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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58호
단기 4343 / 서기 2010. 6. 1 (음력 4. 1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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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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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질 수 없다. -A.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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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불의 괴로움(도탄지고)
‘도탄지고’는 ‘도’가 흙구렁(진구렁), ‘탄’이 숯불, ‘지’가 의, ‘고’는 괴로움으로서, 흙구렁이나 숯불 속에 빠졌다는 뜻으로, 매우 괴로운 경우를 말한다. 출전은 <서경>의 ‘중훼지고’ 편이다. 내용은 탕왕이 하늘 뜻을 따르고 백성 뜻에 응하여 걸왕을 쳤다 하더라도 요순 이래 한 번도 있지 않은 일이므로 그의 마음에 늘 거리껴서, 중훼가 이 글을 지어 탕왕의 뜻을 풀어 밝혀 천하 백성에게 알린 것이다. 하나라 걸왕은 사나운 임금이었으므로 이를 쳐 없애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이가 은나라 탕왕이었다. 탕왕의 처지에서 보면 그래도 자기 임금에게 반역한 것이 되므로, 거꾸로 그 혁명이 정당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탕왕의 어진 신하 중훼가 탕왕이 한 일이 올발랐다고 아뢰고 또 백성에게 알린 것이다. 이 글에 본받을 글귀가 많다.
“오호라,/ 헤아리건대 하늘이 백성을 낳으셨는데,/ 하고자 함만 있고 가고자 함이 없으면 어지럽다./ (중략) 하나라가 덕을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하늘이 곧 탕왕에게 용기와 슬기를 주시어,/ 온 천하를 바로잡아/ 우왕의 뒤를 잇게 하셨다. (하략)”
하나라 왕조는 천자가 덕이 없어서 백성이 ‘흙불의 괴로움’(도탄지고)에 빠졌다. 그래서 하늘이 탕왕에게 용기와 슬기를 내려 천하를 바로잡고 하나라 왕조를 세운 우왕의 본디 영토를 이어받게 했으므로 그 가르침을 따라 천명대로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낱말의 호응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을 문장이라고 한다. 문장은 낱말들로 구성된다. 한 문장 안에서 각 낱말은 다른 낱말들과 호응하면서 독자적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장에서 낱말들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해야 하고, 다른 단어들과의 호응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아마도 신문이나 방송치고 이런 경우를 한두 번 당하지 않은 기관이 없을 정도다.” 신문이나 방송이 종교 등의 비리나 문제점을 보도했을 때 당하는 봉변을 다룬 신문 칼럼에서 따온 구절이다. 인용한 문장의 첫 낱말 ‘아마도’와 마지막 낱말 ‘정도다’의 호응을 살펴보자.
‘아마도’는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뜻을 나타내는 부사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확실하다거나 틀림없다거나 하는 단정적인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리라는 상당한 정도의 믿음이 있음을 내비치는 말이다. 문장의 마지막 낱말 ‘정도다’ 역시 단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없을 정도다’라고 하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없다’는 사실에 상당 이상의 믿음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인용한 문장에서 이 두 낱말은 호응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글을 쓰다 보면 흔히 이런 경우가 있다. 문장 첫머리에 ‘아마도’라고 써놓고 한참 써나가다가 ‘정도다’를 쓸 즈음에는 앞의 ‘아마도’가 가물가물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를 빼거나 ‘없을 정도다’를 ‘없을 것이다’로 바꾸면 자연스럽다.
우재욱/시인
한(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정대로 간다.’ ‘힘이 닿는 한 돕겠다.’ 여기서 ‘한’의 품사는 명사고 조건의 의미를 나타낸다. ‘가능한 빨리 해 달라.’에서 ‘가능한’은 ‘가능하다’의 관형형이다. 따라서 뒤에 수식을 받는 명사나 의존 명사가 와야 말이 된다. ‘한’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의미가 통하게 한다. ‘가능한 한 빨리 해 달라.’
‘-land’ 가 붙는 지명 표기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있는 지명은 ‘랜드’다. 스코틀랜드(Scotland), 아일랜드(Ireland), 오클랜드(Auckland) 등. 젤란트(Zeeland)는 네덜란드, 자를란트(Saarland)는 독일의 주 이름이다.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의 지명은 ‘란트’, 그 외는 ‘란드’다. 아이슬란드(Iceland), 핀란드(Finland).
모자르다, 모자라다, 모잘라, 모자른, 모잘른
현대인은 늘 무엇이 부족하다. 공부할 시간이 모자르고 사업할 자금이 모자르고 피곤을 풀 잠이 모자르다. 여기까지 읽고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면, 자신의 맞춤법 실력도 부족한 것이다.
흔히 "집중력이 모자르니 능률이 오를 리가 없다"에서처럼 ''모자르다''라고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준이 되는 양이나 정도에 미치지 못함을 뜻하는 단어는 ''모자르다''가 아니라 ''모자라다''다. 따라서 "시간이 모자라고 자금이 모자라고 잠이 모자란다"라고 해야 바른 문장이 된다. 또한 ''모자라다''는 동사이므로 현재의 상태를 나타낼 때는 ''나는 잠이 모자라다''가 아니라 ''나는 잠이 모자란다''로 써야 한다. "나는 지금 소리를 지르다"가 아니라 "소리를 지른다"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피가 모잘라 급히 수혈할 사람을 찾아 봐야 한다"에서와 같이 ''모자라다''를 활용할 때 필요 없는 ㄹ을 덧붙여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역시 ''모자라''로 쓰는 게 맞다. ''자르다''와 같은 르 불규칙 용언은 "오이를 잘라 반찬을 만들다"에서 보듯 ''르''가 ''아/어'' 앞에서 ''ㄹㄹ''로 바뀌지만 모자라다는 르 불규칙 활용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ㄹ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한목소리, 한 목소리, 한걸음, 한 걸음
어떤 사안에 대해 ''같은 견해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한 목소리''라고 띄어서 적는 경우가 많지만 이때는 ''한목소리''라고 붙여 써야 한다. 즉 "미.일은 한목소리로 북한을 성토했다"처럼 쓰는 게 옳다. 반면 "숲 속에서 ''한 목소리''를 들었다"에서처럼 ''어떤 목소리''나 ''목소리 하나''라는 뜻으로 사용할 때는 띄어 써야 한다.
