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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57 호
단기 4342. 2. 4 (음력 1. 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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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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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문학 신인추천 공모
1.장 르 ■ 소설 : 단편(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2편 중편(200자 원고지) 200매 이상 1편 장편(200자 원고지) 1000매 이상 1편 ■ 시 : 10편 ■ 평론 : (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1편
2.추천방법 ■ 응모된 작품의 심사는 본지에서 위촉한 심사위원이 담당함 ■ 추천된 작품은 기성문인과 동등한 대우로 본지에 게재하며, 추천된 장편소설의 경우 단행본으로 출간함 ■ 추천은 1회로 완료됨
3 . 기 타 ■ 응모작품 마감은 매년 3월 31일 1회에 한함(마감일자 소인 유효) ■ 응모작품은 반드시 본지 편집부에 접수시켜야 함 ■ 응모원고에 대해서는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 우편물 겉봉투에 <신인추천작품 응모작>임을 적고, 작품 앞에 별지를 붙여 반드시 성명과 전화번호를 명기하여야 함(작품에는 성명과 연락처를 기재하지 말 것) ■ 발표는 6월호 본지에 함
우편번호 137-905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41-10 Tel. 02-516-3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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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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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다.(알프레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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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폭탄
언어예절
달걀 세례, 질문 공세, 주문 쇄도, 세금 폭탄 … 이젠 낯익은 표현들이다. 개중에 폭탄은 물 폭탄·말 폭탄·금융 폭탄·물가 폭탄·달러 폭탄·자살 폭탄 …처럼 실체와 어울리든 않든 천박스레 번져가는 형편이다.
‘세금’이란 인류와 역사를 같이하는 까닭에 이끌리는 말이 많다. 과세·징세·수탈, 세리·탈세·절세·감세·면세 …에다 바치는 이들의 고통을 생각해 ‘세금=혈세’로 쓰기도 한다.
나라를 경영하자면 마땅히 세금을 거둬야 하지만 백성들로서는 큰 짐일 때가 많다. 특히 표를 얻어야 할 선거철에 내거는 후보들의 공약 치고 세금과 관련 없는 게 드물다.
최근 종합부동산세 존폐 얘기가 한창이다. 정부는 ‘1%를 위한 감세라는데, 한 사람이라도 억울해선 안 되니’ 없앤단다. ‘원칙’을 내세우지만, 집토끼 챙기기라 꼬집히기도 한다. 폐지가 현정권의 선거 공약이며, 이는 부유세·부자세이자 징벌적 세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금 내기 좋아할 사람이 드물다는 점에서 이 말은 먹힌다. 굳이 많이 가진자뿐만 아니라 과세 대상 아닌 조금 가진자들도 이 말에 덩달아 기운다.
여기에 불을 붙인 말이 ‘세금 폭탄’이다. 이 말은 지난 몇 해 정권과 정부를 공격하는 강력한 ‘언어 폭탄’이었다. 말 잘 만들고 잘 퍼뜨리는 일부 언론 쪽에 혐의가 짙다. 그 폐해를 알면서도 일부러 쓴 야비함에서 특히 그러하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색감
봄은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계절입니다. 따뜻한 기운이 대지를 적시는가 했더니 바다·하늘 할 것 없이 온통 생명의 잔치가 한창입니다. 이와 더불어 가정과 직장·학교 주변 화단에는 빛(色)이 가득합니다. 연둣빛 초원에서 뛰어노는 샛말간 유치원생 아이들의 앙증맞은 모습에선 싱그러움이 묻어나고, 시뻘건 속살을 내보인 철쭉은 타다 못해 제풀에 지칠 지경입니다. '봄은 색을 뽐내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사물의 색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리말은 표현이 다양하고 쓰임도 미묘합니다. '새파랗다·시퍼렇다·샛노랗다·싯누렇다'. 색채를 나타내는 형용사로 각각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데 쓰임에 어떤 원칙이 있습니다. '색이 매우 짙고 선명하다'는 뜻을 더하는 접두사 '새/시/샛/싯'등은 사용하는 면에선 비슷하지만 뒤에 붙는 형용사의 음운론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표기해야 합니다.
