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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35 호
단기 4341. 11. 21 (음력 10. 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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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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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09 신춘문예
세상과 소통하는 글쓰기를 꿈꾸고 있습니까. 한국일보가 새해 첫날 당신의 꿈을 향한 문을 열어드립니다. 한국일보는 2009년 신춘문예 응모 작품을 시, 소설, 희곡, 동화, 동시 5개 부문에서 12월 5일까지 공모합니다.
소설가 김승옥, 극작가 오태석, 시인 정호승을 비롯한 우리 문학의 빛나는 별들이 한국일보 신춘문예라는 문을 통해 꿈을 펼쳐왔습니다. 응모작에 대한 열린 시각, 엄정한 심사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전통이자 자랑입니다. 싱싱한 감성, 치열한 정신으로 한국 문학과 문화에 새 빛을 던질 여러분들의 많은 응모를 기다립니다.
◆공모 부문
▦시=3편ㆍ당선작 고료 300만원
▦소설= 200자 원고지 80장 안팎ㆍ500만원
▦희곡= 80장 안팎ㆍ300만원
▦동화= 30장 안팎ㆍ200만원
▦동시= 3편ㆍ200만원
◆원고 마감 12월 5일(금). 우편접수는 5일자 소인이 찍힌 것까지 유효합니다.
◆보낼 곳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118 한진빌딩 신관 15층(우편번호 110-770) 한국일보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발표 2009년 1월 1일자 한국일보
◆응모 방법
응모작은 순수 창작물이어야합니다. 타 신춘문예 중복 투고 및 기 발표 원고는 당선이 취소됩니다. 봉투와 원고에 응모 부문과 이름(필명이면 본명 병기),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주십시오. 팩스나 이메일 접수는 받지 않으며 컴퓨터로 작성한 원고는 A4용지에 출력해서 보내야 합니다. 당선작 없는 가작의 고료는 반액이며 모든 응모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문의 (02)724-2319~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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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2009 신춘문예
전남일보사는 시, 단편소설, 희곡, 동화 등 4개 부문에 걸쳐 2009년도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합니다.
전남일보 신춘문예는 그동안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면서 역량 있는 문학도들의 등용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전일 신춘문예 출신 작가들은 이 지역과 한국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과감한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한국 문단을 이끌어갈 예비 문인들의 많은 응모 바랍니다.
▷모집 부문 및 상금
△ 단편소설(원고지 80매 안팎)=300만원
△ 시(3편 이상)=100만원
△ 희곡(원고지 80매 안팎)=100만원
△ 동화(원고지 30매 안팎)=100만원
△ 원고 마감=2008년 12월15일(당일자 소인 유효)
△ 보낼 곳=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700-5 전남일보사 문화체육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500-758)
△ 당선작 발표=2009년 1월1일자
△ 심사=본사가 위촉한 권위있는 문인들이 심사하며 명단은 당선작 발표와 함께 공표
▷ 주의사항
①응모작은 다른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작품이어야 함.
②겉봉에 응모 부문 기입하고, 작품의 앞ㆍ뒤에 주소, 성명(필명일 경우 본명 명기), 나이, 전화번호 등 표기 바람.
③당선 후 표절 또는 중복 입상이 밝혀지면 당선을 취소함.
④당선작 없는 가작의 경우 당선작의 반액을 지급함.
⑤응모 작품은 반환하지 않음.
이밖에 자세한 문의는 전남일보사 문화체육부(062-510-0326)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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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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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생각하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많이 지껄여댄다.(몽테스키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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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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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마치
사람이름
남이를 역적으로 몬 사건에 엮인 이들의 아내와 시앗, 자녀들은 공신들 노비로 간다. 거기엔 남이의 딸 ‘남굴금이’와 홍형생의 일가붙이도 있다. 부인 ‘복비’, 시앗 ‘약비’, 형 ‘홍이생’, 손자 ‘홍방마치’, 조카 ‘홍벌개’가 그들이다.
‘방마치’는 ‘방망이’이며 경북에선 ‘홍두깨’를 그리 이른단다. 이름에 쓰인 ‘마치’는 못을 박거나 무엇을 두드리는 연장이다. ‘방마치·방망이·마치’를 견줘 보면 ‘방·망·마치’는 낱낱의 뜻을 지닌 말로 여겨진다. 이름에 ‘돌몽이·쇠몽이’도 있다. ‘몽이’는 또 무엇일까? ‘몽동이’와도 견주어 보면 ‘몽·동’ 또한 다른 낱말이었던 것 같다. 이름에 쓰인 ‘몽동이’는 몽둥이, ‘몽티/몽치’는 짤막하고 단단한 몽둥이다. ‘망치’는 ‘마치’보다 크며 ‘망이’와 ‘마치’가 섞인 말로도 보인다.
‘메’는 말뚝을 박거나 재목을 맞출 때 쓰는 연장이다. ‘떡메’는 떡을 칠 때 쓰며, ‘큰메’는 달리 ‘물몽둥이’라고도 한다. 바윗돌을 가를 때 망치와 정으로 홈을 나란히 여럿 만들고 ‘비김쇠’(쐐기)를 박아 ‘쌍망이’(큰쇠망치)로 하나씩 쳐나가면 바위는 금방 금이 간다.
‘방마치/방망이·곰방메·몽치’는 나무로, 메·망치는 나무·쇠로 되어 있다. 사내아이를 일컬을 때 ‘고추방망이’라고도 한다. ‘방마치’는 남성 상징을 빗댄 이름인 모양이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로부터
요즘 정치인이나 권력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가면서 언론에는 '○○○은 모 기업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얼마를 받았고, 모 단체로부터 얼마를 받았으며, 모 씨로부터도 얼마를 받았다'는 식의 뉴스가 자주 보도된다. 이런 사실을 듣기도 지겹지만 문장에서 이처럼 '-로부터'를 남용하는 것도 보기에 좋지 않다.
