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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26 호
단기 4341. 11. 11 (음력 10. 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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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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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제5회 세계문학상
고료 1억 제5회 세계문학상 공모
한국 장편소설의 중흥을 위해 제정한 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 그 다섯 번째 응모작을 공모합니다. 그동안 한국문학 활성화에 기여해온 세계문학상은 많은 문학인의 깊은 관심 속에 알찬 결실을 수확해왔습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장편소설을 고대합니다.
▲부문:장편소설(200자 원고지 1200장 혹은 2400장 중 택일) ▲고료:당선작 1편 1억원(당선작 없는 가작일 경우 5000만원) ▲응모자격:신인과 기성 작가 제한 없음 ▲작품내용:주제와 소재 제한 없음(단,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품에 한함), 줄거리 요약 첨부(200자 원고지 20장 안팎) ▲마감:2008년 12월 26일(마감일자 소인 유효) ▲발표:2009년 2월 1일자 세계일보 지면 ▲제출처:(140-740)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63-1 세계일보 문화체육부 세계문학상 담당자 앞. (02)2000-1262, munhak.segye.com
※출판저작권과 당선작 및 가작의 영상물 제작 등을 위한 2차 저작권은 5년 동안 세계일보에 귀속됩니다. 단행본을 출간하여 고료를 웃도는 인세가 발생하면 당선자에게 지급합니다. 제출된 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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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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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깁다.(모르코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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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말글 / 창작도움 → 한글바로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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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미동이
사람이름
세조 2년(1456년), 원종공신이 된 사람의 종 문서를 없애고 양인이 되게 하였다. 그들 가운데 이름을 고친 이들이 적잖다. ‘황중이’는 ‘황윤례’(允禮), ‘박올미’는 ‘박춘미’(春美), ‘김올마디’는 ‘김맹흥’, ‘김원만’은 ‘김여산’, ‘모동이’는 ‘김동’, ‘김올미동이’는 ‘김여생’, ‘울강지’는 ‘유우’로 고쳤다.
‘올미’는 축축한 곳에 자라는 다년생 풀로, 7·8월에 하얀 꽃을 피운다. 고장에 따라서는 ‘가죽지심·대패지심·대패밥’으로도 부른다. ‘올미’가 든 이름에 ‘올미·올미동이·올미쇠’가 있다. 올미와 비슷한 ‘오미’는 평지보다 낮아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이르며, ‘오미·오미동이·오미디·오미타이’와 같은 이름에 쓰였다. 물건 바닥이 납작하고 오목한 것을 ‘오망하다’고 한다. ‘오망’과 ‘오목’이 든 이름에 ‘오망이·오망가이·오망디’, ‘오목이/오무기·오목덕이’가 있다. ‘올망이·올망대·올망이’에는 ‘올망졸망’의 ‘올망’이 쓰였다.
‘-례, -미’로 끝나는 이름은 예전에 사내이름으로도 쓰였다. 요즘에 계집이름으로만 쓰는 것은 현대에 꾸려진 이름문법이다. 이름은 상징가치를 이룬다. ‘근사한’ 한자로 ‘족보 있는’ 사람처럼 이름을 고쳐 대접받고픈 마음은 드라마에서 ‘김삼순’이 이름을 바꾸고픈 마음이랄까? 행복추구권이었다. 이제는 족보식 이름이 아닌, 부르기 좋은 우리말로 이름 지으려는 바람도 만만치는 않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전세값, 삭월세
얼마 전 정부는 부동산값 안정을 위해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국민 생활에서 주거로 인한 비용이 지나치다 보면 다른 경제활동에 그만큼 제약이 따른다는 점에서 취한 조치인데요. 특히 집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이러한 대책이 나오기 전에 신문·방송 등에선 예고성 소식이 보이곤 합니다. '전셋값 올라 서민의 한숨소리가 깊다' '매매 대비 전셋값 다시 오름세' '신도시 전셋값 뜀박질' 등이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전셋값'은 그동안 자주 접하긴 했지만 지나쳤던 표기법상의 오류입니다. '값'이란 '사고 파는 물건에 일정하게 매겨진 액수나 치르는 돈'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세(傳貰)는 '일정 금액을 주인에게 맡기고, 집이나 방을 얼마 동안 빌려 쓴 뒤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이란 점에서 '값'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돌려받는 돈과 사고 판 뒤 치르는 돈은 거래의 종료 시점도 다릅니다. '전셋값'은 '전세금'이나 '전셋돈' '전세 비용' 등으로 써야 보다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세와 관련해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삭월세(朔月貰)'가 있습니다. '집이나 방의 사용료를 달마다 치르는 돈'을 말하는데요. 표준어 규정을 보면'어원에서 멀어진 형태로 굳어져 널리 쓰이는 말은 그것을 표준어로 삼는다'고 돼 있습니다. 상추(←상치)와 강낭콩(←강남콩)을 표준어로 삼은 것처럼 '삭월세' 역시 '사글세'가 맞는 표현입니다.
터울
경제적 어려움으로 맞벌이 부부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특히 40대에서는 37%에 달한다는 조사가 나왔다. 맞벌이를 하려면 무엇보다 집에 남은 아이들이 문제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열쇠 줄을 목에 걸고 어두워질 때까지 놀고 있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몇 살 터울로 형제가 있으면 그나마 집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기가 나으련만 혼자인 아이도 많다. 이럴 땐 적당한 터울의 형제가 아쉽다.
'터울'은 한 어머니에게서 먼저 태어난 아이와 다음에 태어난 아이의 나이 차이를 뜻한다. 쉽게 얘기하면 형제 간의 나이 차이다. 한 어미에게서 난 동물에게도 쓴다. '형과 나는 두 살 터울이다' '위로는 한 살 터울의 누나가 있고 아래로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우리 형제는 터울이 많이 졌다[떴다]' 등을 용례로 들 수 있다. '터울'에는 이처럼 한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 사이의 나이 차이를 가리키는 뜻밖에 없으므로 형제 간이 아니면 쓸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사이에나 단순한 나이 차이 또는 어떤 일의 간격이란 뜻으로 마구 쓰고 있다. '그들 부부는 네 살 터울이다' '한 살 터울인 이들은 서로 말을 놓고 지낸다' '이들 선수는 두 살 터울로 고교 선후배 사이다' '며칠 터울로 송년 모임이 있다'등의 경우가 '터울'을 잘못 쓴 예다. '터울'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고 사용하면 남에게 실례가 될 수 있고, 글을 쓴 이의 신뢰도 떨어진다. '터울'은 형제 간의 나이 차이에만 쓴다.
