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 - 로우라 젭슨 / 이영순 역
2 장 시적 정의(Poetic Justice) - 1/2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에스킬러스의 비극에는 거의 들어맞지 않는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인과 악인에 대해 반대의 재난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 비극, 예컨대 무죄한 오레스테는 풀려나고 죄를 지은 멕베스는 저주를 받는 것처럼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구현되는 비극은 분명 열등한 비극이라고 잘라 말한다. 멕베스 Macbeth와 오레스테스 the Oresteia는 둘 다 신의 정의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으로 끝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의 보상과 처벌을 강조한 비극을 우수한 극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신과 인간 사이가 도덕적인 관계로 맺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확실하게 가질 수 없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인지라, 에스킬러스의 윤리관이나 기독교의 인과응보론에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어떤 정의로운 신이 지상에 있는 인간의 행위를 다스린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멕베스는 악에 의해 서서히 타락하는 인물의 성격을 연구할 때 주로 선택되는 대상으로서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와 자주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서는 어떤 인물의 성격이 고귀해지거나 타락하는 점차적인 성격의 변화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클리템네스트라는 멕베스와는 달리 삼부작의 1,2편에서조차 탁월하게 고귀한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아가멤논에서는 이 극의 극적 행동을 이끌어 가는 클리템네스트라를 선량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악에 의해 지배되는 본성의 소유자로 제시한다. 딸의 복수를 해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남편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러스는 주로 클리템네스트라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즉 코러스는 클리템네스트라가 핑계로 삼는 아트레우스(Atreus) 가문의 알라스토르(Alastor : 그리스 신화의 복수의 신, 혹은 제우스를 가리키기도 함.)의 저주는 단지 그녀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죄를 부추기는 구실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악한 인간을 다루는 것은 희극(Comedy)의 기능이라고 주장하였다. 연민의 감정은 자기의 죄과를 초월해 고통을 겪는 사람에 대해서는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는 "응당 치러야 할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쾌감은 진짜 비극의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희극에나 알맞은 쾌감이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니콜(Nicoll)은 "희극 속의 인물들은 실제의 사람들보다 훨씬 열등하게 그려지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웃음을 유발한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전락에 웃음의 동기가 있다고 믿었음에 틀림없다"(니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견해를 시학에서 만이 아니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개진시키고 있음을 발견하나.)고 단언한다. 그러나 악한은 희극애서나 다루어야 할 인물이라는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멕베스와 클리템네스트라를 희극적 인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멕베스와 클리템네스트라를 희극 이상의 인물로 만드는 선량함이 그들의 성격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비극 멕베스와 오레스테스엔는 훌륭한 아이러니의 에피소드들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비극의 결론은 그 어느 쪽도 아이러니컬하게 끝나지 않는다. 톰슨(Thompson)은 에스킬러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는데, 이는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에스킬러스는 본질적으로 회의론자이기 보다는, 잘 믿는 사람이다. 그는, 윤리적인 어려움들 때문에 분명히 정신적인 혼란을 많이 겪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그러치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윤리적 난제들 주의 하나를 오레스텟스에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프로메데우스에서 극화하였는데, 진짜 아이러니의 철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윤리적 문제들을 극작가인 그가 해결하였다. 그 일례로 복수의 여실들 The Eymenides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에스킬러스는 공저 정의(civic justice)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복수(private vengeance)는 포기되어져야 함을 효과적으로 역설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는 프로메데우스를 들 수 있는 바, 아마도 이 삼부작 가운데 현존하지 않는 두 작품에서 에스킬러스는 분명 프로메데우스의 지혜와 제우스의 힘을 화해시켰을 것이다. 에스킬러스의 극에서 처럼 보상과 처벌이 그 공과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될 때 우리는 바로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세계에 속해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래스태스 삼부작과 멕베스
올레스테스 삼부작
고대 그리스 극의 뚜렷한 특징의 하나는 아마도 윤리적 어조가 강하다는 점일 것이다. 극 속에 내포된 윤리적 의미는 비극적 기교와 결합되어 에스킬러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의 비극을 우수한 것으로 만들었고, 또 한명의 위대한 극작가인 셰익스피어 비극의 탁월한 특징이 되기도 했다. 어떤 극 속에 내포되어 있는 윤리적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지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 모두가 공감하는 도덕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예술가 개개인의 철학 및 종교적 사고방식이 다양하더라도 훌륭한 예술은 모름지기 상식적인 도덕을 근거로 창조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에스킬러스는 바로 그 상식적인 도덕을 토대로 작품을 구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 극작가였다. 따라서 장엄한 윤리를 비극이라는 명칭과 최초로 연관시킨 극작가는 에스킬러스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리스 정신의 소유자에게 선과 미, 즉 윤리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그리하여 예술 작품 안에서 뗄 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특히 그의 주요 작품인 오레스테스 삼부작에서 에스킬러스는 비극이라는 방대한 구조물 위에 견고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철학 및 종교적 배경을 설정해 놓았다.
