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545 호
단기 4341. 12. 8 (음력 11. 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 」 로 표시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 누리집에 오시면 어떤 한자인지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
글터 → 오늘의 어록 |
|
|
좋은 밤을 찾다가 좋은 낮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네델란드 격언)
|
|
|
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
|
퍼주기
언어예절
“함지에 보리밥을 퍼 담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채독에서 쌀을 한 보시기 퍼 동냥을 준다”처럼 활용하여 ‘퍼-’로 쓰는 말에 ‘푸다’가 있다. 이에 ‘주다’를 합치고 뒷가지 ‘기’를 붙여 ‘퍼주기’를 만들어 쓴다.
몇 해 이 말의 폭발력은 대단했다. 2000년대 초부터 반북정서를 대변해, 햇볕·포용, 평화·번영 등 정부의 대북정책을 뭉뚱그려 비판하는 용어로 쓰였다. 말 자체가 주는 단순성과 적확성으로 정부의 대북정책을 꼬집고 무력화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 말을 부려쓰는 쪽에서는 애초 헤아림 같은 것은 버렸다.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 원조를 구별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싸잡은 것이다. 남북 관계를 깊이 생각하고 배려하는 이의 ‘말씀’은 아니란 말이다.
이후 ‘퍼주기’의 쓰임은 선거, 외교·통상, 단체교섭 등으로 그 영역이 넓어진다. 선심 공약, 선심 정책, 조공 외교, 선물 외교 …에서 ‘퍼주기’가 그 앞말을 대신했다. 이는 고정된 말뜻으로 굳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말로서 여러 언어 환경에서 적응한다는 뜻이겠다.
나눔·베풂·선심·보시보다 떳떳하고 좋은 게 뭐가 있겠는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본디 대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상호주의’나 ‘주고받기’가 상대되는 말이 되겠지만, 최근 들어서는 ‘퍼주기’도 ‘주고받기’도 듣기가 어려워졌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안 / 않
'안'/'않'의 구분과 '안'의 띄어쓰기가 어렵다는 사람이 많다. 우선 '안'은 '아니'의 준말이고, '않'은 '아니하'의 준말이다. '아니[안] 벌고 아니[안] 쓴다'에서 보듯 부사 '아니'가 줄어 '안'이 된 것이며, 띄어쓰기를 해 '안 벌다' '안 쓴다'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
그러나 '하다'와 결합하는 경우 부정인 '아니[안] 하다'(두 단어)와 별개로 '아니하다'가 있다. 한 단어인 '아니하다'는 줄면 '안하다'가 아니라 '않다'가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니하'가 줄어 '않'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니 하다'가 준 '안 하다'와 '아니하다'가 준 '않다'는 있지만 한 단어로 '안하다'는 없다.
'않다'는 주로 보조용언(단독으로는 쓰이지 못함)으로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별로 기쁘지 않다'와 같이 '~지 않다' 형태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는 말을 않고 떠났다'에서는 '않다'가 타동사로 쓰인 것이다.
'안 하다''~지 않다''않다'의 쓰임새를 보면 '우리 애는 공부를 안 한다'와 '우리 애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 '우리 애는 공부를 않는다'의 세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 일상 대화에서는 '~지 않다'보다 간략한 '안 한다'를 많이 쓴다. 즉 '나 술 좋아하지 않아'보다 '나 술 안 좋아해'를 흔히 쓴다.
'안'은 대부분 띄어 쓰지만, '장사가 너무 안된다' '자식이 안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에서처럼 일·사람이 좋게 되지 못하는 경우('잘되다'의 반대) '안되다'가 한 단어로 '안'을 붙여 쓴다.
사사, 사숙
'절학무우(絶學無憂,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노자(老子)가 한 말이다. 하지만 '배움을 끊을 수 없다'는 게 더 문제다. 평생을 독서로 일관한 이덕무(李德懋)도 '배우는 일보다 더 당연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안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겸손해야 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배움과 관계된 말에 '사사'와 '사숙'이 있다. 이 두 낱말은 상당히 자주 잘못 쓰이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난곡 김응섭·여초 김응현·송은 심우식 같은 대가(大家)들에게서 23년을 사사한 첫 결실이다.' '사사(師事)'는 '(누구를)스승으로 섬김. 또는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음'을 뜻한다. '사사하다'는 타동사이므로 목적격 조사를 써서 '○○를[을] 사사하다'로 해야 올바른 용법이다. 따라서 위의 문장에서 '대가들에게서 23년을 사사한' 부분은 '대가들을 23년(동안) 사사한'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아무개에게서 사사 받았다'처럼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숙(私淑)'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도(道)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우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퇴계 선생을 사숙하다' '연암 선생은 제가 사숙하는 분이다' 등이 바른 용례다. 스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서 '사사'와 '사숙'이 구분된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잘못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부인
'무술 유단자 특채로 경찰에 투신한 그는 7년간 영부인 경호를 맡았다.'
이처럼 '퍼스트 레이디'의 뜻으로만 '영부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영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말일 뿐 자체적으로 대통령의 아내라는 의미는 아니다. 혼인한 여자는 누구든지 '영부인'으로 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나면 '자네 영부인께서는 안녕하신가?'라고 안부를 물을 수 있고, 모임에서 '이분은 김선생님의 영부인입니다' '홍부장님 영부인께서 오셨습니다'라고 소개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글 첫머리의 두 예문이 제대로 뜻이 통하게 하려면 '영부인'을 '대통령 영부인' 또는 '대통령 부인'으로 고쳐야 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 영부인 라이사 여사가 참관한 제11차 모스크바 세계 언론인 대회 ' 등은 '영부인'이 제대로 사용된 예다.
'영부인'의 영(令)자는 경칭을 나타내는 글자로 '남을 높여 그의 친족을 이를 때' 사용한다. 이 글자가 들어가는 낱말로는 영부인 외에 남의 딸을 높여 일컫는 영애(令愛), 아들을 높여 일컫는 영식(令息) 또는 영윤(令胤)이 있다.
|
|
|
시터 → 우리나라 |
|
|
산다는 것 - 최재환
산다는 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떠내 보낸 뒤 그리움에 지친 심신을 추스르는 일이다.
그건 결국 서로의 만남인데 일기장에 비친 제 모습이거나 아픈 기억들을 접고 이웃과 함께 풀어 가는 소인 없는 편지 같은 것이다.
눈 감고 보는 하늘 끝, 가난을 움켜쥐고 돌아가는 바람 뒤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내닫는 세월 같은 거
기러기 떼 사라진 하늘 뒤켠에 행복은 머물고 서로가 있어 행복하다면 바램은 연꽃 사이로 피어오르겠지만
산다는 건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드는 신이 준 운명을 마름질하는 것이다.
|
|
|
시터 → 현대시조 |
|
|
西域長天 - 이영주
서역길의 낙타울음 삭풍으로 다가온다. 귓전을 속살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응고된 不立의 年代 가는 길이 무겁다.
누대의 서린꿈들 시나브로 일어서고 산란한 그리움도 사구위에 부서지는 밤 서럽던 미아라의 눈 長天을 열고 있다.
|
|
시터 → 고시조 / 한시 |
|
|
빈천을 팔랴 하고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지은이> 조찬한(趙纘韓) 1572~1631.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인조반정 때에 형조참의가 되고, 이어 선산부사를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부에 능하였으며, 석주(石洲) 권 필 · 동악 (東岳) 이안눌(李安訥)과 절친하였다. 그의 형 조위한도 지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힘이 있었다. 일설에는 유자신(柳自新)이 지었다고도 한다.
