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1903~1977)
시인, 국어 국문 학자. 호는 무애. 경기도 개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문학 박사. 일찍이 향가의 해독에 큰 공격을 세운 바 있으며, '국보'라는 별명과 함께 변설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지적이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수필이 많으며 문장은 건축감이 있어 선명한 인상을 준다.
질화로
촌가의 질화로는 가정의 한 필수품, 한 장식품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 그들의 사랑의 용로이었다. 되는대로 만들어진, 흙으로 구운 질화로는, 그 생김생김부터가 그들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건마는, 지그시 누르는 넓적한 불돌 아래, 사뭇 온종일 혹은 밤새도록 저 혼자 불을 지니고 보호하는 미덥고 덕성스러운 것이었다. 갑자기 확확 달았다가 이내 식고 마는 요새의 문화 화로와는 무릇 그 본성이 다른 것이다.
이 질화로를 두른 정경은 안방과 사랑이 매우 달랐다. 안방의 질화로는 비록 방 한구석에 있으나, 그 위에 놓인 찌개 그릇은 혹은 '에미네'가 '남정'을 기다리는 사랑, 혹은 '오마니'가 '서당아이'를 고대하는 정성과 함께 언제나 따뜻했다. 토장에 무를 썰어서 버무린 찌개나마 거기에는 정이 있고, 말없는 이야기가 있고, 글로 표현하지 못할, 그윽하고 아름답고 정다운 세계가 있었다. 누가 식전의 방장을 말하는가. 누가 수륙의 향연을 이르는가. 진실로 행복된 점에 있어서야, 진실로 참된 정에 있어서야, 우리 옛 마을 집집마다 그 안방에 놓였던 질화로의 찌개만하랴.
마음에서 소년은 '서당아이'라 불리었다. 혹은 사략 초권을 끼고, 혹은 맹자를 들고 서당엘 다니기 때문이다. 아잇적, 서당에 다닐 때 붙은 서당아이란 이름은, 장가를 들고 아들을 본 뒤까지도 그냥 남아서, 30이 넘어도 그 부모는 서당아이라고 불렀다. 우리집 이웃의 늙은 부부는 늦게야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자기네가 목불식정인 것이 철천의 한이 되어서, 아들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글을 시켜 보겠다고, 어려운 살림에도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노상 '우리 서당애' '우리 서당애' 하며 아들 이야기를 했었다. 그의 집 단칸방에 있는 다 깨어진 질화로 위에, 점심 먹으러 돌아오는 애의 서당아이를 기다리는 따뜻한 토장 찌개가 놓였음은 물론이다. 그 아들이 천자문을 읽는데, '질그릇 도, 당국 당'이라 배운 것을 어찌 된 셈인지 '꼬끼요도, 당국 당'이라는 기상천외의 오독을 하였다. 이것을 들은 늙은 '오마니'가, 알지는 못하나마 하도 괴이하여 의의를 삽한즉, 영감이 분연히, "여보 할멈,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 마소. 글에 별소리가 다 있는데, '꼬끼요 도'는 없을라고."하였다. 이렇게 단연히 서당아이를 변호한 것도 바로 질화로의 찌개 그릇을 둘러앉아서였다. 얼마나 인정미 넘치는 태고연한 풍경이냐.
