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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25 호
단기 4341. 11. 3 (음력 10. 0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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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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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빙그레 투게더입니다. 현재 빙그레 투게더에서 진행 중인 이벤트에 대한 안내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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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ingtogether.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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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오늘의 어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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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다.(성경 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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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마!
고장말
‘-카마’는 서로 견주는 데 쓰이는 경상도말이다. 표준어 ‘-와/과, -하고, -보다’ 등과 대응된다.
“야, 느그 논 준 기 그 기 아마 너거 생이(형) 논카마 못 한데, 지금 너거 바까다 주꾸마. 논 문서를 하나 두가.”(<한국구비문학대계>, 울산시 편) ‘-카마’는 표준어 ‘-과’에 대응하는 경상도말 ‘-카’와 토 ‘-만’이 합친 ‘-카만’이나, ‘-고 하만’이 줄어든 ‘-카만’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카 + -만>카만>카마, -고 하만>-카만>-카마) “파리 목숨카만도 몬 하제.”(위 책, 김해시 편) “오, 그 집에는 말이지 그 곽수 선생님카만 그 집 자부가 더 안다네.”(위 책, 봉화군 편)
‘-카마’의 또다른 형태는 ‘-카머’다. “그래가 나라아 베실도 많이 하고, 대국꺼짐 사신도 갔다 나오고. 대국 베실로 조선 베실카머 더 많이 했다카데.”(위 책, 경주시 편)
용언 뒤에서도 ‘-카마/카머’가 쓰인다. 이는 토 ‘-카마/카머’와는 다른 말이다. 이 ‘-카마/카머’는 ‘-고 하만/고 하먼’이 줄어든 ‘-카만/카먼’에서 ‘ㄴ’이 탈락한 것이다. “이 눔을 직일라카만 저 눔을 우예 직이야 되겠노?”(<경북방언사전> 이상규) “보리쌀 보리라도 두어 디 돌라카마 안되겠나.”(위 책) “뚜깽이가 디비지머 다시 일받을라카머 얼매나 애라분데.”(위책) “니도 물장수로 돈 벌라카먼 안즉 새까맣다.”(<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이길재/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생사여탈권
'경제 검찰'이라 할 수 있는 금융감독원은 각종 법규와 감독 규정을 어긴 금융기관들의 사활(死活)을 결정할 수 있는 정부 기관이다. 또한 다가오는 총선에서도 공천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당의 대표는 정치 후보생들의 정치생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하거나 기업의 사활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얘기할 때 '생사여탈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에도(江戶)시대 무사들의 생사여탈권은 그들이 섬기는 바쿠후(幕府)의 수장 쇼군(將軍)에게 있었다.' '이사회가 무력한 것은 소유주가 월급쟁이 이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생사여탈권'을 검색해 보니 1백28건으로 '생살여탈권'(13건)의 거의 열배나 되었다. '생사여탈권'이 맞는 표현인 줄 알고 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생사여탈권'은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의 잘못이다. 생사(生死)는 '삶과 죽음'을 뜻하지만 생살(生殺)은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을 말한다. '삶과 죽음을 주기도 하며 빼앗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며,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는 뜻으로 '남의 목숨이나 재물을 마음대로 함'을 얘기할 때는 '생살여탈권'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 '생살'(살리고 죽임)과 '여탈'(주고 빼앗음)의 대구(對句)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는 '생살지권(生殺之權)' '살활지권(殺活之權)' 등이 있다.
구렛나루, 구레나루, 구렌나루 / 횡경막 / 관자노리
사람의 신체와 관련된 단어들로 흔히 잘못 쓰는 것이 몇몇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남자들은 보통 사춘기가 되면 남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수염이 자라나게 됩니다. 수염은 돋아나는 부위에 따라 코밑에 나는 것은 콧수염, 턱밑에 나는 것은 턱수염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귀 있는 곳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볼 부분에 돋아나는 수염은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구렛나루, 구레나루, 구렌나루…. 이렇게 다양하게 쓰고 있지만 모두 잘못이며 '구레나룻'이 맞는 말입니다.
'나룻'은 수염의 고유어입니다. 그리고 '구레'는 '굴레'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제 조금 위쪽으로 올라가 옆머리의 귀와 눈 사이를 만져보면 맥박이 뛰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곳을 흔히 '관자노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이고 '관자놀이'가 바른 말입니다. 옛날 머리에 망건(網巾)을 쓰던 시절 이 부분의 맥동 때문에 망건의 관자가 움직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랍니다. 몸속에 있는 부분도 잘못 쓰는 데서 예외가 아니죠. 배와 가슴 사이에는 막이 하나 있는데 수축하고 이완하면서 호흡하는 것을 돕습니다. 이 막이 경련을 일으키면 들이쉬는 숨이 방해를 받아 딸꾹질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의 이름은 횡격막(橫膈膜)인데 흔히 소리나는 대로 '횡경막'이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횡격막은 가로막·격막이라고도 합니다. 한자의 뜻을 생각해 보면 소리에 끌려가 잘못 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뿐"의 띄어쓰기
요즘 세태를 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라는 말은 실종되고, '나뿐'이라며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정치·경제 분야 등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느 성당 마당에 서 있는 '우리 함께 할게요'라는 무료 배식 차량의 문구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앞에서 보이는 '나뿐'에서의 '뿐'은 그 쓰임이 다양하다. 그렇기에 쓰임에 따라 품사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띄어쓰기도 달라진다. 그 모습을 살펴보자.