'-로부터'를 무의식적으로 많이 쓰는 것은 영어를 공부하면서 'from~'을 '-로부터'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한 탓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로부터 ~까지'를 뜻하는 일본어 '~카라 ~마데(~から ~まで)'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에서' 또는 '(사람·동물)에게서' 등이 어울리는 자리에 '-로부터'를 남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로부터'는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긴 하나 '인생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퀴 달린 탈것은 마차로부터 고속철도까지 발전해 왔다'처럼 유래나 구체적인 출발점을 나타낼 때 잘 어울린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람인 경우 특히 '아버지에게서[한테서] 재산을 물려받았다'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처음에 든 문장도 '모 기업으로부터'는 '모 기업에서','모 단체로부터'는 '모 단체에서', '모 씨로부터'는 '모 씨에게서'로 바꿔 '○○○은 모 기업에서 불법 정치자금 얼마를 받았고, 모 단체에서 얼마를 받았으며, 모 씨에게서도 얼마를 받았다'로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왕따, 가마리
사람은 더불어 살 때 행복이 배가 된다고 합니다. 경제가 어렵다 보면 자칫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자신 혹은 소속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앞서 다툼이 잦고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려운 환경을 다 함께 이겨내야 한다는 국민의 바람과 달리 정치권의 소식은 '특정 지역에서 민주당의 열린우리당 왕따 효과'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 끼여 설 자리를 잃고 왕따당하는 민주당'등으로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위 예문에 등장한 '왕따'라는 표현, 어감은 물론이고 이미지가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학교 내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일본어 '이지메(いじめ)'를 '크게(왕) 따돌린다'는 뜻의 은어로 발전시켜 청소년들이 넓게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의미로 살려 쓸 수 있는 더 좋은 우리말 '가마리'가 있습니다. '가마리'는 욕먹기·매맞기·걱정 따위를 늘 당하는 사람이란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어떤 행위가 심하거나 많은 경우에 '꾸러기'란 접미사를 활용해 장난꾸러기·잠꾸러기·말썽꾸러기로 표현하듯이 '가마리' 역시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행동 따위를 더 강조하거나 새로운 단어로 파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으로 비웃음거리가 될 때나 별 이유는 없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특정인을 집단의 힘으로 미운털을 붙이곤 '욕가마리·놀림가마리·구경가마리·근심가마리·웃음가마리' 등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가하다, 때문에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바삐 움직인다. 언어도 이런 추세를 따라 속도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는 듯하다. 특히 인터넷 채팅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보면 극단적으로 줄인 것이 많다. '안녕하세요'가 '안냐세여'로 줄어드는가 하면, 웃음소리 '크크'는 'ㅋㅋ'만 남았다. 인터넷 채팅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신문·잡지 등에서도 이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꼭 있어야 할 요소를 생략하고 쓰는 글이 많아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국회에서 연금법 개정안이 마침내 통과됐다. 사람들은 '조금 늦었지만 평가한다'고 박수를 보냈다.' 이 글은 사람들이 연금법 개정안 통과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평가한다'라는 말만으로는 그 뜻을 전할 수 없다. 이 단어는 ' 평(評)한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나쁘게 평하는 것도 평가고, 좋게 평하는 것도 평가다. 이 말에 '높게/낮게/나쁘게/좋게' 등의 꾸미는 말이 붙어야 비로소 평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따라서 위 예문도 '높게[좋게] 평가하다' 등으로 써야 제대로 뜻이 전달된다.
'차단막을 설치하거나 최종 작품만 평가하면 되는 음악·미술 분야와는 달리 체육실기는 실제 동작을 눈으로 봐야 하는 특성이 있다. 때문에 이 분야는 입시부정의 '우범지역'으로 지목돼 왔다.'
이 글에서 '때문에'의 '때문'은 의존명사다. 의존명사는 단독으로 쓸 수 없다. 반드시 다른 말과 함께 써야 한다. 그래서 위 예문도 '그 때문에''이 때문에'등으로 써야 바른 문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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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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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이재무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이재무
1958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 국문과 졸업 1983 <<삶의 문학>>에 시 <귀를 후빈다>를 발표하며 등단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섣달 그믐> 청사 1987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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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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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박 - 김일연
-산사에서
흐르는 것들만이 죽비로 깨어있다. 물소리로 겹치는 산과 산 검은 이랑을 거슬러 치고 오른 달 은어처럼 빠르고.
쏟아 붓는 달빛의 돋을새김 속에는 낯선 길바닥을 헤매던 고무신과 적막한 기억을 쓸던 시간의 붓 자국만.
마음이란 먹을 갈아 일필휘지 하고픈 밤 이별보다 만남으로 남은 날을 채우고져 두 눈은 아픈 내부를 깊숙이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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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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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줄 걸어 놓고
낚시줄 걸어 놓고 봉창에 달을 보자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리 맑게 난다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 길을 잊었닷다
<지은이> 윤선도 <말 뜻>
봉창(蓬窓) : 배에 있는 창을 말한다. 하마 : 벌써. 이미. 밤들거냐 : 밤이 들었느냐? '~거'는 과거시제 보조어간. 자규(子規) : 두견새, 소쩍새, 접동새,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등의 다른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만큼 옛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새인 것이다. 잊었닷다 : 잊었더라. 잊었도다. '~닷다'는 뜻을 강조하는 종결어미.
<감 상>
앞 내에 배 띄우고 밤낚시를 즐기는 모양이다. 잠깐 낚싯줄을 걸어 놓고 봉창에 비친 달을 쳐다본다. 벌써 밤이 깊었는지 소쩍새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 온다. 그 소리 맑기도 하구나. 하늘에 달 뜨고 소쩍새 울음 소리 먼데서 들려오니 잔잔한 물 위에 부서지는 달빛이 더욱 흥겹구나! 갈 길을 잊었노라. 이 경치, 이 흥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자연에 흠씬 젖어 푹 빠져 버렸구나. 낚시가 무슨 고기 잡으려는 낚시냐. 낚싯줄 드리워 두고 봉창에 비치는 달 구경이나 하자. 밤하늘을 가르며 먼데 서 들려 오는 자규의 맑은 소리나 들어 보자. 남해 바다에 띄워 놓은 밤배에서 즐길 수 있는 교향악이요 낭만의 영상이다. "갈길을 잊었닷다"는 화룡점정이다.
해남반도 남쪽 멀리 바다 끝에 보길도라는 낙도에는 고산이 벼슬을 물러나 강호 생활(江湖生活)을 했던 유적지가 있다. 넓은 못을 파고, 산더미 같은 바위를 여기저기 날라다 놓았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부용동이라 일컫는 연못에는 연잎이 우산 같다. 고산이 살던 집은, 왜정 때에 흔적을 없애 버리고 국민학교를 지었다. 거기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는 바닷물이 내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겼던 모양이다. 그의 '어부사시가'가 여기서 태어났다.
동녁 멧부리에서 달이 솟아오르고, 숲에서 자규 소리 들려오면, 비록 고산이 아니더라도 시흥이 절로 샘솟을 듯한, 여하튼 그런 곳이다. 고산이 자연을 좋아했는지, 자연이 고산에게 산을 좋아하게 했는지, 아리숭한 그런 고장에서 이 시조가 나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산이나 자연보다도 조물주에게 먼저 고개가 숙여진다.
내 집이 길치인 양하여
내 집이 길치인 양하여 두견이 낮에 운다. 만학천봉에 외사립 닫았는데 개조차 짖을 일 없어 꽃 지는 데 조오더라
<말 뜻>
길치 :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호젓한 외딴 곳. 만학천봉(萬壑千峰) :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이니, 높고 험한 산이 겹겹이 싸여 있는 것. 깊은 산골. 외사립 : 사립은 대나 싸리 따위로 엮은 시골집의 대문짝. 외사립은 그것 이 한짝만으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말한다. 아주 초라한, 시늉만 의 대문. 조오더라 : 졸더라.
