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삶은 가을 하늘의 둥근 사과처럼 - 김화영(시인)
1941 년 서울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프랑스 엑스앙 프로방스대학 졸업. 문학박사. 1964 년 '세대'에 '과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함. 현재 고려대 불문과 교수. 저서에 '봄밤의 가족', '길 위에서', '아침의 시', '어둠의 중심', '겨울연가'외 다수가 있음.
꽃이 가면 신록이 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뒤에는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한 산이 있다. 이 동네로 이사온 지 7 년째가 된다. 서울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상자곽 같은 아파트에 불과하지만 집 뒤의 산 때문에 나는 이 집에 깊이 정이 들었다. 산비탈에 지은 고층 아파트여서 길이 가파른데다가 마당이고 도로고 온통 주차장이 되어 있어서 한가하게 걸어다닐 공간도 거의 없이 삭막할 뿐이다. 강가에서 위치하고 있어야 마땅히 그 넘실거리는 강물이 시원스럽게 내다보여야 하겠건만 앞에 또 고층 아파트가 사리고 있어서 남의 집의 번다한 생활의 창문틀만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다. 집 앞의 고층 아파트는 그러나 시야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 도로로 씽씽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도 차단해 주는 것이어서 우리집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다. 다행한 일이다.
나는 매년 3월 중순이면 가슴이 설렌다. 뒷산에 잡초들이 뾰족뾰족 새싹을 내미는가 하면 이내 그늘진 북쪽으로 진달래가 만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개나리도 지천으로 피어 신명이 난다. 이때부터 약 한달 동안 진달래, 개나리로부터 산복숭아와 산벗꽃으로 이어지는 잔치가 무르익어 간다. 그런데 지금은 벚꽃도 모두 떨어지고 연두색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짙어 가고만 있다. 그러나 축제는 더욱 화려하게 폭발할 것이다. 이제 곧 뒷산에 우거진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꽃향기가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는 우리집 뒷문으로 넘쳐 방과 거실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면 친구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슴이 설렌다.
하지만 이 찬란한 봄의 기쁨을 그냥 안방에 가만히 들어앉아서 맞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집안에서는 뒤꼍으로 난 조그만 창문을 통해서 자연의 아주 인색한 한 귀퉁이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뒷산으로 올라간다. 처음에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가 너무나 힘들고 숨이 찼다. 그러나 7 년간의 되풀이된 나들이로 인하여 나는 산과 아주 친숙해졌다. 더구나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 덕분에, 나는 이른 새벽에 마이크까지 크게 틀어 놓고 체조를 하는 저 부지런한 사람들의 물결이 완전히 빠져 나가고 난 다음, 해뜬 뒤의 투명하고 한가해진 산과 만나게 된다.
나는 성동구로 산길을 올라가서 용산구를 거쳐 중구 소속의 정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성동구로 돌아 같은 코스를 한 바퀴 더 돌고 내려온다. 성동구와 용산구의 산비탈과 정상에서는 고요하고 크게 구비도는 한강의 빛나는 모습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반면에 북쪽의 중구 쪽으로 난 산 중턱길은 인적이 거의 없어 호젓하지만, 발 아래 대로로 지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꼭 장마철에 흙탕물이 불어난 대하의 세찬 물살 소리같이 줄곧 으르렁거리며 나를 따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나무숲에 가려서 차도가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늘 저 발아래에는 거센 냇물이 흐르거니 하는 상상을 하며 그 오솔길을 걷는다. 더군다나 산의 이 북쪽면의 서쪽 내리막길과 동쪽 오르막길 부근에는 오솔길을 약간 비켜서 큰 벚나무가 몇 그루씩 서 있어서 4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나는 여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 아침빛이 청명하고 꽃이 한창인 날은 그 꽃나무 아래서 꽤 오래 머문다. 나와 그 꽃나무들과의 밀회의 순간이다. 나는 늘 오직 나만이 그 꽃나무들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황홀하다.
