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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54 호
단기 4341. 12. 28 (음력 12. 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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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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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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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모범은 천 마디의 논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토마스 카알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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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이
사람이름
1668년, 서면에 사는 박운(朴雲)이 소지(所志)를 올렸다. “이 몸이 지난 임신년(1632) 2월, 관노 말생이가 지어먹던 논 열네 마지기를 사들여 지금까지 부친 지 서른일곱 해가 지났습니다. 말생이의 조카인 관비 ‘오작이’(吾作只)가 어미 등이 돌아간 뒤 청원서(정장)를 내어 본디대로 무르려고 합니다. 이치를 따지고 뜻을 세워 문서를 발급‘하기삼’(爲只爲).” 글말 ‘하기삼’은 ‘하도록 해주십시오’라는 뜻이다. 구실아치의 ‘뎨김’(판결)과 수결을 받은 소지는 판결문이 되었다.
‘오작이’와 비슷한 이름에 ‘오장이’도 있다. ‘오쟁이’(오장이)는 짚으로 엮은 망태로, 고장에 따라 ‘오재기’(오작이)로도 부른다. 오쟁이보다 큰 ‘섬’은 두 가마니 크기이며, 벼 백 섬은 한 ‘담불’이라 한다. ‘섬이·담불이’도 사람이름에 보인다.
조선 때 논밭은 ‘되지기·마지기·섬지기’로 헤아렸는데, 한 되, 한 말, 한 섬을 뿌릴 만한 땅이다. 고장 따라 다르나 논 한 마지기는 대개 약 660㎡(200평)이다. 더불어 고대 때부터 ‘먹·짐’(結·負/卜)과 같은 단위를 썼다. 1먹은 가로세로 33보(약 40m), 약 1600㎡(약 480평)이며, 100짐, 1000뭇(束), 10000줌(把)에 해당한다.
‘오쟁이 진 사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내에게 아내 뺏긴 이를 하필 그리 부를까? 우리말 표현을 살피면 얄궂은 것도 적잖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기지개를 펴다, 피해를 입다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만물이 기지개를 켜고 있건만 움츠러든 우리의 가슴은 쉽게 펴지지 않고 있다. 세계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만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제거됐으니 우리 경제도 이제 기지개를 켰으면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다. '기지개를 켜다'는 몸을 쭉 펴고 팔다리를 뻗음으로써 신체를 유연하고 활기차게 하는 것을 말한다. 경제에 있어서는 소비와 투자 심리가 살아나는 등 본격적인 회생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기지개를 켠다'보다 '기지개를 편다'는 말을 많이 쓴다. 몸을 펴고 팔다리를 뻗는 동작이 '기지개'이므로 '기지개를 편다'는 표현이 이상할 게 없어 보이지만 '기지개를 켠다'가 더 어울리는 말이다. '켜다'에는 '불을 붙이거나 밝히다' '물 등을 단숨에 들이마시다' '톱질하여 나무를 쪼개다' 등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특별히 '기지개'와 함께 쓰여 '팔다리나 네 다리를 쭉 뻗으며 몸을 펴다'는 의미가 있다. '기지개'에 '몸을 펴다'는 뜻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펴다'보다 '켜다'와 어울려 쓰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의미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단어를 가려 쓰는 경우가 있다. '앙금'은 녹말 등의 부드러운 가루가 물에 가라앉아 생긴 층으로, '앙금이 가라앉다'보다 '앙금이 생기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피해(被害)'도 '해를 입음'을 뜻하므로 '피해를 입다'보다 '피해를 보다' 또는 '피해를 당하다'가 잘 어울리는 말이다.
삐지다, 삐치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송곳은 주머니 속에 감추어도 저절로 삐져나오게 돼 있다는 데에서 생긴 말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알려짐을 이르는 말이다. '삐져나오다'는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불거져 나오다'를 뜻한다. '속옷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비닐봉지의 아래쪽 터진 곳으로 붓 한 자루가 삐져나와 있었다'처럼 쓰인다. 당연히 비슷한 뜻의 말이라고 알고 있는'삐지다'는 이와 달리 '칼 따위로 물건을 얇고 비스듬하게 잘라내다'를 의미한다. '김칫국에 무를 삐져 넣다' '꽁치찌개는 굵은 감자를 숭숭 삐져 넣고 푹 끓여야 제 맛이 난다' 등이 바르게 쓰인 예다.
문제는 이 '삐지다'를 많은 사람이 '성이 나서 마음이 토라지다'의 뜻으로 잘못 사용한다는 점이다. '지선이는 잘 삐져서 친구들이 같이 안 놀려고 한다.' '그렇게 조그만 일에 삐지다니 그 친구 큰일은 못할 사람일세그려.' '그 여자 한번 삐지면 되우 오래간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 이런 경우에는 '삐치다'를 써야 옳다.
'삐치다'에는 이 밖에 '일에 시달려 몸이나 마음이 몹시 느른하다'와 '글씨를 쓸 때 글자의 획을 비스듬히 내려쓰다'라는 뜻도 있다. 한편 '삐져나오다'는 '삐지다+나오다'로 구성된 말인데 이때의 '삐지다'는 그 의미가 '비어지다'(가려져 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내밀어 나오다)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칼 따위로 물건을 얇고 비스듬하게 잘라내다'의 뜻은 분명 아니다. 그런데 이런 뜻의 '삐지다'는 아직 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승락, 승낙
여의도에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진보ㆍ보수정당 모두 너나없이 정치 개혁을 외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에 문화적 충격이 필요하다"며 아예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에 나설 방침이다. 국회의원으로서의 의무를 팽개친 채 특권을 휘두르는 것을 더는 '허락'할 수 없다는 민의의 반영이다. '허락(許諾)'은 청하는 일을 하도록 들어주는 것을 뜻한다. 비슷한 말로 '승낙(承諾)'이 있다. 이것을 '승락'으로 잘못 쓰는 사람이 많은데, '승낙'이 바른 표기다. 이는 '諾(대답할 낙)'이 허락.수락(受諾).쾌락(快諾) 등에선 '락'으로 쓰이는 데서 오는 혼동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글자를 왜 '낙'으로도 쓰고 '락'으로도 쓸까? 한글 맞춤법에서는 '한자어에서 본음으로도 나고 속음으로도 나는 것은 각각 그 소리에 따라 적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속음(俗音)'이란 한자의 음을 읽을 때 본음과는 달리 사회에서 널리 쓰는 음이다. 즉 본음은 [허낙]이지만 많은 사람이 발음하기 편리한 [허락]으로 읽기 때문에 이 현실 발음을 수용, '허락'으로 적는 것이다. 수락ㆍ쾌락도 마찬가지다. 반면 승낙은 [승낙]으로 발음되고 본음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분노(憤怒)/희로애락(喜怒哀樂), 토론(討論)/의논(議論), 오륙십(五六十)/유월(六月), 십일(十日)/시월(十月), 팔일(八日)/초파일(初八日) 등도 같은 예다. 그러나 '匿(숨길 닉)'을 은닉(隱匿)/익명(匿名)처럼 표기하는 것은 이와 달리 두음법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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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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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1926-1956),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묻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이 시는 1956년에 쓰여졌다. 그 해 3월에 시인은 31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로 시작되는 시 '목마와 숙녀'와 함께 한때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졌다. 세월은 흘러 그대에게도, 잊혀질 그대 자신과 끝내 잊히지 않을 사랑이 다가올 것이다. 자신을 잃으면 사랑이 남고, 사랑을 잃으면 자신이 남는다.
-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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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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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行列) - 김사균
자궁은 합병증으로 곰팡이가 돋는 오후
개미들이 탈출하는 황금빛 행렬 앞에
분노는 날 무딘 나무칼 철조망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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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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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지은이] 원천석(元天錫) 자세한 연대 미상.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말의 학자이며 의사(義士).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다.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었으므로, 그가 왕위에 오르자 여러 번 간곡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한시집 두 권이 남아 있어 고려말의 사적과 그의 충성된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말 뜻] 굽다턴고 : 굽었다고 하던고? 세한 고절(歲寒高節) : 추운 겨울에도 변하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푸른, 높은 절개.
[감 상] 눈을 맞아서 그 무게로 한때 휘어진 대나무를 그 누가 굽었다고 하던고? 굽힐 그런 절개라면 찬 눈 속에서도 저렇게 푸를 수가 있으랴? 생각건대, 엄동설한에도 끄떡없이 그 추위를 이겨내는 굳센 절개는 오직 대나무 너 뿐인가 하노라.
권력에 굽히지 않는 지사의 굳은 마음을 비유한 것인데, 이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뜻을 노래한 것이 분명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안 는다. 고려의 녹을 먹던 내가 어찌 조선왕조에 절개를 굽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태종의 간곡한 청도 끝내 물리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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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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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망량과 경 - 제물론
망량*이 경*에게 말했다.
