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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60호
단기 4343 / 서기 2010. 6. 16 (음력 5. 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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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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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백교문학상 작품 공모
효친사상 주제 … 7월 30일 마감
고향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그리는 작품을 공모합니다. 지난해 가을 강릉시 경포 핸다리 마을에 세워진 사모정(思母亭) 시비공원이 미래의 등불인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사랑하는 애향심과 부모님을 그리는 효사상을 함양시키는 정신적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자 작품을 공모합니다. 날로 꺼져가는 효심을 높이기 위해 백교문학회에서는 해마다 공모를 통해 우수 작품을 선정, 가을에 백교문학상을 시상하고자 합니다. 강원도민일보가 후원하는 이번 공모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작품내용 : 효친사상이 바탕을 이루는 글 ◇공모분야 : 시/ 수필 ◇원고분량 : 시 5편/수필 2편(편당 200자 원고지 13매 내외. 단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글은 원고지 매수를 적을 것) ◇작품대상 : △상금 100만원 △상패 △신문·문학지에 발표 △대상 작품 시비 건립 ◇선정편수 : 시/수필 각각 1편씩 ◇응모요령 : △작품은 발표된 적이 없는 순수 창작이어야 함 △입상작에 대한 모든 권리는 당선작 발표부터 3년간 본 문학회가 소유함 △응모작품은 일체 반환하지 않음 △필명인 경우 본명을 명기하고 주소· 전화번호를 적을 것 ◇원고마감 : 2010년 7월 30일(마감일시 소인 유효) ◇발 표 : 2010년 8월 15일 (개별통지) ◇보내실 곳 : 문파문학 편집부(서울시 은평구 갈현1동 419-19/우편번호 122-810) ◇연 락 처 : 010-5352-5331(권혁승 전 한국일보 상임고문) (02) 388-1302(문파문학 ·월간) ◇주 최 : 백교문학회 ◇후 원 : 강원도민일보사 · 문파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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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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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질 끄는 사람은 항상 파멸로 몸부림친다. - 헤시오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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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어린이날 가족 나들이, 소풍 또는 운동회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대개 김밥, 삶은 달걀, 사이다나 콜라가 등장하던 때가 있었다. 형편이 나아진 요즘, 이것들은 너무 흔한 것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더 진한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다’(cider)는 원래 영어권에서 사과즙으로 만든 주스(미국) 또는 사과술(영국)을 뜻한다. 그러나 구한말에 일제 사이다(サイダ─)가 들어오면서 원래의 뜻이 아닌 설탕물에 탄산나트륨과 향료를 섞어 만들어, 달고 시원한 맛이 나는 지금의 청량음료를 뜻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사이다, 경인합동사이다 등 일본계 사이다 제품이 있었고, 1945년 광복 뒤에는 서울사이다, 삼성사이다, 스타사이다 등 국내 기업 제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사이다는 영어권에서 ‘소다’(soda)라 이르는데, 영어의 ‘소다’에는 사이다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콜라와 같은 청량음료가 모두 포함된다. 여기에 더하여 생수에 탄산이 포함된 탄산수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말로 양잿물이라고 하는 (중)탄산나트륨, 가성소다(수산화나트륨), 세탁용 소다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소다’는 가성소다나 탄산소다 등 금속 나트륨과 화합하여 생긴 염 정도를 뜻하여 영어권의 쓰임과 차이가 있으며, 주변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은 빵을 구울 때 넣는 ‘베이킹 소다’(baking soda)이다.
김선철/문화체육관광부 학예연구관
사마귀의 도끼(당랑지부, 당랑거철)
사마귀(당랑)가 등을 빳빳이 세우고 도끼를 추켜올려 으르대는 자세를 취한다. 그 턱없이 거센 서릿발은 일찍부터 사람의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장자>의 ‘인간세’ 편에 “그대, 저 사마귀를 아는가 모르는가. 그가 팔을 추켜세우고 수레바퀴에 부딪는다. 그가 제 할 일을 이겨내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짓이다. 그러면서 제 재주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경계하고 삼가라. 이를 어기면 위태로운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는 사마귀의 도끼 이야기는 없지만, 제 힘이 모자람을 돌아보지 않고 적에게 대드는 일이 덧없는 저항이라는 뜻은 엿보인다. 이것이 ‘사마귀의 도끼’로 나타나는 것은 육조시대 양나라 때 편찬된 <문선>에서다. 진림이라는 사람이 쓴 “원소를 위해서 예주에 격문을 보낸다”는 글이다. 그 글 가운데 “사마귀의 도끼로 큰 수레의 바퀴를 막으려고 한다”는 대목이 있다. “제나라 장공이 사냥을 나가는데, 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멈추려 했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하늘 보고 주먹질(손가락질)한다”는 것이 있다. 하늘이 밉다고 주먹질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감히 당치도 않은 엄청난 짓을 한다는 뜻이다.
“사마귀가 발도끼로 큰 수레를 막는다”는 것은 “하늘을 보고 주먹질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수작
수작(酬酌)은 본래 술잔을 주고받는다는 뜻이었다. 의미가 확대돼 ‘서로 말을 주고받음. 또는 그 말’이라는 뜻이 됐다. ‘서림이가 일변 밥을 먹으며 일변 김억석이와 수작하는 동안에….’(홍명희, ‘임꺽정’) ‘남의 말이나 행동 등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란 뜻으로 많이 쓰인다. ‘엉뚱한 수작, 수작을 부리다, 수작에 말려들다, 수작에 넘어가다.’