에스킬러스가 신화적 개념들을 세련되게 다듬어 전통적인 신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 그리스 종교에서 도덕적인 변화는 에스킬러스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현상이었으나, 제우스와 그 밖의 군소 신들을 도덕적 이상을 대변하는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도덕적 변화 양상을 보다 합리적으로 표현했던 것은 에스킬러스의 오레스테스 삼부작이었다. 오레스테스 삼부작에서 에스킬러스는 인간에 대한 신들의 태도를 대변하면서, 그 신들에게서 자연적 특성을 모두 없애 버리고 그 대신 어떤 중요한 도덕의 실현을 위해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 신을 묘사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시인들이 그려내는 신들의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관습상 그리스 비극은 거의 신화나 전설적 주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번 반복되는 신화라 해도 그것은 관중들에게 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소재가 제한되어 있기는 했지만 극작가가 원래의 이야기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바꾸어 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똑같은 아가멤논의 이야기라 해도 호머의 오딧세이에서 그것은 반역과 살인과 복수의 이야기, 즉 에이기스토스와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반역, 클리템네스트라의 도움으로 에이기스토스가 범하는 아기멤논의 살해, 그리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정당한 복수의 이야기로 꾸며진다. 반면에 에스킬러스에서 아가멤논의 아야기는 가문에 유전되는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 문제를 진지하게 추적하기 위한 소재가 된다. 그래서 에스킬러스의 오레스테스 삼부작은 호머의 작품과는 달리, 죄의 선동자로 에이기스토스가 아닌 클리템네스트라를 지목하여 그녀를 중요하게 취급한다.
에스킬러스는 인간의 고통은 밝혀내고 신의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소재로 아트레우스 가문에 얽힌 오랜 전설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원시적인 전설에 끼친 에스킬러스의 진정한 업적은 각 인물들에 동기(motive)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킬러스조차 어떤 행동이 피해질 가능성이 있었음을 분명히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동기를 극 전개 과정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룬다.
아가멤논
아가멤논에서 코러스는 "죄악은 더 많은 죄를 낳아서 마치 그 자체가 새끼를 치는 것과 같다"고 노래한다. 이는 곧 죄에 대한 에스킬러스의 생각을 대변한다. 코러스의 이 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에스킬러스는 대개 죄의 연속성, 즉 여러 세대에 걸쳐서 죄가 죄를 낳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주력하였다. 에스킬러스는 어떤 가문에 속한 모든 구성원은 그 가문의 과거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나누어 가진다고 보았고, 악한 특성을 지닌 가문이나 종족은 그러한 악의 성향을 근절시키지 위해 고통을 통한 교정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죄의 성향은 유전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스킬러스 이전의 극들은 주로 가문에 대대로 이어지는 저주를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이 인간의 부도덕에 대해 내리는 복수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에스킬러스의 극에서 죄의 성향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증가될 수도 있고 억눌려질 수도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저주가 대를 이어 유전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저주는 극복이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에스킬러스의 믿음을 반영한다. 즉 에스킬러스에게 죄의 사슬은 그 어떤 고리에서건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에스킬러스에게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는, 심지어 타락한 가문의 이원에게조차 근절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으로 취급된다.
죄의 결과로 야기된 보복이라는 에스킬러스의 테마는 비록 그 범위가 제한된 정도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물의 타입을 통해 예시된다. 에스킬러스는 소포클레스처럼 어떤 류의 인물들이 실수를 범하기 쉬운가를 묻기보다는, 그것만 아니면 고귀했을 사람을 과연 어떤 동기가 실수로 유도하였는가를 묻는다. 에스킬러스에게 죄의 동기는 흔히 오만(Pride)을 뜻하는 '히브리스'이다.