"당신은 가다가도 곧 멈추고, 앉아 있다가는 곧 일어서는군. 어째서 그렇게 지조가 없소?"
경이 대답했다.
"내가 무엇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겠소? 또한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에 의지하여 그렇게 움직이겠소?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뱀의 배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 정도에 불과한데, 어떻게 그렇고 그렇지 않은 까닭을 알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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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이 경에게 말했다.
"당신은 걸어가는가 하면 금방 멈추고, 앉아 있는가 하면 금세 일어서는구려, 어째서 그렇게 지조가 없소?"
그러자 경이 대답했다.
"당신은 형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인다고 나를 비난하고 있소. 그러나 나의 형체가 과연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소? 내가 따르고 있는 형체도 다른 그 무엇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 형체란 빈 껍데기와 다름이 없을 것이오. 나는 내가 왜 움직이는지 알려 하지 않소."
* 망량: 그림자의 엷은 그림자. 즉 그림자 밖에 있는 희미한 그림자를 말한다. * 경: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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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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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1907~1942)
채롱
시골
우거진 여름 나무 그림자가 아니라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이 앙상하게 남은 겨울 나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듯하다. 우거진 나무 그림자라는 것은 으슥한 낮잠의 터는 되어도 겨울 나무 그림자의 외롭고 아름다움은 없다. 겨울 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처녀설의 흰 막 위에 던지고 있는 그림은 쓸쓸하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나는 겨울에 함경선을 지난 때에 가장 흔히 본다. 과수원이나 혹은 낙엽송림에 눈이 쌓여 아직 밟히지 않은 그 백지 위에 나뭇가지 혹은 수풀의 그림자가 푸른 목판화같이 또렷하게 밝혀져 있는 풍경은 아무리 상 주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나가는 그 한 폭을 아깝게 여기며 다음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다. 조촐하면서도 쓸쓸한 나무 그림자를 볼 때 나는 시골의 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차가 한적한 역에 머물러 눈에 싸인 마을을 바라보면서 고요한 길을 걷노라면 대체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없는가 그 속에도 생활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별것 아니라 나무 그림자 같은 생활이 그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상한 것은 그런 생활에 곧 또 익어져 감이다. 화려한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쓸쓸한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요, 살라는 마련인 듯하다. 무료한 속에서 나는 C의원을 찾는 날이 많았다. 응접실에서 난로를 쪼이면서 한가할 때의 닥터 B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지운다. 밤이면 나로가 달아서 한구석이 과실같이 새빨갛게 익은 것을 둘러싸고 앨범을 뒤적거리고 '우울한 일요일'의 레코드를 듣다가 이웃방에 준비되어 있는 늦은 만찬을 시작한다. 식탁의 진미는 인읍에서 주인이 손수 사 온 도미, 굴과 식혜, 수정과, 부인이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 더운 온돌방에서는 이 이상의 선미는 없다. 식사가 끝나면 윷놀이를 하고 상품을 나눈다. 그러나, 시골의 살림은 나무 그림자같이도 호적하고 쓸쓸하다. 난로를 끼고 창으로 눈을 내다보고-너무도 단조하면 젊은 B박사는 인읍으로 영화 구경을 종용한다. 30 몇 년 형인지의 조금 낡은 자가용 차를 손수 운전해 가지고 집 앞까지 맞으러 온다. 같이 타고 몇 마일권 채 못 가서 발동이 머물고 속력이 없어진다.
간신히 몰아 가지고 온 길을 되돌아 어디로 가는가 하고 의아해하노라면 차는 도로 병원으로 들어가 차고 앞에 선다. 여러 날 쓰지 않았던 차에 물을 넣은 지가 오래 된 까닭에 어느 결엔지 얼어 버려서 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굳은 눈이 구두 밑에서 빠작빠작 울리는 밤거리를 걸어가서 차부에서 버스를 타면 아무래도 인읍까지는 10분이 넘어 걸린다. 늦은 영화관에 들어가면 이어 케이블과 콜베엘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시작된다. 낡고 망측한 토키를 끝까지 듣고 나면 골이 띵하다. 거리의 찻집 '동'에서 이것도 망측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쯤 쉬다가 이번에는 택시를 세내서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한낮은 되어서 B씨를 찾으면 그는 조반이 끝났다고 하면서 피곤의 빛을 띠고 나타난다. 들어 보면 놀라운 곡절이다. 새벽 네 시는 되어서 초에서 난산의 급한 환자가 있다고 사람이 뛰어온 까닭에 십리나 되는 원수대까지 차를 몰고 가, 사경의 산부를 수술하고 태아를 조각 조각 오려서 낸 후 집에 와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늦은 조반을 먹고 나니 그 때라는 것이다. 아무렇거나 간에 단조를 깨뜨린 셈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병원의 흥분은 지나쳐 처참하다. 중요한 것은 산부의 뒷소식인데 며칠 후에 들으니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18세의 애잔한 소부가 마을의 젊은이와 눈이 맞아 만주에까지 뛰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와 살림을 시작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나서 그가 위독할 때에 누구 한 사람 위문 오는 사람도 없고 수술을 시작할 때에는 물 끓여 부는 사람조차 아쉬워서 곤란이었다는 것이다.
말하는 B씨의 낯에도 피곤의 빛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쓸쓸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참한 이야기다. 시골의 생활이 겨울 나무 그림자같이 적적하고 외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나무 그림자의 푸르고 아름다운 점만은 이 산부의 이야기와 인연을 붙여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
B씨에게서 나는 여러 차례나 만찬의 대접을 받고 어간유의 선물을 받고 했으나 그가 거리의 내 집을 찾아오기 전에는 똑같은 형식으로 갚아 줄 도리는 없다. 찻집에서 마시는 차가 아니라 집에서 손수 만든 차를 낼 수 있으며 손수 요리한 도미와 굴과 아이스크림을 대접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가용 차는 없어도 구경만은 부자유스럽지 않게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가 직접 나를 찾기 전에는 어쩌는 수 없는 것이며 옷가지나 과자 상자쯤을 소포로 보낸댔자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닐 것이요, 차라리 그렇다면 소설책을 보냄이 더 뜻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B씨는 소설을 유난히 좋아한다. 난로 전을 싸고 앉아 늦도록 이야기한 것도 말하자면 대부분이 소설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였다. 광범한 그의 소설 지식에는 놀랄 만한 것이 있으며 신문 소설을 등한히 보는 나로서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 대신 나는 고전으로 그를 이기며 그의 지식에 그 무엇을 첨가하여 줌을 기뻐한다. 소설책이라고 하여도 자신의 것은 초라하니 훌륭한 책, 가령 해외의 것이라면 맨스필드의 단편집쯤이 적당할 듯하다. 이와나미판쯤으로는 체재가 너무도 빈약하니 좀더 고가의 호화판이나 나오면 한 부 보내리라. 그의 단편집은 확실히 B씨의 시골 살림에는 윤택과 위안을 줄 것이며 특히 "행복" 같은 걸작은 기어이 추천하고 싶은 일편이다. 물론 그 내용보다도 예술적 향기를 그에게 띄워 주고 싶은 것이다.
남편 해리와 미스 팰튼, 아내 영과 에디워렌의 두 쌍의 미묘한 관계를 나는 즐겨하지 않는다. 다만 해리와 영 부처의 행복스러운 가정적 윤곽, 집뜰 앞에 선 한 포기의 만발한 배꽃으로 상징되는 아내의 행복감, 그것이 그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주제이다. 배꽃이라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임을 사실 나는 이 작품에서 처음 알았고 그것의 행복감의 상징이 이 작품에서같이 여실하게 울려 온 적은 없다.
'...저 쪽편 담으로 향해 한 포기의 밋밋한 배나무가 가지가지에 그득 꽃을 달고 있었다. 마치 구슬같이 푸른 하늘에 고요하고 화려하게 뻗치고 있다.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가 한 개나 있을까. 시들어 버린 송이가 한 송이나 있을까-한창 깨끗하고 흐뭇하게 활짝 피어 있는 것이 멀리 서 있는 피어사에세 완연히 보여 왔다--'
'...그 나무는 고요하게 그러나 타는 촛불의 불꽃과도 같이 하늘에 뻗치고는 아름답게 떨리고 있다. 볼 동안에 자꾸만 높아져서 금시에 하늘 위 둥근 달에 채일 듯하다...'
봉실한 꽃송이가 바로 행복감 그것이다. 능금꽃과는 달라서 배꽃은 일률로 희다는 점에 작자가 특별히 배꽃을 든 비유와 암시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만발했을 때의 능금꽃이라는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도 물론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나 지금까지에 능금꽃의 아름다움만이 눈에 뜨이고 배꽃의 미를 등한시했음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의심한다.