발자국
여러분은 혹시 '발자국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는지? 들어 보신 분이라면 그분은 흔적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인은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발자국은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들과는 다른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되겠지. 다른 발자국 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여겨져서 그걸 들으면 난 땅 밑 굴에서 뛰어나가게 될 거야.'(『어린 왕자』의 한 번역본 제21장 중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골목을 달리는 신문 배달원의 발자국 소리가 하루를 연다.' '아침 저녁 여러 번 나는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발자국 소리'는 틀린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많이 쓰이고 있다. 발자국은 '발로 밟은 자리에 남아 있는 발의 자국'을 말하며,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발을 한 번 떼어 놓는 걸음을 세는 단위'(=발짝)를 뜻한다. 따라서 발을 옮겨 디딜 때 발이 바닥에 닿아서 나는 소리는 '발자국 소리'가 아니라 '발소리'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내가 막 골목으로 접어들어 조금 걸어왔을 때 뒤에서 서두르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시인은 배추흰나비와 밀잠자리의 늦잠을 지켜주기 위해 발소리를 죽인 채 살금살금 그 곁을 떠났다' '저것은 아버지의 발소리다'처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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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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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의 오후 - 구영숙
법당 꽃살문 앞에 선다 태고의 바람소리 일고 보리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해질녘 스님이 독경소리보다 더 잿빛이었다가 한겨울의 함박눈 사운거리는 소리였다가 용마루에 앉아있는 천년의 침묵을 흔들어 놓는다 함월산 깊은 골짝 솔바람 소리로 귀를 씻고 세상을 더듬어가는 청각으로 굽어진 숲길 따라가면 뱀허리 휘돌리듯 돌아오는 풍경소리 신발 위로 툭툭 떨어져 내린다 모든 것이 멸하는 이 가을 박제가 되어가는 나무들의 언어가 물결친다 산자락 넘어가는 노을 꽁무리에 따라붙은 단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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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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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 황다연
그것은 마음여린 목관악기의 하얀 아픔
흐르는 물에 씻으면 실안개로 사라질 공기
해맑은 오솔길 날아오르는 사랑의 화음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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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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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좋은 경을 - 김천택
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내 힘과 내 분으로 어이하여 얻을소냐 진실로 금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말 뜻> 강산(江山) : 강과 산. 산천(山川)이니, 산하(山河)니, 산수(山水)니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툴 양이면 : 다툴 것 같으면. 다툰다면. 두고 노니로라 : 내 앞에 그대로 놓아 두고 자유로이 즐길 수 있다.
<감 상> 이 강산, 이 좋은 경치를 만일 힘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다툰다면, 힘없고 지체 낮은 나의 차례는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것만은 금하는 사람이 없기에 나도 마음대로 노닐며 즐길 수가 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권력이나 금력 따위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자연 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옛선비의 생활 태도가 재치있는 표현으로 잘 그려져 있다. 읊노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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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지혜,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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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100가지 지혜 - A. 갤리언
제1장 삶은 달걀에서 나온 병아리
말을 훔친 페니야
솔로몬은 시간이 나면 장기 두기를 즐겼다. 지혜롭기로 이름난 솔로몬이었던 만큼 그의 장기 기술은 상대방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듯 능수 능란하여서 한 번도 지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솔로몬은 그의 고문인 베나야와 함께 장기를 두고 있었다. 깊이 생각을 하며 장기를 두어나가는 솔로몬인지라 장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베나야의 패색이 짙어졌다. 이제 베나야가 둘 차례였지만, 묘한 수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는지라 호기심이 생긴 왕은 장기를 두다 말고 일어서서 창가로 가서는 밖을 내다보았다. 베나야는 그 틈을 타서 솔로몬의 장기 중에서 한 개를 슬쩍 감추어 버렸다. 왕은 다시 돌아왔지만, 말 한 개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장기를 두었다. 시간이 흐르자 황의 형세는 차츰 불리해져 갔고 급기야 패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항상 지기만 하던 베나야는 처음으로 승자가 되었다. 왕은 패했다는 데 대하여 화가 났다. 자기보다 잘 두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베나야가 유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다. 왕은 패한 이유를 알아보려고 처음에 시작할 때처럼 말을 늘어놓고는 곰곰히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말을 한 개씩 한 개씩 두어 나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말 한 마리가 중간에 없어져 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밖을 살피러 창가로 갔을 때 베나야가 말을 하나 숨긴 게 틀림없어. 패해 가던 베나야가 그 다음부터 이기기 시작했거든. 사람을 속이다니, 고약한 행동을 했구나. 내가 직접 대놓고 꾸짖지 않아도 스스로 고백하도록 하리라."
솔로몬은 그 후에도 베나야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어둠이 깔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얼굴이 험상궂고 어깨에 자루를 멘 두 사내가 무엇인가 수군대면서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차림새나 하는 짓거리로 보아 도둑질을 하러 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왕은 곧 방으로 돌아와서 왕의 옷을 벗고 허름한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거리로 나가 그 두 사내를 따라갔다. 이윽고 두 사내와 만난 솔로몬은 그들과 인사를 한 후 좋은 계획을 하나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과거엔 도둑질깨나 한다는 사람이었다오. 자, 여기 왕이 거처하는 방의 열쇠가 있소. 나는 그곳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소. 오래 전부터 왕궁을 털 생각으로 계획을 착착 세워왔는데 미처 용기가 나지 않아서 이럭저럭 시간만 낭비하고 말았소. 어떠시오, 형씨들. 나랑 한 번 일을 벌여 볼 생각이 없소?"
두 사내는 솔로몬의 계획을 좀더 자세히 듣고는 그럴싸하다고 판단을 내려 함께 일할 것을 승낙했다.
"왕궁의 구조를 잘 안다고 했소? 그럼, 그곳으로 들어가는 건 당신이 앞장서시오. 물건을 훔치는 일은 우리가 할 테니...." "좋소. 하지만 지금은 일러서 안돼요. 좀더 기다렸다 합시다. 예루살렘 성이 아주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길 때까지."
이윽고 시간이 흘러 한밤중이 되자 왕은 두 도둑에게 행동을 시작하자고 말했다. 솔로몬을 따라 궁전으로 들어간 두 도둑은 여기 저기 널려있는 진귀한 것들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아무 물건이나 집어서는 자루에 넣으려고 했다.
"이런 물건은 가져가나 마나 부피만 차지할 뿐이오. 저쪽으로 가면 이것보다 몇 배나 값나가는 보물들이 있으니 그 쪽으로 가도록 합시다."
생전 처음 보는 보물들에 얼이 빠진 도둑들은 왕이 이끄는 대로 따라 갔다.
"자, 마음껏 가지시오. 나는 그 동안 밖에 나가 망을 보고 있을 테니까."
