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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719호
단기 4343. 3. 15 (음력 1. 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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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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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급히 서두르려면 돌아 가는 길로 가라.(영국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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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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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그림에 눈동자(화룡점정)
중국 남북조 때 남조 양나라(502~557) 장승요는 우군 장군이나 오흥 태수 들을 지낸 사람이지만, 그 이름은 그림 그리기로 더 높다. 금릉의 안락사 벽에 네 마리의 용을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았다. 누가 물으면 언제나 “눈동자를 그리면 올라가 버리거든” 했다. 아닌게아니라 장승요가 그 한 마리에 눈동자를 그려 넣으니까, 곧바로 우레 소리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하더니, 용이 벽을 뚫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눈동자를 안 그린 세 마리의 용은 그대로 벽에 남아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사물의 마지막 중요한 대목을 마무르는 일을 ‘용그림에 눈동자’(화룡점정: 용을 그리고 눈동자 찍기)라고 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용그림에 눈동자가 없다”는 식으로 쓰는 일이 많지마는, 그렇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잘되어 있어도 요긴한 점이 빠져 있으므로 다 되었다고는 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비슷한 이야기로, ‘부처 눈 뜨게’(대불개안)라는 말이 있다. 부처 상이 다 이루어져 가고 있을 때, 슬기로운 눈을 뜨게 한다는 뜻으로 마지막 완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라는 것이 있는데 음미해볼 만하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전철련
1년 가까이 끌어온 용산참사 문제가 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참사가 일어나자 ‘전국철거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신문 지상에 많이 오르내렸다. ‘연합’의 본음은 ‘련합’이다. 그러나 두음법칙에 따라 ‘연합’으로 적는다. ‘전국철거민연합’에서 ‘연합’의 ‘연’은 단어 첫머리, 즉 두음이 아니지만 ‘연합’으로 적는다. “접두사처럼 쓰이는 한자가 붙어서 된 말이나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ㄴ’ 또는 ‘ㄹ’ 소리로 나더라도 두음법칙에 따라 적는다”는 맞춤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를 붙여 쓰는 경우에도 앞의 규정에 준한다. ‘전국철거민연합’은 합성어이기도 하고 둘 이상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문제는 ‘전국철거민연합’의 준말을 어떻게 적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 신문들은 대부분 ‘전철연’으로 적었으나, ‘전철련’으로 적은 신문도 있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맞춤법(두음법칙)에는 ‘준말에서 본음으로 소리 나는 것은 본음대로 적는다’고 되어 있다. 예로 ‘국련’(국제연합)과 ‘대한교련’(대한교육연합회)을 들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준말은 ‘자민련’이었다.
그렇다면 ‘전국철거민연합’의 준말은 ‘전철련’으로 적는 것이 맞춤법에 맞는 표기라고 하겠다.
우재욱/시인
애끊다와 애끓다
‘애’는 창자의 옛말이고, 쓸개의 옛말이다. 이 ‘애’와 ‘끊다’가 결합해 ‘애끊다’가 됐다.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뜻이다.‘애끊는 통곡’ ‘애끊는 이산의 아픔’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슬픈 통곡이고 아픔이다.‘애끓다’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그래서 속이 끓는 것이다.‘애끓는 그리움’ ‘애끓는 하소연’
쥬스는 주스
‘ㅈ,ㅉ,ㅊ’은 파열과 마찰의 두 가지 성질을 다 가진 파찰음이다. 뒤에 ‘ㅏ,ㅓ,ㅗ,ㅜ’가 올 때와 ‘ㅑ,ㅕ,ㅛ,ㅠ’가 올 때의 발음이 같다. 이 때문에 외래어를 표기할 때는 ‘ㅈ,ㅊ’ 다음에 이중모음 ‘ㅑ,ㅕ,ㅛ,ㅠ’를 쓰지 않는다. 쥬스는 주스, 챠트는 차트, 레져는 레저, 텔레비젼은 텔레비전, 쵸콜릿은 초콜릿으로 적는다.
~다 라고 말했다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직접화법과 자신의 입장에서 인칭이나 시제 등을 고쳐 말하는 간접화법이 있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다(직접화법)→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다(간접화법)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게요'라는 말을 믿었다→오직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말을 믿었다. 둘 다 가능하지만 말할 때는 간접화법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요즘은 이도 저도 아닌 화법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다라고'(~다라는) 형태가 그것이다. ①글쓰기는 타고난 사람만 할 수 있다라고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글쓰기는 타고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②안다라는 것과 가르친다라는 것은 다르다→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기형적인 말투이고, 뒤의 것이 정상적인 표현이다. 학문적 개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에서 일부 학자가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어법에 어긋나는 표현으로 전혀 본받을 필요가 없다.
참고로 ['~이 힘이다'라고 말했다]처럼 직접화법의 '~다' 다음에 '~라고'를 붙이는 경우가 많으나 '라' 없는 '~고'가 자연스럽다.
