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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42 호
단기 4341. 11. 29 (음력 11. 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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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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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2009 영남일보 문학상
영남일보가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참신한 인재를 찾습니다. 그동안 역량있는 신인발굴을 통해 한국 문학 활성화에 기여해온 영남일보 문학상은 2009년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시와 단편소설 2개 부문에서 작품을 공모합니다. 앞으로 한국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역량있는 신인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응모부문 및 시상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기준 70매 안팎)= 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700만원)
△시(3편 이상)= 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500만원)
◇응모요령
△마감=12월11일(목) 오후 5시(11일자 소인 유효)
△보낼 곳=대구시 동구 신천동 111번지
영남일보 문화체육부 문학상 담당자 앞(우편번호 701-750)
△발표=영남일보 2009년 1월1일자 신년호 지면
△심사위원=영남일보가 위촉한 문인들이 예심과 본심을 맡으며, 심사위원 명단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
◇유의점
△응모작은 미발표 신작에 한합니다. 동일한 작품을 타사에 이중으로 응모하거나 표절할 경우 당선이 취소됩니다.
△응모원고 겉봉투에는 '영남일보 문학상 응모작품'과 '응모부문'을 굵은 글씨로 적어주십시오.
△원고 첫 페이지에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휴대폰 포함)를 적고, 필명일 경우 본명을 반드시 밝혀주십시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단편소설의 경우,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원고량을 첫 장 위쪽에 적어주십시오.
△응모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문의 (053)74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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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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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행하는 데는 나중이라는 말이 필요없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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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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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펄이
사람이름
광해군이 쫓겨나고 폐세자와 폐빈은 교동도로 귀양 갔다(위리안치). 인조 1년(1623년), 폐세자가 가시울타리 밑으로 땅굴을 파 밤중에 달아나다가 나졸에게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졌다. 막덕을 문초하니 두 사람이 여러 번 죽으려 하였으며 서울에서 가위와 인두를 보내오자 이를 보고 굴을 뚫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징 등이 유희분의 집 종 ‘이귿수’의 종적이 의심스럽다며 잡아와 국문하였다. 그를 신문한 기록(공초)에는 “폐동궁이 굴을 파고 탈출하려 하니 부디 두모포 뱃사람 ‘더펄이’(加八里)에게 배를 가지고 갑곶으로 오라고 권채가 말했다”고 하였다.
널리 쓰인 이름인 ‘더펄이’를 달리 ‘덥퍼리’라고 적은 문헌도 있다. 털이나 머리카락이 더부룩하여 출렁이듯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더펄더펄’이라고 한다. ‘더펄가히/더펄개’(尨)는 ‘긴 털이 더부룩하게 더펄거리는 개’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자 尨(방)은 삽살개 뜻도 있다. 고장에 따라서 귓바퀴 위가 아래로 처진 사람을 ‘더펄이’라 한다. 달리 침착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사람, 스스럼없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도 ‘더펄이’라고 한다.
더펄이와 비슷한 이름에 ‘더벅이·더벌이·더부러기’도 있다. ‘더펄개’의 모습 ‘더펄이’는 ‘더벅머리’와 통한다. ‘더벌이’는 ‘떠버리’인 듯도 하다. ‘더펄’을 밑말로 한 이름에 ‘더펄쇠’도 있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두리뭉실
'대선자금 720억원'이니, '십수억원의 경선자금'이니 서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액의 돈을 두고 검은돈이네 깨끗한 돈이네 정치권이 상당히 시끄럽다. 구차한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생활자금 몇 백만원을 융통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서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면 액수가 너무 커서 설사 이번에 '두리뭉실' 넘어간다고 해도 두고두고 말썽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말이나 행동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분명하지 않다''모나지도 않고 아주 둥글지도 않게 둥그스름하다'를 이를 때 흔히 쓰는 '두리뭉실하다''두루뭉실하다''두리뭉술하다'는 모두 표준어가 아니다. 네 글자 전부 'ㅜ'가 들어간 '두루뭉술하다'가 바른말이다. '두루뭉술한 것' '언행이나 태도·성격 등이 두루뭉술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사도 '두리뭉수리' '두루뭉시리'가 아니라 '두루뭉수리'가 표준어다. '두루뭉술하다'(형용사)를 부사어로 쓰려면 '두루뭉수리로' 또는 '두루뭉술하게'로 하면 된다.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일 처리를 해서야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그 친구, 두루뭉수리라서 그냥 사귀는 데는 좋을지 모르나 중요한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운 사람이야.' 무슨 일을 하든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 어물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럿거라, 엊저녁, 옜소, 밭사돈
초봄으로 접어들며 꽃샘바람이 차갑지만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다. 마치 '추위야 물러가라'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겨울바람이 미처 꼬리를 감추기도 전에 함성처럼 피어나는 산수유는 봄의 길라잡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옛날 높은 벼슬아치들이 행차할 때는 길라잡이가 앞에서 길을 트기 위해 '물렀거라'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길라잡이가 외치던 벽제소리 '물렀거라'는 요즘에도 '더위야 물렀거라', '추위야 물렀거라'에서부터 '피로야 물렀거라', '참고서야 물렀거라'에 이르기까지 광고 문구에 무척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글로 쓴 걸 보면 '물렀거라' 못지않게 '물럿거라'로 한 것도 많다. 둘 중 '물렀거라'가 바르게 표기한 것이고 '물럿거라'는 잘못된 것이다. 이 둘은 소리가 같게 나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물렀거라'는 '물러 있거라'가 줄어든 말이다. 한글 맞춤법은 줄어든 말에서도 본딧말의 형태를 유지하는 쪽으로 돼 있다. '물렀거라'의 받침을 'ㅅ'으로 쓰지 않고 'ㅆ'으로 쓴 것이 그 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딧말과 준말의 관련성을 보여줄 수 있다.
'어제 저녁'이 줄어서 '엊저녁'이 되고, '바깥사돈'이 줄어 '밭사돈'이 되며, '여기 있소'가 줄어서 '옜소'가 되는 것도 같은 사례다. '엊저녁'의 경우 '엊'에 '어제'의 'ㅈ'이 받침으로 살아있고, '밭사돈'은 '밭'에 '바깥'의 'ㅌ'이 살아있으며, '옜소'의 경우도 '있소'의 'ㅆ'이 '옜'에 살아있음을 볼 수 있다.