동생과 아우
동생은 본래 지금의 의미가 아니었다.‘한배에서 태어난 사람’을 뜻했다. 대신 ‘아우’가 현재의 ‘동생’이 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러나 ‘아우’는 지금도 그렇듯이 쓰임새가 제한적이었다. 같은 성(性) 사이에서만 쓰였다. 남자는 남동생에게만 ‘아우’라고 했다. 현재도 마찬가지다.‘아우’는 ‘동생’이 ‘아우’의 의미를 가지면서 자리를 거의 다 내줬다.
암닭, 암탉 / 닭 벼슬
사람들은 왜 여름이면 삼계탕을 즐겨 먹을까. 우선 닭은 섬유가 가늘고 근육 속에 지방이 섞이지 않아 소화와 흡수가 잘되며 맛이 담백하다. 또한 인삼은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피로를 풀어 주며, 밤과 대추는 위를 보호하고 빈혈을 예방해 준다. 그래서 지치기 쉬운 여름에 삼계탕을 먹는 것이다.
닭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지만 닭과 관련해 잘못 쓰기 쉬운 단어들이 몇몇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닭 벼슬''이다. "베컴은 멋진 축구 실력을 보여준 것은 물론 ''닭 벼슬'' 머리로 유행을 이끌었다"에서처럼 ''닭이나 새의 이마 위에 세로로 붙은 살 조각''을 ''벼슬''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이 단어를 표준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볏''이 표준어이고 ''벼슬''은 경남.충청 지방의 방언이다.
또한 닭의 암수를 이를 때 흔히 ''암닭'' ''수닭''이라고 쓰지만 이것도 잘못이다. 옛말에 쓰였던 ㅎ의 흔적을 반영해 ''암탉'' ''수탉''으로 하는 게 맞다. 한편 촌스럽고 어릿어릿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촌닭''이란 단어를 발음 그대로 ''촌딱''이라고 적는 실수도 자주 볼 수 있다.
널브러지다, 널부러지다, 너부러지다
장마가 끝나자 한강 둔치에는 어디서 떠내려왔는지 모를 쓰레기 더미가 ''널부러져'' 있다. 사람들이 산이나 유원지에 가서 무심코 버린 술병, 음료수 깡통, 과자 봉지와 음식 찌꺼기들이 장마 통에 쓸려 내려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온 국토가 쓰레기로 된통 몸살을 앓고 있다.
''널부러지다''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표기법상으로는 잘못이다. 두 가지 경우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너저분하게 흐트러지거나 흩어져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방에는 빈 술병과 먹다 만 안주들이 널부러져 있었다"처럼 잘못 쓰는 것이다. 이때는 ''널브러지다''를 써서 ''안주가 널브러져 있었다''로 하는 게 맞다. 한편 ''널브러지다''에는"마라톤을 완주한 선수들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있다"같이 ''몸에 힘이 빠져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축 늘어지다''라는 뜻도 있다.
또 하나는 "널부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피 냄새에 섞일 뿐 집 안은 적막에 덮여 있었다"(조정래의 ''태백산맥'' 중에서)처럼 ''힘없이 너부죽이 바닥에 까부라져 늘어지다, 죽어서 넘어지거나 엎어지다''라는 뜻으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인데 이때는 ''너부러지다''를 써서 ''너부러진 시체들''이라고 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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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전순영 - 안중근
하얼빈 역 플랫폼에는 흰 타일로 세모와 네모가 새겨져 있다 세모는 안중근 총알이 날아간 곳. 네모는 이토가 쓰러진 곳이다. 1909년 10월 26일 그 날이 지금 벌떡 일어나 여기, 여기라고 외치고 있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남인, 그 후예들이 당파싸움으로 날 새는 줄 모를 때,일본이 쳐들어와 군대를 해산하자 안중근은 지축을 흔드는 軍馬가되어 이토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의병대장으로 싸우다 쫓기며 굶주리며 맨발로 러시아 땅에 이르렀다.그는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을 써서 가슴에 품고, 귀빈열파가 하얼빈 역으로 들어오자 주머니 속 권총을 뽑아 하늘에 빌며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일본 검찰 앞에선 안중근의 입에서 천둥이 내려피듯 이토가 명성황후를 삼키고 조선 황제를 짓밟고, 조선을 꿀꺽 삼켜버리자 五臟이 툭 터져버렸으므로 나를 만국공법에 처리하도록 하라. 방청 중이던 러시아. 중국. 일본 재판부가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니 안중근이 인도 간디, 중국 쑨원,, 마오쩌 등과 나란히 서 있었다.
백년 전 뤼순감옥 안중근의 독방에는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그날의 거사가 그려져 있고,안중근이 쓰던 붓과 먹, 종이와 책상, 의자, 침구가 놓여 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본 이라고 쓴 유묵이 삼각산 비봉에 올라선 숫사자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아홉시, 3발의 총성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윤봉길. 이봉창 의거. 해외 독린군으로 번지는 민족의 횃불이었다.