①새까맣다·새하얗다·새뽀얗다/시커멓다·시허옇다·시뿌옇다·시뻘겋다 ②샛노랗다·샛말갛다/싯누렇다·싯멀겋다
'새/시'는 ①에서 보듯 어두음이 된소리나 거센소리 또는 'ㅎ'인 색채 형용사 앞에 붙여 쓰는데, 첫 음절이 양성 모음(ㅏ·ㅗ)일 때는 '새', 음성 모음(ㅓ·ㅜ)일 때는 '시'가 붙습니다.
'샛/싯'은 ②에서 처럼 뒤에 오는 색채 형용사의 첫소리가 목청이 떨려 울리는 유성음(ㄴ·ㄹ·ㅁ·ㅇ)일 때 맞추어 쓰는 것으로, 새/시'처럼 뒤 음절이 양성일 때는 '샛', 음성일 때는 '싯'으로 구분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실업난
사회적으로 모든 것이 어렵다 보니 언어생활까지 함께 어려워지는 것인지 어법(語法)에 맞지 않는 표현이 더러 쓰이고 있다. '최근 경기 침체에 따른 실업난이 장기화하면서 '구인'을 가장한 취업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년 퇴임으로 결원 중인 환경미화원을 뽑는 자리에 대졸자는 물론 20대 응시자들이 대거 몰려 실업난을 실감케 하고 있다.' 예로 든 문장에서 쓰인 '실업난(失業難)'은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난(難)'이 붙은 다른 낱말들과 비교해 보면 뭔가 이상하다. 접미사 '-난'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어렵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원자재난(原資材難)·인력난(人力難)·자금난(資金難)·주택난(住宅難)·식량난(食糧難) 등을 보면 '-난' 앞에 오는 명사들은 거의 다 '어려움'의 뜻이 들어 있지 않은 일반적인 것이다. 이들 뒤에 '-난'을 붙여 '그런 것들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또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겪는 어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실업난'은 '실업(失業)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겪는 어려움', 즉 '모두 취업해 직장을 잃거나 버리기 어려운 상태'라는 희한한 뜻의 말이 돼버린다. '실업' 자체가 이미 '취업(취직)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을 뜻하는데, 거기에다 '-난'을 붙였기 때문에 이상해진 것이다. '실업난'은 '취업난(就業難)' 또는 '취직난(就職難)'으로 바로잡는 것이 좋다.
머지않아/멀지않아
꿈을 잃어가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가난에 갇혀 내일을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그들에게 교육과 복지의 기회를 주자는 'We Start(위 스타트)'운동이 시작됐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서지 않으면 '머지않아' 미래의 희망을 지켜주지 못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머지않아'는 '머지않다'의 부사어로 '시간적으로 오래 걸리지 않아'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멀다'에 '않아'가 붙어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로 쓰이는 '멀지 않아'가 있다. 이 둘은 상황에 따라 구별해 써야 하는 말인데 잘못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두 명의 동생은 학교에 다니지만 그들도 멀지 않아 일거리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 "축구를 즐기며 성장한 유소년 클럽 선수들은 멀지 않아 한국 축구의 동량으로 자랄 것이다" "멀지 않아 헌재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것이다" 등의 문장에서 '멀지 않아'는 잘못 쓰인 예다.
'가까운 미래'를 말하는 것이므로 '머지않아'로 고쳐야 바른 문장이 된다.
"최고 부자들이 산다는 타워팰리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판자촌이 있다" "시청 앞 서울광장은 명동에서 멀지 않아 걸어서 갈 수도 있다" 등의 문장은 바르게 쓰인 예다.
즉 '머지않아'는 시간적 개념을, '멀지 않아'는 공간적 개념을 나타낼 때 쓴다고 이해하면 쉽다. 또 '머지않아'는 한 단어로 붙여 쓰지만 '멀지 않아'는 한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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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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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사막 - 정호승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나간다 낙타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지는 이미 오래다 별똥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저리도 황급히 사라지고 낙타는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평생을 무릎조차 펴지 못하는가 다시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구 밖으로 떨어진다 위경련을 일으키며 멀리 녹두꽃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맡에 비수 한 자루 두고 잠이 드는 사막의 밤 초승달이 고개를 숙이고 시퍼렇게 칼을 갈고 앉아 있다 인생은 때때로 기도 속에 있지 않다 너의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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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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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 심석정
골바람 한 손 퍼질러 얼굴 씻고 산길 간다 찌르륵 벌레 울음 귀를 세운 산 다람쥐 옥죄던 삶의 무게를 여기 잠시 부린다
발 끝에 구르는 돌 낚아채는 나무등걸 원시로 돌아 온 난 신의 피조물일 뿐 수피속 흐르는 물소리 가만 나를 방생한다.
