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2. 땅과 존재
2-7. 스승과 푸닥거리
'선생의 뒤는 개도 먹지 않는다' 고 한다. 인간적인 접촉을 바탕으로 하여 젊은 학도들을 지도하느라 속을 태우다 보니 그들의 뒤는 개도 먹지 않게 됐다는 속설이 생긴 듯하다.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생활을 끊임없이 되 돌아보고 미래지향적으로 자신을 힘써 갈고 닦아야 한다. 그가 이루는 일체의 가르침은 원천적으로 그가 갈고 닦은 학문과 인격의 수준을 넘을 수없기 때 문이다. (중용,,의 말씀에도 '성실한 것은 하늘이요,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길이다'라고 하였는바, 쉼 없이 흐르는 냇물처럼 선생은 힘이 자라는 데까지 옆을 돌아 보지 말고 앞으로걸을 일 이다. 자기들은 제 아들 딸올 잘 이끌어 주지 못하면서, 선생은 마땅히 자기 아들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선생의 역할에 대한 학부모들의 이러한 기대를 선생들은 저버릴 수가 없고, 그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꾸지람의 화살도 당연한 듯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한민족의 전통으로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선생의 역할에 상당한 무게를 두어 왔기 때문에, 서구화한 지금에 와서도 선생에 대한 그러한 기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생산적인 방향으로만 승화시켜 나간다면 이런 문화적인 맥은 그 어느 겨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흘륭한 정신적 전통이라고 본다.
가르침의 바탕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일깨우며 학습자의 창의력을 블지름으로써 전 인격적인 인간의 꿈을 키워 주는 데 있다고 본다. '참'이란 동사 '차다[滿]'에서 갈라져 나온 파생명사이고, 거짓'은 거죽 또는 겉[表面]에서 나온 말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참이 없는 교육, 그런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올까. 혹 엉터리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참된 가르침을 바라며 그런 욕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는 선생 자신이 거짓을 물리치며 잘못된 일을 과감하게 떨쳐 버려야 한다. 그는 늘 깨어 있기를 향한 몸부림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워서 제대로 익은 향기로운 가르침에 가까이 가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흘륭한 선생을 그리워하며 기린다. 어렸을 때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잊을 수 없듯이, 마음 속에 깆이 아로새긴 선생님의 가르침은 깊은 샘물과 같아서 세월이 흘러도 마를 줄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움이 되어 푸른 강물처럼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라는 언덕에 굽이쳐 흐르게 된다. 그리움이 머무는 공간과 시간을 만드는 사람, 선생은 특히 젊은이의 생애에 있어 이정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어두움을 밝히기 위하여 등과 기름을 마련한다. 행여 그 등블이 꺼지지 않나 하여 마음을 졸인다.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 교원. 사부(師舊). 스승'이라고 한다.'스승'은 선생을 높이는 말로, 아무 데에나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선생' 이란 호칭은 아주 많이 쓰이는데, 저 유명한 공자도 선생이었고, 또 선생이면 그만이다. 이율곡 선생 흑은 이퇴계 선생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지면서 일정하게 특수한 사람에게 쓰던 말이 아주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마따나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卽心是佛)'이니, 누구든지 도리를 깨달아 알면 곧 선생이 되는 것은 그럴 듯하지 많은가.
