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4장 인류의 미래는 발전 가능한가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점술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종교적, 문화적 행위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까지도 점술은 살아 있는 문화로서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김홍경(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가톨릭대 강사)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산명술의 대가인 관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조조는 자신이 거느린 문무 관원들을 불러들여 놓고 물었다. "이 사람들은 상이 어떠한가?" "모두가 세상을 다스릴 만한 분들입니다." 관로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 깊은 것은 밝히지 않았다. 조조가 이번에도 거리낌없이 말하라고 두 번 세 번 졸랐으나 관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조안의 일 뒤에는 가볍게 남의 상을 말했다가 천명을 거스르게 되는 걸 꺼려운 탓이었다. "그럼 동오와 서촉의 앞날은 어떠한가?" 관로가 사람의 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는 걸 꺼리자 조조는 나라로 바꾸어 물었다. 그것까지 마다할 수가 없었던지 가만히 점괘를 뽑아 보던 관로가 대답했다. "동오는 한 사람의 대장을 잃을 것이요, 서촉은 지금 군사를 내어 천자의 경계를 침범해 오고 있습니다."
관로는 소설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사 "삼국지"에도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관로는 자가기 태어난 때를 가지고 자신의 단명을 예견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대하면 사람들은 일단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정말 관로와 같은 신통한 예측이 가능한 것일까? 점술은 어떤 역사와 이론구조를 가지고 있을까? 오늘날에도 관로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까? 아무리 이성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점술의 비과학성을 질타하는 사람이라도 잠시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점술은 인류의 가장 오래 된 종교적, 문화적 행위 중의 하나이면서도 아직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는 문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점복행위와 관련된 수많은 관습과 행태가 존재한다. 흥밋거리를 다루는 매체에는 어김없이 '오늘의 운세'가 실리고, 연초에는 한 해의 운수를 알아 보려는 사람들로 점가가 북적대며, 결혼, 출산, 승진, 시험 등 소소한 개인적인 사건에서부터 국가의 흥망성쇠와 관련된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점술가의 견해를 알아 보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어 있는 듯하다. 정보화 시대를 논하고,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생명의 신비를 파헤쳐 가고 있는 대명천지에 아직도 이런 '구태의연한'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왜 사람들은 점을 보려고 하는 것일까? 점술에 대한 의문은 끝도 없이 일어난다. 점술에 관한 의견들은 많지만 우리 공동체는 아무것도 합의해 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술의 기원과 역사
동양의 것이나 서양의 것이나를 막론하고 점술은 삶의 환경 속에 자연적, 초자연적 힘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한 힘을 이해하고 그것에 순응하려는 것이 점술의 정신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만 살아갈 수는 없고, 항상 자기 외적인 힘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해서 장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지가 전적으로 관철되는 존재는 신이고, 전적으로 자기 외적인 힘에 지배당하는 것은 기계이다. 인간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가운데의 존재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의지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인데, 그 설정을 위해서는 자기 외적인 힘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외적인 힘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의지를 조정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점술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활동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획득한 문화이며, 그 때문에 구체적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더라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점술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점술은 대부분 중국에서 왔다.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중국의 가장 오래 된 점술은 복서인데, '복'이란 지금은 멸종된 땅거북 아니면 남생이의 배껍질(또는 등껍질)이나 소, 사슴의 어깨뼈를 이용하는 술법으로 미리 그 껍질이나 뼈의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그것을 불에 달구어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의 양상을 독해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이 의식에 사용되었던 갑골이 한 100년 전쯤 중국에서 발견되었는데, 대개 기원전 12~기원전 11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서'도 비슷한 시기에 사용되었던 방법으로, 특정한 상징이나 암시가 기록된 시초라는 풀의 줄기 다발에서 하나를 뽑아 그것을 두고 점운을 해석하는 일종의 심지뽑기 같은 것이다.
복서에 뒤이어 서주시대(기원전11~기원전8세기)부터 점성술이 행해졌으며, 서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주역점'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어 한나라 때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오늘날 복은 사라졌고, 서는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산통점에서 그 편린을 찾아볼 수 있다. "주역"은 여전히 애용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덜 하지만 대만에서는 아직도 점성술이 유행하고 있다. 이 밖에 보통 사주라고 하는 산명술, 관상법의 원형인 골상, 해몽술인 몽점 등 요즈음에도 남아 있는 점술은 대부분 한나라 때 만들어졌다.
