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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63호
단기 4343 / 서기 2010. 7. 5(음력 5. 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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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덜어주지 않는 슬픔은 없다. -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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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탈 쓴 여우(차호위호)
권세 있고 깃발 날리는 자의 위력을 등에 업고 뽐내는 일을 ‘범탈 쓴 여우’(차호위호)로 비긴다.
출전은 <전국책>의 ‘초책’ 편이다. 초나라 선왕(재위 서기전 370~340년) 때 위나라 ‘강을’이라는 입담쟁이가 와서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초나라에서는 재상 소해휼이 실권을 쥐고 있어서 강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선왕이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북쪽 여러 나라가 소해휼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참말로 그런가.”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강을이 ‘범탈 쓴 여우’ 이야기를 했다.
“범은 모든 짐승을 잡아먹습니다. 범이 여우를 붙잡았습니다. 여우가 범에게 ‘당신이 나를 먹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이 나를 뭇짐승의 우두머리로 삼았습니다. 그런 나를 먹으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당신 앞에서 걸어갈 테니 그 뒤를 따라와 보십시오. 뭇짐승이 도망하나 안 하나’라고 했습니다. 범은 여우 말이 그럴듯하여 여우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짐승들이 모두 도망쳤습니다. 범은 짐승들이 여우가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임금님의 영토는 오천리 사방, 군대는 백만, 이것을 소해휼 한 사람에게 맡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쪽 여러 나라가 소해휼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의 백만 군대를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내 자신
앞에서 가리킨 바로 그 사람임을 강조하여 이르는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달래시면서도 선생님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는 말에서 ‘선생님 자신’은 ‘선생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이다. 이러한 뜻의 ‘자신’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 뒤에 널리 쓰인다. 특히 인칭대명사를 앞선 말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참고 살아온 줄 아는가… 내 자신을 이기기 위해” 어느 정치인의 말을 그대로 옮긴 신문기사 제목이다.
기사의 ‘내 자신’은 ‘나 자신’으로 쓰는 게 반듯하다. 하지만 자기 또는 상대방을 강조할 때 ‘내 자신, 네 자신’으로 쓰는 예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오히려 ‘나 자신, 너 자신’보다 더 널리 쓰이고 있지 않나 싶다.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네 자신을 알라”로 써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심지어 “네 자신을 알라”를 예문으로 실어놓은 사전도 있다.
인칭대명사 ‘나, 너’ 뒤에 주격조사 또는 보격조사 ‘가’가 이어지면 ‘내가, 네가’로 된다. 일부 지방에서는 ‘나가, 너가’로 쓰기도 하지만 표준어가 아니다. 그 외의 ‘내, 네’ 형태는 ‘나, 너’에 관형격조사 ‘의’가 붙어서 줄어진 말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자신, 너의 자신’이 줄어서 ‘내 자신, 네 자신’이 된다고 해석하지 않았나 싶다. 영어의 ‘myself, yourself’ 따위의 단어들이 잘못을 부채질했을 수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재욱/시인
단감
‘단감´에서 ‘단´은 무엇을 뜻할까. 쉽게 ‘달다´의 활용형 ‘단´을 연상한다. 그래서 ‘단감´은 맛이 ‘단´ 감으로 생각하곤 한다. 익었는데 달지 않은 감은 없다. 굳이 달다는 뜻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 ‘단감´의 ‘단´은 ‘단단하다´에서 왔다. 단감은 단단한 감이다. 반대로 말랑말랑한 감은 연시(軟) 혹은 연감이라고 부른다. 연시의 일종으로 빨갛게 익은 감은 홍시(紅)다.
여보
‘여보´는 감탄사다. 느낌뿐만 아니라 부르거나 응답하는 말도 이 품사에 들어간다. ‘여보´는 부부 사이에서 부르는 호칭어로 널리 사용된다. 어른이, 가까이 있는 자기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을 부를 때도 쓴다. ‘여보´에서 ‘여´는 ‘여기´의 준 형태, ‘보´는 ‘보오´의 준 형태다. ‘여보시오´는 ‘여기 보시오´, ‘여보게´는 ‘여기 보게´, ‘여보세요´는 ‘여기 보세요´가 줄었다.
제작, 제조, 조제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해 자식을 낳으니 바로 청풍(淸風)이다"고 한 옛시조처럼 바람 한 자락 일으켜 더위를 식혀 주던 부채. 이제 선풍기와 에어컨에 밀려났지만 부드럽고 맑은 바람을 불러오는 데는 부채만 한 것도 없다.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하는 것에 빗댄 옛사람들의 입담에서 알 수 있듯이 부채는 가늘게 쪼갠 대로 살을 하고 종이 등을 발라 자루를 붙여 만들었다. 이처럼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물건이나 작품을 만드는 것을 ''제작(製作)''이라 한다. 비슷한 의미로 제조나 조제라는 말도 있다. ''제조(製造)''는 큰 규모로 물건을 만들거나 원료에 인공을 가해 정교한 제품을 만든다, ''조제(調劑)''는 여러 약품을 적절히 조합해 약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들 단어는 모두 무엇을 만든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그 대상이나 방식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조제는 약품에 한정돼 사용한다는 점에서 명확히 구별된다. 제작과 제조는 ''자동차 제작/제조''처럼 어휘에 따라선 같이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작은 개인이나 단체가 소규모로 물건을 만들 때, 제조는 공장에서 큰 규모로 물건을 만들 때 주로 쓰인다. 술 제조처럼 액체나 가루로 된 물건을 만드는 경우엔 제조를 쓰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는, 그러고는 / 그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더운 날 시원한 여름 반찬, 오이냉국 만들기. "찬물에 설탕.식초.소금을 넣어 냉국을 만든 후 냉장고에 넣어 둔다. 오이를 껍질째 소금으로 문질러 씻은 뒤 채 썰어 국간장 1작은 술, 설탕 1작은 술을 넣고 5분간 절인다. 여기에 미리 만들어 둔 냉국을 꺼내 붓는다. 그리고는 채 썬 대파와 통깨.얼음을 넣으면 요리 끝!"
