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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667호
단기 4342. 11. 8 (음력 9. 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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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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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6.15통일문학상 공모전
공 모 요 강
공모부문 - 부문 : 시, 단편소설, 수필, 독서감상문 - 주제 : 민족화해협력, 평화통일, 남북교류,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한 내용이 포함된 주제
응모분량 - 시 : 2편 이상 - 단편소설 :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 분량 - 수필 :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분량 - 독서감상문 :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 분량
※ 응모한 작품은 반환되지 않습니다. ※ 이메일 접수 작품만 유효하며, HWP파일 또는 TXT파일만 접수합니다. ※ 작품에 이름(본명), 주소, 연락처, 이메일, 응모분야 필히 기재 응모자격 : 제한없음(단, 기성작가 제외) 일 정 : 응모기간 : 2009년 12월 1일 ~ 12월 15일
발 표 일 : 2009년 12월 30일 시 상 식 : 2010년 1월 6일 제 출 처 : 615award@gmail.com 문 의 : TEL 02-364-6155 / 공식블로그: http://blog.daum.net/615award
시상내역 (총 530만원) - 6.15통일문학상(1명) : 200만원, 상패 및 부상 - 우수상(4명) : 단편소설 1명 80만원, 상패 및 부상 시, 수필, 독서감상문 각 1명 50만원, 상패 및 부상 - 장려상(10명) : 10만원 및 부상
※ 수상작에 대한 저작권은 발표일로부터 1년간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가 보유하고 그 이후 작가에게 귀속합니다. ※ 심사위원은 심사발표시 명단을 공개합니다. ※ 수상자는 공식블로그를 통해 발표하며 개별통지합니다. 독서감상문 도서목록 - 옥중서신. 1, 2 : 김대중이 이희호에게(1) 이희호가 김대중에게(2) - 편지에 새긴 사랑 자유 민주주의 [2009. 시대의 창] - 행동하는 양심으로 - 독재와 나의 투쟁 [2009. 금문당출판사] - 나의 길 나의 사상 [2009. 한길사] - 내가 사랑한 여성 [2009. 에디터] - 김대중 잠언집 - 배움 [2007. 다산책방]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개정판) [2005. 김영사] - 21세기와 한민족 [2004. 돌베개] - 나의 삶 나의 길 [1997. 산하] 주최 : 6 .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 후원 : 김대중평화센터/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사)한국작가회의/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공식팬클럽 DJ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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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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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든 비극 중에서 최악의 비극은 젊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일흔 다섯 살까지 살지만 한번도 진정으로 살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 마틴 루터 킹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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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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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지)
책을 마음의 양식이라거나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한다. 흔히 가을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철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을에 감성이 가장 예민해진다는 뜻이지, 독서 자체가 가을에만 적합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여름휴가 때도 얼마든지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크기에 따라 국판, 신국판, 사륙배판 등으로 나뉘고, 표지 형태에 따라서는 서양식으로 딱딱하게 표지를 만든 양장본과 전통적인 방식의 종이로 표지를 만든 지장본으로 나뉜다. 발행 방식과 내용 구성에 따라서는 단행본과 잡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내용과 부정기적인 발행 방식은 단행본과 별 차이가 없으나 편집 방법이나 책의 크기가 잡지와 유사한 형태가 있으니, 이를 ‘무크(지)’(mook紙)라 이른다.
‘무크’는 ‘잡지’를 뜻하는 ‘매거진’(magazine)과 ‘책’을 뜻하는 ‘북’(book)이 합쳐진 말이다. 어떤 기록을 보면 이 말은 일본에서 만들어졌는데(뭇쿠 ムック),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이 말 대신에 ‘매거북’(magabook), 또는 ‘부커진’(bookazine)이라고 한다.
