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자기 창조로 이루어지는 생 - 유안진(시인)
1941 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사범대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1966 년 '현대문학'에 '달' 등으로 문단에 데뷔함.
인생은 완행 열차를 타고
뛰지마! 그러면 그대는 보아낼 수 있어 그대 주위의 수많은 아름다움들을 꽃 속마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는 걸 그대는 모르지? 뛰지마! 그러면 그대는 찾아낼 수 있어 길섶이 돌틈새에 그대만을 기다리는 다이아몬드를 멈춰 서면 알 수 있어 그대는 많이 뛰어왔지만 항상 그 자린 걸 그대 아는가?
이 가사는 지난 시대 이태리 청년들에게 유행되었다는 칸초네이다. 당시 이태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고 신속한 기계병에 결려 있었다. 기계 문명에 대한 과신으로 산업화의 열병이 이태리에 전염된 대였으니까. 그런 열병에 시달리는 세상에서도 이태리 청년들은 이런 칸초네를 지어 불렀으니, 얼마나 현명한 세대였는가. 가을이 오고 있다. 시의 계절 가을이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일어나 시의 계절 가을 속으로, 아니 나의 고향 시속으로, 가을 고향으로 다가가야 하라. 시란, 고향이란, 눈부시게 화려하고 대단스럽고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와 고향은 버려진 듯 존재하고 없는 듯하지만, 실상은 놀랍고 기막힌 힘인 정신의 세상이 아닌가.
나도 뛰지 말고 천천히 걸으면서, 아니 제일 느린 완행 열차를 타고 가을 고향으로 돌아가리가. 내가 찾는 진정한 기쁨이란 내 주위 꽃 속에 있다는 것도 보아내면서 길섶 돌틈 사이에 나만을 위해 숨어 있는 다이아몬드보다 값진 그 무엇을 찾아내어 갖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건 걸어왔다기보단 뛰어왔다. 내 온 힘을 다해 앞만 보고 초고속으로 뛰어만 온 듯, 그러느라 진짜 중요한 것은 못 보고 못 갖고, 중요치도 않은 것만을 움켜잡은 셈이 된 듯.
이 가을, 나는 느리디느린 달구지 같은 중앙선 완행 열차를 타고 가을 고향으로 가고 싶다. 급행과 특급들이 뛰듯이 빨리 달리느라고 멈춰 서지 않는 서너 평짜리 역사 한 칸뿐인 간이역이 죄지은 듯 미안스레 서 있으리. 그런 간이역 하나도 못본 체로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일일이 멈추어서 안부를 묻듯 위로해 주듯 격려하고, 한두 마디 정담으로 사랑과 친애를 확인받는 완행을 타고 싶다. 초라해서 미안해요. 마음만큼 웃고 얼싸안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런 마음 그대로 안 보일 때까지도 갈대꽃 같은 손을 흔들어 주는 고향 이웃 같은 간이역을 만나러 완행 열차에 몸을 얹고 싶다.
서울은 너무 바빠. 그래서 사람 아닌 초고속 기계들만 살 뿐이지. 나도 그런 기계의 일부로서, 부속품으로서 몸이 망그러지고 기능이 쇠퇴하여 심신이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져 버렸지. 그러나 고향은 아직도 농경시대. 초고속 정보산업시대인 서울과는 너무 다른 인간 세계지. 말도 걸음도 행동도 느리고, 그래서 이웃집의 고뿔 않는 소리까지 다 알아듣게 되고, 그래서 주변의 아름다운 눈물겹도록 정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감동하며 살고들 있지. 개똥밭에도 풀섶에도 장마비에 무너진 토담 아래도 보석보다 값진 창조주의 신비와 비밀이 빠끔히 내다보며 깍꿍! 하고 인사하는 것도 보아내고 찾아내고 누리며 살 수 있지.
내 아이 적 기차 철로에 엎드려 귀를 대고 기차 오는 소리를 듣던 그 흥분된 가슴이 쿵쿵 뛰던 꿈의 세상을 떠올리며,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고 눈부시던 미래를 다시 찾아보기 위해서 강물을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다가 꼬리를 감추어 버리고 마는 기찻길을 따라서 완행 열차를 타고 가듯 인생을 살아가야지. 긴긴 휘파람을 남기고 떠나간 철로변에 가을 갈대꽃처럼 서서, 작아도 하얀 손을 한정없이 흔들어 주었지. 흔들다가 팔이 아파 손을 내리고 보면, 무릎까지 발돋움한 보랏빛 들국화가 앙증스런 낯을 쳐들고 나를 쳐다보며 뭔가를 재잘재잘 일러바치는 뒷집 동생 아이들 같았지.