승전보를 울렸다
"미국은 한국 선수들의 열정에 제압당했다." 한국의 야구 월드컵 4강 진출을 미국 언론은 이렇게 평가했다. 많은 사람이 성취의 조건으로 열정을 꼽는다. 열정도 능력이다. 6월, 다시 한번 뜨거운 가슴으로 독일 월드컵에서도 짜릿한 '승전보'를 울려 주기를 소망한다. 승리의 소식을 전할 때 '승전보를 울리다'고 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한국 야구는 투혼을 불사르며 승전보를 여러 차례 울렸다" "월드컵에서 축구대표팀이 승전보를 울릴 때마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웠다"처럼 쓰는 예가 있다.
그러나 이는 '승전고를 울리다'를 잘못 표현한 것이다. '승전보(勝戰譜)'는 싸움에 이긴 경과를 적은 기록을 일컫는 것으로 '승전보를 전하다/남기다'와 같이 사용할 수는 있지만 '승전보를 울리다'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싸움에 이겼을 때 울리는 북은 '승전고(勝戰鼓)'이므로 "태극전사들이 독일에서 토고ㆍ프랑스ㆍ스위스에 맞서 승전고를 울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처럼 써야 한다. '승전고를 올렸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북은 울리는 것인 만큼 '승전고를 울렸다'가 바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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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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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 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 먹이고 싶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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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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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를 구우며 - 유선
- 돼지
넌, 태고 그 먼 어느 숲을 그리다가 지친 목숨
차라리 투박한 몸 속세의 걸신였기
나날을 갇혀 살아도 아픈 줄을 몰랐다.
빗장 건 세월 저쪽 시장끼만 채우다가
무너진 억장들을 덕성 뒤켠 가린 나날
살아서 가파른 명줄 낙원으로 착각했다.
시퍼런 칼날 앞에 갈기갈기 찢긴 갑옷
가진 것 다 보시하고 절망 너머 딩구는 뼈
구천을 맴도는 원혼 지글지글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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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평론 / 서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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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최재봉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 신경림의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농무' 전문).
신경림(61)씨의 시집 <농무>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 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출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시집을 자비출판하는 것이야 관례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월간문학사'. 정식 등록조차 돼 있지 않은 이 무허가 유령 출판사의 정체인즉,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월간 문학>과 관련돼 있다.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한 시인은 절친한 지기인 소설가 이문구씨가 편집을 맡고 있던 이 잡지의 명의를 잠시 빌리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 시집은 다음해 시인에게 제1회 만해 문학상을 안겨 주었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야심적으로 기획한 `창비시선'의 제1권으로 재출간됐다. `창비시선'의 무녀리로서 <농무>는 좁게는 이 기획의 성격을, 넓게는 민족문학 진영의 시가 나아갈 방향을 어느정도 규정해 주었다. <농무>가 지니는 그같은 규정력은 평론가 유종호씨에 의해 `선행 시편의 추문화'라는 개념으로 정리된 바 있다. 이 시집의 어떤 점이 앞선 시들을 한갓 추문(醜聞)으로 만든 것일까?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풍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고, 시와 현실,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농무>의 새로움은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 으로 크게 구별된다.
“어떡헐거나./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올해에는 닭이라도 쳐 볼거나./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보리밭을 질러 가면 세상은 온통/하얗구나.” (`겨울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파장')
신경림씨는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돼 시단에 나왔다.“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로 끝나는 `갈대'를 비롯한 그의 초기작은 앞에서 든 시집 <농무>의 전반적인 기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시인이 등단 이듬해 초까지 시를 발표하다가는 홀연 낙향한 뒤, `겨울밤'을 발표하는 65년 말까지 10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때까지 내가 썼던 시들에 대해 회의도 생겼고, `불온한' 독서회에 가담해 있던 차에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렵기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농사도 지어 보고 광산이나 공사장 일도 하고 장사도 하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가 더라.”
<농무>에 그려진 농민적 삶의 세목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까지 시인이 고향인 충북 충주를 비롯해 문경·평창·영월·춘천 등지를 떠돌며 보고 겪은 일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농사는 안 되고 세상은 갈수록 힘겨운 씨름 상대로 변해가는데 농민들과 날품 인부들은 술에나 취하고 광태(狂態)를 연출하는 것으로 현실을 잊고자 한다. 울분과 절망에 휘둘리던 농민들은 문득 짐을 꾸려 서울을 향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은 서울은 서울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산 일번지')
시집 <농무>의 또다른 축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역사적 격동이 민초들에게 가한시련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이 모두/싫어졌다”는“대학을 나온 사촌형”,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죽은 당숙,“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주정을 하는 또다른 당숙 등이 그 시련을 대변한다.