무크지는 1970년대의 경제위기 때 선진국에서 출판 시장의 타개책으로 등장하였는데, 주로 컬러사진을 이용하며, 대개 시리즈물이나 기획물, 계간지에 자주 쓰인다. ‘부정기 간행물’로 순화되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독수리
“가락국기에, 수로왕 3년 완하국 함달왕의 아들 탈해가 가락국의 왕위를 뺏으려 가락에 오니 수로왕이 거절하고, 탈해와 도술로써 시합을 하는데 그가 매면 왕은 독수리가 되고 그가 참새가 되면 왕은 새매로 변신하므로 탈해가 항복하고 달아나니 왕이 수군 500척을 내어 신라 경계까지 내쫓았다.”(삼국유사에서)
독수리는 매보다 한 수 위다. 힘이 있는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앞서고 다스리게 된다. 이게 자연의 섭리이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공평하지 않음이 대자연의 질서다. 얼핏 보기로 힘센 것이 반드시 강한 것만은 아니다. 낱개로 보면 메뚜기가 사자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메뚜기 떼가 달려들면 잠자던 사자는 순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힘이 있는가를 한가지로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독수리의 갈래로는 대머리독수리와 참수리, 검독수리와 흰꼬리수리, 흰목독수리와 흰죽지수리, 항라머리검독수리와 물수리가 있다. 날개를 폈을 때 약 1~3m에 이른다. 온몸이 어두운 갈색을 띠며, 뒷머리에는 엷은 암갈색의 부드럽고 긴 솜털이 있다.
독수리의 독은 대머리 독(禿)을 쓴다. 독수리의 생김새는 매나 수리와 비슷하고 뒷머리가 벗어지는 수가 많다. 한편 수리는 으뜸이란 뜻. 따라서 독수리란 ‘대머리 모양의 으뜸 새’다. 독수리가 되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의 영계를 날아다니고 있다.
정호완/대구대 명예교수·국어학
유해 식품, 위해 식품
어느 때보다 식품 안전이 국민의 관심사가 되면서 '유해 식품' 또는 '위해 식품'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둘 다 가능한 표현일까. '유해(有害)'는 해로움이 있다는 뜻으로 '유해 식품[환경, 물질]' 등처럼 쓰일 때 잘 어울린다. '해로운 식품' 등으로 말이 잘 된다. '위해(危害)'는 위험한 재해, 특히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해나 위험을 의미하며 '위해를 가하다[느끼다]' 등과 같이 쓰일 때 잘 어울린다.
'위해'는 생명에 직접적이고 급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유해'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위해 식품[환경, 물질]'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적이고 급박하진 않다는 점에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식품위생법에는 '유해 식품' 대신 아예 '위해 식품'으로만 표기돼 있다. 청소년보호법과 근로기준법에는 '유해 환경' '위해 환경', '유해 물질' '위해 물질'이 뒤섞여 나온다.
이들 법률 용어 때문에 '위해 식품' 등 자연스럽지 못한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식품 관련 법률을 정비하겠다고 하니 '유해 식품' 등 적절한 표현으로 고쳤으면 한다.
그러기(그렇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날씨에 손끝이 살짝 시리다. 그렇기 때문일까? 11월엔 따끈따끈한 호빵이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아이의 손에 들린 호빵 하나가 주는 행복은 비단 맛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와 '그러기 때문에'를 어떻게 구분해 써야 할지 난감하다는 사람이 많다. 이는 '그러다'와 '그렇다'의 차이를 알면 쉽다. '그러다'는 상태ㆍ모양 등이 그렇게 되게 하다, '그렇다'는 상태ㆍ모양 등이 그와 같다는 뜻이다. 즉 '그러다'는 동사로 행위를 나타내는 말을, '그렇다'는 형용사로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받는다.
"입김을 '하-' 불면 시린 손끝이 따뜻해진다. 그렇기 때문에(따뜻해서) 입김을 불며 언 손을 녹이는 사람이 많다" "'후-'하고 입김을 불면 공기 흐름이 빨라져 열을 빼앗는다. 그러기 때문에(열을 빼앗기에) 뜨거운 국물을 마실 땐 '후-'하고 분다"처럼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둘 다 쓰이는 경우도 있다. "그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기(그렇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에선 경험했기에를 받아 '그러기'로도, 문장(전체 상황)을 받아 '그렇기'로도 쓸 수 있다.