신들 중에서 복수의 여신들인 네메시스(Nemesis)를 자극하는 히부리스, 즉 자신의 번영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오만함은 그리스 문학에서 가장 낯익은 테마이다. 네메시스는 안간의 잘못된 행동, 특히 히브리스의 죄에 가해지는 처벌을 뜻하는데, 히브리스의 죄는 영원법(eternal ordinance)에 대한 존경심이 q부족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마음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흔히 네메시스는 승리의 절정에 도달한 인간이 가장 무모해지기 쉬운 경우가 승리의 절정에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EKf 이피게니아(Iphigenia)를 희생시킨 아가멤논의 첫 번째 히브리스의 행위는 도덕적 맹목 때문에 빚어진 것이 아니다. 예언자 캘커스(Calchas)로부터 아가멤논은 이미 달을 제물로 바친 그 행동 때문에 장차"아이를 대신해서 복수를 감행하려는 분노"가 닥쳐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을 보고하는 코러스(the reporting chorus)가 은밀히 암시하는 이 분노를 물론 클리템네스트라의 손이 행할 복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가멤논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다. 즉 그는 복수자 제우스(Zeus the Avenger)의 대리자로서 헬렌(Helen)이 파리스(Paris)와 함께 도망감으로써 발발된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캘카스는 앞으로 재난이 닥쳐 올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아가멤논의 히브리스의 죄 이면에 들어 있는 그의 영웅적 기질이 결국 트로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것이라는 장담을 한다.
아가멤논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의무와 동생 메넬라우스(Menelaus) 및 동맹군들에 대한 명분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주저한다. 아가멤논의 비극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가멤논이 갈등하는 두 가지 의무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아무런 악의도 없이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암사슴을 살해한 아가멤논에게는 아르테미스의 노여움을 진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 자신의 딸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아르테미스에 대한 의무 외에도 아가멤논에게는 동생 메넬라수스의 아내를 유괴해 간 파리스의 희브리스의 죄와 파리스가 헬렌을 데려왔을 때 그를 받아들여준 트로이라는 도시 전체가 범한 히브리스의 죄에 대해 동생 메넬라우스와 정의를 위한 복수의 신인 제우스를 대신해서 처벌을 해야 하는 엄숙한 의무가 있다. 한가지 의무에 충실함은 다른 의무에 대한 불성실을 뜻한다. 신의 법(the divine law)은 허용과 동시에 금지를 명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갈림길 중에 어느 쪽이 잘못죈 길이 아닐까?"라고 아가멤논은 울부짖는다. 망설임 끝에 아가멤논은 결국 야심의 자극을 받아 선택을 한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선택은 에스킬러스 극에서 펼쳐지는 이후의 행적들에 비추어 볼 때 결과적으로 재난을 낳는 선택으로 판명된다. 그렇지만 만약에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포위할 동료들을 출항시키기 위해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 아르테미스의 진노를 달래기를 거부해 버렸다면 과연 그가 제우스의 손에 어떠한 고초를 겪었을 것인가? 이것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들은 바가 없다.