시집 <농무>의 무대는 시인의 고향인 충주시 노은면 연화리 장터와 보련골, 그리고 충주시 일대다. 13대 선조 때부터 들어와 살았다는 보련골은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보련산(764m) 아래의 아주 신씨 집성촌이다. 산과 계곡, 적당한 크기의 들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고장은 구한 말부터 광산이 개발되면서 광산촌이 됐다. 시인의 탄생지인 입장(立場)은 광산개발에 따라 시장의 필요성이 대두하자 큰길가에 세워진 마을이다. 이 크지 않은 면소재지에도 처음으로 4층짜리 연립주택이 세워져 `노은 빌라 분양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보련산의 그 많던 탄광은 오래 전에 폐광돼 보련골은 전형적인 농촌의 면모를 되찾았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그 정경의 어디에서도 30년 전의 울부짖음은 들을 수 없다. 보련산 너머 남한강변의 목계나루는 <농무>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시인의 또다른 대표시인 `목계장터'의 무대가 된 곳이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방물장수가 앉아 쉬곤 했던 주막은 속절없는 세월에 쫓겨 간 곳이 없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를 대신해서는 매점의 산뜻한 파라솔이 성하(盛夏)의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아든 길손들을 맞이한다. 폐쇄된 나루 아래쪽에는 지난 73년에 세운 목계교가 시의 이야기를 과거로, 과거로 밀어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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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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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5장 나 하나 행복 둘
선과 악
완전하게 선하기만 한 인간도 완전하게 악하기만 한 인간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자체가 선하기만 한 것도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태어날 때의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녹화되어 있지 않은 비디오 테이프처럼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 그 깨끗한 마음에 선을 담느냐 악을 담느냐에 따라서 선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한다. 마치 공테이프에 건전한 것을 담으면 건전 비디오가 되고, 음란한 것을 담으면 음란 비디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선과 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 주어지는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한 인간이 선하게 되고 악하게 되는데는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선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 선한 기질의 인간이 되고, 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 악한 기질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민족간에 기질이 다르고 지역간에 기질이 다른 것도 인종이 달라서가 아니라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행실만을 보고 선한 인간 악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상황에 따라 선한 인간도 악한 인간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죽는 날까지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법 없이도 살만큼 호인인 사람이라도 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악한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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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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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한국역사연구회
농민의 조세부담 - 김성우 (경산대 교수)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현대와 얼마나 달랐나
현대인은 수입의 일부를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해야 할 납세 의무를 갖고 있다. 여기에 우리 나라 성인남자의 경우 국토방위의 의무가 하나 더 추가된다. 그러면 경제의 주체이고 국방력의 근간인 납세자에게는 의무만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의무 수행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권리도 주어진다. 납세자가 누리는 권리로는 참정권, 의료혜택, 연금지원 등이 우선 떠오른다. 이러한 의무와 권리의 쌍방 교통로 확보 여부가 그 사회의 민주화, 비민주화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의무와 권리의 쌍방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었던가? <경국대전>의 규정을 살펴보면, 의무와 권리에 대한 국가의 배려가 현대사회와 비교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시대 백성들도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 납부하고 관직 참여권이나 법률적 보호, 그리고 구료사업 등 다양한 형태의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납세자에게 주어진 권리에 주목할 경우, 마치 조선사회가 이미 근대사회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낳을 정도다. 그렇지만 법률적 규정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회가 운영되는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면 이러한 추정이 매우 피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와 조선시대 납세자의 위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두 사회의 과세형태의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신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이 낮았던 조선시대에는 경제주체로서 굳건히 설만큼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가족이 많지 않았다. 자연히 국가의 조세정책은 자립적 경제기반을 갖춘 가호를 대상으로 수립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지 않은 가호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의무와 권리의 쌍방 교통로가 확보된 계층은 경제기반을 갖춘 건실한 가호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이들 납세층을 공민으로, 그렇지 않은 계층을 사민으로 분류했다. 납세여부를 둘러싼 이러한 인민편제를 법제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장치가 양천제라는 신분 규정이다. 그리고 국가는 공민의 납세참여를 유도하고 조세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지주층이 노비를 적절하게 소유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 경제주체로부터 애초에 제외되었던 천인층이 조선사회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50% 내외였고 18세기 전반 이후 급격하게 소멸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의 차이점은 세목의 내용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경제행위가 있는 곳에 과세가 존재하는 반면, 인두세나 가호세와 같은 불특정 경제행위자 일반에 대한 과세 비중은 매우 낮거나 감소 추세에 있다. 반면 전근대사회에서는 한정된 양인층으로부터 가급적 많은 세원을 징수하기 위해서 경제행위에 대한 직접세뿐만 아니라 가호와 인정에 이르는 잠재적 경제단위까지도 독립세목으로 구성하여 과세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사회의 세목은 토지에 대한 세금, 가호에 대한 세금, 인정에 대한 세금으로 크게 구분되어 통상 조용조 3세체제로 불렸다. 이 중에서 직접세에 해당하는 세원을 굳이 꼽자면 전세 정도였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조세제도는 양천제라는 신분제에 의해서 크게 규정되었다는 점, 그리고 인두세와 가호세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이 현대사회의 그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이후 조선사회에서 조세제도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독특한 모습으로 전개되도록 작용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조세제도로 이익을 보는 계층, 피해를 보는 계층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재편되었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조용조 3세가 변화한 내용은 각각 달랐다. 재투자 여력이 많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인력과 물자의 투자비용이 비교적 큰 토지는 변동 여지가 적었다. 또한 고정 자산이라는 점에서 변동상황의 파악이 다른 세원보다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인구의 증감 및 거주 형태와 긴밀한 관련을 맺는 가호세와 인두세는 상대적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이런 이유로 가호세와 인두세는 토지세와는 달리 빠져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에 따라 국가재정은 점차 토지세 중심으로 운영되고, 가호세와 인두세는 보조 세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가호세인두세가 빠져나가는 것은 신분제사회에서는 필연적 현상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에 따라 가호의 크기는 매우 극심한 편차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일수록 대가족을 구성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소가족을 구성하거나 혹은 가족구성이 불완전한 독신형태로 존재했다. 가족 구성의 극심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호적에 기재된 각 가족이 개별 가호로 인정되었으므로 가호세와 인두세의 가구 당 부과액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가호세인세는 대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지배층에게는 부담이 크지 않은 반면 소가족을 구성하는 피지배층에게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큰 조세였다.
