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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94 호
단기 4342. 5. 6 (음력 4. 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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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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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문학수첩문학상공모
계간《문학수첩》에서는 한국문학의 미래를 선도해나갈 새로운 작가를 널리 구합니다. 참신하고 건강한 상상력과 활달한 문체를 담은 작품들이 많이 나와
한국문학의 영토를 넓혀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문단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문학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문학수첩작가상>에 역량 있는 미등단 작가와 기성작가 여러분의 많은
[문학수첩작가상] 2000만원 고료
모집 부문: 장편소설(원고지700매 내외) 응모 자격 : 신인.기성제한 없음 응모 마감 : 2009년 6월 30일 발 표 :《문학수첩》 2009년 가을호 상 금 : 2,000만원
[문학수첩신인상]
모집 부문 시 (10편 이상) 단편소설 (200자 원고지 100매 내외, 2편 이상) 문학평론 (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2편 이상) 응모 자격 : 신인 응모 마감 : 2009년 6월 30일 발 표 :《문학수첩》 2009년 가을호 상 금 : 각 부문 500만 원(시, 소설, 평론) 보 낼 곳 : (413-832)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출판문화단지 525-3
응모 원칙 ● 응모작품은 우편으로만 접수합니다. 겉봉에 응모부문을 기재하십시오. ● 응모작품 처음과 끝에 이름, 생년월일, 주소, 연락처와 응모작품 수를 기재하십시오. ● 문학수첩작가상 응모작품에는 A4용지 3매 분량의 줄거리를 첨부해야 합니다. ● 문학수첩작가상 당선작품에 관한 저작권은 5년간 (주)문학수첩에 귀속됩니다. ● 응모된 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기타 사항은 이메일로 문의해 주십시오.
역량 있는 작가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 주소 :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문화단지)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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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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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을 불신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속은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다.(로셔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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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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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
외래어
옛날엔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붓과 먹물을 빼놓을 수 없었다. 먹물은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아서 만드는데, 먹은 나무를 태울 때 연기에서 생기는 검댕(그을음)을 모아 아교를 녹인 물에 푼 다음 굳혀 만든다.
먹은 중국 유물로 미루어 은나라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굳힌 먹이 아니라 목탄이나 석묵(石墨)을 물에 녹인 것 또는 주약(朱藥)을 썼고, 당나라에 들어서는 칠묵(漆墨)으로 글씨를 썼다고 전한다.
굳힌 먹의 시초는 소나무 연기 검댕으로 만드는 ‘송연묵’인데 한나라 적 유물이 나오며, 동이의 사신으로부터 황제가 선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동이’가 배달겨레를 가리킨 것이라면 우리 조상이 동양 서예 문화에 크게 이바지한 셈이다. 요새 말로 하면 당시의 명품이었던 송연묵은 삼국 시대 주요 수출품이었다. 명나라 때 명품 먹 생산국 지위를 빼앗겼고, 지금 먹 만드는 이(묵공)도 거의 없어져서 먹 생산은 서너 곳에서 명맥을 이어간다.
‘먹’은 우리 토박이말이 아니라 차용어로 본다. 곧, 현대 중국어 ‘墨’에 해당하는 예전의 중국말이 유입되었고, 15세기 문헌에 이미 현대 우리말과 같은 ‘먹’으로 등장한다. 한자어 ‘묵’은 당나라 때 소리를 받아들인 결과로 보이며, 그 결과 우리 한자로는 ‘묵’, 어원 의식이 없는 말로서는 ‘먹’으로 존재하고 있다.
김선철/국어원 학예연구사
말 목숨
언어예절
마지못해 산다는 이가 많은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있다. 오죽하면 그러리오마는, 어버이만 아니라 만인을 얼빠지게 하는 몹쓸 일이다.
자진하는 데는 말이 통하지 않는 까닭이 크다. 그로써 한 세월을, 또 그의 진실과 말을 속절없이 사라지게 한다.
숨을 타는 사물이 생물만 아니다. 사람이 사라지면 말도 사라진다. 얼마 전 배우 최진실이 자진해 한동안 사회가 떠들썩했다. 그에게 소통 부재를 일으킨 진실과 함께 다시는 그의 새로운 연기와 말을 만나지 못하게 됐다. 장차 할 말까지 송두리째 데려가 버린 탓이다. 특히 말과 영상을 다루는 방송작가나 연출가들의 상심이 무척 클 터이다.
가끔 글쟁이들이 붓을 꺾었다거나 다시 들었다는 얘길 한다. 말이 샘솟아 주체하지 못하는 글쟁이가 있는 한편, 억지로 자아내는 이도 있다. 붓을 꺾는 것은 적어도 자기 말과 이야기, 생각을 되돌아보고 쟁이는 구실을 한다.
말은 쓰기에 따라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지만 버림받기도 한다. 말겨레가 7천만 아니 1억이 있어도 제대로 거두어 쓰지 않으면 비틀리고 메마른다. 이는 죽임이다. 오래도록 써 온 말을 전혀 듣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불행히도 우리 시대 들어 그 도를 넘는 걸 뻔히 본다.