''한''은 의미가 다양하다. ''책 한 권''의 경우는 그 수량이 하나임을 뜻하고 "옛날 한 총각이 살았는데…"에서는 ''어떤''의 뜻을 나타내며 "그들은 한마을에 살아서 서로 친하다"의 경우는 ''같음''을 나타낸다. 앞의 둘은 관형사이므로 띄어 써야 하고 후자는 접두사여서 붙여 쓴다.
''한걸음/한 걸음''도 의미에 따라 띄어쓰기가 다르다. "그는 ''한 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에서처럼 수량이 하나라는 뜻이면 띄어 써야 하고 "그는 병원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처럼 ''쉬지 않고 내쳐 걸었다''라는 의미이면 띄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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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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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김인자
장마비속입니다 새삼스레 비엔 푸른곰팡이, 아니 슬픔의 냄새 같은 게 배어있다고 수선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는 우울로 빚은 술, 마시면 취하는 알코올이지만 때론 마시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취하는 도수 높은 술입니다 늦은 밤의 빗소리는 먼길을 걸어와 종신서원을 마친 수도자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떠올리지만 폭풍 속의 비는 미친개의 번뜩이는 눈알입니다 칠흑의 들판을 내달려 무엇이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근질거리는 이빨을 가진 미친개의 속성, 비는 우글거리는 생명입니다 두꺼운 옷을 벗겨 적나라하게 원시의 시간을 걷게 하는 길 안내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따뜻한 호칭을 허락한 이름도 '비'입니다 비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정부情夫가 되게 하고 세상의 모든 여자 또한 정부情婦로 만듭니다 고백할까요? 어느 날 그와 내가 눈맞은 후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은 콩밭에만 가있는 말하자면 그는 나의 기둥서방이고 나는 그 사내의 내연의 처인 셈이지요 그러나 싫지 않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복병 같은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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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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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소의 아침 - 홍성란
1 어젯밤 누운 데로 그대로 있고 싶다 행복이 아니어도 멈추고 싶은 때가 있어 마지막 4월의 아침이 안개에 갇혀 있다 아득한 유죄의 달력 한장 내리며 저 사람 슬픈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지는 꽃 스치며 떠난 그를 향한 절규다.
2 어디로 돌진하든 바람은 죄가 없다 스스로 무거워진 짧은 혀와 기 그림자 무섭다 무중력 질주, 자꾸 열리는 시야 두렵다 활주로에 남아 있는 오후 네시 버려진 단어들이 자석처럼 엉겨 온다 꽃들은 도망 가고 반쯤 붉은 철골 사이 기진한 환형 동물 한 마리 집으로 간다 메마른 아스팔트를 맨살로 닦으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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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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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 꽃봉오리 피는 것은 - 이원수
눈 얼음에 덮였던 북향 뜨락에서 겨울을 난 개나리 가지에 꽃봉오리 일제히 트는 것은 우리 눈을 즐겁게 하려는 그런 뜻에서가 아니었다.
봄마다 우린 너를 반겨했지만 개나리 네 가슴엔 더 큰 벅찬 것이 있었던 것을......
그 모진 추위 더구나 찬 밤 얼음 속에 서서 너는 불켜진 따순 방 유리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울었을 게다. "살자, 살자, 살자!"고 마음속에 힘주어 다짐하면서.
소한 대한 다 겪은 다음, 아이들 새 옷 입고 학교 갈 무렵, 네 꽃봉오리 일제히 트는 것은 모진 것 이겨낸 승리의 부르짖음!
입 벌리는 네 꽃송이들은 못 참을 우렁찬 환희의 고함소리. 환한 햇볕 같은 승리의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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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삶속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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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철 - 세상의 첫 걸음
지금쯤 고향의 상수리나무 뿌리는 언덕을 내려와 온 들판 밑을 끌어안고 있겠지 이 지구를 움켜쥐고 있겠지 나, 그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첫사랑 이름 석 자 새겼으니 그 이름 물관부를 따라 흐르다 내게 다시 돌아오겠지
나는 잠 깨리라 상수리나무 열매 씹으며 텁텁한 향수, 첫사랑의 기억에 미소지으리 인공폭포 지나 가양동으로 오다가 나는 가끔 쓰러져 상수리나무 뿌리가 전해 주는 옛사랑의 노래를 듣네 그녀의 심장은 아직 따뜻하다 하얀 운동화끈도 순결하다 오뉴월 염천, 엄동설한에도 버티었겠지
그 옛날 내 사랑 이름 석 자 새겨놓은 깊은 뿌리 상수리나무 거기 중간키 아직 휘어져 있고 아직 멧새 둥지 틀어 주겠지 고향 뒷산의 중간키 뿌리 깊은 상수리나무
시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전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이들을 피해 슬며시 놀이터로 나간다. 마치 골목 끝에 버려진 폐차처럼 볼썽사나운 서민 연립주택의 놀이터는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끊어진 그네줄, 검붉게 녹물이 흐르는 시소, 모래 속엔 슬리퍼가 한 짝 잃고 처박혀 있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벤치엔 지난밤 누군가의 몸을 가려주었을 법한 담요 한 장이 걸쳐져 있다. 하늘은 멀고 가을햇살이 따갑다. 나는 그 담요를 슬쩍 밀어내고 거기에 않아 친구가 보내온 시집을 읽는다. 친구는 아직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의 노랠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친구마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어깨가 아프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거기 뜻 모를 아픔에 고개를 숙여 굽은 어깨를 주무른다. 목운동을 하다가 벤치에 그려진 서툰 글자를 발견하고 나는 씩, 미소를 머금는다.