흔히 문장을 연결할 때 위의 예문처럼 ''그리고는''을 쓴다. 그러나 이때의 ''그리고는''은 ''그러고는''으로 고쳐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그런데'' 등은 단어.구.절.문장 따위를 연결할 때 쓰는 접속부사다. 이러한 접속부사에는 ''은/는''이 결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다''라는 동사에서 활용한 ''그러고''에는 ''는''이 결합할 수 있다. ''그러고''의 줄어들기 전 형태인 ''그리하고''에도 ''는''을 붙여 쓸 수 있다.
''그리고 나서''라고 쓰는 사람도 많은데 이 역시 ''그러고 나서''가 옳다. ''-고 나서'' 앞에는 "밥을 먹고 나서"에서 볼 수 있듯이 동사만 올 수 있다. ''그리고''는 접속부사이기 때문에 ''-고 나서'' 형태로 쓸 수 없고 ''그러고''는 동사인 ''그러다''의 활용형이기 때문에 ''-고 나서''와 결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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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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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숲 속의 그들 - 임혜신
1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별빛도 이르지 않는 곳 여린 풀잎처럼 어둠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들어야 할 소리도 마주치는 눈길도 없는 곳에 눈 맑게 뜨고 귀 기울이며 있었습니다 결 고운 바람이 스칠 때마다 적막을 뚫고 풀벌레 울음이 흩어지던 거기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깊은 어둠에 싸여 있었습니다.
2 그곳에 등을 달고 싶었습니다 그중 단단한 나무 가지에 등불을 걸면 어두운 숲의 가슴을 열릴 것 같았습니다 저 먼 곳에서 오는 달빛으로는 알 수 없을 숲의 고요, 내부를 비추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내부에서 번져 나오는 주홍의 은밀함 멀리 이르지 못하는 조그만 등불 아래서만 아프게 드러나는 순박한 사랑을 잉태하고 싶었습니다.
3 그 숲을 나는 세상으로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은 것도 실상 착각이었는지 모르지요 어차피 깨어날 바에는 크고 검푸른 알속에서 깨어나느니 밖으로 빨리 나와서 깨어나는 것이 좋았습니다 자라나기 위해선 홀로 있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늘을 더 깊게 꽃잎들을 더 보드랍게 바람을 더 싸늘하게 홀로 있음을 더 무섭게 하기 위한 뼈아픈 시간이,
4 숲을 떠나온 지 오래입니다 뒷마당에 참나무 감나무 산딸기나무까지 자라고 그들의 향그러운 가지에 새소리가 떨어집니다 그것들은 모두 숲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꺾일 때마다 아프다 소리하던 숲, 그 이별이 이만큼 잘 자라난 아침 나는 어딘가에 잘 자라고 있을 숲 그늘을 생각합니다 나의 고독만큼 잘 익은 그곳엔 몇 번이나 잎이 지고 피었겠습니다.
