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달 표면에 호텔이 즐비하다 - 이호철(소설가)
1932 년 함남 원산 출생. 1956 년 '문학 예술'에 '탈향'과 '나상'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데뷔함. 1961 년 현대문학 신인상, 1962 년 동인문학상 수상. 자유실천 문인협회 대표 역임. 저서에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큰 산', '이단자', '인생대리점', '남풍북풍', '그 겨울 긴 계곡', '월남한 사람들', '서울은 만원이다' 외 다수가 있음.
인간 철학의 기둥
17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홉킨스에게 '리버이어선'이라는 저서가 있다. 그는 인간의 성향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힘에의 욕망'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마치 새싹이 돋아오르듯이 문득 땅속으로부터 머리를 쳐들고 태어나 서로 아무런 구속도 받는 일 없이 자라난 상태로서 상정해 보면,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 있는 한, 인간은 상대방을 말살하기까지 싸울 길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는 죽음의 공포야말로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타인과 경쟁하고 타인에 대한 자신의 우월 의식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허영심'과 이 '죽음의 공포' 두가지에서, 홉스는 근대인의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특색을 미리 보아냈던 것이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홉스는 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와 비교해 보았을 때의 홉스의 특색은 그의 도덕, 정치 철학에 있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는 도덕을 여느 모든 학문에 관한 지식을 사그리 섭취한 뒤의 '지혜의 마지막 단계'에다 위치시키면서 끝내 그 도덕 철학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홉스는 '리버이어선'을 비롯한 몇몇 저작을 통해 그의 도덕, 정치 철학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켜서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자연 본성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그 자연권을 보다 더 잘 가꾸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성의 계산을 통한 자연법(도덕)을 발견하고, 계약을 통해서 국가라는 것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죽음의 공포'를 밑자락에 깔고 자연이성에 기대어서 살아간다. 그렇게 인간 본성의 발현인 자연권의 포기를 결의하면서 계약에 의해서 단체(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권력에 의해 생존을 보장받는다.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17세기 중엽 영국 시민 혁명의 중요한 담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영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근대적인 국가를 꾸려 내고 인간의 발전과 생존을 확보해 내려고 한 사람들에게 사상적인 기둥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늘날까지는 근대적인 민주 국가론과 함께, 범세계적인 지도 원리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온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한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작금년에 보는 것처럼 구소련과 동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으로, 최근에는 일찍이 마르크스 자신이 홉스의 인간관을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보았던 그 점이야 말로, 어쩌면 마르크스 쪽의 인간관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보여지고 있다.
어쨌든 간에 홉스의 근대적 의미와는 단지 그 도덕, 정치 철학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차라리 홉스는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갈릴레오에 걸친 근대 자연과학의 원리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섭취하면서, 자연, 인간, 국가를 관통하는 철학 전체의 근대화를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홉스에 있어서는 자연의 유일한 실재는 물체이고, 모든 자연 현상은 이 물체의 인과적인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었다. 물론 인간은 일단 한번 그러한 자연의 인과법칙을 알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거꾸로 자연에다 작용시켜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리하여 자연상의 완전한 기계론화가 성취되면서 도덕, 정치 철학도 그 연장선 위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홉스적인 것에 의해 처음에 열려졌던 근대라는 지평을 찬미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자연상의 기계론은 확실히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림으로써 야기된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모두에 언급된 '허영심'과 '죽음의 공포'조차, 자연을 지나치게 객체화하여, 그로부터 이탈해간 사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홉스와 동시대의 시인 한 사람인 카울리는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의 홉스의 위치를 신대륙 발견에서의 콜럼버스와 비견했지만, 사실 홉스는 차라리 콜럼버스의 위업을 이어받아서 세계 일주를 해낸 마젤란에 더 가깝지 않은가 보여지기도 한다.
시공 개념을 무한대로
그러나 시야를 한번 양껏 넓혀 보자. 여기서 시야를 양껏 넓힌다는 것은, 우리 일상 의식 속의 시공 개념을 무한대로 한번 늘여 보자는 것이다. 가령,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지구 역사 전체를 하루로 압축해 볼 때, 원시인 네안데르탈인이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2초가 채 못 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이 시작된 것은 0.1초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명의 역사는 생물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의 역사였다. 지구 위의 동물의 생활 형태와 습성은 적지 않게 환경에 의해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지구 위에 하나의 씨앗, 즉 인류가 저들이 살아오고 살아가고 있는 자연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된 것은 금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인 것이다."라고 한 과학자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오로지 과학을 믿고 기술을 믿고 있는 것이 오늘의 일반 추세이다. 그 과학 기술의 최첨단 산물인 핵융합과 핵분열은 인류가 이제까지 이루어낸 일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핵융합과 핵분열은 지구를 송두리째 황폐한 사막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고, 거꾸로 사막에다 꽃을 피울 수도 있다. 이것은 인류가 결코 악용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위력으로 등장했다. 한편, 최근에 와서 우리 인류는 우주 시대로 진입, 앞으로 30 년이나 50 년쯤 뒤에는 작금에 해외 여행을 즐기듯이 우주 여행에 나서고 달 표면에 호텔이 즐비하게 늘어날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러한 미래를 우리 전망권에 현실로서 등장시키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텔레비전 화면으로 위성 카메라가 포착한 우리 지구의 모습을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에 하나 청색 축구공처럼 달랑 떠서 빙글빙글 혼자서 귀엽게 돌아가고 있는, 외롭디외로운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는, 우리 지구덩이의 모습을 노상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 한동안만 신기로웠을 뿐, 매일처럼 보면서 어느새 그 광경에도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다 못해 거의 무감각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게 보통 일인가. 새로운 우주 시대가 열렸다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어느 만큼이나 그 새로운 우주 감각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새로운 우주 시대의 개막이라곤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감각은 여전히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세계상이나 우주관에 그대로 깊이 젖어 있고 매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8일간의 우주 비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하나가 이렇게 말한다.