<감 상>
한낮에 소쩍새가 우는 산골. 만학천봉이 겹겹이 둘어싸고 있는 산골.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 외사립을 하루종일 닫아둔 채 개조차도 짖을 일이 없어 나무 밑에서 졸고 있다. 너무너무 조용하구나.
고요의 극치 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졸고 있는 개의 머리 위로 펄펄 꽃잎이 떨어진다. 정(靜) 중(中)의 동(動)이다.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의 움직임이 있어, 이 숨막힐 듯하 고요가 더욱 고요재지고 한결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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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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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인을 위한 철학논쟁 3 -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제2장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동양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이 부분적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과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유의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김수중(서울대 철학과 대학원 졸(철학 박사), 현재 경희대 교수)
어떤 사람들은 철학사상을 이해할 때 그 사상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과 일치될수록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상을 배태한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나 현실과 독립되어 성립하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가 '안으로부터의 접근'이라면 뒤의 경우는 '밖으로부터의 접근'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어느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할 때 근본불교의 교리로서 사성제나 삼법인 등 석가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낳은 인도의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령 인도의 무더운 기후는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대로부터 사제들을 비롯한 지배층은 시원한 나무그늘이나 석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따라서 어떤 철학사상에 접근할 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두고 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주관적, 관념적으로 흘러서 그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두 발을 모두 밖에 두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사상의 배경만 이해할 뿐 심오한 내용까지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제 동양철학의 형성 배경과 요인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이번 장에서 우리는 동양철학에 대한 '밖으로부터의 접근'을 시도하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환경결정론'에 가까운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론에 찬동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순한 환경결정론은 다음과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즉 문화의 총체적인 발전에서는 수많은 원인들과 결과들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원인이고 어떤 것이 결과라는 설명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도 환경을 떠나 진공 중에서 형성된 것은 없다.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사유방식(ways of thinking)은 인간의 생활방식(ways of living)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발달된 과학기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식주와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인간이 자연과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의 지리적 특징 : 닫힌 세계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는 기본적으로 황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문명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닫혀 있었다. 북쪽으로는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으로는 히말라야, 텐산, 쿤륜 산맥으로 막혀 있으며, 동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특히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서쪽의 산맥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수천 년 동안 갈라 놓았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문화권은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격리되어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 문명은 한마디로 '지중해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지중해는 인류가 최초로 항해할 수 있었던 '바다'이다. 지중해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또 때때로 폭풍이나 폭우가 있다 해도 아시아의 태풍이나 카리브 해의 허리케인 등에 비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중해 연안 지방들에서는 일찍이 무역이 발달하고 여러 지역간의 문물교류가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구의 고대문명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은 지리적으로 볼 때 광활한 대륙 안에 격리되어 있었다. 한문으로는 세계를 '천하'(하늘 아래) 또는 '사해내'(동서남북의 바다로 둘러싸인 곳)라고 표현하였다. 중국인의 생각에 바다는 곧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서양의 창조신화에서 '물'이 중심 역할을 하는 데 비해, 중국 고대에 형성된 오행사상에서는 땅을 중앙 또는 중심으로 본다. 위와 같은 지리적 조건은 중국의 철학과 문화가 '중용'이나 '조화'를 중시하는 특징을 가져왔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중용이 곧 진리'라고 믿어 왔다. 중국적 사유에서는 절대적인 선이나 악은 없으며, 단지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을 뿐이다. 또 중국 사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중시하고, 각 개인을 독립적으로 보기보다는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보는 시각이 발달한 점도 위에서 언급한 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닫힌 세계에서는 주어진 여건들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서 구성요소마다 제 몫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농경문화 : 대가족주의와 소박실재론
무엇보다도 중국은 대륙국이다. 이는 그리스-로마가 해양국이었던 점과 대비된다. 중국인들은 광활한 대지에서 주로 농경에 종사해 왔다. 물론 초기 인류의 문화는 농경문화였다. 하지만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유럽 문명에 흡수되고, 인도 문명이 서양 문명과 부단히 상호 영향을 끼쳐 온 것과 달리, 황하 문명은 고대의 농경문화를 근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유지해 온 유일한 문명이다. 농경에 종사하는 농부들은 특별한 기회가 생기지 않는 한 삶의 터전인 토지 주변에 살아야 한다. 그것은 지주인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한 지역에 몇 대의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대가족제도를 형성하게 마련이며, 이러한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가족질서이다. 여기서 조상숭배의 관념이라든가 효를 비롯한 가족윤리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농경문화는 그리스-로마의 해양문화나, 중동의 유목문화와는 매우 다르다. 가령 미술사에 보자면, 중국의 경우에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산수화가 주류를 형성한 반면에 서양의 미술은 그리스 시대부터 매우 도회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경우, 그들은 지중해를 무대로 한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그들은 도회지에 살면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수학적 계산이 중요하였고 그래서 추상적인 사유가 발달하였다. 도시국가 중심의 그리스 시민들은 가족주의적 관념보다는 민주적인 개인관념을 발달시켰다.
경제적으로 농업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인은 농업을 숭상했다. 전통사회에서 흔히 쓰던 '사농공상'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농부는 생산자 계층에서 가장 우대를 받았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농업을 '본'이라 하고 상업을 '말'이라 한다. 중국의 전통사회에서는 언제나 근본이 되는 농업을 중시하고 말단이 되는 상업을 경시해 왔다. 사대부는 토지를 직접 경작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의 신분으로서 그들의 운명은 농업에 매여 있었다. 또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농부들과 함께 전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대부들의 우주관과 인생관은 농부의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농부들의 생활은 자연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을 숭상하고 이상화하였다. 또 농부들의 생활은 비교적 순박하고 단순하였으며 따라서 자연에 대한 직접 경험을 중시하고 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철학에는 '인식론'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세계관은 소박실재론에 가깝다. 농부들은 계절에 따른 자연의 엄밀한 운행과 대자연의 조화를 찬탄하고, 자연을 인간의 스승으로 이상화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맹자는 "진실 그 자체는 자연의 도이고, 진실하고자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도이다."라고 하였다.
온화한 기후와 현세주의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는 대체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점은 같은 농경문화이지만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왜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인도의 기후는 매우 더워서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가령 뉴델리의 경우, 6월의 평균기온은 섭씨 34도에 육박한다(서울의 8월 평균기온은 섭씨 25.4도). 여름에는 섭씨 40도를 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불교의 사성제는 "모든 것은 괴롭고 무상하다."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인도에 명상문화가 발달한 사실, 대체로 인도의 종교와 사상이 중국에 비하여 염세적이라는 사실 등은 그 기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옥한 대지와 온화한 기후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하여금 현세주의적 윤리관을 갖도록 만들었다. 우리 속담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대표적 종교인 도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한다. 중국이나 한국인들은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계시종교'가 성립하지 않았다. 초월적인 계시종교는 중동 사막지방의 유목문화에서 발달하였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싸우며 계절에 따라 계속 초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열악한 현실이 유목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초월'을 추구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집트나 유대교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절대적인 '유일신' 개념은 무제한의 권위를 아무 거리낌없이 휘두르는 '파라오'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인들에게 대지의 이미지는 오히려 생명의 근원이며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대지는 사람을 먹여 줄 뿐만 아니라 만물을 살리는 위대한 존재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현실긍정적인 입장에서 '원죄 의식'같은 것은 나올 수 없다. 그 대신에 공동체의 유지에 필요한 윤리의식이 발달한다. 따라서 서양문화가 '죄의식의 문화'라면 동양의 문화는 '수치심의 문화'라 표현되곤 한다. 중동 지방에서는 종교가 발달하였고, 동아시아 지방에서는 윤리 도덕이 발전되었다.