이같이, 이 같은
벌써 경칩이다. 경칩은 땅속에 들어가 동면하던 동물들이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시기다. 그러나 이맘때는 봄이 왔다고 느낄 만큼 따뜻하다가도 갑자기 겨울이 되돌아 온 것처럼 쌀쌀하다. 앞으로 한두 차례 '이같은' 추위를 더 겪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이' 양력 3월엔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곧 날씨가 많이 풀리고 봄기운이 돋으며 초목이 싹튼다. '우수·경칩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말이 있다.
앞글에서 나타난 '이같은'과 '이 같이'는 일반인이 띄어쓰기를 잘못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같은'과 '이같이'로 써야 옳다. '같은'과 '같이'는 그 뜻이 비슷해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릴 때가 많다. '같은'은 형용사 '같다'의 활용형이므로 앞말과 띄어 써야 한다. 반면 '같이'는 체언 뒤에 붙어 '앞말이 보이는 전형적인 어떤 특징처럼의 뜻(그녀는 마음이 얼음같이 차갑다)을 나타내거나, 때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앞말이 나타내는 그때를 강조할 때(그는 매일같이 지각한다)'사용하는 조사이므로 붙여 쓴다.
그러나 조사 '와(과)' 뒤에 쓰여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함께'(친구와 같이 사업하다)나 '어떤 상황이나 행동 따위와 다름이 없이'(선생님이 하는 것과 같이 하세요)의 뜻일 때는 부사이므로 띄어 쓴다. 간단히 정리하면 우리말에 '같은'이란 조사는 없다. 그러므로 '같은'은 어떤 경우에도 띄어 쓰고, 명사류(類) 바로 뒤에 오는 '같이'는 대부분 조사이므로 붙여 쓴다고 기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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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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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을 - 정진규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다 가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으로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 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 센다 마지막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 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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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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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홀씨되어 - 김차복
내 어릴적 탯자리 떠나면서 잊었어 얼어붙은 겨울강을 거룻배로 건너와서 피어 난 꽃잎 사이로 봄날을 열어보인다.
달빛이 남겨놓은 언약의 말 한마디 눈물을 애써지우며 성숙을 알았느니 첫 정을 길어올리며 오늘을 비워보네.
뻐꾸기 울음소리에 흔들리는 둥지여 돌아서는 네 모습에 연소하는 사랑아 허공 속 기나긴 다리 홀씨되어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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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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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아미 맵다 울고
매아미 맵다 울고 쓰르라미 쓰다 우네 산채를 맵다는가 박주를 쓰다는가 우리는 초야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지은이> 이정신(李廷藎) 자세한 연대미상. 자는 집중(集仲), 호는 백회재(百悔齎). 조선 영조 때의 가인으로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시조 13수가 전한다.
<말 뜻> 매아미 : 매미. 쓰르라미 : 참매미 비슷한데 몸집이 작고, 저녁 무렵에 풀밭에서 애처롭게 운다. 산채(山菜) : 산나물. 산에서 나온 나물. 박주(薄酒) : 변변치 못한 술. 술을 낮추어서 말할 때에 쓰는 말. 초야(草野) : 시골의 궁벽한 곳. 벼슬을 안하고 시골에서 사는 것을 초야에 묻힌다고 한다.
<감 상> 매미는 매암매암 맵다 울고, 쓰르라미는 쓰르람쓰르람하며 쓰다고 운다. 고추 양념의 산나물을 맵다고 하느냐, 텁텁한 막걸리를 쓰다는 것이냐. 우리는 궁벽한 초야에 묻혀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매운지 쓴지 모르고 달게 먹으며 살고 있단다.
속세를 떠난 듯 세속적인 고락을 초월하고, 또 세속적인 부귀와 영화를 한바탕의 꿈으로 돌린 채, 얽매인 데 없이 유유히 소박한 삶을 즐기던 옛 사람의 담담한 생활 철학이 돋보이는 느낌이다.
매미와 쓰르라미의 소재도 좋거니와 그 울음 소리의 비유가 묘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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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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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생태주의는 환경문제의 대안인가
환경문제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한 기술개발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가. - 안은수(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성균관대 강사)
1998년 한국의 여름을 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폭우로 이어진 긴 장마이다. 이 비는 특히 중부, 경기 지방과 충청 지방에 집중적인 피해를 주었다. 저녁 9시 TV 뉴스에서는 집이 무너져 순식간에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의 허탈한 모습,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한 사람들의 얼이 빠진 얼굴, 도로가 침수되고 무너져서 고립된 주민들의 황당한 현실이 속속 보도되었다. TV 화면에서 본 처참한 영상들과 그 와중에도 그치지 않고 쏟아붓는 듯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 못 이루었던 그 밤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후 최초라는 설명이 붙은 강우량에 관한 기사와 그 피해사례들이 연일 신문 머리기사로 올랐다. 무섭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이나 동유럽, 미국 남부 등에서 들려온 소실들도 우리의 걱정을 더하게 했다. 중국에서는 양쯔 강의 범람을 우려하게 폭우가 사람들을 긴장시켰으며 일본과 방글라데시에서도 홍수피해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보루네오 섬에서는 아직 건기에 해당한다는 8월에 폭우가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편 동유럽과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섭씨 40도를 웃도는 폭염이 사람들의 생존을 방해하였다. 모두가 정상적인 기상상태에서 벗어난 현상들인 동시에 무서운 피해를 가져온 재해였다. 이제 우리는 또 얼마나 '이상한' 자연현상과 만나게 될지 불안하기 그지 없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는 기상이변은 지구촌 생태계 파괴가 그 원인이라 한다. 우리는 한 삶도 지구라는 생태계를 떠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지구에는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 미생물 등 수많은 생명체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구는 수많은 생명체 공동의 환경이라 하겠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는 환경문제는 바로 생태계 파괴로 인한 생명체 공동의 환경이 악화되는 현상이다. 환경문제는 생명체의 생명유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람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무엇이 발전인가?
고대문명의 유적들은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원인에 의해 훼손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천 년 이상의 세월 동안 마모되었던 것보다 최근 40년 동안의 훼손이 훨씬 심각하다는 보고이다. 이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반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런 식으로 훼손되는 것이 유적만은 아닐 것이라는 유추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를 거치며 진행되었던 산업화, 기계화의 물결은 서구에서 출발하였지만 곧 세계적인 추세로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지구촌 사람들은 다양한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음으로써 더욱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구 생태계의 균형 파괴를 증명하는 기상이변과 그로 인한 자연재해, 오존층 파괴로 대표되는 대기오염, 대량샹산의 수단으로 사용된 농약 등으로 인한 먹거리의 오염 등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감에 따라 그것에 대처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강화되고 있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한 기술개발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환경파괴문제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어떤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대두되었다고 하겠다.