'뿐'이 어미 '-을'의 뒤에 쓰여 '다만 어떠하거나 어찌할 따름'이라는 뜻(그는 웃고만 있을 뿐이다.)이거나, '-다 뿐이지' 구성으로 쓰여 '오직 그렇게 하거나 그러하다'는 뜻(이름이 나지 않았다 뿐이지 성실한 사람이다.)일 때는 의존명사로 띄어 쓴다.
그런데 '뿐'이 체언이나 부사어 뒤에 붙어 '그것만이고 더는 없음''오직 그렇게 하거나 그러하다'의 뜻(우리 민족의 염원은 통일뿐이다./진규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말을 잘 듣는다.)일 때는 보조사이므로 붙여 쓴다.
또한 '-ㄹ(을)뿐더러' 형태로 쓰여 '어떤 일이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나아가 다른 일이 더 있다'의 뜻(장미는 꽃이 예쁠뿐더러 향기도 좋다.)일 때도 연결어미이므로 붙여 쓴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 발간(1999년) 이전 사전에서는 '뿐만 아니라'를 구(句)나 접속부사로 처리해 문장의 맨 앞에 오는 것을 허용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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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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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씨 - 김기문
풀씨에는 조그만 거울이 있다 자신을 비추는 내면이 있다 바람을 타고 알지 못하는 세계로 펼쳐갈 그의 초록빛 미래 풀씨에는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있고 까르르 함박웃음이 감춰져 있다
농부의 낫이 허리를 자를 때까지 잡초로 살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지혜 그러기에 정갈한 모든 것을 매달고 성자처럼 이슬은 반짝인다
나무야 바위야 끝간 데 없이 뻗은 길들아 풀씨 하나 날리려고 산은 첩첩이 돌아앉고 계절은 성큼 다가서는가 보다
누가 함부로 부질없다 하리 인생은 하찮은 일상에서 풀씨를 키우는 과정이거니 마음에 담아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고 물처럼 낮은 곳을 흐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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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현대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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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하루해 고이 접고 - 황능곤
바람 살 구름 살에 흘린 땀 다리면서 다그친 소리 길로 기운 일 하나 없이 노을 빛 하늘을 이고 조각구름 가르며.
긴긴 해 자랑타가 하루 해 고이 접고 나래 깃 거느리고 무리 져 찾아가는 그리움 묻어 둔 숲 속 저마다의 가슴들.
해 저문 산봉마다 짙게 한 어둠 속에 구겨진 모습 펴고 사랑길 다독이는 붉게 탄 빛살을 깔고 체온 감는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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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고시조,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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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비 기똥 얼마 오리 - 무명씨
가을 비 기똥 얼마 오리 우장 직령 내지 마라 십리길 기똥 얼마치 가리 등 앓고 배 앓고 다리 저는 나귀를 크나큰 당채로 쾅쾅 쳐 몰지 마라 가다가 주가에 들거든 쉬어 가려 하노라
<말 뜻> 기똥 : 그까짓. 우장 직령(雨裝直領) : 우장은 비옷, 직령은 옛날 무관의 웃옷의 한 가지. 깃이 곧게 되어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 당채 : 당나라에서 들어온 말채찍. 주가(酒家) : 술집. 주막.
<감 상> 가을비가 오면 그까짓 얼마나 오겠느냐. 우비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리고 고작 10리 길인데, 등 앓고 배 앓고 게다가 다리까지 저는 비루먹은 나귀를 괴롭힐 것이 무엇이냐. 가을비 맞으면서 걸어서 가다가, 주막에 들러서 한 잔하고 쉬면서 그 비 그어서 가면 되지 않느냐.
느긋한 여유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하고도 소박한 그 멋이 익살스러운 표현에 잘 어울리어,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옛선비들의 낙천적인 성격, 낭만적인 생활태도를 비생산적이라고 일축할, 이른바 현대 산업 사회의 맹렬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4시간을 뛰어야 할 인생도 마음가짐만은, 옛사람의 이 느긋함을 힘써 가지도록 하고 싶다.
중장이 파격이니 엇시조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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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지혜, 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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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100가지 지혜 - A. 갤리언
제1장 삶은 달걀에서 나온 병아리
솔로몬의 재판
안식일에 세 사람의 유태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 무렵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함께 땅에 묻었다. 그런데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은밀히 그 장소에 돌아가 돈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이튿날 세 사람은 지혜로운 임금님으로 알려진 솔로몬 왕을 찾아가 세 사람 가운데 누가 훔쳤는가를 밝혀 달라고 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말했다.