뒷자석, 뒤 자석, 뒷번호, 뒤 번호
승용차의 뒤에 있는 좌석이나 극장의 좌석 등을 얘기할 때 '뒤 좌석'이라고 해야 하나, '뒷좌석'이라고 해야 하나.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26번' 한 뒤 그 다음 번호의 학생을 부를 때 '뒤 번호'라고 해야 할까, '뒷번호'라고 해야 할까. 이처럼 '뒤'가 붙는 말을 적어야 할 경우 한 단어로 봐야 할지, 두 단어로 봐야 할지 띄어쓰기나 사이시옷과 관련해 고민이 많다.
'뒤' 다음에 오는 말이 한 글자인 경우, 예컨대 뒷글, 뒷말, 뒷일, 뒤차, 뒤쪽 등은 문제가 없다. 또 뒷거래, 뒷소문, 뒷얘기, 뒷정리 등은 사전에 실려 있으므로 그대로 따르면 된다. 하지만 '뒷좌석''뒷번호'는 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이들을 두 단어(뒤 좌석, 뒤 번호)로 보는 것이 현재의 어문규정에 맞긴 하지만, '뒤 좌석''뒤 번호'는 '뒷좌석''뒷번호'로 적는 것이 낫다고 본다. 두 단어로 보기보다는 한 단어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사이시옷이 붙은 단어의 발음원칙과도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어디까지 인정해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용 빈도를 기준으로 해 많이 쓰이는 것들은 올림말로 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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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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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시를 읽는 삶의 풍경들 "공감"[교양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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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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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독 - 조영희
풍경소리 독경소리 산바람을 휘감고 고요도 인적도 귀를 열어 잠잠한데 여승의 목탁소리는 산을 울려 고독하네
까투리 산비둘기 세속에서 따라왔나 산사의 기왓장만 콕콕 찍는 외로움 어느새 빗방울 똑똑 신발 가득 고여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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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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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
3. 진정한 삶을 산 사람들
문제투성이
19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영원한 베스트셀러(적극적인 사고의 힘)의 저자 노만 빈센트 필은 95 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랑과 평화,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둘러싸여 집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노만 빈센트 필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그가 벌인 적극적인 사고 갖기 운동은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의 강연, 연설, 라디오 방송, 책을 접한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곧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이 결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다음부터 노만은 우리에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두 가지 선택이 존재함을 상기시켰다.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기분을 갖든지 아니면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든지. 난 아직도 노만이 분명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왜 당신은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는 쪽을 선택하는가?"
나는 노만을 1986년 7월에 처음 만났다. 내 책을 펴내는 출판사가 나와 노만에게 공동으로 책 한 권을 집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인연이었다. 첫 만남 이후 노만은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를 얻는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문제를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노만은 문제를 살아 있음의 증거로 여겼다. 그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 그가 들려준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이 얘기를 나는 글에서 자주 인용해 왔다.
어느 날 나는 거리를 걷다가 내 친구 조지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고뇌에 찬 표정으로 미뤄 볼 때 그가 그다지 인간 존재의 환희와 풍요로움을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조지는 기분이 아주 밑바닥이었다. 자연히 나는 그에게 물었다.
"조지, 잘 지내는가?"
흔히 오가는 인사인데도 조지는 아주 심각하게 날 쳐다보더니 자신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15분에 걸쳐 설명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침내 나는 그에게 말했다.
"조지, 자네가 절망에 빠져 있는 걸 보니 나도 유감이군. 어떡하다가 그런 지경까지 됐나?" 그가 말했다. "내가 가진 문제들 때문이지. 자고 나면 온통 문제투성이거든. 난 내 문제들에 지쳤어. 만일 자네가 내 문제들을 모두 제거해 준다면 그 대가로 5천 달러를 주겠네."
