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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50호
단기 4343 / 서기 2010. 5. 12 (음력 3.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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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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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여지는 미(美)이다.(주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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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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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녁’과 ‘쏘다’
우리가 좀처럼 들어 보기 어려운 말 가운데에는 ‘가녁’이라는 북녘의 말이 있다. “일정한 공간의 중심을 벗어난 변두리나 한쪽 모퉁이”를 가리킨다. 문학 작품에서는 “장군님께서 바위에 걸터앉으시자 회의 참석자들도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최진동과 한영권을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은 지하 혁명조직 책임자들을 될수록 장군님 가까이에 앉히려고 마음을 쓰면서 자신들은 가녁에 자리를 잡았다.”(<근거지의 봄>, 4·15 문학창작단, 문예출판사, 1981년, 214쪽)와 같은 예가 보인다.
북녘에서는 ‘쏘다’라는 말을 우리와는 좀 다른 의미로도 쓴다. “무엇이 쑤시고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로 쓰는 경우가 그것이다. 문학 작품에서 용례를 찾는다면 “어머님께서는 오늘 사하촌에 가셨다가 흐지부지되여 가는 부녀회원들의 야학을 바로세울 대책을 의논하실래기 반나절을 보내시고 돌아오시다가 다리가 너무 쏘아서 길가의 버드나무 그늘에 앉으시였다. 누렇게 익어가는 강냉이 밭이 바람도 없는데 우수수 설레였다.”(<대지는 푸르다>, 4·15 문학창작단, 문예출판사, 1981년, 291쪽)와 같은 것이 있다.
‘의논하실래기’는 ‘의논하시려고’의 뜻이고, ‘설레다’의 경우는 우리는 ‘설레다’만 표준어로 인정하지만 북녘은 ‘설레다’와 ‘설레이다’를 다 문화어로 인정하고 있다.
전수태/전 고려대 전문교수
캐러멜
3월 하순이지만 눈발도 날리고 기온도 제법 차서 봄을 맞이하기가 이렇게 힘든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분들이 많다. 봄이면 학생들은 소풍이 가장 기다려질 것이다. 함께하는 즐거운 놀이도 기다려지거니와 평소에는 잘 먹지 않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여서 1935년 5월의 한 신문에서 ‘원족에는 캬라멜과 빙사탕을’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 당시의 소풍에서 먹는 맛난 군것질거리로 ‘캬라멜’(캐러멜)과 ‘빙사탕’(얼음사탕)이 대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캐러멜’(caramel)은 ‘작은 갈대’라는 뜻의 라틴말 ‘칼라멜루스’(calamellus)에서 비롯되어 포르투갈말에서 ‘고드름’이라는 뜻으로 바뀐 다음 스페인말 ‘카라멜로’(caramelo)와 프랑스말을 거쳐 영어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 말에는 지금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물엿, 설탕, 우유, 초콜릿 따위에 바닐라 같은 향료를 넣고 고아서 굳힌 사탕 종류를 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탕이나 포도당 등을 빛깔이 변할 때까지 졸여서 만든 걸쭉한 물질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일본말 ‘갸라메루’(キャラメル)의 영향을 받아서 ‘캬라멜’이라 일렀고, 지금도 그렇게 쓰는 분들이 있다. 또한 ‘카라멜’로 쓰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일본말스러운 이 두 가지, 그리고 영어식 발음이 섞인 ‘캐라멜’ 대신에 영어의 원음에 가까운 ‘캐러멜’이 바른 표기이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관
경위
‘경위가 밝다’,‘경위가 분명하다’,‘경위가 바르다’고 한다. 경위(涇渭)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나 사리 분별이다. 중국의 경수(涇水)와 위수(渭水)라는 강 이름에서 머리글자를 따 만들어졌다. 경수는 항상 흐리고 위수는 늘 맑다고 한다. 이 두 강물은 서안 근처에서 만나는데 섞여 흐르는 동안에도 뚜렷이 구별된다. 여기서 경위의 뜻이 나왔다.
넋두리
굿을 할 때 무당은 죽은 이의 넋을 불러낸다. 죽은 사람은 이러저러한 하소연과 불평을 무당의 입을 통해 쏟아낸다. 넋두리를 하는 것이다. 넋타령, 넋풀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넋두리’는 ‘무당이 토해내는 하소연이나 불평’이라는 특수한 의미였다. 점차 뜻이 확대돼 ‘불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이라는 일반적 의미를 갖게 됐다.
