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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문화 - 정연식(서울여대 교수)
사람에게 필요한 의식주 가운데에서도 먹는 일이야말로 하루도 빠뜨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류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먹기 위한 욕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먹는 것을 중시한 듯하다. 밥 먹었느냐는 말이 인사말이 될 정도로 말이다. 또한 한국인의 대식은 이미 조선시대에 유구국(현 오끼나와)에까지 알려질 정도였고, 한말에 우리 나라를 다녀간 여러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이다. 그 원인을 전통사회의 가난에서 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한 견해에는 선뜻 동조하기 어렵다. 가난한데 어떻게 '늘' 많이 먹을 수 있겠는가? 예전의 가난이야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서양도 마찬가지였으며,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 유달리 빈곤했던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여사의 조선견문기와 러일전쟁 종군 기자였던 맥켄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은 그다지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현재로서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서양인들이 한국인의 체구가 크고 강건하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였음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대해 체계적인 기록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식생활을 당시 사람들로서는 굳이 기록으로 남길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엉성하나마 조각난 기록들을 모아서 엮어보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끼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체 몇 끼를 먹었을까? 지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끼를 먹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두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식사를 '조석'이라 불렀다. 18세기 후반 이덕무는<청장관전서>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5홉(지금의 1.5홉)을 먹으니 하루에 한 되를 먹는다고 하였다. 그러면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인가? 점심이란 말은 이미 조선 초기에 등장한다. 태종 때 대사헌 한상경은 서울 5부 학당의 교수훈도들이 하루 종일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점심도 없으니 지방의 향교만도 대우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점심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간식 정도의 식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 '점심'이란 중국의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문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디엔신'이라는 말은 간식을 가리키며, 우리의 점심식사에 해당하는 말은 '우판'이라고 부른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중에 쓴 일기<쇄미록>에서도 간단히 먹은 경우에는 점심이라 쓰고, 푸짐하게 먹은 경우에는 낮밥이라 써서 점심과 구분하고 있다. 궁중에서도 아침, 저녁에는 '수라'를 올리고 낮에는 간단하게 국수나 다과로 '낮것'을 차렸다. 그러다가 점심이라는 말이 차츰 낮밥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결국 점심은 간식에서 간식 정도의 식사 단계를 거쳐 정식 식사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하루에 챙기는 끼니 수는 계절에 따라서도 달랐다. 19세기 중엽 이규경이 지은<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대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를 먹고,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성균관에서는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가을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는데, 이때 점심이란 것도 쌀밥 몇 숟갈과 미역 몇 조각 정도였다고 한다. 즉 해가 긴 여름에는 간단한 점심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끼를 먹었다는 말이다. 계절뿐 아니라 노동량에 따라서도 하루에 먹는 끼니 수는 달라졌다. 중국 동북부에 살고 있는 원크족은 지금도 사냥철에는 하루 세 끼를 먹고 보통 때는 두 끼를 먹는다고 한다. 우리 나라 농촌에서 한창 바쁜 모내기 때에는 새참까지 합하여 하루에 다섯 끼도 먹는다는 얘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 끼 식사가 정착되기 전에도 여행길에는 활동량이 많으므로 낮에 밥을 먹어야 했다. 여행객은 주막에서 중화로 허기를 채웠고, 왕도 궐 밖으로 먼 길을 거동할 때는 주정소에 잠시 머물며 간단한 낮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낮수라'를 들었다. 겨울에 두 끼만 먹는 것도 일조시간이 짧은 이유보다도 주로 농사일을 쉬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살림 형편에 따라 빈민들은 하루 두 끼에 만족해야 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세 끼, 또는 그 이상을 먹었다는 기록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1905년 러시아 대장성에서 발간한 <한국지>에서는 한국인은 하루에 서너 번 밥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침식사 전에 죽 따위를 간단히 먹는 '조반'을 보태어 한 말인 듯한데 여기에 밤참까지 포함하면 다섯 끼가 된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두 끼가 일반적이었다. 일본군 군의관들이 한국 북부지방의 생활을 조사한 <조선의 의식주>(1916)에서도 한국인의 식사 횟수는 지방에 따라, 계절에 따라, 경제력에 따라 다른데 대체로 하루 2회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끼니 수는 두 끼가 일반적이었고 간단한 간식 정도에 그치던 점심이 점차 정식 식사로 자리잡아 세 끼로 바뀌었는데, 조선시대 말까지도 완전히 세 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가 완전히 정착된 것은 금세기 후반부터였다.
