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이길을 - 이청담 큰스님 법어록
제2장 생각하며 행동할 때
영광된 봉사
욕심 버리고 일하다. 남을 위해 할 일밖에 없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니니 완전히 내버리고 나면 육체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정신으로 다만 내 이 본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지니고 간직할 뿐, 오직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살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 남을 도와주는 마음은 스스로의 기쁨을 갖는 생명이다. 생은 곧 스스로의 진리인 것이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가정과 그 사회는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행복과 불행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따라 있는 것이다. 신의 가호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신을 계몽하고 자기를 찾아야 한다. 자기 마음을 밝혀 인간 자신은 영원한 진리의 주체임을 깨달아 자신의 입장을 자신이 소멸하는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선악은 자신의 인과응보에 있는 것이다. 선악의 과보로 얽여 있는 업장은 자신의 참회로 자기 업장을 소멸하고 새로운 인과를 닦아 새로운 신앙의 힘을 찾아야 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무한한 우주의 진리이므로 자기 인과로 자신을 얽어맨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면 자신의 신앙에 따라 무한한 힘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속세로부터 얽혀 있는 업장이 자기 몸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밝혀 마음이 곧 천지의 근본이고 자신은 영원한 생명으로 생사 윤회를 하는 진리이고 선악의 과보가 다 자신에 있는 줄만 알면 인간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남을 도와주는 것, 배고픈 사람 밥 주고, 헐벗은 사람 옷 주고, 병든 사람 구원 해 주고 이렇게 남을 도우는 것을 해롭게 하고 남을 죽이고 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보시하고 계행도 잘 지키고 인욕도 하여 남이 뭐라고 욕을 보이더라도 다 참아서 참았다는 생각까지 없이 참으라. 남이 욕한다고 야단치고 보복하고 칭찬해 준다고 좋아하고 이러다 보면 번뇌의 생사심만 늘지 언제 보리를 성취할 것인가.
아픈 것을 못 참을수록 인욕을 하지 않을수록 벼은 오래가게 마련이고 겁을 낼수록 병은 오래 가게 마련이다.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병이 쉽게 낫고 뼈가 부서져도 그게 갑작스러이 나버리는 수가 있다. 몸뚱이를 버리고 나면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몸뚱이를 버림녀 아픈 줄 모른다. 그러니 몸뚱이를 챙긴다든지 하는 수양이 필요하다. 애착하기 때문에 내가 살을 잡으면 아프지만 사실 몸뚱이 제가 생명이 없으니 아플 수도 없고 감각할 수 없다. 마음은 또 본래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아픔이 생길 수 없다. 살이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것도 아니다. 그러면 뭐가 아프냐. 마음으로 생각을 내서 아픈 것뿐이다. (육체가 나라는 착각을 버려보자.) (육체생활을 좀 정리해 가지고 하루 밥 세 끼 먹던 것을 노력하여 두 끼 먹고 수양하자. 더욱더 자아완성을 위해 노력하자.) 우리 마음의 본래 자세에거 보면 무슨 지식이니 신앙이니 하는 것은 흙탕물처럼 된 것이고 헝클어진 실같이 번잡한 망상이다. (그건 무슨 귀중품이다. 보물이다, 잘 관리하자. 이 사람 무슨 병이냐, 어려서 애들과 장난을 하다 피가 많이 날 정도롤 피부가 상했어, 그래 균이 들어가 지금 파먹고 있다.) 이 생각이 병이 되고 이 과념이 절대원리라 믿고 중생심으로 얽매이지 말라. 모든 것 다 버리고 마음을 탁 놓아라. 그러면 본래의 마음이 드러나고 육체의 주인공, 우주의 핵심, 생각의 주체를 알게 된다. 마음을 어디다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보시도 하고 지계도 하고 육도만행을 하라!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농서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일한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이면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일아라는 것이 그때그때 어떻게 됐다고 해서 그게 아주 망하는 건가,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고, 지금 한참 잘된 거이 나중에는 큰 화근이 되어 백년 살 것을 십년도 못 살고 죽는 일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것이다. 좋은 일이 아무리 생겨도 그것을 좋다고 생각 안하고 아무리 지금 불행한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나중에 복 받은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도 오히려 조작이 붙은 속임이다. 그것도 저것도 없는 도대체 아무 생각없이 하는 것이 무소유다. 손바닥만한 거울을 갖고 서울을 비치면 동서남북으로 이십리 이상 되는 큰 서울이 입체적으로 다 들여다보인다. 상식적인 이론으로는 손바닥만한 거울안으로 서울이 들어가면 큰 빌딩이 깨알보다 작데 축소돼서 보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몇 억만배난 되는 서울이 그대로 들어가는 것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이 서로 구애 없이 들어간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마음은 그 자체가 저절로 만복을 다 갖추어 있으므로 일체 탐욕이 없는 것이요, 또한 세상 일에 아끼고 탐낼 만한 일도 없기 때문에 전재산을 버려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며, 또한 처자와 이 몸까지라도 남의 생명을 도울 수 있다면 다 희생하고야 마는 것이다.