옛말에 '스승'은 '무당<두해>, 선생 <능엄>, 고덕한 승려[화상(和尙) ; <석보상절>, 왕<유씨물명고>' 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소리가 나는 형태로는 '고덕한 승려'라는 뜻의 '사승(師僧,중국어 발음으로 스승)'이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와 그 역사의 산물이란 관점에서 볼 때, 더 가까운 말은 무당이 아닌가 한다.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는 무당을 스승이라 하고, 전라도 지역어에서는 당골.단골레라고 한다. 고대사회에서 무당은 위대한 제사장이자 행정의 머리였다. 신라시대까지만 해도, (삼국사기),에서 보듯 왕을 '자층(慈充)' 이라 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파찰음 계통의 소리가 없었음을 감안해 보면 '사승/스승'으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필자는 '스승' 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소도' 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한다.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단을 모으거나 높은 산에 성황목(城皇木), 곧 신의 나무[神樹]를 세운 곳을 '소도'라고 하였다. 그곳은 살인자가 들어와도 체포하지 않는 거룩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는 사제가 곧 '스승'이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소도'가 '숟~솟~슷~스승'의 변이형으로 쓰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응(琢雄)도 따지고 보면 '거룩하고 위대한 스승' 이란 말로 뒤칠 수 있다. 수컷 웅(雄)이라고 하는바, '숫~솟~숟 ~스승'파 같이 '소도'와의 걸림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의 바뀜을 따라 '스승' 이 담당한 영역의 변천을 간추리면 '제사장(종교+정치)>정치>교육/종교>교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점을 치는 무당도 마찬가지인데, 제사장은 길홍화복(솜凶禍福)을 알아서 미리 알려 주는 '예언'의 기능과 응어리진 마음을 풀고 닦아 주는 '해원 (解怨)'의 구실을 해 냈다. 이런 두 기능과 선생의 역할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퇴지 (轉退之)는 '스승이란 도리와 문화 유산을 전달하고 의흑을 풀어주는 자(師者傳道授業解慾)'라고 하였다. 해원과 해흑이 서로 통하는 맥이 있다고 판단된다. 응어리진 마옴을 스승(무당)이 풀어 주듯이, 잘 모르는 의혹을 스승(교원)이 플어 주지 않는가. 그것이 꼭 예언자적인 성격은 아닐지라도. 공부 때문에, 교육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였으며 잠 못 이루는 외로운 밤을 보냈는지. 교육의 본질로 가는 길목에서 걸림돌이라도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바람일 뿐이다. 내일의 새벽이 있기에 교원의 길을 걸으면서 끈질기게 교육사회의 봄이 옴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스산한 겨울의 계절이더라도......
2-8. 귀와 구멍
옳지 못한 일을 저질러 놓고 그게 드러날까 하여 제 귀를 제가 막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속담말로 '귀 막고 방울 도둑질한다' 함은 바로 앞의 경우를 두고 이른 말이다. 만일 인간에게 귀가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하더라도 하등의 쏠모가 없으며, 인간은 결코 언어적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감각기관 중의 하나로서 얼굴의 좌우에 있으면서 소리 듣는 일을 맡은 것을 귀'라고 한다. 귀는 귀싸대기와 귀밑대기를 바탕으로하여 귓부리. 귓불. 귓구멍. 귓전. 귓바퀴와 같은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말하는 이의 뜻은 흔히 심리적-생 리적 -믈리적인 단계를 거쳐 말듣는 이에게 소리로 전달된다. 다시 거꾸로 말듣는 이는 믈리적 -생리적 단계를 거쳐 말소리에 담긴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이들 과정 중에서 생리적 과정과 물리적 과정은 귀의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고 하겠다 귀를 이루는 여러 부위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곳은 귓구멍이다. 따라서 귀의 모양은 구멍으로 상징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말소리를 포함하는 모든 소리가 담기는 구멍이요, 소리꼴 담는 통이라고나 할까. 이 소리의 통, 소리의 구멍을 롱하여 인간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이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오고갈 수 있게 된다.