어떻든, 나는 배꽃을 맨스필드의 단편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셈이다. 하기는 맨스필드만이 아니라 이 곳의 젊은 시인 중에도 배꽃을 노래한 사람은 이미 있으니 그의 시구가 나의 배꽃의 인상을 도와 주었을 것도 사실이다.
돌배꽃 필 때면 뻐꾸기 울고 뻐꾸기 울면 하늘이 파아랗나니 배나무 그늘이 가슴에 푸르고 연두색 잎새 햇볕에 손뼉치고 우거진 가지마다 쫙 펴진 가지마다 웃음 또 웃음...
영화
수업 제한에서 오는 양화 결핍으로 말미암아 요사이 거의 어느 상설관에서나 한 번 상영했던 영화의 재상영을 번번이 본다. 여간한 예술품이 아니고는 두 번 이상 감상하고 싶은 흥이 솟지 않는 것이나 영화의 감상은 짧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라 한 번 기억에 남았던 일편에는 식욕이 동하지 않는 바도 아니어서 두 번째 보러 간다. 그러나, 세상에 좋은 영화라는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대개는 처음에 느꼈던 감흥이 반감되고 품고 있던 아름다운 환상까지 도리어 부서져 버리고 마는 것이 통례다. 한절 한절의 컷의 구성에는 간혹 치밀한 수법과 자연스러운 연기가 보여 그 이상의 표현 방법은 없으리라고 감탄되는 대목도 있으나 전체로 흠이 보여 오고 결함이 드러나게 되어 겨우 이 정도의 영화였던가 하고 환멸을 느끼게 된다. 감독과 연기자들이 인생을 여실히 그려 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나 나타나는 화면이-불과 몇 센티 평방의 셀룰로이드 딱지가 종시 말 안 듣는 것이다. 연기의 부족으로 허덕거리는 장면을 대할 때는 꾸며 놓은 세트 장치 앞에서 상을 찡그린 감독이 메가폰으로 고함을 치며 삼군이 아니라 삼문 배우들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가엾게도 귀에 들려 오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뿐만 아니다. 참으로 감독자 자신의 두뇌와 천분에 더 많이 달렸으니 그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고 연기자에게 가르쳐 주는 표정과 동작이 과연 진실을 포착한 것이어서 만인을 똑같이 감동시켜 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슈탄벅이나 크레엘이나 듀비베가 아무리 능청맞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각각 한 개의 형이 있는 것이요, 결국 자기류의 발휘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개성의 조작이니 그것으로 족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 자기류로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잡았고 보다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여간한 천재를 가지지 않고는 벌써 현대인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게 되었다.
한다하는 천재도 까딱하다가는 일개 무명의 관객에게 뜀을 받고 계발을 입게 될는지 모른다. 거리의 구석구석에 할거하고 있는 군웅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그래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여 왔을 것인가. 폐데일까 루놜일까 채플린일까. '제7천국'을 보려니 성탄제 때의 아동 연극의 정도 밖에는 못 되어서 는적거리는 남배우의 낯짝에다 정신이 번쩍 들게 물을 끼얹고 싶은 충동이 났다. '장군 새벽에 죽다'도 두 번째는 지루하고, '유령 서로 가다'는 장난과 꾀가 너무나 드러나 보였다. '미모사관', '춘희', '다드워스', '대지' 등이 아무리 힘을 들였다고 해도 이 역 두 번 본다면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며 비교적 솔직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마라, 샵드레드', '야성의 부르짖음'이었다. 제작들이 교묘한 꾀를 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작품의 품격에서 받는 감동 속에 숨어 버려서 순진한 눈으로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영화보다는 원작인 소설편이 한층 우수함은 웬일일까. 훌륭한 영화라고 하여도 그것이 소설의 풍미와 암시를 항상 덜어 버리는 것은 일단 시각화된 화면은 아무리 우수한 한 폭이라고 하여도 벌써 결정적 운명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까닭에 소설이 주는 풍부한 환상을 옹색하게 한 까닭으로 규정해 버리고 이지러뜨리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영화란 아주 잘 된 영화가 영화이지 섣불리 되었을 때는 가장 졸렬한 소설보다도 더욱 졸렬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소설은 그래도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난은 이 점에도 있다. 차라리 '미완성 교향악'이나 '악성 베토벤'을 허물없이 본 것은 음악의 덕이었고 '모던 타임스'에서 끝까지 진진한 흥미를 느낀 것을 풍자보다도 웃음의 덕이었다.(이 작품의 풍자란 너무도 진부하고 상식적이다. 채플린의 독창적인 교태와 거기서 솟아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마땅한 듯하다.) 섣불리 본격적으로 겨루다가 실패라는 편보다는 차라리 웃음과 음악으로 대독시키는 곳에 영화의 다른 길이 암시된다. 근대의 걸작은 '아부일족'이었고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봐이에 주연의 '마이아링크'다. 하기는 봐이에의 연기도 벌써 코에 냄새가 미칠 지경으로 되고 말았다.
대체 배우의 생명이 그다지 긴 것이 못 되어서 아무리 명우라고 해도 작품을 4,5편 거듭하면 연기의 형이 결정되어 버린다. 아리볼이나 풀무니, 가르보나 다류가 아무리 차례차례로 연기를 보인다고 하여도 신축자재한 애교가 아니고 사람인 이상 어느 정도에 이르러 고정해 버림은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데아나다빈이 첫 작품에서 벌써 싫증이 남은 웬일일까. 가령 애수가 얼굴에 잔뜩 서리어, 보기만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특이한 종류의 배우는 나타나지 않는가. 국외자의 욕심이란 한량이 없는 것인 듯하다.
우유
'모던 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고따드와 가정 생활을 공상하는 대목이 있다. 물론 집이 교외에 있는 탓도 있겠지만 바로 문 밖에 열린 포도를 따먹고 우유는 문간에 매어 둔 소에게 직접 짜서 그 자리에서 마신다. 이 목가적 취미는 아마도 현대인의 누구나가 환상하는 것일 듯하다. 목가적 취미의 사치한 치장은 그만두고 그저라도 우유를 풍족히 먹고 싶다는 원부터가 우선 급하다.
나날의 곡량은 물론이거니와 시민마다가 우유를 풍족히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된 사회일까. 만반 문제의 출처인 요점을 이렇게 간단히 말해 버린다면 어리석은 잠꼬대가 될는지 모르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든 우유를 중요한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때마다 흡족하게 마시는 습관과 처지에 있는 서방인이 확실히 우리보다는 행복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유를 마시는 풍습은 물론 근래의 것, 적어도 피유리가 흑선으로 동방에 시항해 온 이후에 속한다. 그 이전에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면 그만큼 불행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극동인이 인도에 여행하였을 때에 간디는 인도의 서민층의 생활을 생각하고 두부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영웅으로서 오히려 이러한 세밀한 배려가 있음은 하찮은 식물 한 가지의 보통화가 족히 백성 전부에게 큰 복지를 가져오는 까닭이다. 백성 전체가 우유를 흡족하게 마시는 나라야말로 두말할 것 없이 이상 사회일 것이다.
학교 농장에서 아침 저녁으로 배달해 오던 우유를 흔하게 마실 때에는 아무 걱정 없던 것이 농장의 우유가 끊어진 이후로는 크게 공황을 느끼게 되었다. 질과 값으로 거리의 우유가 도저히 농장의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그 어느 날이나 번기는 법 없이 마치 성탄옹의 선물과도 같이 어림없이 듬직한 5흡들이 콜병이 유회색 문등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로이드 영화에 나오는 커다란 그 병이다. 여름에는 담쟁이의 이슬을 맞고 겨울에는 언 채로 오뚝 놓여 있는 그 풍모부터가 우선 상 줄 만하다. 물론 새벽에 갓 짠 생우유다. 냄비에 붓고 표면에 얇은 유막이 앉을 때까지 끓여서 식후에 숭늉을 대신으로 벌떡벌떡 켜는 것이다. 겨우 한 잔의 우유로 혀를 댈까 봐 고양이같이 홀짝홀짝 핥는 것과는 운치와 격이 다르다. 특히 겨울에 얼어서 살얼음이 잡힌 것을 끓여서 흡사 풋옥수수 삶은 냄새 나는 눅진한 액체를 입안에 그득 머금었을 때 우유의 진미는 그 한 모금에 있다.
해외를 돌아온 학자가 스위스에서 먹었다는 우유 자랑을 하나 농장에서 오는 우유가 결코 그에 밑지지 않을 듯하다. 한 홉에 실비로 3전, 한 콜에 15전, 하루에 두 콜이라도 30전, 한 달에 서 말의 우유를 위 속에 부어도 9원이면 족하다. 그것이 요사이 와서는 사정이 너무도 달라졌다. 농장이 없어진 까닭에 당장에 우유 기근을 만난 셈이다. 한 홉 7전의 거리의 우유를 하루에 한 되를 마시려면 한 달에 20원을 넘는다. 미곡과 신탄대를 합한 액수보다도 많다.
