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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29 호
단기 4341. 11. 14 (음력 10. 1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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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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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2009 부일 신춘문예
'문학청년'들은 이때쯤이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사병을 앓습니다. 첫사랑에게 보낸 연서가 이만큼 아름다울까요? 올해도 어김없이 '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한국해양대와 공동으로 마련한 해양소설(중편) 부문은 부산일보만의 특별한 시도입니다. 이밖에 단편소설, 시, 시조, 동시, 동화, 희곡, 수필, 평론 등 모두 9개 부문에 걸쳐 작품을 공모합니다. 한국 문학의 새 별이 되십시오.
■ 공모 부문
·해양소설(중편, 200자 원고지 200장 안팎)=당선작 고료 1000만원
·단편소설(200자 원고지 70장 안팎)=당선작 고료 500만원
·시(3편 이상)=당선작 고료 300만원
·시조(3편 이상)=당선작 고료 300만원
·동화(200자 원고지 30장 안팎)=당선작 고료 300만원
·동시(3편 이상)=당선작 고료 300만원
·희곡(200자 원고지 70장 안팎)=당선작 고료 300만원
·수필(200자 원고지 15장 안팎, 3편 이상)=당선작 고료 300만원
·평론(200자 원고지 60장 안팎)=당선작 고료 300만원
☞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표시한 것이며, 컴퓨터로 작성한 원고는
A4 용지로 출력, 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원고량을 표시해서 보내면 됩니다.
■ 마감=12월 12일(금)까지 부산일보사에 도착해야 합니다.
■ 보낼 곳=부산 동구 수정동 1의10 부산일보사 편집국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우편번호 601-738). 문의전화 051-461-4181. 겉봉에는 붉은 색으로 '응모 부문'을 적어주십시오. 원고 앞 장에는 응모 부문, 응모 편수, 이름(필명일 때는 본명), 전화번호, 주소를 적어 주십시오.
■ 발표=2009년 1월 1일자 부산일보 지면.
■ 유의사항=동일한 원고를 타사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하면 심사에서 제외되며, 사후 확인될 경우 무효 처리됩니다.
■ 기타=가작은 당선작 상금의 반액을 지급하며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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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9 경향 신문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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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이 나의 출발의 바탕이고 무능이 나의 근원이다.(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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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언어예절
저 몇 달 닫혔던 미국 쇠고기 푸줏간이 열리자마자 살코기를 몇 관씩 끊어갔다던 분은 포원이 풀렸는지? 부시도 다녀가고 ‘미친소’ 반대 촛불집회는 일백회 가풀막을 비춘다.
한우는 보통 송아지 적 아니면, 좀더 먹여 여러 해 논밭을 갈고 새끼를 몇 배 보고서야 어렵사리 내다 팔았다. 호사가들 얘기지만, 고기 맛이야 예나 지금이나 열 달을 넘기지 않은 하릅송아지를 제일로 친다. 일본에선 스무 달짜리 안쪽을, 우리는 서른 달이 넘지 않은 물건을 들여온다는데, 협상 정부나 장사꾼 두루 주권·신용 다 뭉개고 야합하는 세상에 달수 따지는 것도 부질없다.
소 나이(연령) 세는 말이 따로 있지 않으냐는 분들이 있다. 전날엔 집짐승인 소나 말, 개를 한습(하릅) 두습(이릅) 세습(사릅) 나릅 다습 여습 이롭 여듭 아습(구릅) 담불(열릅)처럼 헤아렸다. 누에는 다섯 잠(령)을 한 달 안에 마치니 단위가 다르다. 어린아이도 요즘은 달수(월령)로 헤아리고, 집짐승 먹이고 친화하는 개념이 많이 흐릿해진 지금, 공장내기 말·개·소 나이 일컫는 말이야 온전하겠는가?
‘소’는 잡지만 ‘쇠’는 잡지 못한다. ‘미친소’를 만든 건 사람이다. ‘연세·연치’를 높임말로 치는데, 이빨로 소 나이를 헤아리니 ‘연치’(年齒)가 제격이겠다. 나이를 세는 단위 ‘살’은 ‘한 살, 두 살, 아흔 살’처럼 고유어와 어울리고, ‘세’(歲)는 ‘십이세, 삼십세, 구십세’처럼 한자말과 어울린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ㅣ'모음 역행동화
딸을 인신매매한 남자들을 상대로 복수극을 펼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에미', 봄날 들판에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아지랭이', 젖먹이 아이나 나이가 많지 않은 딸·며느리를 정답게 이르는 말인 '애기',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해 그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때 쓰는 말인 '챙피하다' 등은 흔히 널리 쓰이는 말이지만 표준말이 아니다. 현대 국어에서는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말들은 방언으로 보아 원칙적으로 표준말로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어미''아지랑이''아기''창피하다' 등으로 써야 옳다.
'ㅣ'모음 역행동화란 뒤의 'ㅣ'모음 혹은 'ㅣ'모음을 갖고 있는 이중모음(야, 여, 요, 유)의 영향을 받아 앞의 '아, 어, 오, 우'가 각각 '애, 에, 외, 위'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곰팡이, 다리미, 손잡이, 아기, 아지랑이, 어미, 지팡이, 지푸라기, 창피하다, 학교' 등을 '곰팽이, 대리미, 손잽이, 애기, 아지랭이, 에미, 지팽이, 지푸래기, 챙피하다, 핵교' 등으로 말하는 것을 이른다.