귀의 본바탕이 '구멍'이란 점과 '귀'의 형태 자체와는 어떤 상관이 없올까. 필자는 러'가 구멍을 뜻하는 '쟈'에서 나은 말이라고 본다. 즉 '굿+-이>구시>구미>구이>귀'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굿'은 오늘날에는 무당이 행하는 일체의 연희과정을 말하지만, 원래는 굴, 곧 움푹 들어간 구멍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금도 방언에 따라서는 말이나 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움푹 들어간 통을 '구시'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표준어로 '구유'인 이 '구시'와 관련한 방언의 분포를 찾아 보면, '구수(층청. 전라), 구숭(강원 통천. 장전. 고성), 구시 (경상. 충청.전라. 제주. 함경), 구시통(전남 담양. 진도. 영암. 강진. 여수), 구유(전북 부안), 구이 (경남 울주), 귀 (경기 옹진/황해 은율 안악), 귀숭(강원 간성. 평창), 귀영 (황해 금천 재령. 서홍), 귀융(경기 장단/황해 해주/강원 간성. 양양. 횡성. 영월. 평창. 원주 춘천. 홍천. 인제), 귀이 (경북 경주. 영천. 포항. 홍해. 영덕), 쇠구시 (경남 납해), 밥구시 (전남 장성)' 등과 같다.
'구유'의 방언으로서 음운론적인 시옷(ㅅ)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형태로는 '구시/구이/귀'를 꼽을 수 있다. 물론 '구시>구이'의 과정에서 더 순탄한 진행을 보여 주려면, 반치음(△)단계의 '구시'가 있어야 하는데, 방언의 분포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중세어 자료를 보면 그럴 가능성이 전척 없는 것도 아니다. (초간본박통사), 상 21을 보면, 일체의 우묵한 통을 중세어로는 '구△ㅣ[措子]'라 했음을 알 수 있으니, 방언 자료를 함께 고려한다면 '구시>구쇠>구이>귀'의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굿'은 자음교체를 통해 '굿/굳/굴'의 단어족을 이루는, 요컨대 '굴'을 가리키는 말이다. 굴은 굴이지만 특별히 작은 모양의 굴을 구시, 구이, 귀라고 썼던 것으로 보인다. 모음의 소릿값으로 보아 귀'는 복모음으로서 중세에는 '구이'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구시>구△ㅣ>구이>귀'로 그 변천과정을 상정함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귀'의 낱말겨레로는, '귀, 귀 개, 귀 거 칠다(듣기에 노떱다), 귀걸이, 귀걸이 안경, 귀고리, 귀구양('귓구멍'의 함경도 방언), 귀긋기 (단청에서 처마 등에 색칠을 하는 일), 귀긋기 뱃바닥[첨차(柰嬌). 장여 등의 뱃바닥에 귀긋기를 하는 일], 귀기둥(건물 모퉁이에 세운 기둥), 귀까리 ('귀때 기 '의 방언), 귀꽃(돌탑 등의 귀마루 끝에 새긴 플꿎의 장식), 귀꿈스럽다(보기에 아주 궁벽하여 혼하지 않다), 귀나다(한쪽으로 기울다), 귀돌(석축의 모퉁이에 놓는 돌), 귀동냥(남의 말을 귀로 얻어 들음), 귀먹당수(귀 머거 리), 귀밝이 (귀밝이술), 귀뿌리, 귓바퀴' 등이 있다.
칸트는 '가장 숭고한 명령이 양심의 소리'라고 하였는바, 저절로 들리는 게 소리지만 그것도 올바르게 듣고자 하는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옳게 들리는 법이다. 하물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소리를 물어 무엇하리. 귀가 있어 인간이 언어적 존재로서 바로 설 수 있으니 이는 진정한 축복이며 삶의 가능성을 크게 더해 준 능력의 징표라 할 것이다. 들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들음으로써, 우리의 언어적 상상력은 더욱 그윽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배달의 나라는 대단히 '싹수'가 있는 영지가 될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는 곳, 바로 그런 공간을 우리 모두가 세워 나가야 한다.