농장에 있는 배달부가 K목장으로 고용을 간 날로 구면이라고 즉시 주문을 맡으러 왔다. 하는 수 없이 하루 아침에 세 홉씩을 부탁해서 식구들과 나누게 되었으나 당초에 부족한 양일 뿐 아니라, 아무래도 협잡물이 든 것 같아서 농도가 옅고 맛이 덜하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전과는 달리 아치형의 좁은 홍예문 아래편 시멘트 바닥 위에 가느다란 한 홉 병이 세 개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이 콜병의 위용과는 엄청나게 빈약하게 보인다. 겨울보다 체중이 반 관이나 준 것을 우유 부족의 탓으로 돌린대도 과장을 아닐 듯싶다.
어떻든 농장의 우유는 생각할수록에 행복스런 선물이었고 지금 우유는 그래도 나으나 더 못한 악질의 우유를 찾는다면 함경선 식당차에서 파는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우유치고 이보다 더 못한 것을 구하려면 지옥으로 가야 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유를 넉넉히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지금에 있어서는 가장 원하는 세상이며 바라건대 거리의 복판마다 냉장의 우유 탱크를 세우고 오고 가는 시민에게 자유로 마시게 하거나 혹은 수도와 마찬가지로 지하에 우유를 묻고 각 가정에서 나사만 틀면 적량의 신선한 우유가 언제든지 졸졸 쏟아지게 하는 설비가 국가 경영으로서 하루바삐 생겨질 날을 공상-이 아니라 충심으로 원하는 바이다.
향연
일각이 천금의 값이 간다는 봄날 저녁, 거리의 향연에 감은 옛날 아가톤의 집 축하연에 모여 가는 기쁨보다 못할 것은 없다. 모이는 사람들이 반드시 희랍 시대의 철학자들일 필요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일단 가서 모여든 면면에 접하였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80여 명의 소위 거리의 지명의 사를 망라한 대연이었으니 80여 명에서 겨우 80분지 34명밖에는 구면이 없음이다. 60옹 50객 40줄 30대의 각 연대에 뻗쳤고, 종교가, 교육가, 법률가, 도규가, 조고가들이 쓸어 왔으니 희랍 시대의 초대객보다는 확실히 색채인 셈이다. 물론 그들의 지혜가 아가톤의 집에 모였던 옛 사람들에게 미치는지 못 미치는지 그들에게 비겨 자라격에나 갈는지 못 갈는지는 별문제다. 그들에 의해서 반드시 거리가 운전된다고도 할 수 없으나 그 얼굴들이 별로 신통할 것은 없는 것이요, 어떻든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아서 아물아물 그 수가 퍽도 많은 것이다.
도회의원도 많거니와 의사도 퍽은 많다. 인사 받은 몇 사람을 구면의 분에게 조용히 물어 볼 때 "그 사람은 상당한 지식인이오." "그 사람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오." 대답하고는 좌석을 군데군데 짚어서 설명한다. "저건 돈푼이나 있죠." "저건 고리 대금 업자요." "저건 술주정꾼이오..." 잡동사니다. 오월동주이기는 하나 잔치가 되었을 때에는 준연한 식욕으로 향해서 화기 준연하게 통일되었고 술이 돌았을 때에는 운명의 배멀미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며 당 안이 낭자하였다. 10여 명의 명기가 틈틈에 끼어서 술시중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사중에 여념이 없다. 청초한 맑은 자태들이 점홍이 아니라 점백의 정취를 나타냈다. 사람은 항상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을까. 아가톤의 집 연회에서는 연애를 논의하고 사랑의 원리를 이야기들 하였다. 잔치 마당에서는 그것이 가장 격에 맞는지도 모른다. 나도 이 날 밤의 한 구석의 회화를 비역해 본다. 연애론이 아니고 치정론이라면 결국 현대인의 그만큼 고대의 희랍인보다 타락했다는 증명뿐이요 내 허물은 아닌 것이다.
"요새 까딱 안 오실 젠 신문사 일이 바쁜신 모양이죠?" "바빠서 안 가는 줄 아나?" "그럼 아직두 그걸 노여워하고 계시나요? 내 곡절을 얘기한다 하면서 못 했군요. 오늘 밤에는 기어이 얘기해 드리죠." "발명은 왜, 뻔히 아는 노릇을 이제 새삼스럽게 발명할 테야?" "세상 소문이란 대개 사실과는 다르거든요. 말이란 양편 말 다 들어야지, 왼편 말만 가지군 아나요." "암만 그래 보지, 곧이듣나." "그 날 밤같이 우리집까지 오셨던 건 아시죠. 얘기는 게서부터 시작되는데 선생이 가신 뒤 군이 자꾸 쉬구만 가겠다는군요. 손님 대접이라 하는 수 없이 이불을 펴 주구 전 어머니방에 가 잤죠. 그뿐이에요." "그 군의 말과 다르거든." "그건 그렇죠. 아침에 일어나 그 방에 갔을 때 노여노여하면서 내 겨드랑이를 들추겠지요. 변태인가 봐요. 보이는 건 그뿐이에요." "흥 그걸루 설명이 다 됐다구 생각하나." "그럼요. 그 이상 아무것두 없는 걸 어떡해요. 그 뒤에 다시 시골서 왔을 때엔 아침부터 허덕거리고 와선 보구 싶어 왔다는구먼요. 문제는 그 날 밤인데 여기저기 불리면서 늦도록 놀다가 좋은 사람과 같이 돌아가서 자리에 누웠죠..." "요것 봐, 새롱새롱 말 막 한다." "이렇게 된 바에야 막 하지 않구 어떡해요. 그래두 믿지 않으시면서. 대문 거는 것 깜빡 잊었던 것이 불찰이었죠. 별안간 문 소리와 발 소리가 나더니 주추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그이의 목소리겠지요. 벌써 자리에 누웠구 하는 수 있어야죠. 불을 탁 끄구 시침을 떼면서 몸이 고달프니 가라구만 졸랐죠. 들어 줘야 말이죠. 이러쿵저러쿵 실랑이를 치던 끝에 기어이 마루에 뛰어올라 문을 열라는군요. 그래서 결국 터지구 말았죠. 방 안의 군이 이불을 홱 차구 일어나더니 고래 같은 소리루 누구냐구 고함을 쳤던 거죠. 그 한 마디에 밖이 별안간 조용해지구 그뿐이었어요. 생각하면 미안두 하구 부끄럽기두 하구" "천연스럽게 말하는 품이 영웅인가 요물인가?" "자, 이젠 오해 다 풀어 주세요... 어쩌나 사람들이 벌써 어느새 이렇게 헤졌네. 이 길루 우리집에 가시지 않겠어요? 오래간만에..." "...글쎄 가 볼까. 요것봐. 웃긴 왜 웃어."