초생달, 초승달
'자정 무렵 산행을 하던 연인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눈썹같이 떠오른 초승달이 깊은 밤의 운치를 더했다'. 이 사진은 진짜일까? 분명 합성사진일 것이다. 초승달은 해가 지면 곧 따라 지는 초저녁달이기 때문이다. 음력 매월 초하루부터 처음 며칠 동안 뜨는 달을 '초승달'이라고 한다. 이를 흔히 '초생달'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옛날 사람들은 초생달을 보고 한 달의 시작을 알고 그믐달을 보며 한 달을 마무리 지었다" "초생달 서산에 넘어가고 달빛이 사라지면 산들바람 살랑살랑 물결처럼 밀려오는 밤"과 같이 사용하고 있으나 '초승달'이 바른 표현이다. 초승달은 갓 생겨나다라는 뜻의 '초생(初生)'에 '달(月)'이 더해진 꼴이므로 '초생달'로 쓰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한자어 '생(生)'은 '금생(今生.이승)'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기도 하지만 이승이나 저승처럼 더러 음이 변한 형태를 쓰기도 한다. '초승달'도 어원은 '초생'이지만 '승'으로 바뀐 말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와 같이 사용해야 한다.
가검물(可檢物)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이 이번 학교 급식 사고로 식중독에 걸린 학생들의 가검물을 채취해 검사한 결과 25%에서 노로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한다. 이처럼 식중독이나 어떤 병이 발생하는 경우 '가검물'을 채취 또는 검사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가검물'은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가검물(可檢物)'이란 병균의 유무를 알아보기 위해 거두는 물질을 뜻한다. 환자의 구토물.혈액.변.땀 등 몸에서 나오는 모든 분비물 혹은 물질이 대상이다. '가검물'이란 단어 자체는 어렵지만 뭐 대단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1997년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가 발행한 '국어 순화 용어 자료집'에는 '가검물'이 어려운 행정용어이므로 '검사대상물'로 바꾸어 쓰라고 돼 있다. 순화 용어는 4단계로 등급을 나누어 '×, →, ○, △'로 표시하고 있는데, '가검물'은 '×'라 돼 있다. 절대로 쓰지 말라는 얘기다. 그러나 행정부서나 관련 기관들은 '가검물'이란 말을 계속 쓰고 있다. 정부가 정해 놓고 스스로 지키지 않는 꼴이다. '가검물'은 어려운 한자어다. 순화 용어대로 '검사대상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 긴 게 흠이라면 줄여 '검사물'이라 해도 문제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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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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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맛 - 손현숙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 내 이름은 빨강 중에서 -
오스만제국의 세밀 화가들은 신이 보았던 그대로 세상을 그리려고 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50년 동안 그림만 그렸기 때문에 대부분은 장님이 되고 말았다. 반복해서 그리던 세상을 손으로 외워서야 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다.
언제부터 내 눈도 멀어 너를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나라고 하는 너’는 나를 끌고 일곱 하늘과 일곱 땅을 통과한다.내 발과 네 발이 겹쳐 나는 언제나 혼자다. 보지 않고도 안다는 것,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슬픔의 맛. 너의 시간은 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 속에서만 환생하는 꽃을 보며 내 몸에 벨벳 같은 어둠이 찾아 든다. 너 보다 더 너 같았던 나, 이제야 너를 환히 본다. 그러나 너는 나를 기억하지 말기를. 어둠 속 반복해서 그렸던, 너는 나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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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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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찻집에서 - 최희선
미닫는 문틈 새로 옥로(玉露) 향기 배어나고
결고운 마른 꽃잎 벽면마다 둘러 두면
가야금 애절한 가락 끊일 듯이 들린 듯해
수줍어 더 고운이 살포시 다가 와서
촛불을 밝혀 놓고 그리움, 찻잔에 따르면
불매향(不賣香) 맑은 내음으로 가는 세월 잡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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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동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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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 - 방정환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혼자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기러기 떼 날아간 뒤 잠든 하늘에 둥근 달님 혼자 떠서 젖은 얼굴로 비치어도 비치어도 밤은 안 깊어.