동양과 서양 : 사유방식의 차이
니담에 의하면 중국적 세계관의 근본 특징은 그들의 유기체론에 있었으며 라이프니츠 등에서 발견되는 근대 서구에 나타난 유기체론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을 것으로 파악한다. 고대인의 세계관과 사회관을 살펴보는 데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주역"과 "주례"등에서는 우주와 인간사회에 관한 세계적, 유기적 체계가 큰 특징으로 드러난다. 주역의 체계는 어떤 뜻에서는 지상의 관료제에 대응하는 하늘의 관료제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탄생시킨 인간문명의 특정한 사회질서를 자연계에 반영시킨 것이라고 니담은 보고 있다. 한편 서양에서는 '실체'(substance)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을 전개한 데 비하여, 중국에서는 '상관성'(correlation) 개념을 중심으로 세계를 설명해 왔다. 서양인들은 사물을 보면 '그것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 그에 비하여 중국인들은 '그것은 다른 것들과 어떤 관련을 가지며, 나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감기에 걸렸다고 하자. 서양의학에서는 그 현상(감기)을 일으킨 실체에 관심을 두고 가령 그 본질을 '바이러스균'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처할 항생제를 줄 것이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설사 외부의 나쁜 기에 감염되어 병이 났다 하더라도 그와 맞선 나의 원기가 균형 있게 작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기라는 현상이 나왔다고 보고 원기를 북돋을 약을 줄 것이다. 동양에서 보자면 모든 사물은 상생이나 상극의 어떤 관련성의 그물망 속에 있다. 결국 서양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원자론'으로 정형화되었고, 중국의 세계관은 '음양오행론'으로 귀결되었다. 서양인이 질점을 중심으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데 비하여, 중국인은 타자들과의 관련성에 주안점을 두어 그 사물을 이해한다. 이상에서 고찰해 온 것을 요약하면 다음 페이지의 도표(본문 123p 도표생략)와 같이 될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과 그 현대적 의의
따라서 주역에 표현된 '유기체적 세계관'이야말로 중국사상의 가장 큰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데모크리토스 이래 발전된 서구의 인과율적, 기계적 세계관과 대비된다.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우주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며 각 부분들은 모두 스스로 생성하는 생명과정의 요소로서 상호 작용하고 있다. 니담이 '명령자 없는 의지들의 질서 정연한 조화'라 부른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전통적인 농악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지휘자가 없으면서도 각 부분을 담당하는 악기들의 연주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니담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주 그 자체가 거대한 유기체이다. 그라네가 말한 것처럼 '질서'의 개념이 중국의 세계상의 기초를 이룬다. 그 기초란 세계에는 아무것도 창조되는 것이 없으며 또 세계 그 자체도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인의 관념에는 '신'도 '법'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유기체를 형성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은 그 자체에 내재한 본성에서 생기는 구속에 의해 자기의 기능을 전체의 순환 속에서 수행한다."
서양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비하여, 중국적 세계관에서는 '중용'과 '조화'가 극히 중요시된다. 전통적인 고전에서 볼 때에도 "주역"과 "중용" 은 상호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중국사상의 본질이자 특징으로 지적되는 이러한 '유기체적 세계관'은 닫혀진 대륙국가로서 중국인들이 전체적인 유기적 조화와 중용을 추구해 온 점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은 근대의 세계에서는 매우 불리하였으며, 따라서 중국과 한국은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었다. 근대의 산업사회에서는 자연을 우리가 이용할 자료의 집합체로 보며, 인간의 관점에서 그 자료를 가공하여 이용한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을 서로 대립항으로 보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적 사고방식에 적합했다.
그러나 이제 근대의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근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적 세계관이 모색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을 '개발'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무한히 계속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서구 근대세계에서 신봉된 '이성'이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동양의 유기체적 세계관은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대문명이 동양의 전통에서 수용하여 보완해야 할 점들을 몇 가지 들어 보자.
우선 동양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연은 우리의 가공을 기다리는 죽어 있는 자료의 집합체는 결코 아니다. 전통적인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는 오히려 생명의지를 가진 존재들로 가득 차 있다. 우주는 생명의 경기장이며 나와 우리 인간은 그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은 천지와 혼연일체가 되어 만물을 자기 몸으로 여긴다. 다음으로 서구 근대의 인간관은 지나치게 인간을 원자화, 개체화한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자면, 인간은 결코 고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개념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다. 너와 나를 통한 상호관계 속에서만 우리는 존립한다. 또 근대 이후 사람들은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해 왔다. 동양의 전통에서 보자면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욕구를 제한하고 절제함으로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은 동양의 모든 수양론에 기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근현대 사회에서는 재화의 대량생산이나 사회적 제도개혁에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인간의 내적인 개혁은 너무 소홀히 하였다.
우선 위와 같은 세 가지 점에서 보더라도 동양의 전통은 근현대 문명의 병폐를 바로잡는 데 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물론 동양적 전통만이 미래사회의 바람직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수적인 복고주의자들의 헛된 바람일 뿐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근현대 서구문명의 병폐를 바로잡는데 동양적 전통이 '보완적 기능'을 어느 정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동서 문화가 만나는 한국에서 기대해도 좋다고 본다. 근대 이후 아시아인들은 동양의 전통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개방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왔다. 특히 한국은 두 가지 문명이 만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기에 매우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 문헌
최영진, "동양과 서양". 지식산업사. J. 니담, "중국의 과학과 문명"(1. 2. 3.), 을유문화사. 빙우란, "중국철학사", 형설. 김관수, "중국문화의 시스템론적 해석", 천지.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사회평론사. F. W. 모트, "중국의 철학적 기초",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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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마음의 집
흔히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맨처음 사람을 만날 때 쳐다보는 곳은 대개 눈이다. 눈이란 사람의 외모 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눈을 쳐다보면서 말을 하게 되는데, 사람의 첫인상은 외모보다는 이 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말은 마음의 집’이다. 사람을 드러내는 솔직하고 정확한 잣대가 바로 ‘말’이 아닌가 싶다. 내 경험으로 볼 때도 대개의 경우 말로써 그 사람의 됨됨이가 저절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미인을 뽑는 대회 심사에서도 외모 못지않게 중시하는 것이 말씨인 모양이다. 제아무리 외모가 뛰어난 양귀비라 할지라도 이 말씨가 예쁘지 못하면 낙제하기 십상이다. 또 기업의 신입사원 면접 때도 다른 어떤 조건보다 말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본다. 외모야 발달된 현대의학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지만 말은 고치기 힘들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순하고 편하면 말도 부드럽게 나온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거나 거칠어지면 딱딱한 말, 거친 말이 나온다. 말도 때로는 체에 쳐서 걸러야 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고운 말, 예쁜 말, 듣기 좋은 말보다는 거칠고 험한 말이 빈번하게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이 거칠어져 간다는 것은 그만큼 심성도 거칠고 사나워져 간다는 의미인가.