뮤지컬 "영웅" 은 100년 전 안중근의 독방이 펼져지고 추적추적 내리단 그날의 빗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 하얀 말씀 (만인의 원수를 갚았으니 죽음을 택하라)을 입고, 죽음이 똑각또각 걸어오는데 붓에다 먹을 듬뿍 찍어 "이 목숨 즐겨 바치노라" 안중근 목에 밧줄이 걸리고 덜커덕, 안개 자욱한 자작나무 숲 잿빛 시간이 멈춰버린 그날의 함성이 지금 4700만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2010년 봄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 추모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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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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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메기' - 박영록
때 아닌 열대야로 국토가 찜통이다
'메기' 가 승천하다 태풍몰아 할퀸 논밭
삶의 터 쓸고 간 자리 쭉정이만 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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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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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물오리 - 이원수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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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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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용택 - 그 여자네 집, 그리고 그 여자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떨 때 노란 산국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흥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 나라 가을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습니다. 산도 젖고 강도 젖고 풀잎들도 젖고 내 마음도 젖습니다. 가을비 내리면 추워지고 봄비 내리면 따뜻해집니다. 이 비 그치면 들판의 곡식들은 더욱 더 깊이 고개 숙이며 익어가도, 강가에 풀잎들은 노랗게 말라가리. 아, 가을의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는 지고 억새들이 바람에 하얗게 나부끼는 가을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맑은 햇살 속에 마른 풀잎들이 사각이는 가을 강가에 서서 저무는 물을 보았는지. 외로움처럼 키 큰 포플러 마른 잎이 다 지고 마른 풀섶에 샛노란 산국이 지고, 단풍 지면 산산이 빈 산이 되어 저 강에는 겨울이 오고 저 강물로 하얀 눈송이들이 겁도 없이 하얗게내리리라. 그러면 나는 강가에 서서 강물로 사라지는 눈송이들을 보리. 내게 사랑은 늘 그렇게 왔다네. 계절처럼 소리없이 왔다가 계절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먼서 잎 피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비가 왔다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 윗동네에 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벼가 익고 개구리 울고 감나무가 있고 보리가 겨울 달빛 속에 자랐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하얀 감자꽃이 피고 들국화가 피고 구절초가 피고 산벚꽃이 피고 강가에는, 강가에는 검은 바위들이 달밤에 번쩍거렸습니다. 풀벌레 울고 밤산에서 소쩍새 울고 부엉새가 부엉부엉 울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굽이굽이 하얗게 살아가던 길, 달이 뜨면 뽀얗게 떠보이는 적막하고 다정한 길이 늘 펼쳐져, 해 저물고 바람 불면 바람 따라 길 따라 하얗게 춤을 추던 개망초꽃, 그리고 해맑은 풀잎들. 그 길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정다운 길입니다. 아버지들이 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락을 져 나르던 길이며, 어머니들이 아기 업고 머리에 곡식을 여 나르던 길입니다. 내 누이들이 돈 벌러 가던 길이며, 동무들이 밤도망을 치던 길입니다.어머니들이 울면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눈물로 자식들을 기다리던 길입니다. 꽃길입니다. 서러운 눈물 뿌리던 길입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내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한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앞에는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들 끝에는 언제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들 끝에 그 여자네 무밭이었습니다. 그 무밭에는 늘 곡식들이 다 떠난 들판에 파란 무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따금 그 무밭에서 파란 무나 배추를 뽑아 머리에 이고 빈 들을 가기도 했습니 다. 그 느티나무 부근에는 또 여자네 밭이 있고 그 밭에는 그 여자 네 어머니가 하얀 수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밭가에는 토란잎이 넓적하게 자라기도하고 가지가 열리기도 하고 오이가 열리기도 하고 그 여자가 그 여자 어머니와 함꼐 콩밭을 매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감이 붉게 익고 그 여자가 감망으로 감을 따다가 내가 지나가도 못 본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네 나이 든 할아버지는 뻣뻣하게 풀 먹인 삼베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해 저문 논두렁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그 밭에서 그 여자네 아버지가 큰 암소로 느릿느릿 쟁기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 여자가 밭가에 앉아서 내가 지나가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제비꽃을 꺾고 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는 참으로 크고 의젓하고 당당합니다 봄이 오면 그 느티나무에 잎이 피어납니다. 그 추운 겨울 그 잔가지로 어떻게 그 매서운 강바람 들바람을 이겼는지, 봄만 되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수많은 새 잎들을 피워냅니다. 나는 설레입니다 잎 피어나는 그 나무 밑을 지나면 나는 그 나뭇잎들의 수런거림으로 내맘은 설렙니다. 멀리에서도 나는 그 나무만 보면 늘 가슴이 뜁니다. 잎이 피면 그 주위에 수많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하얀 꽃, 노란꽃, 보라색 꽃들이 피어나고 그 나무 아래는 환하게 밫납니다. 그 여자, 꽃같이 고운 열아홉, 그 여자는 어머니랑 같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나를 못 본 척 눈을 내리깔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디만큼 가서는 얼른 뒤를 돌아다봅니다.뒤태가 이뻤던 그 여자는 그때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힐끗 뒤돌아본 날 밤이면 그 느티나무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달빛을 받으며 그 길을 걸어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달빛을 밟으며, 먼 산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차며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검정 우산같이 달 그늘을 거느린 그 느티나무를 보면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여자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달 쪽으로 기대어 서서 달을 보며 나를 기다렸습니다. 스웨터를 여미며 나를 보고 웃는 그 여자는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박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밤이면 그 느티나무 등뒤에서 만났습니다. 어쩌다가 밤 늦게 사람이 지나가면 우리 둘이는 그 나무 등에 딱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너무 가슴이 뛰고 그리고 너무 좋았습니다. 어찌나 가슴이 쿵쿵 뛰던지 느티나무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의 숨소리, 따뜻해져 오는 몸, 그리고 어색하게 더듬어 찾던 손과 맞주치던 눈길들. 길 가던 사람이 지나가도 우린 한참을 그렇게 오래 느티나무 등뒤에 서 있었답니다. 그 여자는 운동회날이면 양산을 쓰고 학교에 왔습니다. 나는 선생이었고, 스물셋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늘 느지막하게 학교에 동무들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코스모스가 핀 운동장가에 그 여자는 동무들과 어깨를 마주 대고 오불오불 꽃처럼 모여는 부락 대항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졸업생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늘 나를 훔쳐보면서 나에게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가고 산그늘이 운동장을 덮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소고놀이가 끝나면 그 여자는 또 동무들과 집엘 갔습니다. 운동장가에 코스모스 꽃 속에서 그 여자는 웃고 있어습니다. 운동회가 가 끝나고 해가 다 진 뒤 나는 그 여자네 동네를 지나 집에 갑니다. 그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니 보이거나 내가 그 여자네 집 앞쯤 지날 떄, 얼른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면 우린 그날밤에 만났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날이 가면서 겨울이 왔습니다. 어떤 날 밤은 그 여자가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동무들과 같이 와서 내 방문에 밤톨만한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뒷문으로 얼른 들어온 그 여자는, 동무들과 같이 있으면 늘 내게 무심 한 듯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야 내게 닿는 애매한 말 했지만 나는 그말이 내게 한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어떨 때는 평소 우리둘의 뜻과는 너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은 따뜻 했고 우리들은 이불 속에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놀았습니다. 나는 그여자의 발을 찾다가 다른 여자의 발을 잘못 건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둘이 발이 닿으면 우리만 아는 눈웃음을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님이 감도 내오고 고구마도 가져왔습니다. 그릇 하나를 치워도 안 그런 척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도 해서, 자기가 이 집과 특별한 관계임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꼭 그렇게 티를 냈습니다.