5 숲으로 돌아갈 계획이 서지 않습니다 돌아가 다시 어둠을 배워야할 나는 너무 먼 곳에 살았습니다 바람이 쏟아지는 뒤뜰에 서서 하루 일과표를 찢어버립니다 지난달에는 영이 엄마가 죽고 엊그제는 잔 아저씨가 죽었습니다 용감하게 숲을 뛰쳐나와 살던 이들 긴 산 그림자 속으로 속속 돌아갔습니다 내가 숲으로 돌아가고 싶듯 숲 속의 그들도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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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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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찾아서 - 박영록
한라산 베고 누워 파랑새를 찾고 있다
풀잎은 수런수런 바다는 출렁출렁
보채던 손자 얼굴은 생긋생긋 벙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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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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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엄마 젖 - 강소천
울엄마 젖 속에는 젖도 많아요. 울언니도 시일컨 먹고 자랐고, 울오빠가 시일컨 먹고 자랐고, 내가 내가 시일컨 먹고 자랐고, 그리고 울애기도 먹고 자라니 정말 참 엄마 젖엔 젖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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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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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경림 - 그 청보랏빛 새벽길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네 제 그물에 갇힌 거미처럼 가로 세로 마구 뒤엉킨 눈발들이 뽀얀 허공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어디선가 아련히 유리 깨지는 소리 같은 것 들렸네 그때 우리는 그 밑을 묵묵히 걸어가는 먹물 같은 시간들이었을 터 눈발 사이, 밤의 푸르름은 형광빛으로 번득이고 무슨 긴 모래 같은 아픔이 그와 나 사이를 흘러갔네 거대한 밤의 나무들! 이파리 뒤에서 번득이던 수천 개의 눈알들. 툭툭 먹물 같은 눈물이 터졌네 생각나네, 먹어도 먹어도 갈증 솟던 그 검은 우물물 수면 위로 어른거리던 알 수 없는 무늬들, 문득 내 안에서 한때의 구름이 일었네 나는 갈참나무 한 잎처럼 가볍게 혹은 무겁게 흔들렸네 흔들리면서 검은 구름 한때를 고요히 게워냈네
시 '그 겨울 밤'전문
너를 만난다 절망은 미친 바람으로 내 등을 밀어붙여 나를 바다의 끝에 데려다 놓는다 그 끝에서 허기처럼 너는 온다 파도를 등에 업고 어둠의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등대 옆에 있는 풍향계를 밟고 도는 바람이 너를 자꾸 기울게 한다 모래사장이 점점 솟아오르고 바람이 죽은 나무들을 깨운다 너의 파도에 내가 휩쓸린다
'안암동 5- 연애'
인생을 계절로 표현한다면 4,50대는 다사다난했던 한 생의 가을쯤이 아닐까? 그것들 중, 그나마 축축하게 오래 끌어안고 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된다. 라즈니쉬 수상집에 보면 '모든 사람이 황금빛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나 착각이다. 황금빛 어린 시절은 없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에 있어서 단 한번 황금빛 아니 핑크빛 시절이 있다면 그것은 첫사랑을 시작할 무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무렵의 누구도 그 환상적인 색채의 아우라속에 한번쯤 갇혀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이 이루어진 사랑이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든 우리는 일생을 통해 그 찬연한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일 때 더욱 감미롭게 기억될 것이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 집은 고려대 뒤쪽 안암동 산동네에 있었다. 산기슭에 물방게처럼 붙어 있던 집들, 겨울이면 숫제 앉아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왕모래의 길. 종일 그치지 않고 들리던 싸움소리. 공동수도에 끝없이 늘어서 있던 입 벌린 물통들...... 우리는 그곳에서 이웃으로 만났다. 그는 시골에서 올라온 유학생이었다. 햇빛이 투명했던 봄날. 베레모에 제비꼬리 칼라의 교복을 입은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거의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올랐을 때, 나는 풀밭에서 네댓 살 된 이웃집 경이를 데리고 장난을 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언니!'하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 아이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던 것이다.
"우리 오빠야, 시골서 왔어. 우리 집에 살 거야."
얼굴이 까맣고 수줍음을 타는 전형적인 시골 학생인 그는 나를 보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나도 왠지 쑥스러워 그냥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후 우리는 양쪽 집이 가까웠던 관계로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공부벌레였다. 우리는 집옆에 있는 개척교회에 딸린 토굴 기도실에서 밤샘 공부를 같이하는 동지가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밤새 축축한 토굴 속에서 '어부사시사', '월인천강지고', '사미인곡'등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의 곡에 붙여 외우던 기억이며, 그때 서울에서 처음 생긴 정릉의 사설 독서실에서의 밤샘 공부, 새벽 네 시쯤이면 문득 졸음이 걷히고 혓바닥에 이끼가 돋는 듯하던 신신한 느낌이며, 돔바위산 및 채석장에서 그가 불러주던 '딜라일라'. ......그래 지금도 생생하다. 독서실에서 함께 돌아오던 청보랏빛 새벽 산길, 부모님 몰래 보았던 '쉘부르의 우산', '벤허', '율리시즈', '콰이강의 다리'....... 그때 우리는 차비 3원이 없어서 돈암동에서 재동까지 걸어 다니는 가난뱅이들이었지만 그와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푸른 끈이 우리를 슬프지도 지겹지도 않게 해주었다. 어느 날은 밤샘 독서실에서 코피 흘리는 그를 부축해 오기도 했고, 대학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은 이상하게 절박해져 수유리 4.19묘지까지 걸어갔다 오기도 했다. 고3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데 라디오에서 '북치는 소년' 이라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 곡이 왜 그리도 슬프고 애절한지, 온몸의 뼈가 아픈 슬픔이란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다. 불현 듯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새벽 두 시에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고려대 뒷산을 가르는 오솔길이 그날따라 유난히 희게 빛났다. 이파리들은 아청빛으로 반짝이고 세상이 형언할 수 없이 가볍고 슬픈 것들에 싸여 흔들렸다. 그의 방에 발그레한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손 닿을 수 없는 먼 세상의 것처럼 깊고 아득했다. 나는 그의 방이 비스듬히 보이는 둔덕에 아주 오래 앉아있었다. 발 아래 세상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때 나는 천상의 어떤 세상에 있었다. 어쩐지 그와 내가 무슨 슬픈 비극 속의 연인들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상황을 나는 첫시집의 안암동 연작에서 이렇게 썼다.
