즈니 사장과 뚜렷하게 대비됐다고 (기사는) 분석했다."
여기서 ''청중을 흥분시키지 못하는''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하는''인지, ''청중을 사로잡지 못하는''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 알 수 없다. 쓰는 사람 자신이 아는 말이라고 해서 독자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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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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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얼굴 - 고명수
목숨의 팔만대장경 어디엔가 숨겨진 얼굴이 있다 문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얼굴,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행복한 순간에만 살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삶의 그늘, 찌든 계곡 속에 숨어 있다가, 해맑은 웃음 사이로 잠깐 나타났다가는 가뭇없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얼의 모습 사진관에 가서 여러 컷을 찍어 보아도 그 얼굴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사진이란 사람을 온전히 보일 수가 없는 법, 찰나로 변해 가는 어느 지점에 셔터를 누를 것인가 적중의 플래시를 터뜨릴 것인가 칠백만 화소는커녕 천만 화소를 잡아낸다는 최첨단 카메라로도 안 잡히는 얼굴,
사람의 참 얼굴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가 앨범 속 어느 갈피에선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얼굴, 흐린 눈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얼굴, 초고속 디지털 카메라로도 잡을 수가 없는, 사람에게는 술래처럼 꽁꽁 숨은 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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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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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사 가는 길 - 김석철
안개 너울 걷혀가니 동양화가 다가선다
적막 속에 잠긴 기슭 독경소리 들리는 듯
신록에 마음 적시며 허위허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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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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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많지만 - 박경종
할아버지는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지팡이를 끌고 길을 찾아 나섰다.
길은 줄줄이 동남서북으로 어디든지 많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찾는 이북 고향 집으로 갈 길은 없다. 찾아보아도 길은 없다.
할아버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가슴속에 안은 채 끝내 돌아가시어 다시 갈대꽃으로 태어나셨나 보다.
그러기에 오늘도 갈대꽃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몸부림을 친다. 할아버지처럼 가냘픈 몸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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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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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일근 - 4월, 벚꽃나무 아래서의 첫사랑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꽃잎 사이 착하고 어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의 시편들을 날려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까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 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 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시 '4월 엽서'전문
첫사랑! 그 말을 입안에 넣고 추억처럼 중얼거린다. 불혹의 내 입 속에서 4월 진해를 뒤덮던 벚꽃이 다시 씹힌다. 그 기억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불처럼 뜨거웠던 꽃잎들과 얼음처럼 차가웠던 낙엽들의 기억이 입 속에 함께 스쳐 지나간다. 진해. 그렇다. 그 도시에서 내 첫사랑의 시작과 끝이 있었다.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었구나, 사랑이여 첫사랑이여. 아득해하며 눈을 감으니 흰 꽃잎들이 화사하게 눈처럼 날린다. 내게 진해의 벚꽃은 4월에 내리는 눈과 같았다. 해군도시인 남쪽의 진해는 겨울이 와도 눈과 얼음이 귀한 부동항의 항구도시. 그 도시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낸 벚꽃나무들은 4월이면 일시에 피었다가는 바람이 불면 눈 같은 꽃잎을 뿌려주었다. 분분설처럼 날리던 4월의 눈나라를 나는 잊지 못한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그 4월에 내 첫사랑은 시작됐다. 일본의 소설가 가오바타 야스날리는 '터널을 지나자 눈의 나라였다'고 눈나라,'설국'의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진해는 4월이 오면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나는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그대들도 진해에서 열리는 4월의 축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벚꽃잔치인 군항제. 도시에 심어진 7만 그루가 넘는 벚꽃나무들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도시의 축제는 화려하게 막이 오른다. 그 축제의 전야제는 유년의 내 몸과 마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분수 탑 로터리. 우리 나라에서도 귀했던 8거리인 그 로터리에서 브라스 밴드인 해군 군악대의 경쾌 한 행진곡 연주와 장총을 들고서도 한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시계추 같은 의장대의 멋진 사열솜씨를 보면서 우리는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고적대 제복을 입은 여중생들의 멋진 퍼레이드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고생들의 강강 수월래로 봄밤이 서서히 어두워져 오면, 한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엔 불꽃놀이의 요란한 폭죽이 터지고, 땅에는 아이들이 축등 행렬이 시작됐다.