난 그런 제안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좋은 해결책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제 내가 어떤 장소에 갔더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더군.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어. 자네도 그곳에 가 보겠나?" 조지가 당장 말했다. "언제 갈 수 있지? 그곳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가서 살기에 어울리는 곳처럼 들리는군."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자네를 그곳으로 안내하겠네. 그곳은 다름 아니라 우드론 공동묘지일세. 내가 아는 한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들뿐이거든."
나는 이 일화를 매우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올바른 시각을 심어 준다. 나는 노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수없이 들었다.
"당신이 만일 아무 문제도 갖고 있지 않다면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무덤으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당신은 모르지만 이미 무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정말로 당신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당장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달려가라. 그리고 문을 닫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께 기도를 올려라. '왜 그러십니까, 주님? 절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에게 어서 몇 가지 문제를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 켄 블랜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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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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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바꾼다 - 송천호
제3장 사랑하는 나에게
행복과 불행
행복은 만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 속에 있다. 아무리 행복한 여건이 주어져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은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기준을 무엇에 두고 있는가? 타인들만큼 가지지 못해서, 타인들만큼 배우지 못해서, 타인들만큼 좋은 직업을 갖지 못해서, 그러나 그것들은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있어 행복과 불행은 지금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스스로의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
고통스럽고 불행하다는 기준을 타인들에게 두는 자세로써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겉으로만 드러난 타인들의 행복을 보고 자신의 행복보다 낫다는 판단을 서슴없이 한다면 행복도 서슴없이 달아나 버리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무작정 슬퍼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단칸방에서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셋방살이 하고 있는 자신을 불만스럽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다.
참 행복은 주위의 상황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좀 못마땅하더라도 감사히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타인들보다 적게 가졌더라도 자신보다도 더 적게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거리는 노력을 기울일 때 찾아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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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동서양고전/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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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2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서양문학
메데이아(Medeia) -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
14년간의 평화에 뒤이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서 아테네 문명의 와해를 감지하며 쓴 메데이아 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의 사회적위치와 감정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남녀 사이의 대립적 관계와 사회제도의 기본적 불안정성을 천착하고 있다. 도시국가라는 문명세계가 평소에 가까스로 억제할 수 있었던 감정이, 갑자기 격렬한 힘으로 폭발하여 인간과 국가를 파괴하는 모습을 담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석이고 반응일 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가 이루어낸 사회구조나 문명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생애와 작품활동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는 천성이 명상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고독한 성격이었음이 전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한 성격은 그의 작품이나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표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두 번 결혼하였으나 상대는 한결같이 음란스런 여자들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여성을 비꼬는 말이 많다. 때문에 그는 미소지니(여성혐오)의 대명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여성심리의 예리한 통찰자였다. 소재는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신화. 전설에서 빌려왔지만 여러 신과 영웅은 비범한 존재가 아닌,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남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메데이아와 히폴리토스 만 해도 등장인물의 정념이 다소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하지만 가정 내의 비극에 지나지 않고, 이온 같은 작품도 본질적으로는 오늘날의 홈드라마와 같다. 여성의 굴절된 심리를 묘사하는 그의 수법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소포클레스까지의 그리스 비극의 경향, 즉 신과 영웅을 주제로 하지 않고, 신이 내리는 정의로부터 인간중심의 도덕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의 희곡은 문제를 다루는 희곡이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판을 하였으나 합리성을 찾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 중 바카이의 주인공인 테베 왕 펜테우스는 미친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기지만, 작가 자신도 마케도니아에서 야밤에 미소년 집을 찾아가던 중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한다. 총 92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19편이고, 그중 대표적인 것은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헤카테, 헬레네, 트로이의 여인, 바카이 등이 있다.
