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9. 갑오농민전쟁 : 민중 항쟁의 총결산 (1/3)
중첩된 내외 모순 : 강화된 봉건적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모두 실패로 끝남으로써 민씨 정권의 외세 의존성이 강화되어 조선은 열강의 침탈에 더욱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 내정 간섭을 받는 가운데 특히 경제적 침탈에 거의 무방비 상태에 처해 있었다. 앞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일본과 청국은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청국의 경우 임오군란 이후 맺은 무역장정을 통해 얻은 여러 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일본과 마찬가지로 농촌에까지 경제 침투를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구 열강까지 끌어들여 조선은 그야말로 열강의 이권 다툼 각축장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아직 농촌경제의 틀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조선경제는 쌀이 헐값으로 일본에 유입됨으로써 국내 쌀값은 갈수록 폭등하였다. 이것은 아직 지주전호제가 철폐되지 않은 상태에서 봉건적 모순을 더한층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지주층은 농민들을 수탈하여 거두어들인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대신 사치품과 서양제품을 받아들여, 조선의 경제 구조는 기초부터 서서히 무너져갔다. 임술민란에서도 보았듯이 이렇게 농촌에 침투한 화폐경제는 고리대적 수탈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아 농민층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 수많은 빈농과 저임금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빈민이 생겨났다.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방곡령을 내려 쌀 수출을 막으려 하였지만 지방 통치가 미약한 상태에서 방곡령은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결국 지주들과 부농층 및 악질 상인들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빌붙어 스스로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가 조선의 자생적 자본주의 경제 발달을 뿌리부터 짓밟고 말았다. 여기다가 어윤중과 김홍집 등 온건개화파 인물들마저 중앙에서 몰아낸 민씨 정권의 외세 의존성이 한층 강화되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따른 배상금을 갚아나가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은 바닥을 보이게 되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새로운 조세 종목을 만들거나 당오전을 남발하였다. 이에 따라 높은 인플레 현상이 일어나 경제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봉건적 수취체제는 군현 단위로 세금을 징수하는 총액제였기 때문에 생산담당자인 농민에게 그 부담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지방 관리들의 탐학은 날로 심화되었고 정부의 지방 통제가 극히 약화되어 중간에서 횡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이렇게 1)민씨 정권의 봉건적 수탈과 2)지방관들의 탐학, 그리고 3)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제국주의적 경제 침탈 등으로 당시 조선은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중첩된 내외 모순을 척결하기 위하여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1885년 3월에 고종에게 올린 한 상소문을 보면 당시 빈농과 빈민, 유랑민들로 구성된 반란군의 활동 상황과 규모 등을 짐작할 수 있다.
근일 화적(당시 지배층은 농민 반란군을 이렇게 불렀다.)의 폐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하루도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특히 호남지방이 가장 심합니다. 바람같이 모여 무리를 이루는데 그 수가 대략 만 단위에 이르고 있습니다.(중략) 심지어 포교들도 피해를 입고 고을 원들도 때때로 난을 당하여 화를 입어도 고을 원들은 이를 방관하고 다스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19세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특히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1884년 이후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봐도 매년 전국에서 농민들이 항쟁을 벌이고 있음을 다음 표를 통해 볼 수 있다.