"당신들 세 사람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들이므로 내가 지금 재판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먼저 협조해 달라, 그러면 당신들 세 사람의 문제는 내가 재판해 주겠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어떤 남자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의 사랑에 빠져 맨 처음의 약혼자를 만나 헤어지자고 했다. 그녀는 그 때문에 위자료를 주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첫 번째 남자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고 말하며 그녀와의 약속을 취소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다. 그녀는 "나는 결혼하려고 약속했던 남성에게 약혼 취소를 요구했음에도 위자료도 받지 않고 헤어져 주었습니다. 당신도 똑같은 일을 내에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노인은 돈을 받지 않고 그녀를 유괴에서 풀어 주기로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솔로몬 왕이 물었다.
"이 가운데서 누가 제일 칭찬 받아야 할 행위를 한 사람일까?"
그러자 첫째 사나이가 말했다.
"맨 처음 그녀와 약혼을 했지만 약혼을 취소하고 위자료도 받지 않았던 사나이가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돈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그 아가씨야말로 칭찬 받아야 합니다. 그녀는 용기를 갖고 맨 처음의 남자에게 약혼 취소를 요구하고 진정으로 사람하고 있는 사나이와 결혼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칭찬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나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 이야기는 뒤죽박죽이어서 나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유괴한 사람도 돈 때문에 유괴했는데도 돈을 빼앗지 않은 채 풀어 주었다니 이야기의 줄거리가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솔로몬 왕은 큰 소리로 세 번째 사나이를 가리키며 "네가 돈을 훔친 범인이다!"하고 외쳤다. "다른 두 사람은 애정이라든가 아가씨와 약혼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인간관계, 그 사이에 있던 긴장된 분위기 같은 것을 곧 알아차렸는데도 너는 돈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네가 틀림없는 범인이다!"
참다운 이득
몇 사람의 라비가 악인의 무리와 마주쳤다. 이 악인들은 흡사 흡혈귀와도 같은 악질 인간들이었다. 그만큼 교활하고, 그만큼 잔인한 인간들은 이 세상에 없었다. 한 사람의 라비는 이러한 인간들은 물에 빠져서 모두 죽어 버렸으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비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했던 라비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야, 유태인으로서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오. 아무리 이 인간들이 죽어 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일을 기도해서는 안 되오. 악인들이 멸망하는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악인들이 참회하는 것을 바라야 하오."
악인을 벌하는 것은 이쪽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회개시키거나, 이쪽 편에 끌어들이지 않는 한 손해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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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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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2.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잃어버린 걸망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몸으로 태어나 빈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사라 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 해도 죽는 순간에는 결국 빈손이다. 이 세상에서 제아무리 온갖 부귀와 영광을 누린 사람이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한낱 물거품일 뿐이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불가에 입문한 수행자에겐 일체의 소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무릇 배고프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밥 한 끼로 족하고 추위와 더위를 가릴 수 있는 의복 한 벌이면 족한 것이다. 삭발을 하는 이유도 번뇌와 집착을 끊기 위함이다. 소유란 부질없는 집착과 더 큰 욕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없음의 철학, 철저한 무소유의 철학.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수행자로서 마땅히 지녀야 하는 도리이다. 나 역시 오직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수행 출가자로서의 길을 걸어온 지 어언 40년의 세월이다. 때로는 어깨에 짊어진 걸망마저도 부담스럽고 주체하기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걸망 하나도 이승에 대한 집착이 아닐런지. 그러나 언젠가부터 남들이 ‘망태기’라고 부르는 이것이, 없으면 허전하고 아쉬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값비싼 것도 아니고 빛깔 고운 것도 아닌, 남들 보기엔 그저 평범하고 남루한 걸망이건만, 수십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이제 나에겐 친구이상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6개월 전쯤에 이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치른 적이 있으니...
한 사형수의 구명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내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을 즈음이었다. 부산에서 볼일이 있어 서울에 오노라면 시간에 쫓기는 탓에 가끔 비행기를 이용하곤 한다. 그날도 오전 7시 첫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도착했다. 먼저 종로에 있는 조계사에 들러야 했다. 그런데 워낙 피곤했던지라, 택시에 타자마자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그만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제 다 왔습니다.’라고 하는 택시 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허둥대며 조계사 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내리고 나니 조금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 이상했다. 순간 한쪽 어깨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아차, 걸망을 잊은 채 놓고 내린 것이 아닌가! 아뿔싸, 택시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다시 돌아오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택시 안에 두고 내린 내 걸망 안에는 지인들의 주소록과 전화 번호가 적힌 수첩과 목탁 하나, 게다가 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급한 일에 쓰려고 모아두었다가 마침 소용되는 일이 생겨 가지고 온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내 진작 택시 번호라도 보아두는 건데! 점점 멀어져가는 차의 뒷부분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미 손 떠난 화살이요, 엎질러진 물이었다. 양어깨에 힘이 쭉 빠지면서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 나는 급하게 세종로로 뛰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교통방송국이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방송으로 알리면 혹시라도 방금 내린 그 택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한가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순식간에 달음박질로 뒤어 교통방송국 정문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여기는 일반인 통제 구역이므로 아무나 들어 가실 수 없습니다. 출입 허가증을 제시하십시오.”