유의할 것은 이러한 점술의 고대적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삼국지"는 관로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의 단명을 알게 되었는지는 소개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산명술은 명대에 체계화되었다. 점성술의 방법도 오늘날 알려진 것은 명대의 것이며, 골상법과 몽점도 마찬가지여서 그것들이 한 대 이후 행해졌던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체계가 완성된 것은 각각 14세기와 16세기이다. 또 "주역"을 가지고 점을 치는 정통적인 방법인 본서법은 송나라 때 완성되었다. 이 밖에도 이름을 분석하여 운명의 길흉을 판단하는 성명학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아마도 19세기 초 일본에서 고안되었을 것이다. 성명학에서는 복성과 두 글자의 이름을 기본으로 하는데, 중국에는 이러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방법과 고대적 방법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현존하는 점술에 지나치게 역사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러한 방법들과 크게 대별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신력을 빌려 미래를 예측하는 형태이다. 앞에서 자연적, 초자연적 힘을 이해하려는 것이 점술의 정신이라고 하였는데, 위에 열거한 점술 중 "주역", 산명술, 골상 등 체계를 운영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힘을 대상으로 하고, 신력을 사용하는 방법은 초자연적 힘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전자가 과학적 활동과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종교적 실천과 연결된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 점술가는 체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사태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지혜로워야 하며, 자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만 신력을 비는 경우에 영매는 반드시 망아상태에 들어야 한다. 자아를 비워 내야 산이 깃들여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점을 치는 행위는 비슷해 보이지만 면밀히 따져 보면 양자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체계를 운용하는 점술의 발전은 동양의 전과학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지만 신력을 이용하는 점술은 그런 면에 별로 기여하지 않았다. 대신 신력을 이용하는 방법은 종교적 감정을 풍요롭게 하였다.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어떠한 메커니즘 때문에 가능한지는 우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점이라는 것이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준신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점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스러운 법칙이나 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들어맞데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어떤 사람은 점이 일종의 경험과학으로서 통계에 기초해 있으므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일정한 확률로는 들어맞게 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또 자기 주장이 아주 강한 경우가 아니면 점에 대해서 특정한 의견이 없다고 하더라도 불길한 점괘를 꺼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금기를 피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의 심리적 경향이다. 사실 미래를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과학의 목표이기도 하다. 과학은 운동, 변화를 규정하는 법칙을 전제로 그 법칙의 틀 안에서 주어진 자료를 수학적으로 계산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앞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해 내려고 한다. 점도 역시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과학은 속도, 위치, 크기, 질량 등 수량화가 가능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대상만을 연구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정합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연구활동을 진행한다.
이에 비해 점이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일종의 상징, 표상, 조짐과 같은 상이다. 상은 언어를 초월하며, 수학적 기호로 표현될 수 없다. 상에 접근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언어는 상을 완전히 담아 낼 수 없다. 그래서 상을 독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통찰이 필요하다. 직관과 통찰을 통해서 언어가 다 말해 주지 못하는 존재의 비밀스러운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다. 가령 공자는 죽기 이레 전에 서까래 사이에 앉아 있는 꿈을 꾸고서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공자는 은나라의 후예이고, 은나라에서는 서까래 사이에 빈소를 차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공자의 꿈이 하나의 상이다. 공자는 상을 통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이것은 수령화와 논리적 분석의 합리주의적 인식방법과는 다르다. 곧 점이나 과학은 모두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지니지만, 탐구의 대상과 방법은 다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진영에서 볼 때 점술은 언제나 비과학 또는 유사과학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근대 과학이 동양을 장악하였을 때 점술을 미신으로 쉽게 낙인찍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면이 있다. 