'현진이는 내 꺼.'
초등학교 3,4학년의 정도의 글씨체다. 글씨는 서툴게 힘차게 어린 마음 그대로 크레용으로 씌어져 있다. 요즘은 초등학교 학생만 되어도 이 정도의 낙서는 서슴치 않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집을 덮는다. 시집을 덮고 눈의 초점을 잃어 가며 마치 깊은 잠에 빠지듯 한낮의 몽환 속에 옛날 언젠가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자신이 자란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요즘에야 깨달았다. 고향을 떠나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람은 대개 다 그렇게 사는가 싶었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행정구역상 엄연히 서울로 편입된 지 40년이 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러나 40년 세월이라지만 마을의 지세는 지난날 그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고 가구 수조차 그 모양 그대로이다. 다만 신작로가 8차선 대로로 바뀌고 신작로 건너 김포 벌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뿐, 내가 아직 세상사를 잘 모르듯 내가 사는 마을도 뭔가 깊은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아마 내 자식이 내 나이쯤 되면 저 푸른 벌판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내가 저 벌판에서 잘 주어오던 뜸부기알처럼. 예나 지금이나 벌판 끝은 김포공항 활주로다. 그 활주로를 타고 비행기는 하늘로 떠올라 구름을 헤치고 멀리멀리 아주 먼 세계로 날아가곤 했다. 어린 날,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벌판 너머 떠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놓지 않으며 늘 저 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조리며 방과후의한나절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은 1분에 한 대씩 뜬다는 비행기의 공해와 소음이 큰 골칫거리이지만, 한나절에 한두 대 떠오르던 그 시절엔 비행기란 마치 꿈을 싣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타임머신이었다. 그렇게 벌판 끝을 내다보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먼지 쌓인 창틀 위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거기 글자를 써 넣기도 한다.
'부연.'
중학교3학년 때였다. 중학교 3학년이 사랑이 뭔지 알겠냐마는 나는 창틀에,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렇게 쓰고 또 썼다. 나는 3학년 들어 성적이 지지부진하자 그 핑계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과외공부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마음은 잔뜩 바람이 들었던가 보다. 예나 지금이나 과외공부가 꼭 성적을 올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건 그저 자기합리화를 위한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중3의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방과후의 헛된 시간을 보내던 공항시장의 2층 과외방에 새로 한 여학생이 들어섰다. 미닫이 문이 열리고 7,8명의 우리는 침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때 직감적으로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부류임을 알아차렸다. 과외를 가르치던 이병룡 선생도 대뜸 만만치 않은 얼굴빛을 보였다. 가르치는 일보다 다스리는 일이 더 힘든 중3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 등촌동에서 온 그녀 역시 성적보다는 그저 어떤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첫날부터 다른 학생들과 멀어져 있었다. 당시 여중 3학년들은 겨울이 되어도, 외투를 입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외투를 입어도 학생복에 맞춘 군청색의 헐렁한 외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고등학생들이나 입던 밤색의 윤기나는 외투에 그것도 몸의 곡선을 따라 맞추어 입은 듯한 모양이었다. 박박머리의 중3 눈에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얼굴은 그리 곱상이 어니었는데 한층 성숙한 모습의 그녀가 여간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훗날 부연이와 화곡여중 한 반이었던 초등학교 동창 금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나를 보고 그 과외에 들어왔다 하는데 그건 맞는 말 같았다.) 어쨌거나 사흘에 한 번 꼴로 빠지던 그 자리에 나는 하루도 걸르지 않고 나가는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그건 부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 모르게 나누는 밀회란 얼마나 짜릿하고 감미로운가. 나는 이미 그 어린 나이에 그 향기에 빠져 하염없이 헤매이기 시작했다. 공부가 끝나면 그녀는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밤 늦도록 김포가도를 걸었다. 공항동에서 발산동을 지나 화곡동을 지나 등촌동까지 두 시간여를 걸었다. 아직 어렸으므로, 처음이었으므로 말없이 걸었다. 단지 그저 걷고 또 걷는 것이 우리의 전부였다.
그런 밀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긴 교자상 두 개를 붙여놓고 공부를 하던 과외에서 부연이가 내 곁에 앉게 되었다. 자리는 오는 순서대로 앉았기 때문에 나란히 앉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선생을 외면하고 이런저런 잡념에 매달리던 나는 슬며시 부연이의 지우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슬며시 거기에 몇 글자를 써 넣었다.
'부연이는 내 꺼'
나는 그 글씨를 쓸 때의 심정을 기억한다. 공부는 지루했고 실내는 추웠으며 그저 뭔가 유치한 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런저런 낙서나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단지 유치한 장난이 아니었다. 지우개를 받아든 그녀가 잠시후 슬며시 상 아래로 손을 디밀어 나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부연이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여자는, 작지만 어떤 몸짓에 만족해 하는지. 그게 비록 한갓 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떤 시선에 행복해 하는지. 대처승의 외동딸이었던 그녀와 가수가 되겠다던 나의 사랑은 고교 3년 동안 참으로 가련하고 막막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이미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병약한 나와 엄격한 종교인의 딸로서 우린 세상은 온통 닫혀 있는 벽의 한가운데라고 믿었다. 답답하고 답답하였다. 그나마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쏟을 때, 부연이는 오히려 연예계 진출을 꿈꾸며 신인가수들과 몰려다녔다. 우리는 대학입시에서 모두 실패했다. 예상된 결과였다. 나는 너무 높이 지원했고 그녀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나의 처지를 잘 모르던 아버지는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게 깊은 배신감까지 느끼는 모양이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도망가지." "......"