노인들만 남아 사는 시골이 걱정이다. 농사도 살림도 그렇지만 그나마 갈무리하고 베푸는 숱한 말과 풍습들이 그들과 더불어 사라질 걱정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승부욕
스포츠에서 체력·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력이다. 즉 상대방을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한데, 이를 '승부욕'이라 부른다. '강인한 승부욕을 보여 주었다' '승부욕을 불태웠다' '30대의 열정과 승부욕이 업계에 무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등에서 보듯 '승부욕'은 스포츠뿐 아니라 일 등에도 두루 쓰인다. 그러나 '승부욕'은 문제가 있는 단어다. '욕(慾)'이 들어간 다른 단어를 보면 권력욕·명예욕·출세욕·소유욕 등 '욕'이 앞말을 받아 그것을 이루려는 욕심·의욕 등의 뜻으로 쓰인다. 승부(勝負)가 이김과 짐을 뜻하므로 '승부욕'도 앞말을 받아 '이기고 지려는 욕심'으로 풀이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사전에도 '승부욕'이란 단어는 없다. 이기려는 욕심의 뜻으로 단어를 만들려면 '승리욕'으로 해야 한다. '승부욕'이 이기려는 의지 등의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승부를 걸다' '승부에 집착하다' 등의 표현에서 '승부'가 차츰 '승리'의 뜻으로 변화하고, 여기에 '욕'이 붙은 때문으로 추측된다. 어쨌거나 '승부욕'은 뜻이 통하지 않는다. 변화한 의미로 오랫동안 써 왔는데 뭐 그리 문제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전에도 없고 조어법상으로도 문제가 있는 '승부욕'이란 단어를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승리욕'으로 하든지, 내키지 않으면 다른 말로 바꾸면 된다. '강인한 승부욕을 보였다'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승부욕을 불태웠다'는 '이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등으로 풀어 쓰면 된다.
이용과 사용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생활할 수 없는 시대다. 이들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졌거나, 이 사회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셈이다. 그만큼 그것들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우리네 삶 속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이 늘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유용하게 '이용'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이 '사용'과 '이용'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생각 없이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지만 두 단어는 사전적으론 뜻이 다르다.'사용'은 '일정한 목적과 기능에 맡게 씀', '이용'은 '대상을 필요에 따라 이롭게 씀'의 뜻으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이용'은 '폐품 이용, 자원의 효율적 이용,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처럼 '이롭게 쓰다'라는 의미이고, '사용'은 '사용 금지, 사용 기간, 자동차 사용을 제한한다'처럼 단순히 '쓰다'의 뜻이다. 그러나 '휴대전화를 통신수단으로 이용(사용)'처럼 '이용'과 '사용' 모두 쓸 수 있는 경우가 있어 구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어른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다'에서 '사용' 대신 '이용'을 쓰면 어색하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이용하다'와 '사용하다'의 쓰임은 문맥에 따라 달라야 한다. 이롭게 쓰는 것과 단순히 쓰는 것이 가능한 문장에서는 '이용'과 '사용'을 모두 쓸 수 있으나, '이용'이나'사용' 어느 하나만이 자연스러운 경우에는 내용에 맞게 선택해 쓰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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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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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의 광견(狂犬)*
평광선(平光線)과 횡광선(橫光線) 아래 씨앗 망태를 들고 위작자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한다.
몸을 비틀고 불구를 안고 있는 밤 긴 외랑 기둥 하나를 깨물고서야 나는 이제 헤맬 수 있게 되었다. 복서(卜書)에 얼굴을 비춰 보거나 기자(奇字)에 털을 묻히거나 사람을 낳은 신의 옷을 얻어 입는 따위의 하찮은 즐거움으로
겨울을 두드려 본다.
매 문장마다 반드시 초조해지는 강에 우린 얇은 얼굴을 띄웠다. (그런데 사실은 그대로 되지를 않았다) 축마(畜馬)와 함께 이가 흔들릴 때마다 사탄이 내 어금니를 찌른다고 고함치기 (이게 대체 무엇에 쓸 수 있는 진심인가) 종자 더미에 불을 던지러 온 사람이야말로 씨앗 이외로는 자신을 불태울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린 하늘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는 게 그의 마지막 화풍이었다. 밤의 등 근육이 흰 똥으로 이 인체를 더럽히고 있었다.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때때로 작은 편지들이 내게 돌을 굴려 보는 날에 노래가 천민의 둥지인 건 우주가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고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 가는 날에 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 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 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꺾인 나뭇가지 같은 이 하늘 밑에서 여(余)는 남의 일기 위에 부디 설명 같은 눈물을 흘려라.
* A rabid dog of Arcadia. 1746. Nicolas Kossoff.
아르카디아의 광견을 읽고 있었는데, 블레이크의 '태고의 나날들 : The Ancient of Days'이 머리 속을 치고 들어왔다. 이 시와 그 그림을 연결시키려는 욕망도 잠깐, 생각이 뒤섞여버렸고 곧 후회했다. 더 큰 상상력을 위해서는 이성화된 신조차도 떨쳐버려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모아가던 중이었다. 그래야 우리들 사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결국은, 인식론 문제로 환원되는 것 같다. '우주가 음사(音寫)된 세계'이기 때문에 문득 이런 생각도 해봤다. 우리가 사실은 3차원이 아닌 2차원 우주에 살고 있다면? 2차원 세상에 온통 발려져 있는 정보가 마치 홀로그램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홀로그램 우주 이론 이야기다. 그렇다면 3차원 모습의 우리는 정보가 만들어낸 허깨비라는 이야기다. 오직 정보만이 실체일 뿐, 우리는 없다.