생태학(ecology)은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kios'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y'의 합성어다. 문자 그대로 지구에 공존하는 사람, 동물, 식물, 미생물의 거주지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담고 있는 지구라는 환경은 인간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 생태학은 지구 생태계 전반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생태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지구환경이 생명체들의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경고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기 맥락에서 진행되었던 기술개발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다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 동시에 환경파괴, 곧 생태계 균형을 파괴하는 부정적 효과를 산출하여 인간은 물론이고 인간과 공존하는 지구 생태계에 속한 생명체들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처방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지구의 구성원들은 모두 함께 죽어가는 길로 향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멸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을 진정한 발전이라 볼 수 없다면, 지금까지 발전이라는 덕목을 내세워 추진되었던 무분별한 개발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을 추진하는 과정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세계관)에 기초한 것이어야 하겠다.
더불어 사는 지구환경
서양의 근대 과학은 16~17세기 기독교권의 유럽에서 과학혁명의 결과로 출현한 문화적 산물이다. 과학혁명을 지지하였던 정신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대표된다. 이 자연관에 기초한 이후의 산업화과정은 전세계적인 추세였고, 자연환경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기여해야 하는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된 기술의 발달은 자연훼손과 자원의 고갈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는 생태계 균형의 파괴였다. 이 같은 현상은 그 연원이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우리도 서양의 근대 과학이 마련한 토대 위에서 근대화 내지 현대화의 길을 열었다.
"상황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생각은 "주역"에서 보인다. 어떤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다면 그 지점은 다른 쪽으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고, 전화의 방향이 좋은 쪽인지 그 반대인지는 주체의 의지와 행위에 달렸다고 한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상황을 읽어 내고 그것에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의 장면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고 그 결과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생명의 위협이라는 상황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한계상황이다. 다시 말해 이제 우리는 반전의 계기가 되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을 전화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무분별한 기술개발의 결과인 생태계의 파괴를 회복하여 건강한 지구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대표된다. 하나는 과학기술 낙관론자들의 입장이다. 이들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이 현재의 환경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 처방 역시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더 발달된 기술로서 현재 드러난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과학만능주의라고도 한다. 이것과 다른 또 하나의 주장은 현재의 환경문제가 전적으로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것을 부정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들이 생태주의자들이다.
생태주의자들은 인간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법칙에 순리적으로 따름으로써 자신이 그 일부가 되는 전체 생태계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생태계의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기본입장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현대의 환경위기가 자연을 단지 대상물로 파악하는 왜곡된 자연관에 기초하여 무분별하게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구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환경문제의 해결책이라고 한다. 카머너가 현재의 생산기술을 생태학적 요구에 되도록 가까이 적응하도록 다시 계획할 필요가 있으며 대부분의 현존 농업, 공업, 교통 체계를 이 계획과 조화되도록 재조직해야 한다고 하고, 슈마허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대체기술, 적정기술을 채택하면서 생태계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경제의 규모를 축소하자고 주장한 것이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 고유의 생각들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되는 두 개의 입장에서 과학낙관주의의 주장은 자연상태를 파괴하지 않는 기술개발이 과연 가능하겠는가를 물었을 때 역시 회의적인 답을 낼 수밖에 없으므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오늘날 부각되는 환경문제의 개선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해답을 줄 수 있는 생각으로 생태주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두 개의 주장은 모두 서양에서 정리된 생각의 틀이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를 초래한 사회구조의 형성에도 서양의 근대적 자연관이 개입되어 있으며 그것을 치유하자는 논의 역시 서양에서 수입된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반영하는 하나의 술어이다. 그런데 인간은 전체 자연계의 한 구성원이며 인간을 포함한 세계는 서로 연관된 하나의 전체라는 생각은 동양 자연관의 핵심이다. 세계를 서로 연관된 것으로 파악하는 사고는 유가, 도가, 불가 등 동양의 사유를 대표하는 사상 안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유가의 천인합일적 사유는 자연과 인간을 같은 원리를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생각이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는 대자연의 원리가 인간 안에도 똑같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덕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란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 주려는 마음이며 더 나아가 잘 살도록 해 주고픈 마음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대자연의 핵심원리는 살려 주려는 마음이다."라고 했던 것과 통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은 어떤 한편이 우위에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 각각은 같은 원리를 가졌으며 전체가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서로 잘 살도록 해 주는 행위를 통해 전체 세계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으며, 그 안에 사는 인간도 아름다운 틀 속에서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가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사유이다. 노자가 강조했던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개념은 절대적 가치 아래에 있는 개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 이유를 갖는 개체를 상정한 것이다. 장자가 말한 제물도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돈 많고 잘생긴 사람만이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다른 동식물에 우선하는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세계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생명체는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이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가 방해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도의 세계이다.
불가의 승려들은 개미 한 마리의 생명도 무심히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신발 하나 발걸음 하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를 한다. 인연으로 결과됨 모든 존재는 상호 전화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모두 연관되어 있다. 불가에서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자연을 연관 속에서 파악하였던 것이다.
생태주의는 서양의 산물이므로 외면하자는 의견은 과학적 태도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참고해야 할 덕목들이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색이 자신들의 전통 안에서 유용한 자료를 찾아 내는 맥락에서 동양적 사유를 참고한 요소가 부가되고 있다는 점은 정확히 읽어 내야 한다. 요컨대 자기 정체성을 견지한 대안 제시였다는 말이다. 한국의 환경문제는 전세계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만 한국이라는 특수상황이 들어 있다. 따라서 문제해결의 방안도 우리 안에서 우리 식으로 모색해 보아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지구환경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환경문제는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국가간의 대화와 협력이 어떤 문제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 선진국이 기술개발 과정에서 제3세계 국가를 효율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을 자국이 아닌 지역으로 이전하여 일차적인 효과를 보았다 해도 결국 환경오염은 부분적으로 고립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명확하게 이전될 수 없다는 인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모든 국가가 한 테이블에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하는 문제라는 데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 국가 안에서도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계층과 더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계층이 나뉘듯이 국가간에도 그와 같은 역학관계가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파괴의 문제는 전 지구적인 사안이고 이것은 어느 한 지역의 노력으로 개선될 수 없다는 점이 자명하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들어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동양적 자연관을 반영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개발
모유를 먹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최근의 보도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생존 위협의 상황을 상기하게 한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 무방비 상태로 숨을 쉬어도 되는지 불안하다.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보장해 준 과학기술이 오늘의 환경문제를 초래한 주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과학기술의 발달을 정지시키거나 이전의 원시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환경문제라는 두 거인의 충돌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산술적으로 계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환경문제를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당면의 과제이다. 이와 같은 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생각을 그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다.