첫 번째 송가(Ide:특수한 주체로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기리는 서정시, 특히 Choral Ode는 그리스 극에서의 합창가를 지칭한다.)에서 코러스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아가멤논의 행위는 비극이 시작되기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오레스테스 삼부작에서는 극중에서 발생되는 사건처럼 다루어진다. 이는 에스킬러스의 비극에서는 과거가 지배적인 요소를 간주되기 때문이다. 코러스는 사건 연결에 따라서 각 사건에 도덕적 타당성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맡는다. 아가멤논은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캘거스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트로이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 것이라는 성공의 장담만을 생각한 채배를 출항시킨다. 그러는 사이에 그 동안 피의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사악한 행위가 벌어질 순간만을 고대하던 아트레우스 가문의 유전적 저주는 순식간에 아가멤논을 덮쳐 버린다. 그렇지만 아가멤논이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순간 바로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가 활동을 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전에 자신의 동생이자 아가멤논의 아버지인 아트레우스에게 속아서 자식들을 잔치 음식으로 먹어 버린 티에스테스가 아트레우스 가문 전체에 내린 이 저주는 10년 동안 아가멤논이 트로이에서 승승장구한 다음에야 실현되기 시작하나. 한가지 실수는 또 다른 실수를 초래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아가멤논의 기질이 그의 죄를 점점 더 불길한 방향으로 악화시킨다. 트로이에서 무수하게 죽어간 그리스의 병사들, 신들의 성전을 수없이 파괴해 버린 무엄한 행위, 그리고 포로인 카산트라를 귀환 길에 동반한 뻔뻔함 때문에 아가멤논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아가멤논이 포로로 데려온 카산드라(아폴로의 선물과 카산드라의 예언 :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었다. 아폴로가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좀처럼 아폴로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폴로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예언력을 선물로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자 화가 난 아폴로가 그녀의 예언력에서 설득력을 빼 버렸다. 이 때문에 카산드라는 아무리 신통한 예언을 해도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번듯해도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빈말을 '카산드라의 예언'이라고 한다.)는 아폴로에게서 선물을 받았으면서도 처녀성을 고수하기 위해 아폴로의 요구를 거절해 버림으로써 아폴로 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여자이다. 그런데 신의 요구조차 거절했던 그 여자가 지금은 인간 세께의 왕인 아가멤논의 포로가 되어 그 남자가 아내를 모독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포로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이 지금까지 범한 여러 히브리스의 행위들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클리템네스트라의 부추김에 아가멤논이 밟는 자줏빛 카펫트는 여태까지 쌓여 온 아가멤논의 히브리스를 상징하기 위한 극적 장치이다.
에스킬러스는 자만한 인간에 대한 유일한 단련 방법은 역경뿐임을 강조한다. 코러스의 "지혜는 고통을 통해 얻어진다"는 격언은 아가멤논에서 제우스의 속성으로 제시된 바 있다. 에스킬러스는 오레스테스 삼부작에서도 이 격언을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 테마를 이 작품에서는 인간들 편에서 전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테마를 이 작품에서는 인간들 편에서 전개하지 않는다. 고통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는 테마를 전개하는 과정을 통해 에스킬러스가 강조한 것은 오히려 신들의 도덕적 본성이 바뀐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변덕스러운 신들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그 선택의 자유에 있어서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스킬러스가 운명을 믿었느냐, 아니면 자유의지를 믿었느냐를 묻는 것은 불필요한 질문이다. 다른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 역시 그 둘을 다 믿었다. 에스킬러스의 삼부작은 이 세계는 맹목적 우연(bind chance)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극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무리 저항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 배후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킬러스는 자유 의지의 문제를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식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등장 인물들에게 자유를 발휘할 경우, 그 자유는 필연코 재난을 초래하고 마는 것으로 묘사한다. 에스킬러스의 인물들은 매번 여러 가지 의무가 상호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딜레마 속에 빠져 있다. 즉 여러 의무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에스킬러스의 인물들은 도덕적으로 한가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나 그 어떤 선택도 도덕상 용납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조상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어째서 아가멤논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에스킬러스는 이 의문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그 의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 하지도 않는다. 