"우주에서 내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배설물을 받아내는 일이어서 변소엘 가다가 하나밖에 없는 창으로 밖을 내다본즉, 칠흑으로 새까말 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게 우주로구나 생각하면서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더니 파란 청색 지구가 보이지 뭡니까. 청색이라기보다 청백색으로 빛나고 있는 신비로운 지구가 보였어요. 정말로 우주로 왔구나, 저게 지구로구나 하고 와락 흥분이 됩디다. 우주는 그 무엇이나 빨아들일 듯이 새까말 뿐, 아무것도 없는 칠흑이에요. 그 속에 별들은 반짝임없이 걸려 있어요. 한편으로 지구가 보였을 때는 청백색의 불꽃마냥 빛나고 있지 뭡니까. 그 순간, 아아 지구는 아름답구나, 하고 느꼈지요." 이어서 그는 말한다.
"칠흑으로 새까만 우주 속에 진백색의 태양을 보았을 때, 저 에네르기를 직접 쐬면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그 태양 광선도 대기층을 통과하면서는, 우리가 늘 익숙해져 있는 그 부드러운 빛살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대기층의 두께는 겨우 1백 킬로미터. 사과 한 알을 지구 덩어리로 친다면, 대기층 두께는 그 껍질만 할 겁니다. 우리들이 평상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대기층은 나약한 것이고 오염되기 쉬운 것이더군요. 어느 한 나라만 따로 떼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그대로 이어져 있더군요. 한반도의 서울과 평양이 저렇게도 가까이 붙어 있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지도 위에서는 뚜렷한 선으로 국경선이라는 게 그어져 있지만, 우주로부터는 그 어떤 국경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영혼을 지닌 우주
자,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거론한 홉스를 생각해 보자. 사실은 그가 언급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두 가지 요소로 보았던 '허영심'과 '죽음의 공포'조차 자연을 지나치게 객체화하여, 자연 그 자체로부터 이탈해 간 사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 새삼 곱씹혀진다. 그리하여 우리 인류사 전체를 좀더 큰 시야에다 담아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홉스적 인간관이나 세계상만이 있어왔던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가령 기원 전후의 약 4백 년간에 걸쳐 고대 로마에 흥성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우주 감각이 그러하고, 더 나아가서 '우주 국가'라는 사상이 그러하다. 본시 스토아주의에는 희랍의 도시 국가가 붕괴된 뒤, 광대한 세계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던 '세계 시민'이라는 철학의 성향이 있었던 것이어서, 바로 오늘날 우주 시대로 접어드는 우리의 상황과 일맥 상통한 것이 있다. 그때까지는 국가라고 하면 일정한 취락을 성벽으로 에워싼 도시 국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 도시 속의 사람들의 삶을 감당하자면, 도시 식량을 생산해 내는 논밭도 있어야 했고, 사람들은 도시 경제나 도시 국가 서로간의 대립을 넘어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를 희망했고, 우주로서의 비상까지도 끊임없이 꿈꾸어 왔던 것이다. 통 속의 철인 디오게네스가 '우주 시민'이라고 스스로 자처했던 것도 그런 일환이었을 터이다.
그렇게 상정된 우주 국가는 더러는 사람들과 신들이 한데 뒤섞여서 이루어진 조직체로도 불리며, 그 속에 신격화된 천체나 자연 현상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였으면서도 스토아적 정신에 따라 간소한 생활을 했고, 이교도들에게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관대했다. 그가 후세에 남긴'자성록'은 스토아주의의 대표적인 저서의 하나로서 많은 명언들이 남겨져 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더러는 깜짝 놀랄만한 새 시야를 열어 주곤 한다. 가령 그는 우주와의 일체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우주를 하나의 영혼을 지닌 하나의 살아 있는 생물로 늘 생각하라. 또한, 만물이 어떤 방법으로써 우주라는 하나의 감성으로 귀일되며, 우주는 어떤 길로써 하나인 욕구로부터 저 모든 일을 해내는가, 또 직물이나 실타래와 같은 우주의 연결이나 조직이 어떻게 생겨 있겠는가, 그런 것을 두루두루 끊임없이 생각하라"라고.
그리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하면, 우주로부터 자신을 떼어 낸다는 것은 바로 손이나 발을 몸뚱이로부터 떼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향해 본원적으로 묻는다.
"너는 저 우주의 본질적인 통일로부터, 어디 엉뚱한 곳에 다가 자신을 내던져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잇대어서 그는 말한다. "애시당초에 그 통일체의 일부분으로서 너는 태어났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때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다시금 자신의 통일을 되찾을 능력과 가능성을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라고. 결국 아우렐리우스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은 마음의 편안과 평정뿐이 아니었다. "너의 내면을(수직으로) 파들어가라. 샘은 마음 그 안에 있다. 네가 간단없이 파들어가면, 항상 용솟음치는 힘을 지니게 되고, 또한 선을 해내는 샘이 그곳에 있게 될 터인즉......"
그대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오늘로 다시 문득 돌아와 보자. 우리 지구에서 쏘아 올린 우주선에서 건너다본 땅덩어리, 청백색 축구공과도 같은 지구 덩이의 모습을 새삼 떠올려 보자. 그위에서 아글바글 살고 있는 우리 인류의 존재에 생각이 미칠 때, 차라리 그 옛날 아우렐리우스의 그 몇 마디 말씀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싸목싸목 젖어 오지 않는가.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우주 시대로 접어들면서 삶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의 윤곽은 이상의 글 속에 이미 잡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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