이처럼 가호세인두세는 전근대의 신분적 속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조세였다. 국가재정의 운영도 조세제도를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가는 국가재정의 수입지출의 총 규모를 산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세종 때에는 전세의 수입과 지출을 일원화하여 국가재정에서 토지세원을 정확히 산정 하였고, 세조성종 때에는 총 규모가 확정되었다. 따라서 이후 국가재정은 15세기 후반을기준시점으로 수입 규모를 예상하고 지출 범위를 그 틀에서 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른바 총액제 운영이라는 것이 이것을 일컫는다. 그런데 국가재정 총액과 후대의 경제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즉 국가재정의 총액이 15세기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었으므로 경제 상황이 이전보다 나아져도 새로운 국가재정의 세원은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변동에 따라 재정총액도 증대되어야 했지만, 국가의 경상비 재조정작업은 현실경제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국가의 경상비 재조정 작업은 15세기 후반에 한 차례 시도된 이래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대동법이 실시된 17세기 중반, 균역법이 실시된 18세기 중반 등 몇 차례 시도되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변화요인은 과세대장의 작성 과정에서 나타났다. 과세대장으로는 20년 주기의 양안과 3년 주기의 호적 그리고 6년 주기의 군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작성된 것은 호적뿐이었고 양안과 군적은 작성주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작성 시점마다 엄청난 조세저항에 직면했다. 국가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의 변동과 양천 인구의 동향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호적은 작성과정에서 조세저항에 직면할 까닭이 없었다. 그렇지만 양안과 군적은 그 자체가 과세대장이었으므로 어떻게 기재되느냐에 따라 과표의 등락이 매우 심하였다. 한번 작성되면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동안 변동 없는 고정 과표로 기능한 양안과 군적은 납세자의 첨예한 현실문제와 부딪쳐 작성 시기마다 격렬한 저항과 반발에 직면했던 것이다. 과세대장 작성 과정에서의 굴절 또한 큰 문제였다. 과세대장은 주로 국가-각도-각읍의 행정계통을 밟아 명령이 하달되어 작성된 이후에는 그 반대의 통로로 기재, 비치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과세업무는 각읍 지배층이나 유력층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많았다. 따라서 유력층지배층은 과표를 낮추거나 빠져나감으로써 헐세 혹은 면역될 소지가 많았던 반면, 이들과 연결될 수 없는 피지배층은 실제 상황 이상으로 기재되어 중과세되기 일쑤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높은 과세비율 때문에 납세 부담을 느끼거나 이 때문에 몰락, 파산하는 계층은 사회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피지배층 그리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일반농민층이었다. 조세제도의 변동에 크게 피해 입는 계층도 이들이었다. 한편 지배층이나 유력층은 헐세탈루가 가능한 사회구조를 이용해 소유규모를 확대시키고 몰락파산하는 피지배층을 흡수지배함으로써 경제력 집중을 실현시켜 갔다. 이러한 양극현상 또한 신분제사회라는 사회구조의 속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세를 내는 농민의 고통
조선시대 조세제도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의 계기는 연산군 대에 찾아왔다. 연산군은 전대 국왕과는 달리 국가 재정을 매우 방만하게 운영함으로써 15세기 후반에 확립된 재정체계를 일순간에 무너뜨렸다. 이 때문에 국가재정이 적자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자 수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가호세의 대대적 확충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공안 개정을 시도했다. 지배층의 조세저항을 최소화하고 재정수입을 신속하게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가호세의 증액 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액의 증가분은 곧 피지배층의 부담을 가중시켜 일반농민층의 파탄과 몰락이 점차 현실화되었다. 여기에다가 공물 납입처에서 퇴짜를 놓는 형태로 착복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그 부담액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방납하는 행위가 16세기를 지나는 동안 공물 확보와 납부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구조화하여 조세액의 상당분이 유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농민층은 납세과정에서 멍들고 국가재정 또한 적자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반면 방납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는 왕실과 권세가들은 이러한 구조 아래 착실히 부를 축적해 나갔다. 임진병자 양란은 조세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새로이 제기하였다. 전후복구사업의 최대과제는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적자해결과 이반된 민심의 회복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선결 과제가 방납의 개혁이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공물진상과 방납 잉여물의 전체 규모를 추적하는 작업이 시도되고 이를 기반으로 전세와 가호세를 종합한 국가재정의 전체 규모가 재조정되었다. 대동법으로 명명된 조세개혁안이 이것이다. 농민이 가호세로서 부담하던 공물진상의 대부분이 토지소유자층의 부담으로 옮겨지고, 방납하던 때보다 값을 대폭 낮춰 공물을 구입함으로써 국가재정 상황도 많이 호전되었다. 대동세액은 1결당 쌀 12두로 정해졌다.