산정을 밟고 서서 먼 도심 내려다 본다 바둑판 씨줄 날줄 뒤엉킨 삶의 질곡 마천루 끝없는 욕망 골다공증 앓고 있다
부딧쳐 으개져서 쏟아내린 한 줄 폭포 일상의 잡다한 티끌 물보라로 흩어지고 반듯한 뼈대를 세워 희귀의 길 다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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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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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에 책을 써서 몇 해를 보잔 말고 어와 망녕이야 남이 일정 우을노다 그래도 팔십이나 살면 오래 볼법 있나니
[지은이]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 조선 영조 때의 가인으로 '고금가곡(古今歌曲)'을 엮었다. 송계연월옹은 필명이며 본명은 알 수 없다. '고금가곡'의 발문과 거기에 실려 있는 자작 시조 14수를 상고하여 보면, 처음에는 벼슬도 하였으나 본뜻이 아니며, 그것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가 화조(花鳥)를 벗삼고 스스로 즐겼다고 하였다.
[말뜻]
망녕이야 : 망령이로구나! 망령(妄靈)은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언행이 보통이 아닌 상태를 말한다. 일정 : 틀림없이. 반드시. 우울노라 : 웃을 것이로다. '~노다'는 '~나다, ~놋다'로도 쓰였는데 감탄형 종결어미이다.
[감상]
70고령에 책을 써서 몇 해나 보자는 것이냐. 늙은이의 망령이라고 웃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80을 산다면 아직 10년은 더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시대라면, 환갑만 지나도 장수한다는 소리를 듣던 때인데, 고희에 책을 쓰고, 80을 내다보고 있으니 이야말로 노익장의 경지를 과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죽는 그날까지 몰두할 수 있는 필생 사업을 가진 사람은 장수한다는 말이 그 시대에 이미 증명된 느낌이다. 하기야, 인생을 하늘이 정해준 대로 적당히 살면 80은 하구(下壽)요, 100세(또는 90)는 중수이며, 상수는 120세(또는 100)라 하였으니, 기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그 누가 말했듯이, "내일 지구가 개벽을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고 한 마음 가짐, 그 삶의 자세를 이 노래에서 볼 수가 있어 엄숙한 생각이 든다. 그런 그 의 작품을 하나 더 들어보자.
마천령 올라앉아 동해를 굽어보니 물 밖에 구름이요 구름 밖에 하늘이라 아마도 평생 장관은 이것인가 하노라
그의 장수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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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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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명포정 - 양생주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갈랐다. 손을 놀리고 어깨로 받치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힐 때마다 칼질하는 소리가 싹싹 혹은 쓱쓱 울려퍼져 음악적인 가락을 이루었다. 그것은 상림의 춤*과도 같고, 경수의 장단*을 연상케도 했다. 문혜군이 경탄했다.
"오오, 잘도 한다. 제주가 여기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이냐!"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서, 재주보다 훌륭한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소를 잡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 뒤에는 소의 온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오직 마음으로 일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그칠 줄을 알고 마음은 움직이려 합니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큰 틈을 벌리고 크게 비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본래의 구조에 따르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뼈와 힘줄이 엉켜 있는 곳을 가르는 일에 실수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커다란 뼈다귀가 문제되겠습니까? 능숙한 백정이 해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날이 무뎌지기 때문이며, 일반 백정이 매달 칼을 바꾸는 것은 날이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지닌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갈랐지만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간 듯합니다. 소의 마디는 사이가 있지만 칼날은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이 빈틈으로 들어가 여유있게 그 칼날을 놀리기 때문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숫돌에 방금 간 듯합니다. 그러자 오직 한 군데, 뼈와 힘줄이 엉켜 있는 곳에 다다르면 그것이 힘든 일인 줄 알기 때문에 크게 조심하여, 눈은 한 곳을 응시하고, 칼질은 더뎌져서 칼놀림이 대단히 미묘해집니다. 흙이 땅에 떨어지듯 뼈와 살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일이 끝나면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흐뭇해져서 칼을 닦아 넣어둡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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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소를 잘 잡기로 유명한 포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한 마리 잡아 보였다. 포정이 소 몸뚱이에 손을 대고 어깨에 힘을 주며 발의 위치를 정하고 무릎으로 소를 누르는 순간, 고기가 뼈에서 떨어져 나왔다. 보기좋게 돌아가는 칼놀림은 가락을 타는 것이 마치 상림의 춤을 보고 경수의 장단을 듣는 것 같았다. 문혜군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과연 훌륭하구나! 참으로 귀신같은 솜씨다." 포정은 왕의 칭찬을 듣자 칼을 놓고 말했다. "방금 보신 것은 솜씨가 아닙니다. 솜씨의 극치로서 도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이 눈에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는 동안 겉모습은 사라지고 뼈와 힘줄이 보이게끔 되었습니다. 이제는 육안에 의지하는 일없이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입니다. 소를 대하면 우선 감각의 활동이 그치고 마음만이 활발히 움직입니다. 그 다음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소의 몸뚱이에 갖추어져 있는 틈바구니를 끊어서 벌리고 들어가기 때문에, 큰 뼈는 물론이고 힘줄과 살이 뼈와 서로 맞붙어 있는 부분에서도 칼날이 부딪히는 일이 없습니다. 보통 백정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고, 솜씨꾼이라도 1년에 한 번은 바꿔야 합니다. 뼈에 부딪혀 부러지기도 하고, 오래 사용하면 날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칼은 19년이나 쓴 것입니다. 벌써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아직 새것 같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에 집어넣는 것이므로 아무리 써도 날이 상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힘줄과 뼈가 맞붙어 있는 마지막 어려운 곳에 가 닿으면 그때는 긴장하게 됩니다. 눈은 한 곳에 멈추고 동작은 점점 늦춰져서 저 자신도 칼을 움직이는지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윽고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살 전체가 흙덩이처럼 뼈에서 떨어져 나오면 그때서야 긴장이 풀어집니다. 칼을 들고 일어나 주위를 둘려보면 뿌듯한 충만감이 마음에 가득 차 잠시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윽고 냉정을 되찾은 다음, 저는 정성들여 칼을 닦아서 칼집에 넣어둡니다."
문혜군은 감동하여 말했다.
"그대의 말을 듣고 나는 양생의 도를 깨달았다."