지나가던 소낙비가 적신 하늘에 집을 잃은 부엉이가 혼자 앉아서 부엉부엉 울으니까 밤이 깊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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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이글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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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이야기 - 김형균 엮음
1. 신비한 세계로의 여행
불을 내뿜는 사나이
1882년 12월 1일. 미국 미시건 주의 한 마을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응?" "쉿! 조용히 해요. 저기 저 남자가 입에서 불을 내뿜는 데요!" 한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그곳엔 흑인 청년이 서있었는데, 24세인 아주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A.W. 언더우드였다. "정말로 불을 내뿜을까?"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언더우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그의 묘기가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돌돌 말아서 한 손에 들고 그것을 자기 얼굴 앞에다 갖다댔다.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훅하고 입김을 손수건에 불었다. 손수건에 입김이 닿자마자 갑자기 손수건에 불이 붙어 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해져 서있었다. 언더우드는 손수건이 활활 타서 재가 되어 날아갈때까지 그것을 들고 서있었다. 손가락이 불에 델 법도 한데, 언더우드는 조금도 뜨겁지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손수건이 다 타버렸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와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언더우드는 뚜벅뚜벅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걸어나갔다. 그리고 맨 앞에 주그려 앉은, 노란 모자를 슨 사내아이 앞에 가서 섰다. 사내아이는 배구공을 깔고 앉았는데, 언더우드는 그 사내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꼬마야, 그 배구공에 불을 붙여 불배구공이 되어 날아가게 해줄까? 하지만 네 것이니 네가 결정하렴." 사내아이가 대답했다. "좋아요. 아저씨. 이공도 한번쯤은 멋진 불날개를 달고 날아보고 싶을 테니까요." 사내아이는 엉덩이를 들어올리더니 자기의 배구공을 들어 언더우드에게 주었다. 언더우드는 사내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원으로 둘러싼 사람들의 중앙에 가서 섰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한 꼬마신사가 이 공을 제게 선물했습니다. 곧 여러분께서는 불이 붙은 공이 공중을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겁니다." 사람들이 또다시 웅성거렸다. 드디어, 언더우드는 공을 두 손으로 잡고, 가슴 앞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두 손을 하늘 위로 벋침과 동시에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순간, 배구공에 확 불이 붙었다. 그리고는 하늘 높이 날아갔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그 공을 따라갔다. 높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이외에도 불이 붙는 것이라면 뭐든지, 입김을 불어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주의 사람들은 모두 언더우드를 부러워했다. "내가 언더우드처럼 불을 맘대로 내뿜을 수 있다면 무서운게 없을 거야." "내가 저사람이라면 어두운 밤길을 혼자 가다가 깡패를 만나도 하나도 겁나지 않을텐데." 그러나 정작 언더우드는 자기의 특이한 능력 때문에 큰일을 당할 뻔 했다. 한번은 언더우드가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던 중이었다. 사람으로 꽉찬 지하철 안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언더우드는 문 옆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좋은 냄새가 났다. 은은한 아카시아 향기였다. 번쩍 눈을 뜬 언더우드 앞에 웬 아름다운 아가씨가 서있었다. 아가씨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에 하얀 원피스를 입고 책을 읽고 서 있었다. 그때, 언더우드는 문득 아가씨의 뒷머리에 작은 날벌레가 하나 붙은 것을 보았다. 언더우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아가씨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가져갔고, 흥분한 나머지 입김으로 내뿜고 말았다. 그러자, 아가씨의 예쁜고 긴 머리칼에 불에 확 붙어 탸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가씨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자신의 웃옷을 벗어 아가씨 머리칼을 덮고는 서둘러 불을 껐다. 아가씨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곧 정신을 잃었다. 소동 끝에 정신을 차린 아가씨가 언더우드를 똑바로 노려 보면서 말했다. "댁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언더우드는 자초지종을 얘기했으나 아가시는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거렸다. "알고보니 제정신이 아니군." 언더우드가 아무리 사과를 해도, 아가씨는 입술만 씰룩거릴 뿐이었다. 결국, 언더우드는 그 아가씨에게 꼼짝없이 '나쁜 사람'이 라는 욕을 얻어 먹었고, 사람들에게 누명을 쓰게 되었다. '나는 원시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몇시간이고 돌에다 나뭇가지를 부비던 때에 말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오늘 같이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원시인들 중 최고의 힘을 가진 자가 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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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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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돌맹이