<말 뜻> 빈천(貧賤) :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것. 권문(權門) : 권세가 있는 집안. 치름없는 흥정 : 대가를 치르지 않는, 주는 것이 없는 흥정. 흥정은 물건을 사고 파는 교섭. 강산 풍월(江山風月) : 강 · 산 · 바람 · 달이니, 자연의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
<감 상>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하도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보려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집안을 찾아갔더니, 주는 것 없는 흥정, 불리한 흥정을 그 누가 먼저 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강산풍월과 바꾸자고 하는데, 그것만은 안되겠다. 빈천을 못 팔망정 강산풍월을 넘겨 줄 수는 없다. 강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수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풍월주인'이라고 불렀다.
빈천과 부귀영화 · 권문세가에서 빈천을 사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강산풍월만은 그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빈천을 안고 살아도 강산풍월이면 된다는 사람, 요즘에는 별로 없겠지만 지난날의 우리 선인들은 그것을 낙으로 삼았다.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복 받은 풍토가 그렇게 시킨 모양이다.
|
|
|
글터 → 동서양고전 / 신화 |
|
|
장자 : 나면 죽고, 죽으면 태어난다 - 송지영 역
내편
<내편>은 '소요유',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의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편>은 장주 사상의 진수로 전해오는데, '양생주'의 경우 각 절이 독립되어 있어 연관성이 희박하며, '인간세'와 '응제왕'은 내용에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다시 말해 장주 사상의 정수는 '소요유', '제물론', '덕충부', '대종사'의 4장에 국한된다. 그러나 이것은 장주 사상의 통일성을 찾기 위해 추구된 결과일 뿐, 결코 <장자> 전권의 가치를 부인할 만큼 중대한 결점은 아니다. 각 장의 제목은 그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큰 것과 작은 것 - 소요유
북명*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 리인지 모른다. 변해서 새가 되면 붕*이라고 하는데, 붕의 등은 몇천 리인지 알지 못한다. 세차게 날면 그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곧 남명으로 옮겨간다. 남명은 천지다. <제해>*는 이상한 것을 기록한 책으로, 그 책에는 '붕이 남명으로 갈 때는 물 3천 리를 치고 바람을 타고 오르기를 9만 리나 하여, 여섯 달을 난 뒤에 쉰다.'고 씌어 있다.
땅에는 아지랑이와 티끌과 생물들의 숨결이 뒤섞여 있다. 짙푸른 하늘빛은 틀림없이 하늘의 빛일까? 멀어서 끝이 없어서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굽어보아도 또한 그러할 뿐이다. 또 무릇 물이 얕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물 한 잔을 마룻바닥 오목한 곳에 쏟으면 겨자씨는 띄울 수 있으나, 잔을 놓으면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약하면 큰 날개를 띄울 수 없다. 9만 리는 되어야 바람을 아래에 둘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바람을 타고 등에는 푸른 하늘을 지게 되어 가로막을 것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남명을 향해 날게 되는 것이다. 매미와 발의새가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결심하고 날아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에 가 닿고, 때로는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한다. 어째서 9만 리나 남쪽으로 날아갈까?"
교외에 가는 사람은 세 끼 밥만 먹고 돌아와도 아직 배가 부르다. 백 리를 가는 사람은 저녁에 양식을 찧는다. 천 리를 가는 사람은 석달 양식을 모아둔다. 그러니 벌레 두 마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소지는 대지에 미치지 못하고,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것이 그런 줄을 알겠는가? 조균은 그믐과 초하루를 모르고, 매미는 봄 가을을 모른다. 소년이기 때문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5백 해로 봄을 삼고, 5백 해로 가을을 삼았다. 또 상고에 대춘이 있었는데, 8천 년으로 봄을 삼고, 8천 년으로 가을을 삼았다. 그런데도 팽조*가 특히 오래 산 것으로 알려져 뭇사람들이 짝을 이루려 하니 슬픈 일이 아닌가!
탕왕*이 극*에게 물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궁발 북쪽에 어두운 바다가 있는데, 그것이 천지다. 거기에 있는 고기는 그 너비가 몇천 리에 달하며, 길이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 이름은 곤이라고 한다. 새가 있어 이름을 붕이라고 하는데,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바람을 치고 9만리를 올라 구름의 기운을 끊고 푸른 하늘을 업은 다음, 남쪽을 향하여 남명으로 가려 한다. 참새가 비웃으며 말한다.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나는 날아 올라가도 몇 길을 채 못 가서 내려와 쑥대 사이를 날아다닌다. 이것 역시 날 만큼 난 것인데, 그는 또 어디를 가려는 것일까?"
이것이 대소의 구분이다. 그러므로 무릇 지식이 한 벼슬을 감당하고 행실이 한 고을에 뛰어나며, 덕이 군주에 합당하여 일국을 대표하는 사람도 자기를 보는 것은 이와 같다. 그러나 송나라의 영자*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세상이 칭찬을 한다 해서 더 부지런할 것도 없고, 그르다 해서 더 막히지도 않으며, 안팎의 구분이 있고 영욕의 경계를 알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상사에 동요되지 않았으나 아직 부동의 경지는 아니었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며 시원하게 떠돌다가 보름 뒤에 돌아왔다. 그는 복음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았다. 비록 걸어 다니는 것은 면했다고 하지만, 그대로 의지하는 것이 있었다. 만일 천지의 바른 것을 타고, 육기*의 분별을 다스리면서 무궁에 노는 사람이라면 또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그래서 '지인은 내가 없고, 신인은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이다.
*****************************************************************************
북명의 곤이라는 고기는 머리에서 꼬리까지 몇천 리인지 모를 만큼 컸다. 곤은 변신하여 붕이라는 새가 되는데, 이때 몇천 리인지 알 수조차 없는 그 몸뚱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면 하늘은 검은 구름에 덮인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친 계절이 되면 붕새는 남명, 곧 천지를 향해 날았다. 온갖 이상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제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남명으로 떠날 때의 붕새는 바다 위 3천 리를 날개로 치고 날아오른 다음, 바람을 타고 9만 리 높이에까지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남명까지 여섯 달 동안을 쉬지 않고 날아간다."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끼고, 먼지와 생물들의 숨결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하늘은 그저 새파랗게만 보인다. 그것은 하늘빛이 원래 푸르러서가 아니라 다만 끝없이 먼 거리가 하늘을 파란 빛으로 보이게 할뿐이다. 마찬가지로 9만리 상공을 나는 붕새의 눈에는 이 땅위가 다만 파란 빛으로 보일 것이다. 또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마루 틈새에 고인 한 잔 물에도 겨자씨 따위는 떠 있지만, 거기에 잔을 띄우면 그만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날개를 펴려면 큰 바람이 필요하다. 9만 리 높이까지 날아오르면 붕새의 날개는 강한 바람의 힘에 의지하게 된다. 바람을 탄 채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나는 붕새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없다. 그리하여 붕새는 줄곧 남명을 향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매미와 발의새(작은 비둘기)는 그런 붕새를 비웃게 마련이다.