왕은 방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그리고는 왕의 엄위를 갖추고 호위병을 불러들였다.
"내 방에 도둑이 들어있다. 지금 이 방에 들어있으니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 다음 날 아침, 왕은 재판을 열었다. "이 곳에 계시는 장로 여러분들과 공명정대하신 방청객 여러분, 이 자리에 현장에서 잡힌 도둑이 있소. 그것도 보통이 물건이 아닌 국왕의 물건을 훔치려 했던 자요. 이자를 재판하고 싶은데 어떻게 벌하면 좋겠소?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왕의 말을 듣고 있는 베나야는 몰이 오돌오돌 떨리고 심장이 뚝 멎는 것만 같았다. '왕의 물건을 훔친 자'라고 했는데 그건 꼭 왕이 장기의 말을 훔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법정은 자기를 처벌하려고 열린 재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한층 무거운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베나야는 얼른 왕 앞으로 나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용서를 빌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대왕님이 창가로 가셨을 때 제가 몰래 대왕님의 말 한 개를 숨겼습니다. 제가 이겼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대왕님, 두 손 모아 비오니 제발 용서해 주시옵소서."
솔로몬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용서를 빌고 잇는 베나야의 모습을 내려다보고는 껄껄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 일 때문에 법정을 연 것은 아니오. 난 그런 사소한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요. 어제 저녁에 내 방에 들어와 보물을 훔쳐 가려고 하던 도둑을 잡았길래 그 도둑을 재판하려고 이 법정을 연 것이오. 법관 여러분, 부디 정당한 심판을 내려주기 바라오."
솔로몬은 이렇게 베나야를 직접 꾸짖지 않고도 베나야 스스로 실토하도록 만들었다.
시바 여왕의 수수께끼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온갖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리고 어둠의 정령, 악령, 요귀와 마귀도 그의 앞에서는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 솔로몬은 짐승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힘도 갖게 되었다. 솔로몬이 왕위에 즉위하여 태평성대를 누리던 어느 날, 포도주에 얼큰히 취한 솔로몬은 기분이 좋아져서 온갖 동물들과 온갖 어둠의 혼령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선 그들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연회를 즐기고자 했다. 왕의 서기관이 새와 짐승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령하자, 이름을 불린 짐승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솔로몬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었다. 왕이 인사를 하는 동물들에게 답례하고 가만히 살펴보니 노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상한 왕은 뇌조를 잡아들여 벌을 주라고 명령하였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후, 뇌조가 스스로 날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아뢰었다.
"온 세상의 만물을 다스리는 대왕이시여! 제가 오늘 늦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세 달 전쯤의 일입니다. 저는 대왕의 은덕을 충족히 입는 터라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못한 동물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 혼자 결심하였습니다. 세상의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아직도 대왕의 은덕이 펼쳐지지 않은 곳이 혹시 있지 않나 알아 봐야겠다구요.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동방에서 키틀이라 불리우는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키틀이란 도시가 있는 나라는 온통 순금으로 뒤덮여 있고 은 따위는 길바닥에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무도 숲도 천지가 창조된 그때의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경치 또한 말할 수 없이 아름답더이다. 그 나라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활을 쏠 줄도 모를 뿐더러 전쟁이란 말조차 무엇인지 알지 못하더군요. 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시바의 여왕'이라고 불리운다고 하더군요. 만약 대왕께서 명령하신다면 제가 다시 키틀로 날아가서 시바의 여왕을 데려다 대왕 앞에 대령하겠나이다."
뇌조의 이야기를 다 들은 솔로몬 왕은 시바라는 나라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여왕이라는 사람도 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뇌조의 제안에 따르기로 하고, 서기관을 시켜 편지를 쓰게 하여 그것을 뇌조의 날개에 매달아 주었다. 뇌조는 솔로몬의 명을 받고 다른 새들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 시바의 키틀을 향해 날아갔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시바의 여왕은 기도를 올리려 궁전을 나섰다가 하늘 저 끝에서 새의 무리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새떼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밝게 빛나던 태양이 새떼에게 가려 주위는 칠흑으로 변하고 말았다. 놀란 여왕이 대신들과 함께 깜깜해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조 한 마리가 사바의 여왕 앞으로 내려와 앉았다. 여왕은 내조 날개에 편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궁금한 마음으로 그 편지를 풀어 읽어보았다.
'사바의 여왕과 신하들에게 우호의 인사를 드리는 사람은 왕 솔로몬이외다. 하나님은 내게 세상의 온갖 힘을 주신 바 있소.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나라들은 모두 내게 조공을 받치고 있소. 그런데 단 한 나라, 당신들의 '시바'라는 나라만은 내게 인사조차 없던 것으로 기억되오. 만일 여왕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내게 조공을 바쳐 온다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내리지 않은 경의를 표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그대의 나라가 나의 희망을 거역한다면, 나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시바 왕국을 공격할 것이오. 또 정령들을 시켜 당신의 나라 백성들을 괴롭히게 만들고 동물들을 보내어 전답을 모조리 밟아 망가뜨리라고 시키겠소. 어떻게 하겠소?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는 모두 당신에게 달렸소이다.'
솔로몬의 편지를 다 읽은 여왕은 즉시 대신들을 불러 모아 솔로몬의 편지 내용을 말해주고 의견을 물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왕은 들어본 적조차 없습니다. 그의 편지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신들은 솔로몬의 위협에 넘어가지 말라고 여왕을 부추겼다. 그러나 여왕은 대신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왕은 온 나라에 공고를 내어 사공들을 모았고, 많은 배에 값진 보물을 가득 싣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키와 몸매가 같고 생년월일이 같은 6천명의 남녀를 모아 붉은 색의 옷으로 갈아 입히고 뱃길을 떠났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3년이 지난 후, 드디어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성이 있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솔로몬은 우선 장군 베나야 벤 요다야를 보내어 여왕 일행을 맞이하도록 했다. 베나야는 대단한 미남자로 시바의 여왕은 베나야를 보자 솔로몬 왕인 줄 알고 인사를 하려고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베나야는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다.
"왜 마차에서 내리십니까?" "솔로몬 왕께 인사를 드리려구요." "아, 아닙니다. 나는 왕이 아닙니다. 난, 대왕 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시바의 여왕은 베나야의 안내를 받으며 솔로몬에게로 나아가게 되었다. 솔로몬은 시바의 여왕이 곧 도착한다는 전갈을 받고는 성을 나와, 유리로 된 궁전으로 들어가 여왕을 맞을 차비를 하였다. 여왕은 솔로몬이 물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옷이 젖을세라 치맛자락을 둘둘 걷어 올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솔로몬은 본의 아니게 여왕의 다리를 구경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왕은 마치 남자의 다리처럼 털이 수북이 나 있었다.