누가 씹다 버린 희망이나 못다 이룬 잠 더럽혀진 그리움 같은 것들이 판잣집 촉수 낮은 불빛에 고여 골목길을 돌아오는 너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는 일은 하릴없고.....어둠이 비탈길을 휩쓸 때 산 뒤편 부촌으로 난 오솔길은 무섭도록 희다 삶이여 키 큰 바람이 산 아래서 우악스레 거슬러 오를 때 황사에 싸여 회오리처럼 몰려오는 허기여 아, 하루는 허기처럼 길고 거리에는 이루지 못할 사랑이 휴지처럼 쌓인다 숨고 싶어라 돔바위 산을 스미는 시린 물소리 바람소리 거친 숨소리 울음소리 그 아래로 어둠에 쌓인 산 서서히 제 그림자를 키우는
'안암동 1-돔바위 산'
그날 이후 얼마동안 나는 그의 방의 불빛이 꺼지고야 잠드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입시를 앞둔 이들 특유의 초조에서 나오는 광기쯤으로 생각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우린 너무 어렸고 또 너무 가족 같았기 때문이다. 그 겨울이 가고 그와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는 학교가 가까운 동네로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리곤 각자 새로운 환경과 생활에 적응하기에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 가슴 한켠에는 그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입대하게 되었다고 나를 찾아왔는데 그때 나는 너무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 때 나는 정신적으로 말 할 수 없이 황폐하고 지쳐 있었다. 그가 내게,"헤어져 있는 동안 네가 얼마나 나에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어"하고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할 때 나는 "그런 한가한 생각은 부르주아들이나 하는 거 아냐?"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생기지도 않은 애인이 생겼다고 나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마구 지껄어댔다. 나는 모든 것이 벽이고 벼랑이라고 생각되었다. 끝간 데 없는 분노와 반발만이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내가 너무 황폐해있다며 화를 냈고 우리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뚝방에서 밤새 다투다 지쳐 그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튿날 그는 군에 입대했고 그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그후 나는 내가 예감했던 대로, 말도 안되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버렸다. 그것은 나보다 휠씬 윤택한 환경에 있던 그에 대한 반발이나 일종의 시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오랜 후에야 나는 생각했다.
첫사랑의 기억은 대개 어떤 아우라에 싸여 우리들의 뇌리에 혹은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남이 보기엔 정말 미미하고 하찮은 일일 수도 있는 순식간에 어떤 광휘에 휩싸여 생의 한 순간을 휘어잡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시작된다. 그 순간의 일어나는 그 신비스런 움직임을 어떤 과학자가 어떤 증명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나의 졸작 중에 이런 시가 있다.
희양산 계곡 물 속에서 돌 하나 보았다 수많은 돌 틈에서 유난히 다른 색깔로 물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위를 흐를 때 물은 아주 다른 빛깔이 되었다 물의 미세한 결이 다 보였다 순간이었다, 그를 벗어난 물은 태연히 다른 몸들을 넘어갔다 어둑한 몸들을 넘어가는 물소리가 계곡을 꽉 붙들고 있었다
- '돌'
어느 날 나는 어떤 계곡 물 속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깔의 돌을 발견하였다. 그 빛깔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위를 흘러가는 물까지 다른 물과는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흐르는 물 속의 돌과 그위를 흘러가는 물을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돌은 그 자리에 그냥 있었지만 그 위를 흘러가는 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물들은 한결같이 그 돌 위에서만 유난히 다른 빛깔로 반짝였다. 아주 잠깐! 그것을 넘어 간 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다시 어둑한 빛깔이 되어 계곡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일 게다. 우리가 사랑을 느낄 때, 혹은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그 순간의 돌이나 물이 될 것이다. 그때 그 물이나 돌은 그 순간 그곳에 있었으므로 서로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맥 빠지는 이야기 같지만 나는 그때 물속의 돌을 물 밖으로 꺼내보았다. 그러나 물을 벗어난 돌은 물이 마르자 순식간에 여느 돌과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한돌멩이가 되어 버렸다. 사랑도 마찬가지리라. 근래에 와서야 나는 사랑이란 하나의 '상황'이란 걸 알았다. 후일담이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아주 오래 후에(40이 훨씬 넘어)우연한 기회에 한 문인의 집에서 만났다. 처음 우리는 서로 잘 알아보지는 못했다.
"혹시.....안암동에 살던 경림씨 아니세요?"
이런 어색한 탐색전이 오간 뒤에야 서로를 알아볼 정도였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틋해 했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나도 평범한 40대의 찌들린 샐러리맨의 모습이었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언뜻 탐욕스런 모습까지 보여주는 그를 보며 나는 한량없이 쓸쓸했다. 과연 이 사람이 수십년 내 가슴 한켠에 집을 짓고 한사코 떠나지 않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그때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젊음'이나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그러나 상황이든 젊음이든 아니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어떤 사건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첫사랑'이란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 생의 과자인가!
