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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33호
단기 4343. 4. 13 (음력 2.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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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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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 2주기 추모 독후감 공모
(통영=연합뉴스) 임형섭 기자 = 경남 통영문인협회는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 2주기를 맞아 전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후감을 공모한다고 22일 밝혔다.
응모를 원하는 전국 중ㆍ고교생과 대학생들은 고인의 소설 중 한 편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다음달 20일까지 통영문인협회에 제출하면 된다.
협회 관계자는 "한국 문학사에 불후의 명작들을 남긴 박경리 선생을 추모하고, 고인의 문학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는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입상자는 다음달 25일께 협회 홈페이지(www.tylett.org)를 통해 발표되며 상장과 부상이 주어진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나 협회 사무실(☎055-649-2900)로 문의하면 된다.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공모
중앙일보는 (주)웅진씽크빅과 함께 제정한 1억원 고료의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원고를 모집합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마감 기한을 두 달 앞당깁니다. 신인·기성, 순수·장르를 가리지 않고 문학성과 대중성을 아우르는 최고의 소설을 뽑습니다.
▶ 응모자격 : 제한 없음
▶ 분량 : 200자 원고지 800장 이상, A4 용지에 출력해 제출(200자 원고지 20장 가량의 줄거리 첨부)
▶ 마감 : 2010년 8월 31일
▶ 작품내용 : 제한 없음
▶ 제출처 : (우)100-759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사 편집국 문화부 ‘중앙장편문학상’담당자 앞
▶ 당선작 발표 : 2010년 11월 중앙일보 지면
▶ 저작권 : 당선작의 출판저작권은 향후 5년 동안 웅진이 갖습니다. 상금을 웃도는 인세가 발생할 경우 당선자에게 지급합니다. 2차 저작권은 저자·중앙일보·웅진이 3등분 합니다.
▶ 기타 : 응모작 겉봉투, 원고의 맨 앞장, 뒷장에 성명·주소·연락처·원고 분량을 명기해야 합니다.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문의 : 02-751-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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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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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은 참나무가 더욱 뿌리를 깊게 박도록 한다.(허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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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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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어 몇 마디와 ‘-적’
북녘에서는 대체로 ‘극본’을 ‘대본’, 지금은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지만 ‘식목일’을 ‘식수절’이라 하고, ‘예쁘다’는 말보다는 ‘곱다’는 말을 즐겨 쓴다. 또 ‘연수’보다는 ‘강습’, ‘장애인’보다는 ‘불구자’, ‘협찬’보다는 ‘후원’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게 되는 경우, 질병 등으로 자진해서 학교를 그만두면 ‘퇴학’이 되지만 처벌을 받아 못 다니면 ‘출학’이 된다.
북녘에서는 우리보다 ‘-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이후 제1차 장관급 회담을 위해 2000년 7월30일 서울에 온 북녘의 전금진 단장은 장관급 회담에서 두 주연배우가 잘해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듯이 남북의 두 대표가 잘해 보자는 뜻으로 우리 쪽 대표에게 “배우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고 말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같은 해 7월31일 청와대를 방문한 전 단장은 “대통령께서 평양에 오셔서 상봉과 회담을 하신 것은 ‘민족의 위대한 사변’이었다”고 인사한 뒤, 8월 말에 평양에서 열릴 제2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잘되도록 도와 달라는 김 대통령의 말에 “이런 일을 (장군님께) ‘책임적’으로 전달하겠다”고 답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사변’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북녘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전수태/고려대 전문교수