던넌에게는 고집스럽게 묻고 또 묻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한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던넌이 그 제자에게 돌맹이 하나를 주면서 야채시장에 가서 팔아 오라고 하였다. 그 돌맹이는 매우 크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 그것을 팔려고는 하되, 팔지는 말아라" 하고 스승이 말하였다. 그리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그 야채시장에서 돌맹이 값으로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제자는 시장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가 돌맹이를 보고는, "이거 장식용으로 참 좋겠는데... 우리 아이들 장난감으로도 좋겠어. 아니면 야채를 저울질 하는데 쓰면 제격이겠는걸" 하고 그들 나름대로 흥정을 걸어왔다. 그러나 겨우 10페이스짜리 작은 동전 이상을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그 제자는 돌아와서 스승에게 고하였다. "10페이스 이상은 못받겠어요. 사람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대략 2페이스에서 10페이스 사이였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렇다면, 이제 금 시장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단지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알아보기만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그 제자는 금 시장에서 돌아와 흥분하여 말하였다. "그 사람들이 최고입니다. 그들은 천 루피나 주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반응은 달랐지만 5백에서 천 루피까지 주려고 했습니다." 또다시 그 스승은 말하였다. "이제는 보석상으로 가 보아라. 그러나 절대 그것을 팔지는 말아라." 그는 보석상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했다. 사람들이 5천 루피나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팔려고 하지 않자, 상인들은 값을 더 올려 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값은 10만 루피까지 껑충 치솟았다. 그러나 그 제자는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상인들은, "20만 루피, 30만 루피라도 주겠소. 아니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주겠소. 그러니 그것을 제발 파시오/"하고 졸라대었다. 그 제자는, "나는 팔 수 없습니다. 단지 시세를 알아보려고 왔을 뿐입니다"하고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이 야채시장에서 흥정하던 값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승에게로 돌아갔다. 스승은 돌을 집어올리며 말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그 이해의 척도를 잴 수 있다면, 이제 너는 그 값이 네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 그대의 이해력은 그 야채시장의 수준과 일치한다. 그런데도 그대는 더 고귀한 가르침을 요구한다. 그대는 다이아몬드를 요구하고 있다. 먼저 보석상이 되라. 그런 다음 나에게 오라. 그때에는 나도 그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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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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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7장 나 그리고 인생
삶의 의미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 마라. 내가 보기엔 남의 떡이 더 커 보일지 몰라도 남이 보기엔 내 떡이 더 크고 맛있어 보인다. 터무니없이 나보다 나은 존재를 올려다보지 말아야 한다. 나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면 삶의 의욕은 무조건 달아나고 만다. 설령 내가 타인들보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더 잘생겼더라도, 나보다 나은 사람을 올려다보게 되면 나는 이유없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나의 모든 존재 가치는 타인들과의 비교로써 결정된다. 잘살고 못사는 것도, 잘생기고 못생긴 것도, 돈이 많고 적은 것도 타인들과의 비교로써 결정된다. 내가 가진 재산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나보다 더 부자인 사랍과 비교하면 잃은 것도 없이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과 비교하면 얻은 것도 없이 나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가난하다고 생각되면 더 못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내 입에 고깃덩어리 들어가지 않으면 나물 들어가는 입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도 맛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그래도 내가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공정
모든 일에 공정하라. 공정한 것은 모두에게 좋고 불공정한 것은 모두에게 나쁘다. 불공정할 때 목숨을 건 투쟁이 일어나고 이기주의가 대립한다. 어떠한 일에서든 공정을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 공정하면 어떠한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불공정은 모든 분쟁과 갈등의 씨앗이다. 불공정한 데서부터 갈등이 표출되고 이기주의가 고개를 쳐들고 비난과 헐뜯음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노사 분쟁도 흑백 갈등도 불공정한 데 그 원인이 있고, 공산주의의 붕괴도 결국은 불공정(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공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정한 것은 어는 한쪽에만 좋은 것이 아니다. 공정한 것은 타인들에게도 좋지만 결국 자신에게도 좋다. 공정은 만인에 대하여 평등하기 때문에 어떠한 갈등도 비난도 일지 않는다. 평화가 유지될 수 있고 민주주의가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공정(능력 중시)하기 때문이고, 자율 속에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공정하기 때문이다. 불공정은 항상, 그것도 양쪽 모두에게 껄끄러운 뒷맛을 남겨 놓는다. 설령 자신이 타인들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해도 타인들보다 더 손해를 보고 있다는 뒷맛을 지우지 못한다. 더구나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는 그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강한 반발을 산다. 그 특혜가 생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라면 목숨을 건 투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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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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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김규항·김정란·진중권·홍세화
김규항 에세이
썩은 고기