이경림 - 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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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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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후퇴
앨버트가 또 학교에 지각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완벽한 변명거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정말 걷기가 힘들었어요. 한 걸음을 옮기면 두 걸음 뒤로 미끄러졌어요." 선생님이 물었다. "그러냐? 좋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지?" 앨버트가 말했다. "그래서 저는 학교로 오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향했어요. 그런데 역시 한 걸음 나아가면 두 걸음 후퇴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다보니 마침내 학교까지 후퇴했지 뭐예요."
- 변명을 만들지 말라. 그것은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이 변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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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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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선의 힘
옳지 못한 행실을 한다고 하여 냉소를 보내지 마라. 옳지 못한 행실을 한다고 하여 옳지 못한 대접을 하게 되면 계속해서 옳지 못한 행실을 한다. 잘못된 행실을 이유로 상대를 폐인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가 잘못된 행실을 하고 있는 것은 제 궤도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는 것이고, 바른 행실도 돌아오기 위해서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빨리 잘못된 행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는 그이다. 악을 저지르고 있는 그야말로 선을 가장 많이 갈망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우리가 베풀어야 할 일은 그가 제 궤도를 찾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것이다. 그에게 차가운 눈총을 보내서 오기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따뜻한 도피처를 제공해서 더 이상 악이 발동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악도 따뜻한 감정에 싸이면 선으로 돌아온다. 진실로 인간적인 대우를 해 주면 스스로 나쁜 행동에서 빠져나온다. 세상에 이유 없는 악은 없다. 악이 좋아 악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궁지에 몰려 도피처가 없거나 주위 사람들의 차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해서 계속해서 악을 저지른다. 그들을 우리 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악에 대신해서 선을 베풀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을 동화시키는 것은 오직 선이며, 사람과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 영원한 친구로 만들어 주는 것도 오직 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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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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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에세이
문화적 비전 확립의 필요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 관심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는 분명치 않다. 신문 지면마다 화려한 올컬러판 문화 정보들이 흘러 넘치는가 하면, 각 문화쎈터에도 여러 장르의 문화강의가 개설되어 성업중이다.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면서, 지방 단위의 문화 행사들도 봇물 터지듯 기획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맹이가 있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없이 들떠있고, 어떤 문제의식을 둘러싸고 문화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기보다는, 일회성 이벤트나 화제성에 따라 그때그때 반짝하고는 꺼져 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문화 욕구의 빅뱅 현상은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이다. 7,80년대의 우리 사회는 정치적 사고방식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의 양식과 방향을 결정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대중은 훨씬 더 본질적인 층위에서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처럼 인간의 일차적 삶이 아니라, 훨씬 더 화사한,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을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란, 인간이 절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문제, 즉 존재라는 알 수 없는 괴물을 다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본성상 인간이 삶 속에서 영위하게 되는 행위 중에서 가장 무상성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본질적인 층위에서 삶을 성찰하게 해준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깊은 정서적 만족감을 제공한다. 따라서 7,80년대까지 한번도 본격적인 문화 욕구를 분출시켰던 적이 없는 대중이 안으로부터 떠다 밀리듯 문화를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팽창된 문화 욕구를 정부나 문화 관리자들이 순전히 기능주의적인 방식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정부 당국이 문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식견은 '문화가 장사가 된다'는 시각이고, 대부분의 문화 관리자들도 '흥행성'과 '대중성'을 확보한, 대중의 호기심을 쉽게 자극할 수 있는 문화 품목만 매개하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해야만 쉽게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안에서는 팔리는 문화만이 의미 있는 문화라고 여겨진다. 문화는 두 가지 기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재미'를 제공함으로써, 그때그때 삶을 좀더 즐겁게 지내게 해주는 기능이다. 그러한 문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아무런 훈련도 필요하지 않다. 감각 수준에서 반응하고 소비하고 잊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화는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문화는 만들어지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일정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화는 당장 돈을 벌어들이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오래 가며, 사회 전체의 문화적 역량을 한 단계 올려놓는 데 기여한다. 그것은 삶의 상수로서 시간에 버티며 끊임없는 의미작용에 참여한다. 이러한 문화가 세계적 수준에서도 오랫동안 매력을 행사하며, 단발성 장사가 아니라, 꾸준한 구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 생산과 소비 현상은 이러한 문화를 죽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삶의 상수가 될 수 있는 문화는 얼마 안 가 다 무너지고 말 것 같다. 