그리스 3대 비극시인과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시켜 이들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했고, 적군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에서 소년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하였으며, 에우리피데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군이 승리를 쟁취하던 날 태어났다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 3대 비극시인을 흥륭. 전성. 쇠퇴기의시인으로 보아,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감보다 오히려 신이 극의 주역이 되고, 인간은 신의 의지의 구현도구로서 결국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귀의한다. 반면, 페르시아 전쟁에 뒤이은 조국 아테네의 가장 영광된 시기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하여 아테네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불안한 시기를 겪어야 했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신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되고 있다. 반면, 조국의 영광스런 순간을 단지 전해들었을 뿐인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주요내용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인 코르키스왕 아이에테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이다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메데이아 라는 이름은 '빈틈없는 교활한'의 뜻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메데이아는 이국의 땅 코린토스에서 이 나라 왕가의 딸과 약혼한 남편 이아손에게 버림받을 처지에 있다. 한때 그녀는흑해 동부해안의 고향 콜스키에서 황금양털을 구하려고 그리스 군사들을 데리고 원정온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죽이면서까지 이아손을 돕고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그런데 이아손의 고국도 안주의 땅이 되지 못하여 겨우 이곳으로 낙향해 있는 지금 눈앞에 사랑의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구하게 되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고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것이다. 때마침 찾아온 구면의 아테네 왕에게 부탁하여 도피처를 확보한 그녀는 배반당한 사랑과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증오에 불타는 복수를 계획한다. 우선 독약을 바른 예복과 황금의 관을 자기의 아이를 시켜 공주에게 선물로 보낸다. 독약에 취하고 관에서 뿜어내는 불길로 불투성이가 된 공주는 그녀는 돕고자 한 부왕과 함께 불타 죽는다. 이어 자기 자식의 목숨도 끊으려 하지만, 미소짓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흔들려, 모성애와 복수의 악마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한다. 그러나 마침내 분노가 이성을 누름으로써 그녀는 칼을 잡아 자식을 죽인다.
메데이아는 죽은 자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지붕 위에 선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은 합창단이, 다음에는 메데이아의 남편 이아손이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에게 극악무도한 잔학행위를 한 메데이아에게 복수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신들은 전혀 메데이아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태양의 신은 전차를 내려보내 메데이아를 개선장군처럼 아테네의 피난처로 태워다 준다. 남편에 대한 복수로 아이를 죽일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드디어 정념의 힘에 꺾여 죽이는 장면의 묘사는 시인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그로 인해 이 극은 정념의 비극 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내면의 비극적인 갈등을 묘사하는 데에 뜻을 둔 이 시인에게 어울리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의 결말을 두고 불합리하다고 비난했는데, 그러나 그 불합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아닐까? 작가의 비극이 지닌 구조는 세련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우주 속에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선정적인 것을 피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과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 비극에 있어서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는 비극의 완성자로 본다면, 에우리피데스는 많은 면에서 정통을 벗어난 이른바 데카당스 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합창대의 처리방법을 비롯하여 구성면에서나 인물의 취급면에 있어서나 선인들과의 수법차이가 현저하다. 당시로서는 극단적으로까지 사실적인 수법을 썼고, 다분히 아이러니를 포함한 합리적인 해석으로 전통적인 신화와 전설에 새로운 모습을 부과하려 했다. 그 결과 신이나 영웅이 천상에서 일상의 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내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생전에 받은 불평의 주된 원인이 되었지만, 근대인이 그의 예술에 공감하는 것은 이 허황된 세계가 현실적인 세계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있어서보다 사후에 새로운 평가로 각광을 받은 작가로서 3대 비극시인 중 그는 가장 연소자였고, 특히 인간적인 갈등을 주제로 많은 부분을 할애한 작가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 자신의 생활은 매우 비사교적이었으며, 자신이 소유지인 동굴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는 사색적이고 고독한 생활로 일관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다른 작가들보다 작품을 적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래 지속되어 현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후에 그의 극이 붐을 이루어 부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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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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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칭찬하는 사람, 헐뜯는 사람 -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4부 - 창조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