둥글고 환하게 뜬 달을 보며 김단이 묻는다. "아빠, 달은 가까이 가서보면 더 커?" 아이의 질문에 공을 들이는 편이 내가 대답한다. "응, 달에 가까이 갈수록 달이 더 크게 보이지.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지."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 "응, 단아 지구가 어떻게 생겼지?" "공같이." "그래. 그런데 단이가 지금 어디에 있지?" "지구에." "그래. 그런데 지구가 공처럼 보여?" "아니 똑바루 보여." "그래. 단이는 지구에 있으니까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얼마나 큰 지도 알 수 없는 거야." "아, 그렇구나." 내가 하고도 내게 이로운 말이었다. 지구에 있기 때문에 지구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는 당대와 지식인과의 관계와 닮았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많다. 달 위에 선 사람은 달 표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달에 무엇이 사는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달 위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달에서 멀리 떨어져보지 않는다면 달이 공처럼 둥글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지식인의 역할이 바로 거기에 있다. 세상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정보만으로 당대 현실을 파악할 때, 혹은 그게 모두라고 단정할 때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알리는 일 말이다. 지식인은 그런 역할을 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1999년 한국을 파악하는 통찰을 얻기 위해 1999년 한국 이외의 모든 것을 공부한다. 여는 사람들이 사도제자나 장희빈의 사생활을 역사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프랑스혁명사나 러시아혁명사를 배우고, 여느 사람들이 이문열이나 김진명을 독서라 여길 때 지식인들은 구태여 촘스키니 부르디외니 하는 사람들을 읽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당대를 파악하는 지식인의 노동은 용접을 하는 용접공의 노동이나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분담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다. 지식인의 노동이 원래부터 다른 모든 노동보다 존귀한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원래부터 존귀한 것은 없다. 사회가 지식인에게 육체노동의 의무를 면해주고 존경과 명예를 준 것은 지식인이 원래 존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파악하는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지식인에게 등대의 역할, 이정표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기억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다. 지식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상한 삶과 세상의 존경과 명예가 제가 나면서부터 똑똑하고 잘나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지식인 세계`를 형성하고 그들끼리만 소통 가능한 암호 언어(그들이 `지적 대화'라고 부르는)로 그들의 서푼짜리 허영심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또한 그 서푼짜리 허영심의 냄새나는 퇴적물을 지성이니 교양이니 인문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몸에 두른 채 당대 현실로부터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짓는다.
이 나라의 정신 세계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이 나라의 백성들은 온갖 집단주의, 온갖 파시즘의 멍에에 사로잡혀 있지만 겸허한 계몽주의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지식인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다. 오늘도 이 나라의 보수 지식인들은 극우와의 경계를 넘나들고, 이 나라의 진보 지식인들은 가상현실을 오르내릴 뿐이다. 당대의 현실의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이 책상에 앉아 '고유한 지식`을 탐구하는 모습은 머리가 텅 빈 미인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고기와 관련한 것이다. 한국 지식인들은 천민자본주의라는 푸줏간에 걸린 썩은 고기들이다. (99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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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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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3 - 반덕진
수상록 Les Sssais -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나는 무엇을 아는가(크 세 쥬? Que sais je)" 등의 구절로 유명한 이 작품은 몽테뉴가 오랜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독서와 사색에 몰두한 후 부담없이 쓴 지혜의 서다. 이 책은 특정하거나 일정한 논리나 순서없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랑욕망죽음등의 문제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며 쓴 책으로, 스토이즘회의주의 에피큐리어니즘을 거친 저자의 사상편력이 담겨 있으며, 그의 인간성 성찰은 후세의 도덕론자들에게 하나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고전여행과 명상 속에서 보낸 생애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지 않는 한 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몽테뉴는 르네상스 말기에 나타나 당시까지의 인류지성을 집약한 작가로 평가된다. 그는 변화가 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여, 프랑스 르네상스의 후반기를 대표한 사상가였다. 몽테뉴는 프랑스의 페리고르 지방의 신흥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피에르는 젊은 시절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하여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의 진수를 체득하고 귀국한 후 가세를 확장시키고 마침내 보르도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체험한 부친은 어린 아들의 교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우선 갓 태어난 그를 허름한 농가에 양자로 보내 가난한 사람들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했고, 4~5세가 되어 양자기간이 끝난 어린 아들에게 당시 지식인의 필수 코스인 라틴 어 교습을 위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독일인 가정교사를 초빙했다. 종들도 이 아이 앞에서는 라틴 어만을 사용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덕분에 몽테뉴는 6세 때 라틴 고전을 읽을 정도였고, 그때서야 모국어인 프랑스 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때 보르도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을 공부했으며, 16세 때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21세부터 페리그 시의 어용금재판소의 참사가 되어 3년 동안 근무한 후, 그 재판소가 폐지되자 보르도 고등법원의 참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보에티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몽테뉴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언어학자이자 문필가로서 금욕주의의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반면, 몽테뉴는 아직도 자신에게 알맞은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독특하고 신비스런 방법으로 우정을 나누었고, 이런 교유는 심원한 인간관계에 대한 몽테뉴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4년 후, 몽테뉴가 "그가 곧 나다."