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시의 길을 살아온 평생 - 황금찬'시인'
1918 년 강원도 속초 출생. 일본 다이토학원 중퇴. 1953 년 '문예'에 시'경주를 지나며'와 1955 년 '접동새''여운' 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함. 시문학상, 월탄문학산, 대한민국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수상. 저서에 시집 '현장', '5월의 나무', '나비와 분수', '오후의 한강', '산새', '구름과 바위', '한강' 외 다수가 있음.
많은 유혹을 물리쳤다.
어느 친구가 내게 묻는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어떤 직업을 갖겠느냐?" 나는 단호히 말했다. "나는 시인이 되겠다." "또 한 번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는 무슨 직업을 갖겠는가?" 나는 또 단호히 말했다. "나는 그때에도 시인이 되겠다."
나는 열 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겟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말한다.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시인이 안 되었으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없다.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대도 할 수 있는 일은 노동과 시쓰는 일뿐이다. 그것도 남만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노동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노동과 시쓰는 일 외에 그래도 있다면 아마도 남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남만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했을 뿐이다. 시만을 써서 살 수가 없으니까, 노동 대신 택한 것이 교사의 일이었다. 시만을 써서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 버리고 시만을 썼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대충 세 가지 일을 해보았다. 학생 때에 열심히 한 일은 노동이었다. 참으로 힘든 일을 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으며 노동을 했다. 그때 그 노동도 결국 시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택한 것이 교직이었다. 교직 생활도 시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시는 나의 삶의 전부였다. 내 삶에서 시를 우선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 시가 우선했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만 33 년을 있었고 대학에도 20 년 이상 있었다. 그렇지만 직업인으로 직장을 삼지 않고 시인으로 직장을 삼았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도 시도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일은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능력이 없는 관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시업의 방해가 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교직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감투를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략하고 중상하고 온갖 짓들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교직을 통하여 윗자리를 노리고들 있지만 나는 교직을 통하여 좋은 시를 쓰려고 했다. 그렇다고 좋은 시를 썼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마음만 두고 있을 뿐 내가 쓰고 싶은 좋은 시는 못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바라던 시 한편을 못 쓰고 만다 하여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그것만으로 나는 흡족하다. 교직에 오래 있으면서 별의별 권유와 유혹을 다 받았다. 어느 사범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게 교무주임 자리를 주면서 하라고 했다. 완강히 거절했다. 계속하라고 하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까지 하여 겨우 면했다.
다른 직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교무주임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라고 사양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 내가 극력 사양하자 동료 몇 사람이 나를 찾아와 자기를 교무주임으로 추천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그것을 명예직으로 하여 장차 교장까지 바라보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기도 했겠지만 나는 교장이고 무어고 바라는 게 없으니까 그러했으리라. 그후 어느 시골 학교에서 교감으로 오라고 사람을 보내 왔었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그 무렵 김흠광 목사님이 어느 학교가 있는 교회에 전도사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전도사로 2 년만 사무하면 곧 목사로 안수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본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 주일 학교 선생과 교회 합창단을 늘 돕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내게 목사가 되라고 여러 번 권유도 하였다. 내가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인이지 그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김목사의 권유도 뿌리치고 말았다.
이광수와 유진오를 만나다.
하나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 추천을 받으려고 한 것은 1939 년의 일이다. 1939 년 '문장'지가 새로 발간되었다. 거기 추천 제도가 새로 생겼다. 시는 3 회를 추천받으면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이다. 그 '문장'을 구독하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가슴이 벅차 있었다. 나도 추천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시 몇 편을 '문장'에 보내고 추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추천은 되지 않았다. 그후 '문장'지에 추천되는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김종환 들의 시를 읽고 나는 놀라기도 했고 내가 쓴 것은 시가 아니라 유행가 가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 추천투고를 중지하고 다시 시작 공부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시를 쓴다고 하지만 시를 어떻게 쓰는지, 또 시인 한 사람 만나본 일도 없이 그저 혼자 공부하고 있었으니 시의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나의 시작 수련의 길은 참으로 고독하고 슬픈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참고 견디며 열심히 그 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고 지방의 보잘것없는 신문에 시랍시고 몇 번 발표한 일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시를 발표한 것은 1947 년 작가 전영택이 하던 '새사람'이란 잡지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작품이 졸작이어서 마음의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던 작품이었다.
내가 동경 시절, 그러니까 1942 년과 1943 년 그때 우리들이 나가던 교회가 있었다. 완전히 학생들의 교회였다. 그 교회 이름은 간다교회로 나는 목사님의 청으로 매주 교회 주보에 시 한 편씩을 실었다. 그것을 약 1 년 반이나 계속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이젠 시를 주보에 실을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강하게 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의 서글펐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시의 길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1951 년에 강릉에서 '청포도' 동인지를 발간했다. 최인희, 김유진, 이인수, 함혜련 그리고 나 그렇게 동인이 되었다. 그때 지방에는 인쇄할 만한 곳이 없어 부산까지 가서 책을 만들었다. 그 고생 이야기를 여기에 다 할 수는 없다. 1949 년에 박목월 시인이 '시문학'이란 잡지를 발간했다. 1950 년 '시문학' 제2집 발간에 내 시가 추천되었다. 한데 추천사만 실려 있고 시는 실려 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지훈이 그 시고를 가지고 다니다가 취중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의 시도는 남들보다 험했고 멀었다. 내가 처음 '문예'에 추천받은 것이 1953 년으로 '경주를 지나며'였다. 그땐 '문장'과 같이 3 회를 추천받아야 등단하게 되는 것이다. 1954 년 두 번째 작품이 추천되었다. '문예'지가 한 10일 있으면 나온다더니 제작비가 없어서 그만 폐간되고 말았다.