궁핍의 60년대, 흑백 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 오면 오색 찬란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꽃비가 세상으로 내렸다. 어린 내 마음은 그 폭죽 소리를 따라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불꽃이 만드는 무지개를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곤 했다. 축등 행렬은 언제나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축제의 전야제, 사각으로 만든 축등에 촛불을 밝히고 축제의 광장인 8거리를 중심축으로 방사선으로 퍼져가는 쭉쭉 뻗은 도시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이 주는 흥겨움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나서 그때부터 축제는 나에게 슬픔으로 변해버렸고, 나 또한 말보다는 눈물 많은 소년이 돼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4월이었고, 나는 꽃 피는 거대한 나무를 잃은 작은 가지였다. 불의의 교통사로였다. 아버지께서 먼 곳으로 떠나신 이후 집안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나는 눈물과 함께 배워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4월에도 눈이 내린다는 먼 북쪽 마을로 떠나셨다고 생각했다. 기일이 오면 늘 꽃잎이 눈처럼 날렸기에, 아버지는 해마다 4월이면 꽃을 눈 대신 몰로 진해로 찾아오신다고 믿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아버지가 사시는 그 먼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나무에 기대어 선 나에 게, 저녁 바람이 휘파람을 가르쳐 주었고,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의 쓸쓸함이 나에게 가슴속으로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에는 온통 여자의 눈물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남았다. 아들을 잃은 할머니, 남편을 잃은 어머니, 오빠를 잃은 고모들..... 그 많은 여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눈물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잠결에 듣는 어머니의 울음은 슬픔의 바다가 돼 나에게 몰려왔고, 나는 이불속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바다에 젖어 울 수밖에 없었다. 서른에 청상이 되신 어머니인데 어찌 눈물이 없었겠는가. 한순간 가진 것없는 빈손으로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험한 세상에 버려진 어머니. 아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울면서 알았다. 세상 에는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것을. 그 이별은 늘 슬픈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나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생각할 뿐 꽃이 지는 축제의 슬픔은 알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을 더욱 사랑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밀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자고 외로운 섬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지도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슬픔의 시를 쓰는 나를 늘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런데 사랑도, 첫사랑도 내가 그렇게 슬픔에 젖던 4월에 나를 찾아왔으니.중3이었다. 내가 다닌 모교는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는 늘 남쪽으로 열린 진해 바다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런데도 군사도시의 영향인지 중학교인데도 선.후배 사이에 엄한 질서가 있어 선배들의 서슬에 기가 죽어 숨죽여 생활하던 1,2학년을 보내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생 활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모자의 챙을 미니형으로 줄이고 알맞은 가방끈을 괜히 길게 만들어 어깨에 메고, 일자형의 교복바지를 나팔바지로 만들어 입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신는 것이 금지 돼 있는 흰색 신발이나 농구화를 몰래 신으며 괜히 어깨를 으쓱이거나 후배들을 불러 세워 기 합을 지던 시절. 턱과 코밑에 조금씩 돋아나는 수염을 자랑스러워하며 여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하던 시절. 그러나 그런 자유보다는 고교입시라는 짐이 더 무거웠던 시절 이었다. 3학년이 되어서 나는 어머니 덕분으로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겨우 겨우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교육열만큼은 높으셔서 아들의 고교입시를 걱정,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 주셨다.
진해역 오른편에 있었던 청산학원. 학교수업을 마치고 저녁이면 학원으로 걸어가 수업을 받았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있었는데 시내에서는 제법 떨어진 시골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 친구의 집에서 학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동이 아닌 리라는 주소를 쓰는 시골이었다. 당시 진해 시내의 중학교는 모두 남학교와 여학교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시골인 까닭에 유일하게 남녀공학인 중학교였다. 그 중학교에 초등학교 시절 친구도 있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와는 이내 학원 짝지 이상으로 친해져 버렸다. 그것을 기회로 나는 웃으며 "네가 다니는 학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녀공학이니 좋은 여자 친구가 있으면 나에게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친구도 웃으며 자기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같은 학년의 S라는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약속이 있은 지 며칠 후 그 친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나에게 S의 얼굴 사진을 가져다 주었다. 그 친구는 S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고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도 전했다는 것이다. S는 나의 교제신청에 좋다는 뜻으로 자신의 사진을 내게 보냈던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약간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시골 소녀의 모습. 사랑은 그렇게 오는가. 사진만으로 도 S는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여자로 내 눈 속에, 머리 속에, 마음속에, 온몸에 꽉 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마음속으로 S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났든지 나는 S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첫사랑의 숙명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사진만으로도 내 가슴은 뛰었다. 내 사진도 한 장 그녀에게로 보냈다. 