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 자유문학사
타령조의 인생풀이 - 김열규(인제대 교수)
1932 년 강남 고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충남대 조교수, 하버드 대 연경학회 및 U.C.B. 한국학 연구소 객원교수. 서강대 국문과 교수 역임. 현재 인제대 교수. 저서에 '한국민속과 문학연구',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한맥원류', '서정과 인식',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흔들리는 시대의 언어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한국여성 그들은 누구인가' 외 다수가 있음.
뱃전에 부딪히는 물고기 한 마리
살아간다고들 한다. 우리들이 살아간다면 어디를 어떻게 가고 또 예는 것일까? 오월에 보리밭 건너가는 바람결을 닮은 것일까? 한여름 마삭 덩굴처럼 땅을 기다가 풀섶에 얽히다 스스로 칭칭 감기면서 가는 것일까? 늦가을 무서리 뿌리며 구름 헤집고 가는 쇠기러기처럼 간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동지섣달 얼다 말다하는 벼랑 끝 물사품 떨어지듯 가는 것이던가? 아무려나 간다고들 한다. 태어나기 이전 그 미지에서 목숨이 다한 그 뒤의 불가지에 이르는 아주 수유의 길, 엎어지지 않아도 코닿을 그 지척을 간다고들 한다. 마파람 우짖는 한바다, 피어서 지는 포말의 예정은 몇 치나 된단 말인가. 한데도 간다고들 한다. 제대로 행장을 차린다면 명아주 꺾어서 다듬기도 전에 이미 파하고 없을 그 이정을 가고 또 엔다고들 한다. 해서 나서다 말아야 하는 나그네는 더욱 서러운 것이다. 하지만 어디 아니 갈 수 있던가. 돌너설 타고 한사코 도랑물 건너는 개미처럼 이라고 해도 도리 없이 삶이란 건너야 하는 것. 질레가시와 가시 사이가 하도 멀어서 불타듯 날개 젓고젓고 넘어가야 하는 풍뎅이처럼 피치 못하게 인생이란 넘어가야 하는 것. 늦장마 시진한 비기운에 밀려서 꾸역꾸역 고개 넘어가는 하늬바람처럼이라도 남기는 넘어야 하는 게 이승살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다들 간다고들 했을 것이다. 건너가고 넘어가고 돌아간다고들 했던가. 가지만, 가긴 가지만 외길 외곬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환히 트인 신작로, 앞이 빤히 내다보이는 한 길 자로 잰 듯이 가는 것은 차마 아니다.
안개 속을 간다. 오리무중이라도 도리 없다. 눈보라 속을 간다. 알몸 맨살이라도 딴 길이 없다. 그러다가 꽃다지라도 눈부시게 흐드러진 초록 들판을 만나거든 쉬어서 가되 아주 허리 내리지는 못한다. 청머루 넝쿨 속을 간다. 조리대 숲을 가야 한다. 팔이 넝쿨에 감기고 발목에 대줄기에 잡히면서도 그예 가긴 가야 한다. 그러다가 행여라도 억새바람에 설레는 느긋한 등성이라도 만날라치면 다리는 잠시 잠깐 뻗되, 아주 내버린 듯이 뻗지는 말아야 한다. 아마 흥건한 땀방울을 훔치다가, 손결에 한두 방울 입안에 들면 그 짠맛 다시고 또 다시면서 기운이라도 차릴 일이다. 그렇게 예고 또 가야 한다. 그렇게 저렇게 삶이란 가고 예고 건너고 넘고 가야 하는 것. 그렇지만 말일세. 아무려나 넘을 수도 건널 수도 뒤로 할 수도 없는 게 있기는 있는 법. 무슨 악연인지 웬놈의 정의 사슬이 얽혔는지 친친 감고 휘둘러서 걸치고 돌돌 감아 붙이고 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게 있으니 고독이라 하고 죽음의 예감이라고도 한다던가. 그것들은 팔자속보다 더 짙은 것, 핏줄보다 더 진한 것. 우리들 각자의 분신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과 동반한다는 뜻이다. 삶을 가다가 가다가 휘고 예도는 구비쯤, 서낭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는 불모의 고비쯤에서 무엇을 만나고 갈 것인가? 목숨 이끌고 목숨에 이끌려서 우줄우줄 넘어가고 건너가다가 가다가, 나루쯤에서 고갯마루쯤에서 누굴 만나고 갈 것인가?