완행 열차 차창에 이마를 대고 앉아, 가을볕에 피어난 그 옛날의 갈대꽃과 그들 국화들이 스쳐 지나 버려도, 내 얼굴을 알아보곤 소리치며 손흔들며 팔짝팔짝 뛰면서 반가워해 줄 듯. 눈곱보다 작은 얼굴의 코발트빛 달개비꽃, 산에서 갓 내려온 하얀 구절초, 조랑빛 개국과, 개망초와 물망초, 꼬리치는 강아지꽃이 어울려 떼지어 다니는 논두렁길도 내다보리.
연인을 찾아가듯 가을 고향을 찾아가고 싶다. 입대한 동급생을 사랑한 처녀가 낯선 전방으로 첫 위문을 가듯이, 그런 흥분과 감미로운 꿈과 낭만으로 가을 들녘, 가을 산, 가을 수풀, 가을 열매, 가을 시내와 가을 하늘...... 모든 것을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보고 느끼며 감동하면서 완행 열차를 타고 싶다.
그리움과 사랑의 가슴이면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닿는 것...... 모두가 아름답고 신비롭고 감사하게 느껴지듯, 그런 가슴으로 캄캄 굴속과 태백의 준엄한 옆모습, 뒷모습, 앞모습을 먼 듯 가까이 바라보며, 그 가슴에 피어난 크고 작은 나무와 수풀과 꽃과 열매와 단풍도 바라보고 싶다. 그 가슴의 산줄기와 깊은 골짜기와 애잔한 개울과 수줍게 엎드린 언덕과 죄지은 듯 움츠린 구렁도 눈물겨운 아픔으로 바라보고 싶다. 꼭같은 나무들이, 수풀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단풍이 들었고, 각기 다른 소리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내다보며, 사람 사는 것도 저와 마찬가지라고 느끼게 되리.
특급을 탔더라면, 비행기를 탔더라면 놓치고 말았을 아름다움과 소중한 풍경들을. 뛰지 말고 걷자. 걸으면서 둘러보고 느끼고 나누고 주고받으며 걷다가 더러는 멈춰 서서 내 발자국 찍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생각도 하면서, 아니 때로는 뒤돌아가서 들르고도 몰랐던 내 것들을 찾아가지고 와서 요긴하게 사용하자. 너무 성급히 뛰다 보면 많은 것을 흘린 채 너무 멀리까지 와버리게 되지. 그래서 돌아봐도 안 보이고, 보인다 해도 다시 되돌아가서 찾아갖고 오기에는 너무 늦어 버리게 되지.
인생은 특급 열차도 비행기길도 아니리. 걷거나 적어도 완행을 타고 가듯 천천히 좌우사방 둘러보며 음미하고 살다가 가는 길이 아닐까. 인생이 어찌 초특급 열차나 비행기를 탄 듯 단숨에 잠깐 달리듯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일까?
나는 늘 기계에 서툴다. 자동차에 컴퓨터에 워드 프로세서에도. 그래서 내 인생도 이들 기계처럼 능률적이기보다는 탐미적이고 관조적인 듯. 안 보이는 따스함과 눈물겨운 위로를 더 탐하며 걷고 멈춰 서고 뒤돌아가 다시 가져오면서. 앞뒤좌우 안 살피는 돌진은 사고이지 목표 성취는 아니리. 소유와 승진과 향락과 위엄으로 돌진하기보다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완행을 타듯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
인생도 고쳐 가며
비교적 헌 옷을 못 버리며 산다. 아까워서 못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씩 고쳐 가며 입는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헌 옷만을 고쳐 입는 것이 아니라,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새 옷도 곧잘 고쳐 입곤 한다. 요즘은 기성복 시대라서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사람과 우연히 만나기도 한다. 똑같은 옷을 입은 낯선 이와의 마주침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나 역시 대량 생산의 기성품 시대에 허다한 규격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렇게 하며 가볍게 고쳐 입곤 하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은 처음에는 같은 색깔의 비슷한 옷을 두 가지나 샀는냐고 묻기도 한다. 이쯤 되고 보니, 어느 때고 새 옷을 입고 가도 헌 옷을 좀 고쳐 입은 것이 아니냐는 억울한(?) 얘기도 듣는다. 하도 고쳐 입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는 얘기이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다. 20 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표준 키였는데, 어느새 표준 키가 커져서 억울하게 작은 축에 들게 된 것이다. 아니 기성복의 길이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옷을 사면 길이를 조금 잘라내어야 내 키에 맞기 때문에, 잘라낸 부분으로 소매나 깃 등에 주름을 잡아 붙여 입기도 한다. 팔이나 목덜미가 드러나는 옷을 싫어하니까, 그렇게 하여 감출 수가 있다. 고작 이 정도로 고쳐 입지만, 옷을 고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우리 인생이 가볍게 이 정도만 고쳐져도 새롭고 색다른 모양과 분위기로 바뀌어지지 않을까라고.