흰쌀밥을 먹었을까, 꽁보리밥을 먹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었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 나라 식단은 주식과 부식이 확연히 구분되어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밥이라 하더라도 모두 쌀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밥 짓는 재료로 쓰이는 곡물은 우선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1827)에서는 "남쪽 사람은 쌀밥을 잘 짓고 북쪽 사람은 조밥을 잘 짓는다"고 하여, 남북의 주식이 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다. 북쪽의 주식이 조였음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만 있으면 쌀밥을 먹었다. 물론 농촌에서 춘궁기부터 추수 전까지는 보리밥이나 잡곡밥을 많이 먹었겠지만 쌀밥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고 다만 북쪽에서는 조밥을 먹었다는 사실은 국내 기록은 물론 외국인 견문기에도 무수히 많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남쪽에서는 보리나 잡곡이 곁들여진 쌀밥이, 북쪽에서는 조밥이 주식이었고 경제력에 따라서도 사정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보릿고개를 겪고 난 뒤 꽁보리밥만 먹던 추억이 생생한 세대들로서는 의아해 할지도 모르므로 여기에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악몽같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쓰일 군량미 조달과 일본 국내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쌀과 콩이 수탈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에 수출되어, 정작 우리는 쌀 농사를 지어도 쌀을 먹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대신 보리, 안남미,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먹지 못하는 집이 많아 아이들은 얼굴에 부황이 들었다. 일제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도 단절의 시대였다.
왜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도,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을까? 이는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어야 수많은 사람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밀을 1알 뿌리면 6알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쌀은 1알을 뿌리면 평균 25알에서 30알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므로 이중환(1690-?)은 <택리지>에서 볍씨 1말을 뿌려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 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라 하였다. 벼농사는 노동량이 많이 투여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밀처럼 이포제, 삼포제 농업으로 경작지를 묵혀 두지 않아도 되고 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이모작, 삼모작을 행할 수 있어 경지 이용도와 단위 면적 당 생산량 모두 높았다. 또한 밀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고기를 곁들여 먹어야 하지만, 쌀은 기본적인 영양소가 고루 갖추어져 있어 약간의 영양소만 보충하면 될 뿐이었다. 그러기에 쌀을 재배하여 100명이 먹고 살 수 있는 넓이의 땅에 밀을 심으면 75명이 먹고 살 수 있고, 목초지를 만들어 고기를 먹는다면 9명이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불교자이나교힌두교 등 고대 인도의 종교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한 것은, 이 종교들이 발생할 무렵에 인구밀도가 적정선을 넘어서서 육식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인류학자도 있다.
한국음식의 상징, 김치와 고추
밥과 함께 우리 식단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김치이다. 우리 나라 식단 차림의 전형이라 할 만한 반상 차림은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겨 나오는 반찬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부른다. 첩수가 올라갈수록 점차 차림이 풍부해지기는 하지만 밥, 국, 김치는 어디에나 빠지지 않으면서 첩수에는 계산되지 않는다. 그만큼 김치는 가장 기본적인 부식이었다. 김치는 넓은 의미에서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를 의미한다. 김치의 어원인 '딤채'도 '담근 채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깍두기, 오이지, 오이소박이, 단무지는 물론 장아찌까지도 김치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의 것으로는 다꾸앙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쯔께모노나 서양의 피클, 중국의 파오차이,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 인도네시아의 아차르도초나 소금에 절인 채소, 즉 김치의 일종이다. 우리 나라의 김치는 '지'라 불렀다. 그래서 짠지, 싱건지, 오이지 등 김치류에는 지금도 '지'자가 붙는다. 초기의 김치는 단무지나 장아찌에 가까웠을 것이다. 처음에는 피클, 쯔께모노, 파오차이와 비슷했던 김치가 지금은 외형상으로나 맛으로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 김치에는 젓갈과 고춧가루를 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의 김치는 18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도 무나 오이가 김치의 주재료였다. 우리가 지금 흔히 먹는 배추김치는 18세기 말 중국으로부터 크고 맛이 좋은 배추 품종을 들여온 뒤로 널리 담가지기 시작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무김치를 능가하게 되었다.