한번은 내가 타고 가던 책시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났다. 택시가 차선을 바꾸려고 깜박이를 켰는데 마침 옆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미처 보지 못해 일어난 사고였다. 내려서 보니 택시 앞 범퍼가 약간 찌그러져 있었다.
“이봐요, 이거 어떻게 할거요?”
기사분의 표정이 담박에 험악해졌다. 나도 엉거주춤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어째서 깜박이로 신호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쪽 자가용 운전자가 주춤주춤 내리더니 자신의 차를 한번 훑어보더니 만만치 않게 큰소리를 쳤다. 다행히 그쪽 차는 다친 흔적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내가 저쪽에서 분명히 신호를 보냈는데, 당신이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오?” “난 못 봤단 말이요!” “이 양반 이거 안 되겠네! 당신 눈은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요? 그 눈은 가죽이 모자라 찢어 놓은 거요?” “뭐라고? 당신이 잘못을 해놓고선 왜 도리어 큰소리야!”
이쯤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미처 끼어들 새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욕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 xx가!” “뭐 나다러 x라고? 야, 말 다했어?”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 삿대질이 오고가는 이 광경. 택시 손님인 나로선 난처한 일이었다.
“이보시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차분히 마음들 가라앉히고 얘기 하십시다.”
그러거나 말거나 바쁜 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이 일은 자가용 운전자 잘못이라는 결론이 났고, 택시 수리비용 2십만 원을 주고 합의하는 선에서 그치게 됐다. 그러기까지 한 시간이 지체됐다. 처음부터 어느 한쪽이 좋은 말로 설득하고 사과했더라면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 오가지는 않았을 텐데 서로 시간 빼앗기고 목청 높이느라 힘만 들인 셈이다. 다시 차에 오르자 기사분은,
“손님, 이거 너무 죄송하게 됐습니다. 공연히 저 때문에 귀한 시간 빼앗기시고....”라고 말하면서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차가 망가졌으니 수리하셔야겠습니다.” “다시 고치는 거야 힘들진 않지만 차 고치는 동안 영업을 못하게 됐으니 나참!” “처음부터 서로가 좋은 말로 타협을 했으면 이렇게 시간을 끌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운전하다 보면 성격이 많이 거칠어집니다. 도로는 지하철이나 하수도 공사로 해서 일 년 내내 파혀쳐져 있지요. 또 차들이 많으니 막히죠.... 게다가 이렇게 접촉사고라도 나면 짜증이 나서 먼저 욕부터 나오게 됩니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특히 더하지요. 싸움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서로 목청만 높이게 되는 게지요.” “그러고 나면 기분이 언짢으시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욕설이 오가다보면 서로 상처를 받게 되지요. 택시 기사치고 위장 장애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스트레스가 여간해야지요. 이건 결코 과장이 나닙니다. 저 또한 늘 약으로 사는 걸요.” “제게 병을 고칠 신묘한 약이 하나 있는데....” “뭔데요?”
내 말에 기사분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기사님, 약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마음을 편히 갖고 느긋하게 생각하시면 저절로 병은 낫게 됩니다.” “스님도 참!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우리 꼬마 애들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알면서도 이 마음이란 게 생각대로 잘 안 되는 거지요.” “왜 마음이 제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지 아십니까? 말이 거칠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겁니다. 우선 말을 좋게 쓰려고 노력하십시오.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답니다.” “글쎄? 듣고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기사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나쁜 말, 거친 말을 자주 하게 되면 성격도 그처럼 거칠게 변하지요. 또 아무리 악한 사람도 부드러운 말, 너그러운 말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츰 마음이 넉넉하게 바뀌게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말이란 습관들이기 나름이지요. 되도록 좋은 말을 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마음도 넉넉해지고 스트레스니 병이니 하는 따윈 생기지 않게 되겠지요.” “저도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되도록 말을 조심해서 하려 해도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다보니 우선 성질이 나서....” 그 기사분은 나를 보더니 겸연쩍은 듯 빙긋 웃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보면 자연히 기사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 중 재부분은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들이다.
“우리나라는 행정적으로 달라져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만약 서울 시장이 된다면 맨 처음 할 일이 바로 이 교통지옥에서 시민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서울 시장이 몰라서 저러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만요, 다른 외국처럼 차고지증명제나 주말차량제를 실시해서라도 교통체증을 개선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이처럼 목청을 높이는 기사분도 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직업인데, 길이 이렇게 막히다보면 집에 가면 돈 못벌어 왔다고 야단하는 마누라 얼굴 보기가 무섭습니다.” 또는, “스님, 제가 한 시간에 얼마를 버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낮에도 자주 교통체증이 되니 어젠 계산해 보니 한 시간 죽도록 다녔는데도 겨우 8천 원밖에 안 되더라구요. 나참!”라며 하소연하는 기사분들이 많다. 어떤 기사분은 나름대로 고민한 탓인지 보다 적극적인 개선안을 내놓기도 한다. “정부에서도 도로에 대한 투자를 해야 됩니다. 지금 시행되고 있는 혼잡통행료란 무척 좋은 개선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확산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행정적인 개선을 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럿이 함께 타는 ‘카풀제’도 좋은 제도가 아닙니까, 기사님?“ “맞습니다. 좀더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시간과 돈이 들더라도 정부에서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자동차 1천만 대 시대라 야단하면서 떠들어대는 건 말뿐이지..., 정말 시급한 건 우리도 이젠 올바른 자동차 문화를 정립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택시가 왜 합승을 하는지 아십니까? 정부에서도 단속만 하기보다는 왜 합승할 수밖에 없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부터 먼저 생각해야지요.”
이렇듯 점점 어려워지는 교통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택시기사분들이다. 게다가 손님들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 운전하다 보면 험하고 거친 상소리가 빈번해지는데, 이는 열악한 우리의 교통사정에도 일단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부산대 김경호 박사를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차를 어디에 두셨습니까?”하고 무심코 물었더니, “전 전철을 이용합니다.”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의아해서 다시 물었다. “저야 자가용이 없어서 늘 택시를 이용하고 있지만, 박사님께서는 차가 있는데 왜 안 타고 다니십니까?” “운전하면 심성이 자꾸만 거칠어져서요....”라고 웃으시면서 대답하셨다.