'通中上下察天文'(成汝信, <浮査先生文集> 卷1 '東道遺跡二十七首' 十五首 중) '빈속을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찰하다.' 인간은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대한 관심을 없는 것(공중이나 허공)으로 표현해 왔다. 도달할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도달하려 해 왔다. 그렇기에 보는 것은 곧 존재의 싹이 되고, 본 것을 적는 일은 곧 인식의 싹이 되었다. 천문(天文)은 그렇기에 천체(天體)의 인식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 밖의 것들을, 우리는 그들의 무늬를 통해 엿보고 이루려 한다. 비슷하게, 그것은 인문(人文)이 인체(人體)/사람의 인식이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주는 음사(音寫)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조연호는…
1969년 생. 시집 <저녁의 기원>, <죽음에 이르는 계절>, 산문집 <행복한 난청』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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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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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明月曲 - 이전안
한가윗날 은방석 파르스레한 너울 쓰고 진주 옷 차려 입고 한가롭게 노는 명월 내가 든 연엽(蓮葉) 주발에도 떠 달도 함께 마시네.
푸른 달 지향없이 낙동강을 건너면서 우리네 쌓인 시름 등에 업고 떠간 명월 창천에 두렷이 놀다 떠간 것을 나는 봤네.
극채색에 어둠 헐려 아이처럼 노는 밤 풀벌레 어슬어슬 적막 속에 놀라 숨고 취영청 밝아 온 천지 우리 함께 즐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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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싱/지혜/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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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2장 생각하며 행동할 때
사상은 육체를 나로 삼는 데서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을 중시 하는 것은 이것만 떨어지면(마음)이 드러나게 되고 (참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상)이라 함은 내가 항상 말하는 육체를 (나)라 하고 생각을 (나)라고하는 (가아)를 말합니다. 이 (가아)인 (아상)이 있기 때문에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사상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무엇인가. 발심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말은 인생을 바로 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발굴해섯 자기각 갈 수 있는 길을 깨다른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깨달은 이인데,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어떻게 백팔 번뇌, 발만사천 번뇌를 항복 받아야 하겠읍니까.)하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셨는데 그 뜻을 한 번 더 풀어보면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 꿈 속이란 것은 알지만 그러나 이해가 앞설 때는 욕심도 나고 남녀 이성끼리 만나면 이상한 생각이 일어나고 이런 쓸데 없는 꿈 속의 일에 시달립니다. 태평양 바다보다 더 복잡하고 심한 번뇌의 파도가 일어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 되니 옳지 않은 이 마음을 어떻게 항복 받아야 하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이렇게 항복 받아라.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고도 제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일 중생을 교화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은(나다)(남이다)(중생이다)(부처다)(오래산다)하는 분별심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은 발심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중생은 다 제 잘난 멋에 삽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중생을 제도하라 하시면서 제도했다는 생각이 있으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므로 보살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며 중생에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곧 (나)로부터 벌어집니다. (나)란 생각은 본래부터 있는 생각이 아니고 객관을 상대할 때 (나)라는 생각을 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물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다가도 얼마 안 가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 자기의 바탕일 수는 없고 그러 것을 좋다 싫다하고 생각내는 주체가 (나)일 수바껭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항상 말한 바와 같이 물질도 허공도 아닌 산생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동그라미도 네모 세모도 아닙니다. 마음 자리는 모나고 둥근게 아닌 형상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먹물은 본래 검은 것이기 때문에 세계의 먹을 다 갈아도 하얗게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물질이나 허공은 본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아무리 뭉치고 천충 만층 높이 쌓아봐도 그것이 듣고 보고 생각할 줄은 모릅니다. 그와 같이 물질적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도 무엇을 보고 들을 줄은 모릅니다. 마음이 보고 싶어야 보고, 듣고 싶어야 들립니다. 육체는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육체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자리, 차원 이전이고 태초 이전이며 질량 이전입니다. 이것이 온갖 생각의 주체이고 진아입니다. 따라서 진아의 상대가 가아이며, 생각의 (나)입니다. (진아)니(가아)니 해도 실제 마음은(잔아)(가아)를 초월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안니 만사의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설명으로 될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쳐야 합니다.