김치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 향신료의 대명사로 쓰이는 고추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전기의 향신료로는 후추, 천초, 생강 등이 있었다. 그런데 후추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육류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후추는 서양에서도 '금은처럼' 비싸서 유산 목록에 기재되고, 때로는 낟알로 세어 팔 정도였으며, 신대륙 개척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싼값에 후추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전래된 후추는 우리 나라에서도 매우 비싼 물건이어서 약용으로나 쓰일 정도였다. 조선초기에도 왕의 하사품으로 후추가 종종 등장하였거니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사신이 잔치 자리에서 후추 한 움큼을 상위에 흩어놓자 악공들과 기생들이 이를 줍느라고 소란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징비록>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후추는 별로 쓰지 못하고 천초와 생강, 겨자 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추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중미 멕시코가 원산지인 고추는 '남만초'나 '왜겨자'라는 이름으로 16세기 말 조선에 전래되어 17세기부터 서서히 보급되다가 17세기 말부터 가루로 만들어 김치에 쓰이게 되었다. 고추는 19세기에는 향신료로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후추는 더 이상 고가품이 아니었으며,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는 지금은 간혹 추어탕에나 쓰일 정도로 되었다. 우리 나라의 고추는 다른 나라의 고추 품종과 달리 매운 맛에 비해 단 맛 성분이 많고, 색소는 강렬하면서 비타민C 함유량이 매우 많다고 한다. 더구나 고추는 소금이나 젓갈과 어우러져 몸에 좋은 효소를 만들어 내며, 몸의 지방 성분을 산화시켜 열이 나게 함으로써 겨울의 추위를 이기게 하는 기능이 있다. 고추가 김장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기근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데...
조선 후기에 고추의 전래와 함께 특기할 만한 것이 구황식품의 전래이다. 조선전기에는 주로 솔잎, 소나무 껍질, 느릅나무 껍질, 도토리, 칡뿌리, 쑥 등이 구황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전시기를 일관하여 널리 사용된 것은 솔잎이었다. 솔잎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는데 쩌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콩가루 등에 섞어서 죽으로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콩가루를 섞어 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변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도 솔잎을 너무 먹어 변비가 걸릴 만큼 가난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가지 식품이 조선에 들어왔다. 중남미지역의 신대륙을 점령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동아시아로 진출하여 중남미 원산의 여러 가지 식품을 중국, 일본에 전했고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조선에도 이들 새로운 식품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전해졌는데 이 가운데 특히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이 까다롭지 않고 가뭄에도 잘 견뎌 새로운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고구마는 18세기 중엽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19세기에 경기도,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로 서서히 확산되었다. 고구마는 '감저'라 하였는데 고구마라는 말은 고구마의 별칭인 '효행저'를 대마도인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고꼬이모'라 부르는 것을 듣고 받아들인 말이라고 한다. 한편 감자는 16세기 후반에 남미에서 스페인에 전해진 뒤 18, 19세기에는 전 유럽에 번져나가 빈민들의 주식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마보다 늦게 19세기 전반기에 보급되었는데, 말방울 모양으로 주렁주렁 달렸다 하여 '마령서'나 북쪽에서 온 감저라 하여 '북감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감자는 추위는 물론 가뭄과 홍수에 잘 견뎌내어 전래된 지 얼마 안되어 고구마를 능가하면서 북부지역, 강원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식사를 상징하는 숟가락과 혼자 받는 밥상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특이한 것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 인구가 약 4할,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인구가 약 3할, 젓가락을 사용하는 인구가 약 3할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민족이나 모두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티움에서 10세기경부터 식탁에 등장한 포크는 16세기에 이탈리아 상류사회로 전해져 17세기 서유럽의 식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으나, 신분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전 유럽에 보편화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5세기의 예절서에서 음식 먹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코를 풀라고 했던 것이나, 16세기의 사상가 몽테뉴가 너무 급하게 먹다가 종종 손가락을 깨물었다는 기록으로도 당시에 포크가 아니라 손가락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이 서양보다 훨씬 일찍 사라졌다. 손가락 대신 젓가락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젓가락뿐 아니라 숟가락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오랜 옛적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숟가락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선조 때 사람 윤국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중국인들이 상하를 막론하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도 일본에는 젓가락만 있고 숟가락이 없는 것을 특별히 기록으로 남겨 놓은 바있다.