그 시절 사진이란 등교실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할인권을 받아 사진관에서 찍으면 낙엽 모양이나 하트 모양의 무늬 속에 얼굴이 나오던 그런 흑백사진이 아니었던가. 교복에 모자까지 쓰고 찍은 그 사진 곁에 '희망'이 니 '우정'이니 하는 문구가 흰색으로 적혀 있었던. 그 친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진만 교환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전령사로 열심히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솜씨를 살려 나는 멋진 연애편지를 그 친구를 통해 S에게로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S의 답장을 받았다. 사진과 편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는 며칠 있으면 S도 학원에 나오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그 마을에서는 부농이었던 부모를 졸라 시내까지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S는 그렇게 처음 나에게 나타났다. 학원 앞은 큰 도로여서 벚 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4월 저녁, 나는 학원 앞 벚꽃나무 아래서 기다렸고 그 친구를 따라 S는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처음 나에게 슬픔을 가르쳐 준 벚꽃나무 아래서 만났다. 모든 사랑이 시작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어색한 인사로 만남은 시작됐고, 서로 학원수업에 열중인 척했지만 머리 속에는 가까이에 앉아 있는 서로의 생각뿐이었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마을로 돌아가는 막차시간까지 주차장 부근 어두운 골목에 숨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흐르자 학원시간을 한 시간쯤 빼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미 우리에게는 학원수업이니 입시보다는 서로에게 향한 사랑의 감정이 소중했다. 꽃이 피는 4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그 4월은 슬프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그 4월에 사진관에서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축제 전야제의 밤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믿었다.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이제 더 이상 4월에 슬픔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벚꽃이 활짝핀 나무 아래를 그녀와 함께 걸으며 다시 찾은 축제의 흥겨움으로, 첫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 일곱 시 라디오에서 알리는 시보 소리에 맞춰 성냥불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성냥을 켜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리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자는 약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구들 몰래 성냥을 켜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S를 생각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 우주의 중심은 S였다. 어느 날은 함께 이웃 도시인 마산으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고, 영화를 보면서 용감하게도 모자를 벗어 그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기도 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S의 마을로 놀러가 S의 집에서 S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밀 밭으로 몰려가 밀서리를 해먹기도 했다. 어느 휴일에는 S의 학교 교실로 가 환경미화를 돕기도 했으며, 그녀의 친구들과도 자주 어루려, 친구들 사이에 나와 그녀의 사랑은 공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하루하루 깊어져가던 어느 주말이었다. S의 마을로 놀러갔다. 우리는 산 위 무덤 곁에 앉아 함께 밤을 새웠다. 그 마을은 바닷가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시그리'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말을 배웠다. 시그리란 그 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로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 바닷물에서 빛이 일어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었다. 죽은 물고기들의 뼈에서 나온 인들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야광작용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면 도깨비불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일어났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에서도 파란 불이 번쩍였다. 그 마을 아이들은 배에 작은 돌을 싣고 밤바다로 나가 돌을 던지며 시그리를 즐겼다. 물수제비로 뜨는 신비한 불빛 시그리. 무덤에서 밤을 새우고 내려온 새벽 그녀를 집으로 보내주며 집앞에 있는 다리에 앉아 그 시그리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혼불이 머리를 타고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열여섯 나이에 시그리 같은 차가운 불빛에서 그처럼 뜨거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입맞춤이 첫사랑의 완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황홀함이 벚꽃나무에 핀 새 잎이 낙엽이 되어 지는 가을에 끝이 나고 말았다. S는 가을이 깊어지자 내 곁을 떠났다. 실연의 주체는 나. 그녀에게 중2학년 때 서울로 전학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가 좋아했던,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던 그 친구가 불쑥 다시 나타남으로써 그녀의 선택은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첫사랑을, 아름다움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별의 고통과 상처를 더 적어 무엇하겠는가.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와 달리는 여러 차례 나의 애원과, 나를 아낀 선배 누나들이 그녀를 찾아가 나선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면으로 나는 첫사랑의 패배자로 기록됐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차가운 뺨 한 대를 남기고 돌아섰다. 더 이상 비참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벚꽃나무 아래서 찬 이슬에 젖어 있는 낙엽을 짓밟으며 나는 절망이라는 끝없는 우물 속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때 결별의 고통은 아픔으로 오랫동안 나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지금은 오랜 아픔보다 짧은 사랑의 기쁨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게로 향한 그 지독했던 증오와 원망도 이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에게 첫사랑이었기에. 첫사랑은 늘 미완성이지만 완벽한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사랑이기에.