둥근 달 외로이 저 하늘에 밝았는데, 흰 눈에 덮인 저 강산은 한없이 고요하다. 웃노라, 코웃움에 천지는 무색하리.
그러나 저 어두운 중생들이 이 마음이 진실로 나인 것을 잊어버리고 그릇된 생각으로 생사에 윤회하며 소나 개나 남자나 여자나 되었을 적마다 나는 남자다 여자다 소다 개다라고 주장하고 고집하던 버릇의 뿌리가 아직 남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없애버리기 위하여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을 제도하되 사실은 중생이 아닌 중생을, 제도 안되는 제도를 하는 것이며, 내 마음은 또한 그런 생각조아도 없다. 그러므로 이 놀음은 순전한 자리가 되는 동시에 순전한 이타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이 마음은 장엄한 것도 되는 것이다. 승려들이여. 사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점과 말을 위한 말을 경계할 것을 명심하라. 중요한 것은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으며, 지혜로울 수도 있다. 각 사람은 그 사상에 동의 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고 묵살할 수도 있다. 모든 불교의 진리란 지식을 구하는 자를 위하여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다. 즉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것이다. 지식을 경계하라는 말과 세계의 비애를 해탈하려는 말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행동하라는 일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각을 얻기 위해서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얻은 다음에도 행동하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고, 어느 하나를 배척하지 않으면 안된다. 취하는 길은 곧 버리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버리고 얻는 데 허위로 외면으로 택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세존의 정신을 따르는 일까지도 그러하다. 우리들은 세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저 세계의 비애의 해탈인 것이다. 내가 부족해서 집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고, 나 하나 잘못해서 이 나라가 혼란하는 그런 태도로 참회하고 겸양해야 된다. 그래서 우리가 복을 받는다. 이런 태도로 부부간에도 참회하고, 양보하고, 봉사해 주고 참으로 위해 줘야 이것이 자비이고, 진정한 애정이고 행복의 문이다.
세계 45억의 사람이 다같이 남을 살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는 지상 극락이 된다. 이렇게 남을 해치지 않고 위해 주며 사는 자비 앞에는 적이 있을 수 없다. 노동하는 시간을 빼놓고 나면 다로 산 시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일생을 노동하는 시간에 소비하고 만 것이며, 노동하는 시간 외에 따로 산 틈이 전혀 없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만분의 일초도 쉴 새 없이 노동만 하다가 언제 늙어서 언제 어떻게 죽는지 모른다. 꿈이나 생시나 오직 살기 위한 일념으로 하긴 했지만, 삶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잠시도 생각해 볼 여지가 한 번 없이 1년 3백 65일을 맹목적으로 살기 위한 노동에 몽땅 다 바친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참다운 삶이 무엇인지는 젼혀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 없다. 허망하게 시간이 다 가버렸다 하면서 마지막 탄식을 남기게 마련이다. 과연 삶이란 어떤 것이길래 그것을 위해 24시간 몸과 정신을 온통 다 바쳐서 희생을 해야 하느냐? 꼭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삶이 무엇이냐? 어떤 것이 산다고 하는 것이냐?) 이렇게 물어보면, 이런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사람은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장사사기 위해서 산다고 하면 쉬울지 모른다. 이 얼마나 섭섭한 이야기인가? 사람이 우주 이전부터의 실제로서의 질량이 아닌 자기 마음을 깨쳐서, 생사를 초월하여 전우주의 심령세계와 육신세계에 자유자재하며 전지전능한 불타의 지의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이른바 불교에 8만4천가지나 된다. 그러나 실로는 8만4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일 불타의 49년 설법을 다 기록한다면, 현재 남아 있는 불경의 천만배가 더 될 것이다. 법을 듣는 중생들의 그 개성과 그릇이 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8만4천 불법을 다시 종합적으로 간단하게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른바 육바라밀이니 육동이니 하는 것이다.
첫째는 물심양면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자비심을 행한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자신의 마음을 단속하면 행동을 조심하여 탈선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자기의 소신을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곤란과 애로를 다 극복하는 것이요 넷째는 남과 나를 위하여 옳은 일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그 일을 위하여 전후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고 중지나 후퇴를 모르는 것이요 다섯째는 태산 같은 입지와 바다와 같은 안심으로 바라는 바 목적 성공을 위하여 그 바깥 일에는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는 일이요. 여섯째는 위의 차례를 따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인생의 본연면목인 이 마음을 깨쳐서 태어날 적마다 일초의 틈도 없이 죽음에 쫓겨서 영겁에 헤매던 해탈의 세계로 인도하여 영원과 자유과 행복을 누리게 하며 동시에 천상과 인간의 최고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