진정한 여행을 하는 사람
여행은 한 개인이 자신을 찾고 정체성을 세우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는 긍정적인 힘이다. 서양의 역사는 접촉, 투쟁, 교역과 여행에서 탄생한 새로운 관계들의 결과이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면 여행을 통해 얻는 창조적인 능력과 풍요로움이 역설적으로 상실과 고통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율리시즈나 길가메시(수메르 신화의 영웅―옮긴이)의 신화적인 여행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율리시즈는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고 전리품과 동료들을 모두 잃고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된다. 신에게 부름을 받은 길가메시는 자기 왕궁을 버리고 세상 끝에 도착했지만 불멸도 젊음도 얻을 수 없었다. 중세에 떠돌이 기사들은 궁정을 떠나 혼자서 괴물과 거인과 고통과 공포가 기다리고 있는 신비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용기와 성장을 보이기 위한 여행은 마음 든든한 모든 것들, 즉 자기 집, 잘 알려진 일상의 관계들이 주는 확실성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기를 요구한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사회적인 정체성을 잃고, 당황하다가 다시 자신을 찾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태어나길 요구받는다. 따라서 서양의 전통에서 여행은 표면적이고 불확실한 자신을 버리고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을 탐하는 것이다. 진정한 가치에 도달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알기 위해 자신의 결점, 자만심, 허약성, 편견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보편적인 계획된 휴가 여행은 이러한 이상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물리적인 이동은 있지만 모험, 불편함, 다양한 것들과의 접촉, 정처 없이 떠도는 일은 극히 줄어들었다. 휴양지에서 사람들이 찾는 것은 문명과 안락함밖에 없다. 발견은 가이드가 안내해 주는 관광으로 바뀌고, 경쟁은 스포츠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행의 이상적인 의미는 다른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 하나는 이민을 가거나 먼 곳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 우리 이탈리아에 온 다국적 기업의 관리자들 및 전세계에 뻗어나간 그 다국적 기업에 파견된 우리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습관을 뿌리채 뽑아버리고 다른 이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 세관의 장벽이 무너지면, 이런 시련에 맞설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유럽의 건설을 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유형의 여행도 있다. 이것은 공간적인 여행이 아니라 지식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여행이다. 나는 장기간 외국의 주요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간 학자들, 경영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아이 때처럼 책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특권, 지위, 안정성을 포기했다. 이것 역시 정화와 겸손의 훈련이다.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 오만함을 벗어버린 채 모든 것을 거리를 두고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여행의 진짜 효능은 여행하면서 만나는 이런저런 것들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익숙해져 있는 우리 자아에서 탈피하는 데에서 우러나온다. 새로운 것들을 보는 것만 중요한게 아니다.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이가 되어, 사회적으로 인정을 잡아 비대해지고 탐욕스러워진 우리의 자아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 가장 진실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고독한 순간이다.
꿈꿀 줄 아는 사람
예술가의 위대함은 그들을 후원해 주는 사람의 위대함에 달려 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다. 그에게 화가가 되라고 부탁하고 그를 초빙해서 시스티나 성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한 사람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재능을 직감했고, 그에게 도전을 던졌고, 그 도전을 뛰어넘도록 자극했다. 창조적인 시대에는, 그리고 한 시대의 창조성이 놀라울 정도로 집중되는 그런 장소에서는 모두들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요구한다. 이미 알려져 있고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특이한 것, 또는 불가능한 것까지도 전부 해내도록 요구한다. 상식, 습관, 평범함과 충돌하는 그 어떤 것, 보통을 넘어선 뭔가를 요구한다. 창조적 과정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그들은 그것은 과대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성 베드로 성당을 세울 계획을 했던 교황들은 세상의 그 어떤 성당도 견줄 수 없는 그런 성당을 원했다. 피라미드처럼 높지만 그보다 수백 배 아름답고 건축 과정 역시 수백 배 복잡하고 힘든 성당을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이런 요구는 미켈란젤로에게 도정으로 작용했다. 그는 공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들과 완전히 새로운 구성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문제들이 그의 창조성을 자극했다. 우리가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이다.