*1885년 - 1893년 지역별 봉기 현황
연도 민란이 발생한 주요 지역명
1885 황해도 토산, 경기도 여주, 강원도 원주 1886 충청도 음성 1888 함경도 고산, 북청, 영흥, 길주, 초원 1889 강원도 정선, 인제, 경기도 수원, 전라도 전주, 광양 1890 경상도 함창 1891 황해도 평산, 강원도 고성 | 1892 평안도 성천, 함경도 함흥, 덕원, 회령, 강원도 황천, 경상도 예천 1893 평안도 함종, 중화, 황해도 재령, 철도, 경기도 개성, 인천, 충청도 황간, 전라도 전주, 익산, 고부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편, <조선전사(근대1)> 참조
위의 표는 대표적인 민란만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이 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갑오농민전쟁에 가까이 갈수록 점차 항쟁의 빈도수가 높아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893년에는 실제로 이 표에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갑오농민전쟁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으며, 날로 가중되는 내외 모순을 척결해야 한다는 민중 의식이 한층 고양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술민란과 마찬가지로 1893년의 농민 항쟁은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이것을 조직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역량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철두철미한 조직력과 고취된 반봉건, 반외세 의식의 이상적인 결합은 갑오농민전쟁에 와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 : 고양되어가는 반봉건.반외세 투쟁의식
동학의 발생과 교조신원운동의 배경
갑오농민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학의 발생 배경과 성격, 그리고 교조신원운동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전쟁이 동학 세력이 주도한 동학혁명이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농민군이 동학의 조직력을 이용한 면이 많고 또한 동학 사상이 농민들에게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동학과 농민전쟁 사이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에 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동학(천주교, 즉 제국주의 침탈의 선봉 역할을 한 서학의 대립 개념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다.)이라는 새로운 종교을 만들게 되었다. 삼정 문란 등 봉건적 수탈에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 동학을 만든 것이다. 이후 최제우는 당시 조선사회를 왕조의 기운이 쇠하고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고 규정하고 1861년부터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그는 주문을 만들고 강령을 지어 대중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누구든지 한울님을 모셔 군자가 되어 그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서학이 내세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이 땅에 개벽을 이루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보국안민 사상을 내세워 동학을 현실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종교로 만들어나갔다. 지상천국의 이상을 추구하는 동학은 급속도로 민중 계층 사이에서 번져나갔는데, 특히 삼남지방에서 동학교도의 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최제우의 사상은 당시 봉건지배층의 경계를 받아 결국 불온한 사상이라고 낙인찍혀 그는 1864년 1월에 혹세무민죄로 체포되고, 같은 해 3월 10일에 처형당하였다. 이로써 동학은 유교 이념에 위배되는 사악한 이단으로 규정된 셈이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이렇게 이단으로 규정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일어난 것이다.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나아가 동학이 사악한 이단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 동학교도들로서는 시급한 선결 과제였다. 그러나 이 운동 과정에서 지도부와 일반 신도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민씨 정권하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받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은 점차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애초부터 무력 봉기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1870년을 전후하여 4차례(진천, 진주, 영해, 문경 봉기)에 걸쳐 일어난 이필제의 반란 그것이다.
이필제의 반란
기록에 따르면, 이필제가 동학에 입교한 것은 임술민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63년도이다. 그는 최제우가 혹세무민죄로 잡혀 처형당하자, 무력 봉기를 통하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 물론 이 봉기는 반봉건 투쟁의 성격으로 나타났다. 향반 출신인 그는 충청도 진천에 살면서 임술민란을 통해 드러난 봉건적 모순을 직시하고 동학의 조직력을 통하여 교조신원운동을 펼침과 동시에 반봉건 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는 입교 직후부터 교도들을 규합해 나갔는데, 최제우 처형 이후 정부가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이필제와 같은 강경론자들에게 일제히 체포령을 내리는 바람에 그는 1869년 말에 진천을 떠나 농민 항쟁이 일어났던 경상도 진주로 피신하였다. 그는 진주민란을 통하여 이곳의 농민들이 상당히 반정부, 반봉건적 기질이 강하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주성칠이라고 자기 이름을 바꾸고 다시 동학을 통하여 농민들을 규합해 내었다. 그는 마침내 1870년 7월에 이곳에서 민란을 일으켰으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심문 기록에 따르면, 이필제는 중국으로 들어가 새 왕조을 세우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갖고 정만식, 장경로 등과 함께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 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한 후 금병도라는 섬을 거점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필제는 한국 고대 역사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어서 백제의 옛땅을 찾겠다는 신념으로 그러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 이필제가 북벌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사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필제의 뜻이 정리되어 나타난 민란은 흔히 '이필제의 반란'이라고 불리우는 1871년 3월 10일에 일어난 영해 봉기이다. 이 날은 바로 최제우가 처형당한 날이다. 동학교도들은 이 날을 원일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필제는 진주작변 이후 경상북도 영해로 피신, 잠복중이었는데, 이 해 2월에 최시형(그의 본명은 최경상이다.)이 박사헌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이필제는 최시형에게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형, 나는 한번 선생(최제우)의 수치를 씻고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을 갖고 있소.....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 날에 거사하겠소. 다시 다른 말없이 이를 따르시오.