외곬과 외골수
접두사 ‘외-’는 ‘하나만으로 돼 있다’는 뜻을 더한다.‘곬’은 한쪽으로 트인 길이다.‘곬’에 ‘외-’가 붙어 ‘외곬’이 됐다. 단 한 곳으로만 트인 길이란 의미로 ‘외통’과 같다. 한 가지 방법이나 방향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이때는 주로 ‘외곬으로’의 형태로 쓰인다. 외골수(-骨髓)는 ‘오직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터무니없다
전하는 내용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전혀 근거가 없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다. 이럴 때 ‘터무니없다’는 표현을 한다. 터는 집이나 건축물을 짓는 자리다. 건축물 등을 헐어도 흔적은 남는다.‘터무니’는 터에 있는 자취이고 무늬다.‘터무니없다’는 터에 마땅히 있어야 할 흔적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헛되고 전혀 근거가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라야, ~이래야
우리말 조사의 다양한 뜻과 미묘한 쓰임새는 동사나 형용사의 어미 활용과 더불어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라야'와 '-(이)래야'도 헷갈리기 쉬운 것 중 하나다. "한스 섬은 면적이라야 1.5㎢도 안 되고 황량하며 찬바람만 부는 무인도다." "월급이라야 채 100만 원이 안 된다." 예문에서는 '-이라야'와 '-이래야'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이라야'는 어떤 일의 조건으로서 그것이 꼭 필요함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이 임무는 아주 강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야 해낼 수 있다" "제철 과일과 음식이라야 우리 몸에 좋다"처럼 쓰인다. '-이라야'는 '-이어야'로 바꿔 써도 의미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래야'는 '-라고 해야'가 줄어든 말이다. "친척이래야 내 남동생 부부와 조카들, 죽은 아내의 여동생이 전부였다"나 "나는 주인이 가래야 집에 갈 수 있다"와 같이 사용된다.
'면적이라야''월급이라야'는 문맥상 '면적이어야''월급이어야'라는 뜻이 아니라 '면적이라고 해야' '월급이라고 해야'를 뜻하므로 '면적이래야''월급이래야'가 맞는 표현이다.
하노라고, 하느라고
어버이날이다. 하노라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의 마음 씀씀이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살아서는 자식 대신 아프고, 죽어서는 자식을 지켜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라니 이승에선 갚지 못할 은혜인지도 모른다.
자기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결과가 좋지 않거나 흡족하지 않을 때 "하느라고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사흘 밤낮을 하느라고 한 게 이 모양이다"처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자기 딴에는 노력하다'는 뜻으로 쓸 때는 '하노라고 했는데' '하노라고 한 게'라고 해야 맞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도나 목적을 나타낼 때는 연결어미 '-노라고'를 붙여 쓴다.
이와 혼동해 자주 사용하는 '-느라고'는 '그렇게 하는 일 때문에'라는 의미로 앞 절의 사태가 뒤 절의 사태에 목적이나 원인이 됨을 나타낸다. "어머니, 먼 길을 오시느라고 피곤하시죠?" "몰라보게 주름살이 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는 솟구치는 눈물을 감추느라고 얼굴을 돌렸다" 등처럼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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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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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소 - 김룡
1. 소牛를 키운다. 아파트 거실에서 밤마다 정육점 갈고리에 매달리는 꿈이라도 꾸는 건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몸서리치는 소牛.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가 어린 딸과 마주앉아 햄버그를 먹고 있다. 우―우― 눈(目)으로 우는 소牛.
운동장만한 아파트가 시골외양간보다 불편한지 워워, 틈만 나면 현관문 빠져나가 놀이터며 지하주차장을 갈아엎어 아내 얼굴에 똥칠을 하는 우리 집 소牛는 뿔이 없다. 서울로 끌려오면서 팔아치운 고향집과 손바닥만한 논밭뙈기 그리운 날이면 맥도널드 체인점 앞에 모락모락 소똥이나 퍼질러놓는다.