대동법은 국가재정 상태의 호전과 농민층의 납세부담 완화라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었다. 방납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권력층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는 개혁안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 때문에 발생되는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새로운 세원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 무렵 정부가 새롭게 주목한 세원이 양역세였다. 군역이 점차 준조세적 성격을 띠면서 양역화하자 국가는 이를 정규조세로 바꾸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과중한 납세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농민층과 보다 많은 세원을 확보하려는 국가 및 각 관청간의 심각한 마찰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운명적으로 군적에 기재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양인농민층이었다. 양인농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양역세를 줄여야 했지만 그 결과는 국가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새로운 조세개혁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균역법으로 명명된 이 개혁안은 앞서 실시된 대동법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다. 우선 국가는 양역세의 총액을 파악한 후 그것을 중앙에서 일괄 통제하고 필요 재원을 각 관청에 분배하여 국가의 재정 통제기능을 한층 높였다. 이를 기반으로 남정 1인당 면포 2필(쌀 12두)씩을 징수하던 종전의 양역세가 남정 1인당 면포 1필로 대폭 줄어들게 되어, 농민층의 부담도 한층 낮아졌다. 그렇지만 이미 환정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원이 대두하여 농민층의 전체부담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자연재해시 농민 보호를 목적으로 실시되는 환곡은 사실상 세금과는 거리가 먼 농민층이 당연히 누려야 할 혹은 국가에 요구해야할 권리였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환곡이 지방관청의 주요 재정원으로 활용되면서 수탈적 성격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여 균역법 실시로 각 관청이 전용할 수 있는 재원이 줄어들면서 환곡이 그 자리를 메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러 토지세, 가호세, 인두세의 명목으로 전세환곡양역이 자리잡고 총액제라는 동일 방식으로 운영되면서 조용조 3세체제는 전정환정군정의 삼정 체제로 전환되었다.
당시 농민층이 부담해야 할 조세총액은 얼마쯤 될까? 얼마쯤 되길래 농민층의 가계는 적자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몰락하고 있었을까? 조선사회가 신분제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조세부담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양인농민층의 평균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살펴보고, 조세 총액이 가계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때는 18세기 말 조선왕조의 마지막 개혁기라고 할 수 있는 정조 연간이다. 박지원은 1799년(정조 23년) 면천군수로 재직할 당시 그곳 양인농민층의 일반적인 생활상을 <한민명전의>라고 하는 글에서 묘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5명 정도의 노동력과 소 1마리를 가지고 논과 밭 모두 합쳐 약 1결 2부(약 50마지기) 정도를 경작하는 양인 소작농민을 예로 들고 있는데, 과중한 지대와 조세 부담 때문에 이 농가는 만성적인 적자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즉 이 정도의 토지에서 연간 피곡 497두를 생산하는데, 지대 250여두와 전세 72두를 납부하고 49두 7승을 종자용으로 남겨둘 경우, 이 농가가 1년 동안 사용할 곡식은 128두 정도, 쌀로 계산하면 3석 4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군역환곡과 같은 각종 부세와 땔감의복소금과 같은 생활필수품을 여기에서 충당해야 했으므로 위의 양인농가는 곧 심각한 적자상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쉽사리 호전될 성질의것이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농가가 관청으로부터 밀린 조세를 내라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등쌀은 야반도주로 농민을 내몰고 있었다.