그런데 이 원칙에는 몇 가지 예외가 있다. '경험이 없어서 일에 서투른 사람이나 차분하지 못해 객기를 잘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 '풋내기'를 비롯해 '-내기' 형태를 취하는 몇몇 단어(새내기, 서울내기, 시골내기, 신출내기)에서는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형태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냄비, 동댕이치다, 올챙이'등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는 이러한 말을 널리 사용하는 언어 현실을 무시하기 어려운 사정 때문이다.
잇달다, 잇따르다
사회는 늘 변화하며 발전합니다. 새해 새 희망으로 기세 좋게 출발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우리 모두는 울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일이나 현상의 변화와 연속성'하면 떠오르는 용어가 있는데요. '행위나 상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짐'을 뜻하는 말로 '잇달다'와 '잇따르다'가 있습니다. 둘 다 표준어지만 품사적으로 용례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①유세장에 인파가 잇달았다. 실종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②화물칸을 객차 뒤에 잇달았다. 단추에 단추를 잇단 옷매무새.
①의 '잇달다'는 자동사적 용법으로서 '어떤 사고나 행위 등이 계속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②에서의 '잇달다'는 목적어가 있는 타동사적 용법으로서 주로 '~을 ~에 잇달다'의 형태로 구성돼 '일정한 모양이 있는 사물을 다른 사물에 이어 달다'의 뜻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잇따르다'는 '(행운.비난 따위가)잇따르다' '대통령의 가두행진에 보도 차량이 잇따랐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동사로 주로 활용되며, 그 뜻 역시 움직이는 물체가 다른 물체 뒤를 이어 따르거나 사건.행동 따위가 연이어 발생한다는 것으로 '잇달다'의 자동사적 용법과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하나 더 알아둘 게 있는데요. '잇달다'와 '잇따르다'의 관형형은 각각 '잇단'과 '잇따른'이라는 것입니다. '잇딴 사고' '잇달은 점포' 등의 표기는 잘못된 것이니 기억했으면 합니다.
- '잇딴 사고'의 '잇딴'은 잘못이다. '잇달다'와 '잇따르다'의 관형형은 '잇단'과 '잇따른'이므로 '잇단 사고'와 '잇따른 사고'가 옳다. -
애매모호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들로 '모호하다''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있다. 한자어 '모호(模糊)'와 '애매(曖昧)'는 같은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분명하지 않음'의 뜻으로 원래 '모호'만 사용하고 '애매'는 쓰지 않았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애매'와 '애매모호'도 '모호'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이것을 다시 우리가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모호하다' 외에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가 함께 쓰이고 있으며,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모두 올라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굳이 일본식인 '애매하다''애매모호하다'를 쓸 필요가 없다. '애매모호'는 더구나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의 중복 형태다.
더 큰 문제는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별개로 순 우리말 '애매하다'가 있어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순 우리말로서의 '애매하다'는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애매한 사람을 죽이려 들지 마라' 등에서처럼 쓰인다. '애매한 정책이 애매한 사람을 잡고 있다'고 할 경우 앞뒤의 '애매'는 각각 의미가 다른 단어다. 앞의 '애매한'은 '불분명한'을 뜻하는 한자어이며, 뒤의 '애매한'은 '애꿎은''억울한'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 경우 '모호한 정책이 애매한 사람을 잡고 있다'고 해야 훨씬 의미가 명확해진다. '불분명하다'는 뜻으로는 '모호하다' 하나만 쓰고,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당한다'는 뜻으로는 순 우리말 '애매하다'를 쓰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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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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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초대장 - 김용화
가을이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꼭 오시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만 그대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만약, 그대가 못 갈 사정이 생기시더라도 죄송하지만 그대의 시간을 훔칠 계획입니다
나뭇잎마다 시화전을 한다는군요 예쁜 잎새에 시를 한편 쓰고 색깔을 넣어서 대지 앞으로 제출한다고 합니다
심사는 그대가 해도 좋겠습니다 밤하늘 오선지에 그려진 악보를 보고 귀뚜라미는 연주회를 한다는군요
이것도 그대가 심사해도 좋겠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구름이 수채화를 그린답니다 역시 심사는 그대의 몫입니다
꽃들은 패션쇼를 한다는데 그대가 특별 출연하다면 갈채를 받을 겁니다
햇빛은 과일 조각전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볼만하겠습니다 그대와 팔짱을 끼고 축제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을 하늘만큼이나 마음이 설레고 기쁘답니다
제발, 일이 바쁘다고 구차한 변명은 하지 마세요 내가 싫거나, 가을이 싫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가을 축제에 꼭 같이 가겠다고 손도장 찍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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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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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무렵 - 김경자
잣나무가 없어도 잣 밭이라 하는 마을 잣 향기에 이끌리어 돌아오는 소녀 하나 해 종일 배슬거리던 들바람도 돌아간다
천수답 나락 팰 때 노르스름한 벼꽃 향기 다래 숲에 세 들어 사는 할미새 노래 좋아 여물솥 풀풀 밀치며 내다보는 뽀얀 김
시름 속에 기다리는 짠한 마음 먼저 알아 빛으로 말해 주는 외딴 집 초록 별빛 아래 들깻잎 간종거리는 청국장 맛 같은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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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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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대현 올려 - 정철
거문고 대현 올려 한과 밖을 짚었으니 얼음에 막힌 물 여울에서 우니는 듯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르 좇아 마초나니
<지은이> 정철 <말 뜻> 대현(大絃) : 거문고의 넷째 줄의 이름. 과(課) : 대과(大課). 첫째 과. 과는 거문고 줄을 받치는 기러기발.