그때마다 난리가 난다. 어이구, 못살아 내가 못살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버님, 제발 집안에 편히 계세요. 아내에게 사랑받는 우리 집 소牛는 음매음매 자주 아프지만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등골이 빠질 만큼 실컷 부려먹었으니 당장 도살장으로 끌고 가야 하지만 아내는 애완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2. 아버지 참 눈치도 없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내가 헬스클럽에서 돌아왔는지 모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거실 소파에까지 소똥을 퍼질러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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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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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방울꽃 - 이준섭
산이 푸를수록 꽃이 타오를수록
꽃향은 님 떠난 곳을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부서져 더 슬피 우는 종소리 골속골속 뒤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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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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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박태원의 `천변풍경'
청계천은 경복궁 서북쪽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서울의 중심부를 뚫고 동진 한 다음 답십리 부근에서 남쪽으로 물길을 틀어 내려가다가는 성동구 사근동과 송정동, 성수동이 만나는 지점에서 중랑천과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든다. 성수대교와 동호대교의 어름이다. 태백시 인근에서 샘솟아 강화 북쪽의 서해로 몸을 풀기까지 5백㎞ 가까운 한강의 흐름이 대체로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강의 제2지류인 청계천의 물길은 본류와는 정반대되는 행로를 밟고 있는 셈이다. 본디 이름이 청풍계천(淸風溪川)인 청계천은 그러나 일제 때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교까지가 1차로 복개된 데 이어 1958년부터 시작된 여러차례의 복개로 지금은 용두동과 마장동 어름 이하를 제하고는 정작 물길을 볼 수는 없게 돼 있다. 폭 50m의 아스팔트가 덮이고 그것도 모자라 삼일 고가도로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지금의 청계천에서 `맑은 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복개되기 전의 청계천에는 제법 맑은 물이 흘렀고, 시골의 여느 개울가와 마찬가지로 아낙들은 빨래더미 속에 일신의 번뇌와 세상 근심을 함께 넣어 두들기고 비벼 빨았다. 박태원(1909~86)의 장편 <천변풍경>은 바로 이 청계천 빨래터의 광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딴은, 간간히 부는 천변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 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립지는 않은 모양이다.”
1936~7년에 걸쳐 월간 <조광>에 두차례로 나뉘어 연재된 <천변풍경>은 일제 통치의 극성기라 할 30년대 중반 서울 서민층의 삶을 꼼꼼히 재현하고 있다. 모두 50개의 짧은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장삼이사들의 삶의 이모저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십명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중심되는 사건도 주인공이라 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이 소설에서 어찌 보면 청계천이야말로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계천 주변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과 사건들을 하나의 소설 속에 모아 놓는다. 요컨대 청계천은 이 소설의 조직원리가 된다. 젊은 첩 안성댁이 학생놈과 보쟁이는 모양을 보고 속을 태우는 민주사, 바람둥이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의 무관심과 시부모의 학대를 못 이겨 이혼하고 돌아오는 이쁜이, 처녀과부 신세로 호색한인 시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금순이, 술집 여급에서 부잣집 맏며느리로 신분이 격상됐으나 남편의 변심과 시댁 식구들의 냉대로 괴로워하는 하나꼬, 금순이와 하나꼬를 친언니처럼 보살피는 또다른 여급 기미꼬, 시골 가평에서 상경해 어리보기 취급을 당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서울 깍쟁이로 변모하는 소년 창수, 청계천 다리 밑움막에 거주하는 거지들….
소설은 이들 천변 인물군상의 1년 남짓한 삶을 카메라의 눈처럼 충실히 좇을 뿐 그것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일구어내거나 섣불리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소설은 문득 시작하고 불쑥 끝난다. 기승전결이 따로 없다.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도 천변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소설이 끝난 다음에도 그들의 삶은 아랑곳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럴진대, 소설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 속에서 청계천은 근대와 전근대, 도시와 시골이 만나는 접경이다. 창수와 금순이, 만돌 어멈 등은 각자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시골집을 떠나 서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시험해보고자 할 때 청계천변을 그 첫 무대로 삼는다. 그곳에는 기생과 카페 여급이 나란히 활보하며, 냉혹한 이익의 추구와 끈끈한 인간애가 공존한다. 시골에서와는 달리 청계천의 빨래터에는 엄연히 주인이 있어 빨래꾼들에게서 돈을 받아서는 다시 나라에 세금을 낸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시골뜨기 아낙이 다른 빨래꾼들의 역성 덕분에 첫번의 요금지불을 면제받을 만큼은 인정이 살아 있다.