* 포정: 흔히 '백정'이란 말로 쓰이지만 원래 포는 고기를 저장해두는 창고나 고기를 다루는 요리사를 뜻했다. 또 정은 사람의 성이니, '칼잡이 정 서방' 정도의 뜻이다. * 문혜군: 전국 시대 양나라의 혜왕을 가리킨다. * 상림의 춤: 은나라 탕왕이 비를 빌 때 연주한 무곡. * 경수의 장단: 요임금이 작곡한 무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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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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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1910~1937)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 서울 출생. 경성 공고 졸업. 총독부 내무부 건축과 근무, 특이한 소재와 특이한 기법, 특이한 행적으로 이채를 띠었던 이상은 수필에도 뛰어났다. 독특한 안목과 감성으로 사물을 바라본 그의 수필은 실험적인 시나 황당한 소설보다 훨씬 짙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권태
1
어서 차라리 어둬 버리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클,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도 백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녘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염서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 서방네 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 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 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 보다. 최 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나 지난 후니까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 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 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 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 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 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자세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 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 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한다.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민절 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 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울 황원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고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이 범에게 물려 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너머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러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 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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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 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 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이 작소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한 겸손한 겁쟁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은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 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새악씨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 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 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 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 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 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기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4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뎅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 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워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 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넝쿨의 뿌리 돋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했으면 좋을까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 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은 중의 웅뎅이 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러지를 먹겠지.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뎅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뎅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뎅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 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 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 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의 반나체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둘른 베, 두렝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도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 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풀을 뜯어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10분 동안이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 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 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데기씩 누어 놓았다. 아-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 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뎅이 속을 실로 송사리 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 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 떼가 준동하고 있나 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 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 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벌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갔다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 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권태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 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 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한 판 두자. 웅뎅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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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암행어사와 자린고비
옛날 애기를 모으다 보면 인색하기로 소문난 자린고비 얘기가 쏠쏠히 많은 데 놀란다. 굴비에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숟갈 떠넣고 한 번씩 쳐다보면서 먹는데, 겸상해 먹던 아들이 두 번씩이나 쳐다봤다고 “임자식! 물켜려고 짜게 먹는다.” 했다는 유의 얘기들이다.