아가멤논은 근원적인 저주에 쫓기는 가문의 일원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그는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재난으로 가득찬 인생 행로였다. 물론 그가 또다른 코스를 선택했더라도 그 운명 역시 파멸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아가멤논으로 하여금 역경과 필사적으로 맞서도록 했던 복수자 제우스는 삼부작의 제 1부에서는 아직 마지막 작품에서처럼 정의로운 신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조만간 제우스는 변덕스럽지 않게 선과 악을 분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가멤논의 비극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본성 때문에 초래되는 것이지만 주로 환경에 희생당한 영웅의 비극이다. 탁월한 에스킬레스의 인물 창조는 비극의 주인공의 행위가 주인공 자신의 통제력밖에 있는 외적 요인에 의해서 추진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다. 마치 자유스러운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우리들 자신의 삶을 고려해 보더라도,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든 에스킬러스의 이같은 전제가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가멤논의 주도적인 인물은 아가멤논이 아니라 클리템네스트라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이 극의 플롯의 변화는 그녀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의 목적이 완수된 후에야 비로소 마음속을 털어놓는, 그것도 아주 모호하게 말하는 모사꾼이다. 아가멤논은 아주 불길하게 개막된다. 외롭고 지친 경비병이 졸음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데, 그의 노래는 차츰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한 애도의 노래로 바뀌더니, "...하지만 이 집이 말할 수 있는 입만 가지고 있다면 집 혼자서 술술 얘기를 털어놓을텐네"하는 의미 심장한 말로 끝난다. 이 같은 경비병의 대사로부터 시작된 불안의 리듬은 점점 강도가 높아져 극 전체로 퍼져 나가더니, 처음에는 승전의 기쁨으로 가득 차고, 그 다음에는 낙담한 전령의 고함소리, 남편을 맞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위선적인 환영사, 그리고 마침내는 살인자의 범행을 예언하는 카산드라의 신들린 탄식소리 이어진다.(세지윅은 주장하기를 "실제로, 경비병의 첫 대사에서 그 움직임이 시작된 아이로닉한 힘의 파도는, 우리가 클리템네스트라가 불길한 준비를 하는 것을 지켜볼 때 그 힘이 모야져서는, 아가멤논과 카산드라가 탄 마차가 기세 등등하게 등장하는 장면에서 높이 치솟아 올라, 남편과 아내 사이의 충돌이 있는 장면에서 무섭게 부서져 내린다. 그러다가 더욱 증폭된 움직임을 가진 두 번째 파도는, 겁을 먹은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코러스가 듣고 있는 가운데 카산드라가 예언을 하는 장면에서 그 힘이 모아져 높아졌다가, 이 또한 아가멤논이 습격을 받아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부서져 내린다.)
경비병은 클리템네스트라를 "잔인한 심장을 가진 여자이면서 동시에 강한 목적을 가진 남자"로 묘사한다. 이처럼 여자인 동시에 남자처럼 묘사되는 클리템네스트라가 코러스의 첫 번째 송가가 진행되는 동안 등장하여 제단에 불을 밝힌다. 코러스의 그녀에게 말을 걸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기 일을 마친 그녀는 말없이 퇴장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코러스의 대사를 통해 그녀의 목적이 밝혀진다. 즉 클리템네스트라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무엇인가가 코러스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등장하여 말을 할 때는, 관중들은 이미 그녀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차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의 말은 잠시 지체됨으로 해서 더욱 인상적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왕비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반신반의하는 코러스에게 트로이에서 그리스가 승리했음을 장담하면서, 자신의 공언을 믿지 못하는 코러스를 쓸데없는 꿈을 믿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라고 꾸짖기까지 한다. 관중은 그녀가 또다른 승리를 꿈꾸고 있음을 안다. 그녀는 장엄한 어조로 트로이에서 신들에게 아가멤논의 죄를 용서하여 부디 무사히 귀향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그리고 "죽은 자의 가혹한 고통"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게 해는 애매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써, 코러스로 하여금 그것이 살육 당한 트로이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관중은 그 말이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그녀의 딸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나는 즐거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해 이렇게 하려는 것이다"고 말하면서 기도를 마친다. 남편을 환영하기 위한 클리템네스트라의 계획은 완벽하다. 클리템스트라가 퇴장하면서 남기는 기도에 이어서 전령은 장로들로 구성된 코러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트로이에서 신의 제단들과 성물들은 모두 파괴되어 버렸다. 트로이 전체의 씨앗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는 전령의 메시지는 트로이에서 아가멤논과 그의 부하들이 범한 히브리스에 관한 보고에 다름 아니다. 이어서 아가멤논이 등장하자 코러스는 왕을 맞이하는 환영 인사에서, "조만간 그대는 그대의 사람 중 누가 정직하고, 누가 부적절한 사람이며, 누가 나라을 지킬 사람인가를 알게 되리라"며 될 수 있는 대로 분명한 어조로 불안한 심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아가멤논은 그 말의 참뜻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 집안에 있을 도전자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왕권에 도전하는 자들을 기필코 제거하겠노라 약속한다.