아버지의 악담에 가까운 훈시가 있던 날 나는 집을 나와 부연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1978년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 간단한 짐을 챙겼고 어머니는 돈 5만원을 쥐어주었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 기타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옷가지는 별반 챙기지를 않고 마치 야유회라도 다녀오듯 나는 기타부터 둘러메고 당당히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우리는 밤기차를 탔다.
"아유, 귀여워."
내가 초조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고 밴드부였던 그녀는 머리나 옷모양새가 학생이 아니었고 나는 아직 박박머리를 웃도는 동안의 학생이었다. 무조건 멀리 가자 했고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모두 초행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검은 산야를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에 마음을 졸였고 그녀는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것은 밤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역 앞 광장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렸는데 호객행위를 위해 사창가에서 나온 아줌마들이었다. 나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무조건 먼 데로 가서 여관에 들어가요"
우리의 행색을 보던 아줌마는 그렇게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가리키는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 이만하면 됐겠다 싶은 거리의 여관 앞에 섰다. 여관 앞 길가엔 큰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훗날 부산 사는 동료 문인에게 물으니 거기쯤 그런 동상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수학여행 때 경주에서 여관에 들던 기억이 있었지만 거리엔 인적이 없고 붉은 간판이 여간 낯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너, 미성년자지!'하며 덜컥 뒷덜미라도 움켜쥘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선 이는 부연이였다. 눈을 비비며 기어나온 여주인은 흔히 있는 일인지 아무런 제지없이 3층 끝방을 열어주었다. 침대와 화장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대 앞에 병풍이, 그것도 8폭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그런 낯선 모습들이 더욱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몇 번이나 문고리를 확인하였다. 한 시간 여의 침묵이 더 흐른 뒤, 나는 병풍 곁
- 이하 게시판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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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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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도둑
경찰서장이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자네는 이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단 한명의 도둑도 잡아 내질 못했어."
그는 순찰 경관에게 호통쳤다.
"기회를 한번 더 주겠다. 어떤 놈이 데이비스 선생 댁 사과를 훔쳐가고 있다. 어서 가서 그 도둑을 잡아 와!."
그래서 경관은 한밤중에 그곳으로 갔다. 그는 과수원에서 보따리를 짊어지고 도망치려는 복면의 사나이를 발견하고는 쫓아가 붙잡았다. 그가 보따리를 풀자, 값진 은화들이 쏟아졌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보따리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이것이 사과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 지식은 결코 당신에게 통찰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장님으로 만든다. 지식은 당신을 눈멀게 한다. 앎은 통찰이며, 투명하고 순수하다. 지식은 낡은 것이다. 앎은 언제나 새롭고 젊다. 앎은 현재에서 일어난다. 지식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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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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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바로잡기
얽힌 실타래는 서서히 풀고 구부러진 나무는 서서히 펴라. 얽힌 실타래를 급히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얽히고, 구부러진 나무를 한 번에 펴려고 하면 오히려 부러진다. 우리는 비뚤어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 성급하게 군다. 몇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자녀의 탈선을 한 번의 매로 바로 잡으려고 하고, 몇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지역 감정을 한 번의 선거로 풀려고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속사정이나 시간은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그것들을 하루아침에 바로잡기 위해서 부질없는 노력을 들여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우를 법한다. 비뚤어지고 잘못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 왔다면 많은 시간을 두고 바로 잡아야 한다. 적어도 비뚤어지고 잘못되었던 시간만큼은 기다려 주어야 한다. 걸어 내려갔던 계단을 다시 걸어 올라오기 위해서는 걸어 내려갔던 시간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자녀의 탈선이 몇 년 동안 지속되어 왔고 지역 감정이 몇십 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해소시키는 데는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젖은 나무는 그늘에서 서서히 말려야 틀어짐을 막아 원형을 보존할 수 있다. 젖은 나무를 빨리 말리기 위해 갑자기 강한 햇볕을 쬐면 나무는 제멋대로 틀어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탈선도 지역 감정도 서서해 바로잡아야 원상을 회복할 수 있다. 자녀의 탈선을 바로잡기 위해 몽둥이를 쓰고, 지역 감정을 풀기 위해 지역 감정, 지역 감정 하고 떠들어대기만 하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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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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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정란 에세이 (지식인과 글쓰기)
이미지의 타락 - O양의 경우
정보 홍수의 흐름 안에서 개인의 사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얼마 전에 우리 사회를 한바탕 뒤집어놓은 <O양 비디오> 사건은 음란물의 불법 복제와 유통이라는 문제에서부터 개인성의 보호 문제로 위치 이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각의 이동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다른 층위에서 한번 살펴보려 한다. 한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사랑을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내밀한 순간을 생생한 이미지로 남겨놓고 싶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에 놓여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어느 보수 언론의 한 논객은 젊은이들의 서로의 정사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사랑의 징표로 주고받는 풍속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별 해괴망측한 일이 다 있다고 개탄한다. 나는 그 사실 자체를 옳다 그르다 탓할 것은 없다고 본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중심에 놓여있는 '이미지의 욕망'은 분명히 짚어 볼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연인들이 자기들이 사랑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남겨놓고 싶었던 것은 현대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욕망'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남녀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특별한 어떤 순간의 환희를 영속적인 현재로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지는 와해되어 시간성 속으로 사라지는 현재를 공간화 하여 고착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진 기술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형이상학적 욕구가 숨어있다. 시간과 더불어 무형으로 사라질 존재의 무상함과의 싸움, 그런데 사진 이미지와는 '비디오' 이미지, 즉 동영상은 보다 특권적인 위치에서 현재를 재생한다. 시간의 실재성이 합쳐져서 보다 입체적으로 과거가 재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된 테이프의 내용은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것으로만 남았다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어떤 특별한 순간을 종합적으로 재생시켜준다는 기억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경로로든 유출되었다는 데 있다. 가장 내밀한 이미지의 욕망이 공적인 장소로 끌려나오자마자 최초의 이미지는 추악하게 썩기 시작한다. 우리는 세 개의 층위로 이 이미지의 타락의 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허구와 실재의 도착. 둘째, 기호에 대한 욕망. 셋째, 여성의 육체에 가해지는 파시즘. 이미지 복제 기술이 발달되면서, 이미지는 실재를 복제한다는 애초의 기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매스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 이미지는 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그 결과 실재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는 실재가 이미지에게 존재증명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실재에게 존재 증명 도장을 찍어준다. 이미지는 2차 실존이 아니라 1차 실존의 자리로 이동한다.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은 공적 장소로 끌려나오자마자 곧 실재의 살가움을 집어삼키고 그 자체로 존재가 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삶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허깨비가 혼자 설치고 돌아다닌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꼴깍 삼켜진다.