사내라는 게 다 만만하단 말인가. 나도 실상 사내면서도 사내 맘 모르겠다.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으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보다. 30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의 붉은 빛만 남기고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 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치 않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쪽쪽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따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메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 버린 낙엽의 재를-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 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그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 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인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새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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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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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9. 갑오농민전쟁 : 민중 항쟁의 총결산 (3/3)
홍계훈 부대와 접전, 그리고 화약
홍계훈은 전봉준의 전술에 속아 농민군의 뒤를 밟은 꼴이 되어 전주성이 점령된 다음날인 4월 28일 아침에야 간신히 전주 남문 밖에 있는 완산 철봉에 도착하였다. 그는 장성으로 오다가 뒤늦게 전주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온 것이다. 홍계훈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너무 농민군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하다가 기습에 말린 것이다. 만일 전주성을 다시 찾지 못한다면 중앙정부에서 중징계를 내릴 것이 뻔했다. 홍계훈은 우선 경군과 전라도 일대의 지방군을 총동원, 전주성 근처의 주요 산지에 배치하여 사방에서 에워쌌다. 특히 홍계훈이 처음에 자리잡은 완산은 전주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요지로서 매우 유리한 거점이었다. 여기서 관군은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성 안으로 마구 총과 포를 퍼부어댔다. 이에 농민군 수백 명이 장태를 앞세우고 서문과 남문을 나와 관군 진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성루에서는 포를 쏘는 등 지원 사격을 하였다. 관군은 성을 벗어난 농민군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탄을 터뜨렸다. 그래도 농민군은 계속 전진하며 관군 진영을 무너뜨리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살아남은 농민군들은 간신히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장태는 장성전투처럼 고지대에서는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산을 향해 밀고 올라가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농민군이 성 안으로 밀려들어가자 관군들은 뒤를 쫓아와 서문 밖에 있는 애꿎은 민가 구백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다음날인 29일에 농민군은 전날과는 반대 방향인 북문을 나와 황학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때에도 별다른 성과없이 성 안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날 전투는 전날에 비해 치열해서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하루를 쉬고 농민군은 5월 1일에 다시 남문으로 나와 접전을 벌였으나 이 때도 사상자만 내고 성안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날 전투는 6시간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지는 상상할 만 하다. 5월 3일 오후, 재차 관군을 공격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던 김순명과 어린 용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복용 등 귀한 인재들만 잃은 채 싸움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 날에는 홍계훈 부대의 요지인 완산을 쳤다. 북문을 통해 나와 우회하여 용머리재를 공격하였다. 이때 농민군들은 사기 진작을 위해 옆으로 늘어서서 진격하였다고 한다. 앞만 보고 전진했기 때문에 아군이 쓰러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옆 사람이 쓰러져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군은 계속 밀고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정순명, 이복용 등 맹장들이 잇달아 죽자 농민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전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복용의 부대원 이백여 명이 거의 전사하는 등 농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 농민군이 분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자 주변 농민들이 대거 봉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농민군 부대는 운평을 거쳐 완산 철봉 근처에 진을 쳤으며 또 한 부대는 임실을 거쳐 완산 동남쪽에서 관군을 지켜보았다. 또한 충청도, 경상도 일대의 여러 고을에서는 산발적인 농민 폭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 전주성 내의 농민군을 원격 지원하였다. 이런 가운데 몇 차례에 걸쳐 선제 공격에 실패한 농민군은 흐트러진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감을 얻은 관군은 계속 성 안을 향해 포를 쏘아대고 사다리를 이용하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전주성 주변의 농민들이 외곽에서 힘을 모아 관군을 공격하기 전에 전주성을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것은 홍계훈으로서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또한 전주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본관지이며 경기전(이성계의 위패를 모신 곳)이 있는 곳이다. 이토록 왕실과 관련이 깊은 성이 점령되었으니 홍계훈으로서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전주성을 수복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관계로 관군의 공격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반복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성내에 있던 일부 농민군은 전주성이 곧 함락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으며 일부 간부들은 전봉준을 잡아 자수할 결심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성내의 농민군 사이에 동요가 일게 된 원인은 사방을 포위한 채 관군이 계속적인 공격을 한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먼저 외국 군대의 개입을 들 수 있다. 전주가 점령당한 이틀 후인 4월 30일 중앙정부는 일부 관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청국의 원세개에게 군대를 공식적으로 출병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외국 군대 동원은 1893년 보은집회 강제 해산 과정에서 고종이 청군을 동원하자고 했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장차 민족의 앞날에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는지 당사자들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청군 동원을 빌미삼아 일본도 군대 개입을 하였고 곧 청일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의 공식 요청을 받은 청국은 망설일 필요없이 조선을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5월 1일 직예제독 엽지초, 산서태원진총병 섭사성, 북양해군제독 정여창에게 출병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1,500여 명의 청군은 5월 5일에서 9일 사이에 충청도 아산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상륙한 청군 일부는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태를 탐지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3월 봉기 이후로 기대했던 최시형 중심의 북접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일 북접이 수도권과 충청도 등에서 호응을 하였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전주성에 있던 농민군은 외부와의 연락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더군다나 먹을 식량마저 모자란 형편이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여러 번에 걸친 전투에서 머리와 다리를 다쳤다. 이런 연유로 농민군의 사기는 점차 떨어져 승패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홍계훈의 입장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군들도 수차례의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상태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관군들도 몸을 사리게 되었다. 이미 관군 가운데는 도망친 자가 절반이 넘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청군이 들어오고 일본 군대마저 들어왔다는 소식에 접한 홍계훈은 곧 정계 개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떤 형태로든 전투를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전주 인근 지방 농민들이 외곽에서 관군을 조여들고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양면에서 밀고 들어와 결국 관군은 쫓겨가게 될 상태였다. 홍계훈은 자기의 신변 안정을 위해 이미 중앙정부에 과장되게 보고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진다면 홍계훈은 처벌을 당할 입장에 놓여 있었으니 이러한 외곽 농민군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양쪽 모두가 나름대로 불리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소강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화약이 맺어진 것이다. 그런데 화약을 맺게 된 배경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홍계훈이 이끌고 온 부대는 서울을 지키는 주력부대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서울을 지킬 관군이 부재하여 통치에 허점이 생겨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 상태였다. 그래서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임시방편으로 농민군과 화해할 것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전에 전봉준이 죽었다느니 전봉준을 잡아오면 상을 주겠다는 등 소문을 퍼뜨렸지만 농민군 내부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화약을 내걸자는 여론이 비등해졌던 것이다. 이 화약을 직접 하달한 사람은 김학진이었다. 김학진은 전주로 내려오기 전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고집을 부려 편의종사(감사나 장수 등이 현지에서 어명과 관계없이 자기 임의대로 일을 처리하는 대리 권한을 말한다. 이것은 주로 전쟁 등 비상시에 쓰이는 제도라고 한다.)를 받아내었다. 김학진은 중앙에서 정국이 기득권층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더이상 농민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은 소모전에 불과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즉 김학진은 전주로 내려오기 전부터 농민군과 화약을 맺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고종이 농민군을 물리치라는 말에 편의종사를 받아낼 생각을 했던 것이다. 김학진의 말은 홍계훈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진퇴양난의 길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그는 5월 6일 간절한 어투로 농민군에게 효유문을 보냈다.
효유가 이렇게 간절한데도 너희들이 끝내 의혹을 풀지 않는구나.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에 의심을 두고 이를 좇지 않으니 어찌 그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너희들이 살기를 원한다면 속히 성문을 열 것이요, 그리하여 흩어진다면 쫓아가 잡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각 고을에 명을 내려 결코 너희들을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 지금 이것은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것인즉 내가 어찌 거짓말로 너희들을 속이겠는가.
그런데 이 이면에는 무서운 노림수가 있었다는 것을 전봉준을 비롯한 지휘자들은 알고 있었다. 양호순변사로 도착한 이원희는 전봉준에게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와 있어 3국간에 어떤 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농민군을 해산하라고 종용한 적이 있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외국 군대의 개입을 확인하게 되었고 김학진 등이 시간을 끌어 청군이 전주에 도착할 시간을 벌 작정이라는 것도 파악하게 되었다. 김학진의 입장에서는 화약을 맺어도 그만이고 청군이 와서 전주성을 함락시켜도 그만이었다. 이렇게 외국 군대의 개입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전봉준과 지도부는 오랜 토의 끝에 화약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일 청군이 온다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관군들은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 전투 과정에서 조금은 거리낌을 갖고 농민군을 대했지만, 그들은 외국 군대이므로 서슴치 않고 살상을 일삼을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또한 청국에게 조선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전봉준이 화약을 맺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근심 때문이었다. 아직 외국 군대와 맞설 군사력이 없는 상태에서 명분에 얽매여 싸움을 계속한다면 외세에게 내정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꼴이 되므로 일단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전봉준은 판단했다. 이러한 전술적 후퇴는 다른 항쟁에서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전봉준은 봉기의 목적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화약을 맺는 조건으로 27개조를 홍계훈에게 제시하였다. 그 골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백성들을 탐학하는 탐관오리를 척결할 것. 이와 더불어 중앙 관직에서 매관매직을 일삼는 관료들을 쫓아낼 것. 둘째,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을 것. 세째, 협잡을 통하여 농민들을 우롱하는 상인들에게 법적 조치를 강구할 것.
여기에서도 새삼 농민군의 봉기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폐정 개혁을 통하여 봉건체제의 모순을 척결하자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 요구조건 27개조는 집강소 설치 후에는 12개조로 축약한 폐정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주성 화약은 이루어진 것이다. 홍계훈은 약속대로 성을 나오는 농민군을 체포하지 않고 물침표를 발급하여 누구도 체포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렇게 해서 1차 갑오농민전쟁이 막을 내린 셈이다.
반봉건 투쟁의 핵심, 집강소 설치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은 전주를 떠나 각지로 떠나갔다. 홍계훈은 이후 총제병영 삼백여 명만 전주에 남겨두고 서울 방비를 위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이때 이원희가 이끌고 온 청주의 진남병영마저 동원되었다. 이어서 김학진은 신임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 선화당을 차지하였다. 전주를 벗어난 농민군들이 흩어진 곳은 각자의 고향인 무안, 고부, 김제, 태인, 금구 등이었다. 이들은 전주성의 화약이 승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전주성에 계속 주둔할 상황이 아니었을 뿐이다. 중앙정부의 계략에 휘말리지 않고 당당하게 전주성문을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향을 향하면서도 승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북을 치고 칼춤을 추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개인별로 움직이지 않고 동향 사람들끼리 수십 명씩 모여 움직였다. 전봉준은 직접 고른 정예요원 기마대 20여 명을 이끌고 태인, 금구, 김제 지역으로 갔다. 손화중은 전라도 여러 지역을 거쳐 남원으로 갔다가 거기서 전봉준과 합류하였다. 한편 중앙에서는 홍계훈의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농민군이 패배했다고 믿고서는 일본군의 철수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으로서는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친일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호기였던 것이다.