고까지 말했던 친구의 요절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고, 그와의 우정이 지속되었더라면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2년간 숱한 연애를 했으며, 33세 때 결혼했다. 36세 때 부친이 죽자 몽테뉴는 몽테뉴 가의 영주가 되어 막대한 재산과 넓은 영지를 물려받았다. 38세에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라틴 고전 탐독과 명상으로 보냈다. 그후 10년(1570~1580)동안 <수상록> 1권과 2권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완전한 은둔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후 그는 곧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을 여행했으며, 여행 도중에 일찍이 부친이 역임했던 보르도 시장직에 선출되었다. 1858년까지 시장직에 재직하면서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전쟁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1588년에 <수상록>을 대폭 증보수정하고 제3권을 넣어 새로이 간행했다. 그후 그는 성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수상록> 가필로 여생을 보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의 프랑스는 정치적종교적으로는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이 꼬리를 물었고, 사회적으로는 흑사병이 나돌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도 몽테뉴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시대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그는 <수상록>에서 모든 관점에서 문제를 검토하면서도 최종적인 해답은 유보했다.
종교전쟁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 르네상스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 종교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가 절대주의국가로 가는 도상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한 정치분쟁이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그러하고,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30년전쟁이 유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신교도인 위그노와 구교도와의 대립이 왕위계승 문제라는 정치적 대립과 얽혀 30여 년간에 걸친 내란으로 발전했다. 전쟁은 처음 프랑스 왕의 신교도 탄압에서 비롯되었으나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이 신교도를 지원하고, 에스파냐, 로마교황군이 구교도를 원조하는 등 여러 나라가 간섭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말기에 왕위에 올라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가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공인함으로써 내란은 종식되었다.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재직시 양쪽으로부터 보르도 시를 보호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했으며 그 덕분으로 보르도 시는 무사할 수 있었다.
흑사병의 유행
몽테뉴는 그 어려운 시장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로운 불행이 덮쳐왔다. 1585년 여름에 발생한 흑사병이 보르도 일대에 만연하여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교외지역에서 주거하고 있었던 사람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몽테뉴도 가족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로 죽어가는 농민들과 그들의 죽음에 임하는 태도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때 우리는 단순한 서민들에게서 불굴의 본보기를 보았다. 그들은 삶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으며,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라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정신적 위기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닌 지혜로운 철학자 몽테뉴의 출현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자아성찰의 서
수상록은 1572년부터 1592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본서는 총 3권 107장으로 되어 있지만, 각 장 사이에 논리적 연결은 없다. 그리고 각 장의 제목은 반드시 그 장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내기 위한 구실이거나 혹은 이야기를 결말짓기 위한 경우가 많다. <수상록> 제1권에는 로마의 세네카 등 고전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 이성에 따르고자 하는 스토아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제2권에서는 자기 성찰이 깊어지면서 스토아적인 경향을 떠나 피론(Pyrrhon)의 회의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제3권에서는 회의주의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us)적인 쾌락주의가 가미되어 소위 자연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결국 그는 쾌락주의적 자연주의에 접근하게 되어 소크라테스를 스승 중의 스승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그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탐구라는 전제 아래 키케로,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세네카 등 로마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성격행동체험주장을 솔직하게 적고 있다. 그는 항상 흔들리고 기복이 심한 하나의 인간, 즉 자신을 책 속에 그려봄으로써 자기 이상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밝혀보려고 했다. 독자에게 드리는 서문에서 "내가 묘사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밝히면서, 독자들이 자기를 여기 묘사된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 것 아닌 그를 보아주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제1권