<천변풍경>은 이처럼 두개의 시대의 공존과 자리바꿈을 세필화의 필치로 그려내지만, 그것은 그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임화가 그 자연주의적 편향을 지목해 `세태소설'이라 이름붙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는 소박한 휴머니즘의 관점은 있을지언정 뚜렷한 이념이나 사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어느 인물에게서도 당시의 민족적·계급적 모순에 대한 자각을 엿볼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비판도 부재하다는 사실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바람 없고 따뜻한 날, 남향한 대청에는 햇빛도 잘 들고, 그곳에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귀돌 어멈과 할멈이, 각기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지고 앉아 육십팔원짜리 `콘서트'로 `쩨·오·띠·케'의 주간방송, 고담이라든 그러한 것을 흥미 깊게 듣고 있는 풍경은, 말하자면, 평화―그 물건이었다”는 대목은 그 직후에 나온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탁류>의 풍자적어투나 비극적 분위기와 얼마나 다른가.
박태원은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이상, 이효석 등 30년대 모더니스트들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해 활동한다. 그들이 내세운 바는 문학적 전문성과 프로의식이었거니와, 그것은 실은 카프 계열의 계급문학에 대한 반발에 다름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편`소설가 구보씨의 1일'과 <천변풍경>은 당시로 보아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갖춘 작품으로서 춘원 이광수와 월탄 박종화 등의 상찬이 잇따랐다. 그 박태원이 해방기에는 좌익계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고 한국전쟁중 월북해 북한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한 사실은 지금도 숱한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 다 괜은 소리… 덮긴, 말이 그렇지, 이 넓은 개천을 그래 무슨 수루 덮는단 말이유? 온, 참….”
소설 속 한 인물은 청계천 복개에 관한 소문을 듣고 턱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마나 그 넓은 청계천은 어김없이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이제 그 위로는 자동차들이 질주한다. 빨래하는 아낙들이 깃들었던 천변의 가옥 자리에는 높직높직한 건물들이 솟아 있다. 한때 맑았던 물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소음과 진동에 짓눌리며 질식 상태로 흘러간다. 광교를 중심으로 한 소설의 무대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청계천 평화시장은 1970년 봉제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역사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감싸안고 오늘도 청계천의 복개된 도로 아래로는 한때 맑았으나 더 이상은 맑지 않은 물이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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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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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삶을 꿈꾸는 너희들이여 - 라즈니쉬 外
1. 배꼽 - 라즈니쉬
열정
옛날 인도에 신비주의자로 이름난 바바 샤이크 화리드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를 찾아왔다. 그때 그는 겐지즈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는 신비주의자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신을 찾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화리드는 젊은이를 끌고 강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서 물속으로 쳐박아버렸다. 그런 후, 물속에서 숨이 막혀 버둥거리다가 탈진 상태가 되어서야 그 젊은이를 끌어 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화가 난 젊은이가 물었다. 성자 화리드는 젊은이를 향해 미소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물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 같이 신을 찾을 때에 비로소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지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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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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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무라카미 하루키
제1장 문학 안팎의 내 삶
자동차 유감