그리고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가벼운 문화만이 정신의 폐허 위에 거품처럼 떠돌 것이다. 나는 지금 우리 나라의 문화적 상황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그리고 어느 사회보다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화적 욕구는 엄청나게 크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개인성의 생생함이 몽땅 탈각된 집단주의적 관념형 문화만 주입 받아 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금 그 욕구는 형태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금은 무턱대고 문화 이벤트들을 벌릴 때가 아니라, 문화 현장을 차분히 분석하고 문화적 비전을 확립해야 할 때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 문화는 곧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제대로 물꼬를 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국제 사회의 비웃음을 사는 싸구려 문화국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장사? 물론 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 하자. 그리고 고급으로 하자. (99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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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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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김소월 전집 - 김소월(1902~1934)
소월 김정식은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 진달래꽃(1925)을 냈으나, 그의 사후 스승인 김억이 그 유고작을 수습하여 소월시초(1939)로 다시 출판한 바 있다.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민요적 가락과 여성적 어조로 표현한 소월의 시들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무거운 가슴을 카타르시스해주었다. 소월의 시를 민족시, 민중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고독한 시인
평북 정주군 곽산면에서 김성도와 장경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정식, 개화의 도시 정주는 이광수나 김억 등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들을 배출했음은 물론, 안창호나 조만식 선생과 같은 선각자도 그 부근에서 출생했을 정도로, 일찍이 서구사상을 수용한 도시였다. 또한 정주는 하나의 서정시인을 기르는 데 부족함이 없는 수려한 도시였다. 소월이 그의 시에서 즐겨 노래한 산과 바다강 등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의 고향이 그 모태가 되었고, 워즈워스가 그의 고향 컴벌랜드의 자연을 시로 읊었던 것과 같이, 소월 역시 고향의 자연을 통해서 삶의 본질적이고도 근원적인 감성을 노래했다.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소월은 가족들의 사랑 속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2살 때 그의 부친은 나들이를 가다가, 철도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소월문학의 주제가 되는 한은 여기서 시작된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고 숙모인 계희영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특히 계희영은 소월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 친정에서 읽은 고대소설 설화로서는 더이상 소월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자, '언문 이야기 책'을 사서 보고 이 꿈 많은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다. 할아버지의 배려로 독선생을 모시고 공부하던 수월은 7살 때 그의 고향 뒷산에 남산보통학교가 설립되자, 여기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게 된다. 1915년에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교장이던 이승훈 선생, 교사이던 조만식 선생이 있던 오산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생에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그것은 첫째 그가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신 안서 김억을 만난 것이고, 둘째는 폐쇄된 향토생활을 떠나 민족이나 국가차원으로 시야를 넓히게 된 점이다.
1916년에는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홍단실과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한다.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숙모 계희영에게 불만을 털어놓긴 했지만 버리지는 않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자 졸업 1년을 남기고 배재고등학교에 편입해 1923년 졸업했다. 이때 성적은 44명 중 4위 정도였다고 한다. 곧바로 도일하여 동경상대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그해 10월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를 모시고 큰 집을 지키며 농사일을 돌보았다. 원래 비사교적인 성격인 그는 이제 외부와의 대화가 단절된 채 외롭고 적막한 생활을 했다. 정신이상자인 부친, 무식했던 어머니, 유교사상에 철저했던 조부, 애정을 줄 수 없었던 아내, 이미 기울기 시작한 가산, 무능한 자신에게 떠맡겨진 장남으로서의 책임,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적 결함 등은 심성이 연약한 소월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유일한 말벗이던 숙모가 남편을 따라 평양으로 이사를 가자, 그는 자폐적 생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고향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구성으로 분가해 갔다.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떨치고 싶었으리라. 그곳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기도 하고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기도 했으나, 결과는 빈손뿐이었다. 이즈음에는 일본인들의 감시도 심해졌다. 답답하고 울적한 소월은 그의 스승인 김억에게 자신의 심경을 편지에 담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이상과 꿈에 대한 좌절,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 적응할 수 없는 현실과 세속적인 삶에 대한 절망, 대화의 단절, 문학의 한계성에 대한 자각과 역사의 거대한 횡포 등은 나약하고 소심했던 서정시인을 폐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소월은 이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술로 위안을 삼으면서 집에서, 시장터에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아내와 더불어 그는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독백하고, 때로는 절규하면서자신과 세상을 조소했다. 소월이 고향을 떠나 처가로 이사해온 후의 10년간은 그의 정신과 육체가, 그의 문학과 생활이 하나씩 몰락해간 기간이었다. 남은것은 그가 어떤 죽음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였다. 1934년 32세 때 고향의 조상 무덤을 둘러보고, 그날 밤도 아내와 술을 마신 후 홀로 아편을 술에 타서 마시고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민족시인은 그것을 비극으로 초월하기보다는 한으로 남긴 채 꿈꾸듯 이 세상을 떠났다.