깨달았다 견성했다는 말은 소위 밥 먹고 자고 이러나고 할 줄 아는 그 자기를 깨친 것이니 깨달았다고 해도 말이 안됩니다. 부처님이 깨쳐 놓고 보니 출가하려고 할 때 애쓰던 그 마음 그대로고 싯달태자 그대로입니다. (육체 말고 자기 마음 그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니 진실상 그대로의 마음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 그래서 우주에 재자유가 이고 전지전능한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이 마음을 깨쳤다고 하는 것이 밥 먹고 똥 싸는 그 마음, 산모가 아기 어서 나가라고 힘주는 마음 그대로이니 이것은 깨쳤다고 해도 안됩니다. 본래 미한것도 아닌데 어떻게 깨칩니다. 그런데 육체를 (나)라고 하는 데서 (아상)(가아)가 생기고 안상, 중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이 생기는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나)라고 하다 보니 술에 미친 사람 아편에 미친 사람이 되고 정치에 미친 사람, 문학에 미친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인간의 본성이 개발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인간성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을 뜻하며 선한 것 악한 것이 인간성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번뇌각 이러나는 것을 걱정말고 깨치지 못한 것만 걱정하라는 것입니다. 망상을 안 일으키려면 더 일어납니다, 망상 일어나려는 것은 내버려 두고 망상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망상 저혼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망상은 가만 두고 염불이든 참선이든 그것만 하면 오늘 반에 깨칠지 금생에 깨칠지 여하튼 깨치게 됩니다. 사람이 전생에 공이 많으면 금생에 깨치고 공이 적으면 내생에 깨치게 됩니다. 하여튼 깨치게 될 그 시간을 바라고 금생에 못하면 늙어 죽을 때 까지 염불이나 하고 참선하고 마치면 그러면 내생에는 깨칩니다. 복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복을 가지고 태어나며 머리도 지금보다 몇억만 배 좋게 태어납니다. 다만 공부하는 데는 깨치려 해도 안되고 안 깨치려 해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 되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될 그런 요소가 나한테 있구나. 오온이 내가 아니구나. 말하는 여기에, 배 고프면 밥 먹는 여기에 있겠구나. 여기서 자기 관혁을 깨치게 됩니다. 그 부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부처란 소리가 어떤 뜻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니 불교가 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평생 강사 노릇해서 제자가 수천 명이 돼도 자기가 모르고 가르치니 제자도 모르고 듣습니다. 마치 눈먼 장님에게 매달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는 것도 그렇고 염불도 그렇고 다른 어떤 공부를 해도 불교의 근본 진리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지, 생사를 어떻게 해서 해탈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49년간의 기나긴 설법을 하셨던 것입니다. 육조 대사께서(응무소주이생기심)을 듣고 깨치셨는데, 그 뜻은 (번뇌 망상없이 살아라. 아무 모양, 주의 ,사상 그런 거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 거 다 청산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라)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 버립니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 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입니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닌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한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도 병원에 어떤 보살을 문병 갔다 온 일이 있는데 별안간 사람이 와서 스님 좀 꼭 보자고 해서 누군지도 모르고 따서가서 한 시간이나 이야기 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복잡해서 마음을 쉴 수 없다며 눈물을 자꾸 흘립니다. 가정불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 얘기를 해 주고 관세음보살님만 자꾸 부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불안해지면 대번에 이것이 독소로 변해서 온갖 병을 일으키는 때문입니다. 그래 당신이 그 마음을 풀기 전에는 천하없이 기도를 하고 한국 돈 다 갖다 바치고 기도를 천 년 만 년 해도 그 병이 낫질 않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첩이 되어 남편에게 곤란을 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본 마누라가 되어 가지고도 남편 번 돈으로 자꾸 딴놈과 쓰고 다니고 나쁜 짓 했기 때문에 이생에 와서 남편이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다 인과법인데 아무 까닭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시간 정도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정말 그러냐)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 꼭 믿겠다고 하면서 안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인과를 안 믿으면 죽는다. 암은 아무리 째고 해 봐도 별 수 없어 다른 데 또 생긴다. 기분이 만든 암이기 때문에 뇌가 또 나빠지기도 하므로 마음부터 항복받아야한다.)고 말해 주고 온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바로 안정이 되어야 병도 낫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것도 (병원에 가면 의사가 우리 병을 책임지고 고쳐 준다)고 믿는 마음의 안정이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잘 나타납니다. 치료하기 전에 벌써 자기 마음이 반은 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체는 마음이고 이 현실은 꿈이어서 꿈은 다 마음이 꾸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백까지가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의 피조물이라 맏어 구속되고 자연계의 물리화학의 원리가 절대적이라 하여 그것에 구속되고 무당이나 점장이에 구속되고 그러지만 중생들의 마음자리 불성자리는 본래부터 완전한 부처이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전지전능한 실존이어서 가사 우주을 창조한 신이 온다 해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그것이 다 자기 마음이 만들었던 망상이었으니 망상이 천 리 만 리 사라진 본 마음자리가 나타나면 자연히 신이니 과학이니 신앙이니 미신이니 불교니 유교니 하는 따위의 제2의 산물인 그야말로 피조물들은 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스스로 우주의 주재신이 있다고 믿고 자연과학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지배된다고 믿는 마음에 의해 지배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평소 아무것도 모르고 불법도 모르는 이런 사람이라도 심어지는 개,소,돼지 같은 금수까지라도 산보고 높다는 말은 안 하지만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은 압니다. 이렇게 말은 없어도 알줄 아는 이 자시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시간이나 공간이 아닌 실재이고 물질이나 에네르기처럼 죽은 존재가 아닌 산 생명입니다. 이것이 눈을 통해서 내다보고 귓구멍을 통해서 듣고 이러지 다른 놈은 다 죽은 것들이므로 그럴 놈이 없습니다. 보인다 들린다 하는 생각 그것이 보고 들을 줄 아는게 아니고 일체 보는 마음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며,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아무 생각도 없는 실재이고 실존이고 실상이고 한 이것이 직접 눈구멍으로 내다보고 귓구멍으로 듣는 것입니다. 생각 그것도 이 실상의 반야인 마음으로부터 생각되어 만들어진 피조물임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서 어느 정도 인식이 외었으리라 믿습니다.