사족 하나. 그 결별 이후 우리는 대학시절 대구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대구 모 대학에서 응모한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입상이 되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 갔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그녀가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도 그 부근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내 생각이 나서 먼저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사랑이 깨어진 사람들을 위해 신이 한번쯤 허락해 주신 그런 운명적인 재회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지금의 아내와 열애중이었고, 전문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녀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4월이 오면 진해로 가보아야겠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벚꽃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 지. 꽃은 또 그렇게 아름답게 피는지. 피었다가는 부는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지. 4월이 오면.
정일근 -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경주 남산','감지의 사랑', '처용의 도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바다가 보이는 교실' 등이 있으며, 사랑시 선집 '첫사랑을 덮다'가 있다. 현재 울산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학과 지도교수로 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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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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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팝콘
어떤 정신분석가가 자기가 팝콘이라고 생각하는 한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다.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치료한 결과, 이제 거의 다 완쾌가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정신분석가가 환자에게 물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물론 사람이지요"
이제 다 나았다고 판단한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나간지 불과 오 분도 안되어, 그 환자는 공포에 질린 채 뛰어들어오면서 외쳤다.
"의사 선생님, 의사 선생님, 밖에 병아리가 있다고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겨우 도망쳐 왔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이 팝콘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안그래요?" "물론 저는 알고 있지요. 하지만 병아리들은 그 사실을 모르쟎습니까?"
- 마음에 관계되는 모든 일은 표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는 지금 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겉모양만 그럴 뿐이다. 때문에 또다시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그대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변형이 아니라 다만 위안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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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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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노동
육체와 정신 노동은 상대적이다. 육체적 노동은 육체가 피곤한 대신 정신적인 고통은 면할 수 있고, 정신적 노동은 정신이 피곤한 대신 육체적인 고통은 면할 수 있다. 육체적 노동은 모두 힘들고 정신적 노동은 모두 쉽다는 주장을 펴서는 안 된다. 육체적 노동이 정신적 노동보다 힘들어 보이는 것은 외견상 보여지는 오해일 뿐 실제로 육체적 노동이 더 힘든 것은 아니다. 얼핏 보기에는 육체적 노동을 할 때만 어깨 결리고 몸살나며 입술 부르트는 고통이 따를 것 같지만 정신적 노동을 할 때도 그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육체나 정신 노동의 난이도(어려움과 쉬움의 정도)는 똑같다. 육체를 움직여야 하는 육체적 노동이나 머리를 써야 하는 정신적 노동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육체적 노동이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면 정신적 노동은 정신적 고통을 수반하고, 육체적 노동이 육체적 피로를 감당해 내야 한다면 정신적 노동은 정신적 피로를 감당해 내야 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사실, 육체적 노동이 더 힘드냐 정신적 노동이 더 힘드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겨울 나기가 더 힘드느냐 여름 나기가 더 힘드느냐를 따지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일이다. 겨울 나기는 겨울 나기대로 힘들고 여름 나기는 여른 나기대로 힘든 것처럼, 육체적 노동은 육체적 노동대로의 고충이 따르고 정신적 노동은 정신적 노동대로의 고충이 따르는 것이다.
돌아가는 지혜
하나의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는 정반대의 방법을 동원해 보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오로지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며, 이 방법이 없으면 저 방법이 있다. 정면 돌파가 불가능하다면 측면 돌파를 하고, 앞길이 막혀 있다면 뒷길로 돌아가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손해보지 않는 쪽을 택하고, 성공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내고, 돈 벌기가 힘들 때는 돈을 벌기 위해서 발버둥치기보다는 절약하는 지혜를 찾아내면 그러한 어려움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은 되는 쪽으로 밀어붙여서 달성할 수도 있지만 안 되는 쪽을 서서히 줄여 감으로써 달성할 수도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 주는 행위를 해 줌으로써 그들과 친해질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행위를 함으로써 친해질 수도 있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건강을 지킬 수도 있지만 건강에 해가 되는 행위를 절제함으로써 건강을 지킬 수도 있는 것이다. 힘들어서 하지 못하는 일도 위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면 쉽게 해낼 수 있다. 청소하는 것이 힘들다면 버리지를 말고, 예의를 보이기 싫으면 무례를 범하지 말고, 타인이 좋아하는 행동을 보여 주기 힘들다면 타인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해서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되는 쪽으로만 밀어붙일 때보다도 오히려 쉽게 극복해 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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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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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진 중권 에세이 (뮤즈의 복수)
뮤즈의 복수
발터 벤야민. 인용으로 글쓰기. 때는 포스트모던에 인테넷 시대. 에리다가 말한 것과 비슷한 글쓰기?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공간, 사이버 공간의 글쓰기. 주체 없는 글쓰기. 주체는 ID 뒤로 숨어버리고 주인 없이 불꽃처럼 명멸하는 기호들의 무한연쇄. 이 불똥들을 몽타주하여 사회의 망탈리테와 상시빌리테를 스케치한다. 인용과 인용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예측하지 못한 사태, 이 단편들의 충돌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사회의 감추어진 이미지. 재미있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런 글쓰기. 하지만 그 짓은 뒤로 미루고, 여기선 고전적 인용으로 우리 사회의 일부를 스케치하는 데 그치련다. 화장실 얘기다.