사실 그렇다. 말이 거칠면 심성 또한 자연히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활이 조금 불편하긴 해도 심성이 나빠질까봐 운전을 안 하신다는 김박사가 새삼 존경스러워 보였다. 우리 주위에도 이분처럼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고운 말, 아름다운 말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나쁜 말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나쁜 말이란 무엇인가, 거칠거나 험한 말만이 나쁜 말은 아니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 교묘하게 이간질 시키는 말, 거짓으로하는 말.... 이 모두 거칠고 험한 말만큼이나 더욱 나쁜 말이다. 내가 늘 걱정하는 큰 결점 중의 하나가 말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아 실수를 하는 때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말이 많다보니 간혹 실수를 한다. 또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기도 한다. 우선 마음이 먼저 달려가기 때문이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 내가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할 일들이 많기에 말이 먼저 앞서게 된다. ‘삼중아, 너 이러다간 큰일이로구나!’ 하루에도 세 번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계율 2백5십 가지를 다 지키지 못할 뿐더러 또한 입으로 짓게 되는 죄가 실로 크니 이를 어찌할고!
일찍이 야운 스님은, ‘입은 재앙의 문이다.’라고 하셨다. ‘오로지 입을 지켜라. 무서운 불길같이 입에서 나온 말이 내 몸을 태우고 만다. 일체 중생의 불행은 그 입에서 생기나니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이다.’ 한결같이 입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법구경’의 말씀이다. 나는 참회하고 또 참회하면서 부처님께 엎드려 빈다. 구업을 씻어내고 또 씻어내려 한다.
말이란 이 얼마나 무서운 죄업인가.
조선시대 중엽, 어느 정승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자신의 아내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내게 큰 비밀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이를 들어줄 수 있으시오?”
그러자 정승의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비밀이요? 우리가 40 년간이나 늙도록 해로해 왔거늘, 당신이 나를 못믿는다게 말이 된답니까? 무슨 얘기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라고 궁금해서 정승을 다그쳤다. “만약 이 얘기를 남들에게 발설한다면 우린 삼족이 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 정도로 중차대한 비밀인데....” “여보, 내가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어서 말씀해 보세요.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은 꼭 지키리다.”
그러자 정승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를 반드시 지키실 수 있으시오?” “그럼요. 당연하지요.” “점괘를 보니 앞으로 내가 왕이 될 운수라고 하지 않겠소? 이 비밀은 세상에서 당신과 나 둘밖에 모르는 일이오. 그리 알고 있으시오.” 아내는 정승에게 비밀을 지키겠노라고 언약했다.
그런데 사흘이 못 가 아내는 참지 못하고 친정 어머니께 이 사실을 살짝 귀뜀하게 됐고 급기야 온 장안에 파다하게 퍼지게 됐다. 이 소문은 마침내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정승은 대노한 왕 앞에 불려오게 되었다.
“이놈! 네가 앞으로 이 나라의 왕이 될 운수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이더냐?"
그러자 왕 앞에 깊숙이 머리를 도아리고 있던 정승이 고개를 들더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보고자 제가 아내에게 거짓으로 꾸며본 일입니다. 임금이시여,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시험해 보니 역시 말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말이란 때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에 서면 단 한마디의 말로 인해 사람이 살기도 하고, 때론 죽기도 한다. 단 한마디 말로 사형수가 되기도 하고, 무기수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이 말이고 보면, 말의 위력이란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다. 또 말은 할수록 늘고 되질은 할수록 준다고 했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도 말이다. 물론 말이 고우면 말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고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를 사오기도 한다. 좋게 사용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 또한 말이다. 나는 칭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선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도 칭찬을 자꾸 해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대로 잘하라고 부모가 야단을 치고 윽박지르면 지를수록 더 어긋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말한 대로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자라난 사람은 보다 맑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반면 부모로부터 늘 야단만 맞고 자라난 사람은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의 태도와 말이란 이처럼 자녀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슬데없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는 차라리 침묵이 낫다. 그리고 기왕 말을 하려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한마디가 알맹이 없는 백 마디 말보다도 소중한 법이다. 말은 좋게 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거짓으로 꾸미기보다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라야 말의 참맛이 새록새록 나는 법이다. 비록 투박하고 거칠지언정 남에게 진정으로 위안이 되는 말, 깊이가 있는 말, 말의 향기가 오래 남아 두고두고 생각나게 하는 말.... 세상사가 거칠어져 가고 있음인가. 이런 말들이 요즘들어 부쩍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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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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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한국사 - 김현묵
4. 무신정권시대의 민란 : 군사정권 타도와 신분 해방을 위하여 (1/2)
반란의 원인과 배경 : 민중의 고양된 사회의식
무신란 후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일어났는데 이같은 민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 우선 농촌사회의 파탄에 따른 농민 생활의 궁핍화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려사회는 무신정권 이전 시기부터 국가 권력이 쇠약해짐에 따라 관리들의 횡포와 권문세가의 토지겸병 등으로 농민의 생활은 점차 어려워졌으며 더욱이 지배층에 의한 사원의 난립은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특히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극에 달하여 이를 견디지 못한 많은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예종(1105-1122)은 다음과 같이 탄식한 적이 있다.
지금 각도 주군을 다스리는 사목 가운데 청렴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자는 열에 한 두명도 없어 오직 이익을 얻고자 할 뿐이며, 명성을 얻고자 대체를 상하게 하고 있으며 뇌물을 좋아하고 사욕을 도모하여 백성들을 심히 억압하므로 유망민이 서로 잇달아 생겨 열집 중에 아홉이 빈 집이라고 하니 짐은 매우 가슴이 아프다.
이러한 유민들은 신라 말기처럼 결국 도적이나 걸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씨는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이 피폐된 민중들의 실상을 파악하고 단호한 개혁정치를 펼쳤다면 민란의 발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권이 바뀔 당시에는 일반 민중들은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호족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제대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왕실의 허약함을 알고 있던 민중들은 중앙집권적인 정부에 의한 과감한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말그대로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민중들은 오히려 각성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상층부에게 개혁을 맡긴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며 결국 자신들의 현실은 스스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각종 민란이 발생하였다.