이 말에 따르면, 이필제의 북벌론을 단순히 황당무계한 말로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반봉건 투쟁을 통하여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다소 이상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이필제의 강경한 말에 최시형도 동감하여 봉기할 것을 결심하였다.(일설에는 이필제의 무력 봉기에 최시형은 반대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시형은 이필제의 북벌보다는 교조신원에 비중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필제 등은 치밀한 계획을 짜고 동학교도 500여 명을 모아 천제를 지낸 뒤 게릴라 전법에 따라 야밤에 영해관부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부사인 이정을 문책한 뒤 처단하였다. 동학군은 성을 완전히 점령한 후 소를 잡아 나누어 먹고 탈취한 돈을 풀어 헐벗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성을 빠져나와 영양 일월산으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게릴라 전법은 임꺽정의 경우를 빼고 기존에 일어났던 민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였다. 따라서 "이는 어떠한 도적들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며 봉건지배층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으며, 이필제의 동학군들을 두려워한 영해 주변 고을의 수령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도망칠 정도였다. 이필제의 반란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동학을 믿는 신도들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화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여세를 몰아 같은 해 8월 2일에 문경에서 정기현 등과 함께 다시 봉기를 계획하였다. 봉기 거점으로 삼은 지역은 정확하게 말해서 문경조령초곡으로서, 이곳은 지리상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이면서 소백산맥의 준령이었다. 따라서 난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험준한 산중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필제는 문경읍을 습격하였다가 이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관군의 역습에 말려 체포당한 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부에서는 이필제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주는 셈이다.
이필제의 반란은 1)교조신원운동, 2)반봉건 투쟁, 3)중국 정벌 등을 목표로 해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 하겠다. 또한 임술민란에서 나타난 농민들의 경제적 투쟁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 일어날 갑오농민전쟁의 맹아가 이 안에 담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필제가 북벌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필제의 게릴라식 항쟁이 모두 실패로 끝난 후 정부는 동학을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뒤에서 보듯이 최시형이 무력에 의한 항쟁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도 이필제의 반란 실패 후 받은 탄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교세가 확장되기도 전에 그 뿌리까지 뽑힌다면 동학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신도들의 교조신원운동은 집단 행동 방식을 동원하여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삼례집회에서 본격화되었다.
삼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1
1892년 11월 3일, 수천 명의 신도들이 참가한 삼례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의 결의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과 전라도 관찰사 이경식 앞으로 소장이 보내졌다. 조병식과 이경식은 평소 동학교도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신도들을 잡아 가두었고 때로는 뇌물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다. 당시 동학교도들에 대한 재물 약탈이 상당히 심했는데 두 사람은 일반 농민들조차 동학교도로 몰아 착취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동학이 계속 확장되자, 두 사람은 '동학의 금령'을 내려 더 심한 탄압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리들의 탄압에 맞서 동학의 중간 직책을 맡고 있는 서병학, 서인주 등은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펼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고, 그는 처음엔 만류하다가 이를 받아들여 삼례집회를 열도록 한 것이다. 이경식 등에게 보내진 소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교조신원을 통하여 포교 활동을 공인해 달라는 것이다. 동학이 계속 이단으로 몰린다면 동학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종교의 자유를 달라는 요구이다. 이와 관련된 주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맹의 도를 하는 자가 양묵(양자와 묵자)을 가리켜서 이단이라 하고, 양묵의 도를 따르는 자가 공맹을 보고 이단이라 한다. 그러므로 공맹만이 정이고 양묵이 사는 아니다. 대개 이단이라는 것은 그의 도와 나의 숭상하는 도가 같지 않다는 바의 명사일 뿐이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볼 때 반드시 명칭의 다르고 같음을 가지고, 그 마음의 사정을 분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학은 유학과 동일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동학의 정통성 강조는 당시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던 유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따라서 동학은 유교를 대신할 수 있는 사상이며 종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부당한 가렴주구를 즉시 중단하라는 것이다. 동학교도들은 상대적으로 더 심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지방 관리들은 정부에서 동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리자 이에 편승하여 동학교도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탈취해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소장에 실었던 것이다.