"나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었소. 그런데 그대의 아름다움은 다른 여자의 아름다움과 다를 바가 없으나 그대의 다리는 다른 여자들보다 못하군요."
그러자 시바의 여왕이 말했다.
"왕이시여, 나는 대왕께서 무척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내가 세 가지 수수께끼를 내겠습니다. 만일 그것을 알아맞추신다면 왕께서는 소문 그대로 현자이심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맞추지 못하신다면 대왕은 보통 남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여왕에게 수수께끼를 내보라고 말했다.
"나무로 만든 샘 속에서 쇠로 된 통이 돌을 퍼내기 시작하면 물이 흐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장상자요. 나무로 만든 화장상자 속에서 조그만 쇠수저로 눈 화장하는 돌가루를 퍼내어 눈꺼풀에 문질러 바르면 눈물이 흐릅니다."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의 수수께끼를 내었다.
"흙속에서 나와서 먼지를 먹고 반죽같이 되어 집안을 엿보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집을 지을 때 바르는 안료라는 것이오."
여왕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문제를 내었다.
"갈대처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가 바람이 불면 좌우로 흔들리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부자에게는 명예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수치심을, 죽은 사람에게는 장식이며 살아있는 자에게는 고통이 됩니다. 그것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모시가 아닌가요? 들판에서 자랄 때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돛에 달면 바닷바람에 포효하듯 울부짖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는 으시대며 자랑하고, 누더기를 입은 가난한 사람은 부끄러워하며, 삼베옷을 입혀 죽은 자를 감고, 모시풀을 꼬아 교수대의 밧줄로 쓴다면 교수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될 사람에겐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솔로몬의 대답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여왕은 그 지혜로움에 감탄을 했다.
"저는 이제껏 대왕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대왕님은 역시 이 세상을 다스릴 만하십니다."
솔로몬은 시바 여왕을 궁전으로 안내했다. 궁전의 성스럽고 호화로운 광경을 보자 여왕은 솔로몬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리고 가지고 온 보물들을 망설임 없이 솔로몬 왕께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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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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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2.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광주가 아름다운 세 가지 이유
나는 광주와 인연이 깊다. 그리고 갈 적마다 아름다운 도시라고 생각한다. 광주에 자주 가게 되는 것은 광주은행 사원 연수 강의를 5년째 하고 있는 인연이 있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받은 인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짙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호남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 광주역에 내렸을 때였다. 택시가 여러 대 내 앞으로 다가왔지만 유심히 보니 저쪽에서 염주를 매달은 택시가 눈에 띄었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여인네들의 기족적인 염원이 강한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이다. 염주를 달았다고 해서 반드시 불교신자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나 또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꼭 그래야 할 필요성은 없었지만, 그러나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그쪽으로 마음이 움직여졌다. 택시 안에서 달리 할말도 없고 해서, “기사님은 불교 신자이신가 보죠?”라며 운전석 위에 매달린 염주를 쳐다보면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습니다. 저는 부처님 때문에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자연스레 말문이 열리게 되는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끈 같은 것, 그것은 일종의 공감대라 할 수 있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목적지에 이르고 있었다. 호남대학교 안으로 들어와 차를 세운 그 기사는 주머니를 뒤지며 돈을 꺼내는 내게,
“저는 어떤 스님에게서든 요금을 받지 않습니다. 저로선 보시한 것이니 그냥 내리십시오.”라고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제가 지켜오는 신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루에 20분씩 날마다 남에게 선행을 하자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 다 부처님께 기도 드린 덕분이니 그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요금을 안 받겠다는 뜻은 이해가 가지만 부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로선 납들이 가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군요, 제게 그 얘기를 조금 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강의 시간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했으므로 아직 시간이 남아 이었다. 나는 운동장 그늘이 있는 나무 벤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잠시 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세워 놓고 함께 걸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자기는 일곱 살 때까지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앉은뱅이였다는 것이다. 이를 마음 아프게 여기던 어머니는 정안수를 떠놓고 매일을 하루같이 부처님께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느 날 그는 거짓말같이 일어나게 되었고 남들처럼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께 기도드린 덕이라고 모두들 놀라워했고 기적이라고 쑤근댔다. 병원에서도 치유 불가능이라고 판정하고 평생을 불구자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했던 원인 모를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듯 건강하게 운전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보면 부처님의 은혜 때문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나의 가슴에는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왔다. 이 얼마나 갸륵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좋아도 그에 보답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사람이란 원래 남에게 자신이 준것은 잊지 않아도 받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기억에서 밀려나게 되고 잊는 경우가 많아. 자신이 받은 그 보답으로 날마다 잊지 않고 선행을 베풀고 산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이제 강의 준비를 서둘러야겠기에 아쉽지만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강의가 끝날 즈음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나는 이리로 오던 도중 만났던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광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순간, 넓은 강당 안은 갑자기 터져나온 환호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흐뭇한 마음으로 강의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내가 광주를 떠올릴 적마다 생각나는 첫번째 아름다운 기억이다.
내가 광주에 갈 적마다 가끔 들르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 영광굴비를 맛나게 차려 주는 집이다.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소박한 분위기인데다 주인 아주머니가 손수 내오는 맛깔스런 밑반찬이 그럴 수 없이 내 입맛을 자극하는 집이다. 나는 절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어 주로 밖에서 음식을 사먹다보니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채식만 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입맛도 속세인들과 거의 다름없이 변하는 것 같다. 아침 일찍 광주에 도착해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영광굴비 백반’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눈에 띄었다. 주위에는 달리 마땅한 음식점도 없었기에 중이라는 체면도 잊은 채 그만 불쑥 들어갔는데, 이 영광굴비라는 것이 어찌나 맛나던지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한 접시를 뚝딱 해치워 버리고 말았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주인 아주머니는,
“스님 공양 대접 해야지요. 찬이 없어도 맛있게 드시지요.”라고 말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굴비 한 접시를 더 내왔다. 식사라 하지 않고 ‘공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걸로 봐서 아마 불교 신자인가 보다고 나름대로 짐작했다. 더욱이 이렇게 굴비 한 접시를 더친절하게 대접받고 보니 그러한 생각이 짙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대에서 셈을 하면서 주인 아주머니께,
“어느 절에 다니십니까?”하고 정중히 물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 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추가된 굴비 한 접시는 스님께 서비스로 드린 것이니 굳이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승복을 입은 처음 보는 내게 진심에서 우러난 친절을 베푸는 이 아주머니가 인상적이었다. 출가한 수행자가 살생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일반인의 시선이 곱지 않을 터인데 굳이 굴비 한 접시를 더 내오는 그 따뜻하고 고운 마음에 나는 솔직히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후 광주에 내려가게되면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꼭 이집에 들르는 습관이 생겼다. 굴비맛보다도 더 감칠맛나는 그 마음 씀씀이가 내 발길을 자주 이곳으로 향하게 만든다. 친절하고 아름다운 정이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씨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난 직후, 광주은행 강연이 있어 광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히 화제가 그쪽으로 흐르게 되었다.