1. composition (이인화 작, 설치예술, 60m 20m, 두랄루민, 합성수지에 인간염료. 어너러블 화이트, 화이트, 블랙, 엘로우+화장실)
"남아프리카를 갈 때였어요. 스튜어디스들이 나하고 일본사람들은 어너러블 화이트라고 쓰인 자리에 앉히고, 그 다음에 화이트, 블랙, 그리고 화장실 바로 옆 자리에 중국사람들을 앉혀요. 못 사니까. 중국사람들한테는 냄새가 안다고, 냄새가 좀 나긴 납디다." 이름하여 아파르트헤이트. 누렁이로 하여금 아너러블 화이트로 분류되게 해주신 그 분, "솔직히 말하면 쿠대타를 포함해서 그분이 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왜? "국적성 때문에 진리 자체가 변할 수 있으니까요. 가령 2+2=5는 '거짓', 2+2=4는 '한국'. "우리 세대에는 저 같은 존재도 드무니까요." "이거 성공할 꺼야, 1억 부 팔거야." 대한민국 인구 4천만. 온 국민이 같은 책을 21/2권 산다? 그러니 당연히 "집사람이 미쳤다고 하죠."
2. hommage M.C. Escher ou l'essaie de l'impossibiit topologique. 에셔에게 헌정 혹은 위상학적 불가능의 시도 (김탁환, 컴퓨터 그래픽,17 LCD화면)
"그러나 그것은 결코 비아냥의 대상은 아니다." 더구나 "예술가의 삶과 고통을 연구하는 학자라면 비아냥거림은 있을 수 없다." 남의 횡경막의 운동에 간섭하는 자여, "예술가"가 토로하는 "삶과 고통"을 보라. "이제는 집사고, 모아놓은 돈과 땅도 좀 있고, 자가용 타고 다니고 꿈에 그리던 공직(이대 교수직)을 갖게 되었지요." 뭘 더 바래? 다시 본문으로. "그의 비난이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인화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자, 힘을 얻자. "내면" 앞으로. 근데 정작 우리 "예술가" 왈.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누구도 내가 누구라고 고백할 내면을 가질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책으로 쓸 내 안의 고유한 내면이란 없다." 이 위상학적 불가능, 어떡하죠? 이 모든 고찰로부터 "예술가의 삶과 고통을 연구하는 학자"가 끌어낸 잠정적 결론. 우리 "예술가"는 "집사고, 모아 놓은 돈과 땅도 좀 있"지만 "내면"이 없다.