첫째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본적이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추진하는가는 그 사안의 향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은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근대 자연관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오늘의 환경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요구된다. 유가나 도가, 불가 등에서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는 생각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도록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로 대표되는 동양의 자연관은 우리의 전통시상이지만 한동안 잊어버렸던 생각들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한 구성원이며 전체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어야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안녕도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관점이다. 이것과 더불어 생태주의자들의 주장은 새로운 세계관의 모색에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세계관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일 텐데, 새로운 자연관에 기초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우리 나라에서 전문 환경운동단체가 조직되어 그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1982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이다. 그 이후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1986),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1987) 등이 조직되었으며 통합단체인 '공해추방운동연합'(1988)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한살림 운동'이나 '자연의 친구들' 등의 모임이 생기면서 환경운동의 장이 확대되는 추세이다. 소비자보호단체나 경제정의실현연합 등의 시민 단체에서도 환경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시민운동 단체를 포함한 여러 단체들의 역할은 앞으로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환경교육은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문제의 중요함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환경교육은 유아교육에서부터 반영되어야 한다.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생태계의 균형 유지는 인간중심의 개발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야 한다. 공존의 원리를 무시하고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태도에 대해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은 어렸을 때부터 축적된 학습에서 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개인에 대한 환경교육으로 학습된 사람들이 힘을 모을 수 있을 때 잘못된 방향의 개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건강한 견제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 예문서원. 김명자, "동서양의 과학전통과 환경운동", 동아출판사. 야마다 게이지, "주자의 자연학", 통나무. 한국불교환경교육원 엮음,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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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4. 운명을 점치는 스님
당뇨병 이야기
“스님, 차라리 죽고싶은 심정입니다.”
자비사 신도 중 조금 연세가 드신 어느 보살이 하루는 내게 이렇게 푸념을 하셨다.
“아니, 왜요? 그러고 보니 안색이 퍽 안 좋으십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내가 놀라서 묻자 그 보살은,
“당뇨가 심해서요....”라며 힘든 표정을 지어보였다. “보살님, 저도 당뇨병을 얻은 지 2십 년이나 됐습니다. 수치도 4백이 넘게 나오고요. 의사 말로는 퍽 중증이라고 하지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보살은 놀란 눈으로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제가 보기엔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고 건강하게 보이시는데요. 전 수치가 겨우 2백인데도 이리 힘든데.... 스님, 제게 그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시지요!” “비결이란 게 있다면 제가 병을 잊고 지낼 만큼 바쁘게 사는 것이겠지요. 바삐 움직이다보니 미처 병을 의식하지 못하는 게지요. 보살님도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보십시오. 병도 저만치 달아나 버릴 겁니다.”
나도 평소에 쉬 피로를 느끼고 목이 자주 마르며 때때로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치아도 성한 게 없을 정도로 자꾸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병원에 가서 따로 치료를 받은 적은 거의 없다. 특별히 좋은 약을 먹거나 자주 병원 치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당뇨병은 만성질환이라 치료가 쉽지 않기에 식사를 잘 조절해서 병이 호전되기만 바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 병을 갖게 된 것에 늘 감사하고 기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건강할 때보다도 더 왕성하게 활동하고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남이 들으면 이상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더 열심히 활동하는 것만이 병을 이기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조금만 게으르고 나태해도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아지고 자꾸만 눕고 싶어지는 때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할 일을 찾아서 바삐 움직이다보면 통증도, 아픔도 모두 잊게 된다. 그러니 병을 견디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게 된다. 열심히 살아야 병을 이기고 견디는 힘을 얻는다.
‘보왕삼매론’을 보면,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람은 병이 들어야 비로소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또 건강할 때는 미처 몰랐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느끼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건강할 때는 활동하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병을 갖고 나서 병을 견디기 위해 더 열심히 부지런히 활동하면서 사는 기쁨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또 몸이 아프니 비로소 병 앞에 무력한 자신을 느끼게 되고 겸허한 마음으로 지내게 된다. 건강할 때보다 더 고마운 마음으로 활동하는 기쁨을 몇 갑절 더 느끼고 사는 보람도 얻으니 이 모두 병으로 인한 깨달음이다. 병이란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일을 찾아 즐거움을 얻으면 병은 자연히 낫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당뇨병을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병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 더욱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 서면 스스로 낮아지는 ‘하심’수양 또한 절로 이루어지니 병이란 내게 얼마나 좋은 스승인가!
부산대 내과에 계신 김용기 박사는 십 년 전 이 당뇨병으로 해서 인연을 맺게 된 분이다. 당뇨 전문의로 부산에서 제1인자이신 김 박사는 항상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는 천주교 신자이시다. 어쩌다 만나면 늘 한결같이 내 건강을 염려해주고 걱정을 해주는 고마운 분이다.
“스님, 병원에 자주 들르셔야지요. 당뇨 수치가 꽤 높습니다!”
만날 적마다 이렇게 나를 나무라시곤 한다. 내가 내 병에 무신경하다 보니 병원에 가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병원에 자주 못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아예 병을 잊은 채 속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서다. 막상 수치를 보면 더럭 겁이 나고 걱정이 되니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김 박사는 이런 내가 걱정되는지 몇 번인가 당뇨 수치를 재는 기구를 선물한 적이 있다. 그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내 건강을 체크하고 관리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곤 하지만 역시 그때뿐이다. 일전에 천재숙 신도회장, 김용기 박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김 박사에게 늘 아픈 신도들 봐달라는 부탁만 하고 사는 나이기에 조촐한 저녁 한 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식사 도중 김 박사는,
“저도 의사이긴 하지만 어떤 때는 의사라는 직업이 냉정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에 의사에겐 항상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이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중요한 거지요. 그런데 환자는 아파서 죽어가는데,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고 의사 자신은 감탄을 하며 기뻐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이 어찌 슬픈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매우 인간적이고 솔직한 토로를 했다. 자연히 우리의 화제는 인간의 삶과 죽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김 박사님,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있다면 이 사실을 본인에게 알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모른 체 내버려두는 게 좋겠습니까?” 내 질문에 김 박사는 진지하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불치병 선고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환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고서 좌절하게 되지요. 곧 분노로 이어지고 깊은 좌절로 인해 방황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죽음 선고를 받고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하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알리는 편이 그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삶에 따라선 이를 알려서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준비하게 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이는 참으로 신중해야 할 어려운 문제입니다, 스님.”