“이건 내 소견이오만, 사형선고를 받은 전씨 모습이 인간적으로 참 안돼보이더군요.”
그러다가 아차, 괜한 말을 꺼낸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나는 기사분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죽이면 안 되지요.” “이곳 사람들이 그 때문에 얼마나 죽어갔는데, 당신은 이 고장 사람이 아닌가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것으로 족합니다.”
나는 의외의 대답에서 잠시 말문을 잃었다. 남이 내게 지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망과 원한이 맺혀서 당장 전씨를 처형해야 한다는 말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뜻밖의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광주는 불행히도 많은 상흔을 간직한 도시이다. 금남로에서, 시청 앞 광장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어이없는 군인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되돌릴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전두환 정권 아래 저질러진 비극인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러한 고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시민들이기에 그 상처의 깊이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쉽게 아물지 못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신 혼자의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시민의 여론이 그렇습니까?”
나는 용서한다는 그의 말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누구신가 했더니... 제가 스님을 잘 알지요. 삼중 스님이 맞지요? 그런데 그런 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전두환 씨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어 물어 본 것뿐입니다.”
비록 전씨가 지은 죄가 크고 현재 그 대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론 그에게 여러 면에서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다. 내가 만나본 전씨는 소탈하고 거리낌없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그에게 피해를 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뭇매 맞을 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 택시 기사는 내 말을 들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씨가 세인의 이목을 피해 백담사에 쫓기다시피 내려가 있을 무렵, 나는 일부러 그를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었을 때 내가 구명운동을 하던 한 명의 재일교포 사형수를 무기수로 감형해 준 것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도착하니 백담사 부근에는 기자들이 취재하기 위해 와 있었다. 나를 알아본 어느 기자분이 이렇게 물었다.
“삼중 스님, 여기에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전두환이란 죄수가 백담사라는 감옥에 있으니 아마도 그를 교화하러 오신 거지요?”
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겨울의 산사에는 매서운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전씨는 누추한 방 안에서 무척 초췌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무슨 일로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스님?” “ 한 사형수의 목숨을 살려 주신 것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자 전씨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도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까?”
나는 전씨와 마주앉아 금강경을 읽어 내려갔다. 가끔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주저하지 않고 내게 붇고 또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짚어가면서 감탄하기도 하는 솔직한 그의 모습은 내겐 퍽 인상적이었다. ‘저렇듯 소탈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군인으로 전역을 한 뒤 편안히 앉아 기도하는 모습이라면 나 또한 얼마나 마음 편했을 것인가!’ 산사를 내려오는 내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부처님은 ‘잡아함경’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뉘우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는 긴 밤 동안 쓸데없는 괴로움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를 위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광주 시민들은 응어리진 원한을 던져 버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미 전씨를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 모르는 어느 택시 기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이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것만큼 용서한다는 말이 있다. 용서한다는 것,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나를 위하고 너를 위하는, 드넓은 화해의 바다로 가는 길임을 택시 안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실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는 내가 광주를 사랑하고 광주 시민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세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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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모정과 누정에 숨은 뜻은
찜통더위가 계속되면 누구나 탈출을 꿈꾼다. 바람 솔솔 불어오는 마룻바닥에 누워 뭉게구름을 바라보는 나른한 오후의 한때...... 이것은 모든 도회인들이 꿈꾸는 바가 아닌가. 대뜸 원두막에서의 한가로운 피서를 연상할지 모르나 원두막은 임시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옛날부터 한여름 '피서지'로 정평이 나 있는 곳, 모정과 누정으로 떠나가 보자.
모정과 누정.
모정은 농민들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이 딸리지 않고 마루뿐인 마을건물이다. 글자 그대로 초가를 얹은 소박한 정자로, 농민들의 휴식처이자 집회소이다. 반면에 누정은 누각과 정자에서 '누'와 '정'을 따온 말 그대로 정자식 건물이다. 쌓아올린 대위에 세운 건물을 누각이라 한다면, 누정은 밑에 대가 없다고 설명할 수 있다. 한 시대를 들여다볼 때 두 가지 병렬적인 문화현상에서 당시대 문화구조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정과 누정이 아닐까. 양자를 대비하면, 같은 시대에 어쩌면 그렇게 다른 문화가 병존하고 있었는가 하고 놀라게 된다. 당시대 신분구조는 물론이고 삶의 태도, 일상적 관습, 신분에 걸맞은 예우 같은 중세사회 풍속사 자체가 모정과 누정을 통하여 온통 드러난다. 물론 이 둘은 요즈음처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자기 식으로 혼자만의 별장을 짓고 사는 행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문화의 소산이기도 하다.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 누정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의 온갖 꽃 먼 빛이 더욱 좋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춘사의 첫 구절이다. 고산은 탐라로 향하던 중에 해남에서 남쪽으로 70리 길, 기암절벽과 동백꽃이 어우러진 보길도에 매혹되어 그대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당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보길도에서 완성한다.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걸작을 꼽으라고 하면 대개 시문을 드는데, 나는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시문학이 거둔 높은 격조를 폄하할 뜻에서가 아니다.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순전한 조선식 정원'인 부용동이야말로 조선 시대 선비문화의 최고 걸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연꽃 봉오리가 터져 피는 듯한 지형 때문에 부용이라 이름했다고 하는 부용동. 소나무.대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세연정을 세웠으니 파도소리와 솔바람에 세상의 풍진을 씻음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부용동 제일의 절승은 동천석실이다. 누정을 세웠던 동천석실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서 굽어보면 보길도를 둘러싼 녹빛 남해바다가 늘 안개 속에 잠겨 있고, 비껴가는 구름 속으로 섬들이 드문드문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절경 속에 서면 나 같은 사람조차 시문이 절로 나올 것만 같다.