전주성에서 나온 농민군에게 남겨진 과제는 화약 당시 제시한 폐정개혁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당시 제시한 요구조건은 단순히 전주성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는 봉기의 정당성을 알리고 실제로 이와 같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봉기는 무위로 끝난다는 것을 잘 알고 정부에게 구체적인 실천을 바라며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개혁안이 정부의 손에 의해 실시될 것이라고 믿는 농민군도 없었다. 따라서 농민군들 사이에서는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에 따라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역사상 최초의 농민대표 행정기관이었다. 집강소 설치 이후에도 농민군은 전라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고을의 수령들을 비롯한 관리들이 이미 도주한 뒤였기 때문에 모든 행정이 마비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향임 등의 협조를 얻어 농민 스스로 행정을 수행하였다. 고조선 이래로 봉기군에 참여한 농민들에 의해 자치 행정이 이루어진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도 지방 행정을 이끌어 간 계층은 중간 계급이나 지식층이었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지역에는 여전히 관청이 있긴 하였지만 농민군은 그곳에도 집강소를 만들어 폐정개혁을 실천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실질적으로 전라도 일대를 농민군이 점령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앙에서 봤을 때 전라도 일대는 무정부 상태였다. 비록 관청이 있는 곳이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농민군의 세력에 밀려 관리들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양호순변사 이원희의 조치에서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는 음력 5월 19일에 발표한 효유문에서 농민군에 참여했거나 집강소 활동 등 폐정 개혁에 앞장선 농민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은 요구 사항이 있으면 집강을 통하여 관청에 제기하라고 하였다. 물론 집강소 활동 중에 일부 농민군들이 그동안 쌓인 원한이 깊어 양반들에게 횡포를 부리거나 노략질을 일삼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이 순회를 돌면서 이러한 부정을 제지하여 점차 집강소는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집강 활동을 통해 제일 먼저 쇄신된 것은 역시 고리채나 부채 문제였다. 삼정 문란으로 빚을 지고 살지 않는 농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농민군은 집강소 설치 직후부터 부당하게 지고 있는 모든 부채는 무효로 하고 관련 문서를 소각시켰다. 대지주들의 토지는 모두 빼앗아 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집강소는 5월 중에만도 50여 개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찰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나주, 남원, 운봉 등의 수령들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면서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에 김개남은 남원으로 가 군수를 죽이고 전라좌도를 담당하였고 최경선은 나주에 가서 항거를 진압하였다. 집강소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고책임자를 집강이라고 하였으며 하부조직원으로는 성찰, 동몽, 집사, 서기 등이 있었다. 성찰은 대체로 질서 및 치안 유지를 맡았으며 동몽은 교육 담당으로 주로 청소년층 계도에 주력하였다. 집사는 재정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집강소는 관청 못지 않은 조직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집강소는 기존 관청 건물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이렇게 농민군이 행정 체계를 갖추어 실질적으로 전라도 일대를 다스리자, 위기감을 느낀 전라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7월 들어 중앙에는 개화정권이 들어서서 전주화약에서 전봉준이 제시한 폐정개혁의 내용이 갑오개혁으로 수용되었고, 이어 청일전쟁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또 9월에 들어서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개화정권과 연결되어 나라의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재봉기의 도화선, 청일전쟁
이미 1890년대에 들어와 조선을 강점하며 나아가서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할 계획 밑에 전쟁 준비를 끝낸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나 청군이 출병하자 이것을 조선 출병의 구실로 삼아 중국을 반대하는 본격적인 전쟁을 도발하려고 서두르게 되었다. 실제로 농민전쟁이 터진 후 일본은 정보요원들을 조선에 긴급 파견하여 정세를 탐지하게 하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동원 준비에 착수하였고 정부에 출병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술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농민전쟁이 확대되고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일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4월 29일에 소집된 내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무장 간섭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원병 요청을 정식으로 제기하기 하루 전에 취해진 조치였다. 일제의 조선 출병조치는 거류민 보호나 청군의 조선 출병에 대한 대응 조치가 아니라 침략의 발판을 삼자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본이 조선 정부의 철군을 거절한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계속 대륙을 넘보며 청국과 대립 관계를 가져왔지만 아직 청국을 물릴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면 대결을 피해왔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력은 1890년대에 들어 급격히 증강되었던 반면, 청국은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우위를 확보한 일본은 임오군란 이후 계속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청국 세력을 완전히 조선에서 몰아낼 계산이었다.
일본은 청국에게 같이 조선의 내정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청국은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라도 내정개혁을 이룬 뒤에 철수하겠다고 버티었다. 일본은 내정개혁 제의를 청국이 거절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은 교묘한 수법으로 청국을 전쟁에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마침내 일본은 7월 23일에 왕궁을 포위하여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킨 뒤 친청적인 입장을 보인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모양을 갖추기 위해 이미 노쇄한 대원군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이 생긴 것이다. 이어서 일본은 7월 25일에 아산만, 29일에 성환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뒤 8월 1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때 미국이나 영국 등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했지만 뒤에서는 일본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일본을 통하여 자국의 국제적, 경제적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었다. 서구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본은 청군과 일대 전쟁을 벌였다. 청군은 9월 15일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게 밀려 모두 조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청일전쟁은 두 달도 안 되어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청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이라는 야욕을 드러내어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 등은 일본이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삼키려 한다고 보고 일본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일 것을 결심하였다.
2차 갑오농민전쟁 : 대일본 전쟁
농민군은 마침내 재봉기를 결의했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이었다. 이미 근대화 과정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의 싸움은 관군 때와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고 농민군 지도부는 인식하였다. 청군을 물리칠 정도의 군사력이라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충청도 농민군과의 연합이었다. 9월 중순 경 전봉준은 삼례로 나와 각지 책임자들과 봉기에 대하여 의논을 거듭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북접의 최시형도 처음으로 무장 봉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그는 중간 간부들의 설득에 설복하여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재봉기를 결의한 전봉준은 각 지역에 통문을 돌려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4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에 도착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이 남쪽을 친다는 정보에 따라 손화중과 최경선을 광주로 보냈다.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북상을 거듭하여 공주에 진을 치고 있는 일본-조선 연합군과 대치하였다. 일본군은 1,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막강한 화력을 갖춘 정예부대였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양군 사이의 전투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것은 공주 외각인 우금치에서 벌인 접전이었다. 이곳에서 무려 4,50여 회에 이르는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점점 남쪽으로 퇴각하여 일단 논산에 진을 치게 되었다. 이때가 11월 초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주에 있던 김개남의 부대도 일본군에게 밀려 붕괴되고 말아 농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농민군에는 몰락양반, 유생 등도 끼어 있었는데,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들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도망치거나 전쟁 초기부터 있었던 민병대인 민보군 등에 가담하여 오히려 농민군을 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점차 전세가 불리해져 갔지만 농민군은 끝까지 일본군에 저항하여 논산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태인, 원평 지역으로 밀려났다. 이곳에서 농민군은 최후의 항전을 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농민군의 패배로 전투는 끝나고 말았다. 강원도에서도 수천명의 농민군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여 주동자들은 대부분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은 재기하기 위해 흩어진 농민군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부하의 배신과 한신현의 밀고로 12월 30일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뒤 이듬해인 1895년에 처형당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갔다.
항쟁은 이제부터이다 : 면면히 계승된 갑오농민전쟁의 정신
갑오농민전쟁은 홍경래의 반란-임술민란-1893년까지의 각종 민란 등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민중들의 항쟁을 결집하여 반봉건, 반침략 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높다. 비록 갑오농민전쟁이 전면적인 봉건체제 타도를 주장하지는 못했지만 집강소의 활동에서도 보았듯이 '만민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은 가히 진보적인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876년 이후 심화된 외세 침탈에서 국가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기치 아래 무력 봉기함으로써 반봉건, 반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갑오농민전쟁은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전쟁 이후 잠적한 농민들은 영학당, 활빈당으로 활약하거나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투쟁에 가담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이 지닌 반봉건, 반침략 정신을 후대에까지 면면히 계승시켜 주었다. 무엇보다도 2차 봉기에서 민족독립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이 갖고 있는 세계사적인 의의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갑오농민전쟁의 성격은 1910년 일제에게 합방된 후에도 반일 투쟁속에서 나타났고, 해방 후 독재정권과 종속적 정치 구조에 대항하는 민중운동 속에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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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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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넷째 묵음 : 십대들을 위하여
작은 감사
엄마, 저는요 새해 첫 날 엄마가 저의 방에 걸어주신 고운 꽃달력을 볼 때처럼 늘 희망과 설레임이 피어나는 그런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어요.