맨 처음 절에 와서 법문을 듣고 그것이 잘 듣지 못하는대로 들었지 딴놈이 들을놈이 없습니다. 허공이 들을 수 없고 고깃 덩어리인 육체는 물질일뿐이니 역시 못 알아들을 것이고 귀신이나 도깨비가 와서 듣고 알려 준것도 닙니다. 설사 도깨비라 할 지라도 그 실상은 여시 불성자리인 마음입니다. 지옥에 가서 두들겨 맞고 아픈 줄 아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실상자리인 그것이 알지 이것 빼놓고는 무엇이 아픈 줄 재미있는 줄을 깨달을 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들은 그때도 완전히 부처가 돼 가지고 들었고 차차 법문을 들어서 세상은 무상한 것이다. 참선을 해야겠구나 하고 말을 알다들을 때에도 역시 본래 완전히 부처각 되어서 듣습니다. 그러니 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번뇌 망상이 없어졌다고 해서 별 것이 아니고 내내 산보고 높은 줄 알고 물보고 깊은 줄 아는 그대로이고 다른 면목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도가 다 돼 있는 것이므로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일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멀쩡한 부처가 딴 생각을하고 있으니까 술 위해섯 길 가는 것 붙들어 준 폭 밖에 안됩니다. 술이 취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고 술이 깨도 그 사람, 취해도 그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주에 위해 가지고 육체만 나인 줄 알고 이해타산하고 온갖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여 복잡한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탐진치의 삼독주에섯 까어나라. 육체가 나라는 생각을 버려라. 내다 남이다 하는 것이 관념이고 없는 것이다.)하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공입니다.
번뇌,망상, 온갖 지식과 경험을 쌓아 가지고 하는 법은 이렇고 땅의 이치는 어떻고 인간 사회의 도리는 이런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는 서로 죽이려고 하고 전쟁을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그런 하늘도 없고 그런 땅도 그런 인생도 없고 그런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도 있는게 아닌 도리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법공입니다. 부처님 법공의 진리를 듣고 나서 여태까지의 지식을 다 놓아버니고 온갖 생각이 끊어지면 본래 있던 적멸 그 자라가나타납니다. 마치 구름이 벗겨지고 나니 본래 있던 밝은 달이 나타난 것과 같아서 아예 없던 달이 그름 벗겨지고 나서 새삼스레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아아이제 알았구나!)하고 깨달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께달았다는 생각마저 놓아버리는 이것이 구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공,법공,구공의 이치를 깨달았다고해서 본래 부처자리인 마음 바탕이 더 밝아진 것도 아니고 알 줄 아는 성품이 잘못된 착각을 품었다고 해서 손상이있느냐하면 그런것도 아닙니다. 근본 마음 자리는 벌레나 굼벵이가 되었다고 해서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하나도 중감이 없이 불생불멸이고 불면하는 일여평등체입니다. 그러니 애당초에 이렇게 완전한 부처각 되어 있으므로 제도 한다는 생각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생을 내가 제도 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을 내가 제도하겠다, 깨우쳐 주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 사람은 중생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고 보살이 될 수는 더욱더 없는 것입니다. 그레서 내가 법사거니, 내가 누구를 가르쳐 주었거니, 걔를 내가 일러 주었으니, 내 제자거니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 주지도않고 제도하지도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제도하기는 하되 그런 생각 없이 무심으로하고, 하는 것 없이 한다는말씀입니다. 만일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또 소승이고 공에 떨어진 것이며, 대승이 아니고 금강경의 말씀을 바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의 말씀은 공의 사상을 철저히 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여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고 상없는 마음으로 머무름없이 중생을 제도 하고 인류의 구제를 위해 공의 원리로 백천억의 육신을 바치고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중생을 발심시켜서 일일이 지도를 해서 견성을 갖게 하고 보살만행을 잘 하도록 호념해 주고 부측해서 정각을 이루고 성불을 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다 꿈 숙에섯 하는 일이고 관념일뿐 꿈을 깨고 보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거기까지 가는길인 로정기만을 말씀하신 것인지 그 당처 자리는 시방제불이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 곳은 말이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꿈 속에 들어가서 꿈으로 꿈 같은 이야기를 해서 꿈으로 꿈을 깨도록 하는 말씀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꿈 밖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실상의 소식에 대해서는 입을 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아무 상관도 없는 말씀한 하셨지 사실로 중생이 제도 받는 일이 없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고 본래부터 그렇게 완전한 자리이므로 제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도하는 사람도 제도하고 제도받을 것 없는 줄 알고 설법해 주므로 종일 설법을 해도 법을 이럴 줬거니 하는 생각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일체 사상,인륜도덕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선방에서 참선할 때 조금만 허술하면 방망이가 막 내려 옵니다. 망상이나 피우는 그런 머리통은 부서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체 중생을 실제로 제도했다 하더라도 게도 했거니 하는 생각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은 곧 중생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잘 무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불법을 모르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은 보살일 수 없고 중생을 제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굶는 사람이게 쌀말이난 주었다 하더라도 주었거니 하는 생각이있으면 아상,인상이 있는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자선 보살이 제도를 했거니 제도를 받았거니 하는 생각이 있어서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고 불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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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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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실수와 고의는 엄연히 다른 법
동래 정씨에 홍순이라는 이가 있었다. 영조 21년 을축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우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그가 호조판서로 예조판서를 검하고 있을 때, 저 유명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예조판서 책임하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모든 절차를 될 수 있는 한 후하게 하고, 염습하는데 쓰인 옷감에서부터 시신에 신기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재료를 한조각씩 따로 떼어, 그 당시의 경비 쓴 문부와 함께 궤짝에 넣고 굳게 봉하여 두었다. 그리고 그 궤짝의 열쇠를 몸소 지니고, 믿을 만한 서리에게 일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부디부디 이 궤를 단단히 간수 하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조가 연세 높아 승하하시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연산군의 재판으로 일대 보복의 형옥이 일어날 판이다. 자기 아버지를 혹시라도 소홀하게 다루었을까 하여 왕은 상례 당시의 담당관을 물었다. 곧 어전에 불려 들어간 그는 이미 일러두었던 서리에게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고, 몸소 차고 다니던 열쇠로 열었다. 그리하여 이러이런 천으로 이러이러한 옷을 지어 입혀 드리고 이러한 재료로 이런 것을 만들어 넣어 드려 경비는 암만암만이 나고... 재료 견본과 함께 손살피같이 밝혀진 사실을 보고, 정조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아버지를 위해 쏟은 그 정성, 오늘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만반의 대비를 갖춰놓은 그 꼼꼼한 일솜씨... 임금은 크게 감동하였고 그래 정승으로 승진시켜 국가대사를 의논하게 된 것이다.