3. 깊은 시름 하던 차에 (김택환, 행위예술, 어느 달 밝은 밤, 전남 한산군 해안의 수루, 1998)
"신화가 되어 버린 사내(=이순신)를 알고 싶다." 또 "신화"다.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펼쳐 보이고 있다." 또 "운명"이다. "전쟁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사건이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만들어 내는 공간." 또 "전쟁"이다. "전쟁터를 누비면서 그들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 "인간"이다.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또 "제국"이다. 과학적 예측. 머잖아 '김유신뎐' 나온다. 증명. "김유신-이순신-정조-박정희로 이어지는 가운데 징검다리처럼 단속적으로 명맥을 유지…"(조갑제) "박정희"는 더블, 조갑제와 이인화, "정조"는 이인화, "이순신"은 김탁환, 그러니 남은 건 "김유신." 증명 끝. "나는 이 소설이 자유롭게 읽히기를 원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윤리적 판단도 배제하고." 요구도 많다. 주문을 마친 예술가,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우리는 지금 아주 긴 휴전을 하고 있다. 만에 하나 정유재란과 같은 전쟁이 재개된다면…", 깊은 시름에 빠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일성호가가 그의 애를 끊는다. '마라데스, 마라데스, 웃기지노 마라데스…'
4. 공자는 포스트모더니스트 (함재봉, 행위예술, 전통의례 현대적 재현, 1998)
"유교가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근대사상의 모순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사상에 대한 유교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두 사상을 올바로 비교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 "틀"을 마련하자. 근데 "근대 서구사상과 유교 (…) 중 어느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거나 과학적이라는 것을 판단해줄 제3의 담론이나 기준은 없다." 그런 틀 없단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수신, 규율, 기강 등을 그 핵심으로 하는 우리의 유교전통은 이미 근대성을 갖춘 전통이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근대화 혁명가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Alons, enfants de la patrie, 나폴레옹은 이성계다. "유교전통은 전근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근대적인 전통이다." 아, 이건 봉선화학당 맹구식 테제. 왜? "지극히 근대적"이라는 유교가 "근대 사상의 모순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5. sacre conversazione 성가족의 대화 (다큐멘타리 필름, 출현: 함재봉, 이인화, 김탁환 1998)
함 : "우리로 하여금 좌우 모두에 대하여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그러한 요소는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공자는 토니 블레어, 좌우를 넘어선 제3의 길? 함 : "유교전통의 유토피아를 논하고 있는 최근의 시도 중에 흥미 있는 것으로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그런데 우연히 이인화는, 김 : "우익이고 보수주의자이리라." 그런데 함 : "좌우의 이상은 공히 힘을 상실한 불구의 이상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우익 보수주의자"의 이상, "유교전통의 유토피아"도 "힘을 상실한 북구의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함 : "수신, 자제, 극기, 규율 그리고 기강을 중시하는 유교…" 이런 걸 "유토피아"라 선전하는 이의 삶. 이 : "탕진하는 거죠. 자기 생을. 시간을 소비하는 게 아니고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 탕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게 "수신, 자제 극기, 규율 그리고 기강"? "유교의 존재론은 '인간'의 존재론…" 그 존재론을 가진 '인간'의 말씀. 이 : "짐승의 부분에 대한 해명과 통찰이 없는 한 모든 얘기들은 공허한 탁상공론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현실정치에 있어서." 그렇다. "짐승의 부분에 대한 해명과 통찰" 없이 "'인간'의 존재론"을 떠드는 유교정치론은 "공허한 탁상공론이 아니겠습니까? 특히 현실정치에 있어서."
6. 문중대회 (재령 이씨 영일파 종친회 어른들, 해프닝 경상도 어느 양반가문의 고옥, 1998)
함 : "가족중심주의는 유교의 인간중심주의 사상의 제도적 구현이다." 고은광순 : "그래서 쓸 데 없다며 일년에 3만 명의 여태아를 골라서 죽이고" 있지요. 함 : "제사는 유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을 담아내는 기제이다." 고은 : 그래서 "명절이며 제사라는 것이 여성을 도구로 하는 과거지향적 남성문화로 고착되어 있"지요. 신경숙 : 그런데 "우리 집은 종가집이에요. 당연히 제사도 많고…" "존재론과 인식론을 담아내는" 철학적 사건의 발생빈도는 "여성을 도구로 하는 과거지향적 남성문화"의 강도와 정비례. 고로 유교철학=남근중심주의. 증명 끝. 함 : "삼강오륜은 이러한 간주관성의 존재론의 극명한 표현…, 그리고 인간의 간주관성의 가장 원초적인 장은 가족." 신 : 그러니 "남성에 대한 생각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는 오빠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거 아녜요?" 당연하지. 그 인식론적 귀결. "그래선지 저로서는 우선 여자와 남자를 구별지어서 대립관계에 서는 건 이해하지 못 했어요. 그걸 전투적으로 해결하려는 데에는 선뜻 동화할 수 없"어요. 그럴 수 있어요. 어차피 승산도 없대요. 이인화 : 당연히 "보수주의가 이기죠. 예를 들면 재령 이씨 영일파 종친회…, 전여옥을 고소한다고 해요. 지금 문중대회를 소집해서." 아하, 그 분이 재령 이씨 영일파였구나. 종친회, 유림, 문중대회, "지극히 근대적인 전통"? 특별출현. 일찍이 근대의 폐해를 척결하녀 했던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스트, "이 놈들, 공자가 다시 살아나도 용서하지 않겠다아아아." (흥선대원군)
7.revanche de Muse 뮤즈의 복수 (최보식, 액션페인팅, 변기, 인분과 황색 저널리즘.