그 여자들이 가면 나는 밤길을 걸어 그 느티나무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타박타박 걸어왔습니다. 먼 산을 지나는 밤바람 소리, 발 끝에 채이는 물소리. 우리는 늘 만나 놀았습니다. 이웃마을에 사는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나 놀때도 있었고 삼삼동네 젊은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난 밤을 세워 강가에서 놀았습니다. 달 뜬 밤 우리들의 젊음을 견디지 못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장소에서 마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친구들이 군대 갈 때 헤어짐이 슬퍼서 놀았고, 이웃마을 처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강가에서 만나 밤이슬이 내리 때까지 놀았습니다. 콩쿨 대회 때도 만났습니다 그 여자네 오빠가 어찌나 감시와 단속이 심하던지 그 여자는 그 여자네 작은 언니 방에 나들이옷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감시가 심해도 어떻게든지 그 여자는 다른 동무들과 가설극장 불빛 아래 곱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우리 둘은 어떻게든 또 따로 만났습니다. 넓은 바위위에서 나는 눕고 그 여자는 내 곁에 앉아 달을 보며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먼데서 사람들의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달빛은 강물에 부서지고 풀밭에 이슬들은 반짝였습니다. 까마득하게 높은 달, 먼 산의 서늘한 어둠, 그리고 아스라한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같고, 노랫소리도 같은 산울음 소리, 그리고 멈춘 시간들, 그렇게 밤이 깊어졌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린 우리 둘이라는 게 그렇게 실감나고 호젓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사랑도 흘렀습니다.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길이면 나는 그 여자네 뒤꼍으로 담을 넘어 그 여자가 있는 그 여자 골방에 들어가 놀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 바로 옆방에는 나이든 할아버지가 계셔서 우리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며 놀았습니다. 민화투도 치고 그 여자가 가져다준 감도 먹으며 놀다가 집에 갔습니다. 그럴 때 그 여자친구들과 그 여자가 그 느티나무까지 나를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눈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졌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사이에 우리들은 풀잎처럼 만나고 바람처럼 헤어졌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여자네 집만 떠올리면 이 세상이 따뜻해져 오던 그 여자네 집엔 살구꽃이 있고, 은행나무가 있고, 감나무가 있고, 그리고 노란 초가집이었습니다. 저녁 연기가 오르고 그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부산하게 마을길을 걸어 그여자네 집 대문으로 얼른 사라질 때면 나는 늘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디 갔다가 올 때면 그 여자가 무밭으로 무를 뽑으러 나가기를, 그 여자가 감을 따러 가기를 나는 간절히 빌곤 했습니다. 어떨 때는 그 여자가 소쿠리를 들고 얼른 대문을 나서서 멀찍이 떨어져 내 뒤를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그 여자네 밭으로 그 여자는 감을 따러 갔습니다. 어떨 때 나도 그 여자가 감을 따는 감나무 밑에 가서 감을 얻어먹기도 하며 올라가서 감을 따는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쯤이면 산국이 노랗게 피어 있어서 나는 산구구을 꺾어 그 여자 감 바구니에 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수줍어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고 어떨 때는 너무나 의외로 거리낌없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 두 모습이 다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 여자가 스물한 살 먹을 때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무들도, 여자 동무들도 하나하나 그 아름답고 즐거웠던 고향의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떠나갔습니다. 그 강, 그 산, 그 강변, 그 풀꽃들, 그 감나무와 밭의 넓적한 토란잎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자를 위해 두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여자네 집'이고 또 한 편이 '애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보던 그 느티나무에도 단풍이 들고 가을이 가겠지요.
김용택 -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섬진강','맑은 날','꽃산 가는 길','그리운 꽃편지','그대, 거침없는 사랑','강 같은 사랑'이 있으며 최근 '그 여자네 집'을 냈다. 산문집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그리운 것들은 산뒤에 있다','작은 마을' 들이 있고, 장편동화로 '옥이야 진메야'가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김소월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섬진강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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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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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바다
어떤 물고기가 여왕 물고기를 찾아가서 물었다.