우리 도(동학)를 서학여파(천주교와 다를 바 없는 이단이라고 규정한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미 천주교와 기독교는 1880년대 초에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의해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공인받았다.)로 지목하고, 샅샅이 조사하여 잡아 가두고, 재산을 쳐서 빼앗고, 사상자가 연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지방의 호민 또한 따라 듣고 침학하여 집을 헐고 가산을 빼앗지 않는 곳이 없다. 도인(동학교도)이라고 이름붙은 자 모두가 유랑하여 안정된 가정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일면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막아 기본 생존권을 쟁취하려는 항의에 그치는 것 같지만, 가렴주구를 일삼지 말라는 청원에는 당시 보편화되어 있던 관리들과 지주층의 착취를 중지하라는 반봉건적 의식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두번째 항의 내용은 점차 하층 교도들의 주요 투쟁 목표가 되어 갑오농민전쟁의 반봉건적 성격에 유입되었다. 이러한 내용의 소장을 받은 이경식 등은 11월 6일, 동학의 금령은 지방장관의 권한 밖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죄를 짓지 말고 해산하라고 회유문을 보냈다. 그러나 삼례에 모인 교도들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경식의 회유문에 더욱 격분하여 "지금 각 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탄압이 물보다 깊고, 불보다 맹렬해서 수령에서 서리, 군교와 향간, 토호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가산을 탈취하고 자기 집의 소유처럼 생각하며, 살상.구타.능학하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렴주구를 즉시 중지하라고 이경식에게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이경식은 당황한 나머지 일단 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편법으로 부당한 착취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각 읍에 내리는 한편, 교조신원에 대해서는 상부와 의논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일반 신도들은 가렴주구 반대라는 반봉건적 투쟁을 내세운 반면 상층 지도부는 교조신원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동학 내부에는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계층과 정치적, 사회적 투쟁을 벌이려는 두 가지 흐름이 이미 이때부터 대립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빈농과 빈민, 천민으로 구성된 일반 신도들의 반봉건적 성격은 삼례집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상소운동과 반외세 벽보운동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2
삼례집회가 끝난 후 약속과는 달리 동학교도들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삼례집회를 주동한 인물로 서병학 등을 지목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그러자 서병학과 서인주 등은 다시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펼치자고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고민 끝에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직접 상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서병학 등은 무력 봉기를 통하여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 투쟁을 병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들은 "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혀 군대와 협동하여 정부의 간당을 소탕하고, 조정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최시형 등 동학 지도부 내의 보수파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병학 등 급진파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삼례집회를 통해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급진파와 일반 신도들을 따돌린 최시형, 손병희 등 보수파 40여 명은 1893년 2월, 각기 과거보는 선비 차림을 하고는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3일 동안이나 엎드려 '포교 공인'을 골자로 한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정부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워 상소를 거절한다고 통고하였다. 그리고 "정학을 높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법이며, 따라서 이단을 내세워 수작을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고 국법에 따라 처형할 것"이라는 국왕의 전교를 내렸다. 당시 정부는 유림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상소를 사학 집단인 동학교도들이 올렸으니 변괴라고 여기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러한 전교가 내려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서 상소의 내용이 단순히 종교의 자유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보자. 최시형 등 보수파는 이필제의 반란 후 겪은 탄압을 교훈 삼아 무력을 동원한 동학운동을 반대해왔다. 결국 보수파는 정치적 투쟁 구호를 생략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입장은 일부 급진파 접주들과 일반 신도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광화문 앞에서 상소가 벌어질 즈음에 수만 명의 신도들이 속속 서울로 상경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급진적 동학교도들의 반외세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 외국 공영사관과 외국인 거주 지역, 그리고 교회와 학당 등에 격문을 붙여 하루 속히 조선을 떠나라고 협박하였다. 제일 먼저 프랑스 공사관에 붙은 격문 내용을 보도록 하자.