옷을 고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인생 고치기에 대한 확신 비슷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잘 모르며, 살아가면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알수록 자기에게 맞게 자신의 어떤 허약점을 고쳐 가며 살 수 있고, 그래야 만이 자기다운 인생이라는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비관론자였던 것 같다. 인생은 괴롭고 고통스럽지 않으면 인생다운 인생이 아니라는. 그래서 늘 세상을 떠나 뜬구름 같은 나그네나 돌팔이 무적 승려쯤이 되고 싶고, 지금도 이 증세가 발작하면 지독한 염세에 빠지곤 한다. 그런 때는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헌 옷을 꺼내어 고치곤 한다. 옷을 고치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것이 아니다라고, 비관론자인 나의 본질도 본질대로 살 것이 아니다라고, 즉 누군가가 수없이 많이 만들어낸 옷 중의 하나를 사서 그 옷대로 입고 살 것이 아니라, 내 생김에 맞게 내 일하기에 편하게 고쳐 입듯 신이 만들어 준 내 기질도 내게 맞게 고쳐 가며 살아야 된다고. 그래서 나는 낙천적이 되려 애쓰고 낙천적.긍정적.적극적이 되고 싶다.
정말이지 비관적이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 본성도 어느 정도 바뀌어지긴 했으니 내 옷을 고칠 때마다, 고친 옷을 입을 때마다 굳혀진 덕분일까? 막내동생은 유치원 때부터 신장병으로 고생해 왔다. 그래서 유난스레 허약하며 매사에 조심해도 병이 떠나지 않았으나, 북부 캐나다 에드먼튼의 영하 40 도의 강추위를 5 년씩이나 견디면서 심신을 함께 고쳤다. 무척이나 대견스러운 것은 박사 학위를 얻은 것이나 우수 논문으로 그 대학에서 출판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막내의 기질이 허약 체질도 아닌 단단하고 강인한 심신으로 고쳐진 것이다.
인생도 옷을 고치듯이 고쳐 가며 살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 창조라 했을 것이다. 신은 그러한 고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인간을 지으셨다. 그것이 곧 신이 주신 기회이며 우리의 희망이리니, 어찌 적극적으로 이 기회를 활용하지 않을 것인가. 문득 입던 외투도 고쳐 입고 싶어 진다.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마테를링크의 동화극에 '파랑새'가 있다. 이 동화극은 이런 내용으로 요약된다.
마술 할미가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 남매는 마술 할미의 부탁으로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숲을 지나서 '행복의 궁전'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들 남매는 행복의 궁전에서 물질적 행복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보게 된다. 그리고는 진정한 참행복이란 건강과 정의, 모성적 사랑 등이라고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는 자기들 마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계시받게 되고, '미래의 나라'에서 꿈을 깨게 된다. 꿈에서 깨어보니, 자기 집의 비둘기가 파랑색인 것을 보게 되며, 이들 남매는 그 비둘기를 마술 할미에게 준다. 파랑 비둘기를 받자, 앓고 있던 마술 할미의 딸은 병이 나았다. 그러나 그 비둘기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 "저 새를 찾는 이는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이렇게 치르치르가 외치면서 동화극은 막을 내린다.
마테를링크는 치르치르 남매의 입을 통하여 행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먼저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라고 하며,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행복한 마음으로 보면 비둘기도 파랑새가 되는 것이니, 행복이란 결국 자기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또한 행복이란 파랑새와 같이 가졌다고 느낄 때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닐까? 작가는 어린이의 입을 통해서 분명히 말했다. 행복이란, 진정한 참행복이란 건강, 정의, 모성적 사랑 등이라고.