소월의 작품세계와 주요작품
한국 현대시사에서 소월의 시만큼 애송되는 시도 드물다. 소월의 시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한민족의 무거운 가슴을 카타르시스해주었다. 수월의 시를 민족시민중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소월의 시가 그토록 대중성을 확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의 정서
소월시에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한의 미학이다. 소월시는 그 어느 것을 살펴보아도 그 안에 저 끈질긴, 그러면서도 연약하고 풀 길 없는 맺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진달래 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저 '풀 길 없는 맺힌 감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은 뚜렷한 이유도, 잘못도 없으면서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오직 그만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한 대가가 임으로부터의 배신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싶지 않다. 아니 자기를 사랑하는 임은 결코 자신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자기합리화에 빠진 시인은 현실적으로는 떠나간 임인데도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떠나가는 임에게 진달래꽃을 뿌려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3연에서는 떠나가는 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감정을 보이다가 4연에서는 임이 내 곁을 떠나가는 원인이 내 자신에게 있을 수 있다는 자기성찰 내지는 자기반성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시에는 이렇듯 절망과 미련, 원망과 자책이라는 모순된 감정의 복합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소월의 시에서 보편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저 끈질긴 한이란, 바로 이처럼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고, 이별하면서도 그것을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모순의 감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고전문학에 반영된 일반적 정서이기도 하며, 거문고나 판소리의 흐느낌, 동양화의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선의 감정이기도 하다. 소월은 우리 민족의 심층에 전승되고 있는 이 한을 시화했기에 민족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여성적 어조
소월의 시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여성적 어조에 있다. 물론 소월 시 중에는 남성적 절규를 표현한 <초혼> 같은 시도 있으나 이들 작품은 매우 예외적이다.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이 시를 보면 우리는 시의 주인공이 은연중에 여성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은 이 시의 내용인 이별과 기다림, 그리고 이룰수 없는 사랑의 한등이 모두 여성 쪽의 입장에서 노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우선 이 시의 주인공이 소극적인 의사표현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월 시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에 의해서 사랑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셋째는 소월시에 표현된 감정은 자기 부정적이거나 자기 희생적이며, 주인공의 운명론적 인생관이다. 상황의 변화에 순종할 뿐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능동적 의지가 결여된,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남성의 그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조선조 여인들의 인생관에 가깝다. 소월은 왜 이토록 여성적 정감에 탐닉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소월이 유년시절부터 여성들 틈에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닐까?
민요적 어조
우리는 흔히 소월을 민요시인이라고 부른다. 소월의 시가 민요시라는 견해에는 대체로 두 가지 측면의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시의 음률상 소월의 시가 전래민요의 리듬을 차용하거나 계승발전시켰다는 의미와, 둘째는 그외에 민요가 가지는 일반적 속성, 예를 들면 향토적 소재, 설화적 내용, 민중적 정감, 방언의 차용, 전통복귀의식, 반복법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민요의 기본 음보는 2음보와 3음보이며, 4음보는 2음보의 배수인데, 소월시가 우리민요의 음보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했음을 7.5조의 <산유화>를 통해 음미해보자.
산유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어느 비평가의 통계에 따르면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시 126편 가운데 93편이 민요적 율격으로 씌어졌다 한다. 소월시에 짙게 깔려 있는 향토적 분위기, 민속적 감정, 설화적 내용 등은 아마도 숙모인 계희영에게서 들은 고대설화나 민담 등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민족주의 이념
소월 시를 논함에 있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의 민족의식에 관한 것이다. 소월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의 서정시인만은 아니다. 소월이 개별작품에 표현했던 사랑은 그의 문학 전체를 놓고 조망해볼 때 이성에 대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 그의 민족적 차원을 지향한다. 물론 소월이 직접적으로 현실과 투쟁한 저항시인은 아니다. 또 저항시를 쓰는 것만이 최선의 길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현실도피적이고 식민지인으로서의 패배적 감상주의를 자족적인 슬픔을 통해 노래한 시인이기도 했다. 민족시인 소월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그가 민족시인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민족주의 시인이라는 뜻이다. 전자가 문화적 개념이면, 후자는 정치사회적 개념이다. 소월이 민족시인이라는 말은 그의 시가 한민족의 심층에 전승하는 무형의 가치, 즉 민족적 원형질에 기초를 두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한국인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한민족의 집단무의식에서 발원하는 감수성을 느낀다. 한편 소월시는 그가 구체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인의 불행과 슬픔을 노래함으로써,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는 점에서 민족의 시다. 그가 오산학교에서 얻은 이승훈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은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만해와 함께 1920년대 대표적 시인
당시 한국문단을 주도하던 문인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자라 일본유학을 통해 서구의 문학을 배운 후 동인지를 만들며 창작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소월은 서울문단의 흐름과는 일정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시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탁월한 시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한용운과 함께 한국 현대시의 기점인 192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간주된다. 그의 시정신은 인생의 깊은 허무와 고독에서 발원하는 연민과 사랑을 노래했고, 사랑의 기본정신인 자기희생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시인, 다시 말해서 자기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진실을 노래하는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소월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그들도 소월의 공적은 인정하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식민지 현실에의 대응방식이 소극적, 애상적, 자기유폐적, 과거지향적이며,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하고 정조속에 숨어 버림으로써, 그의 시는 창조적인 미래 속에서 체험되지 않는다는 한계성을 지적한다. 사실 소월론을 쓰려는 순간, 과연 소월론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소월은 정감으로 다가오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소월론을 읽는 것보다 소월의 시를 읽는 편이 훨씬 진한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들이 할 일은 스스로 작품을 읽고 음미해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독자들께서는 가장 비극적인 시대를 살다가 간 위대한 서정시인의 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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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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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보름달
수피 신비주의자 한 사람이 위대한 이란 왕의 명을 받고 사자로서 인도 왕에게 보내졌다. 이란 왕은 인도 왕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으므로 근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수피 신비주의자를 보내어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오해들을 풀고 서로의 이해를 돕고자 한 것이었다. 신비주의자는 인도 왕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보름달이십니다."
그가 왕에게 '대왕께서는 보름달이십니다.'라고 말했다는 소식이 이란 왕에게 전해졌다. 그런데 그 신비주의자는 이란을 떠날 때 이란 왕에게 '대왕께서는 초승달이십니다.'라고 말했었던 것이었다. 이란 왕은 매우 화가 났다. 초승달이라고? 그것은 바로 이제 시작하는 초하루의 달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는 인도 왕에게는 그가 보름달이라고 말했었다. 이것은 이란 왕에게는 모욕이었다.