이 때 클리템네스트라가 자줏빛 양탄자를 든 시종들과 함께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여기서 그녀의 마음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있다. 꿈속에서조차 두려워하지 않던 남자를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고 있으며 조만간 둘 중의 하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감정이 복받치는 듯한 연설을 늘어놓으며, 겉으로는 복수의 신들을 몰리 하는 척하면서 은근히 복수의 신들인 네메시스를 끌어들이다. 아부의 말은 곧 아부의 행위로 이어지고, 그녀는 "정의여, 그가 이제껏 한번도 꿈꾸어 보지 못했던 가정으로 그를 이끌어 주소서"라며, 시종들에게 아가멤논을 위해 자줏빛 카펫을 깔도록 명령한다. 그녀는 오직 신에게만 바치도록 되어 있는 영광을 감히 인간인 아가멤논이 받아들이게끔 유도함으로써 그의 히브리스의 죄를 만천하에 명백히 공개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오만의 죄를 징벌하는 네메시스가 그를 뒤쫓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줏빛 카펫을 밟으라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제안에 아가멤논은 잠시 놀랜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자존심에 호소를 하고 결국 아가멤논은 승복하고 만다. 신처럼 숭배 받는 것은 신들로부터 가장 축복 받은 왕들이나 누릴 수 있는 운명이다. 축복 받은 아가멤논이 되고 싶은 유혹은 아가멤논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게끔 만들고, 그리하여 그는 오직 신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영광을 받아들인다. 아가멤논은 타협안을 제시한다. 자신이 겸손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신발을 벗고, 신들의 네메시스에게 타격을 받지 않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다음, 그는 자줏빛 카펫을 밟고 궁정까지 들어간다. 궁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아가멤논은 자기 아내에게 전부인 카산드라를 잘 보살피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열에 클리템네스트라는 모욕감을 느낀다. 염려 말라는 클리템네스트라의 다짐의 말을 믿고 아가멤논이 궁으로 들어가는 사이에,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히브리스의 징표로서밖에 남아 있다. 그 사이에 클리템네스트라는 "이곳은 바다이다. 누가 이 바다를 마르게 할 것인가?"라는 매우 상징적인 말로써 곧 거행될 피비린내 나는 살인을 예고한다.
초조하고 분노에 가득찬 클리템네스트라가 퇴장할 때까지 카산드라는 침묵한 채 서있다. 카산드라의 침묵은 매우 효과적이다. 관중은 그녀가 다른 세계의 환영을 볼 수 있음을 안다. 드디어 카산드라가 입을 여는데, 그녀의 예언의 말을 통해 관중은 트에스테스의 연희가 있었던 때부터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복수자로 오레스테스가 등장하기까지의 아트레우스 가문에 얽힌 저주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꿰뚫어 봄으로써 그 저주가 암시하는 윤리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
카산드라의 고통은 부당한 고통을 겪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승리를 얻자마자 패배를 안겨주는 역경에 맞서 싸우는 고귀한 인내심의 예증이다. 아가멤논의 히브리스를 상기시켜 주는 존재인 카산드라는 한 개인의 잘못은 그 잘못을 범한 당사자에게만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까지도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카산드라의 예언은 비극적 순간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녀의 예언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한다고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컨대 카산드라의 비극은 인류 전체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궁전 안으로 들어가고 포로로 잡힌 자와 포로를 잡은 자는 둘 다 똑같이 죽음을 맞게 된다. 다시 궁정 문이 열리고 클리템네스트라가 자신이 죽인 희생자들의 시체더미 옆에 그 모습을 들어낸다. 바햐흐로 관중은 밝혀질 모반자들의 동기를 듣게 될 것이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면서, 그 위선은 이제 막 완수된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노라고 변명한다. 코러스가 그녀에게 무시무시한 위협을 하자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녀의 자식이자 아가멤논의 자식이기도 한 딸을 제물로 바쳤던 남편의 행위를 비난하는 말로써 코러스에 대한 대답을 대신한다. 그녀는 에이기스토스를 자신의 보호자로 칭한다. 그런데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 정부들 들이댄 남편을 부정한 인간이라고 소리 높여 규탄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스스로를 매세대 피의 대가를 요구하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서로는 죽이는 혈족 상잔의 긴 행열을 마감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재산이 조금 밖에 없는 빈곤 속에 사는 편을 택했을 것이라며 슬며시 원한의 영인 알라스토르와의 타협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에이기스토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겁쟁이에다 냉혹하기 짝이 없는 건달 같은 인물로서 강하고 의지적이며 뛰어난 지략과 결단력을 겸비한 클리템네스트라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보조 인물(character foil :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 사물이나 사람과 대조되는 상대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햄릿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시되는 레어티즈(Leartes)나 포틴브라스(Fortinbras)가 여기에 해당된다.)