창조적인 시대에는, 그리고 창조성이 집중된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현재 능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를 제시한다. 그 문제가 풀리면 거기서 풍요로움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잉여물이 생기고 잔고가 남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 열심히 일하고 전력을 다하며 자시 자신 및 다른 사람들과 겨룬다. 기존의 지식이나 과거에 이루어 놓은 것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다. 가능성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능력은 설정된 목표와 비례해서 커진다. 우리 세기는 미국인들의 창조성에 지배받아 왔다. 소비재의 거의 전부가 미국에서 발명되었거나 미국에서 대량생산되었다. 기업가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환상과 욕구를 해석해 내려고 애썼다.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엘리트들은 변화를 두려워했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자동차를 주려는 포드의 생각은 한때 미친 생각이거나 어리석은 생각으로 간주 되었다. 오랫동안 위대한 기술 혁신들은 <미국적인 것>, 유치한 것으로 생각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애니메이터 팀들에게 일을 시켜「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만화 영화로 만든 월트 디즈니의 생각도 마찬가지 취급을 당했다. 지식인의 관점에서, 정치가의 관점에서, 유럽경제 학자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낭비였다. 할리우드가 엄청난 스펙터클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인기 스타들을 만들어냈을 때도 유럽 사람들은 똑같이 비웃는 태도였다. 이탈리아에서는 할리우드를 <꿈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부를 때 은근히 경멸하는 감정을 보태서 말한다. 배우들은 꿈속의 인물이므로 스크린 밖에서도 동화나 신화처럼 살아야만 했다. 할리우드가 신경을 쓴 것은 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집이었다. 그들을 위해 의상, 집, 자동차, 적절한 연인들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것은 대중들이 동일화를 할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곳이 바로 소비의 모델이 쏟아져 나온 것이며, 이 모델들은 조금씩 조금씩 대중적인 것이 되어갔다.
미국인들은 꿈을 자원으로 생각했다. <꿈꿔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미국의 슬로건이 있다. 유럽에서 우리는 이처럼 중심점을 옮겨 꿈을 강조한다는 것이 독특한 신호이자 창조적인 시대의 상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창조성이 우리 시대를, 대중을, 기업을 버리고 떠났을 때 우리는 인간 존재가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 곧 사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믿음은 인간의 꿈에 대해, 그 가능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다. 그 뒤를 이어 조심스럽고 믿지 못하고 의심 많고 탐욕스러운 자세가 따랐다. 각자 될 수 있는 한 조금만 베풀고, 마찬가지로 남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적다. 원대한 계획을 마음 속에 그리지도 못하고, 그것을 믿지도 않고, 그런 계획을 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기업가와 창조적인 인간 대신에 의심 많고 회의적인 관료가 자리를 차지한다. 지식인들은 창의적인 것들을 반대하고, 사람들이 훨씬 정직하고 훨씬 단순하고 낭비도 별로 하지 않았던 지나간 시절을 회상한다. 이탈리아의 창조성도 언제나 이런 정체된 비관주의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다. 1960년대에는 컬러 텔레비전에 반대했다. 라 말파 패거리들은 컬러 텔레비전 방영을 연기시켰는데, 그게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영화의 주역들이 전세계 사람들이 꿀 수 있는 꿈을 생산해 내기를 포기 했을 때 이탈리아 영화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놀라울 정도로 지적이고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당연히 뛰어난 성과를 거둘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들은 괜찮은 결과를 거두고 성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어떤 제도 안에 자리를 잡고는 잘 알려진 길을 따라가고 만다. 새로운 형식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별로 지성적이지도, 똑똑해 보이지도, 능력 있어 보이지도 않지만 실제로 비범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험은 학교에서의 1등이 인생에서도 1등은 아니라는 말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실제로 학교에서의 성공은 직업적 성공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형태의 지성이 이미 학교에서 모습을 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는 체계적인 지성인데 이런 지성을 지닌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순응주의자이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반대로 내부에 불안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한다. 이런 학생은 자기대로의 내적 리듬이 있기 때문에 절대 선생님들의 리듬을 완벽하게 따라갈 수가 없다. 그는 이해할 수 없게 지체하다가 어지러울 정도로 속력을 낸다. 이것은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 그 성질상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창조성은 언제나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