근대적 조세제도로의 접근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조선왕조 성립이래 설정된 조세제도는 그 형체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조용조 3세체제는 토지가호인정에 대해서 조세를 부담시키고 그 대신 일정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납세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국가재정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렇지만 3세체제는 시대의 변화상과 더불어 극심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삼정체제로 전환되었다. 삼정도 명목상으로는 토지(전정)가호(환정)인정(군정)에 대해서 부과되는 세원이었지만, 납세자의 권리(군역과 환곡)로 인정되던 부분까지 세원으로 파악함으로써 납세자에 대한 국가의 노골적인 착취를 기반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납세자는 오로지 국가와 지배층의 의도 아래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는 의무자에 불과했다. 의무에 대한 반대급부가 사라진 상황에서 납세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최종 수단은 집단 민원의 제기, 납세 거부 혹은 관청 파괴와 점령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저항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가까워질수록 농민층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또한 급진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시기 각종 조세는 삼정체제로 수취 운영되었지만 가호세와 인두세의 비중이 현격하게 약해지고 토지세를 중심으로 한 직접세가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이미 17세기 중반 대동법을 계기로 가호세가 토지세로 완전 전환했으며, 18세기 중반 균역법을 계기로 인두세의 일부분이 토지세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거의 모든 부분의 조세가 토지를 기준으로 산정 할당되는 도결이라는 형태로 징수되었다. 토지세로의 집약화는 조세제도 내에서 신분적 속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지배층의 자의적인 수탈 가능성 또한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농민의 납세부담은 증가 일로에 있었지만 조세제도의 형식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조세를 직접세 위주로 파악하고 납세자의 의무에 상응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새로운 조세제도를 만드는가, 마지막까지 전근대적 폭력성을 기반으로 하여 납세자의 권리를 억누르면서 의무만을 강요하는 조세제도를 유지하는가의 선택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조선사회 최말기까지 지배층은 후자를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시대적 책무를 저버리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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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사회/문화/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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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상징세계 - 구미례
제3장
꽃
3. 무궁화
3) 꽃으로서의 무궁화
(1)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꽃
무궁화는 이른 새벽에 꽃이 피었다가 오후가 되면서 오므라들기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진다.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그의 시구에서 “무궁화는 하루 동안 스스로의 영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처럼 무궁화는 날마다 새로 피고 반드시 그 날로 지고 만다. 그러나 매일 새로운 꽃이 연속적으로 피어,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백여일 동일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의 특징이다. 무궁화의 화기가 짧다거나, 위에서 말한 백낙천의 시구절 등은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 나무의 화기를 말한 것은 아니다. 화기를 두고 볼 때에 가장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것이 무궁화이다. 하루에 보통 작은 나무는 20여 송이, 큰 나무는 50여 송이의 꽃이 피므로 100여 일 동안 피운 꽃을 합하면 한 해에 2천에서 5천여 송이의 꽃을 피우는 셈이니, 다른 화목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특유한 개화습성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른 새벽 태양과 함께 피어나 태양과 함께 지는 무궁화. 그날의 태양은 졌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매일 새롭게 꽃을 피우는 무궁화. 무궁화는 태양과 일맥상통하는, 태양과 운명을 같이 하는 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궁화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생과 역사를 상징하는 철학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유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일생은 짧기가 그지없다. 오늘의 꽃이 최선을 다하여 피고 지면 다음날, 또 다음날을 연이어 새로운 꽃들이 대를 잇는다. 마치 한 인간의 삶은 짧지만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듯이... 또한 무궁화는 질 때에 뒤가 어지럽지 않고 조촐한 끝맺음을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질 때는 색이 바래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따로 떨어져 지저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무궁화는 봉오리처럼 곱게 도로 오므라져 송이채 꼭지가 빠지면서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활짝 꽃을 피운 뒤 깨끗하게 끝맺음을 할 수 있는 삶. 우리는 무궁화를 통해 인생의 철학, 역사의 진리를 다시금 느껴볼 수 있다. 정인보의 시조 「근화사삼첩」은 무궁화를 노래한 3수의 시조이다.
신시로 내린 우로 꽃 점진들 없을쏘냐? 왕검성 첫 봄빛에 피라시니 무궁화를 지금도 너 돋 대하면 그제런 듯하여라.
저 뫼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세오리까? 천만년 무궁화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담우숙 유한코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이 둥두렷이 돌아올 제 옛 향기 일시에 피니 강산 화려하여라.
이 시조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울 때 겨레의 영원한 표상으로 나라꽃 무궁화를 점지하셨으며, 우리나라의 태고적 자연과 함께 변함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의 정신을 찬양하고, 무궁화의 그윽한 자태와 향기 속에 영광스럽고 평화로운 겨레의 미래의 노래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사라져 갈지라도 새로 살아나고 자라나서 길이 무궁한 빛으로 역사를 이어 가는 우리 겨레, 이 모든 겨레의 힘으로 또한 무궁히 뻗어나갈 우리나라. 무궁화는 유구한 역사와 관계를 그대로 표출시킨 꽃이다.