나는 세상사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의사가 불치병인 암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당신은 3년밖에 못 삽니다.’라며 죽음을 선고했다. 환자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더니 병세가 악화돼 몇 개월이 안 돼서 사망했다고 한다. 꼭 나아야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꺾이는 순간, 삶에 대한 욕구나 희망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이나 불치의 병을 얻어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의 자세에 따라 죽음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편히 갖고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면 병도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다. 반면 마음에 슬픔과 분노와 걱정을 담고 살면 죽음도 더 쉽게, 더 빨리 자초된다고 믿는다. 생노병사의 괴로움은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 누구든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 더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자. 그러다 보면 병도 고통도 저만치 멀리 가게 되고 죽고싶은 마음도 사라진다. 오늘 이 순간,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바쁘게 움직이자. 이것만이 스스로 병을 이기는 길이요, 죽음의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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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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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10. 임꺽정의 반란 : 부패한 봉건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농민 반란
누군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역사적, 사회적 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구조적 모순으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여 빈농이나 빈민, 유랑민, 또는 도적으로 몰락해갔는가이다. 가장 큰 원인 제공은 역시 당시 정치를 맡고 있던 관료들과 외척들에게 있다는 시각에 일단 분석의 초점을 맞춰놓고 배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기묘사화가 사림들에게 끼친 악영향은 너무 커 보수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는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조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향리에 뿌리를 내려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꾸준히 후진을 양성하여 지방에서는 사림들이 계속 증가하였다. 반면에 중앙에서는 기묘사화 이후 권신들 사이에 격렬한 정치 싸움이 벌어졌다. 기묘사화로 정권을 장악한 남곤, 심정 등이 몰락한 후 김안로가 득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를 폐출시키려다 오히려 실각당하였다. 이때가 1537년(중종 32년)이었다. 김안로 실각 이후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통해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씨의 몸에서는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가 원자를를 낳고 바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왕비를 들인 것이다. 장경왕후의 동생은 윤임이고, 문정왕후의 동생은 윤원형.윤원로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숙청되자 그에게 당해 정계에서 쫓겨났던 윤원형 등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에 따라 두 윤씨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두고 엄청난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때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불렀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순리대로 왕위는 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런데 인종은 성격이 조용하고 욕심이 없는 편이었으며 효심도 매우 깊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중종이 병상에 있을 때 지나치게 간호에 신경을 쓰다가 자신도 병을 얻어 언제 사망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인종은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 등의 신원을 회복해 주었다. 이러한 인종의 조치는 자신이 학문을 좋아하여 건강이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다시 왕도정치를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이러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사림들을 대거 기용하기도 하였다. 물론 중종 말년에도 주리론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비롯하여 이황 등이 등용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포부를 펼쳐보지도 못한 채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1545년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숨을 거두었다. 이가 바로 명종(1545-1567)이다. 그런데 문제는 왕의 나이가 너무 어린 데에 있었다. 명종이 즉위할 때 나이가 불과 12살이었다. 따라서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청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윤원형.윤원로 등 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아직도 대윤인 윤임 일파가 건재했기 때문에 소윤 일파는 이들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안정적인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 이들을 반역죄로 몰아 윤임 등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그리고 윤임 등을 따랐던 사림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이로써 윤원형 등은 반대파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이다.(1545년) 그리고 윤원형은 자기의 형인 윤원로마저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하여 을사사화 이후 윤원형 일파의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553년(명종 8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명종은 이를 기회로 외척을 제거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고 이량 등을 기용하였으나 이량은 오히려 이것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파벌을 조성하고 사림들을 외직으로 추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량은 사화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심의겸 등의 밀고로 좌절되어 숙청당하였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윤원형과 결탁하여 왕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승하함으로써 윤원형의 횡행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왕후의 죽음으로 크게 위축된 윤원형은 박순 등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숙청당하였던 것이다. 이후 사림들은 다시 중앙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사림파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상 간략하게나마 왕권을 둘러싼 당시 왕실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중앙 동향을 살펴본 이유는,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지방에 대한 통치가 소홀해져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성을 부렸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즉, 당시 임꺽정의 반란이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은 극심한 왕권 약화 사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중앙의 정치가 구심점을 잃으면 지방 관리들은 불법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또한 정치의 부재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문란해져 통제 기능이 크게 축소되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배경은 이외에도 제도적인 취약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조 때 실시한 직전법이 명종 때에 폐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관리들은 녹봉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이에 관료들은 사리사욕의 충족을 위해 토지의 개간, 매입, 약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토지를 넓혀나갔다. 16세기에는 토지에 대한 사유권이 확립되어가는 시기였는데, 이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일반 농민들의 사유지를 부당한 방법으로 겸병하기 시작하였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무전 농민이 되어 도적이 되거나 유랑민으로 떠돌기도 했다. 게다가 놀고 있는 토지에도 세를 부과하는 진전세에 시달려 일방적으로 수탈당해야만 했다.
토지겸병의 예를 하나 들어보면, 16세기 중엽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 대부분이 권력자들의 소유지가 되어 나무값이 터무니없이 오르게 되었는데 나무 한 바리에 쌀 한 말을 주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윤원형의 폭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토지겸병과 더불어 16세기 농민들을 괴롭힌 것은 공납(또는 대납)이었다. 왕실과 관료들의 사치가 날로 더해가 부과되는 공물의 양은 끝도 없이 늘어만 갔다. 그런데 수납 과정에서 폐단이 생겨 그전에는 현물로 바치던 것을 상인들이나 지방 관리들을 통해 대납하게 하였는데 그 대가로 착취를 일삼아 중간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각종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는 사족들의 개간에 강제 동원되어 노동 착취를 당하기 일쑤였고 군역에 시달리던 장정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의창제도 그 기능을 잃어 상평창이 이를 맡게 되었는데, 이 역시 제구실을 하지 못해 빌려간 식량의 1할을 내던 이자가 점점 고리대로 변하여 빈농들은 쌓인 이자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제도의 부패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임꺽정의 반란이 있기 전부터 이미 도적떼들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위와 같은 사회적 모순이 낳은 결과였다. 임꺽정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16세기 중엽의 조선은 부패해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1559년은 윤원형의 외척 세력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였다.