더러는 서쪽 내리막길 꽃나무 밑에 오래 서 있어 보고, 더러는 동쪽 오르막길에서 한참 비켜 있는 너럭바위 아래의 큰 파라솔 같은 벚꽃 더미를 내려다본다.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행복의 전율과 더불어 그 덧없음이 가져오는 슬픔을 가슴 쓰리게 맛보는 며칠이 계속된다. 세상에 와서 한낱 착각 같은 봄을 보았던 것인가? 그 아름다움을 두고 나는 산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이랴. 꽃들이 빛의 폭죽 터지듯이 만발했는데 어느 날 난데없는 비바람이 몰아쳐 이튿날 아침에 가보면 반 넘어 떨어져 버린 것이다. 꽃이 가면 산록이 올 것이다.
순간과 세월을 영혼에 각인시킨다.
'왜 사냐건 웃지요.'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그러나 그보다 천년도 더 된 오랜 옛날에 이미 그렇게 웃었던 시인이 있었다.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물으면 그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니 마음이 절로 한가하도다 복사꽃 싣고 물은 어디론가 아득히 흘러가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이 아니로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
그러나 이제는 인간 세상이 아닌 '별천지'의 꿈은 어디에도 없다. 삶이 무엇인지 묻는 철학자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번뇌하는 시인도, 깨달음을 찾는 수도승도 징집당하게 되어 있고, 시인이 쓴 시의 원고료도 컴퓨터에 입력되어 세금이 부과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 손쉬운 질문에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대답하고 있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몇 번 뒤척이다가 더러는 거뜬하게, 더러는 나른하게 일어나 칫솔을 입에 물고 조간 신문을 읽는다. 현관에 배달된 우유와 빵과 커피로, 혹은 된장국으로 허둥지둥 아침식사를 하고, 월부로 산 자동차에 올라타거나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일한다. 물건을 배달하고 관공서에 서류를 제출하고 전화를 걸고 고객을 만난다. 사무실 근처의 단골 식당이나 구내 식당에서 점심, 다시 분주한 근무, 그리고 자동차의 물결이 도도한 삶의 바다를 헤엄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이 과외 공부에서 돌아오고 있다. 저녁식사에 이어 텔레비전에 멍한 시선을 비끄러매고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코미디도 흘러가고 연속 방송극도 흘러가고 통기타도 랩뮤직도 흘러가고 5공도 6공도 그 네모난 통 속으로 흘러간다. 그 끝없는 흐름의 끝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러나 성실하게 절약하여 모은 덕택에 적금도 늘어가고, 아파트 평수도 자동자의 배기량도 늘어간다. 자리가 집힌다. 자리가 올라간다. 잘살게 되었다. 희망도 꿈도 커간다. 이만하면 괜찮다. 안심이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런 외면적 물질적인 삶도 물론 귀중하다. 저물면 등불이 켜지는 저 창 너머의 단란한 작은 행복은 물론 중요하다. 물론 소중하다. 누구나 부유하게든 가난하게든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목표도 세운다. 결심도 한다. 억척으로 난관을 극복한다. 여차직하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각박한 세상을 원망만 하면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서울시청 건물이 이마에 '다시 뛰자'는 표어를 커다랗게 써붙이고 시민들의 삶을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 표어를 바라보면서 다시 힘을 내어 뛰는 것 같았다. 내가 아침마다 뒷산에 오르는 것은 물론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여 숨찬 삶의 길을 뛰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나의 친구가 몇 년 전부터 권하는 헬스 클럽의 회원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한 바퀴 두 바퀴 산길을 '혼자' 돌기 위해서 산을 오른다. 나는 한 바퀴 두 바퀴 돌아가는 순간과 세월을 영혼에 각인하기 위하여 산을 오른다. 산에서 마주치곤 하는 동네 사람이 배드민턴을 치자고 해도 나는 웃기만 한다. 나는 하루 중 이 시간만은 혼자이고 싶다. 유난히 고독이 좋다. 오솔길에서는 풀과 꽃나무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다람쥐도 만나고 장끼도 까투리도 만나고 까치도 만난다. 그러나 참으로 만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인적이 없는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가는 나 자신과 만나 산길을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노라면 가끔 머리에 떠오르는 말이 있다. 알프스가 남쪽으로 무너져 내리다가 골짜기를 이룬 프랑스의 작은 마을 마노스크가 고향이고 그 산간의 고향에서 일생을 살다간 소설가 장 지오노는 힘차고 생명감이 넘치는 산문을 많이 남겼다.