"느릅나무 박달나무 가지에 날아오르는 것도 힘에 겨워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떨어지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멀리 남쪽으로 9만 리나 날아가려고 하는 저 새의 기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교외로 나가는 정도라면 하루치 식량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백 리쯤 되는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하루 전에 쌀을 찧어놓아야 한다. 만일 천릿길을 떠날 사람이라면 석 달 전부터 양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니 매미나 발의새 따위가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세계에 사는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짧은 시간을 사는 것들은 오랜 세월을 알 길이 없다. 아침에 돋아났다가 저녁이면 시들고 마는 조균(하루살이 버섯)으로서는 하루가 얼마나 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철을 사는 매미 또한 1년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짧은 세월이라고 말한다. 옛날에 초나라 남쪽에 있던 명령이라는 나무는 1천 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했다. 또 대춘이라는 나무는 1만 6천 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해갔다고 한다. 이런 것들에 비한다면 수백 년을 살았다는 팽조가 부러워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
은나라 탕왕과 그의 신하 극과의 문답에도 붕새가 언급되어 있다. 땅(궁발)의 북쪽 끝에 어두운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천지라 한다. 거기에 곤이라는 고기가 사는데, 등의 너비는 몇천 리나 되며, 그 길이는 얼마인지 알 수조차 없다. 또 거기에는 붕이란 새가 있다. 크기는 태산만 하다고나 할까? 날개를 펴면 하늘이 검은 구름에 덮인 듯하다. 붕새는 바람을 타고 빙빙 돌면서 9만 리 높이로 날아오른다. 앞길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붕새는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남쪽의 남명을 향한다. 참새가 비웃으며 말한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우리는 기껏 날아봐야 몇 길도 못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만다. 그래서 이렇게 쑥대 사이를 푸드덕거리며 뛰놀고 있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저런 힘든 일을 하다니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크고 작은 것의 차이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지식을 길러 관리가 된 사람, 공을 세워 한 고을의 원이 된 사람, 재능을 인정받아 대신이 된 사람, 덕이 높다 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 그들 역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따지고 보면 이 참새와 다를 것이 없다.
송나라의 영자는 그들을 속된 무리라고 비웃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방 같은 것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자신과 남, 안과 밖을 분명히 구별해서 영예로운 것과 욕된 것이 자기에게 본질적인 것이 못 됨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세속에 초연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참다운 자유를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에서 놀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표연히 땅 위로 돌아왔다. 그렇듯 그는 세상사에 속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바람의 힘을 빌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참다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천지 자연에 몸을 맡기고 만물의 육기에 따라 무궁한 세계에서 소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참다운 자유의 존재인 것이다. '지인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은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며, 성인은 명성에 관심이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 북명: 명은 '까마득하게 끝도 없는 바다'라는 뜻으로 명으로도 쓴다. * 곤: 장자의 우의적인 표현. 큰 고기의 이름, 혹은 '고기 새끼'라고도 한다. * 붕: 장자는 '매우 큰 새'라고 표현했으나 봉의 옛 글자라는 설도 있다. * <제해>: 책 제목으로 해석했으나 가공 인물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팽조: 전욱의 현손으로, 은나라 말엽까지 767년을 살았어도 늙지 않았다고 한다. * 탕왕: 하나라의 폭군 걸을 내쫓은 후 은왕조를 세운 성군. * 극: 탕왕 때의 현인이라고 하나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 영자: 도가의 학자였던 송견을 지칭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욕심을 배격하고, 싸워서는 안 된다는 비전론을 주장했다. * 열자: 열어구. <열자>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 육기: 천지간의 여섯 가지 기운. 곧 음, 양, 풍, 우, 회, 명을 이른다.
|
|
|
글터 → 수필 |
|
|
한용운(1879~1944)
시인. 승려. 법호는 만해. 충남 홍성 출생. 한학 수학. 33인 중의 하나인 그는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 예술적. 사상적 깊이가 있는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고 18세 때는 동학에 참여하였고 그 후 승려로 한국 불교계의 혁신을 도모하였고 만주에 건너가 독립 운동에 공헌하였다.
최후의 오분간
벌써 근 30년의 회상이다. "음빙실문집"에서 얻은 기억의 한 토막이다. 지나의 양계초가 무술 정변에 실패하고 미국에 망명하였을 때에 미국 조야 인사를 방문하였는데 모건은 미국에서 유명한 부호요, 기업가요, 돈도 많고 일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을 면회하든지 5분 이상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건은 부호요 거상이니만큼 면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인즉, 그 만큼 바쁜 사람으로 그만한 사람을 면회하자면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도 그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니, 능력이라는 것은 그의 두뇌를 말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심상한 방문객도 없지는 않겠지마는 대부분은 일이 있어서 찾는 사람일 것이요, 그 중에 복잡한 사단과 장황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방문도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면 어찌하여 다만 5분간의 면회로 그러한 일들을 해결할 수가 있는지가 의문이네, 모건은 어떠한 복잡한 일을 당하든지 지엽의 토의를 필요로 하지 아니하고 편언척어로 요령을 포착하여 단도 직입, 언하에 신속히 판단하고, 한 번 판단하면 여하한 경우라도 그것을 변개하는 일이 없다 한즉 그는 그러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그러한 판단력과 의지력이 있어서 5분간의 면회로도 미해결의 일은 없다 한다.
모건은 대부호이니만큼 미국 정부에서도 그에게 돈을 꾸어 쓰는 일이 있는데, 그러한 때에는 대통령이 직접 모건을 방문하게 된다. 모건은 대통령의 방문에도 물론 5분 이상을 허비하지 않는다 한다. 모건은 일개의 우연한 부상이 아니라 실로 일종의 걸물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양계초가 그를 찾은 것은 소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이었던 것이니만큼 그들의 면회는 3분간에 끝났는데, 양이 떠날 때에 자기에게 기념될 만한 말을 청한즉 모건은 '성공은 최후의 5분간에 있다'는 간단한 말로 고별사를 지었다 한다. 세계적 부호요 서반구적 걸물인 모건으로 당시 지나 일폭의 풍운아로서 정변에 실패하고 천애윤락 이역에 망명하여 미래의 부침이 적어도 4억만 생령에 관심되는 양계초에게 기념적으로 준 말이라면 반드시 심상할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대적 추상보다 그 말 자체를 음미하면 실로 우리들의 좌우명이 될 만한 말이다.
이 말은 중도의 실패에 낙망하지 말고 최후까지 노력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경영하는 일은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이 없고 성공까지에는 반드시 다소의 시일이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일을 두고 참담 경영하던 일이 최후의 종국은 5분간으로서 족한 것이다. 구인의 산은 최후의 일궤를 가하는 5분간으로 부족이 없는 것이다. 일을 영위함에는 시간의 조만도 문제이지만 성공의 5분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공기의 지속이 그 일을 영작하는 노력의 질적 양적의 다과로 정비례될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 영위하는 일이라는 것은 산판상으로 타산하여서 전도를 예측할 수 있는 대금업이나 토목 공사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도의 성패를 알 수 없으면서도 사람으로서 당연히 당할 일을 말하는 것인데,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은 매양 순경보다 역경을 당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은 조화용의 장난인지도 모른다 하려니와, 그보다도 순경에 처한 사람보다도 역경에 있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이 많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궁할수록 달하고 싶고 퇴할수록 진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느니보다 차라리 생물의 본능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고로 위대한 사업은 흔히 역경을 만난다고 하지마는 위대한 사업일수록 역경에서 출발하기가 쉽게 되느니 그 출발점이 역경인지라 그 진로가 순경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에게 순경이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성공하는 최후의 5분간으로부터일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역경에 선 사람들도 순경을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마땅히 그것을 먼저 간파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여 일을 영위하다가 곤란이 있다고 중도에 퇴보한다든지 진로를 변경한다면 그것은 최초의 본의가 아닐 뿐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성공은 없을 것이니, 그러면 그 사람의 일생은 실패와 비애로 시종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위에 대하여 일시적 성취가 사람으로 그것을 영위하고 거기에 용진하여 백절불굴, 쉬지 않고 행하다가 광란을 기도에서 돌이키고 대하를 장경에서 붙들어서 성공의 최후 5분간을 본다면 사람의 희열이 거기에 있고 진정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세도의 일빈일소에 영수향응하여 조동모서로 종작이 없어 부침하는 경박아, 천장부에게는 각각으로 실패의 5분간을 계속할 뿐이다.