나는 운전이란 걸 하지도 않고, 또 자동차라는 물건 자체에도 별 흥미가 없다. 내 주위를 둘러봐도 어쩐 일인지 운전을 하는 사람의 수가 굉장히 적다. 대충 아는 사람 중의 30퍼센트 정도만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일본 총인구의 60퍼센트 가까이가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한심할 정도로 적은 숫자다. 어째서 이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 운전하지 않는가 하면,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을 하면 불필요한 신경을 써야 하고, 쓸데없는 돈이 들며, 술도 마실 수 없고, 세차니 차량 검사니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서 지하철이나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야 홋카이도 들판 한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차 없이는 생활할 수 없을 테지만, 도쿄 근교에서 살아가는 데는 차가 특별히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 불편하게 느낀 적은 1년에 한두 번 정도 뿐으로, 그 한두 번을 어떻게든 넘기고 나면-물론 넘긴다-나머지는 전철과 택시를 타는 것과 걷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야 뭐 사람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모두들 앞 다투어 차를 갖고 싶어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 없이도 충분히 평화롭게 살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얘기를 자동차를 가진 사람에게 하면, 대개 "맞아요, 그게 제일이에요, 차를 탈 필요가 없으면 차를 안 타는 게 좋죠"라는 대답에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하철로 한두 구간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차를 몰고 간다. 운전을 안 하니까 이런 소릴 하는 거라고 한다면야 할말이 없지만, 운전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난 잘 모르겠다. 부지런히 주차 공간을 찾아 돌아다녀야 하고, 시간도 얼마 차이나지 않는데 그새를 못 참아 차선을 바꿔 달리는 일 같은 건 나로선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차가 없으니 자동차 대금이라든가 주차 요금, 세금이라든가 기름 값, 수리비 같은 게 들 리 없기 때문에, 그 대신으로 택시나 국철의 그린 차(역주:특등 차)를 종종 탄다. 이게 또 이상한 일인데,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택시나 그린 차의 요금이 턱없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내가 종종 택시나 그린 차를 탄다고 하면, "너, 그거 사치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도쿄와 후지사와 간의 그린 차 요금이라고 해봐야 두 시간 반 정도 주차시키는 요금과 엇비슷하다. 한 시간 동안 느긋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딱히 국철을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조금만 더 젊었으면 역시 고급 승용차를 굴리며 드라이브하자고 여자를 꼬시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르니 큰소리칠 순 없다. 이런 일은 운과도 같은 것이라 조금만 달리 살았더라면 완전히 정반대의 주장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널린 주장의 대부분은 결과적으론 좋은 게 좋다는 정신 위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서 자동차 무용지물론을 전개하려는 게 아니라, 차가 없어도 별로 부자유스럽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게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견을 타당성 있게 설명하려 했던 것뿐이다. 그러니, 화를 내며 반론을 제기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후지사와 거리도 여름이 가까워짐에 따라 차량이 점점 늘고 있다. 주말이 되면 후지사와 교에서 에노시마까지 길이란 길은 차량 행렬로 념쳐 나고, 좁은 길에도 꾸역꾸역 차가 밀려든다. 밤중에는 오토바이가 내는 소음이 시끄럽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뒤에도 조깅을 하시던 할머니 한 분이 차에 치여 돌아가셨고, 오토바이 소음으로 잠을 잘 수 없다고 항의 자살을 한 사람도 있다. 정말 안된 일이다. 내가 자동차에 대해 너무 신경질적인 탓인지도 모르지만, 차량이 늘어남에 따라 일본 내 어디엘 가더라도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다. 때때로 생각이 나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이젠 거리마다 온통 자동차라서 머리가 아파져 빨리 돌아와 버리고 만다. 교토 같은 곳은 옛날에는 그렇게 거칠고 시끄러운 곳이 아니었다. 세상에 자동차가 한 대도 달리지 않는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 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와이어트업이 덧지 시티에서 사람들로부터 권총을 압수했듯이, 담당자가 입구에서 차를 맡아 두는 것이다. 어딘가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꼭 거기에서 살아 보고 싶다. 간혹 '보행자 천국'이란 곳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를 천국이라고 부르다니 말도 안 된다. 차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인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정이 있어서 이 글을 쓴 후에 면허증을 땄다.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국철은 그 후 JR로 이름을 바꾸었다. 에노덴은 어떻게 되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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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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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7장
소
1. 생활 속의 한 식구