하루하루는 혼탁한 어둠의 시각에 시작하고 또 끝난다. 그 하루하루는 화살이나 길이나 인간의 질주와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것들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길다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는 태양이나 세계나 신과 같이 영원하며 변함이 없는 것들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둥근'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의 문명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향하여, 원대한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그냥 사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지낸다. 그냥 사는 것이야말고 우리가 매일같이 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살아가기만 하면 매일 매순간 우리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지낸다. 문명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루는 새벽에, 혹은 새벽보다 조금 늦게, 혹은 훨씬 늦게, 요컨대 각자가 일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시각에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일을 하는 동안 '하루 종일' 계속되다가 눈을 감고 잠들 때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가 '길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하루는 '길지' 않고 '둥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감각 기관들을 통하여 느낄 준비만 하고 있으면 그 순간 모든 것에 다 이를 수 있다. 하루하루는 과일이다. 우리가 맡은 역할은 그 과일을 먹는 것이다. 각자의 천성에 따라 천천히 혹은 미칠 듯이 그 과일을 음미하는 것이며, 그 과일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의 혜택을 입는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에 그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
삶, 또는 사랑의 순간은 둥글다.
같은 맥락에서 화가 반 고흐도 '삶은 둥글다'고 했다. "사람들은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 삶은 둥글다"라고 시인 조 보스케는 말했다. 내가 생명의 아침 산길에서 만나는 호젓한 '나'의 모습은 둥글다. 생명의 중심을 향해서 존재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같이 혼자서 아침 산길을 돌면서,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다시 어느 날 아침 그 아름답던 꽃이 지는 것을 본다. 기쁨의 전율이 부서지는 행복의 덧없음과 동시에 가슴을 흔든다. 그리고 봄이 가면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로 순화하는 것을 산을 따라 돌면서 느낀다. 그 생명의 순환이 삶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그래서 허무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덧없음이 매순간의 귀중함과 그 집중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새싹을 보아도, 떨어지는 꽃잎을 보아도, 한강 위에 쏟아지는아지는 햇빛을 보아도, 소나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아도, 어느 시인이 '뒤에 두고 온 세상 / 온갖 괴로움 마치고 / 한 장의 수의에 덮여 있다'고 노래한 흰눈 덮인 산을 보아도 생명의 감각 기관을 싱싱하게 열고 있으면 매순간의 삶이 둥글고 가득찬 과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산속의 오솔길을 돈다. 둥근 아침이슬을 본다. 덧없음의 빛.
그렇다. 하루는 아침 산길을 가면서, 순간의 새소리를 따라 솟아 오르면서 웃는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덧없이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매순간을 힘껏 사랑하리라. 쉬 져버리는 풀꽃을 사랑하리라. 다시 다시 만나지 못할 뒷모습을 사랑하리라.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모퉁이 도는 길가의 레코드 상점에서 언뜻 들은 한 소절의 멜로디, 다시는 반복하지 못할 그 순간의 감미로움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사랑하리라. 그 모든 순간들은 둥글다. 내 존재를 다하여 사랑한 순간들은 둥글다.
나는 어린 시절을 드넓은 과수원 속에서 자랐다. 과수원 옆 언덕 위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봄철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내려다보면 사과꽃이 허연 바다가 되어 출렁거렸다. 그러나 꽃핀 봄보다도 더욱 빛나는 날은 사과를 따는 가을날이었다. 서리가 내리고 잎이 시들거나 떨어져 버리고 나면, 푸른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탐스러운 사과가 자욱이 익어 매달리는 것이었다. 삼각 사닥다리를 고이고 올라가 잘 익은 한 알 한 알의 사과를 따기 위하여 손을 뻗치면 '속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겨우 뺨에 빛이 내비치는 실과'가 우리 일생의 투명하고 텅 빈 하늘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뜬다. 우리의 삶의 매순간이, 그리고 덧없는 우리의 일생이 그 가을 하늘의 사과처럼 둥글게 익는 모습을 나는 가끔 꿈속처럼 그린다. 오, 살아 있음의 청명한 기쁨이여!
그렇게 둥글어진 다음에야 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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