번민과 고통
번민과 고통은 밖에서 오는 것, 정신 활동으로 번민을 제하자
먼저 고통과 번민에 대한 관념부터 말씀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받는 고통으로 말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째 정신상으로 받는 고통과, 둘째 물질상으로 받는 고통입니다. 모든 고통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니, 이것을 받은 때에 받아서 느낀 때에 비로소 고통이 생기는 것이외다. 다시 말하면,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는 그 느낌이 고통이외다. 들어오는 고통을 받지 말고, 스스로 나아가 기쁘게 즐겁게 영적 활동으로 나아가면 고통이란 없을 것이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현실 세계를 부인한 모순의 말이라 할 것이외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밖으로 들어오는 고통 그것은 다름없이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외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좀 넓어집니다. 허나 이것이 결코 현실 세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외다. 다만, 그 고통이 생기는 까닭이 고통을 느끼는 데 있으므로, 만일 이 고통을 느끼면서 밖으로 그 고통 주는 바를 쳐 버린다든지, 또는 그 고통을 없이할 만족을 요구한다든지 할진대, 아마 그 고통은 용이하게 없어지지 아니하리다. 더욱 고통은 고통을 더할 것이외다. 옷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밥이 없어서 고통이외다. 자유를 잃어서 고통이라 합니다. 그래서, 밥을 구하며 옷을 주기를 기다립니다. 자유를 빼앗은 자를 원망합니다. 고통이 주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도 하고, 애원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주는 고통 그것이 또한 피(저)라는 자리에 있어서 아(나)에게 요구합니다. 나와 같이 겨룹니다. 이렇게 되고도 고통이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고도 번민치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현재 우리 조선 사람이 정신상으로나 물질상으로나 무한한 고통을 받음은 사실이외다. 남다른 설음과 남다른 고통으로 울고불고하는 터외다. 밥이 넉넉지 못하고, 옷을 헐벗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갖은 고통이 일어납니다. 자유가 없으니까, 눈이 있으나, 입이 있으나 없으나 다름이 없습니다. 손이 날래고 발이 튼튼하다 하더라도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느끼어 갑니다. 그러나, 이 고통을 물리치려고 없이하려는 태도로 수단을 부리고 길을 취한다 하면, 고통은 점점 더할 것이외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의 탈 가운데서 뛰어나와 쾌락하게 평화로운 영적 활동을 계속하여 가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외다. 고통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외다.
|
|
|
글터 → 한국사 |
|
|
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3. 이괄의 반란 : 쿠데타는 다시 쿠데타를 부른다
중앙관료들에 대한 불만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관한 통설은, 인조반정 때 김류가 망설이고 있을 때 대장이 되어 혼돈에 빠진 반란군을 수습하는 등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이후 2등 공신밖에 되지 못한 데다가 중앙에서 밀려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변방인 국경지대로 쫓겨나자, 이에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괄을 단순히 반역자로 몰았던 후대 사람들이 조작해낸 것에 불과하다. 반란을 일으킨 동기나 당시 상황을 볼 때 일정한 계획하에 거사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정변이 성공한 후 정부는 주동 인물들의 공과를 가려 공신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괄에 대해 정부는 정변에 나중에 참여했다는 명목을 내세워 판윤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그리고 2등공신이 되었다. 반면 도감대장 이수일은 내응한 공이 크다 하여 공조판서직에 임명하였다. 누가 보아도 불공평한 인사 발령이었다. 이전에 반정공신을 정하는 자리에서 이귀는 이괄의 공을 알고 인조에게, "어제의 반정은 이괄의 많은 활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히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해야 할 줄 압니다"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괄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괄은 말하기를, "신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다만 일을 다하여 회피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어제 대장인 김류가 약속 시간에 오지 않아서 이귀가 신에게 그를 대신케 하였는데 류가 늦게 왔으므로 그를 베고자 하였으나, 귀가 극력 말려서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김류도 같이 있었는데도 이괄은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속마음을 인조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괄은 관직은 둘째치고 김류의 기회주의적인 자세에 더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졌다. 김류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반격하였다. "이경으로 시간을 정하였으니 병법으로 논한다면 미리 온 자는 참형을 당하여야 합니다."자기가 늦게 현장에 나타난 것을 변명하려는 말이었다. 그러자 한교라는 자가 나섰다. "병법에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김류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다시 대답하였다. "<오자>(전국시대의 명장 오기가 지은 병서)에 나와 있소이다."이에 참다 못한 이귀가 김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자>에는 병졸이 장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돌진하여 명령을 어기면 참한다는 말은 있으나 미리 온 자를 참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김류의 말이 변명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에 인조는 더이상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쇠고기와 술을 잔뜩 준비하여 모화관에서 위로 잔치를 벌였다. 여기서도 김류와 이괄 사이의 눈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이괄은 김류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이때 이귀가 나서서 화해하라고 종용하였다. 두 사람은 일단 서로 시선을 거두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이괄의 성격은 급하고 단순한 면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 사후 처리에 대한 감정보다는 비겁한 행동 끝에 반정에 참여한 김류가 일등공신으로 책정된 데에 격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단 사후 처리는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괄은 이때의 체험을 잊지 못해 두고두고 중앙 관료들에 대한 불만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변방으로 떠나는 이괄
인조가 세력을 잡은 뒤에도 국내외 정세는 어수선하였다. 안으로는 아직 반정에 따른 민심 수습과 정치권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고 밖으로는 후금이 날로 강성해져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여서 북방 국경지대에는 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누르하치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광해군 정권이 몰락한 뒤에는 더욱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부는 우선 전투 경험이 많고 유능한 지휘관을 변방 책임자로 보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장만을 도원수직에 임명하였다. 도원수직은 원래 전시 중에 내려지는 임시직이다.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에는 왕명을 대신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총지휘권을 가질 수 있는 직책이었다. 이러한 중책에 장만을 임명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 봉산군수로 있으면서 수령들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명나라 군사들을 잘 달래어 민생의 안전을 도모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을 알게된 정부는 그에게 포상을 내리고 동부승지로 승진시켰다. 전쟁 이후에는 대사간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함경도 관찰사가 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후금이 강성해져 언제 남하할지 모른다고 정부에 보고하여 방어책을 세울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후금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의 산천지도를 그려 바친 일도 있었다. 이듬해인 1611년에는 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관서민들의 형편에 맞게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여연 등 버려진 지역이 조선의 국토임을 여진족에게 알려 그들을 철수시켰다. 또한 명나라가 요동 지역에서 패한 이후 1619년에 장만은 이시발과 함께 광해군 앞에 나아가 대후금 정책을 숙의한 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장만은 명나라와 후금 등 인접한 국가에 대한 소식통이었으며 국제 정세에 밝은 사람이었고, 이러한 장만(그는 당시 57세의 노장이었다.)을 변경에 보낼 정도로 양국간은 초긴장 사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도원수를 보필할 부원수 자리에도 역시 유능한 지휘관을 골라 임명해야 했다. 더구나 부원수직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전방에 진을 치고 직접 적과 맞대고 경계를 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장만은 이괄과 이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임명하여 줄 것을 인조에게 요청하였다. 인조가 판단해 볼 때 두 사람 모두 유능한 장수들이기 때문에 누구를 보내도 상관이 없다고 보고 임명권을 장만에게 일임하였다. 그러자 장만은 이괄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의 자리에 올라 장만과 함께 중대한 임무를 띠고 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장만이 먼저 평양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때가 1623년 5월이었다. 인조는 직접 모화관까지 나와 북으로 떠나는 군사 행렬을 전송하였다. 왕이 친히 나와 전송할 정도로 북방 경비는 국가의 존립과 관계된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괄이 변방으로 쫓겨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같은 해 8월 17일, 인조와 작별을 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도원수와 경이 가니 이제야 서북 지방의 근심을 잊게 되었소."인조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으로 이괄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괄은 머리를 조아리며 인조에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소신의 재주 없음을 아시면서도 분에 넘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두렵웁기는 1만 5천의 군사로 적을 감당하기 어려울까 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괄은 인조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소상히 아뢰었다. "군사의 모집은 마땅히 사세를 관망한 뒤 이에 따라 적절히 행할 것입니다. 신이 가서 주둔할 곳은 원수(장만을 말함)와 상의해서 차후 보고할 예정입니다. 현재 구성과 태천에는 아직 성채가 없으니, 영변이 주둔지로서는 가장 적당한 줄 압니다. 그리하여 그 지방 소속 각관으로는 소관 지역을 지키게 하고 신은 저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며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불만을 갖고 떠나는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임금 앞이라 겉치레로 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그의 계획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또한 그는 실제로 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평안도 영변에 주둔한 뒤에 군사 조련, 성책 보수, 진의 경비 강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물론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그는 떠나기 전부터 반란을 계획했기 때문에 이것을 숨기기 위해 연막술을 쓴 것이라고. 그러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이 반란이 얼마나 어이없이 터졌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외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시작한 반란