(2) 순결과 정열의 꽃
무궁화는 화려하거나 요염하지 않고 짙은 향기도 없다. 여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인 꽃이다. 품종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이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흰색의 꽃잎에 화심 깊숙이 붉은색이 자리잡은 단심 무궁화가 손꼽히고 있다. 그 깨끗한 흰 꽃잎과 깊숙이 또렷하게 자리잡은 붉은색 심문은, 가슴 속에 열정을 간진한 순결한 영혼을 연상하게 한다. 마치 먼 옛날 심신유곡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맑게 하고 가슴의 뜻을 가지던 화랑도의 무리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달빛 아래서 손에 손을 잡고 긴 댕기를 휘날리며 끝없이 강강수월래를 하던 이 땅의 순결한 처녀들인 듯... 조지훈은,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들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주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러워하는 삶”이라 하였다. 이러한 무궁화의 순결한 일편단심을 잘 나타낸 설화가 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글과 노래를 잘하여 많은 남자들이 사랑을 구애하여 왔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앞을 못 보는 남편이 있었고 그녀는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였으므로,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은 사람이 유혹을 해도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인을 탐내 오던 고을의 성주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그녀의 마음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음을 보고 강제로 여인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끝까지 명령에 굴하지 않자 성급한 성주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여인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여인은 죽으면서 자신의 시체를 집뜰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소경 남편이 있는 집 뜰에 묻어 주었다. 묻은 자리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은 삽시간에 그 집 뜰 안을 둘러싸고 말았다. 마치 남편을 보호하여 품안에 감싸안은 울타리처럼. 그 뒤 동네 사람들은 이 꽃을 ‘번리화(무궁화의 별칭)’, 즉 ‘울타리꽃’이라 불렀다. 한편, 중국의 「시경」에는, ‘안여순화’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 마치 무궁화와 같다는 뜻이다. 이어 시선 이백은, "함초롬히 피어난 섬돌 옆의 무궁화 온 동산 다 살펴도 이 꽃에 견줄 것이 없구려."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서는 무궁화를 이상향인 샤론의 장미, ‘ROSE OF SHARON’이라 하여 꽃 중의 꽃이라 칭송하고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궁화의 고아하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으나, 정작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취하여 무궁화의 참된 아름다움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3) 나라꽃으로 부적합한 이유에 대한 변
앞에서 무궁화가 국화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측의 이유를 살펴본 바 있다. 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에 분포한다는 점이다. 이 주장은 1950-1960년대의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보고된 것으로, 그 뒤 오랜 연구를 거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 바 있다. 유달영 박사는 함경도 등에 무궁화가 없는 것은 단지 심어 가꾸지 않은 까닭이며, 무궁화는 어느 땅에서도 잘 자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번식이 되는 강인한 꽃이라 하였다. 임채욱 선생은 이 점과 관련하여 무궁화를 보지 못한 북한사람들에게는 ‘무궁화 삼천리’가 넌센스가 된다는 의견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유로 오늘의 북한에서도 무궁화가 잘 알려져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198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음악제 ‘아시아음악연단’에서「무궁화 3형제」라는 노래가 공연되었다고 한다. 또한「무궁화 꽃수건」이라는 가극도 있으며, 의식행사 때 단상을 장식하던 꽃도 무궁화였고 소련인이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국화로 보기보다는 분단 이전의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꽃으로 인식하고, 그 상징성을 자기들도 유하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까지 분단상황을 떠나 겨레의 상징성으로 공유되고 있는 무궁화임을 다시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원산지가 인도이므로 외래식물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역시 역사적 기록과 고증을 통하여 잘못된 것임을 밝혀진 바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에서 살펴보았듯이,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토양에 맞아 2천여 년 이상의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자생하여온 꽃이다. 식물학계에서는, 무궁화의 원산지가 학명으로 미루어 시리아라고 해석되어 왔으나, 이에 대해 점차 의문이 제기되고 최근에는 인도, 중국, 한국 지방이 원산지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다는 점이다. 무궁화에는 진딧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된 육종으로 최근 진딧물 없는 무궁화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사실 난이나 장미 같은 꽃은 까다롭다 하여 어린아이 돌보듯 온갖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만, 무궁화는 세인의 관심은커녕 화단에서도 밀려나 관공서, 학교의 담곁에 묵묵히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단명허세하다는 평은 같은 현상을 놓고 나쁜 쪽으로만 본 극단론이다. 그것이 오히려 무궁화를 무궁화답게 하는, 우리 민족의 꽃으로서의 특성 중 하나임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점이다. 무궁화가 늦게 꽃이 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늦게 꽃이 핀다고 하여 그것이 어찌 흠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묵묵히 때를 기다려 다른 꽃들이 하나 둘 지고 난 다음,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줄기차게 피어나는 무궁화야말로 우리 민족성의 강인함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무궁화는 계절상 늦게 피지만 가장 부지런한 꽃이기도 하다. 흔히들 새벽 5시경에 피어나는 나팔꽃을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무궁화는 이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운다.