갑자기 나타난 제복의 남자 두 명이 정중하게 말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신분증도, 출입 허가증도 있을 턱이 없었다.
“난... 나는 교통방송국 국장을 만나야 하오.”
순간적으로 급한 김에 이렇게 둘러댔다. 물론 그곳 국장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무사통과를 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댄 것이다. 아마 국장이라면 그곳에서 제일 높을 사람일게 분명하겠고 그래서 무사통과를 기대하고 직함을 잠시 실례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 성함을 대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믿을 수 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던가. 나는 당황해서,
“사실 난 지금 급한 사정이 생겨서 이리로 온 겁니다. 제발 봐주시오. 내 오죽하면 이렇게 국장을 둘러댔겠습니까?” 하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의 임무가 있는 지라, “안 됩니다. 허가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들어가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완강한 태도로 버티는 것이다. 곁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사정하는 모양이 딱했던지, 우선 경찰청에 가서 신고한 후라야 분 실물 방송이 나가게 되어 있다고 그곳 규칙을 귀띔해 주었다.
나는 예서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부랴부랴 서소문 근처 경찰청으로 달려갔다. 일러 준 대로 민원실로 갔더니 그곳 직원이 시큰둥한 포정으로 다시 분실된 물건이 보관돼 있는 ‘분실물 센터’로 가보라고 했다. 물론 그곳에 내 물건이 있을 리 없었다. 일이 자꾸만 꼬여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한참 궁리하다가 아무래도 교통과장을 찾아가는 것이 일을 수월하게 해결하는 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쩔까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스님이 웬일이십니까?”
곁을 지나가던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웬 중이 이른 아침부터 경찰청 복도에서 사색이 다 된 얼굴로 서 있는게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며 이러저러한 속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마침 출근하던 경찰관이었다.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 한마디에서 나는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처럼 기뻤다. 그는 곧 교통방송국과 MBC, KBS에 전화를 걸었다. 내 분실 내용은 그 즉시 방송을 통해 나가게 됐다.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그는 친절하게도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경우에는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일단 그 택시 기사분이 양심적으로 신고를 해야 되는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부디 스님이 잃어버린 그 물건을 다시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는 우려하면서도 나의 일이 쉽게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참으로 따뜻한 마음씨의 사람이었다. 나는 감격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그에게 조심스레 ‘무슨 종교를 갖고 계시느냐’고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기독교 신자라는 그의 대답은 나로 하여금 더욱 고마운 감정을 갖게 만들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나는 경찰청 정문을 나섰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젠 방송을 들은 그 기사분의 신고 연락이 드렁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걷다보니 세종문화회관 앞이었다. 몸이 피곤해져서 다리도 쉴 겸 차를 마시러 잠시 다방에 앉아 있다가 나와서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택시 한 대가 스르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문득 그 택시 기사가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애써 내 앞에 멈춰서는 차를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차에 오르자,
“어? 좀전에 타셨던 스님 아니신가요? 맞지요?”
가시가 놀라면서 반갑게 묻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차 종류도 비슷하고... 어쩐지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는,
“한참 전에 제가 공항에서 조계사 앞까지 모셨잖습니까? 곤히 주무셨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실 겁니다. 스님께서 큰 망태기를 두고 내리셨길래 제가 좀전에 조계사에 가서 총무님께 맡겨 놓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부처님이 도우신 것인가! 어느새 지옥이 극락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걸망을 잃어버린 지 두 시간만이었다. 나는 거듭 합장을 하면서 곧장 조계사로 방향을 돌렸다. 내 걸망은 무사했던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아야 하는 법, 그 고마운 기사분에게 사례금으로 얼마를 드리고 난 뒤 나는 잃어버린 걸망을 다시 품안에 소중하게 안았다. 잠시 동안의 소동이었지만, 이 작은 해프닝은 나로 하여금 새삼스레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돈, 이 돈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다. 또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돈이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욕망에는 순간적인 쾌락이 있을 뿐 긴 고통이 따른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은 걸망 안에 들어 있는 돈 때문이었다. 돈을 소유함으로써 애착이 생기고 그것을 잃게 되자 고통이 생긴 것이다.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아무런 가진 것 없이 빈손으로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성자라 부른다.’ ‘숫타니파타’에 있는 구절이다.