소는 농경생활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에게 있어 단순한 가축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농사를천하의 근본되는 일이라 생각한 전통사회에서는 소를 한집안 식구처럼 생각하여 생구라 부르기도 하였다. 생구는 한집에 사는 하인이나 종을 일컫는 말로서, 소를 사람으로 대접하여 줄 만큼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소는 농사를 짓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여 줄 뿐만 아니라, 무거운 짐을 나르는 운송의 역할도 거뜬히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소는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효용성이 높은 가축으로서 민가의 가장 귀한 재산이기도 하였다. 최근 소값 폭락 파동이 있기 전가지만 하여도 농가의 재산목록 제1호였던 소는, 농민이 큰 일을 당할 때 급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비상금고나 보험통장의 역할을 대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50-1960년대의 대학을 우골탑이라 불렀을 만큼, 소는 농촌출신 영재들의 중요한 학자금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소는 지금부터 1800-2000년 전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의 소는 주로 제천의식의 제의용이나 순장용으로 사용되었다.「삼국지」동이전에 보면, 부여에서는 군사가 있을 때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발굽의 상태를 관찰하여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 붙어 있으면 길한 징조라 점을 쳤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기형이나 이상한 빛깔의 털이 난 송아지가 태어나면 응양오행과 관련시켜 길흉을 예측하는 습속은 계속되었다.「삼국사기」에는 84년 고타군주가 신라 사파왕에게 청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청우는 털 빛깔이 검은 소로 추정되는데, 중국문헌에서 늙은 소나무의 정이 청우로 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청우는 선인, 도인, 성인의 상징으로 여겨진 듯 하다. 또한 마한에서는 순장에 이용하였고, 백제에서도 소를 기르는 목적이 순장용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에 이러한 풍습이 있었고 중국대륙에서도 같은 모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소를 제의, 순장, 점술에 이용한 고대 우리나라의 습속은 북쪽의 대륙에서 전래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농사에 소를 이용한 우경이 시작된 것은 신라 지증왕 3년(502년)이며, 눌지왕 22년(438년)에는 백성에게 소로 수레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삼국사기」에 전한다. 우경과 우차를 생활에 적용한 이 시기부터 농업과 운송수단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벽화에 바퀴가 큰 이륜차의 가마와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고, 경주 98호 고분에서도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실생활에서 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를 제의 및 순장용으로 사용한 초기의 풍습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고려 때에는 궁중의 희생용 동물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생서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전구서, 전생서 등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풍년을 빌기 위하여 농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매년 경칩 후 첫 해일에 임금이 친히 제사를 지냈다. 이 때 제물로 소를 바쳤으며, 그 제의 이름을 선농제, 제단을 선농단이라고 하였다.
선농제에 즈음하여 임금에게 바친 헌시 가운데 “살진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선농제에서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소는 의식이 끝난 다음에 탕으로 만들어 많은 제관들이 나누어 먹었는데, 오늘날 ‘설렁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선농탕’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중한 가축으로서, 한 가족처럼 정성들여 보살펴 왔다. 부엌 가까이에 외양간을 마련하여 통풍이 잘 되도록 배려하고 외양간의 위층은 가마니, 짚 등의 창고로 삼아 보온의 효과를 겸하도록 하였다. 날씨가 추워지면 짚으로 짠 덕성을 입혀 등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하였으며, 봄이 오면 외양간을 깨끗이 쳐내고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 보름마다 청소를 해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낮에는 양지바르고 따뜻한 곳으로 내어다 매어 주고, 솔로 빗기고 비로 쓸어 주어 신진대사가 잘 되며 털에 윤기가 나도록 하였다. 먹이는 아침 저녁으로 짚을 잘게 썬 여물로 쇠죽을 쑤어 주며, 수시로 풀밭이나 야산으로 몰고 가 싱싱한 풀을 뜯어먹였다. 이 때 이슬이 묻은 풀은 먹이지 아니하고 힘든 일을 많이 하게 되는 일철에는 특히 콩을 많이 먹였다. 삼복더위에 소를 부릴 때면 야경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먼 길을 갈 때에는 짚으로 짠 신을 신겨 발굽이 닳는 것을 방지하였다. 소를 사들이거나 외양간을 짓는 경우에도 반드시 음양오행에 기초를 둔 택일을 하여 길일을 받아 시행하였고, 특히 소를 사거나 송아지를 들여오는 날을 납우일이라 하였다. 이처럼 소를 한가족처럼 각별히 아끼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핀 것은, 그만큼 농사일을 신성시하고 소중하게 생각한 우리 선조들의 심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 것이다.