<감상>
대현 위에 올려놓고 한과 밖을 짚은 거문고 줄 위에서 율동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눈에 선하구나. 그 소리 또한 얼마나 맑고 아름다우냐. 마치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 게다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반주가 더없이 절묘하구나!
구성진 거문고 소리를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 하다 했고, '널따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주라도 하듯이 장단을 맞춘다는 착상이나 시정(施情)이 송강의 붓끝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청각에 호소한 음률의 표현이지만, 그 뒤에 숨은 시각적 영상이 더욱 선명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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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지혜,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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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100가지 지혜 - A. 갤리언
제2장 짐승이 가르쳐 준 교훈
가장 강한 신랑
어느 곳에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는 수도사가 있었다. 선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인지라 하나님도 그를 깊고 아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수도사가 강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억센 발톱 사이에서 쥐 한 마리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그 쥐가 가엾게 생각되어 수도사는 외투자락으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집에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싶었으나 집안 식구들이 더럽다고 반대할 것 같아 여자아이로 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신앙이 깊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쥐를 예쁜 소녀로 변신시켜 주었다. 수도사는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마치 친딸처럼 예쁘게 키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소녀가 열두 살이 되었다.
"너도 이젠 나이가 찼으니 시집을 가야지? 너는 어떤 사람을 남편으로 삼고 싶으냐?"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 내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태양인 것 같다. 우리, 태양에게 결혼을 부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수도사는 몸을 청결히 하고 태양에게 호소했다.
"태양이시여, 만물을 자라게 하는 강한 자여!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딸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하기에 , 제가 그 뜻을 전하려 합니다."
수도사의 호소를 듣고 태양이 응답하였다.
"주님께서도 그대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내가 진실을 말하겠노라. 나는 그렇게 강한 자가 못되네. 나보다 강한 자가 있다네." "그분은 누구십니까?" "구름의 대왕이지. 그가 구름을 피우기 시작하면 나는 그 속에 갇히게 되고 이 세상은 암흑에 되어 버린다네."
수도사는 태양이 가르쳐준 대로 구름이 생성되어 퍼지는 곳으로 가서는 구름의 대왕을 불렀다. 수도사의 이야기를 들은 구름 대왕은 대답했다.
"그대의 이야기를 잘 들었노라. 물론 나도 강하긴 하지. 하지만 나보다 강한 자가 있어 나도 그에게는 꼼짝 못한다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람이네. 바람은 나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날려보내기를 식은 죽먹기처럼 하네. 바람에게만은 맥을 못 추겠거든." 수도사는 바람을 찾아가서 구름의 대왕이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강한 힘을 가졌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상대가 있네. 그대는 그자에게 가서 부탁해 봄이 어떤가?" "그가 누구입니까?" "산이네. 내가 아무리 강한 바람을 보내도 산이 가로막으면 난 힘을 못 쓰거든."
수도사는 산에게로 가서 또 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내가 강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나에게도 두 손을 들게 하는 상대가 있으니 그자를 가르쳐 주겠네. 바로 쥐일세. 쥐는 내 배 가운데에 구멍을 뚫는 놈이네." 수도사는 쥐를 찾아갔다. "당신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겠소?" "거대한 산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자는 우리 쥐들밖에 없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쥐이기 때문에 땅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수도사는 다시 딸에게 돌아갔다.
"내가 여태 돌아다녀 보았지만 결국 쥐가 제일 강하다는 결론이 났다. 쥐에게 시집가겠니?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주님께 부탁드려서 원래의 네 모습인 쥐가 되도록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녀는 다시 쥐가 되었다.
수도사는 소녀 쥐를 쥐구멍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희망
랍비인 아키바가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당나귀와 개와 작은 램프를 갖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 시작하자 아키바는 한 허름한 헛간을 찾아내어 그곳에서 잠자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잠자기에는 이른 시각이어서, 그 램프에 불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램프의 불이 껴져 버려 그는 할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밤 불운하게도 여우가 개를 죽여 버렸고, 사자가 당나귀를 죽여 버렸다. 아침이 되자 그는 램프만 갖고 혼자서 쓸쓸히 출발했다. 어떤 마을에 들어가니,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지난 밤 도적이 들이닥쳐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몰살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램프가 바람에 꺼지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도적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개가 있었더라면 개가 짖어대어 도적에게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당나귀 역시 틀림없이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덕분으로 그는 도적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랍비는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연결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숨을 희생한 개
집 안에 우유가 있었다. 그런데 뱀이 그 우유 속에 들어가 버렸다. 고대 이스라엘 농촌에는 뱀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그 뱀은 강한 독을 품은 뱀이었기 때문에, 우유 속에 독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개만이 그것을 알아차렸다. 가족이 창고에서 우유를 꺼내려고 할 때, 개가 맹렬히 짖기 시작했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우유를 마시려고 하자 개가 뛰어들어 우유를 엎지르고,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는 곧 죽어 버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가족들은 우유 속에 독이 들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개의 희생은 그 무렵의 랍비에 의해서 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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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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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3. 택시 기사 시아버지가 최고라구요?
복을 짓는 마음
옛날 어느 마을에 구두쇠가 있었다. 그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장사와 고리대금업을 한 덕에 엄청난 돈을 모으게 됐다. 재물이 흡족할 만큼 생기게 되자 이제는 일 년쯤 편히 쉬며 안락한 생활을 즐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돈 모으기를 중단하고 편히 쉬려고 하던 바로 그때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그의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서 였다. 구두쇠는 이제껏 죽을 힘을 다해 돈 모으는 만 자신의 시간을 썼기 때문에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구두쇠는 온갖 지혜를 짜내어 저승사자를 돌려보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구두쇠가 말했다.