둘째, 문제는 이 비디오의 주인공이 연예인이라는 데 있다. 연예인이란 일반인들과 달리, 공적인 공간에서 움직이는 특별한 존재, 즉 기호 가치를 가지는 개인이다. 그 기호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일 경우, 강력한 모방 욕구의 대상이 된다. 실재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닌 그 이미지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기호 가치 때문에 한없는 모방 욕구의 증폭 회로 속에 들어간다. 베껴지고 베껴져서 더 이상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 베껴졌다는 O양의 메피스토. 유령은 울부짖는다. 시체를 돌려다오. 셋째, 이 불쌍한 기호 유령은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의 시선의 희생물이 된다. 사랑을 정복으로 오해하는 이 원시동물들은 힘의 행사를 존재 증명의 궁극적 가치로 여긴다. 너를 죽여서 내 존재를 확인하는 파시스트의 욕망. O양의 유령은 여성의 육체를 정복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남성들의 파시스트적 시선 아래서 잔인하게 찢겨진다(여론 조사 결과 성인 남성의 42.9%(여성은 13.3%)가 이 비디오를 보았다 한다. 정말 할 일들도 없다). 무제는 현대 사회 안에서 이 모든 욕망의 요체를 인문학적으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그 막연하고 무의식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달려들 때, 엄청난 파괴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철학이다. 철학 없이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석할 수도, 적절한 처방도 내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점점 더 기능주의적인 방식으로만 대처하는 현재 우리 나라 대중매체의 추세가 두렵기 그지없다. 시청률만 높일 수 있다면 양잿물이라도 퍼먹을 기세이니 말이다. 갈갈이 찢긴 O양의 삶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보상될 수 있는가. 이것은 공공연히 저질러진 테러다. 그 비디오를 구해서 본 당신들 모두 그 테러의 공범이다. (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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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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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계원필경 - 최치원(857~?)
이 책은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되는 최치원의 개인문집으로, 저자가 당나라에 있을 때 쓴 시문들을 귀국하여 모은 책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당에 유학하여 과거에 합격까지 했으나, 이방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 속에 고국에 귀국한 후, 자신의 포부를 펴보고자 했으나 이것마저 불가능함을 알고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친 불우한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이 잘 나타나 있다.
성공과 좌절의 생애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인 최치원의 자는 고운이고 경주의 6두품 가문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고운은 12살의 나이로 학문적 성취와 세속적 야망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했다. 먼 길을 떠나기 전 그의 부친은 그에게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는 말로 자식을 전송했다. 당에 간 그는 18세에 빈공과에 장원급제하여 부친이 정해준 기간을 4년이나 앞당겼다. 빈공과란 외국인을 위해 당나라에서 실시했던 과거시험이었는데, 유학생들은 이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당시 동양문화의 중심인 당에서 관직을 얻을 수 있고 귀국해서도 일정수준의 관직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시험이었다. 그런 점에서 진골 출신의 독무대에 눌려 있던 6두품 출신들에게는 이 시험이 매력적인 통로여서 신라에 유학 붐이 일고 있었다. 신라 출신의 합격자가 58명이나 되었다 하니 알 만하다. 그러나 고운은 중요한 관직에는 임명되지 못하고 주로 시작에 몰두하는 한편 주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당시의 실력자인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온다.