그보다 앞서 그가 평안감사로 있을 당시의 일이다. 기생 하나가 사또가 안계신 틈을 타 담배를 조금 훔쳐서 피웠다. 자리에 돌아와 담배 함 안의 것이 대중에 틀리는 것을 알고는, 누가 그랬는가를 밝혀, 예의 기생은 끌려내려가 매 30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았다. 그런지 얼마 뒤 일이다. 심부름하는 통인이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전신을 비춰보는 체경을 깨뜨리자 겁에 질려서 떨었다. 담배 한두 대에 그런 형벌을 내리던 사또인데.... 자리에 돌아와 대령할 아이들 하나 없이 텅 빈 것으로 보고 다른 하인에게 물으니 그런 사정이라, 모두 불러 오게 해 잘 타이르고, 깨어진 것이나마 한쪽씩 나눠갖게 하고는 다시는 말이 없다. 그 당시 유리로 된 거울은 정말로 귀중품이었으므로 측근에 모셨던 이가 의아해서 물었다.
“거울을 깨친 것이 먼젖번 담배에 비할 것이 아닌데, 먼젓건 벌하고 이번엔 그냥 두시다니...” “그게 아냐! 먼젓건 고의로 그랬으니 소행이 발칙하고 이번거야 철모르는 아이들이 실수로 그런 거 아닌가베.”
그 정승에게 딸이 있어 걸맞는 감의 수재를 사위로 맞게 됐는데, 혼사에 쓸 부비를 부인과 의논하니, 혼수에 8백냥, 잔치비용에 4백냥의 예산을 가져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혼인날이 다 되도록 피륙을 안 들여와 부인이 안절부절한다
“장사꾼이 가져오마고 하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입던 옷이나 빨아 입혀서 보낼밖에...”
또 잔칫거리를 들여오지 않아 성화를 하니까,
“가져오마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그냥 있는 것 가지고 치르지.”
그렇게 치뤄진 혼례이니 딸은 물론 사위도 은연중 불평이 컸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위가 처가에 와 밥먹고 묵는 것까지 용납않고 되쫓아 보내던 박정한 장인은 몇해만에 딸과 사위를 불렀다. 집 가까운 한 곳에 이르더니 보여주는데, 조촐한 집에 뜨락도 아늑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그야말로 분통같이 꾸며져 있다.
“네가 시집갈 때 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천이백냥은 들거라고 하더구나. 그렇기로 그 많은 돈을 공연히 남의 눈이나 즐겁게 하려고 써 버릴 것이 뭐냐? 그래 그 돈을 따로 세워 가지고, 그 동안 늘렸느니라. 그 불어난 것으로 이 집도 지었고, 시골에 땅도 사서 계량할 만한 추수는 받게 해 놓았지. 이만하면 남의 집에 꾸우러 가지는 않을 것이니, 예 와 살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추수나 받아먹고 편히 지내라는 얘가는 아니다. 후고의 염려없이 사나이답게 앞길을 열어가는 기본을 삼아라, 그런 얘기지, 하하하.“
한번을 그의 사는 집을 수리하는데 그 공임 몇 푼을 가지고 장색들과 다투는 것이었다. 자제들이 보기에 딱해서 조용한 시간을 타서 말씀드렸다.
“가난한 일꾼들의 수고비를 깎자고 하신다면 상신된 체면에 뭣하지 않습니까?”