나는 지금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인가. 걸망은 다시 찾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은 깊어가는 고뇌 한가닥이 스며들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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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사회, 문화, 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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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구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바라본 구들
북아시아에 관심을 지니고 있던 니콜라스 위트센(1641-1717년)이라는 사람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인 위트센은 1667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타르타리아(북아시아)에 관한 지리적인 식견을 넓혔다. 그는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를 출간했는데 거기서 한국을 다루었다. 그는 1690년까지 유럽에 알려졌던 한국의 기록을 거의 섭렵한 듯하다. 특히 온돌에 관한 기록도 남겼다.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2피트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17세기 말엽,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 나라의 구들에 관한 초기 기록이다.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구들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의 카톨릭 전도사 달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1593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큰 박해가 끝나던 1871년까지 280여 년 간의 교회사를 <조선교회사>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187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했다. 교회사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풍물도 세세히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구들이 등장한다. 다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이지만 뿌르띠에라는 사람의 편지를 발췌한 대목을 들어보자.
"중국.인도와 비교할 때 방바닥을 덮고 있는 자리가 꽤 보잘것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약간 두꺼운 짚으로 흙을 덮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종이로 흙벽을 바르고 유럽의 마루와 타일처럼 두꺼운 기름종이로 방바닥을 바릅니다...... 벽난로가 없는데 어떻게 자리 위에서 불을 피울까요? 벽난로를 대신할 것이 준비돼 있습니다. 집 바깥에 옆으로 부엌 아궁이가 있고, 방바닥 밑을 통과하는 여러 고랑이 아궁이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고랑이나 파이프는 커다란 돌로 덮여 있고, 그 틈새와 들쭉날쭉한 곳은 반죽한 흙으로 메워 놓았는데 그 바로 위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방고래를 지나서 집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와 열은 희한하게도 당신에게 온기를 전해주는데 그 열은 돌 두께로 말미암아 꽤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보시다시피 조선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난방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연기가 방바닥 틈새로 뭉개뭉개 피어오르지만,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 결점 없는 것이 있나요?"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말투이기는 해도 구들에 대해 비교적 꼼꼼하게 적어놓았으며, 우리의 구들이 자기들 난방법보다 빨랐음을 실토하고 있다. 주한공사를 지냈던 알렌도 <조선견문기>에서 구들을 관찰하고 있다. "방바닥은 갈색 대리석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기름종이로 덮여 있다"고 상류계급의 온돌방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양반사회의 문화수준을 엿보게 해준다. 또한 소작인이나 품팔이 노동자의 오막살이에 있는 구들도 짙은 갈색의 기름종이로 덮여 있으며, 이 점이 일본이나 중국 같은 이웃나라보다 훌륭하다고 하였다. 그리피스는 1882년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구들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사람을 굽는다? 하긴 뜨거운 장판은 사람도 구울 정도로 고온이니 이런 표현이 나옴직하다. 서양인들이 우리의 구들문화를 모두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만큼 우리의 구들문화가 돋보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너무도 흔하면 귀한 줄 모르는 법일까. 정작 온돌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무덤덤하게 지낼 뿐, 온돌문화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기하고 있다. 연탄이 사라지고 아파트에서 보일러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그나마 아궁이마저 사라져서 온돌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온돌보다는 구들을
나는 이 글에서 온돌을 피하고 애써 구들이란 말을 쓰고 있다. 온돌이 한자말이라면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보편적으로 온돌이라고 쓰는 것을 나무랄 일이 아니겠지만 데워서 난방한다는 그 뜻이 좋아서 나는 구들이란 말을 굳이 쓰고 있다. 구들에 관한 말 가운데 사라진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유형에 따라 구분하는 선자구들.쇠구들.토판구들, 불아궁 안쪽에서 연료가 타는 불목, 부뚜막이 없이 불만 피우는 함실아궁, 불기가 빠져나가는 구들고래,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두둑, 편편하게 덮은 구들장,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내어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파낸 개자리, 구들고래가 개자리에 접속되는 곳인 바람막이...... 이 모든 것이 거의 사라진 구들문화의 토속어들이 아닌가! 구들은 가장 원초적인 문화유산이면서도 희소성이 없기에 '화끈하게'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들만큼 민족생활양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문화유산이 또 있을까.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물었다. "우리 나라 의.식.주 풍습에서 무엇을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꼽습니까?" 나는 늘 똑같은 답변을 한다. 의생활에서는 백의풍습, 식생활에서는 된장 같은 장풍습, 주생활에서는 구들을 꼽는다. 백의, 된장, 구들이야말로 우리 민족 의식주 생활의 첫머리를 장식하지 않을까. 흰옷이 원색문화에 떠밀려 차츰 사라지고, 된장도 입맛 까다로운 어린 아이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지만 구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구들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풍습 가운데서 현대까지 적응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데 있다. 