에 불과하다. 클리템네스트라를 재하는 코러스의 태도를 보면, 그녀를 비난하는 말을 할 때조차도 그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만, 허풍적인 에이기스토스에 대한 그들의 태도 속에는 경멸밖에 없다. 에이기스토스가 아가멤논에 대한 원한을 거론하면서 "나는 정의로운 마음으로 이 살인을 계획했다"고 호언하고 있지만, 정작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를 범죄의 공모자가 아닌, 범행 후의 보호자로 여길 뿐이다. 아가멤논이 범한 히브리스이 죄만을 고려한다면 그의 운명이 제우스의 손아귀에 놓이게 됨은 어쩌면 정당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살해당한 왕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를 동정하는 평자들이 주장하듯 왕이라는 지엄한 신분과 그가 쌓은 위대한 업적이 오히려 그의 죽음의 불명예스러움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여기에 한때는 일국의 왕이었던 사내 대장부가 한 여자의 손에 살육 당해 누워 있노라.보다 분명한 것은, 설사 정의의 저울대 위에 올라간 아가멤논의 무게가 부족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그 부족한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그 부족 때문에 클리템네스트라의 죄가 감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니아를 살해하기 전에 몹시 주저하였고, 그것도 오직 신탁 때문에 딸을 살해한 것이지만, 클리템네스트라는 치밀한 계산 하에, 그것도 증오심 때문에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가멤논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그를 증오했지만, 클리템네스트라 역시 부정을 저질렀다. 아가멤논의 정부는 카산트라였는데, 그녀는 트로이 군대가 바친 선물이었으며, 더욱이 고통을 대하는 그녀의 굳건한 인내심이 동정심을 자아내는 트로이의 공주였다. 그러나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부 에이스토스는 그 어떠한 이유라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근친상간의 간음자이다. 클리템네스트라가 그를 사랑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티에스에테스가 과거에 저지른 간음에 대해 아트레우스가 보복한다는 차원에서 이해자면 여왕의 간음에도 일말의 시적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죄 행위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의 근친상간적인 간음 행위는, 극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녀가 아무리 자신의 행위를 전적으로 정의에 입각한 인과응보였노라고 주장하여도, 그녀의 이같은 탄원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 된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신을 저주의 화신으로 몰아 부친 것은 그 옛날에 아트레우스의 자식들에게 퍼부었던 티에스테스의 저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코러스는 그녀의 주장 가운데 일부만을 수긍하면서, 선조의 원한의 영인 알라스토르는 그녀의 죄를 선동한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교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코러스는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만일 이피게니아 때문에 남편을 살해한 것이라면, 전통 의식에 따라 씰김국(purification)을 해서 그 죄를 정화하라고 요청한다. 그렇지만 클리템네스트라는 이같은 코러스의 제안을 거절해 버린다.
클리템네스트라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내세울 수 있는 주요 동기는 살해당한 자식의 복수를 해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도덕적 의무이다. 클리템네스트라 역시 이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은 당연히 무죄라고 자장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행위가 오히려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문의 저주를 종식시켰노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나이든 장로들 가운데 일부는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모든 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님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러스는 클리템네스트라의 탄원을 묵살해 버린다. 클리템네스트라는 에스킬러스적 딜레마에 빠진 희생자이다. 에스킬러스적 딜레마란 어떤 인물이 어느 관점에서 보면 옳을 뿐만 아니라 도덕상 당연히 요구되어야 할 일이,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는 옳지 못하여 금지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클리템네스트라의 범죄 역시 전적으로 사악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녀의 범죄를 야기한 여러 충동들 가운데 적어도 한가지만은 고귀하다. 그렇지만 결행한 대리자라고 해서 그녀가 결코 무죄한 것은 아니다.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그러는 동안에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선택했었고, 그녀가 택한 모든 결정은 비단 어머니로서의 의무감에 의해서만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열등한 여러 동기들이 뒤섞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약에 클리템네스느라가 선택을 잘못해서 스스로를 저주의 도구로 삼았다면, 자신을 저주의 대상으로 만든 것 또한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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