“더도 말고 딱 사흘만 여유를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이제껏 모은 재산의 3분의 1을 당신에게 떼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들은 체를 하지 않았다. “정 그러시면 단 하루라도 여유를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면 3백만 냥이나 되는 내 재산을 몽땅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단 하루의 여유조차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구두쇠는 마지막으로 간청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발 글 한 줄 쓸 시간이라도 주십시오.”
그러자 저승사자는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구두쇠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업서 얼른 혈서를 썼다. ‘사람들아,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 나는 3백만냥을 갖고도 단 한 시간도 내 인생을 살지 못했다.’ 돈을 모으느라 자신의 인생과 모든 즐거움을 희생하고 나니 구두쇠에게 남은 것은 회한 뿐이었다. 이처럼 애써 돈을 모았다 한들 늙고 나면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빈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이 구두쇠가 조금이라도 자신과 남을 위해 돈을 썼더라면 아마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돈과 인생을 맞바꾸려 했던 이 구두쇠의 얘기처럼 우리도 헛된 재물 욕심에만 아까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삼 일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요. 백 년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 티끌과 같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았다 한들 그것은 삼 일 닦은 마음에 미치지못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남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품을 행하는 것이 진정한 참삶이요, 또한 생사의 고해를 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수행이 보시행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이 보시란 자비로운 마음으로 조건 없이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며,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생활이 보시행인 것이다. 보시는 남을 기쁘게 하며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주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쁜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날이 갈수록 예전과 같지 않은 각박한 인심을 느끼게 된다. 콩한 쪽이 생겨도 나누어 먹을 줄 알았던 우리 조상들의 훈훈한 인정미가 요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재산은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것 같다.
어느 할머니가 김밥 장사를 해가며 평생 모은 수억 원의 돈을 대학교 장학기금으로 선뜻 내놓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제대로 고운 옷 한번 입지도, 맛난 음식 배부르게 한번 먹지도 않고 꼼꼼히 모은 돈을 진정 가치 있는 선행에 쓰고자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부자이고 또 돈이 많은 재산가라 해서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에 우리에게 훈훈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얘기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와 같은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꾸준히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택시 기사분들 중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의 10분의 1을 꼭 떼내어 남을 돕는 사람이 있고, 장애인을 무료로 태워주는 사람, 내게 요금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 그리고 하루에 20분이라도 날마다 선행을 하는 갸륵하고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게 될때 내 마음은 행복해진다. 이렇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기에 우리가 모여 사는 이 세상이 깨끗해지고 선하게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이들이야말로 세상의 탁해가는 물을 청정하게 정화시키는 정화수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이처럼 남에게 선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복을 짓는 일이다.
내 얘기를 하나 하겠다. 부산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단골로 들르는 곳이 하나 있다. 자비사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그랜드 호텔 안에 있는 목욕탕이다. 처음 간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하루는 돈 받는 창구에서 어느 직원이 나를 보더니 ‘목욕탕 사장의 지시’라고 하면서 스님한테는 특별히 목욕비를 반값으로 할인해서 받으라고 했다며 값을 깎아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목욕탕 사장이 직접 나를 보자고 했다. 사장은 자신이 불교 신자라고 소개하면서, 스님은 좋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니 반값도 필요없고 아예 그냥 하시라는 거였다. 이런 친절을 받고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 탓에 5시 반이면 나는 어김없이 그 목욕탕으로 향하곤 했다. 그렇게 해오기를 3년째. 그동안 몇 번 주인이 바뀌었지만 새로 오는 사람마다 우연하게도 모두가 불교 신자라 그전처럼 무료로 다닐 것을 내게 부탁하곤했다. 그런데 사실로 말하자면 내 속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속담에 ‘벼룩도 낯짝이 있다.’라고 했거늘 그것도 한두 번이면 괜찮겠지만 매번 이렇듯 공짜 목욕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창구에 있는 아가씨 보기가 민망하고 탕 안의 비누 한 장도, 타월을 쓰는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들곤했다. `이대로는 내가 불편해서 안 되겠다. 차라리 돈을 내고 떳떳이 다니는 것이 낫겠다.`싶은 마음에 여러 번 돈을 내려 했다. 그럴 때마다, “기왕 이렇게 해오신 것이니 이대로 그냥 하십시오. 그래야 저희도 복을 짓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무색한 답변만 듣게 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좋은 기회가 생기게 됐다. 2년 전 주인이 호텔 직영으로 다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꼭 돈을 내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 먹었지만 결국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일주일 전 마침 누가 나를 보자는 전갈이 왔다. 안 상무라고 불리는 그 호텔 총지배인이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를 왜 보자고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밀린 목욕 요금을 모두 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껏 밀린 요금을 모두 합산해서 내는 도리밖에 없지.` 이렇게 생각하니 한편으로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사실 그간 안 상무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도 고개가 수그러지고 웬지 주눅이 드는 나 자신을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 이번 기회에 나도 남들처럼 떳떳이 요금을 내고 다녀야겠다.`나는 다짐을 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다. 마침 안 상무는 사무실에서 혼자 있었다. 반기며 나를 자리에 앉게 한 뒤 그는,
“스님, 제가 뵙자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간 목욕탕을 호텔서 직영으로 해오다 이번에 새로 대전서 주인이 오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는
“염려 마십시오. 앞으론 제가 돈을 내고 다니지요.”
라고 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미안한 말을 꺼내기 어려워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스님, 그게 아닙니다. 실은 이번에 새로 오는 주인에게 제가 특별히 스님에 대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론 이 표를 창구에 내시면 됩니다.”