"저는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바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왕 물고기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바다에서 태어났으며 바닷속에서 살고 있다. 지금 바로 이순간에도 그대는 바닷속에 있고, 바다는 그대 속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대는 그 바닷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처하고 있는 상황과 똑같다. 바다는 늘 변함없이 존재하는데 물고기가 그것을 어이 알겠는가? 바다는 한순간도 그 물고기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바다는 지금도 변하지 않고 그 물고기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바다는 너무나도 투명하여 물고기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한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마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그 물고기는 바닷속으로 녹아 들어갈 그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너무 가깝고, 또한 너무 멀다. 그리고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너무 깊이 숨겨져 있다. 너무 쉽게 손에 닿는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 역시 에너지의 바닷속에서 살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태어나 그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속으로 분해되어 사라져갈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너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한번도 그것을 놓쳐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에 있었다. 보다 민감해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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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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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선택의 가치
선택함으로써 얻은 가치가 선택함으로써 잃는 가치보다 크지 않으면 선택하지 마라. 선택한 가치보다 선택하지 않은 가치가 더 크면 반드시 후회한다. 어떤 것을 취함에 있어, 그것을 취함으로써 얻는 가치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취함으로써 잃는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어차피 양쪽 모두를 취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하나를 얻으려면 대신 하나를 내주어야 한다. 침대를 사용하면 대신 따뜻한 방바닥을 내주어야 하고, 뇌물을 받으면 대신 청렴한 마음을 내주어야 하며, 애인을 사귀면 대신 시간을 내주어야 한다. 그 무엇을 취하든지 간에 취함으로써 얻는 가치보다 취함으로써 잃는 가치가 더 커서는 안 된다. 달콤한 이익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취하지 않았을 때 잃는 가치보다 그것을 취했을 때 얻는 가치가 더 크지 않으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맛나는 음식도 체하면 오히려 손해가 되듯이, 아무리 좋은 이익도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이라면 오히려 손해를 가져다 준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을 취할 때 취함으로써 얻는 가치만을 생각하지 잃는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여 예상치 못한 손해에 부딪힌다. 취할 때의 달콤함만을 생각해서 받은 뇌물이 평생 직장을 잃게 만들어 손해를 보게 만든다든가, 사귈 때의 달콤함만을 생각해서 사귄 애인이 학업에 지장을 주어 엄청난 인생의 손해를 안겨 주는 것이 그 좋은 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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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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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 에세이
권력과 돈의 줄다리기
장관 부인에게 고급 옷을 사줬네, 안 사줬네 하고 법석이고, 또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해 보겠다고 법석이다.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수사 될 부자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재력가의 아내가 권력자의 아내에게 비싼 옷을 사주었다는 것인데, 기어이 구속되는 바람에 소동이 터져 나왔던 모양이다. 권력과 부 사이의 치졸한 줄다리기를 지켜보면서 국민의 마음은 어처구니가 없다. 옷을 사 달라고 했네 안 했네, 사 달래는데 안 사줬더니 구속시켰네 어쨌네, 온갖 추악한 말들이 오고 가고,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국민은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보다도 수치감을 느낀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짓거리라는 말인가. 대체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일차적 원인은 '옷값'의 액수에 있는 것 같다. 도대체 옷값이 얼마나 되길래 그것이 '로비'의 수단이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고급 옷'이라는 아이템이 여성들 특유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값이 수천만 원에서 수억대까지 이르는 모양이니, 평생 설거지통 속에서 손을 빼지도 못하고, 번듯한 옷 한 멀 얻어 입을 수 없는 서민 여성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른바 '오트 쿠튀르'라고 불리는 '고급 옷'은 현대인들의 기호 소비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존재를 설명해주는 모든 준거틀이 사라졌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점점 더 외적 기호를 소비함으로써 그것을 존재 이유로 삼으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러한 경향은 정신적으로 부박한 사람들일수록 더욱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 졸부들이 기를 쓰고 고급 메이커제품을 소비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나 이러한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행태는 그들이 아무런 정신적인 고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추악한 냄새를 풍긴다. 모든 것이 부와 물질로 재단되는 사회, 무슨 수를 쓰든 돔만 벌면 '성공'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 그러한 사회의 텅 빈 골이라는 비참한 빈터에 '고급 옷' 이라는 기호의 버러지들이 우글댄다. 오 하느님, 우리가 우리의 비참한 존재를 기호로 가리려 하나이다. 그러니 용서하소서. 우리가 나날이 더욱더 추악해짐을 견딜 수 없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고급 기호 소비를 둘러싸고 기호의 유통 자체가 권력화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사회 계층에 속하는지를 증명해주는 사회적인 코드가 되기 때문이다. 허영은 허영을 부르고, 그 뒤에서는 소비재의 생산 원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기호의 권력화 비용이 첨부된다. 그것은 일종의 비눗방울 놀이다. 허영의 욕망이 클수록 기호의 뻥튀기 정도도 커진다. 그리고, 물론, 꺼질 때도 더 큰 파열음을 내며 꺼진다. 어머나, 알고 보니 뻥이었네!