사랑에 놓인 또 하나의 질화로는 이와는 좀 다른 풍경을 보이었다. 머슴, 소배들이 모인 곳이면, 신삼기, 둥우리 만들기에 질화로를 에워싸 한창 분주하지마는, 팔씨름이라도 벌어지는 때에는 쌍방이 엎디어 서로 버티는 서슬에 화로를 발로 차 온 방 안에 재를 쏟아 놓기가 일쑤요, 노인들이 모인 곳이면, 고담책보기, 시절 이야기, 동네 젊은 애들 버릇 없어져 간다는 이야기들이 이 질화로를 둘러서 일어나는 일이거니와, 노인들의, 입김이 적어서 꺼지기 쉬운 장죽은 연해 화로의 불돌 밑을 번갈아 찾아갔었다. 그리하여, 기나긴 겨울밤은 어느덧 밝을녘이 되는 것이다. 돌이켜 우리집은 어떠했던가? 나도 5, 6세 때에는 서당아이였고, 따라서 질화로 위에는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찌개 그릇이 있었고, 사랑에서는 밤마다 아버지의 담뱃대 터시는 소리와 고서 읽으시는 소리가 화로를 둘러 끊임없이 들렸었다. 그러나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그 소리는 사랑에서 그쳤고, 따라서 바깥 화로는 필요가 없어졌고, 하나 남은 안방의 화로 곁에서 어머니는 나에게 대학을 구수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마저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그 질화로 옆을 길이 떠나가시었다. 그리하여 서당아이는 완전한 고아가 되어, 신식 글을 배우러 옛 마을을 떠나 동서로 표박하게 되었고, 화로는 또다시 찾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질화로의 찌개 그릇과 또 하나 질화로에 깊이 묻히던 장죽, 노변의 추억은 20년 전이 바로 어제와 같다.
몇 어찌
내가 중학교의 전 과정을 단1년 간에 수료하는 J중학 속성과에 입학한 것은 3.1운동 이듬해였다. 그 때까진 고향에서 한문학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문학이라면 노상 무불통지를 자처하는 나였으나, '처녀작','삼인칭' 같은 신식 말 때문에 크게 고심하던 중이어서, 나는 참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신학문을 배우러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개학 전날, 교과서를 사 가지고 하숙에 돌아와 큰 호기심을 가지고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처녀작', '삼인칭'에 못지않은 참 기괴한 또 한 단어를 발견했는데, 그게 곧 '기하'라는 것이었다. '기하'의 '기'는 '몇'이란 뜻이요, '하'는 '어찌'란 뜻의 글자임이야 어찌 모르랴만, 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기하'란 말의 뜻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하'라? '몇 어찌'라는? 첫 기하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를 정돈하고 앉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들의 예를 받으시고, 막 강의를 시작하려 하실 때였다. 맨 앞줄에 앉았던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대체 '기하'가 무슨 뜻입니까? '몇 어찌'라뇨?"하고 질문을 했다. 선생님께서는 이 기상천외의 질문을 받으시고, 처음에는 선생님을 놀리려는 공연한 시문으로 아셨던지 어디서 왔느냐, 정말 그 뜻을 모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곧, 나에게 아무 악의도 없음을 알아채시고, 그 말의 유래와 뜻을 가르쳐 주셨다. 가로되, 영어의 '지오메트리(측지술)'를, 중국 명나라 말기의 서광계가 중국어로 옮길 때, 이 말에서 '지오(땅)'를 따서 '지허'라 음역한 것인데, 이를 우리는 우리 한자음을 따라 '기하'라 하게 된 것이라고.
"알겠느냐?" "예." "너, 한문은 얼마나 배웠느냐?" "사서삼경, 제자백가 무불통지입니다." "그런데, '기하'의 뜻을 모른다?" "한문엔 그런 말이 없습니다." "허허, 그런데, 너 내일부터는 세수 좀 하고 오너라." "예."
사실 나는 '기하'란 말의 뜻과 그 미지의 내용을 생각하는데 너무 골똘했던 나머지, 세수하는 것도 잊고 등교했던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일사천리로 강의가 계속되어, '점, 선, 면'의 정의를 배우고 '각, 예각, 둔각, 대정각'을 배우고, '공리, 정리, 계'란 용어를 배웠다. 하숙에 돌아온 나는 또, '정리란 증명을 요하는 진리다.'와 같은, 참으로 기괴한 문장을 뇌까리면서, 다음 기하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음날의 기하 시간이었다. 공부할 문제는 '정리 1. 대정각은 서로 같다.'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손을 번쩍 들고, "두 곧은 막대기를 가위 모양으로 교차, 고정시켜 놓고 벌렸다 닫았다 하면, 아래위의 각이 서로 같을 것은 정한 이치인데, 무슨 다른 '증명'이 필요하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허허 웃으시고는, 그건 비유지 증명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럼, 비유를 하지 않고 대정각이 같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 음, 봐라."