너희들은 우리나라에서 금하는 법을 어겨 가면서 교당을 짓고 선교하고 있다. 만약 행장을 꾸려 속히 돌아가지 않으면 3월 7일 우리 당이 너희 공사관으로 들어가 박살낼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척양운동을 펼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인 거주 지역에 붙은 격문에도 이와 똑같은 성격이 표출되어 있다.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기 때문에 선은 도와주고 악은 징벌한다. 너희는 비록 오랑캐이지만 천품 받음이 대략 같음을 아는가, 모르는가?......망령되이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 웅거하여 공격을 장기로 삼고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무슨 마음이며 끝내는 무엇을 하려는가?......해를 당하고 안 당하는 것은 너희들이 결정할 일이니 후회하지 말라. 우리는 두말하지 않겠으니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활동에 당시 정부와 외국 공영사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들을 잡으려 물샐틈없이 수색 작업을 하였지만 극히 일부만 잡혔을 뿐이었다. 이들은 신출귀몰하여 심지어는 외국 선교사의 집에까지 격문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도꾜 아사히 신문은 동학교도들의 활동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정리해 놓았다.
동학당의 과격파는 드디어 외국인 척양운동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고, 그 일착으로서 조선 고래의 관행이었던 격문을 동대문, 남대문 및 서울 시내의 선교사 집에 붙이고, 하루가 지난 다음 다시 외국 종교를 공격하고, 또 외국 교도로서 음력 3월 7일까지 조선을 물러나지 않으면, 비상 수단을 써서 죄상을 들어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배포했다.
다른 날 실린 기사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음력 3월 7일은, 동학당이 만일 그 날까지 외국인이 퇴거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결심한 바 있다고 성명한 날이다. 외국인 등은 물론 공갈이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날의 형세를 염려하고 있다.
동학교도들의 격문을 읽은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동학교도들의 정체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만큼 이들의 투쟁 활동은 상당히 조직적인 것이었다. 당시 민비의 미움을 사서 지금의 당진군에 유배되어 있었던 온건개화파인 김윤식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외국인들은 변을 당할까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거나 심지어는 여차하면 조선을 떠나려고 인천으로 몰려갈 정도였다. 서울의 주민들 중에도 짐을 꾸려 시골로 피신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동학 내부의 보수와 급진의 대결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신문에 이러한 분열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대목이 있어 이목을 끈다.
동학당 중의 과격파는 상소의 효과가 없게 된 이래 은밀히 서울에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토벌 계획을 세웠다. 한편 온건파는 계속 이를 만류하면서 다시 한번 국왕에게 상소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당내의 논의가 쉽게 결정되지 못하고 그 기세가 약간 위축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울 시내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동학교도들의 반외세 투쟁을 주도한 인물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것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벽보운동을 하다가 잡힌 일부 신도들의 문초 내용을 볼 때 흔히 북접이라고 부르는 충청도 중심의 동학교도들이 아니라 남접인 전라도의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 갑오농민전쟁이 주로 남접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급진파의 벽보 투쟁은 외세에게 큰 위협을 주어 외국 군함이 인천에 입항하여 조선 정부에 대해 무력적 압력을 가하였고, 원세개는 종주국의 입장에서 사태를 우려하여 조선 정부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이렇게 조선 내외에 큰 자극을 준 급진파의 투쟁은 일단 멈추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일어날 농민전쟁을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번은 무사히 끝났지만, 멀지 않은 앞날에 동학당은 반드시 천지를 뒤흔드는 큰 변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고 조선 정부는 떨고 있다.