은둔거사를 자처했음에도 윤씨 가문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던 고산이었기에 남해바다 오지에 이 같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선비들만의 '전매특권'이었으니 누정문화는 그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일시에 많은 누정을 보고자 하는 이들은 월출산 쪽으로 가 보길 권한다. 월출산 서쪽의 구림촌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촌락이다. 워낙 문화유적이 많은 곳이라 동네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누정의 보고'다. 솔밭과 대나무숲 사이에 정자 10개, 서원.사우 5개, 우산각 7개가 전해진다. 구림동을 구성하는 12동네는 간죽정, 총취정, 죽림정, 쌍취정 같은 누정들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림동의 으뜸 누정인 회사정은 1646년부터 무려 8년여의 세월이 걸려 완공되었다. 우리 나라 대동계의 으뜸으로 꼽히는 구림 대동계 모임터이자, 모든 정치.경제.문화의 토론 중심지였다. "나막신으로 벼를 모아서 상부상조의 자산으로 삼았다"고 하니 공동체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17세기 선비 조행립(?-1663년)은 시에 이르되, "복사꽃과 오얏꽃이 단정하고 물이 끼고 도는 마을에 우뚝 솟은 고각이 중장하구나" 하였으니 지금의 웅장한 건물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이 같은 것을 일러서, 누정이라 불러왔다. 이들 누정은 단순하게 선비들의 휴식터만은 아니었으니, 당대 양반층들의 '종합문화센터'였다고 할까.
양반 남성들만의 독과점적 종합문화센터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만 꼽아도 885개소에 이를 정도로 누정은 전국 곳곳에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누정을 경영하였고, 지방관들도 행정의 권위나 자신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누정을 세웠다. 조선 후기에는 동성마을이 번창하면서 '뼈대 있는 가문'임을 과시하기 위해 자못 경쟁적으로 누정을 세웠다. 시쳇말로 빼어난 명승지에 누정을 세우지 못하면 못난 동네 취급을 받았다. 진주 촉석루, 부여 백화정, 울진 망양정, 밀양 영남루, 안주 백상루, 함안 와룡정, 담양 소쇄원의 대봉대, 간성 청간정, 그리고 대표적인 궁궐 누정인 창덕궁 부용정...... 일일이 꼽을 수 없이 많은 누정들, 그 뛰어난 경관과 신분사회에서의 사회적 기능을 연상해 보라!
향촌사회의 사대부들과 관리들이 모여서 친교를 도모하고 당대의 경세를 전론으로 펼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다는 비판도 따른다. 어쨌든 누정은 가히 전국적인 규모로 정착하였다. 누정은 야트막한 구릉이나 산록, 계곡이나 경관 좋은 강변, 절경의 암반 위, 자연 연못이거나 아니면 인공으로 판 연못 가, 심지어 마을의 살림집 복판이나 논밭 가운데도 세웠다. 나는 음풍농월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선비의 자연을 관조하는 격조는 높게 평가하고 싶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대로 녹아드는 누정의 건축 양식이나 위치를 보면 자연을 대하는 선조들의 뛰어난 산수관을 느낄 수 있다. 한국적인 산수화나 절창의 산수시들을 논할 때 어찌 누정을 빠뜨릴 수 있으랴! 동해의 그 유명한 관동팔경 중에 총석정, 청간정,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이 모두 누정일 정도였으니 그 높은 안목에 새삼 놀랄 뿐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누정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누정문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누정은 풍광이 곱고 경관 좋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시가 빠질 수 없다. 모란봉 부벽루에 올라서서 차마 시를 끝내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고려 시대 김황원의 일화처럼 선비들은 누정에서 시를 겨루었다. 가히 '누정시단'이라 할 만한 세력이 나타났을 정도다.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등 누정에 뿌리를 둔 시가들은 수없이 많다. 듣기만 해도 쟁쟁한 문사들이 누정문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했으니 누정은 선비문화 그 자체였다. 이름난 누정의 편액에는 지금도 당대 일류의 글씨와 문장이 전해져 오고 있다. 누정은 시문을 창작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토론하는 강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누정에 따라서는 인근 일대의 뜻 있는 후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는 큰 배움터, '마을에 세워진 사립대학'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누정은 향촌사회의 지방자치가 구현되는 정치집회소이기도 했다. 앞의 구림대동계가 태동했던 회사정의 사례에서 보듯이, 향촌사회의 질서를 잡고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중심지였다. 물론 긍정적 의미에서 자율적인 질서를 잡는다는 측면도 있지만, 양반들의 기득권을 확고부동하게 하기 위한 지방통치의 한 가지 수단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누정은 당연하게 '남성문화'의 중심터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사회에서 어디든 여자들이 끼여들 자리가 적었지만 누정은 여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구역이었다. 남성들만의 '독과점 문화장소'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누정에 기생들이 출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에 나타난 그 생생한 모습을 보라. 근엄한 양반들의 일탈된 모습이 너무나 해학적이지 않은가!
여름철에 모정이 없다면?
반면에 모정은 무지랭이 농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시정.유산각.농청.농정.동각.양청 같은 명칭이 두루 쓰이나 역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모정이다. 시정 같은 표현들은 후대에 모정문화와 누정문화가 일부 섞이면서 등장한 이름이지 순수 '모정혈통'은 아니다. 누정이 양반들의 유유자적한 '관음의 문화'라면 모정은 '노동의 문화'라고나 할까. 무더운 여름철 양반들은 누정을 찾아들어 죽부인을 껴앉고 오수에 접어들 수도 있지만, 농민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해마다 음력 2월 1일(머슴날, 혹은 하아드렛날) 모정에서 마을회의가 열리는데 이때 품앗이, 다리보수, 공동혼상구 준비 따위의 일년 대소사를 결정한다. 그러나 모정이 제 역할을 십분 발휘하는 시기는 역시 한여름철이다. 김 매던 농군들이 점심을 먹고 잠시 불볕 더위를 피해 눈을 붙이는 요긴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굽이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 구실도 하고, 모깃불이 사위어가도록 밤더위를 피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모정이 없다면? 아마 한여름철 농촌문화 자체가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 아닌가.