2-9. 미래와 용 신앙
문예사조를 살펴 보면 20세기초에 미래파(未來派)가 나온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운동으로 과거의 전통과 정적 (靜的)인 예술에 대한 반동으로서 새로운 예술의 창촐을 지향한 문학운동이었다. 아직 다다르지 않은 시간을 '미래'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의 세상을 이르기도 한다. 미래(未來)'는 한자어인데 이와는 좀 다르지만 미래 개념을 지닌 순우리말로 '니리'라는 부사가있다. '어떤 일이 생겨나기 전에'란 뜻을 가진다. 인간은 현재로만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미래의 시 간과 공간을 그리며 산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음 속에 그리는 바람이나 이상을 꿈이라고도 하는바, 다분히 심리적 존재인 우리 인간에게 앞날에 대한 의식이 없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꿈' 이란 말도, 없는 것을 다른 데서 빌리는 동작 '꾸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름써이니, 꿈은 시간적으로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 그 갓을 드러낸다. 누구나 보다 오래, 그리고 잘 살기를 바란다. 그 누가 이 세상에서 일꺽 죽기를 바라겠는가. 대담은 분명하다.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오랫동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이루어 내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정신문화 중의 하나가 바로 '종교' 라고 할 것이다. 어떤 종교, 어떤 신앙에든 미래의 병원한 공간이나 시간이 설정된다. 무속신 앙에도 죽은 뒤의 세상 이야기가 있다.
자연의 순환이란 큰 흐름 속에서는 죽음이란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니, 우리 사람들만 영원한 삶의 시간과 공간을 그리떠 괴로워하고 맴돌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후의 세계란 특정한 종교의 교리를 굳게 믿는 이들에게는 진리가 되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분명한 것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장 확실한 공간, 여기 우리의 조상들이 살다 갔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있음과 없음이 본시 하나이며, 죽음과 삶도 같은 뿌리에서 돋아나온 존재의 양상(樣相)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고양이를 놓고 어떤 이는 귀엽다고 하고, 어떤 이는 무섭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까. 그러나 어쨌든 사람들은 미래로 연결되어 있는 무의식의 끈을 놓아 버릴 수가 없다.
우리말의 부사 '미리'는 미래의 예 언자이자 물을 다스리는 '미르[龍]' 곧 용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용신앙[사신 (蛇神) 신앙]은 호랑이 신앙에 못지 않게 아주 폭넓은 분포를 보인다. 흔히 농경문화권에서는 비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만큼 물을 다스리는 용신이야말로 증년과 흥년을 좌우하는 두려운 존재라고 믿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용(龍)'은 만주어로는 '륑'으로, 영흔(신)의 뜻으로 쓰였다. 고유어로는 '미르(밀/미르기)'였으니 우리 조상들은 물과의 깊은 연관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장덕순의 <한국 설화문학 연구>, (1971)에 따르면, 용은 종교에 따라서 수호신으로 그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교세를 지키는 수교자(守敎者)로, 유교에서는 호국룡(護國龍)으로 나타난다. 절의 모양도 잘 보면 용의 머리가 있고, 지붕의 기와는 용린갑(證辣甲 ; 용의 비늘 모양으로 비늘을 달아 만든 갑옷)의 형상이며, 네 기둥은 용의 다리를 본뜬 것으로 판단된다. 용은 그것이 지니는 초자연적인 힘 때문에 제사장의 권위를 뜻하는 동시에 마침내 왕권을 상징하기에 이르렀으니, '용상(임금이 정무를 볼 때에 앉는 평상)용안. 용루(龍淚, 임금의 눈물). 용발(龍髮 ; 임금의 머 리털)' 등이 그 좋은 보기라고 하겠다. 짐작하건대, 용신 (물의 신)은 농경사회에서 쇠대한 신이니 태 양신 (불의 신)과 더불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인다. 신라의 문무대왕이 죽은 뒤 바다에 묻혀 호국룡이 되겠다고 한 것이나, 조선조 태종이 백룡과의 관계를 드러낸 것 둥은 뚱은 참고자료라고 볼 수 있다.