즉 구들의 힘은 그 '장기지속성'에 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왔으며, 초현대적 생활과 어울려 21세기로 온전히 넘어가고 있는 풍습이 또 있을까? 땔감용구들, 연탄구들, 보일러와 전기를 쓰는 개량구들을 거쳐서 '온돌침대'마저 등장할 정도로 전통의 지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탓에 왠지 한문투의 온돌보다는 구들이란 말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산모가 몸을 푸는 곳, 추운 겨울날 할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자식에게 대를 이어가면서 구전의 역사가 펼쳐졌던 '씌어지지 아니한 역사'가 저술되던 '구술문화'의 현장 그리고 사람이 마지막 운명을 다할 때 자손들의 손을 마지막으로 쥐던 곳...... 그러한즉 구들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최초로 지은 집은 신석기 시대에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이었다. 움집의 갖춤새는 매우 단순하였다. 자갈이나 모래, 진흙 등을 깐 맨바닥이었다. 그 움바닥 중심부에는 예외없이 화덕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바닥을 일정한 깊이로 파고 그 주위에 강돌이나 진흙으로 둥글게 테두리를 만든 것이었다. 화덕을 방 안에 설치한 탓으로 연기를 뽑기 위해 천장에는 구멍도 뚫었을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구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도 이르기를, "기후가 추워서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안에서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고 큰 집은 아홉 계단이나 내려간다"고 하였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움집은 후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지상으로 솟아오른 집다운 집이 출현한다. 움집에서 화덕 따위로 난방을 하던 수준으로는 지상가옥의 난방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더욱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는 만주 벌판에서 나라를 건설해가던 선조들은 다양한 구들을 개발하게 된다. 북한 고고학계는 북한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평북 영변군 세죽리, 평남 북창군 대평리 등지에서 구들의 초기 형태를 다수 발견했다(<고고민속> 1966년 4호). 판돌을 세워서 이어 대고 그 위에 판돌을 덮은 좁고 긴 구들이었다. 전체를 데우지 못하고 방바닥 한구석에 작게 독립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평리 유적 3호 집자리의 구들은 고래 너비가 다른 고래보다 근 3배나 되어 구들이 제법 넓게 발전하였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문헌상으로 구들을 처음으로 암시한 <신당서>와 <구당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하였다. 갱은 무엇일까.
갱은 중국사람들이 캉이라 부르는 난방시설이다. 한국 민속학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역사민속학자 남창 손진태 선생은 그의 '온돌고'에서 캉과 구들의 기원이 같다고 하였다. 구들이 바닥 전부를 데운다면 캉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운다. 구들이 전면적인 방바닥 난방이라면, 캉은 벽 일부만 난방하는 형식이므로 페치카와 구들의 중간 성격을 띤다고 할까. 남창 선생은 간단한 부뚜막에서 실내 일면 캉으로, 일면 캉에서 삼면 캉으로, 삼면 캉에서 전면 구들로 발달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캉이 중국 북부 만주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구들의 고구려 기원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고구려의구들이 궁금하거들랑 고구려 벽화무덤 속으로 들어가보라. 고국원왕릉과 약수리 벽화무덤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부엌과 긴 고래온돌을 그린 그림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궁이에서 지핀 불길은 긴 고래구들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굴뚝도 예전에는 없던 풍습이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중국식의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단계였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건축학자 강영환 교수(울산대)는 의자에 앉는 입식문화, 책상다리로 앉는 구들문화가 혼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구들은 있으되 본격적으로 발전한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벽화무덤의 주인공들인 귀족들과 달리 고구려의 민중은 '돈이 덜 드는 난방방식'인 구들을 선택하였음이 분명하다. <신당서>와 <구당서> 기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구들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귀족문화는 '신발 신는' 입식과 '신발 벗는' 좌식생활이 병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본격적인 구들문화의 창시자를 '고구려의 민중'이라고 결론 맺고자 한다. 우리들이 누워 잠자는 구들에는 바로 고구려 민중의 강골차면서도 따스한 숨결이 서려 있는 셈이다.
백제나 신라 쪽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875-886년)대에는 서라벌에 기와집이 줄줄이 있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 그을음을 피하려고 숯으로 난방을 한 것은 구들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고상식 주거양식으로서 마루가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내려와 고려 시대의 구들문화를 살펴봄으로써 하나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구들과 마루가 움직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1123년)에 이르기를, 귀족들은 중국과 비슷하게 낮은 평상생활을 하여 아무 불편이 없었으며 전혀 외국에 온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흙침상으로,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하였다. 여전히 구들이 민중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자의 <보한집>을 보면 흥미를 끄는 기사가 나온다. 고려의 고승으로 이인로.이규보 등과 교류하였으며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각훈에 관한 대목인데 구들풍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행자가 일찍이 겨울에 자리 하나를 펴고 앉아 승복 한 벌을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그 옷자락 속에는 서캐라곤 없었다. 얼음장 같은 구들방에 앉아 있어도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도를 배우고자 하는 후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곡진하게 일러주었다. 한때는 날씨가 추워 얼어죽을까 염려해서 그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자를 보내어 급히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했다. 밖에 나갔던 행자가 들어와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없이 천천히 방을 나가 자갈을 주워서는 아궁이를 막아버리고 회를 이겨서 틈을 바르고는 다시 자리 위에 앉아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다시는 사람을 보내어 방을 데우게 하지 않았다.