드넓은 벌판지대에 가 보면 막상 쉴 만한 곳이 마뜩찮다. 오뉴월 뙤약볕에 세 벌 김매기로 허리를 펴지 못하다가 점심바구니가 들어오면 술푸념에 한시름을 잊는다. 점심 먹고서는 불볕 더위를 피해 차라리 한잠을 자야만 했다. 이때 모정이야말로 불볕을 가려주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겠는가. 모정은 당산굿을 치르는 종교 중심터이기도 했다. 호남의 넓은 들판마다 마을이 있고, 그 마을마다 당산나무가 서 있다. 해마다 당산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풍물굿을 친다. 느티나무같이 가지와 잎이 많은 활엽수가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면 여름철의 피서지가 된다. 반대로 겨울에는 신성한 제의공간이 된다. 당산나무는 홀로 서 있는 경우도 많지만, 나무그늘에 모정을 지어서 여름을 나기도 한다. 성과 속이 계절적으로 교차하는 공간이 아닐 수 없다. 호남의 모정을 샅샅이 조사한 바 있는 최재율 교수(전남대)의 보고에 따르면, 모정이 민중의 문화였음이 분명해진다. 양반들이나 노약자들은 설령 모정에 나가고 싶어도 한창 농군들이 일할 때는 조심해야 했다. 일꾼들이 들로 나간 연후에야 잠시 쉬는 정도였다. 모정이 노동의 산물이었음이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모정은 글자 그대로 초가지붕이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모정에도 불어닥쳤다. '초가집도 없애고' 어쩌고 하는 마을회관 확성기 소리와 더불어 모정의 초가지붕도 날아가버렸다. 대신 슬레이트나 양철지붕 따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논 가운데에 슬라브 지붕 따위로 '완벽시공'하여 들판의 '분위기'를 망쳐버린 곳도 있다. 요즈음에 새로 짓는 모정은 기와를 올린다. 초가가 사라졌으니 '와정'이라고 부를 것인가. 자연과 어우러져 농사 현장을 지키던 모정의 옛 모습이 사뭇 그립기만 하다.
모정이 호남에만 있는 까닭은
모정과 누정, 어느 것이 먼저 발생했을까.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누각무늬 벽돌을 볼 수 있다. 호화스런 기와집 누정이 날렵하게 돋음새김되어 있어 당대의 화려했음직한 누정문화를 그대로 전해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연못을 파고 호화로운 누정을 지어 귀족들의 휴식처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누정이 모정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귀족층이 농민을 배려하여 쉼터를 만들어주었을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중국에서도 누정문화가 발달하여 시인묵객의 시구에 오르내렸다. 우리 나라도 삼국 시대에 이미 호화로운 누정을 국가적으로 세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모정은 어떤 경로로 발전했을까. 먼저 모정의 전국적 분포상황을 알아보자. 모정은 주로 호남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호남,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모정 분포도가 높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모정문화 자체가 극히 희박하다. 가령 전북 익산지방에서 모정문화를 조사하다가 금강을 건너가 충청남도 부여로 접어들면 이내 모정이 사라지고 만다.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도 곡성에서 경상도 하동으로 접어들어도 마찬가지다. 호남에만 모정이 발달한 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모정과는 구별되지만 다른 지역에도 모정에 준하는 공동체적 결집소는 있었다. 모정의 이명인 동청, 농청, 농정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집회소는 두레꾼들이 모여서 두레의 출범의례인 호미모둠을 이루거나 한해 농사의 대소사를 토론하는 회의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젊은 두레꾼들이 모여서 악기를 배운다거나 멍석짜기 따위로 소일하던 공간이다. 공동집회소는 이북지방에도 있었다. 함경도 북청 같은 지방에는 도가라 불리는 공공건물이 있어 마을의 제의.노동.놀이 따위를 관장하였다. 북청사자놀이도 도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 도가라는 말뜻에는 공동집회소로서의 의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신도시를 건설하기 직전에 안양시에서 민속조사 의뢰를 받고 평촌을 조사한 적이 있다. 오늘날은 평촌 신도시가 들어서서 완벽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 곳이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넓은 들이 펼쳐있던 서울 인근의 곡창지대였다. 그 평촌을 둘러싼 여러 마을에는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동청이 있어서 두레꾼들의 집회소로 기능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두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정, 농청, 농정 같은 마을공동체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다가 일제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촌락의 공동체적 행사나 모임이 이루어지던 결집소가 사라지고 호남의 모정만 남은한 것은 아닐까. 물론 들판에 모정이 서 있는 형식은 호남의 독특한 풍토가 요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야산조차 없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들녘은 그야말로 햇볕 가릴 곳조차 없다. 마을 당수나무 그늘과 모정이라도 있어야 견딜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같은 농사지대라도 경상도에서는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평상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일까. 적어도 모정만을 놓고서 판단한다면, 호남 민중의 공동체적인 결집력만큼은 여느 지방에 비하여 단연 돋보인다. 같은 호남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도서나 산악지방에는 모정이 드물다. 평야지대가 모정문화의 중심권역이다. 또한 단결력이 강한 마을일수록 모정도 잘 이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호남사람들만이 가진 독특한 정서,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싹튼 단결력이 모정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백두에서 한라까지
누정은 멀리 두만강.압록강으로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퍼져 나가는 전국성을 보여준다. 박준규 교수(전남대)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토대로 뽑은 각도의 누정 수를 살펴보자.
경도 14/ 한성부 24/ 개성부 13/ 경기도 34/ 충청도 80/ 경상도 263/ 전라도 170/ 황해도 50/ 강원도 81/ 함경도 56/ 평안도 100/ 합계 885
전라도에 비하여 경상도의 누정이 압도적으로 많다. 경상도에서도 양반이 많이 살았던 안동이 으뜸을 차지하였던 데서 양반문화와 누정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다. 누정은 멀리 북방에까지 세워졌다. 변방으로 나간 장수들이 지은 시구를 보면 '전선의 밤'에 누정에서 느낀 정취가 다수 등장한다. 당대 '야전사령부'에도 누정이 있었다는 증거다. 성문에 문루를 올렸는데, 그들 누각은 전망이 좋게끔 높은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물로 뛰어든 '기생파티장'인 촉석루도 원래는 진주성의 지휘소였다. 서울은 어땠을까. 양반층이 밀집해서 살았던 만큼 서울도 단연 수위를 달린다. 흰 바위와 북한산 내린 물이 어우러진 세검정, 한강 뱃사장을 오고가던 백구를 바라보던 압구정...... 서울은 누정이 설 만큼 아름답기도 했지만 권문세가가 즐비하여 그만큼 경제력이 뒷받침 되었으니 누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누정 창설자의 면면을 보면 중앙과 지방정치권력의 세력균형도 엿볼 수 있다. 가문이나 문벌을 내세워 누구누구 가문의 누정을 세워놓고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다 보니 공연히 거들먹거리는 부정적 요소도 없지 않았고, 민중의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비판의 대상만 될 수야 없지 않은가. 조선 시대 선비정신이 구현되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모정과 누정의 21세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급문화와 서민의 문화는 나름의 가치와 몫이 있으므로 제 갈 길을 이어가게끔 도와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누정은 어떠한가. 누정은 엄밀하게 말하여 전통 시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하였다. 시인묵객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이제 인걸은 간 곳 없고 건물만 덩그라니 남아 있다. 나는 누정이 지녔던 자연친화적인 교감을 굳건히 이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누정이 설 만한 전망 좋은 곳은 예외없이 호텔, 콘도 따위의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서 경관을 망치고 있다. 누정이 지녔던 자연 속의 자리잡음 방식만큼은 이어 나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또한 누정의 뛰어난 건축미가 지닌 전통의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이어져야 마땅하리라. 누정의 날렵한 처마, 숲 속에 그윽하게 들어앉은 자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빼어난 정감, 나무와 연못과 바위가 연출하는 선비정신 따위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의 자산인 탓이다.