첫눈이 많이 내린 날 다투었던 친구와 화해하고 손잡고 길을 가던 EO처럼 늘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런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어요.
엄마, 저는요 장독대를 손질하며 콧노래를 부르시고 꽃밭을 가꾸시며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시는 엄마의 그 모습처럼 늘 부지런하면서도 여유 있는 그런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싶어요.
항상 나의 마음 가까이 있는 십대의 소년, 소녀들에게 이 한 편의 동시와 함께 새봄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시는 얼마 전 내가 작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을 때, 병실 흰 벽에 걸린 꽃달력을 바라보다가 쓸게 된 것입니다. 하루종일 누워 지내다보니 평소엔 무심히 보아 넘겼던 꽃 한송이, 햇빛 한줄기, 바람 한 자락도 예사롭지가 않았고 삶의 유한성, 아픔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 자신의 참을성 없음과 무력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욕심을 줄이고 아주 작은 것으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팎으로 큰 아픔의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절로 기도가 되곤 하였습니다.
나에게 편지를 통해 갖가지 사연과 함께 기도를 부탁해 온 십대들의 모습도 자주 떠올리곤 했는데 그 중엔 <십대들의 쪽지>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도 많았답니다.
길에서, 버스 안에서, 또는 책방이나 문구점에서 나는 십대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비록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늘 정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나의 어린 친구들이 요즘은 공부에 시달려 너무 바쁘게만 사는 게 무척 안쓰럽고 근본적으로 제도가 바뀌기 전엔 도울 수도 없다 싶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십대들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이들이 다 숨가쁜 매일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라는 것이 현대생활의 구호이다. 여기서 쾌락은 점점 증가하지만 기쁨은 점점 적어지는 결과가 된다"라고 한 헤르만 헷세의 말이 더 자주 기억되는 요즈음입니다.
나는 새로운 일을 맡아 요즘 서울에 와 지내고 있는데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얼떨떨하고 아직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전에 비해 나의 일도 더 바빠진 셈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몇가지의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늘 반복되는 일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기쁘게 하자는 것입니다. 꾸준히 그렇게 하다보면 마음의 기쁨 때문에 절로 여유가 생기고, 바쁜 중에도 생기는 자투리 시간들을 이용하여 남을 기쁘게 하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바쁘다' '지겹다' '속상하다' '죽겠다'는 말을 연발하기 전에 다만 작은 것 한 가지라도 기뻐하고 감사할 거리를 찾는다면 바쁜 생활 중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늘 생기를 잃지 않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소중한 삶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1989>
봄마다 새로운 꽃씨를 뿌리듯
얼마 전 나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분으로부터 조그만 화분 하나를 선물받게 되었는데, 그것을 방에 갖다 놓고 한동안 무심히 지냈더니 곱게 피었던 꽃들이 다 시들어 버려 보기 흉하게 되었습니다. 실망한 나는 시든 꽃들을 아예 다 뽑아 없앨까 하다가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며칠 간 정성껏 물을 주고 햇볕을 쏘여주며, 관심의 눈길을 보냈더니 다시 샛노란 꽃을 피워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화분에 물을 주어 고운 꽃을 피워 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사랑이란 물을 주어 우리의 존재를 꽃 피워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올바로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현재의 삶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보내오는 10대들의 편지 속에서 종종 '죽고 싶다'는 말이 버릇처럼 반복되는 것을 보면 슬퍼집니다. 이젠 공부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이 다 여의치 않아 차라리 수녀원에서 가고 싶으니 그 절차를 알려달라고 조를 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수녀원이란 곳이 어떤 좌절과 실의에 빠졌을 때 달려가는 '인간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우리의 고민은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기대에서 올 때가 많은 듯합니다. 그들을 원망하고 미워하기 전에 '나 자신은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를 한번쯤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현재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보고 싶어도 너무 멀리 있거나 소식을 모르는 과거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어떻게 불신과 미움의 포로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흐르는 세월과 함께 어느 날은 지금의 선생님. 친구들과도 헤어지고 또 어느 날은 부모님을 떠나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날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내가 좀더 잘했어야 하는 건데'라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기회가 있을 때 좀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새봄의 들풀처럼 아름답고 싱싱한 나의 친구들이여, 젊음 하나만으로도 축복받는 여러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소중한 젊음의 때, 희망의 때를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낭비하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하루 한 순간이 다 유일무이한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삶에 대한 경이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회복기의 환자처럼 우리는 매일을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면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햇빛, 공기, 물, 바람, 그리고 학교, 우리집, 가족, 이웃, 모두가 새로운 의미로 살아 올 것입니다.
봄마다 새로운 꽃씨를 뿌리듯 우리 마음의 밭에 날마다 새로운 감사의 꽃씨를 뿌리며 다가오는 한 해도 기쁘게 나아갑시다.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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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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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전 200선 해제 1 - 반덕진
제2부 고전 해제
제1장 <동양사상>편
<대승기신론소> 저자 : 원효(607~686)
<대승기신론소>는 프랑스의 폴 드미에밀이 <대승불교철학의 가장 명쾌한 개론서>로 극찬한 <대승기신론>(인도의 마명)을 원효가 해설한 책으로 <금강삼매경론>과 더불어 원효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작이다.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던 철학문제인 <공.유의 대립>을 극복,독특한 <화쟁사상>으로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사상의 방항을 제시한 원효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불성>이 내재해 있다는 <여래장사상>의 본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 원효가 일생동안 추구했던 <일심사상>과 <대중불교>의 전개라는 그의 염원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생애
우리에게 김춘추의 딸인 과부 요석공주와의 로맨스,그리고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다음날 깨달음을 얻어 도중에 돌아온 멋진 사나이로 알려진 원효, 원효는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지 1백여 년 만에 나타난 우리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지도자였다. 성은 설씨,원효는 법명,설총의 아버지, 29세 때 출가하여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했고, 34세 때 의상과 함께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나, 고구려의 순찰대에 잡혀 실패하고 10년 뒤에 다시 떠나, 도중 당항성의 어느 무덤에서 잠결에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이튿날 <<모든 사물과 법은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온다. 그후 분황사에 있으면서 <통불교>(원효종.해동종)를 제창하여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했으며,장안거리에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바칠 기둥을 깎으리로다>>라고 노래했다. 그 뜻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태종 무열왕이 듣고서 홀로 된 요석공주와 짝지어주니 설총을 낳았다는 공주와의 로맨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파계한 뒤 스스로를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칭하며 속인 행세를 했고,<화엄경>의 이치를 쉽게 풀어 <무애가>라는 노래를 지어 민중 속에 전파했다.
신라왕비의 종기의 치료를 위해 당나라에서 <금강삼매경>을 들여와 왕이 설법을 듣고자 대법회를 준비하도록 했느나 설법할 사람이 없어 모두 낭패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 당시 박식하기로 유명한 대안법사가 천거되었으나 그는 다시 원효를 추천하고 물러났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효는 우선 이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쓰기로 하고,소를 타고 가면서 소의 두 뿔 사이에 책을 걸쳐놓고 먹을 갈아 <금강삼매경소>5권을 썼다. 그러나 현존하는 <금강삼매경론>은 이것이 아니다.그를 시샘하는 자들이 그것을 훔쳐갔기 때문에 원효는 다시 <약소>3권을 집필하여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드링 원효의 대작이라 일컫는 <금강삼매경론>이다. 원효는 이것을 가지고 당시 신라불교의 대표사찰인 황룡사에서 왕과 고승대덕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경전의 깊고 오묘한 이치를 설파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후 절에서 저술과 참선으로 말년을 보냈다. 그는 불교사상의 종합과 실천에 노력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총100여 부240권 중 20부 22권만이 현존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즐겨 인용했고,<금강삼매경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그의 대저술이다.
원효의 불교사상
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그러기 위해선 겸손하라>>는 것이다. 원효는 인생의 비극이 싸움에 있으며 이싸움을 피하기 위해 아집과 자만심을 버리고,본래부터 <나>라는 존재가 따로 없으니 나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는 것이 원효가 남긴 사상적 교훈이다. 원효의 불교사상은 1.화쟁사상 2.일심사상 (원융회통사상) 3.정토사상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같다.