농민 봉기의 집약체, 임꺽정의 반란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명종 14년)에서 시작되어 1562년 1월(명종 17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다른 민란에 비해 볼 때 한 인물이 이끈 난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임꺽정의 활동 상황에 대해서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로 이 반란의 역사적 의미와 후대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위에서 본 사회적 모순이 빚어낸 농민들의 몰락으로 임꺽정이 전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도적들은 들끓고 있었다. 연산군의 집권 시기인 15세기 말을 전후하여 산발적인 저항이 지속되었는데, 농민들은 손에 쟁기를 드는 대신 죽창과 칼을 들고 봉건체제에 도전하였다. 명종대에 이르러서는 민란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도적으로 몰락한 농민들의 봉기가 끊임없이 사방에서 진행되었다. 유민들의 봉기는 경기, 전라, 강원, 황해도 등 중남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지역적 봉기가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이 임꺽정의 반란이다. 농촌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자 임꺽정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하여 기존의 유랑민들과 도적들을 규합하여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임꺽정의 반란은 특이하여, 관군과 전면전을 벌이기보다는 무장 게릴라 활동을 통해 평소 농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온 권문세가나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이것을 양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행위를 펼쳤다. 이러한 점이 임꺽정의 봉기가 오래 지속된 원인일 수도 있다.
그는 구월산을 본거지로 삼고 주변 고을의 관리나 양반집을 강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는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옥에 갖혀 있는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임꺽정 등이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을 지지하여 내응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관에서 잡으려 하면 이들을 통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나기 일쑤였다. 중앙정부에서는 임꺽정의 반란군이 극성을 부리자 개성 등 황해도 일대의 관리를 거의 무관으로 교체하는 등 수습책을 마련하였지만 그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뿐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신출귀몰하는 임꺽정의 무리를 정탐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미투리를 눈 위에서 거꾸로 신고 다니는 바람에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구월산에 소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선전관은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오히려 반란군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다. 임꺽정은 관리를 사칭하여 군현에 자유롭게 출입하는 등 대낮에도 당당하게 활동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 관료는 이와 관련하여 명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도적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져 심지어는 관호를 사칭하고 여러 마을에 출입하기를 꺼림김 없이 하여, 수령 중에는 알지 못한 채 대접한 자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임꺽정 등은 개성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서울과 평양 내부에도 자유로이 왕래하고 다녔다고 하니 이들의 활동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임꺽정 등은 대낮에도 공물 등을 싣고가는 수레를 털어대니, 관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1559년(명종 14년) 개성 근방에서 임꺽정이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이 군인 20여 명을 데리고 임꺽정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여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반드시 잡으라는 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명종은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면 엄벌을 내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작은 도둑 무리만 잡았을 뿐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서울에까지 임꺽정 등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은 1560년 8월 무렵이었다. 서울에 출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통방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며 달아나 부장을 맞혔다. 그런데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이 잡히고 말았다. 정부는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중앙정부는 금교역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소굴을 두고 활동 영역을 넓혀 더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정부를 괴롭혔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아 활동 자금을 확보하여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자주 출입을 하였다. 이들은 이때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수법으로 관리나 문벌세가의 이름을 사칭하거나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낼 정도였으니 임꺽정의 반란군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활동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예이다. 정부는 오가작통법(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그 책임자가 감시하는 제도를 말한다.)을 통하여 이들을 검색하려 했으나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해 12월에 엄가이라는 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다. 이 사람이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었다.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다. 또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해 알아내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은 뒤 무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 그때 반란군은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에 대항하여 부장 연천령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명종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 또한 평산 북면 어수동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임꺽정의 한 부대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결과는 관군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백주에 임꺽정 휘하의 무장단이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 이 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신문을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 강려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 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1561년 9월에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 한온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하였다. 이렇듯 관군의 눈을 피해 신출귀몰하던 임꺽정은 정부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결국 사로잡혔다. 체포된 지 약 15일 후에 처형당함으로써 임꺽정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한 사관은 임꺽정의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 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이 절박해도 아침 저녁 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의 반란은 현실 변혁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반영하여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민중들이 임꺽정의 무장단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것은 중세 봉건적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임꺽정의 반란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이 축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명종은 왕권 회복의 기미를 잡을 수 있었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이유가 바로 외척들의 불법적인 횡행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후 사림파가 대거 중앙에 진출하였다고 하지만 사회적 모순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형태로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 다음에 볼 '정여립의 반란'이다. 바꿔 말해서 정여립의 반란은 임꺽정의 반란을 토대로 일어났던 지식인의 저항이었다.
임꺽정의 반란 이후 정세
16세기 조선 사회의 특징은 사림파의 득세라고 볼 수 있다. 연산군 때의 무오, 갑자사화, 그 뒤의 을사, 기묘사화 등을 거치면서도 사림파는 꾸준히 중앙에 진출하였다. 특히 사림들은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을 설립하여 세력 기반을 확장해 나갔다. 원래 향약과 서원은 중앙 중심의 교육과 통치 형태를 지양하고 주자학의 이념에 따라 교육, 제사, 풍습 등을 시행한 지방자치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도 이를 권장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게 되었다. 그런데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되고 훈구파와 거의 대등한 권력을 잡게 될수록 나중에는 이 향약과 서원이 양반 중심의 통치 기구로 전락하여 새로운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명종 통치 기간인 16세기 중엽에는 사족들이 토지 겸병을 하여 대지주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농민들의 피해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향촌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만 갔다. 무엇보다도 사림파가 중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이들 사이에 이념적 대립이 생겨 파벌이 형성되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래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소인과 대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성리학자들은 서로를 소인이라고 하면서 분당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서 분당이다. 이로 인해 19세기 초 세도정치가 들어설 때까지 조선 특유의 붕당정치가 약 250년간 지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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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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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음악의 향기 속에
1 매일 미사 때마다 성가를 부르고, 일을 하면서도 가끔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내 나름대로는 음악의 향기 속에 산다며 자랑하곤 한다. 특히 주일이나 축일 미사에 우리가 함께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아름다움,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끊일 듯 이어지는 잔잔한 그 음률은 바다보다는 호수를, 푹풍보다는 미풍을 연상케 한다. 오늘은 더욱 정성껏 노래를 부르며 나의 삶도 하나의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은은하고, 이웃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2 슬플 때는 눈물로 기쁠 때는 미소로, 외로울 때는 조용한 위안으로 음악은 사람을 사로잡는 큰 힘이 있나보다. 나도 먼 나라에서 <가고파>라는 노래를 여럿이 부르다가 울던 일, 산 노래를 듣다가 산이 그리워 울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요즘도 어떤 곡을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 보면 음악은 영혼을 건드리는 신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새롭다. 칼릴 지브란의 말대로 '오, 음악, 그대의 심연에 우리의 마음가 영혼을 가라앉히고/ 그대는 우리에게 귀로 보기를 가르쳤으며 마음으로 듣기를 가르쳤다'라고 나도 고뱍하고 싶구나
3 좋은 음악을 들을 땐 너도 나도 말이 필요없지 한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강으로 흐르는 음악은 곡 기도가 되지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이해하면 사랑의 문이 열리지 낯선 사람들도 음악을 사이에 두고 이내 친구가 되는 음악으로 가득 찬 집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향기 날리며 고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
광주에서 사이 좋게 고전음악실을 꾸려가는 두 처녀에게 나는 이런 메모를 적어 보냈다
4 수도원의 종소리, 기도소리가 내겐 늘 음악으로 살아온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새소리, 시냇물소리도 그대로 고운 음악이며, 아기의 천진한 웃음 소리, 서로 사랑하는 이들끼리 조용히 속삭이는 사랑의 음성 역시 아름다운 음악이다. 나는 오늘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의 음악을 들었다.