용은 지존자(至尊者), 믈의 지배자, 예언자, 인간적인 성품을 지닌 존재로 파악된다. 용파 관련된 지명도 많다. 지 명에서는 '용미르.미리.미르기' 둥의 변이형으로 표현되는데, 용은 한자어이고 나머지는 고유어계의 말이다. 예컨대 '미르기재[龍阮]'라는 지명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로써 본다면 석가모니 다음으로 중생을 건질 원대한 꿈을 가진 '미륵보살' 속은 '미륵'도 용과 관련이 있는 말로 보인다. '미륵'은 향찰식으로 읽으면 '일' 이요, 중국어 발음으로는 비르'이다. (훈몽자회),의 '미르 龍'의 '미르'와 우연스럽게도 일치한다. 미르, 용의 주기능은 물을 다스리는 일이고, 물을 다스리는 일은 짬날의 일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물은 삶의 원천인 만큼 물을 다스림은 곧 모든 생물의 살고 죽음을 다스리는 일이기 패문이다. 물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목숨을 좌우하는 요소인 탓에 물이 없는 곳에서는 삶이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물이 너무 많아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용을 섬기는 지역, 용을 섬기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용은 예언자이며 지존의 통치자이자 삶의 희망이뎌 아울러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먹는 양식으로서의 '말 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시는 물을 용, 즉 밀이 다스린다면 그로인한 '밀' 은 직접적인 양식으로서 상여 삶에 활력을 주니 말이다. 오늘날 서양을 비롯한 빵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의 사람들이 길러 먹는 밀도 우리나라 남부에서 채취한 '앉은뱅이 말'을 개량한 것이라 하니, 참으로 미르가 모든 사람에게 희 망이요, 앞날의 식생활을 보장하는 복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민족에게나 용 신앙을 찾기란 쉽겠지만, 특히 우리 배달겨레의 말에서는 용(밀)의 예언자로서의 기능이 고착되어 '미리'와같은 부사어가 상이니, 돋보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낱말의 겨레라는 관점에서 보아 '미르(밀)-' 계에 드는 말로는 '미루다(이미 안 것으로 다른 것을 비추어 보다), 미루적거리다, 미룩미룩, 미륵도(경남 통영), 미륵봉(금강산), 미륵산(울릉도), 미륵치 (굉남 맹산), 미르기재 (강원 횡성), 미리' 등을 들 수 있다. 밤 하늘의 아름다운 미리내(은하수)를 보고 누가 용(밀)을 연상 할까마는, 미리내는 용 신앙과 깊은 상관 속에서 쓰이는 표현으로 보인다. 은하수의 위치를 보아 수확의 때를 알아차렸던 것도 결국은 물을 다스리는 용에 대한 신앙의 잠재된 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앞날의 일에 대하썩 미리 가치 있는 일을 예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는지.
2-10. 만남과 헤어짐
서로 만나서 바로 헤어질 때, '만나자 이별'이라고 한다. 상대방과 마주보게 되거나 재앙 또는 앙화를 입을 경우, 또는 어떤 때를 당하거나, 인연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일러 '만난다'고 한다. 작은 시내들이 만나 큰 내를 이루고, 다시 가람이나 바다를 지어 내듯이, 사람들은 서로 만나 관계를 맺으며 모듬살이를 이어 나아간다. 불가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을 하나의 말미암음으로 이해하여 살아감의 주요한 계기로 풀이하기도 한다. 이러한 만남과 헤어짐의 섭리 속에서 세상 만물이 나고 사라진다. 사람들의 삶도 그 예외는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친구간의 아름다운 우정도 서로의 만남에서 그 실마리가 생겨나뎌 애끓는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하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도 서로가 만나 교통함으로써 관계가 이루어지 니, 신과 인간의 만남이다고 어찌 다를 수있으랴.