넋을 빼앗길 사람일까? 내 호주머니 털릴 사람일까? 고개 숙여 엎드릴 그 무엇일까? 아니면 발가락 끝으로 문질러 지나쳐 버려 옳을 그 무엇일까? 물살 머리 스칠 바람처럼 만날 인연일까? 혹은 행여라도 걸려서 넘어질 돌부리 박힌 듯한 연줄일까? 하필이면 수몰하는 배속에 갇혀서 겨우 내다본 시선에 와서 부딪치던 한 마리 물고기의 눈길이나 곱상하게 닮은 것을 만나고 갈 것인가? 아무려나 별의별 것을 다 만나게 되리라. 하지만 잘만 내다보면, 조금만 눈치 약으면 물차는 제비 아니라도 아슬아슬 피해갈 수 있는 것이야 왜하니 설마 없을라고. 개나 한두 마리 말뚝에 매어 두고 그리고 수상쩍을 적마다 헛기침 두세 번 쾅쾅 모질게 할라치면 무당 푸닥거리하듯 미리 물릴 수 있는 것들이 아주 없기야 할라고. 허다 못해 맨발로 줄행랑도 놓고, 아니면 꽁지부터 먼저 묻고 어설프게 숨는 방법인들 아주 쓸모 없다고는 잘라 말못할 경우인들 왜 없을라고. 그러다가 정히 안 된다고 하면 줄을 대고 손을 맞비벼 대고, 아주 영 죽지는 못해도 그나마 죽는시늉이라도 지으면 쪽박 쓰고 벼락 피하듯 할 수도 더러더러 있을 법도 한 일. 그게 사바 세계의 진여고법이 아니던가.
이도 저도 드디어 궁하게 되면 지옥 문 앞에 버티고 선셈치고는 쌍지팡이 짚고 눈 부릅뜨고 컹컹 공갈을 치는 수도 있는 것 아니던가. 어차피 안 된다면 그냥 당하기보다 오기나 부리자고 한 것인데 뜻밖에 봉사 문고리 잡고 황소 뒷걸음치다 쥐잡는 꼴이 생긴다면 삶의 길, 넌짓넌짓 가볼 만도 한 게 아닌가. 그러나 무슨 끈적이가 지독해서 무슨 고, 웬 사슬이 그리도 질겨서 애시당초 면피할 염도 못 낼 것들 있으니, 우리들 살아가다 가다가 만나게 되는 것들 가운데, 그렇게 모질고 흉한 것이 있으니, 그를 일러서 죽음의 예감이라고 하고 고독이라고 한다. 죽음과 고독, 고독과 죽음. 어느쪽이 보다 더 견디기 힘겨울까? 대답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 두 가지 그늘을 가늠할 저울대가 우리들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을 법하지 않다.
삶은 죽음의 집행유예
오늘의 우리들은 그 둘을 하나같이 가출한 지 오래고 오랜 강아지 한 마리인 듯 잊고 살려고 한다. 없는 것으로 따돌리는 것이 안 되면 피치 못하게 불시에 당할 그때, 바로 그때 가서 보기로 하되, 미리 마음으로 챙기려 들지는 않는다. 말썽을 피우다가 스스로 나가버린 식솔처럼 영 마음에서 떨치기는 어려워도 되도록 그가 돌아와 주지 말기를, 그리하여 되도록 생각나 주지 말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식에서 얼마쯤 지워진 상태, 이를테면 성능이 나쁜 지우개로서 서투르게 지워낸 잘못 쓰인 글자나 기호 같은 상태에다 죽음도 고독도 처박아 두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지극히 엉성한 상태를 죽음과 고독의 '알리바이'로 치부하려고 든다. 그러한 우리들 의식으로는 죽음과 고독, 고독과 죽음의 무게를 겨루어볼 염을 낼 수가 없다. 다만 어느 쪽이 일시보다 더 많이 지워져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죽음은 오직 지레 갖는 공포뿐이다. 말을 낮추어서 불안이라고 해도 좋다. 미리 경험하는 두려움이다. 언제나 저만큼 앞서 있는 죽음의 뒷모습을 우리들은 이따금 천야만야 깊은 웅덩이를 들여다보듯 흘깃흘깃 넘겨다보면서 몸을 떨고 그리곤 겁에 질린다. 물론 때로는 잘 마련된 비상구 같다는 생각, 아니면 여름 뙤약볕의 정자나무 그늘 밑 같다는 생각에 젖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생각의 경우에나 사람들은 죽음을 저만큼 멀리 외돌아 세우기 마련이다. 