그가 정색을 하더니 전철표같이 생긴 종이 한 장을 건네주는 것이다.
“아닙니다. 앞으론 제가 돈을 내고 다니겠습니다. 이렇게 오래 거저 다니다보니 제 마음도 실은 불편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간곡하게 사정했다. “저도 현생에 복을 짓도록 스님, 좀 도와주십시오!”
그는 오히려 내게 사정을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고마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고 말았다. `내 마음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것이 그를 편하게 하는 일이라면 참자.` 요즘도 어쩌다 길에서 안 상무를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는 왜 요새 자주 안 오시는가 묻는다. 그럴 때 내 대답은 `바빠서요, 죄송합니다.`하고 얼버무리게 된다. 사실 예전보다 더 바빠진 게 사실이지만,`자주 좀 오시라.`는 그의 말이 참으로 고맙다. 또한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그토록 과분한 친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목욕물 보시를 받을 만한 진정한 스님인가? 그들의 기대에 부끄럽지 않게끔 앞으론 더욱 열심히 돌아다니고 이 육신 아끼지 말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해야겠다.!` 목욕탕에 갈 적마다 몸과 마음의 대를 말끔히 씻게 될 뿐만 아니라 남들 앞에서 한층 낮아지는 겸손함을 배운다. 또 이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수행에 정진하려는 마음이 된다. 그러므로 목욕탕에 가는 시간은 내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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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4부 우리 민족의 원형
6. 결혼과 장례 풍속도
남자들은 첩을 두면서
동이족은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고 옛 기록들은 전한다. 동이족은 제천의식과 같은 국가 행사에서 뿐만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가무를 즐겼다. 부여 사람들은 어린이나 늙은이, 남자나 여자 가릴 것 없이 길을 걸어다니며 노래를 불러대서 하루종일 노랫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남녀가 밤에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진한에서는 술과 노래와 비파를 뜯으며 놀았다. 이렇게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긴 것은 생활이 풍족해서라기보다는 낙천적인 기질 탓이었다. 지금도 중국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 땅이나 두만강가나 백두산 언저리에서 술마시고 가무판을 벌이는 사람들은 거의가 조선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야외에서 모임을 가지면 거의가 노래하고 춤추며 논다. 이런 기질과 놀이문화는 유래가 길다. 자유분방한 생활 태도는 남녀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부여에서는 남녀관계가 음란했다. 고구려도 풍속이 음란하였고 남녀가 밤에 서로 떼지어 어울려서 떠들썩하게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제천의식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도 남녀가 자유로이 어울렸을 것이다. 부여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였던 것 같다.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이는 형벌을 시행했다. 이 음란이 처녀 총각사이인지, 유부녀 유부남 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부부사이 이외의 교제와 성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주로 여자에게 씌운 굴레로 보인다. 투기하는 여자를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 있었던 것을 모면 이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왕자 이모이는 사통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별말썽이 없었던 것을 보면 여성에게만 차별적인 형벌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예 땅에서는 부인들이 정절을 잘 지켰다고 하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또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하는데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을 데리고 살았다는 기록이 없으니 남성우월적 남녀관계가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도 남성 중심적인 재산 상속의 한 형태이다. 동옥저에서는 해마다 7월이면 동녀를 구하여 바다에 던졌다. 심청전에 보이는 것처럼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해달라고 해신에게 비는 풍습에서 나왔겠으나 여성을 희생물로 삼는 차별의 한 모습이다. 여자의 정절을 강조한 것은 청동기시대 이후 남성 위주의 가부장사회에서 태동한 차별적인 성관이다. 남성들은 일부일처제도를 표면적으로는 유지했지만 첩이라는 제도를 두어 실제로는 일부다처의 가족형태를 만들어냈다. 자유분방한 남녀관계와 사회 분위기를 국가의 통제력으로 억누르고 남성위주의 제도로 고착시킨 것이다. 동이사회에서도 첩제도가 공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옥저는 고구려가 자꾸 힘을 키워 압박을 해오자, 특산물을 바치면서 미녀를 끼워 보냈다. 고구려에서는 이 미녀들을 첩으로 삼고 종처럼 부려 먹었다고 한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나라의 대인들은 너댓 명의 아내를 두었고 하호들은 두세명의 아내를 두었다고 한다. 일본의 부인들은 음탕하지도 않고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부다처가 제도화되었고 엄격하게 여성을 통제한 탓이다.
혼인 풍습을 살펴보자. 예에서는 같은 성바지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진한에서는 혼인을 예의에 맞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변진에서는 혼인하는 예법에 남녀의 분별이 있다고 하였다. 동옥저의 혼인 절차는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자는 나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한다. 그러면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데려다 기른다. 여자가 성인이 되면 친정으로 돌아간다. 이때 친정부모들은 신부의 몸값을 요구한다. 요구한 돈을 받으면 사위집으로 여자를 돌려보내 정식 혼인을 시킨다. 이것이 양식, 곧 예처제도이다. 이 사실을 유별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동옥저에만 있던 혼인 풍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구려에서는 혼인을 약속하고 나면 신부집에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 신부집에서는 먼저 본채 뒤에 작은 집을 짓는다. 이를 서옥, 곧 사위집이라 부른다. 사위가 될 사내는 저물 무렵에 여자의 집 창문밖에 가서 스스로 이름을 외친 뒤 무릎을 끓고 절을 드린다. 그리고는 간절한 말로 빈다. 따님과 자게 해주소서, 따님과 자게 해주소서, 따님과 자게 해주소서. 이렇게 세 번 간청하면 여자의 부모는 사위를 들여 작은 집에 머물게 한다. 신랑이 가져온 돈이나 비단 따위 폐백은 사위가 자는 곳에 쌓아둔다. 신랑은 신부의 집에 머물면서 일정기간 노역에 종사한다. 자식을 낳아서 어느 정도 자라면 그제야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서옥제로 데릴사위와는 조금 다른 혼인 형식이었다.