정변이 한번 일어나고 나면 민심의 동요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다시 반대파의 반격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광해군은 아직 죽지 않고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광해군 복위를 꾀하며 역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태였다. 이리하여 공신들은 구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겠다는 강박 관념을 갖게 되었고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하여 휘하의 군관들을 동원, 민심 동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불순한 행동을 계획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권력을 잡은 자들 주변에는 아부하는 자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며 이를 통해 출세하려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 어느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세태이다.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붙기 위하여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밀고를 일삼았다. 실제로 이 밀고가 차고 넘쳐 그중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걸려들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게 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인조반정 후 반정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심해져서 반역 음모 혐의로 잡히는 자가 적지 않게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이 일어났다. 이괄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1624년 1월에 문회, 허통, 이우 등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사실 이들의 고변은 전혀 근거없는 것으로서 추측하건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문회의 경우 향교 등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종6품의 교수를 맡고 있었다. 문회 등의 고변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국청에서는 연일 관련자들을 잡아다가 엄중 문책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근거없는 고변이었기에 뚜렷한 물증을 잡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무고당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정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일 만한 공통점이 있다. 기자헌은 영의정 등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친 명사였다. 그는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이 되었고, 북인이 다시 대, 소로 나누어질 때 대북의 편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파에 관계없이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 지조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정여립 모반사건 때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을 신원하게 하고 당시 옥사를 일으킨 서인들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그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는 선조의 뜻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서 유영경 등이 교서를 숨기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할 때 이에 반대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헌하였다. 그렇지만 이이첨 등이 내세운 폐모론에는 반대하여 길주로 유배를 가야 했으며, 후에 강릉에 처사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이 다시 관직에 오르라고 하였지만 끝내 거절하였고 인조반정의 주동 인물들이 거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을 때도 왕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인조가 그의 인품을 높이 사 관직에 임명하려 했지만 이것 역시 거절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자헌은 이원익처럼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중도를 지키며 신하로서 해야할 소임을 완벽하게 수행하였던 것이다. 아마 문회 등이 모함할 때, 그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조의 명을 어긴 사람이니 분명 역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나중에 이괄과 끝까지 정부군에 대항한 한명련은 의병장 권율 휘하에서 큰 전적을 올린 무신이었다. 그는 명나라의 제독이 오위장에 임명할 정도로 종횡무진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방어사를 거쳐 1623년,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구성순변사에 임명되어 전방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투 경험이 많은 역전의 노장인 그를 국경지대로 보냈던 것이다. 그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려 했지만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한명련이 무고에 휘말리게 된 것은 전쟁에서 거둔 공적이 커서 이괄과 공모하여 막강한 군대를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들추어냈기 때문이다. 이시언의 경우, 그 역시 왜란 때 많은 전적을 세운 무신이었다. 광해군 때에는 그는 전투 경험을 인정받아 평안병사,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광해군을 도와 대후금 정책을 세우는 데 큰 밑바침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후에는 순변부원수에 임명되어 국방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시언 역시 문회 등의 표적이 되었다. 이괄의 반란과 관련되어 처벌된 사람들이 수십 명에 달하지만, 일단 대표적인 인물들인 위의 세 사람만 살펴봐도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떠한 형태로든 광해군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이다. 즉 스스로 세운 공로에 따라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무신들이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봤을 때 문회 등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고변을 하여도 쉽게 걸려들 만한 대상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또한 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인조나 반정공신들은 광해군과 가까이 지낸 인물들의 동향에 대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도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국청의 신문 결과 무고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층은 이괄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던 것이니,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쨌든 엄중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지자 조사 담당관들은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시 반정공신 등 집권층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그 진상을 신문한 뒤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를 하였다. 이들은 문회 등의 고변 내용 가운데 이괄의 명단이 들어 있다는 점에 매우 놀라고 있었다. 또한 그가 떠나기 전 중앙 관리들에게 보여준 태도를 상기시키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충분히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목하였다. 게다가 그는 정예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처음에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를 묵살하였다. 자기의 판단으로는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괄이 떠나던 날 자기에게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명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무장으로서의 굳은 결의가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의 건의가 근거없는 말들이지만 이괄과 그의 아들에 대한 변고가 계속 이어지자 인조로서도 일단 확인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인조 역시 정변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반역을 꾀할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마침내 이괄의 군중에 머무르고 있던 그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서울로 압송하라고 명하고는 금부도사 고덕상, 심대림과 선전관 심지수 등을 영변으로 보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괄은 당황하였다. 더군다나 찾아온 목적이 자기 외아들을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압송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이괄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관례적으로 볼 때 역모로 일단 정부 손에 잡히게 되면 혐의가 풀릴 가능성보다는 반역자로 몰려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이것을 이괄이 모를리 없었다. 이괄은 자기 손으로 아들을 인계해주어야 할 위치에 처했다.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이다. 또한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되면 자기나 가족 모두가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이괄은 정부에서 온 사자들을 안심시켜 놓고는 부하 장수인 이수백, 기익헌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몇 차례 의견이 오갔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괄은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다.
"나에게 자식이라고는 외아들 하나 뿐이오. 그런데 무참하게 죽게 되었소. 아들이 잡혀가는 이 마당에 어찌 그 아비인들 온전할 리 있겠소? 사태는 매우 급하게 되었소. 남아가 어찌 가만히 목을 늘여 죽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소?"
그러자 부하 장수들도 그의 뜻을 알고 먼저 사자들을 죽이자고 결정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중앙에서 온 사자들을 목베고 말았다. 이리하여 이괄의 반란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는 전혀 사전 계획도 없었고 반란을 일으킬 명분도 없었다. 이괄의 반란은 이렇게 외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무작정 터진 것이다.