한편, 어느 정도 자란 송아지에게는 몸체를 꾸미는 소치레를 하게된다. 소치레는 소를 보호하고 잘 부리기 위한 것으로, 먼저 생후 5-6개월이 지난 송아지에게 목사리를 하여 고삐를 매며, 1년이 지나면 대개 음력 5월 단오날을 택해 동구 밖이나 야산에 가서 나무에다 붙들어 매고 코를 뚫은 다음 코뚜레를 한다. 이 때 앞걸이와 목사리를 데고 굴레를 짜게 되는데, 코뚜레에 줄을 걸어 고삐와 연결하고 한두 개의 방울을 단다. 이 방울은 잃어 버린 소의 위치를 빨리 확인하기 위해 달기도 하였지만, 소는 겁이 많고 무서움을 잘 타서 헛소리를 들으면 놀라 크게 동요하므로 이 헛소리를 듣지 못하게 달아주기도 했다. 우직하고 순박하여 성급하지 않은 소의 천성은 은근과 끈기, 여유로움을 지닌 우리 민족의 기질과 잘 융화되어, 선조들은 특히 소의 성품을 사랑하고 아껴 왔다. 다소 미련하지만 술수를 부리지 않고, 재빠르지 않지만 꾸준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거대한 몸집에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길게 여운을 남기는 독특한 울음소리를 가진 초식동물. 소의 이러한 성품과 특성은 우리의 농촌사회를 한층 여유롭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떠오르게 한다. 풀밭이나 야산에서 대여섯 살박이 꼬마에게 긴 고삐를 맡긴 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 꾸준하지만 결코 성급하지 않은 동작으로 묵묵히 앞에서 쟁기를 끄는 소와 뒤에서 보조를 맞추며 따라가는 농부의 모습, 양지바른 토담 곁에 편안히 앉아 긴 꼬리를 천천히 휘둘러 등에 붙은 파리를 쫓아 가며 낮잠을 즐기는 모습, 때로 고개를 젖히며 길게 한 번 울어대는 ‘음메에’소리...
소는 그 어느 동물보다도 농촌에 어울리는,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분위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는 우리의 생활 가까운 곳에서 가장 친근한 동물로 함께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속담과 관용어 속에서도 그 속성과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는 농가의 조상’이라 하여 농가에서는 조상같이 소를 위한다는 표현으로 소의 귀중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처에게 한 말은 난다’는 속담은 소의 신중함을 들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조심하라는 경계를 담고 있다. 소의 근면함을 들어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어라’는 속담을 통해 성실히 일하고 절약할 것을 일깨웠고, 인간에게 한없이 유익한 존재임을 역으로 이용하여 ‘소한테 물리다’라고 하면 전혀 뜻밖의 상대에게 해를 입는다는 뜻이 된다. 또한 소의 우직하고 다소 미련한 면을 들어 ‘쇠귀에 경읽기’, ‘소궁둥이에 꼴을 던진다’라는 속담은 몹시 둔하여 깨닫지 못할 사람에게는 아무리 교육시켜도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소 뒷걸음질 치다 쥐잡기’라 하여 우연히 공을 세웠음을 나타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속담 속에서 우리와의 친근한 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소 잡은 터전 없어도 밤 벗긴 자리는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 .소 닭 보듯 닭 소 보듯 한다 .소 잡아먹은 귀신 같다 .소 탄 양반의 송사 결정이라 .소도 웃을 일이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한다
이제까지 생활 속의 한식구로서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소의 의미와 간략한 역사,소의 특성과 성품 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소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념은 어떠했는지, 2000여 년 동안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오면서 소가 우리의 민속과 인식세계에게 어떠한 위치로 자리잡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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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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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무언 - 우언
우언이 열에 아홉이고, 중언은 열에 일곱이며, 치언은 날로 새롭게 천예*를 조화시킨다. 열에 아홉인 우언은 다른 데에 가탁해서 논술하는 것이다. 친아버지가 그 자식을 위해서 중매 서지 않는 것은, 그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보다 아버지 아닌 자가 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사람들이 죄다. 가지 뜻과 같으면 응하지만 자기와 같지 않으면 반대하며, 자기와 같으면 옳다 하고 자기와 다르면 그르다고 한다.