우리는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를 마쳤음을 나타낼 정도로 숟가락은 식사 자체를 의미하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음식에 물기가 많고 또 언제나 밥상에 오르는 국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국을 먹지만 국이라기보다는 국물에 가까워서 손으로 국그릇을 들고 입을 대어 마시므로 숟가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국은 국물을 마시는 것도 있으나 대개는 건더기가 많고 밥을 말아먹는 국이다. 미역국, 된장국, 해장국 등 거의 모든 국이 그러하다. 찌개류나 '물만 밥'도 숟가락이 필요한 음식이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는 몽고풍의 요리가 전해져 고기를 물에 넣고 삶아 그 우러난 국물과 고기를 함께 먹는 지금의 설렁탕, 곰탕이 생겨났다. 특히 국밥은 애초부터 밥을 국에 말아놓은 것인데 이런 식생활풍습은 전 세계에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젓가락 숟가락을 모두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유일한 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서양은 그렇지 않았다. 여럿이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접시를 두세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개인용 접시가 사용된 것은 17세기에 가서야 정착되었다. 서양에서 식사 때의 청결이 강조되고 식사예절이 까다롭게 발전한 것은 여럿이 한 식탁에서 맨손으로 집어먹던 습속에서 유래되었으며, 포크나 접시도 초기에는 몇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 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작은 소반을 몇 개씩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들끼리 상에 모이거나 간혹 할아버지와 겸상을 받기도 하였지만 성인 남자는 혼자 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서민층의 주부들은 그렇지 못해서 부엌의 부뚜막에서 간단히 먹거나, 상 옆의 방바닥에 밥주발과 국대접을 놓고 먹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진 것도 그리 오래지 않다. 또한 혼자 상을 받으므로 개인별로 정해진 그릇과 수저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아기가 돌을 맞을 때는 아기 몫의 밥주발, 국대접과 아울러 숟가락, 젓가락을 마련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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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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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4장
산
산은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 아래로는 세상과 연결되는 곳이다. 하늘과 땅 중간에 우뚝 선 산. 이 자리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로 인간은 하늘과 태양을 숭상하여 왔다. 하늘을 향한 산의 수직성은 이러한 숭천사상, 태양숭배사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인간은 산을 신앙의 대상, 수호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라는 말이 있듯이, 산은 그 품이 한없이 깊고 아늑하다. 인간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산으로부터 모성으로서의 위안을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산은 멀리 떨어져 바라볼 때에도, 그리고 그 품속에 깊숙히 들어가 있을 때에도 인간의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산이 없다면 우리는 심리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커다란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산은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그 품속에서 우리들을 성숙시킨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산을 찾아 은거하며 탈속의 경지를 누렸고, 숱한 사연의 인물들이 속세를 떠나 산과 함께 삶을 영위하였다. 한편, 산은 그 민족이 강역 및 역사,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러 산악이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산맥은 그 민족의 약동하는 힘의 원천이다. 그 산에서 잉태되고 자라난 강은 그 민족의 생명의 젖줄이 되며, 산세에 따라 한 마을, 한 부족, 나아가서는 한 민족이 형성되기도 한다. 수천 년 역사의 소용돌이를 감싸오면서, 또는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면서 묵묵히 우리 민족을 지켜온 산. 조국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은 바로 이 산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민족에게 투영된 산의 의미, 그 상징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그 품속에 있을 때에 느끼게 되는 ‘탈속과 은일의 상징’으로서의 산을 살펴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는 산, 그 수직성의 상징으로 형성된 ‘산악신앙과 산악숭배사상’,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세와 지형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리체계로서의 산’의 상징성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1. 탈속과 은일의 상징