하기에 죽음은, 우리들의 몫인 죽음은 언제나 미래의 시계에 속해 있다. 사람들은 적어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죽음은 언젠가 올 그 무엇이다. 우리들은 그것이 삶 속에 매양 어느 순간에나 내재해 있다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는다. 원체 죽음이란 뜻밖이 없고 느닷없이도 있을 수 있다. 불의라든가 졸지라는 말은 죽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부고장에 쓰는 심히 관습적인 말귀 아니면 말버릇에 지나지 못한다. 삶과 죽음은 시작을 함께 한다. 오직 삶이 그 종말을 죽음과 나누어 갖지 못할 뿐이다. '졸지'에나 '불의'를 굳이 쓰려고 한다면 죽음을 두고 쓸 게 아니라 삶을 두고, 말하자면 삶의 시작을 두고 써야 한다. 삶이 다하고서야 비로소 죽음이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삶과 더불어서 죽음이 자라다가 어느 순간 죽음은 더이상 성장을 정지한 삶을 까마득히 앞질러 버린다. 그때서야 뒤쳐져 버린 삶이, 죽음이 결코 만만한 동반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늦다. 하지만 성장해 가고 있는 죽음이 아닌, 완성 체로서의 죽음은 우리들이 결코 미리 누리지도 갖지도 못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죽음이 우리들에게 언제나 미래의 시제에 속한다는 것은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나머지 심하면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죽음은 인간에게 망각의 욕망이거나 무시의 욕망이거나 할 것 같다. 가능만 하다면 영원히 유예된 미래의 시제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원한 집행유예까지는 못 가도, 적어도 시기를 미리 못박아 놓지 않는 집행유예로서 죽음이 우리들에게 있기를 사람들은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온전히 자기 몫인 삶을 포기하는 데 길들어 간다. 아주 낯선 죽음, 도무지 자기의 것 같지 않은 외면당한 죽음을 갖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죽음을 유예 당한 미래 시제에다 내맡겨 놓으면서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의 죽음을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른바, 자기 증명을 얻어낼 마지막 보루, 최후의 근거란 것을 그만 놓치고 만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른바, 자기 증명을 얻어낼 마지막 보루, 최후의 근거란 것을 그만 놓치고 만다. 사람들은 죽음을 미래 시제로만 생각하면서 필경 죽음을 포기해 버린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자라고 있을 죽음과 친화할 기회를 붙들지 못하고 만다. 죽음과 정, 그것은 우리들 인간의 마지막 정이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사랑의 첫정과 아구맞춤을 하기 알맞다. 세월이 가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월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서 잊어버리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 죽음이다.