본격화된 이괄의 반란
한편, 구성부사 한명련은 이미 모반 혐의로 서울로 압송되어 가고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이괄은 지체없이 날랜 항왜병을 길목에 잠복시켜 기습 공격한 뒤 그를 구해내어 반란에 가담시켰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명련은 전투 경험이 많아 작전에 능한 인물이었다. 이왕 반란을 결심한 이괄로서는 한명련 같은 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후부터 두 사람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반란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1624년 1월 22일, 마침내 이괄은 항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고, 휘하의 전병력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 서울로 향하였다. 이괄은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을 피하고 샛길로 곧장 서울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그의 최종 목표는 서울 점령이기 때문에 중간에 쓸데없이 전투력을 소모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장만은 이괄에게 잡혔다가 풀려난 군관 남두방을 통해서 반란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그의 지휘하에 있는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해 이괄의 정예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일단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휘하 군졸들을 평양으로 결집시켜 성문을 굳게 닫은 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즉시 반란 소식을 중앙에 알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은 개천, 자산 등지를 거쳐 1월 26일에는 강동의 신창에 주둔하였다. 이틀 후인 28일에는 삼등을 지나 상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달이 바뀐 2월 1일에는 수안으로 향하였다. 수안에 이른 반란군은 정부군이 새원에 주둔하고 있음을 알고 기린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그만큼 반란군은 서울 당도가 최우선이었다. 황해감사 임서의 군대와 경기방어사의 군대도 모조리 피하며 남하하였던 것이다. 반란군의 행군 속도가 빨라 정부에서는 이들의 남하 경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한명련이 지리에 밝고 용병술에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완전히 지방 정부군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과 정부군이 최초로 접전하게 된 곳은 황주 신교에서였다. 이곳을 지키고 있던 정부군 지휘자는 정충신과 남이홍 등이었다. 그런데 이중 정충신은 이괄과는 매우 철친한 친구 사이었다. 정충신은 왜란 당시 권율의 휘하에 있을 때, 장계를 행재소에 전할 사람이 없음을 알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장계를 전달할 정도로 강단이 센 무신이었다. 그 역시 광해군 때에는 국경지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럴 즈음에 이괄과 친한 관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회의 무고로 잡혀 갔다가 혐의가 풀려 명을 받들어 이괄의 군과 대치, 친구 사이에 서로 칼부림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괄은 정충신의 부대를 피해갈 수 없다고 판단, 잠시 전략을 생각하다가 묘안을 떠올렸다. 그는 정충신이 자기의 친구라는 것을 감안하여 가급적이면 정면 돌파를 삼가하겠다고 판단, 부하 장수인 허전 등에게 거짓 항복케 하였다. 그러자 정부군은 반란군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고심하였다. 그만큼 방비도 허술해졌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이괄의 반란군은 정부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결과는 반란군의 승리였다. 이괄은 이곳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정부군의 선봉장인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즈음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이돈 등이 체포되어 능지처참당하여 죽고 말았다. 이러한 비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괄은 서울을 향하여 쉬지 않고 진격해 들어갔다. 이괄은 평산에 이시발, 임서 등이 이끄는 정부군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파악하고, 봉산 고읍에서 전탄을 건너 샛길을 이용하여 마탄(예성강 상류)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다시 정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당시 정부군은 방어사 이중로, 평산부사 이확 등이 여울을 경계로 삼고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을 탐지한 이괄의 반란군은 낮은 여울을 건너 급습하였다. 정부군은 반란군의 전술에 말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이괄은 장수들의 목을 베어 말에 매달아 정충신의 부대로 보냈다. 이를 본 정부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때 이확은 시쳇더미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정충신이 포 소리를 따라 남하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즈음 서울에서는 내응 세력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기자헌 등 수십 명을 잡아 처형하였다. 이괄의 거침없는 남하에 집권층은 불안을 느낀 것이다. 이때 이귀 등은 극구 인조를 만류하였으나 여론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두번째 전투에서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반란군은 사기가 더욱 올라 빠른 행보로 개성을 지나 임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정부군이 반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괄과 한명련은 강의 형세를 살핀 뒤 정부군이 볼 수 없는 샛길을 따라 강을 건너 정부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반란군의 기습에 임진을 지키고 있던 정부군은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 벽제에 이르렀다는 보고에 정부는 코앞에 적이 와 있음을 실감하고, 2월 8일 해가 질 무렵 인조와 대신들은 한겨울의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서둘러 궁을 빠져나와 남대문을 지나 한강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건너갈 배가 보이지 않았다. 사공들이 난리 소식을 듣고 모두 몸을 숨긴 뒤였다. 가까스로 배를 강제로 구한 일행은 강을 건너 서울을 빠져나가 수원을 거쳐 공주로 피난하였다. 그럴 즈음 반란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 근교에 이르게 되었다. 먼저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병 30여 명이었다. 이미 서울 주민들은 임금이 궁을 빠져나갔고 반란군이 곧 들어온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었다. 이들은 말을 몰고 다니면서, "도성 안의 사람들은 놀라 동요하지 마시오. 새 임금이 즉위한 것이오." 하고 외쳐 반란군이 승리했음을 사방에 알렸다.
2월 10일, 이괄과 한명련이 선두로 반란군 주력부대가 마침내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때 서울 주민들 중에는 거리로 나와 이들을 환영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각 관청의 서리 등 관리들도 의관을 갖추고 나와 예를 갖추었다. 반란군은 행군을 멈추고는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였다. 한국 역사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역으로 말해서 이렇게 허술한 정부군을 가지고 후금과 싸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의병이 일어나겠지만 정규군 전력만 보더라도 당시 사대파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이 사건을 통해서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왕의 피난 행렬이 수원에 이르렀을 때 부산에 와 있는 왜인들에게 구원 요청을 하자는의견이 나왔다. 어떤 경로로 이런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것 역시 당시 정부군의 허술함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라 하겠다.) 서울을 점령한 이괄은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편으로는 각처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흥안군은 원래 인조를 따라 한강을 건넜다가 중간에 몰래 도망쳐 서울로 온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이괄의 부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마땅히 임금으로 삼을 왕자도 없어 사태 수습을 위해서라도 일단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이다. 이를 보고 서울 주민들이 "식(흥안군의 이름)이 추대되었으니 오래 못가겠구나." 하면서 혀를 찼다고 한다. 어쨌든 임금을 세운 반란 정부는 여러 기관에 관원을 배치하는 등 새로운 행정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또한 승리에 도취한 반란군은 흥안군이 내린 술과 고기로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반란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이괄의 직속 상관인 도원수 장만은 이괄이 남하하는 동안에 뒤를 쫓아오면서 계속해서 각지의 지방군을 끌어모아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사실 장만이 부대를 지휘할 경우 이괄이나 한명련으로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워진다. 이괄이 평양을 우회해서 내려온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강행군 끝에 장만이 이끄는 연합 정부군은 서울 근교인 파주에 이르렀다. 그는 왕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보고를 듣고 즉시 종사관을 보내 문안을 올렸다. 장만은 혜음령에 이르러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괄의 부대가 정예부대라는 점을 감안하여 장만도 함부로 이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장만과 그의 부하 장수들은 길에다 풀을 깔고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작전 계획을 짰다. 