건강한 사람은 행복의 첫째 조건을 이미 갖춘 것이다. 미인이냐 아니냐 보다는, 건강한가 아닌가가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는 것은 아파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 그래서 우리의 오복에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 천수를 누리다가 제 명에 죽는 것을 수와 고종명으로 보았으리라. 그 다음이 정의 또는 우리의 오복에서 말하는 유호덕이나 강령과 관계되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며 내 가정, 내 직장, 내 사회가 행복해야 진정한 행복이 되리. 이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사회가 정의에 바탕을 둔 덕스럽고 화평스런 분위기인 것을 뜻하지 않을까? 몸의 건강만이 아닌 마음의 건강이 곧 정의와 강령과 유호덕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라는 소속 집단의 심리 상태의 건강을 뜻하는 게 아닐까? 그러고 나서 사랑, 특히 모성적 사랑은 모든 행복의 완성으로서 필요한 조건인 듯.
엄마를 찾아 울던 아기는 엄마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할 수 있다. 사랑 중의 최고는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 같은 모성적 사랑인 듯. 그래서 모든 종교, 특히 카톨릭에서는 아들 예수의 십자가 참형까지 체험한 참혹한 심정에서 우러난 무한한 자비와 인내, 용서를 통합한 성은의 사랑을 기구하게 되는 듯하다. 그런 사랑을 받는 이도 행복하지만, 이런 사랑을 베풀어줄 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바로 이런 모성적 사랑이 곧 유호덕과 통하지 않을까? 이런 사랑에도 사랑하는 슬픔과 안타까움, 아픔과 고통이 왜 없으랴. 따라서 행복에도 슬퍼하는 행복, 아파하는 행복이 포함되지 않을까?
"저만큼 가거라 뒤티(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티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티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입 속을 보자."
이도령이 춘향과 이별하러 가서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몽룡의 아픈 행복, 그래서 행복은 사랑하는 기쁨 외에 고통까지도 포함하게 되리.
행복은 이렇게 쉽고 편안한 웃음만이 아닌 고통스러운 기쁨, 힘든 극복의 기쁨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행복을 부산물로 여긴다. 즉 목표 그 자체가 아닌 목표 달성에 부수되는 감정, 즉 부산물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행복은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긴 하지만, 사랑이나 일의 성취, 즉 자기 능력을 시험하며 그 기대한 결과를 바라보고 만족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것이니, 행복의 조건에는 긴장과 스트레스, 힘든 목표 설정과 고통을 극복하는 인내, 때로 좌절하는 슬픔과 아픔, 놓치고 다시 좇는 안타까움 등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고통, 긴장, 슬픔, 아픔 등을 불행이라고 여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목표 성취를 위한 노력으로서 기쁘게 여기는 이가 있으니, 꼭같은 것이 누구에겐 불행이 되기도 하고 누구에겐 행복이 되기도 하는 것, 따라서 행복도, 행복의 조건도 같은 것이 각자에 따라 결국 다르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이런 험상궂은 가시나무에도 이처럼 기막히게 아름다운 꽃이 피다니!'라고 장미를 보고 감탄하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예쁜 꽃나무에 이런 험상궂은 가시가 돋히다니?'라고 분노하는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닐까? '평양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니, '제 눈에 안경'이니 등의 말은, 행복이 남보기 좋은 어떤 객관적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좋은 표현이 아닌가.
금배지를 달고 싶어 가산을 탕진하며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이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행복할 수 있으리. 그러나 자신의 결혼반지를 팔아서 남편이 원하는 시집을 출판해 주어야 하는 여성은 시인의 아내라는 말 한마디로써도 행복할 수 있다. 여름 감기 몸살에 시달리는 나같이 허약한 사람에겐 당장 감기에서 회복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일 것이며, 나아가서 계속 건강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되지만, 막상 건강해지고 나면 더 나은 무엇을 바라게 되겠지. 오래 살고 부유하고, 귀하게 되고, 많은 자녀들이 건강히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에 다니면 행복하겠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얻고 나서도, 더 나은 무엇을 바라기 때문에 불행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내 마음이 파랑색이면 모든 새가 파랑새이리. 행복은 외적으로 그 누가 갖다 주는 것이기보다는 내 마음의 자세에 달린 것. 욕심을 줄이고, 나아가서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으련만, 장자와 같은 초월자가 아닌 이상, 그런 무욕의 경지에서 일평생을 노닐 수는 없을 테고. 다만 몸이 건강하고, 그 무엇이나 사랑하고자 하며, 사랑하느라고 괴롭고 슬픈 것을 행복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은 보통 사람의 노력으로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왜 행복이 무엇인지 따지면서 살아야 하는가! 행복이 무엇인지, 지금 내가 행복한가는 굳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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