가관인 것은, 이런 권력형 기호 놀이에 떼거리로 몰려다녔던 장관부인들께서 '수요봉사회' 라는 걸 조직하고 교회까지 드나드셨던 모양이라는 사실이다. 최순영 회장 부인의 편지에서는 사뭇 비장한 어조마저 읽힌다. 하느님에 성령님까지 동원되는 이 돈과 권력의 시소게임은 저질 코미디처럼 보인다. 자신을 순결한 희생양으로 여기는 최 회장 부인의 태도에서는 허위의식의 버러지들이 우글대고 있다. 그 버러지들도 앙드레 킴 옷을 입고 있나? 하느님이 내려주신? 근본적인 층위에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줄 모르면, 국민은 정신나간 기득권층의 이 따위 추악한 행태에 언제까지나 휘둘릴 수밖에 없다. 국민 각자가 이런 치사한 외적 요건들에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개인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너절한 기호놀이는 언제라도 끝나지 않는다. (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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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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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열하일기 - 박지원(1737~1805)
<호질> <허생전>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이 쓴 중국 견문기. 청의 연경과 열하를 여행한 후 그곳 문인 명사들과 교유하고 새로운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이 책은, 조국의 현실 개혁을 전제로 이국 땅을 관찰하고 분석한 연암이 그의 사상을 탁월한 문학적 재능에 의해 전달한 사상서이자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진보적인 지식인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높게 평가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작가인 연암 박지원은 노론의 명문인 반남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6세 처삼촌인 이양천에게 글을 배우고,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했다. 20대에 이미 뛰어난 글재주를 나타냈다. 1759년에는 모친이, 1760년에는 조부가, 1767년에는 부친이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응시를 포기했다. 32살 때 서울의 지금의 파고다 공원인 백탑 부근으로 이사했다. 주변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 살았고, 박제가는 그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연암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나갔는데, 그것이 <북학파> 실학이다.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4대시가>로 일컬어졌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출신이었다. 이들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세상이야기나 문학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1780년 44세 때 영조의 사위이자 자신의 친척인 박명원을 수행하여 중국의 북경과 열하 등에 다녀왔는데, 이 과정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들이 거처하는 여름 별궁이 있었던 도시로, 주위에 온천들이 많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는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런 연유에서 <열하일기>라는 제목을 붙였던 듯하다. 그는 귀국 후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했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도 실려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열하일기>는 공간되기 이전에 이미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당시 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 문화의식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그에게 반성문을 바치게 했다.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1797년에는 면천 군수를 지내고 정조의 농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이 책은 농업 생산력 발전에 대한 깊이 있는 책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평생동안 가난 속에서 살았던 연암은 한때 황해도 연암 골짜기로 들어간다. 초가삼간 주변에 과일나무도 심고, 양어장도 만들었다. 손이 부르트도록 직접 농사일도 하면서 숯도 구웠다. 이런 찌든 가난 속에서도 "마음은 이것을 즐기며 바꿀 생각이 없다."고 자족할 만큼 정신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몸을 던지며 광인처럼 살았지만.
연암의 문학세계
박지원의 사상은 철학사상,경제사상,문학사상 등 여러 측면에서 분석이 가능하나, 그의 실학사상에 대해서는 본서 제1, 2권의 곳곳에서 간간이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그의 문학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청년기와 장년기에 11편의 소설을 썼는데, 현재는 9편이 전해지고 있다. <광문자전>에서는 광문이라는 거지의 성실성과 정직성을 말하면서 이런 표본적인 인간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꾸짖었다. <마장전>에서도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의 건강한 도덕성과 고결성이 퇴색하고, 비속화된 양반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양반의 허식적 생활을 풍자, 비판했다. <예덕 선생전>에서는 똥거름 치는 근로자인 주인공 엄행수를 등장시켜 가장 훌륭한 삶의 구현자임을 밝히고, 손 하나 까닥 않는 양반을 꾸짖었다. 장년기의 작품인 <양반전>은 양반도덕의 하위성, 위선적인 양면성, 몰염치한 착취에 기반한 무위도식, 양반의 무능성에 대한 날카로운 규탄과 폭로로 일관하고 있고, 양반몰락의 역사적 현실성과 필연성을 묘사했다. 그는 양반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하늘에서 사람을 낼 때 4가지 종류로 만들어냈는데, 그중에서 선비란 것이 가장 고귀하다. 선비는 양반이라고도 부르는데, 농사나 장사도 하지 않고 책이나 대충 훑으면 문과에 급제하고 적어도 진사는 따놓았다. 우선 이웃집 소를 끌어다가 밭을 갈리고, 백성들을 끌어다가 김을 매게 한다. 누가 감히 나를 괄시하겠는가.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 놈의 코에 잿물을 부어넣고, 귀뺨을 때린들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폭로하고, 그 평등윤리인 우정의 세계를 희구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생활도덕에서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도 그 자신이 서민들과 함께 호흡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지식인 체질이었으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허생처럼 재주를 가지고 고독하게 숨어살면서, 세상을 풍자하고 개탄하는 한 양심적인 지식인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개혁을 위한 문명 비평서
연암이 박명원을 수행하면서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긴 <열하일기>는 당시 사회제도와 양반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하여 필사본만 전해오다가 1901년 김택영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7권은 여행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압록강의 장관에 대한 인상적인 묘사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광대한 중국의 산천풍물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청나라의 사회상을 다채롭고 힘찬 필치로 그려나가는 <열하일기> 앞에 독자들은 압도된다.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요양에 이르기까지 15일간의 기록으로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우물가마성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이 있으면 자세히 서술하면서, 모든 물건을 이롭게 써서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야만 덕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로부터 소혹산에 이르기까지의 5일간의 기록으로 여행과정에서 자유롭게 만난 평민들과 나눈 대화와 그곳의 산천과 절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에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의 9일간의 기록으로 저자거리여관교량 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수레의 제도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한 것을 <허생전>의 중심사상과도 통한다.