"그를 소환하라!"
이란 왕은 분노하여 기다렸다. 신비주의자는 돌아오자마자 즉시 붙잡혀서 법정으로 보내졌고 문책 받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보름달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 죽는 것이며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지요. 보름달은 과거는 있으나 미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 왕에게 '당신은 보름달이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러나 대왕이시여. 나는 대왕을 초승달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왕은 미래가 있고 가능성이 있으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인도 왕의 위엄은 위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죽은 겁니다."
- 보라. 어떤 것이 과거를 가질 때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과학은 과거로 간다. 만약에 당신이 정신 분석학자에게 간다면 그는 당신의 과거를 들추어낸다. 그는 말할 것이다.
"당신의 모든 과거를 말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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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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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11.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륙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류의 건조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만리장성을 꼽을 것이다. 오늘날 북경 교외의 팔달령으로 오르는 장성은 관광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장성의 입구에는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을 어찌 사나이라 하리)라고 씌어진 모택동의 글귀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성에 이르는 계단을 약 40분 오르면, 해발 1,015m의 정상에 다다른다. 그 정상에서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준령의 물결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장려함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에 축조된 것이다. 본래 장성은 토성이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위치가 변하기도 하고 보수, 확장이 거듭 되었으니, 그 총연장을 합치면, 아마도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본래 만리 장성은 진시황 때 이 무렵 중국 북방을 위협하던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흉노는 아시아 최초로 기마술을 터득한 유목민족으로, 놀라운 기동력으로써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성은 서쪽의 감숙 성 임조에서 시작, 황하 북쪽을 휘돌고, 음산을 따라 조나라와 연나라 때 이미 축조되었던 성벽을 연결, 동쪽으로 요령성 양평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북방에 이어져 있었다. 비록 기존에 있던 성벽을 연결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엄청난 대역사였다. 성벽은 단순히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이도 대단해서 성벽 위로 5필 정도의 말이나, 10열의 병사가 동시에 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됐든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진시황의 중국통일의 과업은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적 세계를 북방의 유목민족과 구별하는 북방한계선이 되었고, 만리장성 이남으로 표현되는 중국의 영역은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중국의 명칭이 진에서 유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진시황 - 그의 이름은 정, 기원전 259년 장양왕 자초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살, 정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 태후와 여불위에게 맡겨졌다. 여불위는 대상인 출신으로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품고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자초에 접근,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공작을 통해 그를 즉위시켰다. 그는 자초가 자신의 애첩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그녀마저도 자초에게 내주었는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한다. 그 아이가 바로 진왕 정. 그렇다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실부가 되는 셈이다. 그가 학자나 변론가 3천 명을 빈객으로 우대하고, (여씨춘추)라는 일종의 대백과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니 그의 재력과 권세는 가히 천하를 호령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기원전 238년 성인 의식을 치르고 친정에 들어가자, 냉철하고 과단성있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의 중상책은 다시 억제되고, 상앙 이래의 전통적 개혁정책이 강행되었다. 낙양에 연금되었던 여불위는 마침내 전도를 비관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재상으로 등용된 이사는 강력한 법치로써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시황은 하루에 30kg의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고한다.
39살의 나이에 천하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 된 그는 자신의 명칭이 종래 6국 군주와는 차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리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니, 바로 시황제이다. 황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란 자연계와 인간계를 지배하는 최고신을 의미한다. 이제 군주는 '하늘의 아들', 혹은'천명을 받은 자'정도가 아니라, '절대신' 그 자체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가히 전제군주의 출현에 걸맞은 칭호라 할 것이다. 전제군주 시황제의 명령은 군현제를 통해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황제라는 칭호가 허황한 이름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간접통치 방식인 봉건제는 폐지되고, 군현제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전국은 36개의 군으로 나뉘고, 군 밑엔 현, 향, 정, 리를 두었다.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지방의 토착세력이 아니라, 중앙에서 황제의 대행자로 파견되어 황제의 신임에 절대 의존하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대체 되었다. 이제 황제는 백성들을 직접 지배하게 되었으며, 최초로 중국 전역은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통치체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도 함양으로부터 지방 각지로 뻗어나가는 방사선의 도로망이 정비, 황제의 명령이 전파되었고, 반란군이 발생되었을 때는 신속한 진압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도로건설의 과정에서 반란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성벽이나 진지 등에 제거되었다. 전국의 토착부호 12만 호가 강제로 수도에 이주당했으며, 민간 소유의 무기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을 5차례에 걸쳐 순행하고, 태산 등 명산에 올라 거대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통일국가 속에서 문자, 도량형, 화폐등도 통일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진시황을 폭군적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통일책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 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 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랬다.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 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의 소지도 금지되었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의 자유로운 학술토론도 금지되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관에 수거되고 잿더미로 화했다. 옛 서적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당하는, 이른바 갱유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말렸던 그의 장자 부소도 멀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독재적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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