1) 은거와 은일의 산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산에 수놓아진 인맥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일찍이 산의 철학을 깨달아 산과 함께 삶을 산 많은 선각자들이 있었으며, 왕조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이를 한탄한 선비들은 산을 찾아 은거하였다. 그 밖에 숱한 민란의 주모자들이 산을 피신처로 삼았으며, 일제 때에는 징용, 징병을 기피한 청년들과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이 산을 근거지로 숨어 살았고, 광복 후엔 파르티잔(빨치산)의 소굴이 되기도 하였다. 신라 때의 최치원을 비롯한 많은 법사와 선사들은 차치하더라도 유명 무명의 인물들이 산을 중심으로 역사의 수를 놓았다. 그런 뜻에서 산은 자연과 인생이 어우러진 무대이기도 하고, 바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현실생활의 도피장소로서 산을 택하여 산 사람들이다. 이들이 산중생활을 선택하게 된 데는 뚜렷한 현실적 이유가 있으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산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완성된 자아실현의 장으로서, 산 그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을 느껴 스스로 찾아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다. 즉 현실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스스로 선택하여 산중생활을 영위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는 언제나 산 밖의 인간생활이 사고의 중심이 되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고, 또는 돌아가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있는 사람들이 은신처나 도피처 등 ‘에서 벗어난 '장'으로서 산을 인식하고 있는 반면, 뒤의 경우는 산중생활 자체가 삶의 중심이 되어 산 밖의 세상일을 관망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형태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대개의 경우 복합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현실의 도피로 산을 찾아들었으나 산과 함께 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초월과 승화의 경지에 이르는 경우이다.
특히, 근대 이전의 왕조시대에는 나라의 어지러움을 피해 일시적으로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산에 은거하였던 많은 선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현실에 대한 고통과 소외감으로 유배의 심정을 맛보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의 산중생활은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주옥 같은 글과 글씨, 그림 등을 남겨, 산중생활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풍요롭고 넓게 해 주었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허유가 그린「선면산수도」에는 수려한 산수의 그림과 함께 산중 선비들의 하루 일과를 담은 글이 적혀져 있다. 이 산수도는 부채에다 그린 것으로, 거기에 담은 내용과 함께 더욱 운치를 더하고 있다. 부채에 담긴 글을 읽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들이 왜 산을 택하여 살고 있는지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집이 산속에 있으니 봄 여름 계절이 바뀌는 때가 되면 푸른 풀이 뜰에 무성하고 낙화가 오솔길에 만발하구나. 문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없고 소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리네. 높았다가 낮아지는 새소리에 편안한 낮잠은 절로 오누나. 샘물 긷고 솔가지 주워 차를 다려 마시며 「주역」과 「시경」의 국풍, 「좌씨전」, 「난소경」, 「사기」,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동파의 문장을 읽어나간다. 조용히 산길을 걷기도 하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안고 어루만지며 아기사슴, 송아지와 더불어 우거진 숲과 풍성한 풀밭 사이에 누워 함께 숨을 쉬네. 냇가에 발을 담그고 않아 흐르는 시냇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양치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와 어린 아들이 대순과 고사리를 다듬고 보리밥을 짓누나. 한바탕 흥겹게 취하여 크고 작은 붓으로 수십 자를 적고 법첩과 묵적을 펴 책 끝까지 읽어나간다. 시내가 흐르는 산으로 다시 나가 전원의 늙은이와 시냇가의 벗을 만나 뽕나무와 삼농사를 묻고 기장과 벼 농사에 대해 이야기하네. 날씨의 맑고 흐림도 요량해 보고 전후를 헤아려 시절을 셈해 보며 서로 더불어 담론이 만발하여라. 집에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 지팡이를 세워 놓고 방에 와 앉으니 서산 노을의 자주빛, 푸른빛이 책상 위를 물들이는구나. 소 치는 목동의 피릿소리가 들려 오고 앞 시내엔 달이 흐르고 있으리라.