고변과 인연을 맺은 고운은 고변이 9년에 걸쳐 중국 전역을 휩쓴 황소 토벌에 나섰을 때 그의 종사관으로 따라가 4년 동안 중요한 문서작성을 담당했다. 현재 <계원필경>에 전하는 글들이 대부분 이때에 이룩된 것이다.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도 이때 지은 것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 하고 있고, 땅 속의 귀신들까지도 몰래 너를 죽이자고 의논했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황소는 놀라서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한다. 변방의 미미한 청년이 중원천지에서 마음껏 문재를 자랑하던 득의의 세월이었다. 이처럼 고운은 세계제국의 중심지에서 문학적 명성을 날리는 등 후배 유학생들에게는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외국인으로서의 그의 출세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로 인해 그가 느껴야 했던 소외와 고독은 심각했다. 그러던 중 당나라도 기울어가고 고변도 퇴진하여 미래의 전망이 불투명하자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28세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에게 헌강왕은 도당 유학생에게 의례적으로 주었던 벼슬을 하사하여, 외교문서의 작성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이듬해 고운은 당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28권의 시문집을 왕에게 바쳤으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이처럼 문장가로 능력은 인정받았으나 정치적 혼란과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당에서 공부한 학문적 이상을 펴보기에는 신라사회가 너무 협소했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오면서 중앙의 권력쟁탈전과 더불어 지방세력의 반란으로 전면적인 붕괴국면에 들어간다. 외직으로 전전하던 고운은 38세 때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올려 사회적 모순과 국가체제 정비를 기원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율적인 개혁능력을 상실하여 그의 충정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의 개혁의지가 수용되지 않자, 당과 신라 모두에서 거부당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대자연을 유람하다가 결국 가야산의 해인사에 은둔했다.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신라의 현실은 최치원을 어떤 구체적인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방관자의 위치로 밀어냈다. 다만 제자들을 양성하여 고려 건국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 그가 시대를 위한 노력의 유일한 소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뛰어난 재능을 역사의 변화에 연결시킬 수 없었던 지식인의 고뇌를 본다.
고운의 사상과 문화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는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어 선사들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그곳에 은거한 사실을 보면, 불교에도 상당한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산천을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활을 쏘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심었으며, 책보기를 즐겨하고 바람과 달을 노래했다." 고 기록된 것처럼, 만년에는 도가풍의 면모를 보여 한국도교의 선구자로 추앙되기도 한다. 결국 고운은 그때까지 수입되어 상당히 성행한 유불도의 사상과 막연하게 전해오던 전통사상을 접목하여 풍류도라는 독특한 한국 전통사상을 확립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난랑비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은 실로 삼교를 포함하고 있어서, 모든 생명과 접촉하여 교화시킨다. 또 이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니 이는 유교의 가르침이며, 모든 일을 억지로 처리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고 일을 실행함은 도교의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행실만 행함은 불교의 가르침이다."
고운이 지은 글은 매우 많은 편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 4명의 승려를 위한 비문인 <사산비명>과 조선의 서거정이 지은 귀중한 한문학 고전인 <동문선> 등 여기저기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문학은 유교나 불교의 어느 쪽에 비해 보더라도 모자랄 수밖에 없다는 논조를 폈다. <사산비명>의 하나인 <진감화상비명>의 서에서 "초년에 중원에서 이름을 얻어 장구 사이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을 맛보았으나, 미처 성인의 도리를 마시어 취하지 못했으므로, 오직 진흙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성인의 도리가 문장수식보다 앞선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
한국 최초의 시문집
<계원필경>은 고운이 당나라 고변의 휘하에 있을 때 쓴 글들을 귀국하여 28권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나라에 관한 글은 비교적 적고, 중국의 임금이나 고관대작들에게 보내는 글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서문에 아버지의 분부를 깊이 명심하고 당나라에 가서 피나는 노력 끝에 과거에 급제한 사연과 고변의 종사관으로 많은 문서를 맡아보던 성공담을 적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의 그의 성공의 이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서 <당서>의 문예열전에 최치원은 들어있지 않다. 겉으로 표방하는 포용성은 주변민족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고 사실은 배타적인 기풍이 강했던 당의 사회에서 그는 당시 세계제국의 내면적인 모순을 발견하고 갈등과 번민에 휩싸였다. 그런 심정을 선명하게 드러낸 <진정상태위>를 음미해보자.
진정상태위
해내수련해외인 : 당나라의 누가 나를 가엾이 여기리 문진하처시통진 : 묻노라, 어느 나루가 내가 건널 만한 나루인가 본구식녹비구리 : 애초에 먹을 것이나 구하고 이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지위영친불위신 : 다만 부모를 빛내려고 했지 내 몸 위하지 않았다. 객로이수강상우 : 나그네길 이별의 시름은 강 위의 빗소리요, 고원귀몽일변춘 : 고향에 돌아가는 꿈에 봄이 아득히 멀구나 제천신우인파고 : 냇물 건너다 다행히 은혜로운 물결 듬뿍 만나서 원탁범영십재?: 속된 갓끈의 십년 먼지를 다 씻어버렸으면
고운은 자신이 외국에 있음을 절감하면서 깊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먹고사는 것이나 구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했다는 변명으로 그 고민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면 <촉규회>라는 시에서는 "천한 땅에 태어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도 참고 견디는" 접시꽃에다 자기 처지를 비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에서 고운은 자신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으로 의식하게 되고 주위의 민중의 생활에도 관심을 가질 여유를 얻었다. 그런 심정을 담은 시중 대표적인 시는 <강남녀>가 있다.
<강남녀>
강남탕풍속: 강남땅은 풍속이 음탕하여 양녀교차린: 딸자식을 요염하게 키운다네 치성치침선: 천성이 요염해 바느질은 싫어하고 장성조관현: 단장하고 거문고 타는 일뿐 소학비아음: 우아한 곡조는 배우지 못했으니 다피춘심견: 춘정에 많이도 이끌리네 자위방화색: 아름답고 꽃다운 그 맵시 장점염양년: 언제나 청춘일 것으로 여기네 각소린사녀: 가난한 이웃집 여자들 종조롱기저: 온종일 베틀 놀리는 걸 비웃네 기저종노신: 아무리 땀흘려 비단을 짜도 라의불도너: 비단옷 너에게 돌아가지 않을 걸
이 작품은 강남의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 빈부의 사회적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비록 중국인의 생활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부녀자들의 생활상이 직접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주제의 측면에서 보면, 상류층 부녀자의 교만하고 방탕한 삶의 모습을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하층 여성의 삶과 비교함으로써, 빈부귀천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즉 부귀한 가문 출신의 부녀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비난과 경멸의 시선을 보내면서 하층 여성의 삶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만년에 세상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가야산에 은거했을 때 지었다는 <추야우중>은 고운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이다.