하지만 창조성에도 처음에는 동조하고 믿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근본적으로 창조적인 사람은 거의가, 절대 의심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의 깊고 기꺼이 남을 도우려고 하며 꾸밈이 없다. 그리고 속으로 불협화음과 모순을 찾아낸다.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그래서 주제로 되돌아가 거듭 다시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다른 가능성이 그의 머리에 떠오른다. 이런 과정에 있는 그를 보면 무감각하고, 생각에 잠겨 있어 멍해 보인다. 그는 그러다가 갑자기 해결책을 찾아낸다.. 창조적인 사람은 생활 속에서 환멸과 회의, 불확실함과 혼란에 맞닥뜨린다. 질서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미리 정해진 방향을 따라 움직이고, 어디서 출발해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런 불확실함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우연, 모험,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여지를 주지 않고 모든 요소들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이 예술가라면 공인된 양식을 따를 것이다. 신문 기자라면 대중들이 기대하는 것을 말하려고 애쓸 것이다. 학구적인 학자라면 흥분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번 계획을 세워 놓으면 외부 상황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디까지나 그 계획을 따를 것이다. 모든것이 그 언제든지 질서 정연해야만 하니까. 하지만 창조성을 위해서는 자신 안에 혼란과 무질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창조적인 사람은 책을 쓰던 중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쓰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을 쓸 수 있다. 창조적인 기업가는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시장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계산을 모두 다시 하고 필요하다면 계획을 수정한다. 이것은 끈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끈기는 충분하고 넘치게 있지만 절대 타성에만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이미 결정된 것을 존중하기 위해서만 일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창조성은 또한 모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용기를 필요로 한다. 모험은 현실적인 위험을 의미한다. 실수 할 위험, 길을 찾지 못할 위험 말이다. 결과가 정말 불확실할 수도 있고 좋지 않게 끝날 수도 있다. 창조적인 기업가는 실제로 자신의 운명을 모험에 건다. 이 때문에 계속 나타나는 끝없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완전히 자신을 바친다. 도덕적 지적 자원을 남김없이 모두 다 써버린다. 창조성의 핵심은 아주 강한 질서 성향과, 질서를 지배하고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재구성하기 위해 혼란과 무질서에 맞서는 능력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있다. 그저 단순하게 똑똑하고 무질서하며 표면적인 사람, 가짜 창조성을 내세우는 사람과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차이점은 그가 질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을 철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구별이 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깊이 들어간다. 깊이 들어가면서 모순과 부족함을 찾아낸다. 이와는 반대로 표면적이고 얄팍한 사람은 끊임없이 정신을 딴 데로 돌린다. 그는 새로운 유행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성공한 사람을 흉내내고 상투적인 말들을 사용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대로 되풀이 한다. 계속 변하지만 그 변화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질서한 사람은 창조성을 서투르게 흉내낸 사람이다. 창조성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솟아나게 한다. 그것은 전체, 조화, 통합을 지향한다. 무질서한 사람도 통합을 꿈꾸지만 세부 사항 속에 빠져 계속 길을 잃는다. 그는 분주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또다른 유형은 가짜 창조자는 비판을 위한 비판가이다. 그가 보기에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다. 그는 자기 의견을 표명하고, 맹렬히 비난하고, 폭로하고, 쓰러뜨린다. 그는 결점을 발견하고자 그릇된 행위를 폭로하고 모순을 증명할 때에만 기쁨을 느낀다. 그 역시 건설할 줄은 모른다. 뭐든 조각내 버리고 산산히 부서뜨린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부수는 것이니 그에게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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