더군다나 무신정권의 전개 과정이 반복된 무신들간의 세력 싸움과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하극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역설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게다가 천민들의 경우, 무신정권 이전부터 정치적 사회적 신분 상승을 하여 심지어는 중앙관리로 나서는 자들도 더러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의종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의민이다. 조선 후기처럼 신분 계층간의 변동과 구조적 와해의 조짐이 보편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천민들 스스로는 신분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조작 세습되거나, 그리고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객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여러 사료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농민들이나 천민들 사이에서는 혼란한 사회가 재정립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 질서와 신분 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를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이러한 보편적인 요구를 무신정권이 묵살하자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신정권 당시의 각종 민란은 유사한 점도 있지만 특이한 배경과 원인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민란 발생 배경에 이와 같은 공통점이 있다면 지금부터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민란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려 민란의 시대 : 전체 개요
19세기가 '조선 민란의 시대'였다면 무신정권이 들어선 1170년부터 이후 40-50년 동안을 고려 민란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김보당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당시 민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참여 계층 또한 농민이나 천민만이 아니라 중앙에서 소외된 일부 지방 호족들도 동조의 움직임을 보였다. 주요 민란만을 보아도, 김보당의 반란 이후 창성, 성천, 철산의 민란(서북지방 : 1172), 조위총의 반란(1174), 명학소민의 반란(1176), 예산(1176), 익산(1177), 여주(1177), 가야산(1177), 옥천(1182), 서산(1182), 남원(1200), 진주(1186), 안동(1186), 경주(1190) 등지의 지역적인 민란, 김사미.효심의 반란(1193), 강릉, 경주(1199), 합천, 김해(1200), 제주(1202) 등에서 일어난 민란, 만적의 반란(1198) 진주 공사노비의 반란(1200), 밀양 관노들의 반란(1202)이 일어났다. 이후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지역의 봉기에서 신라 부흥을 내세웠으며(1202) 고종 때 서경에서 최광수 등이 고구려 부흥을(1217), 담양에서 이연년 등이 백제 부흥을(1237) 각각 표방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중의 항쟁이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단계로 진전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것은 대표적인 민란에 불과하다. 이밖의 것을 포함시킨다면 명종, 신종대만도 전국에 걸쳐 수십 차례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선 문벌귀족이 무너진 다음 정권을 잡은 무신정권은 반복되는 유혈 경쟁으로 인해 안정된 집권 유지를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방 통제가 극히 약화되어 지방관들의 탐학이 날로 심화되었고 중앙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이나 농민 수탈도 극에 달했다. 결국 무신정권이 들어선 뒤부터 사실상 고려는 무정부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 틈을 이용하여 민중들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을 척결하기 위하여 봉기했던 것이다. 이 당시 민란을 여기서 모두 거론할 수는 없다. 그대신 성격이 뚜렷한 민란을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민란의 발생과 특성 : 주요 민란을 중심으로
조위총의 반란(1174년) : 민란 발생의 도화선
이전에도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김보당의 난이 있긴 하였지만 명종과 신종대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민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반란은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봉기이다. 조위총의 신상에 대한 사료는 그리 많지 않으나 의종 말년에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유수라는 말은 임금이 주재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곳을 지킨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문신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신들을 대량 학살할 때에도 살아남은 것을 봐서 어느 정도 무신들과 교류를 하였거나 최소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타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서경유수로 임명된 것으로 봐서 무신들의 신임도 상당히 두터웠던 것 같다. 또한 무신들간에 문신 학살 범위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틈을 타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묘청난에서 볼 수 있듯이 서경 세력은 개경 세력을 견제하는 유일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무신들 역시 이를 무마할 수 있는 자를 서경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위총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하여 무신정권을 속여 충성을 하는 척하다가 서경유수가 되자 난을 일으켰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문신 특유의 자존심을 숨기고 있다가 정권 장악을 목적으로 봉기하였던 것이다.
나름대로 봉기 계획을 마친 조위총은 1174년 9월에 황해도와 평안도 일부 지역에 격문을 돌려 정중부를 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격문에서, "듣건대, 개경의 중방에서 의논하기를 우리 북경의 여러 성이 사납고 난폭해져서 마땅히 토벌해야 한다 하고 이미 대군을 보냈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조위총이 꾸민 내용이지만 그의 봉기에 재령(서흥-봉산 일대) 이북의 40여 성의 대부분이 동조한 것으로 봐서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이 일대에서도 심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위총의 격문은 단지 이를 집약시키는 구실을 했을 뿐이다. 이때 농민들이 조위총의 봉기에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무신정권 이후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가 매우 미약해져 지방 관리들의 농민 수탈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반무신정권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참여했던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묘청난 이후 개경 집권자들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지역 감정적인 면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위총이 봉기했다는 보고를 받은 무신정권은 곧바로 평장사 윤인첨(이 사람도 역시 문신이다.)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내시예부낭중 최균을 여러 성에 보내 반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토벌군과 반란군은 재령 근처에서 처음으로 맞딱뜨리게 되었다. 토벌군이 재령에 이르자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고 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토벌군은 지리나 날씨에 익숙치 못한 탓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런 틈을 타서 반란군은 고개 위에서 쳐내려가 삽시간에 토벌군을 물리쳤다. 윤인첨은 포위당하여 끝까지 싸우려 하였으나 도지병마사인 정균이 훗날을 도모하자고 말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첫 전투는 반란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한편 동계 방면에서는 조위총의 부하 장수인 김박승, 조관 등이 화주영을 점령하고 있었다. 윤인첨의 군대를 물리친 반란군은 사기가 올라 개경을 향하여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이의방은 화가 난 나머지 개경 안에 있는 서경 출신 양반들인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거리에 효수한 뒤 군대를 모아 출정하였다.
이의방은 우선 기습 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그는 최숙 등에게 정예 기병 수십 명을 보내 반란군의 허를 찔렀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에 말린 반란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이의방은 전진 명령을 내려 대동강 유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반란군은 서경 성문을 모두 걸어잠그고 토벌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 날씨에 익숙지 못한 토벌군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반란군의 공세에 패해 밀려나고 말았다. 서경으로 돌아온 이의방 등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같은 해 11월에 5군을 편성한 뒤 윤인첨을 원수로 임명하고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서경을 집중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3차 토벌군에게 갑자기 출정 보류 명령이 떨어졌다.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손에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같은 해 12월이었다. 이의방이 살해당한 뒤 무신정권 내부에는 잠시 혼란이 일어났다. 정중부 일파는 이를 무마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조위총에게, 이의방을 처단하였으니 이제는 화해하자는 협상안을 제시하였다. 조위총은 '의방을 처단한 것을 축하한다'는 상표를 사신을 통하여 개경에 보냈다. 그런데 정중부 일파는 사신을 옥에 가두고 말았다. 정중부 일파의 제의는 순전히 기만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결국 양 세력 사이의 화해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3차 토벌군이 출발한 것은 대략 해가 바뀐 1175년 1월이나 그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토벌군은 서경을 목적으로 진격하였지만 연주(개천)에 있는 조위총 지지 세력이 있어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두경승은 먼저 이곳을 쳐야만이 서경 점령이 수월하다고 판단, 함남의 남쪽을 거쳐 서북 지방에 이르러 개천으로 진격하였다. 이 성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개천을 소홀히 하면 토벌군은 앞뒤에서 공격을 받게 되어 패배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개천을 차지하게 되면 서북 지역의 다른 성 점령도 한층 쉬워진다. 두경승은 이러한 점을 묘청난 때 김부식이 써먹은 전술에서 배웠던 것이다. 연주 전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이곳의 전투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아마 늦겨울에 시작하여 봄까지 진행된 듯하다. 조위총이 이곳을 집중 지원했던 점으로 봐서 그의 충실한 부하가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연주가 매우 중요한 거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주는 두경승의 집요한 공격에 함락되고 말았고 이 전투로 수천 명의 반란군이 죽고 수백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런 숫자만 봐도 이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전투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반란군에 참여한 농민들의 저항이 매우 완강했음을 뜻한다. 즉 이곳 지역의 농민들이나 무신들은 개경의 무신정권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성이 함락되자 그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은 토벌군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남은 것은 서경 뿐이었다. 윤인첨은 다시 전열을 다듬어 서경으로 향했다. 윤인첨의 군대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동북쪽에 토산을 쌓아 성안을 공격하였다. 조위총은 주위 성과 통신이 거의 두절되어 고립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조위총은 마지막 수단으로 금나라에 호소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김존심과 조규를 금나라에 보내 이의방 등이 왕을 살해하였으니 이는 모반이라고 하면서 군대를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김존심이 조규를 죽이고 토벌군에 투항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금나라에 보냈다. 조위총은 서언을 통해 말하기를, 재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게 넘겨줄테니 원병을 보내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금나라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서언을 잡아 고려정부에 넘겨버렸다. 결국 조위총의 사대적인 계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위총은 서경 내의 군대만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양군 사이의 전투는 거의 일 년이 지나도록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1176년 6월, 윤인첨이 서경의 통양문을 공격하고 두경승이 대동문을 공격하는 등 총공세를 펼쳐 반란군은 패하고 말았다. 조위총은 사로잡힌 뒤 처형당하였다.