(4) 나라꽃 무궁화
이제까지의 글에서 혹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갖거나, 다른 적합한 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일가견을 가진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관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가장 적합한 말이 있다. “무궁화는 육안으로 보기보다는 심안으로 보아야 한다.” 윤극영 선생의 말이다. 꽃만을 보기보다는 그 속에 담겨져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정신과 역사, 그리고 도도히 흐르는 배달겨레의 맥락을 보아야 된다는 뜻의 이말은 오늘 우리가 새롭게 되새겨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처럼 우리 민족의 깊은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온 무궁화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해 왔고 자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민족의 꽃이 무궁화와 우리나라만큼 깊은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겠는가. 멕시코의 선인장, 그리스의 올리브, 캐나다의 단풍 등은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나라의 상징으로 그 국민이나 외국인이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스코틀랜드 같은 나라에서는 애국주의적인 전설 하나 때문에 엉겅퀴 같은 독특한 꽃을 국화로 사랑하고 있다. 즉 중세기 덴마크 군대가 침략했을 때 스코틀랜드의 엉겅퀴 숲에 매복하였다가 그 가시에 찔려 패퇴한 유래 하나만으로도 지역과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웃 일본도 어떠한가. 일본은 그들이 아시아를 재패할 때 발길이 닿는 곳마다 제일 먼저 벚꽃을 심었다. 일본은 그네들의 국화인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다닌다. 벚꽃의 특성과 일본인의 기질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는 무엇으로 우리 민족의 상징임을 말할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될까? 오히려 일제 때 왜곡된 무궁화에 대한 인식이 무의식 중에 전해 내려와, 무궁화를 하찮게 취급한 적도 없지 않으리라.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꽃이다. 오랜 역사를 두고 그러한 위치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끊임없이 꽃을 피워 온 무궁화. 우리가 잠시 그 존재와 의미를 망각했다 하더라도, 무궁화는 늘 그대로의 의미와 상징성을 간직한 채 우리의 곁에서 오늘도 묵묵히 꽃을 피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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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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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3
2. 삶을 위하여
나무 위의 집
우리가 워싱턴 D. C.로 이사했을 때 우리의 두 아들은 일곱 살과 아홉 살이었다. 뒷마당은 아주 작았지만, 다행히도 마당 한 가운데에 거대한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를 올려다보는 순간 나는 당장에 나무 위에다 오두막을 짓고 싶어졌다. 망치며 톱 다루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편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몇 번이나 거길 올라갈 것 같애? 처음 며칠은 거기서 살다시피 하다가도 이내 거들떠도 안 볼 거라구. 괜히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어."
몇 달 뒤. 나는 아직도 뒷마당의 떡갈나무를 올려다보곤 했다. 다시금 그 꿈이 되살아났다. 남편이 또 코방귀를 뀌었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몇 번이나 거길…."
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더 이상 얘기하지 말라구요."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는 또다시 나무 위의 오두막을 생각하다가 이번에는 동네 목수를 불러 견적을 뽑게 했다. 목수는 웃으며 말했다.
"부인, 전 땅에다 집은 지어도 나무 위에는 짓지 않습니다."
그래서 난 다시 그 꿈을 버렸다. 또다시 한 해가 흘렀다. 이제 큰애가 열두 살이고 작은애가 열 살이었다. 잘못하면 나무 위에 오두막을 지을 시기를 영영 놓쳐 버릴 수도 있었다. 난 남편에게 말했다.
"나무 위에 집 짓는 일 말인데요…." 남편이 또 말했다. "나무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서 우리집 애들이 과연…."
이번에는 내가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애들을 위해서가 아녜요! 나 자신을 위해서라구요! 난 아이들에게 나무 위의 집을 지어 주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단 말예요! 내 말 알겠어요?"
남편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결국 내 뜻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수소문 끝에 은퇴한 목수 폴 윌레스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집 떡갈나무를 보는 순간 내 꿈을 이해했고, 나무 위의 오두막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며칠만에 그는 마술사처럼 뚝딱거리며 떡갈나무 둥치 위에 동화 같은 집을 지어나갔다. 마침내 집이 완성되었다. 마룻바닥에 마지막 못질을 하고 나서 윌레스 씨는 자신이 탄생시킨 멋진 오두막집 안에서 행복에 겨워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순순한 기쁨의 춤이었다. 나는 춤추는 윌레스 씨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그리고 나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함께 춤을 추었다. 남편의 말이 옳았다. 아이들은 나무 위의 오두막집에 몇 번 올라가 보고는 이내 시들해졌다. 사실 우리는 1년도 채 못 가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으며, 그 집에 이사온 새 주인은 나무 위의 오두막을 당장 철거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춤을 추었었지 않은가. 나무 위의 집은 사라졌지만, 춤을 추던 그 기억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으리라.
이것으로 나무 위의 집에 대한 얘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완성하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때 목수 윌레스 씨의 딸이 우리집에 전화를 걸었다. 윌레스 씨가 교통 사고가 나서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윌레스 씨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우리가 사진을 가져왔다는 얘기를 하자 마침 병실에 왔던 간호사가 말했다.
"오, 그래요? 저도 그 유명한 나무 위의 집 좀 보여주세요."
윌레스 씨가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그 오두막에 대해 얘기했던 것이다. 우리는 떠나면서 윌레스 씨가 누워 있는 침대 옆 벽에다 그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나무 위의 집이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 낸시 코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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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무엇입니까?
칼리프 압두라만 3세(891~962)는 49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다스렸다. 그 제국의 1년 동안의 수익금은 336,000,000달러였으며, 당대의 어떤 나라보다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그는 제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6,321명을 뽑아 모두 부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618명의 자식을 두었다. 한마디로 그는 현명했고 화려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그리고 2,600,000,000달러 정도의 돈을 축적했었다. 사후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49년 동안의 부귀 영화를 누렸던 나의 재임 기간 중에 완전한 행복을 느꼈던 날들을 손으로 꼽아 보았는데 불행히도 단 14일밖에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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