평북 삭주지역의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북부지역은 지금 보는 온돌과 거의 같은 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 고려 시대의 중부지역은 어땠을까. 문경의 원터 유적은 구들 남하과정을 아는 중요한 단서이다. 일군의 학자들이 1977년 문경 새재의 제1관문 안에 있는 원터를 발굴하다가 구들고래를 발견했다. 알맞은 크기의 산돌과 개울돌로 쌓은 고래가 고려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으로 구들이 이미 소백산맥의 남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신영훈 선생은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어 사용했는지, 아니면 제주도처럼 서울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관아 건물에만 설치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확정적인 견해표명은 유보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구들문화는 여전히 북쪽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들은 조선 전기에 들어와 서서히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말엽, 고득종의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은 아궁이와 구들 없이 맨바닥에서 잔다"고 하였다. 구들이 조금씩 퍼져 나가던 과도기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구들이 없는 곳이 여전히 많았다. 17세기 후반, 숙종조에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 따르면 제주도 살림집에는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었다. <숙종실록>권12(숙종 7년 9월)를 보면, 구들이 비로소 한양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경연사 벼슬을 하던 이단하가 왕에게 올린 내용이다.
근년에는 대내의 여러 방실을 판방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온돌이 점점 많아져 기인(나무를 공물로 제공하는 자)이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숯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근년까지 마룻방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국이 본격적인 구들문화권에 들어서지 못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넓은 집에 구들이 두어 칸뿐이고 나머지는 판자를 깔았다고 하였을 정도다. 심지어 구한말 제정 러시아가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하여 1900년 페테르부르그에서 발간한 <한국지>에도 맨땅에서 살고 있는 민중의 생활상이 드러나 있다.
땅이 그대로 방바닥을 대신하는데 가끔 짚을 깐 경우도 있다. 바닥이 나무인 경우에는 짚으로 엮은 깔개가 바닥에 덮여 있다.
여러 문헌과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북방에서 시작된 구들문화가 남하하고 있었고, 남방에서 시작된 마루문화가 북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양자의 만남은 우리의 주거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식 생활과 백제나 신라식 생활이 통일되는 형식이 바로 마루와 구들의 조화가 아니었을까.
마루는 끊임없이 북상을 모색하였다. 마루는 북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서울.경기 지역의 대청마루로 완벽하게 진출했다. 서울 양반집의 널찍한 대청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대청마루에 누워서 시원한 매미소리를 듣노라면 땀방울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대청마루에서 밤 늦도록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의 낭만은 또 어떤가. 한편 구들은 '호시탐탐' 남하를 꿈꾸었다. 애초에 구들은 부뚜막과 방이 구분되지 않은 미분화 상태였다. 선조들은 화덕을 개량하여 구들로 발전시켜 나갔다. 부뚜막은 구들이 발전하는 단서가 되었다.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근년까지도 부엌과 방의 경계가 아예 없었다. 부뚜막의 열기가 벽을 거치지 않고 방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양통집'이라 불리는 집 안에는 외양간까지 있었다. 그러나 남하를 거듭한 구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함경도같이 추운 날씨가 아니었기에 방과 부엌의 경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밑에서 올라온 마루도 중부지역에서 만났기 때문에 마루방으로 향하는 불기운을 정확히 차단시켜야 했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구중 궁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국가에서도 구들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였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우리식 살림집의 정형을 창조하였다. 깔끔하게 지은 조선 시대 살림집을 생각해 보자. 시원스럽게 뻗은 대청마루와 적절하게 배치된 구들, 이 두 문화가 균형을 이루게 된 역사적 만남이 드디어 실생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 시대 이래로 발전해온 민중의 문화가 궁궐에까지 침투해 들어간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덕수궁이나 창덕궁에서도 구들과 굴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민중의 저력이 민족생활사를 이끌어왔다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앉은문화, 접촉문화, 굴뚝문화
외국여행을 하다가 몸에 한기라도 들면, "아, 구들방이 그립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몸이 찌뿌둥하면 아랫목에 '몸을 지져야' 거뜬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영낙없는 '조선사람'이다. 침대문화가 들어왔어도 안방바닥은 여전히 장판지다. 이렇듯 동양 삼국에서도 유독 우리만 구들을 발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답변은 어렵지만, 삼한사온이 분명한 기후 조건 때문인 듯하다. 겨울의 뜨듯한 방바닥과 여름의 시원한 방바닥을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구들은 천천히 데워지고 서서히 식는다. 우리의 속성인 '은근과 끈기'도 바로 구들의 속성에서 나온 것 같다. 그리하여 구들은 '구들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구들은 바람과 기후 조건을 잘 따져서 아궁이와 고래구멍, 굴뚝을 배치해 연기가 나지 않고 난방이 잘 되었다. 아랫목은 낮고 윗목은 높게 구들장을 놓고, 아랫목은 두껍게 흙을 바르고 윗목은 얇게 발라 열전도율의 균형을 맞추었으니 선조들의 열관리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들의 등장.발달은 굴뚝과 부엌의 발달을 의미하였다. 굴뚝을 잘 뽑아야 연기가 잘 빠져나가고, 구들이 골고루 데워졌다. 그러나 유목민들처럼 연기가 나지 않는 말똥을 태웠던 제주도에서는 굴뚝 없는 독특한 구들도 존재했다. 벽과 분리된 부엌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생활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엌의 부뚜막에 모신 조왕신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모시는 가장 강력한 신이 되었다. 구들의 윗목에는 조상신이 자리잡고, 아랫목에는 아기를 돌보는 삼신이 자리잡았다.