잠에서 개어나라 멈추지 말고 흘러가라 좁은 마음 넓혀서 네 마음과 마음 사이로 사랑이 파도치게 하라 푸르디푸른 음악으로 출렁이며 자꾸만 일어서려고 했던 나의 아침 바다여
5 봄에는 풀루트나 피아노 곡을, 여름엔 클래식기타 곡을, 가을엔 바이올린 곡을. 겨울엔 첼로 곡을 들으면 어떨까? '수녀님, 얼마나 더 피아노 앞에서 울면 좋은 피아니스트가 욀까요? 넉넉한, 맘껏 나눌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오늘은 파리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은주의 편지를 읽으며 쇼팽의 전주곡을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피아노 연주로 들었다. 음악에 투신한 사람의 고운 사색이 엿보이는 편지의 다음 구절을 나는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제가 비워 두었던 방은 먼지투성이였습니다. 3개월 동안 치지 않았던 피아노는 소리도 멍해져 있었고, 음들도 서로 들리지 않아서인지 삐걱거렸습니다. 그런데 조율사 아저씨를 거치지 않고서도 며칠 제가 그 위에서 연습을 하고 나면 소리도 다시 제가 원하는 소리가 되어 나오고, 도와 레 사이도 더 친해져서 서로 음들을 맞추어 가는 겁니다. 신기하죠? 악기도 살아 있는 생물처럼 사랑받고 그를 향해 기대를 가져주면 반응을 보인답니다.'
6 홀로 듣는 음악도 아름답지만 함께 듣는 음악도 아름답다 홀로 부르는 노래도 즐겁지만 함께 부르는 노래도 즐겁다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은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특권임에 틀림없다. 시와 기도와 음악 사이에서 별처럼 떠올랐다. 스러지는 나의 고마운 하루여! 어둠 속에서도 빛이 고이는 삶의 평화여!
<1994>
수첩 속의 향기
1 몇 년 동안 벼르기만 하던 수첩 정리를 올해는 꼭 해야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내 마음에 꼭 드는 수첩을 선물받게 되어 당장 정리를 끝냈다.
옛날보다는 덜해진 셈이지만 수녀원에서의 수첩 사용은 매우 의미가 있고 중요해서 입회하면 으레 조그만 수첩부터 받았고, 헝겊으로 표지를 꾸미는 등 정성껏 만든 것이 많았다. 그 안엔 단체로 외우는 공적인 기도문 외에도 성찰 내용, 개인의 단상. 일기. 필요한 연락처와 해야 할 일들을 적어두는 등 다목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래서 수첩은 어디엘 가나 들고 다니는 우리의 가장 정다운 친구이다.
2 오늘은 문득 생각이 나서 내가 유품정리를 한 적이 있는 선배 수녀님들의 낡은 수첩 몇 개를 들고 와서 촛불을 밝혀놓고 읽기 시작했다. 사람은 가도 수첩은 남아 오롯하고 성실한 봉헌의 삶을 살고자 애썼던 '수도자들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져 단편적으로나마 몇줄씩 소개하고 싶다.
3 매우 슬기롭고 유머 감각이 빼어났던 Y수녀님은 1972년 11월, 당신이 사랑하던 농장에서 연탄가스 사고로 별세하셨는데 어느 날 애써 가꾼 참외를 닭이 쪼아버렸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적어놓으셨다.
첫봄부터 손주어 가꾼 참외폭 잎이 돋고 꽃 피어 아롱지게도 누마다 오랭조랭 웃음짓더니 짖궂은 선머슴닭 심술을 피워 애꿎은 참외 쪼아 살생하다니 맞이다리 장손이는 배가 터져서 몇날 못 산 이 세상을 가벼렸어요 닭의 목을 자를까나 참욀 뽑을까 순간적 어리석은 마음의 투쟁 아픈 가슴 남몰래 고이 간직코 지는 한숨 서리서리 걷어사린 뒤 참외넝쿨 바라보며 시름만 짓죠.
이 글을 읽으면 우리가 다니러갈 때마다 옥수수, 감자, 과일을 푸짐히 내오며 즐거워하시던 수녀님의 밝고 어진 웃음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4 꽃을 유난히 좋아했던 원예담당의 R수녀님은 1983년 4월, 꽃들의향기 속에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드셨는데 그의 수첩엔 시적인 짧은 기도들로 가득하다. '내 심장의 마지막 고동이 가장 완전한 사랑의 기도문이 되게 하소서 ' ' 내마음에 드는 사물을 볼 때면 신이난다. 신이 나 내 영혼아. 너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거룩한 영혼이 되어라' 등등 곷에 대한 감상, 서원하는 수녀들을 기리는 축시들이 군데군데 적혀있다.