기자의 자택 화장실. 유감스럽지만 여기서 어너러블 화이트는 대변기에로, 옐로우는 그 위에 걸터앉은 예술가의 둔부와 추락하는 카타르시스에게 돌아간다. 그대여 아는가? 영감에도 냄새가 있음을?)
"어느 일요일, 기자는 화장실에서 아내가 이동도서관에서 빌려온 한 여성작가의 소설을 보다가 던져 버렸다." "이렇게 한줌의 가치도 없는 걸 계속 써대는 오늘날의 작가란 어떻게 되어 먹은 족속들인가." "그렇게 해서 본 기사가 작성됐다." 신식변소 몽달귀신의 영감으로 작성된다."무지한 자여, 원조 벤야민에 따르면 그건 칭찬이라오. "용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게 마련인데, 요즘 여성들처럼 성형수술을 해 본 적은 없었나요?" 그러는 그대 얼굴의 현황은? "독자들이 당신 시집을 산 것은 섹스표현에 대한 호기심 때문?" 상상력의 한계는 존재의 한계.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독해가 안됐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시를 독해할 수 있습니까?" 독해가 안 된다, 당연하지, 진중권 정리 : 충성심과 이해력은 반비례한다. "송창식 노래보다도 못한 이 무기력한 시를 왜 쓰는냐…" 김흥국 노래보다도 못한 무식한 기사는 왜 쓰고? "당신의 대중성이란 뒤집으면 깊이 없음이 아닐까요?" 이인화의 대중성은 깊이 있는 대중성? "상업적 판단에서 여자를 등장시킨 겁니까?" 이건 자사 영업비밀. "그림만 그릴 것이지, 왜 소설까지 쓰려고 덤볐는가요?" 그러는 편집장은 기사만 쓸 것이지, 왜 소설까지 쓰려고 덤벼? 기자의 문학계 총평. "기자는 글로써 소음을 일으킬 줄 모르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야 했다." 안 하던 짓 하느라 욕 봤데이. 점수. "술마시고 딴 짓을 했을 때보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술 마시고 딴 짓 하지. 앞으론 술로써 고래고래 소음 일으키며, 그냥 제 존재의 본질에 어울리세요. 이어서 짝다리 집고 껌 씹으면 불량한 자세로 묻기를, "본인 스스로 이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틈새에 건달처럼 먹고사는 쪽인가요?" 좋은 질문. 호국미학의 첨병 최보식 선생, 그대는 어느 쪽이니? "본인 스스로 이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틈새에 건달처럼 먹고사는 쪽인가요?" (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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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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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말의 필요성
어떤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매우 근심하고 있었다. 아이는 열 살이나 되었는데도 아직 말을 못하는 것이었다. 원인을 찾으려고 애써 보았지만 의사들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뇌 기능은 정상입니다."
몸은 정상이었고 아이는 건강했다.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면 치료라도 해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이 빵은 너무 탔어!"
어머니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소리쳤다.
"아아, 네가 이렇게 말을 하다니! 그런데 왜 그동안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니? 우리가 그토록 달랬는데도 너는 말을 하지 않았었어."
아이는 말했다.
"그동안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처음으로 이 빵이 너무 구워져서 탔거든요."
- 만일 거기에 아무런 잘못된 것이 없다면 그대가 왜 말을 하겠는가? 만일 잘못된 것이 없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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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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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7. 동서교역로의 좁은 문 비단길 개통
비단길을 개통한 장건과 비슷한 인물을 굳이 서양사에서 찾는다면 콜럼버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첫 탐험가였으며, 그들이 개척한 새로운 교통로는 동서의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장건은 고대, 콜럼버스는 근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는 어디까지나 순수 비교일 뿐, 그들이 미친 사회적 파급력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간격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장건은 본래 탐험가로서 서역탐험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무제가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무제는 중국의 오랜 숙원이요 당시의 가장 커다란 현안이었던 북방의 흉노족을 효과적으로 치기 위해 서쪽의 월지국과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고, 장건이 그 사절단장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진한대 중국 북방에서 가공할 위력을 떨쳤던 흉노족에 대해서는 불행해도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서양 고대의 몰락과정에서 등장하는 훈족도 바로 흉노의 일파라는 설이 있다. 그들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던 기마술을 스키타이로부터 도입, 아시아에서 가장 최초로 흥기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진시황도 이들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일부를 북방으로 내몰면서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이루었고, 한고조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한나라에서는 이들의 대표인 선우에게 황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온갖 선물로 회유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전제권력을 확립한 무제 때에 이르러 국가의 명운을 건 흉노와의 대전쟁이 단행되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약 20여년간 끈질기게 되풀이되었다. 한은 위청과 곽거병 등의 뛰어난 명장을 영웅으로 배출시키면서 흉노의 세력을 약화, 이들을 외몽고 지역으로 내쫓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의 위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대규모 살상전으로 한나라측의 손실도 대단한 것이었다. 인명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재정상의 타격도 매우 심각해서 무제기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연출했다. 