제4장 <참된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그 열정을 그릇된 목표에 쏟는다>에서는 "바람은 울창한 숲이 그 진행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 힘을 잃고 허공에 흩어진다"는 그리스의 철학자 루카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요하는 영혼은 그 영혼에게 붙잡을 어떤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길을 잃고 방황하므로, 우리는 항상 영혼에게 그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에서는 빈부는 각자의 견해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 또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만큼 행복하게 살기도 하고 불행하게 살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욕구를 적절히 조절하고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며,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든 줄어들든 그것에는 개의치 말고 자기의 마음에 맞는 일에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19장 <우리의 행복은 사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그의 마지막 날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의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는 그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명은 때때로 우리가 지나간 세월 동안 쌓아올린 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애를 판단함에 있어 나는 항상 그가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므로 나의 생애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나의 생애가 끝날 때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 즉 평온하고 태연하게 처신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제20장 <철학을 하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는 제1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장이다. 철학의 연구와 사색은 우리의 영혼을 우리에게서 끌어내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육체 이외의 일에 분주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며 죽음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제26장 <어린이 교육에 관하여>에서는 "인간의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어렵고 중대한 문제는 어린 아이의 양육과 교육이다"라고 그의 교육론을 서술하고 있다. 교사가 혼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학생에게 생각하고 말할 기회를 주고, 그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던 점을 상기시키고, "대부분의 경우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는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된다"는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교육론은 후에 루소에게 연결되어 루소의 교육학 명저인 <에밀>에 영향을 주었다. 제27장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제28장 <우정에 관하여>는 그와 보에티간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제33장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관능적 쾌락을 피해야 한다>는 초기의 금욕주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었던 그의 심경을 보여준다.
제2권
제5장 <양심에 대하여>는 "죄인의 가장 큰 형벌은 재판관인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방면될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유베날리스의 말을 인용하고, "양심이 우리를 공포로 채우듯이, 양심은 또한 우리를 확신과 신념으로 채운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29장 <덕에 대하여>에서는 "한 인간을 아주 공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그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기술했다. 제31장 <분노에 관하여>에서 "분노만큼 우리의 판단의 정확성을 감소시키는 감정은 없다 분노로 인해 우리의 맥박이 세차게 뛰고 우리가 흥분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꾸짖는 일을 뒤로 미루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가라앉아 평온해지면 사물은 정녕 다르게 보일 것이다. 분노에 싸여 있는 동안에는 명령하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인 것이다"라고 분노의 악영향을 경계하고 있다.
제3권
제3장 <3가지 교제에 대하여>는 우정사랑독서의 기쁨을 기술하고 있다. 우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로는 점잖고 재능있는 사람들을 들고 있다. 그리고 아름답고 덕있는 여자들과의 사랑도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측면에서는 전자만큼 즐거움이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교제에 있어서는 경계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두 차례에 걸친 성병도 언급하고 있다. 세번째는 책과의 교제를 들고 있는데 "책은 나의 인생행로에 변함없는 친구가 되어 나를 도와준다"라며 독서를 예찬하고 있다. 제8장 <대화의 기술>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말도 즉석에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한두 번쯤 그 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음미해보고 그가 무슨 의도로 그 같은 말을 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학문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왕의 홀이 되기도 하고 바보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다"는 언급도 나온다. 고전지식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교양서로 환영받고 있는 이책은 근대의 합리주의 정신과 과학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교육사상은 루소로 연결되어 한층 심화되었다. 또한 그 이후의 휴머니스트에게는 그의 인간성 성찰방법이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몽테뉴의 지적 편력
"프랑스의 근대정신은 몽테뉴로부터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그가 <수상록>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추구한 다음 나아가 자기 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존재 그 자체의 본질을 예리하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은 각기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자기 성찰을 계속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인간을 묘사함으로써 <보편적 인간>을 묘사하고자 했고, 현실적인 생의 관찰을 통해 생의보편적 모럴>을 탐구하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몽테뉴의 위대한 모습을 보게 된다.