참으로 나의 시도는 기구하였다. 그후 나는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마쳤다. 시도는 준엄한 길이었지만 슬픈 길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 시의 길이 희망의 길로만 생각되었다. 1943 년 동경에서 이광수, 유진오, 박영희, 그분들을 만났을 때 그들로부터 문학의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특히 이광수 선생과 여러 차례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내가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말과 글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하여도 문학은 해야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역시 민족으로 남을 터이니까. 이 시대가 이렇게 어렵다 하여도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고 남겨 놓아야 합니다." 나는 그분의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말과 글이 없어지고 나면 무슨 말로 글을 써야 합니까?" 그때 그분은, "일본말로라도 써야 합니다. 글을 쓴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문제이지 글이나 말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요. 세월이 흘러간 다음에 이 글은 그때 한국 사람이 쓴 글이라고 전해져야 합니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우리말 아닌 남의 말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유진오도, "우리가 일본말을 잘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 일본 사람만은 못하다. 그렇게 못하는 말로 문학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붓을 꺾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후 일본말로도 약간의 글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1941년에 우리말로 되어 있던 신문이나 잡지는 한 가지도 남김없이 모두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그리고 유일한 문학 잡지였던 '문장'과 외국 문학을 많이 소개하고 평론을 주로 싣던 지성의 잡지 '인문평론'도 폐간되었다. 매일신보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신문이 아니었다. 일본말을 가르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 신문이었다.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1940 년대 초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의 한 5 년 동안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우리말과 우리 글로 과연 문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또는 아무리 일본이 강하다 해도 결국 이 전쟁은 미국에 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데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도 남아 있을 민족은 없다. 이 무렵 나는 아주 작은 산간 마을에 숨어 들어서 철학서를 탐독하며 시를 공부하였다. 결국 내가 쓰는 시가 빛을 못 보고 만다고 해도 나는 시를 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온 해가 1954 년이다. 내가 서울로 이사한 것도 시 공부를 좀더 깊이 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나는 서울에 와서도 학교 생활을 했다. 해마다 봄이 되어 학교 사무 담당이 바뀔 때마다 내게 명령조로 학교장이 지시하는 것이었다. 교무주임을 맡으라느니, 연구주임을 맡으라느니, 심지어 생활주임을 맡으라느니, 그 압력이 많이 가해져 왔지만 나는 그것을 단 하루도 맡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시도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하나 학교 수업만은 누구 못지않게 충실히 했다. 남들은 그렇게도 선호하는 윗자리의 직책을 나는 무슨 형벌처럼 절대 거절했던 것이다. 내 일종의 고집을 안 어느 학교장은 내게 그 점을 존경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편한 것을 좋아할 줄 안다. 하지만 나의 시도에 방해되는 일은 어떠한 것이라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965 년에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천에서 제일 이름있는 여학교에 교장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것은 거절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교장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그런 것은 관계하지 말고 승낙하라는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달았다. 나는 학교에 오래 있었으나 행정과 사무를 전혀 몰라 교장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의 모든 일은 서무가 할 것이고 교무는 교감과 교무주임이 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며 교장 기밀비도 약간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느냐. 수업도 없고 시 공부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란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갈 곳은 아니라고 단정하고 거절했다. 그 친구는 내게 "좀 쉽게 잘살아 보라고 했더니 끝내 거절이로군. 앞으론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후회할 날이 있을 걸세"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후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연코 장담해 둘 수 있다.
난 고등학교에 있으면서 어느 야간 대학 기독교 문학과의 주임교수로 있으면서도 그랬고, 한신대나 추계예술대에 출강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람에게 가장 보람된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가 선택한 일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일생을 바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성과는 따지지 않고 자기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보람된 일일 것이라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하나 다른 사업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면 흥하나 망하나 그 결과가 완전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 시의 길은 자기의 일생을 바쳤음에도 그 흥망의 결과를 볼 수 없다.
사람이 가는 길이 어디 편하고 쉬운 길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이 예술의 길처럼 험하고 고독한 길은 없다. 더구나 시의 길은 저 높고 험한 산을 열어 길을 새로 내는 일이다. 그리고 자기가 낸 길을 자기가 혼자 걸어가는 일이다. 그 길엔 길벗이 없다. 간혹 뻐꾹새가 울어 줄 뿐이다. 나는 그렇게도 고독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누가 내게 시의 길을 택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행복했노라"고 대답하리라. 이 산을 넘어가면 저기에 꽃의 호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꽃의 호수는 거기에도 없었다. 다만 가는 길 옆에 몇 송이의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시의 길은 멀고도 한없이 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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