점술을 비판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역시 그것이 비과학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문명화가 덜 된 지역일수록 점복의 문화와 관습이 강하고, 문명화가 진전된 지역은 그러한 정도가 덜하다는 점도 점술이 근대 과학 그리고 그 기초 위에 서 있는 현대 문명과 양립할 수 없는 체계임을 방증한다. 하지만 이제 근대 과학은 부동의 진리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은 근대 과학이 부분적으로, 특히 미시적 세계에 관해서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식의 도구가 아님을 밝혀 냈다. 아울러 현대 물리학은 적어도 지금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인간이 대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백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이 과학적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대상에 대한 인식의 한계도 단지 측정의 문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과거의 과학주의자와 이성주의자의 믿음에 어느 정도 흠집을 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신과학운동론자 같은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일부의 해석가들은 낡아빠진 근대 과학의 방법을 버리고 새롭게 세계를 이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이 포기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주의적 인식방법이고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직관과 통찰이다. 대상의 요소들을 조작해서 그것들을 찢어 붙이는 식으로는 세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직관과 통찰을 통해 살아 있는 대상자체에 접근할 때 대상의 본질, 생명을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점술은 적어도 비과학이기 때문에 비판되지는 않는다. 점술 자체가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점술의 체계속에는 근대 과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연 합리주의적 인식은 대상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그것은 보완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직관과 통찰을 통해서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그러한 이해는 공유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상이한 답변이 점술을 평가하는 입장의 차이를 낳는 하나의 측면이다.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갖든 점을 통해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용한 점술가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가 공감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점은 상을 다루는 것이고 상은 언어를 뛰어넘기 때문에 언어에만 익숙한 일상인이 아닌 상을 읽는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의 뜻을 이해하는 자이다. 그가 경험하는 것은 상이지만 그는 상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상을 넘어서, 그 은유를 넘어서 그 가운데 있는 의미를 꿰뚫어본다. 이러한 능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공부가 필요하다. 체계를 운용하여 상을 읽고 상 속에 담긴 의미를 통찰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신력을 빌려 앞날을 예측하는 사람도 공부가 필요하다. 세습무는 입문식을 거치기 전부터 공부를 하고, 강신무도 입문식을 거친 후에는 신들의 계보를 외우고 시간에 망아의 상태로 돌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 공부에 들인 노력 여하에 따라 공력에 차이가 생긴다. '제대로 잘 보라'는 것이 술수의 학당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하는 말이다.
고대 문화를 읽어 보면 이러한 능력을 갖춘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잇다. 그 기록의 진위를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간 포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기록하고, 그들에 존경을 표시하는 풍토가 과거에는 존재하였고, 그러한 풍토를 형성하는 데 그들 자체가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꼭 '영웅'이 아니더라도 문명의 발달과 반비례하여 고대인들이 현대인들보다 신성, 절대적 존재, 조상의 영혼-이런 것들이 실제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과 더 쉽게 합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문화사적 자료가 증명해 준다. 문명은 영적 능력이 소산이 아니라 이성적 사유의 소산이다. 반면에 점술은 신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체계에 의존하는 경우라도 항상 신명을 사용한다. 논리적으로는 체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높은 빌딩이 창공을 갉아먹고 불야성이 어둠을 몰아 내는 삶의 환경에서 영적 활동이 깃들일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하나의 역사적 경향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고대 문화 속의 영웅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점복의 문화와 관습이 약한 것도, 그러한 사회에는 구조적으로 용한 점술가가 드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개인이 경험한 점술가의 공력 정도, 나아가 문명사회에서 뛰어난 공력이 점술가가 도대체 존재할 수나 있는 것인가에 관한 생각의 차이가 점술에 대한 평가의 차이를 낳는 또 하나의 측면이 된다.