5 우리 수녀회의 첫 수녀로서 1984년 12월에 노환으로 별세하신 인자한 모습의 G수녀님의 수첩엔 각종 기도문 외에 수녀원 대지와 건평수, 수녀들의 구내 전화번호, MBC 11번, KBS 9번이라고 텔레비전의 채널 번호까지도 수업 뒷면에 적혀 있었다. 제법 큰 공동체의 원장을 지낸 적이 있는 그 분의 수첩엔 수녀들의 성찰 항목으로, '매일의 생활에서 나는 부차적인 것을 더 중요시하지 않았는가?' '나는 하느님의 호의보다 사람들로부터의 칭송 듣기를 더 좋아하지 않았는가?' '영적으로 지능적으로 내가 남보다 낫다고 잘난 척한 적은 없었는가?' '수도자 신분에 부끄러운 사치스런 것을 원한 적은 없었는가?' '살수나 잘못을 범했을 대 겸손되이 인식하고 용서를 청했는가?' '시간을 충분히 사용했는가?' 등등 40여 가지나 되는 항복들을 적어놓은 것이 새삼 눈길을 끈다.
6 1990년 5월, 암으로 돌아가시며 안구를 기증하기도 했던 E수녀님의 주머니용 수첩에는 '우덕'이란 이름을 지닌 수녀원의 소가 팔려가던 날의 슬픈 심정을 주님께 하소연하며 붉은 글씨로 적어놓은 것도 있고, 소임이 이동된 연월일, 신학용어 풀이 '수렴의 시작은 문을 조용히 열고 닫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쁜 날일수록 문을 수없이 여닫게 되니 얼마나 많은 화살기구를 드리게 되는지 아느냐?' 하는 식의 결심 내용, 고운 시들이 적혀 있다.
'기증해야 할 안구이기에 눈을 더 깨끗이 보존해야 한다'며 고통 중에도 각별히 눈에 신경을 쓰셨던 수녀님의 장례미사에서 내가 대신 읽어드린 그 분의 시를 수첩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 기쁜 마음이다.
님은 고우시고 고요하시기에 곱게 조용히 단장한 규수만을 찾으시옵니다 님께 바친 이 몸 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골백번 죽어 묵묵하렵니다 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애정까지 묵묵히 희생할 것이옵니다
<1993>
우리 동네 작은 이야기
1 우리 수녀원 아랫집에 살다가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간 '사랑의 고리' 공동체엔 몸이 불편한 두 처녀가 서로 도우며 생활하고 있는데 우리는 종종 내려가서 차 한 잔과 더불어 좋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키가 너무 작아 설거지도 받침대를 고여놓고 해야 하는 그들이지만 마음은 크고 넓게 열려 있으며. 늘 밝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훌륭해 보인다.
2 우리 동네 우체국은 골목길에 있어 얼른 눈에 띄진 않지만 우리가 종종 일을 보러가면 직원 모두 친절히 대해준다. 벌써 10년 넘게 우리집에 오는 집배원 최씨 아저씨는 안내실 수녀님들의 배려로 우리가 구운 빵과 차 한잔을 꼭 들고 가시는데 어쩌다 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 분의 수수한 모습을 만나면 한 가족처럼 반갑다.
3 '환한 미소' ' 상냥한 응대' '최선의 봉사'라는 표어를 크게 걸어놓고 공휴일도 없이 깨어 봉사하는 우리 광안 4동사무소는 모범시범 동답게 친절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주어 심부름 가는 일도 즐겁기만 하다. 우리는 워낙 식구가 많아 아예 17통 1반으로 등록이 되었으며, 이래저래 가장 왕래가 잦은 서로의 좋은 이웃이다.
4 우리 수녀원 단골 P양화점의 허씨 아저씨는 우리가 들고 사는 헌구두를 완전히 새 것으로 바꾸어 놓는 마술사의 손을 지녔다. 성당과 수녀원의 큰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부인과 더불어 봉사에도 열심인 아저씨는 어느 날 문득. '우리처럼 늘 독한 본드 냄새 맡으며 일하는 사람들은 수명이 단축된답니다.' 라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고급양화점이나 백화점에 밀려 장사가 잘 안된다는 아저씨네 가족을 의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 가득하다.
5 H사진관 안씨 아저씨는 내가 맡겨놓은 사진을 찾으러 가면 '이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 한 두장 고르세요. 5×7사이즈로 확대해 그릴게요'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언젠가는 부활 달걀과 빵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선물했더니 어찌나 두고두고 인사를 하던지 민망할 지경이었다. 한번은 우리 270명이 모인 자리에서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더니 미리 올라와서 하도 예행연습을 잘 한 덕분에 멋진 가족사진이 나왔다며 다들 기뻐했고, 그 후로 아저씨는 더욱 신뢰받는 우리의 단골 사진사가 되었다.
6 우리집 길 건너 바닷가로 가는 길목엔 '까치신발'이란 이름의 가게가 있는데 나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가끔 들르곤 한다. 신발을 사고 싶어하는 손님들을 그곳에 안내하기도 하고, 꼭 신발을 살 일이 없어도 계절마다 다양하게 바뀌어 진열되는 신발들이 정겹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곧잘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친절한 주인 아줌마는 늘 미소를 보내곤 한다. 언젠가 이 '까치신발' 가게에서 산 회색 체크무늬의 단정한 운동화를 신고 산책을 하면 나도 까치처럼 즐거운 마음이 된다.
7 광안리 바닷가에 나가면 여러 종류의 조가비를 이용해 앙징스런 장식품들을 만들어 파는 아줌마가 있는데 나는 가끔 혼자서 또는 손님들과 함께 나가 구경을 하다가 몇 개 사오기도 한다. 겨울에 조가비를 주워다 작업을 해서 봄, 여름, 가을에 내다 판다는 아줌마의 그 순박한 모습과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나는 산책을 나갈 때마다 모래사장 한 복판에 잇는 그 이동가게를 들르게 된다. 특히 길게 엮어진 목걸이는 선물 받은 어린이도, 멋쟁이 아가씨도, 종일 누워지내는 장애인도 조각비가 흔들릴 때마다 파도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좋아하는데 나는 선물용으로 쓰고 남은 몇 개를 내 방에 걸어두고 바다가 생각날 때마다 오며가며 흔들어보곤 한다. 기껏해야 이천원짜리인 아름다운 쇠고등, 소라, 꽃가리비, 새조개 등으로 엮어진 고운 목걸이는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 멋지고 낭만적인 것이어서 그토록 정교한 작품으로 많은 이에게 기쁨을 준 바닷가 아줌마를 늘 고마움 속에 기억하게 된다.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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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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