“모르는 소리! 정승은 일국의 의표야. 나 편한 것만 취해서 품삯을 올려주면 곧장 선례가 돼서 많은 백성에게 누가 된다는 것은 왜 생각않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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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국문학/우리말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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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상상력 1 - 정호완
2. 땅과 존재
2-5, 기원과 별 신앙
한번 잘못을 저질떴을지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알고 발면 아무리 모진 마음을 가진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 이를 두고 속담에 비는데 는 무쇠도 녹는다고 한다. 자신의 소원대로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거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바라는 것을 우리는 '빌다'는 말로 드러낸다. 비는 동작은 요컨대 비는 사람이 았어야 하고 비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문화가 분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비는 사람이 제사장으로서 정치와 종교를함께 관장했고, 온 부족의 안녕과 질서, 풍성한 생산을 기도드렸던 것이다. 고대 한국사에서는 단군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맡았는데, 단군이 비는 대상으로 삼은 것은 무엇알까 ? 태양신으로서의 니마(>님>임)' 와 태음신으로서의 '고마(> 곰~금)'에게 빌었으니, 북방의 별로 상징되는 물과 땅을 다스리는 단군의 어머니 신이었던 '고마'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까지 별 신앙의 뿌리 갗은 흐름을 이루어 준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태양신과 태음신의 상징적인 본래의 관념은 불과 물이었다.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자연물로 인식하였던 결과 마침내 그것에 신성(神性)을 부여하게 되었고, 이를 숭배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연과의 친화와 합일 (合一)을 꾀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별을 뜻하는 진(辰) 자를 두고 '미르 辰(광주본 (천자문,,), 별 辰(신미본)천자문),' 으로 플이하고 있다. '미르'는 '용(미르 龍: 신미본 <천자본>), 또는 '물'을 뜻하였으니 물과 별은 어떤 언어적인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날의 지방 사투리를 보면 별을 빌 (강원 층남. 층북. 전남. 전북 경남)'이라고 하고 있다. 비는 동작을 '빌다' 로 한 것은 농경사회에서 물신[水神]에게 기도했던 정황을 설명해 준다. 여기 물신은 고마신 (단군의 어머니 신)이며 북방의 북두칠성의 별신을 뜻한다. 그럼 '빌다' 는 어떻게 '별~빌'과 관계가 있는가. 동작이나 상태를 뜻하는 동사나 형용사가 만들어지는 언어적인 특징을 보면, 명사에 접미사 '-다'가 달라붙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빌다'의 경우도 그러한 보기로 플이하면 될 것이다. 결국 별의 방언형태인 빌'에 접미사 '-다'가 붙어 만들어진 셈이다. 이러한 짜임으로 볼 수 있는 말들의 떼는 상당히 넓은 분포를 보인다. 별을 향하여 비는 사람을 제사장인 단군, 무당이라고 하였는바, 지금도 전라도 방언에서는 무당을 '단골' 혹은 '단골레'라고 한다.
중세어 자료를 보면 별 또는 빌과 같은 두 가지 형태가 이미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보상절) 9-33 에는 '별'이, 같은 자료 6-53 에는 '빌다'가 나오고, (신증유함), 상 2에는 별자리신(辰)' 이, (월 인석보), 7-31 에는 '빌먹다'가 나온다. 현대 어에서도 별과 관계된 말의 떼를 찾아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별, 별나라, 별 빛, 빌붙다(남에게 아첨하다), 벼르다(별 +으+-다>벼르다), 벼름벼름' 등을 쉽게 열거할 수 있다. 흔히 하늘의 별자리 중 큰곰자리우 별 가운데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국자 모양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별을 북두칠성이라고 한다. 북두. 북두성. 칠성 (七星)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북두칠성이 곧 고마별(곰별)로 아주 위대한 별로 보고 빌었으니 지금도 칠성신앙은 도처에 화석처럼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어 무덤으로 갈 때 등 뒤에 별이 홉어진 모양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널빤지를 깔고 그것을 칠성판이라고 하는 예가 그러하며, 오늘날까지 쓰이는 칠성바위, 칠성시장 등과 같은 땅이름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불가에서는 일곱 별에 모두 임금에 해 당하는 군호(룸號)를 붙여, 탐랑(貪淡)성군.거문성군.녹존(祿存)성군.문곡(文曲)성군. 염정 (廉貞)성군.무곡(武曲)성군.파군(破軍)성군이라 하여 일곱 별신으로 모셨던 것이다.
저 아름다운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경우를 보자. 한자로 표기는 하지만 우리말의 '빌(별)'을 비슷한 한자의 소리로 적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곧 높고 제단이 있는 것을 상징한 것으로 보이니, 묘향산의 비로봉이나 속리산의 비로봉이나 치악산의 비로봉이나 소백산, 지리산의 비로봉이 모두 별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불가에서 연화장세계에 살며 그 몸은 법계(法界)에 두루 차서 큰 광명을 주는 부처를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는 범어로 바이로자나였는데 한자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비로자나가 된 것으로 본디는 광명을 뜻하는 말이었다, 천태종에서는 법신불(法身佛), 화엄종에서는 보신불(報身佛), 밀교(料敎)에서는 대 일여래 (大日如來)라고도 부른다. 별의 속성 가운데에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밤 하늘에 빛나는 불, 곧 광명으로서의 특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명의 뿌리는 태양으로서, 이를테면 별은 해의 변형이며 어두운 정신과 삶의 누리에 비치는 빛이었다. 마치 우리의 육신을 밝히는 것이 얼굴의 눈이듯이 별은 밤에 맞나는 저 멀리의 촛불이요, 영흔의 등대라 할 것이다. 별처럼 수많고 아름다운 나라에의 그리움으로 우리가 살아 간다면, 인간 의식의 언덕에는 늘 푸른 하늘에의 꿈이 자랄 수 있을 것이다.