열에 일곱을 차지하는 중언은 논란을 중지시키려는 옛사람의 말이 그것이다. 나이가 앞섰다고 할 수 없다. 앞선 사람으로서 사람을 이끌지 못하면 사람의 도를 다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의 도를 갖추지 못하면 이것을 가리켜 진인*이라고 한다. 날로 새로운 치언은 자연의 천예와 조화되고, 그 사리를 만연히 하여 천수를 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고르나 말을 고르게 하려 하면 고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무언을 말한다. 말을 했으나 말이 없는 것이다. 평생 말해도 말하지 않은 것이 되고, 평생 말을 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 천예 : 자연의 경계. * 진인 : '진부한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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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에는 다른 일에 가탁해서 표현하는 우언이 전체의 9할이고, 옛사람의 말을 빌려 표현하는 중언이 전체의 7할이며, 대상에 따라 자유 자재로 변호하는 치언은 전체에 걸쳐 통용되어 있다. 우언이란 다른 것을 빌려 말하는 문장이다. 가령 아버지가 아들을 중매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세상 사람들이 우언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의 의견이 자기의 뜻과 같으면 찬성하지만 다르면 반대한다. 또 자기와 같은 의견은 옳다 하고, 다른 의견에는 비난을 퍼부어댄다. 그러기에 직접적인 발언을 삼가고 우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중언은 번거로운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옛사람의 말이라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옛사람들이라 해도 사리를 분별 못하고 일의 본말을 알지 못했다면 앞섰다고 할 수도 없다. 더구나 사람을 이끄는 힘이 없는 사람이면 사람으로서의 도마저도 체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옛사람들을 가리켜 낡았다고 한다.
치언이란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것을 써서 상대적인 논쟁을 절대적인 입장에서 화해시키며, 무심하고 자유롭게 천수를 다하게 하기 위한 말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사물의 대립은 생기지 않으며, 만물은 그 제동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동성이라고 묶어서 말할 때, 그 용어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 된다. 도라는 말 역시 용어와 개념은 이원적인 대립을 갖게 되므로 궁극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말고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무언이란 바로 이런 궁극의 도에서 나온 말이기에 일생을 두고 말을 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또 반대로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진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한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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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차 있는 늘보의 배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동물'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이 동물은 미 대륙 열대지역에서 살고 있는 포유동물로서 이 동물은 거의 모든 시간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절대로 필요할 때가 아니면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괴상하게 둥근 머리와 넓적한 얼굴의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늘보의 앞발에 발가락이 2개 달린 종류와 3개 달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이 두 종류의 늘보는 모두 나무를 탈 수 있도록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으며 행동도 똑같이 느리지만 이들의 행동이 게으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늘보의 발은 땅 위로 걷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더러, 항상 배를 가득 채우기를 좋아하는 늘보가 이것을 소화시키는 데만도 일주일 이상 걸리기 때문에 음식물이 소화될 동안은 꼼짝 않고 나무에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행동이 느리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정글의 어떤 동물도 이 늘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뭇잎을 먹고 사는 이 동물은 때때로 마치 죽은 나뭇잎의 뭉치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에 웅크린 자세로 매달려 있으며 우기에는 이 늘보의 털에 이끼와 같은 것이 자라기 때문에 더욱 완벽한 위장을 할 수 있게 된다. 간혹 늘보는 자신이 매달려 있는 나무 밑에서 다른 동물의 기척이 들리면 그것을 쳐다보기도 하는데 이때의 행동은 아주 최소한도로 움직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행동이 가능한 것은 그 목이 270도까지 돌아갈 수 있는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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