장만은 도성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공격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정충신이 조심스럽게 이에 반대하며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보았으나 적을 격파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파천하셨으니 우리들의 죄는 만번 죽어도 다하지 못할 지경인데 어찌 이렇게 적을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제가 보건대 북산을 먼저 점령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길마재에 진을 친 뒤 이에서 내려다보며 싸움을 걸면 저들이 반드시 응전할 것이고 싸움을 시작하면 적군은 우리를 올려다보며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군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싸우게 되는 것이니 우리에게 유리할 것이며, 이에 적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충신의 작전 설명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홍도 이 계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마침내 정충신의 작전대로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에 진을 쳤다. 이러한 정충신의 작전은 적중했다. 이튿날에야 반란군 진영은 정부군이 길마재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장수가 이괄에게 뒤에 위치한 장만을 사로잡으면 적은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배후를 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괄은 정부군의 주력부대가 별로 많지 않고 쉽게 쳐부술 수 있다고 판단,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판이었음을 당시 아무도 몰랐다. 이괄은 "적을 쳐부수고 밥을 먹자"고 호언장담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정부군 진영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때 반란군의 선봉장은 한명련이었다. 이괄은 중군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갔다. 그때 마침 동풍이 세차게 불어와 반란군은 바람을 등에 업고 유리한 싸움을 벌였다. 정부군은 불리한 자연 조건 속에서도 사력을 다하여 저항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에 밀려 수십 보 뒤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늘은 정부군의 편을 들었던 것인가.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북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먼지를 동반하며 반란군을 향하여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반란군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전투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서북풍이었다. 결국 한명련은 화살을 맞고 뒤로 물러섰다. 이괄은 전투 진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이자 대장기도 따라 움직였다. 그때 이를 본 남이홍이 "이괄이 패하였다"고 외치자, 먼지바람 속에서 격전을 벌이던 반란군들은 이 말이 진짜인 줄 알고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이괄 등이 독려하였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난 뒤였다. 정부군은 일제히 고개를 내려와 반란군을 사정없이 칼로 내리쳤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부군을 포위, 공격하려 했던 작전은 이렇게 해서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날 밤 이괄과 부상을 당한 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달아나면서 목사 임회를 죽이고 이북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정부군의 추격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2월 15일 밤, 이괄 등은 지친 몸을 이끌고 이천의 묵방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 등은 더이상 도망해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치자고 은밀히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두 사람이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다.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였다. 이로써 이괄의 반란은 한달도 안되어 평정되었다. 인조는 2월 22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반란 이후와 특성
인조는 환도한 뒤에 이괄의 반란 평정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장만, 정충신, 남이홍 등 32명을 진무공신으로 포상하는 등 사태 수습을 하였다. 그러나 이 반란은 국내외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국내의 반란으로 인해 처음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났다는 사실에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민심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집권층은 다른 반란이 유발하지 않도록 각계 각층에 대한 사찰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명련의 아들 중에 한윤이 있었는데,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구성에 숨어 있다가 후금으로 도망하여 강홍립의 휘하에 들게 되었다. 그는 조선 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627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물론 한윤의 배반 행위가 호란의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광해군 몰락 이후 조선 정부의 대후금 정책을 알게 된 후금 정부가 조선을 치겠다는 결정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한적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매우 우발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부의 강경적인 통치 방식이 이괄의 반란을 야기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반란들이 대체로 뚜렷한 명분과 상황의 불가피성을 내세워 일어난 것이라면, 이괄은 단순히 자신의 외아들과 가족의 신변 보호를 위해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하는 집권층에 대한 불만도 작용하였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든 이 반란 이후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쿠데타로 세력을 잡은 정권은 구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찰을 강화하게 되며 이러한 강압적 분위기에서 다른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었다. 출세를 위해 변고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지만, 이로 인해 무고한 대신들이나 무장들이 처형을 당하여 다시 한번 조선 정부는 내부 혼란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
|
|
글터 → 수필 |
|
|
꽃삽 - 이해인
셋째 묶음 : 작지만 좋은 몫을
산으로 솟고 강으로 흐르는 그리움을
40년이 넘도록 산으로 속소 상으로 흐르는 겨레의 아픔과 이산가족들의 절절한 그리움은 누가 달래줄 수 있을까? 지난해 6월, 내가 상상만 하던 백두산과 두만강을 실제로 가 보았을 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났다. 오래 전에 통일전망대나 임진각에 갔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이 더 뜨거워진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그 동안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나의 아버지의 대한 그리움이 더욱 새삼스럽고 구체적으로 출렁여온다고 할까.
1950년 9월, 시골 숙부님댁에 다녀오시다가 그 길로 납치당하신걸로 추측되는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전혀 알 길이 없으면서도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는 그 분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계시길 바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가끔 신문을 통해서 수십년 만에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어느 날 문득 우리 아버지도 기적처럼 가족들 앞에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된다. 나도 요즘은 가족들과 함께 찍은 아버지의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꼭 살아 계신 분을 대하듯 말을 건네보기도 한다. 서른아홉살의 아내와 열아홉 살, 열네 살, 여섯 살, 두 살 짜리 사남매와 예고도 없이 헤어지셔야 했던 아버지는 정말 어떻게 되셨을까?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궁금하기 그지없다. 유난히 정히 많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신 아버지가 퇴근하실 무렵이면 나는 으레 집 밖에 나가 기다림에 서성이곤 했다. 그 분이 천천히 올라오시던 서울 청파동 집의 층계, 내 조그만 손을 잡으실 때의 그 깊은 눈길과 다정한 웃음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마 전에 나는 그 분을 그리워하는 40년 전의 아이가 되어 다음과 같은 동심의 시를 읊어보았다.
내가 여섯 살 때 이북을 끌려가신 아버지 처음으로 내게 노래를 가르쳐주신 아버지를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처음으로 크게 불러본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불러본다. 하늘나라에 계세요? 땅위에 계세요? 가족과 헤어진 후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 없던 보고싶은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은 백두산을 솟는다. 간절한 기도를 바쳐도 통일의 노래를 불러봐도 대답은 들리지 않고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 나는 서둘러 산을 내려온다 묻어둔 그리움이 화산으로 폭발할 것 같아 나는 울지도 못사고 산을 내려온다.
여행길에 비가 많이 와서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젖은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두만강. 비를 맞고 황토빛으로 일어서던 두만강가에서, 동행했던 노수녀님 몇 분을 40여 년 전 행상인 차림으로 변장하고 그 강을 건너 남하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깊은 감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날의 두만강은 내게 다음과 같은 노래 하나를 안겨주었다.
살아갈수록 우리 이야기는 강이 되고 강은 흐를수록 말이 없네 오늘은 비를 맞고 가슴을 풀어헤친 겨레의 강 하나 되지 못한 우리의 아픔을 대신 울어주다 시퍼렇게 멍이 든 기다림의 강이여 언젠가는 모든 이와 손잡고 일어설 꿈과 희망을 굽이치는 물살로 노래하는 강 오늘도 흐르는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그리움의 강이여
푸른 하늘과 맞닿을 듯한 신령한 아름다움의 백두산 위에서도, 큰비로 불어나던 두만강가에서도 나는 한과 슬픔에 젖은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흐느낌을 듣는 듯했다.
모쪼록 우리나라의 남북대화가 잘 진행되어 아직은 더 오래 기다려야 할 통일에 앞서 한 사람이라도 더 헤어진 가족들의 소식을 생전에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기쁨의 날이 올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남북통일 지향으로 수녀원에서 계속중인 주기적인 단식과 빔기도에도 더 열심히 참배해야겠다. 언젠가는 꼭 통일이 이루어져 산으로 솟고 강으로 흐르는 우리의 그리움이 더 이상 큰 아픔이 되지 않는 날을 기다려본다.