고대의 혼인 풍속으로 오늘날 이 두 가지 형식만이 확실하게 전해진다. 동옥저의 혼인 풍습은 민며느리제도라고도 한다. 구매혼의 요소가 짙다. 남자 쪽에서 어릴 적에 데려가 일을 부려먹고 나면 여자집에서 그 몸값을 받는 것이다. 결국 신랑은 아내를 사오는 형식이 된다. 이러한 혼인 풍습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주로 서북지방에서 이루어졌고, 만주지뱡에도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민며느리제도는 신부집에서 딸을 천시하는 풍조를 막는 구실도 했겠으나 신랑집에서 어린아이를 혹독하게 부려먹는 폐습을 낳았다. 서옥제는 예처제보다 널리 퍼졌고, 그 잔재가 오래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혼례는 신부집에서 치르고 일 년이나 또는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신부를 신랑집으로 맞이해오는 절충식 친영의 혼례 형식이 정착되었다. 그렇지만 아내가 임신을 하면 친정에 가서 해산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서옥제의 유습이다. 조선시대의 많은 명사들은 대개 본집이 아닌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이와 허균은 모두가 모두 서울에 살았지만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옥제라는 제도 아래 신랑은 처가에서 노역에 종사하면서 온갖 수모를 겪었을 테지만 한편으로는 처가 식구들과 유대를 돈독히 맺을 것이다. 또한 외가에서 태어난 아이는 외가에 특별한 애정을 같게 된다. 나이가 어린 신랑은 부모와 자기 집에 대한 그리움을 맛보아 친가의 소중함을 깨우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겪으며 신라은 한 집안을 꾸려갈 애착과 인내심과 능력을 키웠다. 이런 관계 속에서 혼인을 맺은 두 집안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서옥제는 고구려의 이웃 종족 사이에도 퍼졌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나 조선시대에 유교식 친영 형식이 도입된 뒤에도 그 유속이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혼인은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첫 출발이어서, 어느 나라나 사회를 가릴 것 없이 일생의 큰일로 여겼다. 모계사회에서는 혼음상태라 어미 쪽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일부일처의 부부제도로 옮겨왔으나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로 하여 남성만이 성의 자유를 누리고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했다. 유교에서 특히 여성의 정절을 찬미하고 투기를 사악한 것으로 가르치는 윤리관도 이런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조선과 부여와 삼한에서는 지배자들 중심이기는 했으나 성을 사용했다. 조선의 준왕이 기씨라든가, 부여의 왕실이 해씨라든가 하는 성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성은 구장이나 벼슬아치 등 지배자들 중심에서 차츰 아래 계급으로 이어져 국왕에게서 받거나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성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혈통을 중심으로 정해졌지, 결코 여성의 혈통을 따져서 만들거나 하명된 적이 없다. 이것은 혼인 관계와 이어지는 문제이다.
왜 문신을 했을까
옛 기록에서 동이족을 칭송하는 덕목으로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꼽았다. 서로 인사하고 교제를 할 때 절도가 있다는 것이다. 부여 사람들은 출입할 때 주인과 손님 사이에 서로 읍하며 에의를 표하였고, 술자리에서도 잔을 주고 술잔을 닦는 예절이 있었다. 예의 사람들은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서 남에게 구걸하지 않았으며, 음식 그릇으로 변두 곧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했다. 고구려에서는 절을 할 때 무릎을 끓고 한쪽 다리를 편다고 하였는데, 이 예절은 부여와 비슷하다. 진한 사람들은 길을 지날 때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있으나 무릎 끓고 절할 줄 모르며, 남녀노소의 차례와 분별이 없다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차림새도 예의에 걸맞게 대강은 갖추고 있었다. 먼저 머리 모양을 보자. 위만이 도망쳐 조선으로 왔을 때 상투를 틀었다고 하였는데 부여문화권에서는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정수리에 묶는 상투가 보편적인 수식이었다. 상투는 일제강점기에 단발령이 시행될 때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마한에서는 괴두를 하였고 변진에서는 장발을 하였다. 괴두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통을 둘러 머리 위에 묶는 것으로, 상투와 조금 모양이 다르다. 이렇게 묶은 머리끝을 두고 날카로운 병기와 같다고 하였다. 장발은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늘어뜨리는 것이다.
고구려의 벼슬아치들은 일정한 의관을 갖추고, 공공 모임에는 금은을 장식한 비단옷을 입었는데 특히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 부여에서는 흰옷 입기를 좋아해서 흰 베로 만든 큰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었다. 국외로 나들이할 때에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모직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마한에서는 베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금은 또는 비단이나 모직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구슬을 좋아해서 옷에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였다. 예에서는 남녀 모두가 목을 둥글게 만든 곡령을 입었다. 읍루 사람들은 겨울에 가죽옷을 입으면서 피부에 두껍게 돼지기름을 발라 추위와 바람을 막았고, 여름에는 알몸으로 지내면서 베조각으로 앞뒤만 가렸다. 지금의 제주도인 주호국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하였고 옷은 가죽으로만 해입었다. 윗옷만 입고 아래옷은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나체와 다름이 없었다. 변진 사람들은 왜국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하였다. 문신 풍습은 마한과 부여에도 있었다. 마한과 변진은 바다에 접해 있었고 또 일본과 가까워서 문신 풍습이 생겨난 것이 자연스러우나 내륙문화를 지닌 부여에서 문신이 유행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문신은 남쪽 해양민족이 만들어낸 풍습이다. 뱀이나 악어는 문신한 사람을 동류로 착각하여 공격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해양족들은 우글거리는 뱀과 악어를 피하는 방법의 하나로 문신을 하였다. 또 물고기들도 문신한 사람을 보면 동류로 여겨 잘 달아나지 않는다. 이것이 어부들이 문신을 하는 이유이다.