<추야우중>
추풍유고음: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니 거세소지음: 넓은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드물고 창외삼경우: 창 밖은 삼경인데 비만 내리고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달리네
가을 바람에 괴롭게 읊조리기만 하는 만년의 심경을 잘 보여주는 시다. 당나라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래 마침내 가야산에 입산할 때까지 방황과 번민을 시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토로했다. 다음의 글을 당시 중국 전역을 불안에 떨게 했던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황소를 준열히 꾸짖는 글로서 고운의 문학적 명성을 떨쳤던 명문이다. 이로 인해 "황소를 토벌한 것을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었다"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격황소서>(제11권)
"광명 2년(818) 7월 8일에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치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고 이르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슬기로운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이는 이치를 거역하는 데서 패하나니, 백년 동안 목숨을 이을지라도 생사를 기약하기 어렵고, 만사는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느니라. 지금 우리 천자의 군대로 말하면 은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장차 수도를 수복하고 진실로 큰 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고자 한다. 너는 본래 천민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승세하여 감히 사람의 도리를 어지럽혔다. 드디어 불순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도성을침범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그 죄 하늘에 미치고 반드시 패하게 되리라. 햇살이 널리 비침에 어찌 요망한 기운을 마음대로 펴리오, 하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 알고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만 착함도 없으니, 천하 모든 사람이 다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문득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벌써 너를 남몰래 죽이기로 의논했다."(이 부분에서 황소는 놀라서 떨어졌다)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
<계원필경>에는 305편의 문장과 총 6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 시의 비중은 크지 않다. 그중 문장은 <사륙변려체>로 일관했고, 시는 당시를 따랐다. 사륙변려체란 각 구의 글자수를 4자와 6자로 대구를 맞추고 운자를 맞추는 등 형식미에 치중하는 화려한 문체로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나 과거시험에 많이 사용되었다. 시 중에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고변의 업적을 찬양한 것, 그리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주로 중국에 관련된 것들이고, 신라와 관련되는 시문은 권말에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자신의 내적 정서를 표현한 것은 드물다. 그중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참산에서 봄을 맞으며> 등과 같은 작품은 고국에 귀국하기 직전에 쓴 것들로서, 고국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간결한 시 속에 섬세한 필치로 노래했다. 한시의 다양한 형식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이토록 절묘하게 한시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비조로 평가된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보면 "고운 최치원은 전무후무한 공을 세웠으니 우리 나라 학자들은 모두 그를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대한다."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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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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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예수
시장 바닥에 죽은 개가 하나 누워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는 구역질난다며 얼굴을 돌려버리곤 했다. "아유, 이 냄새!" 어떤 사람은 코를 막으며 지나갔다. "저 빠져나온 갈비뼈 좀 봐, 아유 징그러워, 구역질나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신발 끈을 만들 만한 가죽도 없잖아?" 그때 온화하면서도 질책하는 소리가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는 소리 가운데 들려왔다. "진주라도 저 하얀 이빨에 비교할 만한 게 못 되지!" 그러자 사람들은 슬슬 흩어지면서 이렇게 소근거렸다. "저 사람은 틀림없이 예수일 거야. 아니면 누가 죽은 개한테 저렇게 좋은 말을 해주겠어?"
- 객체는 그대가 투사하는 그대로 비추어 준다. 가슴속에 추한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추하게 보이고 그대 가슴이 순수하다면 모든 것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보인다. 그대는 단지 그대 자신의 메아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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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세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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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100장면 - 안정애, 양정현
6. 주의 봉건제도
은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방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 마침내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은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적 세계는 북중국 전역으로 확대,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화이의 관념이 시작되었고, 천명사상, 혈연 중심의 예문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윙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기주)에 정착했다. 이곳은 예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 은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은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은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 은은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했다. 문왕 때에 은 정벌의 계획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현되었다. 마침 은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은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흘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은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은의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은 왕실의 잔혹한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은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은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 음주를 특별히 통제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하남성 낙양 부근)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은의 잔존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긑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성왕을 슬기롭게 보좌함으로써, 훗날 공자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주왕실은 방대해진 영토와 주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스려야 할 것인지 커다란 고민에 빠졌다. 아직 청동기 단계에 불과한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북중국 전체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차피 간접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각 제후들을 포섭, 통제하여 반란에 쐬기를 박을 수 있을까? 이때 창안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 통치제도가 바로 봉건제도다. 