그러나 고독이란 완강하게 현재의 시제를 고집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외로움을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누리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을 미래로 밀쳐 내고 그 빈 공간에 고독을 들어 앉힌 것일까? 고독은 집행유예 판결을 내릴 판관으로서 우리 앞에 있지 않다. 다름 아닌 형의 집행 자로서 우리와 함께 있다. 지금 당장 우리들은 외로움의 얼음굴에 갇혀서 무시로 떨고 질리곤 한다. "내일이야 운명의 물레에 맡긴다고 해도 오늘만 감당해 낼 수만 있다면......" 하고 다짐두기 버릇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고독이 더 무섭고 두려워진다. 죽음이야 얼결에 당할 수도 있고 불시에 넘겨 버릴 수도 있다. 지레 들려 있던 그 지리하고 기나긴 겁에 비하면 실제의 죽음은 눈 깜짝할 수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릴 적에 등치 큰 녀석들에게서 폭행을 당할 때와 비슷한 것 같다. 힘센 깡패가 얼러대면 우선 겁을 먹고 허둥댄다. 하지만 막상 눈에서 불이 번쩍 나고 나면 그때부턴 별것 아니다. 순간적이라 미처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너 죽고 나 죽자는 오기나 악이 발동하는 서슬에 그만 작은 불콩 맞은 멧돼지가 되고 만다. 지레 겪는 죽음의 공포는 깡패의 주먹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독은 현재형으로 진행되는데 영속된다. 말하자면 묘하게도 우리들은 현재진행형의 고독에 발이 묶이고 만다. 무진할 미로 안에서 제자리걸음하는 꼴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 하루 온밤을 야금야금 아파대던 치통을 연상하게 된다. 고독은 끈적대고 이죽댄다. 상당한 점액질, 끈끈이주걱 같은 속성을 이 냉혹한 빙혈은 인간이란 곤충을 향해서 발휘한다. 이때 사람들은 아교투성이의 얼음찜질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고독과 심심함이 전혀 무관하다는 점에 유념해 두어야 한다. 남을 만나면 누군지 옆에 있어 주면 그걸로 심심함은 이미 끝장이 난다. 하지만 옆에 사람이 다가와서 비로소 덧나는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따져 캐게 되면, 이 유사 고독증인 심심함을 쉬 깔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들은 내게 와서 심심함은 걷어 가지만 고독은 덧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독은 아^예 유예라든가 말미라든가 하는 미결정의 상태, 유보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는 살기 등등한 야수처럼, 때로는 지극히 평온한 안개의 진액처럼 우리 둘레를 맴돌고 우리에게 다가든다. 하기에 고독이 죽음보다 훨씬 악성이란 결론을 우선 내리게 된다. 죽음의 골짝 저 끝, 어둠에서 당할 외로움을 미리 그려보게 되면 고독의 악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해서 기왕 내성을 기른다고 하면, 그래서 조금이나마 면역성을 닦아 나간다고 하면 아무래도 고독 쪽을 택해야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야, '아서라 내 몰라라'고 시침을 떼면 얼마쯤 비켜서 주기라도 하지만, 억지로 돌아서는 우리들 앞에 재빨리 고독은 앞질러 와 있기 마련이다. 고독의 구렁텅이에서 설마하니 항아리 속 술처럼이야 익을까마는 정히 하다못해 밭은 바위 비늘에 붙어서 가뭄을 견뎌내는 이끼의 흉내야 못 낼라고.
물살과 바람이 영겁이듯
남쪽 바다 끝, 산남 땅의 또 산남 물 깃으로 옮겨 앉은 뒤로 무시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 가고 있다. 헤매다가 홀연 길 자국이 사라지고 마는 산을 가도 혼자. 조수가 넘나든 물금, 모래 금을 따라서 어슬렁대는 것도 혼자. '우우'밀물이 몰려드는 소리에 귀기울여도 보이는 것은 물살뿐이다. 아무도 없는 섬깃에 섬처럼 앉아도 혼자. 그런 시간이 늘어갈수록 마음에 부는 바람이 더해 갔다. 시린 물살에 허리 담그고 있는 벼랑머리, 외톨이 무덤 가에서 망연자실 바다바라기에 골몰했던 것이 어찌 한두 번이던가. 그리하여 이미 봉분이 자국만 남을 만큼 착실히 삭아진 그 무덤머리에서 지금 당장 세월이 삭아 가는 그 바스락대는 아슬한 소리에 마음연 지도 이미 오랜데.
뜰에서 온종일 풀을 매다가, 진종일 밭을 매다가 풀 더미에 걸터앉아 갖는 그 혼자의 시공,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그 시공을 새삼 확인하는데, 뜻밖에 나비 한 마리 풀 더미 자락에 날개 쉬고 있음이 발견하던 것. 그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해서 아주 옛날에 읽은 적이 있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비슷한 시구절이 거듭 가슴에서 응얼대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야밤중 짐짓 책상머리 불을 끄면 바깥은 칠흑 어둠뿐이고 나는 다만 그 어둠의 껍질을 뒤집어쓴 한 마리 애벌레 같기를 기구한 시간은 또 얼마나 자주 되풀이된 것인데. 그리하여 바다와 하늘, 물살과 바람이 이따금 가뭇없는 눈치 같은 별빛을 머금은 한덩치 어둠이 되고 나는 거기 돌돌 감겨서, 눈뜨고 앉아도 잠드는 시간이 다소곳하게 마치 영겁이듯 계속되곤 하던 것인데. 내 살갗을 짚으면 나의 아주 깊은 속에서 다만 어둠살이 집히고, 바람결이 집혀 오는 기척에 아스라이 눈감음은 또 얼마나 자주자주 되풀이된 것인데.