문신 풍습은 왜인들 사이에 성행하였는데, 이것을 차츰 우리나라 남쪽에 사는 어부들이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여 사람들이 문신 풍습을 본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엇을까? 부여도 바다 쪽을 영역 안에 둔 적이 있지만 어업이 그리 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도 멀리 동해를 통해 왜인들과 교류를 활발히 벌였고 또 왜인들이 부여 땅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문신 풍습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때의 풍속은 지방적인 특색을 띠고 지역의 생산물이나 문화 정도에 맞추어 전개되었다. 아직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유교의례가 보급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었고 상투의 수식이 굳어졌다. 갓은 고려 말기에 생겨났으나 의관은 이미 많이 정제되어 있었다. 문신 풍습은 우리 풍조와 맞지 않아 사라졌고 중국의 복식을 본받으면서 좌임의 옷만듦새가 우임으로 바뀌었다.
무덤에 새를 묻은 이유
마지막으로 장레 절차를 알아보자. 장례는 결혼과 함께 인가사의 중요한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절차는 민족이나 나라에 따라 다르다. 영혼 숭배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어서 인생의 마지막 길인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다. 부여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5개월에 걸쳐서 초상을 치렀다. 5개월 동안 시체를 땅에 묻지 않으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체를 집안에 오래 둘수록 영화롭다고 생각했고, 상주는 남의 강요나 눈치를 보며 장례를 치러야 했다. 5개월 동안 시체에 얼음을 채워 보관했으니 그 절차도 복잡했을 것이다. 부여 사람들은 시체를 보관하면서 곽(덧널)을 사용했으나 정작 땅에 묻을 때에는 관(널)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 고구려에서는 결혼을 하고 난 뒤부터 장례에 쓸 물건을 조금씩 준비한다. 이를테면 껴묻기할 물건을 하나씩 만들어두기도 하고 관을 만들 나무를 심기도 한다. 죽으면 모아두었던 수많은 물건을 무덤에 껴묻었는데, 후장의 풍습은 일반 서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순장제도를 금지하였는데도 동천왕이 죽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죽었다. 죽음을 같이하는 것을 영예롭게 생각한 것이다. 무덤에는 다듬은 돌을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려 석총을 만들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묘 주위에 심어 유택을 보호했다. 잔디를 심지 않고 침엽수를 심어 유택을 아늑하게 만든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으면 풀이나 넌출들이 잘자라지 않아 묘를 잡풀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동옥저에서는 시체를 얕은 땅에 임시로 묻어두었다가 피부와 살이 모두썩으면 뼈만 추려서 곽 속에 안치하였다. 이를 세골장이라 부른다. 곽은 길이가 열 발이나 될 정도로 크게 만든다. 이 곽의 한쪽 끝부분을 열어 문을 만든다. 가족이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단 시체가 곽 속에 들어가면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의 문 곁에 엮어 매달아둔다. 저승길도 먹으며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식구의 유골을 모두 넣어둔다. 그리고 나무토막에 죽은 사람의 모양을 숫자대로 새겨서 넣어둔다. 완전히 죽음의 공동체이다. 한에서는 관을 쓰지 않고 곽만 사용하였다. 읍루에 살뎐 숙신씨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그날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삼한 땅에서는 후장의 풍속이 북방에 못지 않았다. 변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했다. 죽은자가 새의 깃털을 달고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이런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황해도 봉산의 무덤에서 발굴된 새뼈와 새를 조각한 청동기를 들 수 있다. 또 소와 말이 하늘과 인간세상를 매개한다고 믿었던 증거들도 많이 보인다. 삼한에서 무덤의 벽화나 항아리의 그림에 소나 말이 그려진 것은 소와 말을 장례에 사용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당시의 장례 풍습은 오늘날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순장은 없어졌으나 껴묻기 풍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해져 일제 침략자들이 무수히 발굴해 가져갔고, 도굴꾼들이 마구잡이로 파내서 팔아먹었다. 시체를 묻을 때 관을 사용한 경우도 있고 곽만을 사용하여 그대로 땅 속에 묻기도 했다. 당시에도 시체의 육탈을 주요하게 여겼으며, 상여에 꽃이나 깃털을 장식하였다. 부부 합장과 가족묘지 풍습도 이어져 내려왔다. 세골장의 풍습은 근래에도 서해안 섬지방의 초분장으로 이어졌다. 초분장은 평지 위에 관을 놓고 짚이나 풀을 덮어 놓은 뒤 3년쯤 지나 육탈이 된 시신을 다시 매장하는 것이다. 세골장 풍습은 오키나와를 통하여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것으로 보기도 하나, 옥저에서 동해를 통해 번져간 것일 수도 있다. 또 죽은 자의 뼈를 모아 가족납골소에 넣어두는 이차장은 인도네시아 지방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 처리 과정은 사자의 영혼이 거쳐야 할 현세에서 저승에 이르는황천의 길을 물질적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종교사회학자는 말한다.