모정은 누정에 비하여 전통의 지속력이 완강한 편이다.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여전히 생활 속에 살아 숨쉬는 공간이 되고 있다. 초가는 기와로 바뀌었을지라도 모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역사 속의 민중과 더불어 유전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의 육모정도 바로 모정의 되살아남이다(단청 입힌 콘크리트 모정도 출현하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하긴 하지만!). 땅에 뿌리박은 농민의 문화가 가장 생명력이 강하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부용지와 부용정 출처 : "창덕궁 후원은 비원이 아니다" - 오마이뉴스
나주영모정(羅州永慕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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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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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추억을 선물하는 여행길
며칠 간 다른 지역에 갔다가 다시 부산역에 도착해서 쩝쩔한 바다내음을 맡으면 나그네가 고향에 온 듯 반가운 마음이 된다. 이번에도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방문 온 벗과 함께 바다에 나가 오래오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모래 위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물을 깁는 아줌마들의 모습에서 파도처럼 살아 뛰는 생명의 맥박소리를 들었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구나'라고 한 성서 구절도 바다에서 묵상하면 더욱 새롭다. 이제 나는 하루에도 몇번씩 빛깔을 달리 하는 바다의 모습을 바다 없는 도시에 가서도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대체로 한 달에 한 번꼴로 서울을 다녀오게 되는 나는 집밖을 나서는 일이 왠지 불안하고 피곤하게 느껴지면서도 지금의 내가 수도원 밖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해서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달리는 차 안에서일지라도 여행은 자연과의 만남을 새롭게 해준다. 차창을 통해 계절따라 변하는 산천의 모습을 마음껏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봄에는 붉은 진달래로, 여름엔 짙푸른 신록으로, 가을엔 불타는 단풍으로 그리고 겨울엔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도 정답고 고맙게 느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추수를 끝낸 들판과, 흰 새가 떼지어 나는 강을 보면 더없이 평온한 마음이 된다. 언제나 깊은 침묵 속에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자연의 모습은 침묵에 소홀했던 나의 지난날을 반성하게 해주고 그동안 내가 써왔던 시들조차 새삼 부질없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일부 상혼에 의해 요즘 갖가지 모양으로 나의 시가 남용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간에 여행은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 세상의 단면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게 해준다. 내가 입은 제복이 주는 거리감 때문인지 차 안에서도 아예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동행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저것 호기심에 가득 찬 필요 이상의 질문들로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다. 그러므로 옆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서 그날 여행의 분위기도 달라지는 셈이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가족관계에 얽힌 갈등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분들도 있다. 이런 인연이 계기가 되어 수녀원까지 나를 찾아오는 아줌마도 있고, 편지 왕래를 하는 아가씨도 더러 있지만 때로는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을 만큼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들 또한 없지 않다. 수녀라는 신분에 대해서 사람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저마다의 선입견을 나름대로 갖고 있는 듯하다. 매우 성스러워 보인다며 반쯤은 '천사'취급을 하는가 하면 가련하게 실연당하거나 '별 볼일 없는'인생 낙오자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 연민의 눈길을 보내오기도 한다. 차 안에서 내가 들어보라는 듯이 파계한 수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이야기를 일부러 큰 소리로 떠드는 젊은이들도 있다. 어느 땐 내가 외국인 같이 보이는 모양인지 영어로 말을 건네 웃음을 자아내는 일이 있고 또 때로는 당사자인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이해인 수녀'의 근황을 물어오는 적도 있었다.
항상 남의 입장을 미리 헤아려주고, 또 조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참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 나의 신분에 대한 체면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옹골차지 못한 성격 때문인지 다니다보면 바보처럼 속는 일도 여러 번 생긴다. 언젠가 한번은 서울에서 나와 동행한 친척 동생이 택시 기사에게 큰 돈을 미리 내고 내린 적이 있는데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직 절반도 더 남은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하니 먼저 내린 손님이 이미 잔돈을 받아갔다며 하도 그럴싸하게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냥 내리고 말았다. 좀더 다그쳐 묻지 못한 후회스러움과 더불어 그후 며칠 간은 불쾌한 마음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번은 길에서 불쑥 나타난 낯선 아이가 다짜고짜 내 가방 속에 있는 필통을 좀 보자고 하더니 나의 예쁜 자와 제 것을 바꾸자고 하면서 집에 가서 가져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체험했던 그 씁쓸한 슬픔의 맛이었다. 지금도 차 안에서 고학생이 껌이나 볼펜을 팔면 꼭 한두 개라도 사주고, 길에서 만난 초라한 차림의 어떤 사람이 차비나 점심값이 없다고 애원을 하면 조금이라도 애긍을 하려고 애써온 나이지만 하도 여러 번 언짢은 일을 당하고 나니 사람을 쉽게 믿기가 어려워져서 이것이 종종 나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여행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각 사람에게 선물로 남겨주나보다. 특히 속임수에 관련되는 일들을 직접, 간접으로 체험할 때마다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떠오르는 두 얼굴이 있다.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 한번은 버스 여행 중에 휴게소에 내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여유 있게 간식을 먹는데, 식당에서 먹는 게 부끄러워 그 근방의 아는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밖에 나와보니 나와 동료수녀님만 남겨놓고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나는 큰 가방 한 개를 그대로 두고 내린 터여서 더욱 불안하고 초조했다. 다급한 김에 지나가는 어느 개인 차를 불러세우고 사정을 말했더니 그 주인은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친척아저씨처럼 우리가 다음 버스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게 만반의 배려를 다 해 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바기오라는 도시에 도착하여 부랴부랴 먼저 탔던 버스를 찾아갔더니 그 버스의 차장인 청년이 나의 가방을 무슨 보물단지인양 끌어안고 앉아서 고맙다는 말을 거듭하는 나에게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했다는 듯이 환히 웃어주던 그 선량한 눈빛을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길에서 무조건 손 흔드는 수녀들을 차에 태워 친절히 보살펴 준 그 중년신사와 빈 버스 안에서 가방을 안고 있던 녹색 유니폼의 그 청년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행길에 나서면 더 자주 기억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마음 가득하다. 앞으로도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겠지만 그들의 그 친절하고 따뜻하게 열린 마음을 본받아 나도 이웃의 필요에 구체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여행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이 가을에 생각해 본다. 바다 가까이 사는 사람답게 바다처럼 넓게 열린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겠다고......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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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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