옛날 충주에 고비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비는 비자와 통하여 난다는 뜻이다. 성과 합치면 높이 난다는 뜻이 된다. 광해군 때 학자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오를 정도로 부자면서 인색하기로 조명이 난 사람이다. 본래 사람 사는 길이라는 것이 체면과 도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특히 유교의 예절을 바탕으로 발달한 조선시대 사회에서는, 제사를 제대로 받들고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함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인색하여 그것을 옳게 차리지 못했으니 소문은 좋지 않게 나고, 자연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아 지방을 붙이고 행사를 하는 때는, 제사를 마친 뒤 그 지방과 축문을 깨끗이 불살라 없애는 것이 도리인데, 얘기의 주인공은 그 종이 태워 없애는 것이 아까워서 책갈피 같은데 끼워 놓고 매년 꺼내 되풀이해 썼더란다. 그런데 옛날 백지는 다룰 적마다 피어 보푸라기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고비옹은 닳지 말라고 들기름으로 결어놓고 썼으며, 그래서 별명지어 `결은 고비`라고 하던 것이, 변해서 오늘날은 `자린고비`니 `자리곱재기`니 하는 호칭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가 사는 고장으로 암행어사가 왔는데, 일대에 자자한 그의 소문을 듣고, 어느날 늦게 그의 집을 찾아갔다. 하룻밤 쉬어 가자고 했더니, 들라 한 것가지는 좋았으나 오래지 않아 저녁 상이 나온 것을 보니 기가 차다.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정갈하게 격식 갖춰 차리고 곁상에는 전골과 반주까지 곁들였는데 이것은 주인의 몫이다. 다음, 개다리 소반에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 김친지 뭔지 반찬이 딱 한 가지 놓여서 내왔는데 이것은 손님의 차지다.
“시장하실텐데 어서 드시지요.”
그래도 인사는 잊지 않고, 부잣집 영감님답게 반주 석 잔 따라 자시고, 이 반찬 저 반찬 곁들여 상의 것을 골고루 아주 복받게 잘도 먹어 나간다. 어사야 애시에 그러려고 길 떠난 사람이라 자기 몫으로 온것을 이 또한 달게 먹어 치웠다. 뜰에 내려 한참을 서성이고 들어서니까 하는 말이다.
“기름 아까운데 우리 일찌감치 자리에 듭시다.”
침구를 내려 푹신한 이부자리는 아랫칸에서 자신이 깔고, 개떡조각같은 이불을 내어주며,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웃칸에서 자라고 한다. `듣던 대로구나!` 하며 고신고신 잠을 못이루고 그렁저렁 한 밤중이 되었는데, 그 집 남자 하인이 호들갑스럽게 소리친다.
“주인어른! 주인어른! 살쾡이가 와서 닭을 한 마리 물어갔사와요.” “으음!”
신음하는 것같은 소리가 나더니 주인 영감이 일어나 앉는 눈치다. 이내 불을 휘황하게 밝히고 이부자리를 개어 얹고 나더니, 장지를 열며 웃칸의 손님을 부른다.
“손님! 손님! 잠시 일어나 얘기나 나눕시다.” “...” “공연히 그러지 마십시오. 점잖으신 어른이 그만큼 하대를 받았으면, 분해서라도 잠드셨을 까닭이 없습니다.”
마지못한 척 몸을 일으켰더니 손을 잡아 아랫칸으로 인도한다.
“여봐라, 거 나 먹는 식으로 한상 잘차려 내오너라.”
새삼스레 통성명하며 인사를 나눈 뒤에, 주인이 잔을 들어 권하며 자신의 성장과정을 털어놓는다.