보은집회 : 갑오농민전쟁의 전단계3
보은집회는 서울에서 벌인 벽보투쟁 운동의 연속선상에서 열렸다. 1893년 3월 10일 충청도 보은에는 각지에서 모인 동학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척왜양창의'(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의로운 투쟁에 나서자)라는 다섯 글자가 적힌 깃발을 앞세우고 외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때 선무사로 파견되었던 온건개화파 어윤중은 "집회 이후 물이 골짜기에 흐르듯이, 불이 벌판을 달리듯이 하루에 수천 명씩 밀려드니 막을 도리가 없다"고 증언하였듯이, 보은집회는 이제 단순한 집회 형식을 떠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 시위로 번질 기미를 보였다. '포교 공인'이라는 종교적 구호는 어느새 사라지고 '외세 척결'이라는 정치적 투쟁 구호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일반 동학교도들은 더이상 종교적 이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인 현실 변혁을 통하여 존폐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윤중이 보고한 장계에는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성향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다.
재능은 있어도 뜻을 이루지 못한 자, 욕심을 내고 더러운 짓을 하는 자들이 횡행하는 데 격분하여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고 각오한 자, 외국 침력자들이 우리의 재부를 빼앗아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겨 망녕되게 큰 소리를 외치는 자, 서울과 지방에서 죄를 짓고 피신하고 있던 자, 감영과 고을의 아전들로서 쫓겨난 자, 농사를 지어도 죽 한 그릇 먹을 수 없고 장사를 하여도 한 푼의 이익도 얻을 수 없던 자, 고리대업자의 빚 독촉에 견딜 수 없던 자, 상민이나 천민으로서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원하던 자들이 여기에 가담하였으며 온 나라의 불평 불만이 규합되어 하나의 큰 집단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두에서 밝힌 내외의 중첩된 모순에 의해 기본적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민중들이 모여들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집회가 비록 동학이 주도한 모임이지만 이중에는 근래에 입교한 자들이나 동학을 통하여 맺힌 원을 풀려는 자들도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즉 국가와 관리들, 그리고 지주와 상인들의 착취에 시달림을 받던 소외 계층들이 동학의 변혁 사상에 호응하여 집회에 참석하였다는 것이다. 동학의 신도수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도 이러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제 동학의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학을 매개로 민중의 변혁 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점 역시 이 보은집회가 갖는 의미중 하나이다.
보은집회에 당황한 정부는 급히 군대를 출동시켜 집회를 해산시키라고 명하였다. 선무사로 내려온 어윤중이 호유문을 반포하고 교도들의 뜻을 국왕에게 전하겠다고 하자 일부 보수파 지도층은 이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또한 최시형 등은 4월 2일 밤을 이용하여 잠적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군대까지 동원한 정부의 강제 해산에 보은집회는 별다른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여기서도 보수적인 상층 지도부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보은집회는 민중들 사이에 퍼져 있는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고취시켜 갑오농민전쟁 당시 인력 동원을 수월케하는 전초적 구실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그런데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전라도 원평에서는 또다른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원평과 금구는 남접의 중심지였다.) 이른바 원평집회를 뜻하는 말인데, 이 집회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전봉준이다. 최제우가 죽은 후 동학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이고, 다른 하나는 서장옥이 주도한 남접이 그것이다. 따라서 보은집회가 표면상 북접 대표인 최시형이 주최하였다면, 원평집회는 서장옥 계열인 전봉준 등이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봉준은 주로 배후에서 조종하는 차원의 활동만 하고 있을 때였다. 교주의 자리는 최시형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최시형의 온건적 사상에 반대하는 남접의 활동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평집회는 우선 보은집회 상황을 살펴가며 진행되었는데, 군대가 출동하여 보은집회가 막을 내리자 원평집회 참석자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이 집회는 집회에 대한 정부의 반응을 살펴보고 나아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성분을 분석하여 훗날 민중 봉기의 가능성을 점쳐보려는 의도에서 뿐만 아니라 북접의 온건성에 대립하여 남접을 별도의 세력으로 성장시키려는 뜻에서 개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삼례집회-상소운동과 벽보투쟁운동-보은.원평집회 등 3단계를 걸치면서 일반 신도들은 종교적 테두리를 벗어나 반봉건, 반침략 투쟁의식을 결집시켰고 이러한 전단계를 밟은 후 치밀한 계획 아래 본격적인 무장 봉기에 나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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