호질
<관내정사>는 산해관에서 연경(북경)까지의 기록으로, 이중 특히 <호질>은 연암의 소설 중에서 <허생전>과 함께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존경받는 선비인 북곽 선생과 동리자라는 수절과부의 추문을 통해 당시 선비들의 이중성을 풍자한 소설로서, 특히 동물을 의인화하여 호랑이가 인간의 비행을 나무란다는 발상은 기발하다. 제목 <호질>은 <호랑이의 질책>이라는 뜻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크게 3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단락에서는 범의 속성 및 범과 인간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범의 신령스러움과 용맹함을 칭송하면서 범이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랑이와 호랑이에게 먹이를 찾아주는 귀신인 창귀들이 모여 저녁거리를 논한다. 창귀들이 권하는 메뉴에 대해 호랑이는 먹이 투정을 한다. 의사는 육체가 약한 자를 등쳐먹고, 무당은 정신이 약한 자를 등쳐먹고, 선비는 공리공론을 앞세워 백성들을 등쳐먹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는 북곽선생이라는 위선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점잖고 학식이 높은 것처럼 행세하지만 밤이면 열녀로 소문난 동리자라는 과부의 집을 찾아가 정을 통한다. 그녀의 아들들은 북곽선생을 여우가 변신한 것이라고 믿고 여우를 잡아 돈을 벌려고 하자 이를 안 북곽선생은 도망나온다. 여기서 북곽선생은 당대의 부도덕한 지배세력을 대변한다. 셋째 단락에서는 동리자의 집에서 도망나오다 거름구덩이에 빠진 북곽선생이 범을 만나 살려달라고 애걸하는데, 여기서 양반의 위선과 이를 꾸짖는 호랑이의 준엄한 질책이 그려진다. 범은 유학자들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모순점과 그들의 허위의식, 그리고 이중적인 생활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꾸짖기를 마친 범은 썩은 선비의 고기는 역겨워 못 먹겠다고 말하고 사라진다. 호랑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북곽선생은 서성대는 동네사람들에게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있는 중"이라고 여전히 허풍을 떤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로 가기까지의 기록으로 연경에 겨우 도착한 사신 일행이 열하에 피서중인 황제를 좇아 밤새워 달려가는 동안 겪었던 숱한 고생들을 현장감 있게 서술하고 있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관에 6일 동안 머물러 있는 동안의 기록인데, 중국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한국과 중국의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관해 논평하다가 이어 달세계와 지동설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는 내용을 기록하고있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면서 급히 갈 때 보지 못했던 것을 적고 있는데, 특히 교통제도에 관한 서술 등이 주목된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관에서 그곳의 학자 10여 명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며, <황교문답>은 불교의 한 지파인 라마교 중에서 갈라져나온 황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울러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반서시말>은 황교의 법왕인 반선의 내력과 우리 사신이 반선을 만나보게 된 시말을 기록한 것이고, <찰습륜포>는 곧 반선이 살고 있는 지명으로서 그가 거쳐하는 호화로운 궁전 등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망양록>에는 주로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의 악론을 살필 수 있으며, <심세편>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청나라를 오랑캐 출신이라 하여 업신여기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곡정필담>은 중국인 곡정 왕민호와의 필담으로서 정치경제종교지리 등 다방면에 걸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특히 천문에 깊은 관심을 두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산장잡기>는 열하 산장에서 보고 느낀 바를 담은 것으로 내면에 침잠하여 얻은 깨달음을 서정적으로 엮고 있다. <환희기>는 황제의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요술장이들을 구경한 이야기이고, <피서록>은 중국의 황제와 학자, 우리 나라 학자들의 시 등에 관한 시문 비평을 적은 것이다. <행재잡록>은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로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취한 정책을 적고 조선 당국자들의 청에 대한 관심과 대처가 소홀하다고 개탄하고 있다. <구외이문>은 만리장성 밖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60여 항목이다.
허생전 <옥갑야화>에는 한국소설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허생전>이 수록되어 있다. 가난한 선비 허생은 10년 계획한 글공부를 7년만에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다. 장안의 부자인 변씨에게 돈 1만 냥을 빌려 시작한 허생은 수완을 발휘하여 거부가 된다. 변산 근처의 도둑떼들을 이끌고 무인도로 가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전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다음 서울로 돌아온다. 허생은 변씨에게 빌린 돈 10만 냥을 넘겨주고 예전처럼 독서에 열중한다. 허생의 비범함을 알게 된 변씨는 어영대장 이완에게 그를 소개하고 이완은 허생을 찾아와 인재등용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 이에 대해 허생은 3가지를 제시한다. 이 장면에서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첫째 제갈량과 같은 인재를 천거할 테니 임금이 삼고초려할 것, 둘째 명나라에서 이주해온 정객들에게 혼인을 주선할 것(국내 세도가들에게 국혼을 주선하는 것보다 차라리 대국이라고 섬기는 명나라 정객들에게 국혼을 주라는 빈정거림), 셋째 양반의 자제들을 뽑아 청에 첩자로 파견할 것(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청의 실정에 어두운 북벌론자들을 풍자한 것) 등인데, 명분에 사로 잡힌 이완은 하나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도망나온다. 그후에 그를 다시 찾았으나 이미 허생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 작품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되새겨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금료소초>는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엮은 것이고, <황도기략>은 연경에서 관광한 문물, 제도 등을 39항목으로 나누어 그 내력과 전해오는 말들을 곁들여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공자의 묘를 참배하고 난 후 그 건물과 학교, 학사의 연혁과 규모 등을 10항목에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는 연경 안팎에 있는 절과 궁 등 주요 명소 20군데를 구경한 기록이고, 마지막으로 <동란섭필>은 이제까지 기록한 것 이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은 것이다.