이로써 1174년 9월부터 1176년 6월까지 거의 22개월 이상 벌였던 반무신 항쟁은 끝을 보게 되었다. 묘청난 이후 다시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 무산된 셈이다. 그러나 반란이 평정된 후에도 잔류 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계속 투쟁을 벌였다. 즉 이에 참여한 농민들이 끝까지 무신정권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조위총의 반란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난이 진행되는 동안에 전국에 걸쳐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조위총 개인의 정권 탈취욕에서 시작된 반란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란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그 힘이 서경을 중심으로 오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위총의 반란이 농민항쟁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전국적인 민중 봉기의 서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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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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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둘째 묶음 : 아름다운 순간들
아름다운 순간들. 2
10 '추억은 우리의 교양 있는 분별력으로 정도가 알맞아야 한다. 감사와 기쁨으로 추억을 간직하는 것과 거기에 묶인 채로 남아 있는 것 사이에는 삶과 죽음만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추억을 감사하게 간직하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움켜쥐고 여전히 무엇을 구하면 우리는 비현실과 신경쇠약에 빠지게 되고 당장에 사람들은 우리의 인격을 의심하게 된다.'
10년도 더 된 나의 옛 노트에서 발견한 유진 프라이스(Engene Price)의 말이 오늘따라 더 가까이 들린다.
나이들수록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추억의 노예가 되기 쉽고, 추억을 밑거름으로 전진하기보다는 그대로 그 안에 갇혀 비현실적이 될 때가 많은 것 같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추억이야말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면 추억을 잘 가꾸고 다스리는 일 또한 그리 만만치 않다.
11 매일 오후 두 시경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수녀원에 오는 집배원 아저씨를 위해 벌써 몇 년째 한결같은 정성으로 간식을 준비하며, 그 분을 가족처럼 친절하게 맞아주시는 단아한 칠순 수녀님의 모습은 늘 아름답고 따뜻하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잎들을 객실의 유리접시나 재떨이에 띄워놓기도 하고, 솔방울이나 낙엽들을 주워다 장식할 줄도 아시는 다정하고 해맑은 할머니 수녀님은 모든 손님들을 늘 기쁘게 하시니 우리 객실의 '고운 해님'임에 틀림없다.
12 아침에 일어나서 신발을 신으려고 현관에 나가면 누군가 어느새 내가 신는 쪽으로 가지런히 돌려 놓은 정성에 고마움을 느끼며 나도 다른 이의 신발을 돌려 놓게 된다.
'따뜻이 안아줄 줄 안다. 내 발을 너는 보잘것도 없이 추운 뜨락에서 잠들지만 나의 무딘 발이 네게로 불쑥 찾아들었을 EOs 너는 어김없이 그랬다 어머니가 안아주시듯 그렇게 내 발을 포옥 껴안았다.'
권영상님의 <신발>이란 동시를 외우며 신발을 신노라면 한결 더 정답고 따뜻해보이는 한 켤레의 나의 신발.
13 오늘은 미국 켄터키,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하롤드(Harold)수사님의 글을 받았다. 하얀 수도복에 검은 성의를 걸쳐 펭귄새의 모습을 연상케도 했던 그 분이 지난 겨울, 여행 중에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나는 통도사의 어느 암자로 그를 안내했었는데 그곳 ㅂ스님의 환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눈이 푸른 외국인과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그 스님은 처음 보는 손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듯했다. 손님이 작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신기 해 하자 즉시 고운 한지에 그것을 선물로 싸 주었고, 사진을 찍고 싶은데 필름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방에 들어가 스님의 카메라 안에 들어 있는 필름을 꺼내 '다행히 아직 쓰지 않았다'며 건네주었다.
손님맞이를 그저 적당히, 소극적으로 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는 ㅂ스님의 모습에서 나는 늘 '깨어 살아 열려 있는' 구도자의 민감성을 읽었다.
14 만 25년 만에 만난 나의 국민학교 동창생이 대뜸 '얘, 난 먼 나라에서도 네가 쓴 글을 종종 읽어보았는데 전부 다 내가 쓴 것으로 착각이 들곤 한단다. 괜찮지?'하며 어릴 때와 변함없이 밝고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다정했다. '너도 다 잊어버렸지? - 별을 보며 주고 받던 고운 이야기 깨어보니 꿈이었구나 - 이건 네가 국민학교 때 내게 적어주었던 최초의 글이야' 하며 반가움에 눈물 글썽이던 벗 현숙. 내게는 필요도 없는 알록달록한 고운 돌멩이 액세서리(팔찌)를 상징적으로 받으라며 떼를 쓰던 친구. 내가 즐겨 싸 가던 도시락 반찬 중 감자볶음은 자기가 더 많이 먹었다면서 깔깔대던 그의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에서 나는 초록으로 찰랑이는 동심의 노래를 들었다. 어릴 적 동무들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치자꽃처럼 향기롭게 괴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15 오늘 아침, 미사 때 들은 ㅌ수녀님의 플롯 연주는 아름다웠다. 오늘처럼 비오는 여름날은 목관악기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어도 좋고, 요한스트라우스의 왈츠곡을 들으며 춤추는 마음이 되어도 좋으리라. 형편상 자주 듣는 편이 못되지만 아름다운 음악은 그대로 아름다운 기도이다.
<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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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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