한편, 산중에 은거한 선비들은 현실세계와의 갈등을 끝까지 떨쳐 버리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경국제민의 유학적 이념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현실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참여해야 하는 자기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강한 자의식 때문에 산중생활에 젖고 심취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현실과 귀거래적 이상을 다같이 긍정하였다. 이러한 점은 선비들이 현실적 소외의 극복, 사유훈련, 심성수양 등을 위한 방편으로 불교의 청정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동경하고 좋아했으면서도 불교정신 자체에 대한 체득이나 그것에로의 완전한 귀의를 이루지 못한 태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무심을 표방하고 산 밖의 세상사람을 만나는 것을 피하였으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을 그리워하고 조정사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지은 시 한 수, 글 한 구절에서 그러한 심사를 역력히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그들이 엮은 산중생활과 그들이 꽃피운 산중문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어려운 때를 만나 세속을 피해 산을 찾은 선비들 중 가장 철저히 산과 함께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운 최치원을 들 수 있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와 지리산 쌍계사를 하루에 오가면서 많은 족적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그의 시가 전하기도 한다.
거센 물결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그는 쇠망해 가는 신라의 국운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음을 깨닫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뜬구름처럼 소요자적 길을 떠났다. 가야산, 지리산, 금강산, 청량산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남긴 그의 산중생활의 자취는 그와 대화하려는 후학들에게 청정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선조 24년(1591) 어느날 산사를 찾아가던 노승 한 분이 지리산 골짜기를 헤매다가 바위 틈에서 여러 권의 책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시 18수가 수록된 그 책에서 고운의 정교한 필적을 본 노승의 손은 일순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에 적막한 산능선을 바라보며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를 돌다가 시흥이 솟아나면 그대로 적어 아무 바위틈에나 시첨을 꽂아놓았을 그의 풍류를 생각할 수 있다. 지리산에는 또한 세이암이 있다. 그가 세상을 등지고 소요하던 중 국왕이 신하를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는 뜻을 전하자, 못들을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었다는 곳이다. 산에 들면 다시는 속세에 내려오지 않을 것을 말하고 이 곳을 건너며 손을 씻었다는 가야산 무릉교, 가야금을 타면서 시와 풍류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학사대, 그가 짚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 자라 고목이 된 해인사의 천년고목, 곳곳의 바위에 쓰여진 시... 이렇게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고운은 어느 날 가야산의 한 숲속에 갓과 신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후 아무도 그의 자취를 찾지 못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월당 김시습은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면학을 힘쓰던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 폐위의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으로 3일간을 지낸 뒤 모든 책을 불사르며 통분에 몸을 떨었다. 항시 세사의 어리석음과 부조리에 한탄하던 그로서는 너무도 큰 충격과 절망이었던 것이다. 본시 산수를 벗하며 명리를 구하지 않던 그는 방랑의 길을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때부터 평생을 미친 이처럼 행세하고 울음으로 시를 지으며 천하를 주유하였다. 금강산, 오대산을 비롯하여 내장산, 무등산, 조계산, 가야산, 북한산 등을 유랑하면서 처처에 명시 1만여 수를 남겼다. 31세 되던 해에는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을 짓고 6년 동안 칩거하면서 불후의 명작인「금오신화」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아침에 일어나 예불을 올린 뒤 통곡을 하고 하늘을 우러러 노래를 불렀다. 시를 지은 뒤에는 시를 쓴 종이를 태워버리고, 나무를 깎아 그 위에 시를 쓴 뒤 다시 그것을 불살라 태우고 통곡하는 신산의 일과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금오산실, 매월폭포, 매월동굴, 매월대, 매월동 등 그가 남긴 산중생활의 자취마다 천재의 유랑이 남긴 그의 탈속행각을 그려 볼 수 있다. 