선생님께선 칠판에다 두 선분을 교차되게 긋고, 한 선분의 두 끝을 A와 B, 또 한 선분의 두 끝을 C와 D, 교차점을 O,그리고 ...AOC를 a, ...COB를 b, ...BOD를 c라 표시한 다음, 나에게 질문을 해 가면서 칠판에다 식을 써 나가셨다.
"a+b는 몇 도?" "180도입니다." "b+c도 180도이지?" "예." "그럼, a+b=b+c이지?" "예." "그러니까, a=c 아니냐." "예. 그런데, 어찌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잘 봐라, 어떻게 됐나." "아하!"
멋모르고 "예, 예." 하다 보니 어느덧 대정각(a 와 c)이 같아져 있지 않은가! 그 놀라움, 그 신기함, 그 감격, 나는 그 과학적, 실증적 학풍 앞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내 조국의 모습이 눈앞에 퍼뜩 스쳐감을 놓칠 수 없었다. 현대 문명에 지각하여, 영문도 모르고 무슨 무슨 조약에다 "예, 예." 하고 도장만 찍다가, 드디어 "자 봐라, 어떻게 됐나,"의 망국의 슬픔을 당한 내 조국! 오냐, 신학문을 배우리라. 나라를 찾으리라. 나는 그 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나는 지금도 첫 강의 시간에는 대개, 위에 적은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 주고, 중학교에 들어가서 기하를 처음 배울 때, 그 말의 뜻을 묻는 학생이 과연 몇이나 되느냐 하고 농담삼아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의심'과 새 세계에 대한 '경이감'을 잃지 않았기에, 알량하나마 학적 저서 약간 권을 이룩했노라고 말한다.
면학의 서
독서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 전비들의 무수한 언급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의 인생 삼락에 모름지기 '독서, 면학'의 제 4일락을 추가할 것이다. 진부한 인문이나 만인 주지의 평범한 일화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으로 나의 실감 하나를 피력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운운이 대성현의 글의 모두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은 그 밑의 정자인가의 약간 현학적인 주석에 의하여 다소 그 도를 완화하였으나 논의의 허두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의 진리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의 주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 소박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와 같은 명리와 허화의 와중을 될 수 있는 한 초탈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에 고요히 침잠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 백년,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 수복의 구차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안두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의 청등이 희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 어느 문생이 내 저서에 제자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으로 서증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이다. 세상에는 실제적 목적을 가진, 실리 실득을 위한 독서를 주장 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함이다. 선천적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한 이야기야말로 다생의 숙인으로 다복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않은 행복한 족속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에게나 이상가에게나, 다 공통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과 지식의 영역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 경건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에서 발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하였다.
그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의 감시자가 시계 안에 한 새 유성의 헤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모든 그의 부하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 있는 고전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를 호흡한 신서를 더 읽으라, 각인에게는 각양의 견해와 각자의 권설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 후자는 말한다. "생동하는 세대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인 교양에 일보라도 낙오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로 규정할 것은 못 된다. 누구는 '고칠 현삼제'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의 좋다고나 할까?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이 그 통폐요, '안광이 지배를 철함'이 후자의 지론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 '다'와 '정'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하나마 '박이정' 석 자를 표어로 삼아야 하겠다. '박'과 '정은 차라리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의 기념을 궁극적으로 초극하여야 할 것이다. 소인의 다음 시구는 면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이다.
벌판 다 한 곳이 청산인데,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 역설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한 심충의 바다에 도달하기 전에, 우선 기구, 간난, 칠전팔도의 괴로움의 협곡을 수없이 경과함을 요함이 무론이다. 깊디 깊은 진리의 탐구나 구도적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한 학습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된다. 비근한 일례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인 애로는 적으니, 학생 제군은 나의 소년 시절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려다가 철야, 종일 베껴서 읽었고, 한문은 워낙 무사 독학, 수학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 50년 전 일이다. 영어를 독학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이란 고언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만 자꾸 염독하였으나, 종시 '의자현'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에 들어가 보통 학교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 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에게 그 말뜻을 설명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 너는 이인칭,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이다 삼인칭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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