봉건제도란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확장된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 다스리게 하는 제도로, 제후는 왕에 의해 봉해져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했으나, 지역의 내정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주왕실은 이러한 지역분립을 극복하고 주왕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현연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왕실과 제후는 단순히 정치적인 군신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와 분가의 관계, 즉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집안임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천명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널리 유포, 주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하늘은 주 무왕에게 포악한 은의 주왕을 멸하고 주왕조를 개국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은, 주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듯을 반영한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백성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주의 지배에 반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무서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주의 지배는 제사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은나라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다.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질박하고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애기가 된다. 주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잡고, 심지어 주가 정복한 은의 제사도 중시되어서, 그들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후손을 제후국에 봉했다.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독자적 예문화가 정착, 이후 중국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왕실은 도읍을 동쪽의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한다.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데, 춘춘시대는 공자의 책명 (춘추)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전국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주의 멸망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왕은 포사라는 후궁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올려졌다. 다급해진 제후들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왔으나,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넋빠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본 포사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보기를 원했고, 자구만 봉화를 올렸다. 거듭 속아왔던 제후들은 정작 견융의 침입으로 주왕실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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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3. 수련 단계에 대한 욕심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단계를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신입회원을 예로 들어보자. 누워서 석문혈 자리에 단전을 자리잡게 하는 수련은 3~4개월 하노라면 앉아서 수련하는 회원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수련이 끝나고 차를 마시며 다담을 나누는 시간에도 좌식수련 이상 되는 회원들은 지긋이 정좌하고 앉아 수련을 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단전자리가 어긋날까봐 누워서 할 때 외에는 절대 호흡수련을 못하게끔 되어 있는 신입회원들 입장에서 어찌 부럽지 아니할까? "저기... 와식수련(누워서 수련함)하는 사람은 앉아서 차 마실 때 수련하면 안 되나요?" 수련지도를 끝내고 회원들과 모여 차를 내고 있는데, 주변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수들의 아랫배가 부러웠는지 입회한 지 한 달된 신입회원이 넌지시 물어온다. "안 되죠. 아쉽더라도 참으세요. 단전만 자리잡으면 앉아서도 수련할 수 잇습니다." "그거 참... 다들 수련하는데 나만 멍하니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그런 생각하면서 열심히 수련해서 지금은 차 마시면서도 수련할 수 있는 거예요."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한참 발도심이 살아나 밥먹고 자는 시간도 아까워할 시기에, 나 아닌 남들은 모두 수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공연히 나만 뒤쳐지는 것 같은 억울함(?)까지도 느껴지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와식수련자가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인 것을 말이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미치게 되면 이해를 돕기 위해 항상 예로 들게 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현재 은평지원의 지원장으로 있는 호월 권진홍 사범이다. 내 입장에서는 거의 전설과도 같은 양반인데, 특유의 걸쭉한 입담은 둘째치고 항상 도장, 도장 일만 외치고 다니니, 발도심의 측면에서도 참으로 본받아 마땅할 사람이다. 항상 나 같은 놈은 호월 반도 못 따라간다는 괜한 자격지심에 시달려 잠을 설칠(?) 정도이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랴? 호월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장을 만들어 이야기할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기로 하자. 아무튼 호월이 고생고생 끝에(무엇이 고생이었는지는 추후에 알게 될 것이다) 와식을 끝내고 좌식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아하! 이제 좌식에 들어갔으니 단전도 자리를 잡았겠다. 어떤 자세로 수련해도 상관이 없겠지." 호월도 신입회원 시절에 차 마시며 앉아서 수련하는 도반들이 엄청 부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좌식에 들어가면 불철주야 수련하리라고 각골명심하고 있던 차에 좌식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호월은 좌식에 들어가자마자 앉아서는 물론이고, 누워서도 물론이며, 하물며 옆으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수련에 몰두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좌식 한 달이 지나고 수련점검 때 사상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일명, '단전 삐뚤어져 도로 눕기'사건이었다. 지금은 대주천 수련까지는 거산 김경사 님이 맡고 계시지만 그 당시엔 한당 선생님께서 모든 수련점검을 다 하시고 계셨다. 점검을 위해 들어간 호월에게 선생님이 단전이 삐뚤어졌으니 다시 누워서 수련하라는 지시를 내리신 것이다. 이런 사태(?)는 호월 이전에도 없었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어나지 않은 초유의 사태이니 그 당시 호월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금은 호월도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자존심은 둘째치고 한당 선생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게 아닌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겹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대체 왜 단전이 삐뚤어졌을까?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두문불출한 결과, 옆으로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소박한 자체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누가 알 것인가? 정말 단전이 삐뚤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한당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실 뿐 말이 없으시다. 이렇게 고생을 해서 좌식에 들어가면 또 다른 고민이 기다리고 있다. 단전에 기가 모여 쌓이는 느낌은 알겠는데, 경락을 따라 몸 안으로 기운이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 수련은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측면이 많다. 그러나 수련 단계로만 보면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스스로 신선이 되는, 끝이 보이는 공부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기보다 월등히 높은 단계는 감히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자신의 바로 위 단계 회원들을 보게 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다. 이러한 수련단계에 대한 욕심은 지나치면 마가 되지만, 적당하면 발도심으로 작용해 수련상승을 가져오는 효자 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앉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지만 대맥운기만 생각하면 조바심이 솟구치기 마련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비록 자기 몸이지만 피가 도는지 안 도는 지도 모르고, 기껏해야 배고플 때 위와 장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나 들을 정도인 일반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눈으로도 안 보이고 수술을 해도 나타나지 않는 경락을 따라서 기가 돌아가는 느낌을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는가? 기운을 최초로 돌린다는 것! 바로 이것 때문에 대맥 수련은 초보회원에게 있어서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대맥운기에 들어가자마자 눈은 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마련인 것이다. 엄청난 기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몸 안의 소우주가 눈을 뜬다는 소주천, 진기의 소생처가 마련된다는 온양, 천지공간의 기운과 통한다는 대주천, 일월성법, 귀일법, 풍수법, 선인법, 전신주천... 열심히 땀흘려 수련하고, 그 땀의 결실로 다음 단계 수련으로 들어갈 때의 희열이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 이 길이 비록 멀고 고적해 보일지라도, 밀알이 싹터 결실을 맺듯이 하루하루 수련의 정성이 모이고 모여 결국은 끝을 보게 될 것이다. '단전 삐뚤어져 도로 눕기'의 산 증인인 호월도 어느새 전신주천 수련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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