어쨌든 점술가는 점을 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 주기 위해서 고객의 과거를 자신 있게 늘어 놓기도 하지만 결국은 미래를 예언한다. 점의 본령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다. 그런데 미래는 정말로 예측 가능한 것인가.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운동, 변화가 필연의 소산이어야 한다. 특정한 존재는 반드시 또 다른 어떤 존재와 만나서 결합하게 될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주체와 사태 사이에도 필연적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는 견해의 전제이다. 과학과 점술은 이러한 면에서는 타협한다. 단지 과학에서는 이 필연성을 법칙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점술에서는 운명이 있다는 말로 표현할 뿐이다. 이때의 필연은 물론 단순한 논리적 필연을 넘어선다. 우주의 근본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사태도 근본법칙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한다면 필연이다. 가령 과학에서는 당장 그 원인과 결과를 해석할 수 없는 현상들도 '숨겨진 변수의 이론'을 내세워 법칙의 테두리안에 있음을 천명하고, 점술에서는 모든 것이 필연성의 표상이되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 표상을 읽지 못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관로는 "하늘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삼국지")라고 말하였다. '나라가 장차 흥할 때는 반드시 요망한 조짐이 있는 법'("중용")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것은 골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꿈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사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당연히 우연성은 배제된다. 우연성을 인정하면 점술은 스스로를 한정하게 된다. 우연성은 예측되지 않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필연의 소산인가? 우리는 필연성에 저항할 수 없는가? 찰나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태들의 모든 인과관계를 낱낱이 알 수 없다면 필연이란 허구가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이 점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또 하나의 측면이다. 이제 또 체계의 문제가 남는다. 대부분의 점술가들이 상을 읽기 위해서 의존하는 체계는 타당한가? "주역"은 정말로 권위를 부여할 만하며, 간지와 시간이 결합되는 것은 수긍할 만한 일인가? 동양의 경우 점술의 체계는 모두 음양오행설과 결합되어 있는데, 음양오행설은 정말 천지 자연의 뜻을 드러내 주는 상징체계인가? 이에 대한 대답도 점술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하는 하나의 측면이다.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한 것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다양한 견해의 대립을 낳기 때문이다. 지금 단계에서 어떤 하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다른 주장을 압도하는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쨌든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만족되어야 한다. 세계는 필연의 소산이고, 필연성의 입법자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하며, 그 필연성이 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하고, 체계를 운용하는 경우에 그 체계가 거짓된 체계가 아니어야 한다. 아마도 여기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추가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를 알려고 하는 강렬하고도 거짓됨 없는 바람이 있는가. 혹시 심실풀이로나 시험삼아 점가를 찾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훌륭한 술수가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신통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상이고, 우리가 보여 주는 상이 거짓된 상이기 때문이다.
문화로서의 점술
점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전제가 어떠한 것이든, 그것이 충분히 충족되고 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오늘도 사람들은 여전히 점가를 찾는다. 그들은 점가를 찾기 전에 점술의 메커니즘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는 않는다. 이미 점술은 그들 생활의 일부이고 관습이고 문화이기 때문이다. 점술이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고 관습, 문화가 된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문화적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은 과거에 생겼다. 그 과거를 평가할 수도 있고, 영적 체험이 충만한 과거로 평가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에는 점술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주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점가를 자주 찾았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술문화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환경 속에 존재하는 외부의 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발달된 학적 체계(과학)를 가지고 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수단(기술)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누구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일식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놓고 점을 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대 과학기술문명은 한계를 가지고 있고, 삶의 모든 것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 생명현상이나 인간관계와 같이 복잡한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얻으려고 하는 염원이 여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점가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의 합리화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사람들을 점가로 내모는 하나의 원인이다.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한 왜곡된 사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사회, 그것에 비합리성으로 인한 고통을 위안받으려고 하는 자연적인 심리상태가 결합되어 살아 있는 점술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할 것이다.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이 꼬여들어갈 때 사람들이 점가를 찾게 된다는 것은 그에 대한 방증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화되고 삶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점술이 겪게 된 주요한 변화이다. 원래는 환경 속에 존재하는 자연적, 초자연적 힘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하는 수단에 불과하였던 점술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스스로가 하나의 힘으로 격상된 것이다. 마치 재액을 물리칠 수 잇는 선한 힘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부적이 그 스스로 신적인 힘으로 발전하고, 운동, 변화의 규칙성과 항상성을 상징하였던 주역의 부호가 그 스스로 마술적 기호로 발전한 것과 같다. 사제는 원래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역할을 해 주고 신을 경배하는 의식을 주도하는 자이지만 의식이 강조되면 신과 관련이 없이도 그 스스로가 권위를 가지며, 때로는 신보다도 더한 힘을 갖는다.
이러한 일들이 점술의 사회화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그래서 그 체계의 진실성이나, 그것이 모시는 입법자의 정당성이나. 심지어는 점술가의 능력과도 상관없이, 점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상관없이 점술의 문화는 하나의 힘으로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게 되며 심령 속에 침투한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체계나 입법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운명과 미래가 예측되는지, 내가 만난 점술가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모르는 상태에서 점을 본다. 물론 그에게는 미래를 알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 점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냥 점을 본다. 자신의 심령 속에서 침투해 있는 힘에 이끌려서 말이다.
참고 문헌
한규성, "주역에 대한 46가지 질문과 대답", 동녘. 하야시 하지메, "동양의학은 서양과학을 뒤엎을 것인가", 보광재. J. 니담, "중국의 과학과 문명 3", 을류문화사. 시에쏭링, "음양오행이란 무엇인가", 연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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