금욕주의
초기에 씌어진 에세이 중에는 도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제1권 14장 "행불행은 대체로 우리의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19장 "우리의 행복은 죽은 후가 아니면 판단해서는 안된다", 20장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39장 "고독에 관하여", 42장 "우리들 사이의 불평등에 대하여" 등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이들 제목이 나타내고 있듯이 이들은 죽음행복불행 등 고대철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다루었던 도덕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당시 그가 공감하고 있던 도덕론은 스토아 학파의 도덕론이다. 그가 존경하는 친구 보에티와의 교제를 통해 깨끗한 청교도적인 그의 자세에 감명을 받고 스토아적인 극기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도덕의 본질은 <이성>으로써 정념을 억제하는 데 있다. 정신에 의해 육체를 지배하고 의지의 힘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면 초연한 <무감동상태<apatheia)>상태에 달할 수 있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주의
그러나 <영웅전>의 저자인 플루타크와 회의주의 철학자인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저술을 읽은 후 스토아 철학으로부터 멀어진다. 플루타크의 <윤리론집>은 <플루타크 영웅전>과는 달리 범인을 다루고 있어, 그동안 그리스로마의 영웅들에게서 도덕적 교훈을 구하던 몽테뉴에게 자기 주위의 주변 인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차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괴이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섹스토스 엠페이리코스의 <회의파 개설>을 읽은 후 사상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피론<Pyrrhon>으로부터 시작된 회의파 철학은 <사물은 본디 불확실한 것이므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항상 부정과 긍정의 양론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je?)"라는 형태로 표현했다.
자연주의
그러나 제 3권에 들어오면서 자연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연의 행복 중에서도 몽테뉴가 가장 중시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다. 그는 한때 스토아 학파의 영향을 받아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쾌락을 피할 것>에 찬성했지만 그후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기초를 둔 육체적 쾌락을 피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달았다. 육체와 정신은 하나인데 이것을 둘로 나누어 어느 한 편에 편중하기 때문에 오류가 생기며, 자연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편력을 거쳐 그는 점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갔으며 이러한 자기 묘사가 <수상록>의 중심과제가 된다. 그에게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다가왔다. 자기를 묘사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고정화하는 일이다. 몽테뉴는 <수상록>을 쓰면서 자기를 관찰하고 연구검토함으로써 이제가지 알지 못했던 자기를 발견하고 새로운 자아를 창조해갔다. 이런 의미에서 <수상록>이 그를 만들고 그가 <수상록>을 만든 상호작용이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묘사하고 자기를 아는 몽테뉴에게는 훌륭하게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비판
그의 주된 관심사가 항상 자기라는 소우주를 완성해가는 것이었기에 일부 비판자들은 그를 <이기주의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몽테뉴의 도덕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도덕의 원리를 실제의 행동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수상록> 전체를 보면 그의 사상과 행동의 기저에는 개인주의를 훨씬 초월한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한 박애주의와, 회의주의로부터 얻은 합리주의 정신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상록>은 개인을 초월한 넓은 의미의 인간연구서이며, 현대의 살아 있는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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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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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신발 신기기 - 오쇼 라즈니쉬
조작
내가 어떤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집은 상가였다. 그 죽은 사람은 부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여동생이 장례를 도와주려고 왔었다. 나는 거기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그 여동생은 문밖을 보며 곧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죽은 남자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는 아주 훌륭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니 이제 하늘이 노래지고 땅이 꺼질 것만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당신은 바깥뜰에 좀더 앉아 계십시오. 그러다가 만약 누구인가 오면, 즉시 나에게 신호를 보내 주세요."
그녀는 나에게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버리고 나면, 그녀의 눈물은 말끔히 사라진다. 그녀가 울부짖을 때에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사람들이 집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이 등을 보이자마자, 눈물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이것저것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고 일을 하였다. 나는 아연실색하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완벽한 여배우 같습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눈물까지 흘리지 않았습니까?"
하고 묻기까지 하였었다.
- 조작. 그대는 다른 사람의 육체를 조작할 뿐만 아니라, 그대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조작하고 있다. 그대는 로봇이 되어 모든 자발성을 잃어 버렸다. 바로 이렇게 하여 삶은 추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옥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대의 사랑은 거짓이다. 그대의 마음도 거짓이다. 그대의 웃음도 거짓이다. 그대의 눈물도 거짓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대가 그러한 허구 속에 살면서 행복을 생각한다고, 진리를 생각한다고 , 해방이나 해탈을 생각한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거짓된 존재를 위한 해탈이란 없다. 허구는 떨쳐버려야 한다. 자발적이 되어라. 거기에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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