월흥 마을을 지나 동화리를 또 지나기까지 제법 먼길을, 그 바닷길을 혼자서 어정대기도 한다. 이따금 송어일까, 물위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솔새 울음과 회답할 뿐이다. 그 서슬에 이미 너무 오래 걸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곤 신발에 앉은 먼지를 멀건히 내려다본다. 그러면서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는 생각을 아주 즐거운 추억의 한토막처럼 반기게 된다. 어스름 바람이 일고 신발끈에서 먼지가 소스라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혼자 있음'과 '외로움에의 익음'이 굳이 같거나 하다못해 닮기라도 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문득 이런 대목을 떠올린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고기잡이에요." "아냐, 더 윗길인 어부가 얼마든지 있지 않고." "하지만 당신은 당신인 걸요."
욕지섬이 어슴하게 떠 있는 물마루를 내다보는 좌이산 기슭에서 생각해 낸 '노인과 바다'의 한 대목. 원문에서는 '유아 온리'라고 하였으니까, "당신 같은 분은 이 세상에 혼자뿐인 걸요"라고 번역해야 하리라.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바닷가 언덕에서 나도 누구에게선가 이 말을 듣고 싶다. 총명한 소년 친구가 없다면 누구에게, 무엇에게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다만 물머금은 바닷바람에 귀가 젖을 뿐이다. 몇 시가 아니라, 몇 물이냐를 눈여겨보는 버릇도 이제 석곡을 캘 때, 바위 이끼에서 이는 가느다란 향내만큼이나 설지는 않게 되었다. 반 마장쯤 떨어진 가룡곶의 코앞, 개구리섬이 물에 잠기고 드러나는 높낮이가 나의 새로운 시계 바늘이 된지도 오래다. 안개가 짙어지면 귓전을 손으로 가리고 들고 나는 물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이제 저 기나길었던 삶의 서툰 잠에서 눈비비고 비비고 깨어날 새벽, 갓밝이의 물때가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그러면서 혼자임이 곧 외톨이가 아님을 스스로 타이르고 싶다. 별들이 사라져 내려서는 잘게잘게 구슬 가루이듯 부스러지는 솔섬의 물가를 아무도 없이 혼자 걷는 것이 어둠 걷어 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살 한복판에서 비로소 영그는 빛살, 아주 은근한 빛낟알로 영그는 일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런가 하면, 벽방산 정수리로 해서 올라서는 해돋이 한 가운데를 향해서 내딛는 새벽 걸음이 존재의 화심박힘 같아지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지금은 철갈이의 여름. 앙글방글하는 제 꼬리 장단에 맞추어서 활처럼 흰 긴 부리로 물 속을 엿보곤 하던 알록꼬리 도요 무리가 수런스레 저안을 지나간 뒤에 뜰 안 딱새의 병아리들이 둥지 떠날 채비를 차리는 즈음, 아비 어미에게서 먹이를 낚아채는 그들 노랑부리에서 햇살이 자지러진다. 절기 따른 새들의 번가름, 그리고 천시를 어기지 않는 물때의 번가름. 내왕이란 그런 것, 왕래란 또한 그런 것, 지금은 지나간 어느 철보다도 혼자 있음에 어울리는 절기를 누려야 한다.
고독과 죽음, 죽음의 예감과 고독의 현실. 지금은 그 둘을 따로따로 바라볼 때가 아니다. 두 손에 하나씩, 별개로 들고 들여다볼 째는 아니다. 두 손 모아서, 합장하고 또 하고 해서 한 움큼으로 받들고 받쳐들고, 찬찬히 소슬하게 살피고 보살필 때다. 하기에 지금은 살아가는 것의 새 고비, 새 고개. 이 고비, 이 고개를 내일의 너머를 위해서 뚜벅뚜벅 혼자서, 외로이가 아니고 다만 혼자서 넘어가는 철이다. 그리하여 두 손바닥에 받는 것을, 눈엽에 설레는 햇살 받아서 오직 혼자서, 외톨이가 아니고 오직 혼자가 되어서 앙구고 앙구는 그런 철갈이의 어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