2-6. 임과 해
한 가지 일뿐 아니고 그 이상의 좋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때, 일석이조 (一石二,옳) 라고도 하지만 속담으로는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한다. 앞서 살다 간 선인들의 문학작품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언어생활의 밑바닥에는 개인 또는 집단이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랄까 신의 모습으로서의 임에 대한 지향성이 두드러진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 묵>에서도 노래하였듯이 우리는 생애를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임, 바로 이데아의 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임이 다스리는 공간과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펴 보이고자 하여 끝없이 인간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임의 목소리는 영원한 시간으로 메아리치며, 임의 눈빚은 온 우주에 가득하여 더함도 덜함도 었다. 인간은 그런 믿음을 갖고 이제까지 살아 왔고, 뒤에 을 날들도 그떻게 살 것이다. 필자가 보기로는 그런 임의 세상은 바로 이 땅이며 과거와 미래가 함께 숨쉬는 바로 이 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을 함께하게 하는 임은 불행히도 행복도 아닌 공평무사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접미사 '-님'을 붙여 공대어로 쓴다. 스승님, 할아버님, 임금님이라 할 때의 '-님'이 그런 경우이다. 참으로 인간존중의 셍각을 생활화하는 좋은 언어관습으로 보인다. 임은 넘 '에서 구개음화된 소리가 말머리에서 떨어져 생겨난 것이고, 더 오래된 전단계의 형태는 '니마'였다. 지금도 얼굴의 한 부분으로 눈썹 위에서 머리털이 난 부위의 사이를 이마라고 하는바, 니 마' 라는 말이 그 뜻이 바뀌어 신체부위의 명칭으로 화석이 되어 남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일종의 의미전성이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서 본래의 뜻파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니마 혹은 님이 태양을 뜻하는 불의 신이며 방위로는 남쪽(앞)이니 신체부위 중 높으면서 앞쪽이 됨은 본래의 의미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니마와 고마는 더불어 하나의 짝을 이루는 하늘신과 땅신의 상징이었으나, 고마에 대한 자료는 상당한 분포를 보이지만 니마에 대한 것은 드문 편이다. 니마의 상징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신으로는 땅과 물의 신, 계절로는 여름, 동꿀로는 주작, 빛깔로는 붉은색, 성으로는 남성, 소리로는 헛소리가 된다. 또한 계층으로는 군왕(君王)에 해당하는 상징성을 보인다. 신체의 한 부위의 명칭인 '이마'라는 말에 니마의 형태가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쪽 자묘와 더불어 일본어의 형태가 큰 암시를 주고 있다. 이마를 일본어로 히타이라고 한다. 여기서 히는 해를, 타이는 흙을 둥글게 쌓아 제사를 위한 장소를 뜻하는 말로서 제단의 모양과 같이 높고 툭 뒤어 나온 몸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분포는 아니지만, (삼국사기), 지명자료를 보면 '니마'의 너 '와 '日/熱/尼(魯)'의 관련 가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어의 자료에서도 너' 가 주로 '赤.熟.紅.日'의 뜻으로 대응이 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니마'는 태양신으로, '니 +-마(존칭의 전미사)>니마'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말로 풀어 볼 수도 있다.
이에 상응하는 '고마'는 물과 땅의 신으로서 생산을 맡는다. 니마는 단군의 아버지 신격이고, 고마는 단군의 어머니 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단군왕검에서 우리는 임금이란 말의 원형을 볼 수 있는데, 임금은 니마와 고마신의 변이형으로 보이며 제사를 모시던 대상신의 뜻은 없어지고 오히려 신을 제사하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즉 '님금(태양신과 태음신-불의 신과 물의 신)-님금 (>임금, 태양신과 태음신을 제사하는 사람)'으로 간추릴 수 있다. 제사장으로서의 '단군' 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 전라도 지방의 방언에서 무당을 뜻하는 '당골. 단골레'로 삽이고, 혼히 '단골짐' 이라고 할 때의 단골을 뜻하게 되었다. 임금의 복장을 보면 붉은색에 용 무늬를 놓은 곤룡포를 입는다. 붉은색은 태양신, 용은 태음신 (물의 신)을 슬배하는 상징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니 왕의 원형은 태양신과 태음신을 제사하는 제사장이었다고 하겠다. 군왕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 으로서, 그 권력은 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어 왔다. 이집트의 경우 왕을 파라오라고 하는데, 이는 '큰 집' 곧 신전(神穀)이란 뜻이었다. 이 파라오가 태양신인 '라 Ra'의 아들이며 제사장을 가리키게 되었음을 상기하면, 고대국가의 왕의 위치는 신을 모시는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여 지나치지 많을 것으로 보인다. <훈몽자회>,에서 '님 쥬(主)' 로 풀이하는 임금을 뜻하는 말 '主(주)'도 등불을 뜻하는 글자 화산불 곧 태양을 상징하는 '王'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 이니, 임금은 태양숭배의 책 임자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현재 누가 '임'에 대한 역사적인 뜻을 생각하면서 그 낱말을 쓸까마는, 임은 따지고 보면 태양신 곧 광명의 신으로 숭앙되었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 이다. 앞에서 풀이한 별 신앙도 결국은 태양숭배의 밝음 지향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미루어 보건대 상대방을 '-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관습은 태양신과 같은 존재로 본다는 의식이 그 밑바닥에 있으니 참으로 소중한 인본주의의 드러냄이 아닐 수 없다. '니마'는 태양신을 뜻하는 말에서 제사하는 군왕으로 다시 상대방을 높이는 접미사로 쓰였으니, 말 그대로 언어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셈이라고나 할까. 태양처럼 빛나는 밝음에의 지향을 갖고 사는 배달겨레는 예부터 어두움, 사악하고 블의에 찬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가장 종교적인 개념에서 비롯한 임의 뜻과 정서가 이제 인간적인 개념으도 쓰이고 있다. 하늘과 땅에 사는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전제가 없고서는 참다운 임의 세계는 저만치 있을밖에. 서로는 임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상적인 삶에 그 빛을 더하면서 하늘의 큰 복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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