그는 “남아가 성세를 만다 도를 행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자기의 안일과 이름을 위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나, 도를 행할 수 없는 난세를 만나면 차라리 세상을 멀리하여 자기 일신이라도 깨끗이 하는 것이 현자의 도리”라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은 평생을 태백의 웅기가 가득한 청량산의 토굴에서 글씨를 쓰며 살았다. 김생이 이 굴에서 초서를 완성하여, 후세 사람들에 의해 ‘김생굴’이라 이름지어졌다. 청량산은 36봉 36대 36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이 중 경일봉에 위치한 김생굴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오른쪽에 의상봉과 왼쪽에 금탑봉, 건너편의 축령봉이 둘러싸고 있어 비가 오는 날이면 온통 암벽으로 된 봉우리마다 폭포수가 흘러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맑은 날에는 둘러쳐진 폭포가 바위로부터 흩어 떨어져서 물방울을 날리면 나무를 쪼개어 그것을 받아 마실 물을 삼았다 하니, 가히 그의 풍류와 멋은 신선의 경지와 멀지 않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명필체본을 구해다가 이 굴에서 40여 년 동안 글씨공부를 하였다. 종이로는 날마다 연습하는 양을 당해 낼 수가 없어 바위에다 연습을 하였는데, 커다란 바위에 글씨를 써서 가득 차면 다시 물로 씻고 또 쓰곤 하여 하루에 몇 번씩 되풀이하여 썼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 쓸 때는 까끌까끌하던 바위가 몇 년을 쓰고 나니 표면이 반들반들해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변에 있는 나뭇잎에도 빠짐없이 글씨연습을 하여, 비가 오면 골짜기의 물이 온통 먹물로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이렇게 닦여진 글씨는 신품에 달하여, 이황은「퇴계집」에서 “우리 동쪽나라 천 년 동안에 김생이 태어났으니 괴기한 필법은 바위와 폭포에 남겨 있도다. 사람 마음과 똑같다 감탄치 마소”라 하였고, 홍양호는 ‘동방서가의 조종’이라 극찬하였으며, 홍경모의 글과 주세붕의 시에서도 그의 필체는 실제 깍아지른 바위와 무리지어 솟은 봉우리를 옮겨놓은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 년 동안 토굴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이니, 그의 산중생활은 초인적인 정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 김생굴과 김생이 사용하던 우물, 그의 연고지에 지어진 김생사 등에는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김생을 만나려는 세인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다산 적약용은 천주교도로 박해 받아 전남 만덕산 기슭의 다산초당에서 18년간 유배상활을 하였다. 그는 다산초당의 산객이며 은자였고 산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고적한 귀양객이었다. 이 다산초당에서의 생활은 다산 개인에게는 일면 불행한 일이었지만, 여기에서「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등 방대한 경세제민서의 저술을 하고 경학과 문학, 과학 등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겨 후손과 우리 민족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산 윤선도는 귀양살이, 벼슬살이, 은거생활을 되풀이하였다. 유배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과 소외감은 고산으로 하여금 문학이라는 승화된 정신세계로 몰입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명 조식은 벼슬보다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였다. 그는 철저한 은일의 선비로, 몇 번이나 간청에 못이겨 벼슬에 않았다가는 며칠을 넘기지 못하였고,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를 짓고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지리산을 배워 평생을 그 속에서 살았으며, 남명에 의해 지리산은 온통 시화로 장식되었다. 그가 지리산을 읊은 시는 수백 수를 넘었고, 지리의 산수 속에서 일생을 마쳤을 때 그 향년은 72세였다. 김만중은 남해군 용문산의 유배지에서 혈흔과 함께 인생의 유서처럼 불후의 명작「구운몽」을 남겼다. 조선시대의 명필 김정희의 서체는 유배생활 동안 더욱 무르익어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초기의 정도를 주장하던 틀에서 벗어나 예절과 형식을 초월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유배생활 동안 산수를 벗하고 넓고 깊어진 그의 정신세계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산중생활을 통하여 깊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가꾸어 나갔으며, 그러한 정신세계의 결정체로 창조해 낸 주옥 같은 작품들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유산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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