이용후생 사상의 집대성
<열하일기>는 연암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으로 그의 위대한 창조역량과 평생에 걸쳐 이룩한 모든 예술적 성과들이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중국현실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그에 입각한 혁신적인 개혁안, 진보적인 천문학설과 과학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등 북학파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단순한 사적 여행보고서에 그쳤던 종래의 견문록과는 다르다. 연암은 이 책을 통해 이용후생을 비롯한 북학파의 사상을 역설하는 동시에, 구태의연한 명분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색된 사고방식을 효과적으로 풍자하기 위하여 사실과 허구의 혼입이라는 복합구성을 도입했다. 즉, 여정과 관련시켜 삽입해놓은 일화들은 보고 들은 것일 수도 있으나 필요에 따라 창작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그는 비속어와 저속한 표현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는데, 이러한 실험적 구성은 당시에 이미 <연암체<라고 일컬어진 정통을 벗어난 문장과 함께 기문으로 지목받게 되어 복고적인 문예정책을 추진하던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대화중심의 극적인 장면묘사와 유기적인 구성을 추구하는 소설적 수법, 인간심리에 대한 원숙한 통찰 등 그의 다양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 <열하일기>에도 그 나름대로의 한계는 있다. 그가 여행했던 코스는 강남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중국의 강북지방이었다. 그 일면만을 보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발달상을 일방적으로 예찬한 반면, 이를 가능케 했던 보다 근원적인 요인인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농민층에 대한 상업자본의 착취수탈관계 등 중국의 심각한 농민문제와 농촌실태 파악에 소홀한 점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개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개혁의 주체로서 각성된 사대부만 상정하고 있을 뿐, 실질적 능력을 갖춘 중인계층이나 상인층의 참여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연암의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적 제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열하일기>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한계는 곧 다음 시대의 사상과 문학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연암은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국제현실에 대한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사회개혁의 방도를 진지하게 모색한 그 시대의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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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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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규정
경찰차가 은행 강도들을 맹렬히 추격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주유소 쪽으로 달렸다. 주유소에서 차를 세운 뒤, 그 경관은 상관에게 무전으로 보고했다. 반장이 흥분된 어조로 물었다. "놈들을 잡았나?" 경관이 대답했다. "놈들은 참 운이 좋았습니다. 거리를 좁혀 거의 반 마일 정도로 따라잡았을 때 그만 운행 거리가 500마일이 넘어 추격을 중단하고 기름을 넣어야 했습니다."
- 운행 거리가 500마일이 넘을 때마다 기름을 새로 넣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우선 기름을 넣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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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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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전국시대는 중국사회에서 커다란 격동기였다. 이제 신석기 말기 이래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감되어가고, 거대한 고대제국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철기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기술상의 대혁신이 있었다. 철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에 불과했던 청동기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청동기 시대에도 생산용구는 석기와 목기였으며, 그에 따라 생산력 수준도 신석기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고도의 청동문명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된 결과였다. 그러나, 점차 금속 제작기술이 발달, 춘추 중기에 이르면 보다 단단한 철기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철기는 보다 예리한 무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기구로 널리 사용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했다. 철제 농기구는 땅을 보다 깊이 갈 수 있게 했으며, 여기에 소를 경작에 이용하는 우경이 시작, 인간의 근력에만 의존하던 농경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이를 제 2의 농업혁명이라 부른다. 이제 기계화 이전 전통 농업사회의 기본틀이 마련된 셈이었다. 예전에는 쓸모없던 땅에 불과했던 황무지가 개간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각국은 다투어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이게 되니 농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농업기술의 진전에 따라 집단농경에 의존하던 농업경영 방식은 소가족 단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점차 사회조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새로운 물결을 재빨리 인식하고 개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나라가 장차 통일제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주산업인 농업생산의 발달로 경제 전반에 생기가 넘쳤다. 수공업, 상업등이 농업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철업, 제염업의 발달이 돋보였다. 제철업은 각종 농구와 무기의 수요 폭증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발굴된 야금유적지는 넓이가 십여 만 평 방미터에 달했으며, 곳곳에서 발굴된 주조장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이때 이미 산 위에서 적갈색 흙이 발견되면 그 아래에 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당시 철이 출토된 산이 3,609개 소였다는 기록이 있다. 각국의 산물이 활발히 교환되어 원격지 무역을 통해 재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진나라의 여불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화폐는 이미 춘추시대에 출현했으나,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 농기구 모양의 포전, 칼 모양의 도전이 널리 사용되었다. 산업발달의 거대한 흐름은 또 다른 면에서 각국 국경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각국의 화폐, 도량형 등의 차이는 상업의 발달에 제약이 되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어 한 줄기로 흐르는 강물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이 요청되고 있었다.
각국의 왕들은 각기 부국강병에 힘써 스스로 통일의 주인공임을 자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군사력의 우열로 판가름날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군사상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랐다. 전국시대의 전쟁에 비하면, 춘추시대의 전쟁은 거의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청동제 칼과 창으로 무장한 귀족들이 4,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차전이었으며 귀족전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춘추말기 강남의 오, 월에서 시작된 평민병사의 보병전이 중심이 되었다. 보병부대는 산림과 소택지에도 자유로이 신출귀몰했으며, 쇠뇌라는 발사용구가 발명되면서 사정거리가 길어져 수레 위에서의 사격전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북방의 조나라에서는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채용하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한번의 싸움으로 승패가 판가름나고, 수도 바위에 치중하는 야전이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주요 도시 및 변경에 이르기까지 성을 거점으로 끈질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춘추시대의 초강대국 진, 초의 싸움에서는 전차 4천 승, 즉 많아도 4만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나, 전국시대의 각국은 60만~10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이제 전쟁은 귀족들의 영예가 아니라, 국민개병제에 의해 평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었다. 전리품의 획득과 상대국의 복속에 목적을 두었던 전쟁은 토지의 획득과 적국 병력의 말살로 바뀌었다. 순수 무장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이론과 작전을 연구하는 병법이 발전, 유명한 손자병법이 출현하기도 했다. 사력을 다한 각국의 경쟁 속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 백성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자의 반전론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받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묵가가 가장 인기있는 학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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