1.<화쟁사상>은 서로 간의 다툼을 화합하려는 것이다. 그가 살던 당시의 불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이론이 분분하여 혹은 나만 옳다 하고 남을 그르다고 하며,혹은 내 학설은 옳고 남의 학설은 틀리다 하는 단순한 이론만 횡행하고 있어 드디어 쟁론이 강과 바다를 이룬 상황>>이었다. 이 <강과 바다>를 이룬 쟁론을 화합한다는 것이 원효가 시도한 과업이었다. 즉 서로 모순 대립한는 것처럼 보이는 각 경전의 불교사상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하나의 원리로서 회통시키려 했다. 원효의 화쟁은 서거정의 <동문선>이 전하는 것처럼 <<여러 갈래의 각기 다른 쟁론을 화합하고 유와 무의 대립된 견해를 귀일시키는>>것이었다.
2.이러한 화쟁은 <일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가능하다. 원효사상은 달리 표현하면 <일심을 통한 화쟁사상> 혹은 <일심을 통한 원융회통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불교의 모든 교설은 불타의 깨달음을 원천으로하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경론과 교설은 이 <깨우침>의 영역이다. 즉 모든 경론이 한 마음의 펼침이며 그것들을 모으면 그대로 <일심>으로 귀일되는 것이다. 또 여러 갈래의 종파 또한 한마음의 펼침에 불과하며 요약하면 역시 일심일 뿐이다. 이처럼 원효의 논리는 개합과 종요의 회통원리인 것이다.
3. 정토사상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기본원칙 위에 어려운 볼교경전을 몰라도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만 위우면 누구나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는 단순한 신앙이었고 현세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갈 수 있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내세신앙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과 자장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의 수용 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충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혜숙.혜공.대안 등이 대중속에 깊이 파고들어가 서민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화시킴으로서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했다. 원효 역시 이들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괴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가로써 가무하고 잡담하는 가운데 불법을 널리 알리어 샐생활을 불교화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무애가에는 본체(리)와 현상(사)이 소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당시의 귀족 중심의 불교에서 민중불교로의 불교 대중화를 시도했다. 그의 포교로 신라하대에는 신라인들의 대부분이 불교신자가 되었다 한다.
<대승기신론소>의 내용
1.<대승기신론>
<대승기신론>은 2세기경 인도의 시인이자 고승인 마명대사가 대승불교의 근본 뜻을 이론과 실천의 두 측면에서 설명한 책으로 줄여서 <기신론>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찬이라는 주장이 있어 저자문제는 오늘날까지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으나, 설사 인도에서 찬술되었다고 해도 그곳에서는 크게 읽히지 않고 중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하며, 이는 원효가 해설한 <기신론소>의 영향이 컸다.
<기신론> 해석서 중 혜원.원효.법장의 주석서를 3대소로 지칭하고 있으나,혜원의 것은 가짜라는 설과 함께 질로나 양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분과와 어구해석에 있어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원효의 <기신론소>야말로 최고의 <기신론>해설서라 할 수 있다. 원효 자신도 그러한 위치를 알고 있었던 듯,<<종전의 주석가들은 허심탄회하게 논지를 바로 찾지 못했으니 근간을 잊고 곁가지를 얻는 데 그쳤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기신론>에 대해 무려 7종의 연구서를 냈고,특히 그의 <기신론소>는 일찍부터 중국의 불교학계에서도 높이 평가했다. 그런 의미에서 원효는 <기신론>의 <재발견자> 요 <선양자> 할 수 있다.
2.<대승기신론소>의 내용
원효가 생존했던 당시의 불교계는 인도는 몰론 동아시아의 사상적 대립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종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1.공 (무).유의문제 2.진 (출세간적 진리) 3.속 (세속적 진리)의 차별문제였다. 그런데 원효는 많은 경론을 섭렵한 끝에 이 문제들을 근본저그로 해결할 수 있는 논리를 마명의 <기신론>에서 발견하여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사이을 화합시키고,진과 속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진속일여)라는 주장을 폈다. 마명은 <기신론>의 첫머리를 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불보(부처님),법보(부처님 말씀), 승보(불제자)의 삼보에 대한 찬양하는 권두시로 시작하고 있는데 원효는 이 권두시에 대한 해설로 <기신론>의 사상을 요약,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원효는 <일심> 이란 관점에서 불교의 모든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삼보에 귀의한다라는 것은 외부의 객관적인 대상에 대한 귀의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마음속으로의 귀의를 의미하며, 그렇게 되면 불법의 가르침도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되고 영원한 마음(진여)은 현실 속에서 오염(생감)되어 나타나는데, 참된 마음과 현실의 마음은 어떤한 관계에 있으며 현실의 마음은 어떠한 양상을 갖는가? 마명은 진여와 생멸의 마음을 포괄하여 대승(여래장)이라 칭했는데, 대승이란 곧 <중생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대승인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지만 진여와 생멸의 두 방향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인 것도 아닌 것을 <아라야식> 이라하는 데, 이러한 아라야식에 의해 진여의 세계(각, 깨달음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불각, 타락의 세계)는 같은 것으로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불각은 피할 수 없으며 깨닫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 시각 단계이고,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본각(구경각)은 우리의 본래마음인 진여의 세계다. 불각 때분에 생기는 기본적인 세 가지 모습을 <삼세>라 하고 그로부터 파생되어 더욱 복잡해진 여섯 가지의 모습을<육추>라고 한다.
그러나 불각의 과정이 인간세계의 전부는 아니며, 각이라고하거나 불각이라고 하거나 그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기신론>의 주장이다. 한마음(일심)에 의해 진여(본체론적인 중관학파)와 생멸(현상론적인 유식학파)이 <기신론>에 이르러 비로소 종합되는 것이다. 중관.유식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세속(속).출세간(진)의 차별까지도 <기신론>에 의해 합리적으로 극복된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자세. 그것이 결정짓는다. 무궁무진한 여래의 진여한 마음을 가진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고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그 존재의의나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신론> 의 사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얻은 그의 깨달음으 내용과 신기할 만큼 일치하고 있다. 이<기신론>을 보고 원효는 얼마나 기뻤을까? 원효는 <기신론>이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진속일여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원효는 그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인 마음 이외에 다시 무슨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리석어서 그 하나인 마음을 잘 모르고 방황하는 까닭에 그 고요해야 할 바다에 파랑이 일고 기복이 생기며 갖가지 평화롭지 못한 인간의 한계상황은 생겨난다."
<기신론>은 이러한 마음, 곧 <일심>에 관한 설명이며 원효는 그것을 독특한 입장에서 해설하고 있다. 권두시의 이러한 내용은 <기신론>의 대의를 표명하고 있지만 원효의 독창적이고 해박한 해설에 의해 더욱 참신함을 갖는다. <기신론> 자체의 이러한 내용은 어느 불전과도 다른 독특한 것이다. 흔히 불전들이 어느 한사상을 말한는 데 비해 <기신론>은 불교 교리를 전체적으로 조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승의 삼보에 관한 문제나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열반이나 진여의 상태, 또한 진여의 상태에서 타락해 있는 모습들에 대한 기술은 실로 불교 전체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원효사상의 의의 및 영향
이상으로 원효의 생애,<대승기신론소>를 살펴보았는데, 그의 종교사상은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원효는 한국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으며 한국불교는 원효를 통해 비로소 총화불교, 즉 화쟁의 불교에 이르렀다. 원효 이후 한국불교는 신라말의 5교 9산으로 부터 고려의 5교 양종,다시 조선시대의 선교 양종이 되고 결국에는 선과 교가 합하여 일종으로 된 것은 원효의 화쟁에 의한 모든 종문의 회통사상의 영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원효의 진가를 재발견한 고려 의천의 교선일치 그 뒤를 이어 보조의 선교일화, 조선시대의 사명 등에서 원효가 이룩한 한국 불교의 전통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불교의 도덕적 논설에서도 <화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그 덕목을 1.현상문 2.입의문 3.차별문,그리고 끝으로 4.화쟁문이라 했다. 플라톤은 지혜.용기.절제.정의의 <4주덕> 기독교의 믿음(신).소망(망).사랑(애), 중국의 유교에서는<인의예지신>을 각 각 덕목으로 강조했으나, 원효는 모든 차별의 덕목들을 일관하는 화쟁의 문을 따로 열었던 것이니 이는 원효의 사상이 지닌 원융의 정신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다. 여러 종파들이 원효를 통해서 일관된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각파의 의미가 다시금 살아나서 <교>와 <선>이 그 상극성을 극복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효는 당시 사상계의 최고정점에 올라 왕과 대중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었으나, 스스로를 낮추어 대중 속에 들어가 호홉을 함께한 인물이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원효는 계속적으로 인용되고 있고 특히 중국에서는 원효의 소를 <해동소>라부르고 중국의 화엄철학을 대성한 법장의 사상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불교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하여 당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한 특출한 사상가였으며 실로 한국사상사에서 우뚝 솟은 봉우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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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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