“알거지나 진배없는 외로운 신세로 남의 집을 살다가 등짐장사로 나섰습지요. 착실하니 신용있게 하는 사이 차츰 돈을 만지게 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달걀을 하나 얻었습니다. 주인 집에 맡겨 깠더니 암평아리 하나 주어서 제 몫으로 키웠는데, 알이 열다섯 개 모였을 때 안겼더니, 하나를 더 낳아 보태서 열여섯 마리를 깠는데 모조리 암놈이지 뭡니까? 그대부터 이상하게도 자신이 생겼아와요. `나는 하늘이 낸 놈이다.` 그래 객주에 들어서도 음식이랑 언제나 최고급으로만 시켜 먹으면서 작정을 했습니다. `어디 얼마나 느나 힘껏 해보자.` 천량은 날로 늘고 이외의 사람은 안중에도 없습디다. 한집에 살면서도 저녁에 보셨듯이 나만 그렇게 먹었지. 평생을 같이 산 마누라에게도, 자식 새끼들에게도 손님께 드린 그 이상은 못 먹게 했사와요. `내가 누군데.` 물론 인근 동에도 고을 안에도 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방금 살쾡이가 닭을 한 마리 물어갔다지 않습니까? 내 일생동안 천량에 축이 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내 재산 느는 것도 이것이 고비라는 징조로 여겨집니다. 여태까지가 오르막길이었다면 이제부턴 내리막인데, 인심도 이제 그만 잃고 돈도 한번 본때있게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님! 외모로 보아도 손님께서는 학식도 유여하고 경륜도 깊으실 것입니다. 이놈에게 제 천량 유용하게 쓰는 법 좀 친절하게 지도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튿날로 소 잡고 돼지 잡아 동네 잔치를 한바탕 벌이고, 가족들에게도 새옷과 옳은 밥상이 차례왔으나, 낭비를 막기는 오히려 전보다 더하였다. 어사는 그의 재산목록을 살핀 뒤 갖가지 사업을 일러 주었다. 그리하여 이제 충주 갑부 고비옹은 고장의 자선사업가로 탈바꿈해, 다리도 놓고, 집회소도 지어주고, 빈민 구제의 기금도 세워주어, 칭송을 받으며 살다가 나이 많아 죽을 때, 그의 손엔 한푼 재산도 남은 것이 없었다. 임종에 그는 자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유언하였다.
“나는 내 손으로 모아 내 복에 살고 나 할 일 하고 간다. 너희들도 제 손으로 벌어서 제 몫을 하며 살아다오.”
이런 유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널리 또 길이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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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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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다섯째 묶음 :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새해 첫날의 엽서
새달력에 찍혀있는 새로운 날짜들이 일제히 웃으며 뛰어와 하얗게 꽃으로 피는 새해 첫날
묵은 달력을 떼어내는 나의 손이 새삼 부끄러운 것은 어제의 시간들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나의 게으름과 어리석음 때문이네
나의 주변 정리는 아직도 미흡하고 어제 하던 일들의 마무리도 안했는데 불쑥 들어서는 손님처럼 다시 찾아오는 새해를, 친구여 우리는 그래도 망설임 없는 기쁨으로 맞이하자
우리에게 늘 할 말이 많아 잠들지 못하는 바다처럼 오늘도 다시 깨어나라고 멈추지 말고 흘러야 한다고 새해는 파도를 철썩이며 오나보다
살아 있음의 축복을 함께 끌어안으며, 친구여 새해엔 우리 더욱 아름다운 모국어로 아름다운 말을 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하자 우리의 모든 말들이 향기로워 잊혀지지 앟는 시가 되게 하자
우리의 좁디좁은 마음엔 넓은 바다를 들여놓아 넓은 사랑이 출렁이게 하고 얕고 낮은 생각 속엔 깊은 샘을 들여놓아 깊은 지혜가 샘솟게 하자
이제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해야 할 무겁고도 아름다운 멍에를 새해 선물로 받아 안자
-자꾸 밖으로 겉돌기 쉬운 마음 골방으로 들여놓고 자기 안을 보기 -바쁜 중에도 이웃을 향해 웃을 수 있는 여유 지니기 -자랑할 일 있어도 들뜨지 않고 겸허한 자유인이 되기 -어떤 작은 약속에도 깨어 있는 충실한 생활인이 되기
새해라고 하여 이런저런 결심을 내세우는 것조차 부끄럽고 부끄럽지만, 친구여 우리가 서로를 더 많이 사랑한다면 이 세상 모든 이가 형제라고 할 만큼 서로를 더 많이 아끼고 위해 준다면 우리의 새해는 기쁨의 춤을 추겠지? 꽃 속에 감추어져 있는 꽃술들의 그 미세한 떨림과 움직임의 순간처럼 우리가 진정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읽어내고 소중히 여기는 고운 감각을 지닌다면 우리는 더욱 행복한 새해의 새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흰 눈 속의 동백곷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희망 찬 새해의 연인이 되자, 친구여.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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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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