풍습은 곧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놀이문화는 민족의 기질과도 관련이 깊으나 수렵생활이나 농경생활과 같은 생활조건이 그 내용을 만들어내며, 국가나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남녀의 사랑이나 결혼도 그 사회가 지닌 도덕률과 전통으로 일정한 규범을 만들어낸다. 불교, 유교의 사상이나 의례가 침투되지 않은 시대에는 토속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예의는 문화의 수준이나 질서의식으로 다듬어진 절도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사회에서 지켜지고 있던 예의는 한 사회가 상당한 기간을 두고 질서있는 생활을 누렸음을 보여준다. 의복이나 치레는 물질생활이나 기후 풍토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 무렵 우리 민족의 초기 단계에도 여러 형태가 있었다. 이러한 풍습들 중에는 오늘날 통합되어 그대로 이어지는 것도 있고 변형되어 전해지는 것도 있으며, 다른 문화의 영향으로 사라진 것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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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섣달이면 켜지는 마음의 꽃등
해마다 날아오는 크리스마스 카드라 몇 년 전부터는 내게도 수백통이 되다보니 카드를 보낸 분들의 정성스런 사연을 나도 모르게 놓치지나 않을까 싶어 한번 읽고 모아 둔 것을 후에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시 한번 읽곤 한다. 이 글을 청탁을 받고 나는 작년 12월에 받은 편지 묶음들을 다시 풀어 읽어보니 대개가 늘 건강하고 좋은 글 많이 쓰라는 내용의 성탄 카드였고, 내용 없이 이름만 사인된 연하장은 어느 국회의원으로부터 온 것 한 장뿐이었다. 카드의 겉그림들이 모두 아름답고 다양해서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시 이용할 생각을 해본다. 직접 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꽃잎과 나뭇잎을 붙여서 만든 카드들은 더욱 눈여겨보게 되는데, 받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겉모양보다는 카드 속에 담겨 있는 글의 내용인 것 같다. 인쇄된 축하의 말 끝에 '건강하세요'. '기쁜 성탄, 복된 새해 맞이하세요'라고 극히 간단한 내용과 함께 이름만 쓴 것들이 있는가 하면, 카드 안의 흰 공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촘촘히 정성스런 사연을 적은 것들도 많다. 어떤 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애송시를 붓글씨로 적어 카드에 붙이기도 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말보다는 받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구체적이고 진실어린 애용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랑과 격려, 축원과 기도로 가득한 카드 속의 말들을 나도 몇 개 골라서 읽어본다.
'이모,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그린 이 그림을 받아 드시고 잠시나마 기뻐하세요. 성탄과 새해에는 주님의 별빛 같은 축복을 받으세요. 안에 들어 있는 작은 그림은 보너스로 드릴께요.'라고 쓴 어린 조카애의 글, '찌든 마음 가다듬고 조용히 구세주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라고 쓰신 어머니의 글, '날마다 해가 뜨듯 날마다 반짝이는 은혜의 빛을 주님, 내 누이에게 내려 주소서'라고 한 오라버님의 글에서 깊은 정을 느낀다. '민들레의 영토에서 바다 가득한 넉넉한 사랑으로 이 한 해를 사신이여, 다가올 새해에도 당신의 사랑으로 낳은 빛난 언어로 살아가소서' '넉넉한 가을 들판에 서 계신 해인 수녀님, 새해에도 시 쓰시는 수녀님 두 손과 뜨거운 가슴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이라고 쓴 독자들의 글을 읽으면 짐짓 좋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새로워진다.
또 '늘상 접하는 수녀님의 시 때문에 얼굴 한 번 안 보고도 항상 곁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은 소나기같이 내리쏟는 사랑만을 갈구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몽당연필'같이 닳아지는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다' 라고 어느 교도서에서 날아온 카드와 '기다림이 징역살이인 슬픈 인생은 억누를 담장이 높을 뿐이지만 하늘이 내 집 같은 희망은 분명 사랑의 확신입니다'라는 어느 무기수의 고백이 적힌 카드는 나를 참으로 숙연하게 한다.
일년에 한 번 성탄 카드를 쓰는 일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부담스런 의무가 아니라 평소에 못다한 인사까지 더불어 챙길 수 잇는 혼연한 사랑의 의무, 즐거운 의무여야 할 것이다. 전화와 팩시밀리가 아무리 신속하고 편리해도 고운 카드 안에 정성껏 쓰는 축하의 말을 대신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나도 어느 해인가는 팔이 아프도록 사인을 해서 수백 통의 성탄 카드들을 독자와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했으나 분량이 많다보니 두세 줄의 좋은 말을 써넣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좀더 긴 글을 써서 복사를 해보낼까도 생각했으나 친필에서 배어나는 따뜻한 정감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또 몇 통의 카드들을 받게 되고 또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보낼 때는 우선 어린이, 장애인, 수인들, 일반 독자, 가족, 친지 등 순서대로 쓰려고 나름대로 정해 놓고 있다. 내가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내가 이웃에게 자신을 더 많이 내어 주어야 할 사랑의 빚쟁이임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수많은 카드와 편지들, 이들 앞에 약간은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새로운 고마움으로 내 마음에 환한 꽃등이 켜진다. 그리고 카드 속에 쓰여 있는 모든 좋은 말-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말들이 내 삶의 길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노력하리라 다짐해 본다.
비록 어느 날 내게 더 이상 많은 카드가 오지 않고 내가 보내지 않더라도 행복하고 충일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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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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