무제 때는 한이 국력을 가장 크게 떨쳤던 Eio이기도 하지마, 또한 쇠퇴의 씨앗을 배태한 시기이기도 하다 무제 추기에 관의 창고에는 곡식과 화폐가 넘쳐나서, 곡식이 썩어나가고 돈을 꿴 줄이 썩어 셈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나, 말기에는 바닥난 재정 타개하기 위해 염철전매법 등 신경제정책이 수립되어야 했다. 어느 날 무제는 흉노의 포로로부터 솔깃한 애기를 들었다. 흉노의 서쪽에 월지라는 나라가 있어 일찍이 흉노에 패한 바 있는데, 그왕은 흉노왕이 자신의 부친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한다는 애기를 듣고서 단단히 복수를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과 연합, 양쪽에서 흉노를 협공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훌륭한 묘안은 없을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자정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장건이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10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월지국을 향해 출발했다.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시까지 중국인들은 중국의 서쪽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역이라 하여 막연히 중국의 서쪽 지역 모두를 지칭했는데, 그 서역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좁게는 타림분지 주변을, 넓게는 중앙아시아 전역, 나아가서 서아시아까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중국의 서쪽에 중국을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는 험준한 자연조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지리적 고립이 중국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세계 문명 발생지를 볼 때 중국만이 유일하게 황하 문명 이래의 그 기본골격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장건일행이 월지를 향해 서쪽으로의 길을 떠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흉노의 포로생활이었다.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고, 그들이 국경을 밟는 순간 곧바로 흉노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장건은 그곳에서 10년이 넘는 억류생활을 해야했다. 그동안 흉노족의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었던 그는 사절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탈출, 대원국을 거쳐 마침내 월지국에 도달했다. 그러나 월지국은 이동을 거듭, 남러시아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미 비옥한 지애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들은 옛 원한을 되살려 흉노를 정벌하는 모험에 나서고자 하지 않았다. 교섭에 실패한 그는 타림분지 남쪽, 즉 천산남로로 귀국했는데,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다시 탈출, 마침내 귀향에 성공했다. 기원전 126년, 실로 13년간에 걸친 대단한 집념이었다. 흉노 부인과 종자 감보만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장건은 체격이 좋고 관대하며 신의가 두터워 흉노 등 외국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받았다고 하며, 감보는 본디 유목민족으로 활을 잘 쏘아, 험난한 여행 도중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사냥으로 생활을 자급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장건의 귀향을 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서역 견문은 무제를 비롯한 당신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제 중국인들에게는 월지 외에 대원, 오손, 강거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졌다. 인도(신독국)의 존재도 이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무제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에는 서역 제국의 신기한 물산도 있었지만, 명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건은 말하기를 대원국은 천마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데,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의 산지라고 했다. 무제는 명마를 얻기 위해 대원국에도 정벌의 군대를 보냈고, 이광리는 중국사상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은 군사가 되었다. 한나라의 위력은 서역에 진동하게 되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 국가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 심지어 로마(대진국P의 문물도 교류되게 되었다. 그 동서 문화의 교통로의 이름이 바로 비단길. 이 길을 통해 서역에 전해진 중국의 대표적인 물산이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 등이 중국에 전래되었고,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등이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들 교역품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교류는 대중적 수요에 기초를 둔 광범한 것은 아니었고, 주로 귀족들의 사치품을 위주로 한 귀족들 상호간의 교류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아름다운 광택에 매료되어 이를 사기 위해서는 어떤 비싼 값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단길을 이야기할 때 후한 대의 반초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반초는 궁정관료 반표의 아들로 (한서)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의 쌍둥이형제다. 그의 누이동생 반소는 고대중국의 가장 뛰어난 여성지식으로 반고가 죽은 후 (한서)를 완성했다. 반초는 30여년간 서역 경영에 주력, 카스피해 이동의 50여 국을 복속, 비단길을 장악했으며, 감영을 로마 사절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은 7세기 중엽 당나라 때에 가장 번영, 당의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동서양의 각종 산물과 함께 각종 종교, 과학기술, 음악, 곡예 등 민간의 기예, 풍습 등도 이 길을 통해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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