슬픔을 나누며
누군가에게 축하할 만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와 기쁨을 나누는 뜻에서 어떤 표현을 하긴 쉬워도 어쩌다 불행에 처했을 때 그를 위로하는 적절한 말을 찾아 하긴 그리 쉽지 않은 듯하다. 더구나 가장 사랑하는 이와 사별하고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신앙적인 말로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잘못 표현하다간 오히려 엉뚱한 오해를 받기고 하고, 위로 아닌 상처를 줄 수도 있어 때론 소리로서의 말보다는 그저 묵묵한 애도의 표정이나 연민의 눈길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음을 본다. 꼭 기일이 아니라고 자주 죽은 남편의 묘지를 찾아 꽃과 고운 카드를 놓아두고, 아이들과 같이 사랑의 편지를 써서 태우기도 하는 몇분 미망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아주 서서히 오랜 기간을 두고 슬픔을 삭여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상을 당한 이들에게 우리가 하는 위로의 말은 많은 부분 피상적일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곤 한다. 그러나 친지들이 상을 당하고 시름에 잠겨 있을 때 나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종종 죽은 이의 입장이나 유족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슬픔을 대변하는 시를 적어보기도 하고, 다른 이의 좋은 시나 성경구절과 함께 기도한다는 내용이 적힌 위로 카드를 보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은 정성이 어떤 이에겐 무척 큰 위안이 되기도 하나보다.
지난 여름 나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동료수녀의 올케언니 장례미사에 갔다가 사진 몇장을 찍어둔 것이 있어 몇주 후에 고인의 남편되는 J씨에게 위로의 글을 적은 카드와 함께 사진을 보냈더니 즉시 고맙다고 전화 연락이 왔다. 나는 그 분을 깊이 알진 못하지만 자녀도 없이 30년 가까운 결혼생활을 하면서 부인이 앓아 눕자 사업까지 그만두고 오직 간병에만 정성을 쏟은 사실을 익히 알던 터라 '얼마나 쓸쓸하세요?'했더니 울먹이는 소리고 '수녀님, 이게 뭡니까? 요즘은 정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먼저 간 그 사람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이 나이에 아무데서나 눈물을 보일수도 없구요' 하는데 나도 마음이 아파 며칠 후 수녀원 저녁기도와 식사에 오시라고 했다. 나도 한번 병원에서 만난 일이 있는 그의 부인은 많이 아픈 중에도 상냥한 표정과 말씨로 우리를 반겨주던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의식이 있을 땐 늘 머리를 단정히 하고 엷은 화장을 했으며, 요리, 바느질, 집안 정리를 너무 깔끔히 해서 별나다는 소리도 더러 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빈소에 갔을 때 여느 초상집 사진들과는 달리 분홍 치마 저고리의 화사한 한복차림의 아내 모습을 액틀에 넣어놓은 것이 퍽 인상이었다고 나는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J씨는 꿈에도 생시와 같이 부인과 등산을 가는데 깨어보면 ' 없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어쩌다 냉장고 문을 열어도 그릇마다에서 아내의 손길이 느껴져 슬프다며 '그 사람은 글세 내가 자기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며 부디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는군요'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오직 아내 간병에 정성을 쏟은 자기더러 사람들은 장하니 어쩌니들 하지만 아무리 잘한다고 했어도 환자 자신이 겪은 아픔과 내면의 그 깊은 고독은 남편인 자기도 미처 몰랐을 것이라며 울먹였다.
부인 때문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인생 공부도 많이 했다는 그는 이미 반의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환자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류 간호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은 환자의 입장보다는 흔히 자기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에 환자는 더욱 고독할 수밖에 없으며 고독과의 싸움이야말로 가장 눈물겨운 것이라고 했다. 때로 환자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거나 보호자의 입장에선 꽤 무리한 요구를 해올 때도 이를 이상히 여기거나 비난하지 말고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지극한 관심과 인내의 노력이 필요함을 거듭 강조하는 50대 중반의 J시의 슬픈 체험담을 나와 친구 수녀는 저녁 내내 들으면서 배우는 게 많았다.
사실 얼마나 여러 경우에 나 역시 슬픔과 아픔 속에 잇는 사람들에게 그 입장이 되기보다는 내 입장에서 내 방식대로 생각하고 표현할 때가 많은지 반성이 되었다.
아내가 쓰던 화장품 주머니에 기도서와 성가책을 넣고 성당으로 향하는 J씨의 슬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의 슬픔에 주님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했다.
<1993>
메모하는 기쁨 속에
연필, 들고 바라보라 푸른 산 여기저기 새 시상 혼자 키워 써내린 분신들 모퉁이길 걸어서 돌면 주머니 속 피리 소리 눈 둘어 젖은 생각 이미지로 말려본다 새하얀 여백에다 침 묻혀 뼈를 씻고 종이 하나 접고 푼 기억 무릎 치는 깨달음이여.
노창수 시인의 <메모지>라는 시를 읽다가 내 수도복 주머니 속의 조그만 메모수첩을 만지작거리니 시인의 표현대로 '주머니 속 피리소리'가 금방이라고 들려오는 것만 같다.
길든 짧든 한편의 글을 쓰려면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메모지를 버려야 하는지 모른다. 무엇이든지 미리 메모해 두지 않고는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 나는 어려서부터 워낙 메모하기를 좋아했다. 더구나 요즘은 무엇이든지 잘 잊어버리는 나이가 되다보니 생활 전반에 걸쳐 메모는 매우 중요한 몫이 된 셈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 뿐 아니라 소임에 필요한 사항을 적기 위해서, 부탁받은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늘 메모지를 가까이 둔다. 그래서 수도복의 속주머니뿐 아니라 내가 쓰는 책상 위에, 성당 자리에, 서가 위에, 침대 머리맡에, 손가방에 작은 수첩이나 메모지를 즐겨 놓아두다 보니 이왕이면 이쁜 메모지들을 좋아하는 종이 욕심쟁이가 되어버렸다.
메모하는 습관은 창작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지만 평범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데도 도움이 된다. 책을 읽다 발견한 모르는 낱말, 산이나 바다로 산책을 하다 발견한 특이한 모양의 꽃, 나무, 조가비들의 모습을 적어두었다가 도서실에 가서 사전을 통해 알아가는 순간은 얼마나 기쁘고 흐뭇한지 모른다. 우리가 걸핏하면 '이름 모를 꽃' '이름 모를 새'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사람에게 고유의 이름이 있듯이 꽃, 나무, 새, 조가비들의 이름도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아서 불러줄 수 있을 텐데 많은 경우엔 우리가 무관심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더 모르는 것 같다.
혹시 책을 읽다 만난 어느 좋은 구절을 말이나 글로 인용하고 싶다면 이 또한 책 이름과 지은이의 이름을 즉시 메모해서 기억해 두면 될 텐데 우리는 너무 자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일이 있다' '누군가의 글이었던가'하고 얼버무리는 식의 표현을 자주 하고 있으며, 이런 표현에 아예 익숙해져버린 듯하다. 다른 이들이 쓴 글에서 이런 식으로 인용되었거나 작자 미상으로 표기된 나의 글들도 나는 꽤 여러번 보았었다.
이것 저것 너무 잘 잊어버려 큰 일이라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는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세요'하고 말하곤 하는데 듣는 쪽에선 '메모한 것까지도 잊어버릴 텐데 어떻게 합니까?'하면 나도 함께 웃다가 '그래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걸요'라고 대답한다.
새로운 글을 쓰는 일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챙기는 것도 메모를 통해서 많은 도움들 받고 시간을 절약하게 되므로 나는 더욱 열심히 메모를 한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나면 나는 우선 주머니 속의 메모지를 꺼내 내 나름대로의 분류법으로 정리를 하면서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을 새롭게 확인하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다시 작은 메모 수첩과 몽당연필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더욱 새롭게 채워질 내 시간 속의 말들과 삶의 무늬들을 그려본다. 부지런히 메모하는 나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한. 내 매일의 삶 또한 희망과 기쁨으로 이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1994> |
|
|
|
|
사진과 그림 |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