'만나다'라는 말의 짜임으로 보아 '맞다十나다>맞나다>맏나다>만나다'로 그 형성과정을 풀이할 수 있다. 현대 국어에서는 '만나다'가 표준'어이지만, 원래는 '맞다'가 합성되어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오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을 '맞이'라고 하고, 오는 사람을 기다려 받아들이거나 불러서 오게 하는 동작을 '맞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만나다'는 사람을 오게 해서, 또는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말의 쓰임을 보아, '맞다'는 대체로 행위의 대상이 높임의 대상일 때 쓰인다(맛조이 ; (신어, 5-l8). 오늘날에도 '해맞이. 달맞이. 손님맞이. 봄맞이' 라고도 흔히 쓰지만, '원수맞이. 재 앙맞이. 거지맞이' 라고는 잘 쓰지 많는다. 쓰더라도 자연스럽지 않다: '맞-'은 '맛/맏/맡/말(머리)'과 같은 단어족으로 으뜸가는 지도자, 앞 또는 위를 말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마한(馬轉)'도 '말한'이라고 읽어, 제일 큰 한족의 나라라고 새겨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혈거생활과 연관지어 보면 재미있을 듯싶다. (후한서), 나 더삼국지),와 같은 중국의 문헌자료에서처럼 굴이 수직으로 무덤같이 생겼올 경우엔, 굴에서 나와 누굴 만나려면 우선 머리 위쪽, 곧 머리맡으로 나와야 한다. 수굉의 경우도 그러하다. 안으로부터 굴의 입구(맡)로 나와야 한다. 어느 쪽이든지 맞이하기 위하여 집에서 나옴은 배달겨레가 지닌 인간관계의 적극성을 뜻함이요, 인간존중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때에 따라서 만남은 하나의 약속, 곧 계약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말을 통하여 우리는 직간접으로 온갖 모양의 계기를 마련한다. 말은 특정한 겨레의 정신이 담기는 그릇이요, 우리 겨레를 동여매는 질기고 단단한 끈이기도 하다. 말은 만남의 바탕스런 약속으로, 우리는 서로 언어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살고 있다. 말은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특별히 화려한 삶을 누린 세대라 할지라도 곧 사라져 가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그들이 살던 동안의 경험과 슬기만큼은 문자언어인 글로 옮겨 주고 간다. 뒤로 갈수록 지식과 경험의 고원은 넓어지고 더욱 높아질밖에.
사람들의 만남에 대한 욕구는 다양하다. 살아서 정들었던 이들은 죽은 뒤에도 신앙의 힘을 빌려서, 아니면 자연현상의 윤회를 따라 만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 간다. 기다림은 아름답다. 작가가 온 마음을 쏟아부은 문학작품이라면 그 글에 글을 쓴 사람이 지닌 영혼의 목소리가 담기기 마련이다. 종교의 경우 십중팔구 죽음과 관련하여 사후에 펼쳐질 만남의 공간과 시간이 설정된다.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만나서 신과 더블어 살기를 바락는 것이지만, 만남이 있는 곳에 반드시 헤어짐이 있으니 그것이 곧 신의 섭리요 보이지 않는 만남의 철리인 듯하다. 만남이 서로간의 관계로 플이되거니와 형태에 따라서 단일어나 복합어로 싱이는 일이 있음은 널리 아는 일이다. 보기를 들면, '맞닥뜨리다, 맞당기다, 맞담배질, 맞두레 (물을 푸는 두레의 히나), 맞모금, 맞미닫이, 맞바느질 (바늘 두 개를 양쪽에서 한 구멍에 마주 넣어서 꿰매는 바느질), 맞바람, 맞부꽤 (광산에서 하는 두 사람의 동업), 맞이, 맞자라다(서로 같이 자라다)' 등으로 '맞-'계가 중심을 이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규정되거니와 흔자서는 살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살면서 여러 모양의 사람과 일을 만나게 된다. 아름답고 소박한 만남을 위하여 서로가 맞이하는 마음가짐과 의지 (힘)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움을 꽃피우고 참된 만남의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 밭을 일구고 믿음을 심어야 한다. 혹여 만났다가 안타까운 헤어짐을 간직한 채, 서로 그리면서도 만나지 못하며 가슴닳이를 하게 되더라도. 아마도 우리의 육신과 영혼 속에는 삶과 죽음이 함께 일어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변하지 않는 만남을 찾아 긴 나그네의 길을 걷는다 그 길은 또 길로 이어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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