일본은 습기를 피하여 다다미를 깔고 살며 방 가운데에 화덕을 둔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 북부 사람들은 캉을 설치한다. 우리 구들이 신발을 벗는 좌식생활임에 반하여 캉은 입식생활이다. 따라서 구들은 우리 민족만이 창조해낸 독자적 '앉은문화'인 것이다. 우리의 가구배치, 활동반경, 방의 쓰임새 등은 모두 앉은문화에 알맞게 이루어졌다. 침대와 소파가 들어왔지만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앉은문화를 선호한다. 앉은문화는 청결을 보증한다. 반짝반짝하게 콩기름 먹인 장판을 닦고 또 닦아서 윤기가 흐르도록 청결을 유지했던 우리네 살림살이였다. 먼지가 풀풀 나는 카펫문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들은 '앉은문화'와 '선문화'의 양대문화권을 구분하게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쓰는 문화로 볼 수 있겠다. 어느 책에선가 구들을 '접촉문화'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겨울철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여름철 시원한 구들장에 배를 대는 식의 접촉문화가 우리의 구들문화이다.
전기밥솥이 탄생하기 전만 해도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위하여 주발에 담은 밥을 아랫목에 넣어 구들과 접촉하게 했다. 그리하여 구들과 똑같은 온도의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인생의 2/3 이상을 바로 접촉문화의 끈끈한 정서 속에서 살아온 셈이 아닌가. 앉은문화, 접촉문화, 구들문화는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들문화를 논할 때 굴뚝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우리 건축미에서 굴뚝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사람이다. 전세계 어느 민족도 이처럼 굴뚝을 아름답게 꾸민 경우는 없었다. 굴뚝의 원조도 역시 고구려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 3호분을 보면 부엌일 하는 아낙네 옆에 굴뚝그림이 선명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굴뚝을 실용적인 용도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서는 처마에 잇대어 소박한 굴뚝을 매다는 데 그쳤지만, 사찰이나 대갓집에서는 멀찍이 굴뚝을 설치하여 나름의 멋을 냈다. 실용적인 물건에서조차 멋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여유가 있으면 경복궁 아미산의 육각형 굴뚝(보물 811호)을 찾아가 보라. 원래 교태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 굴뚝(보물 810호)과 더불어 굴뚝의 정상을 차지한다.
보물 제811호 : 경복궁아미산의굴뚝(景福宮峨嵋山의굴뚝)
보물 제810호 : 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景福宮慈慶殿十長生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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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작은 일에 충실한 삶을
오늘은 우리 수녀회의 일곱 수녀들의 종신서원식이 있어 많은 손님들이 수녀님들이 수녀원을 다녀갔다. 지원기, 청원기, 수련기, 유기서원기를 거쳐 입회 이후 만 10년 간의 긴 수련을 끝내고, 이제 종신토록 수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결의를 공적으로 다짐하는 서원예식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아름답다. 흰 수도복에 흰 꽃을 단 오늘의 주인공들이 두 손을 높이 들어 '주여, 언약대로 나를 받으소서. 나 당신 안에 살리오니 나의 희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게 하소서' 하고 한발짝씩 제단 앞으로 나가며 3번 반복해서 노래할 때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웠다. 주교님이 축성하신, 약속의 표징인 반지를 끼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는 서원자들에게 전 공동체가 '오 기쁘도다, 기쁘도다, 주님의 집에 간다누나'라고 우렁차게 화답할 때는 함께 사는 이들의 사랑과 일치의 기쁨이 그 절정에 달하는 듯했다. 장미나 카네이션처럼 화려한 꽃들을 제쳐두고 당당히 오늘의 축제를 장식하는 꽃으로 선택된 색색의 백일홍들도 족두리를 쓴 새색시인양 즐거운 웃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백합들이 줄지어 서 있는 안정원 잔디밭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거나, 가족과 친지들에게 둘러싸여 축하의 인사를 받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10년 전의 그러한 내 모습도 잠시 떠올려보았었다. 이제 며칠 후면 새로 소임을 받고 임지로 떠나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도 오늘은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식탁봉사를 하며 뛰어다녔다. 오늘의 잔치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식탁을 꾸미고, 벽 장식을 하고, 노래연습을 하는 등 참으로 많은 이들이 안팎으로 정성을 다했다. 어떤 이는 밖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축하의 리본을 달아주고, 어떤 이는 차량을 정리하고, 또 어떤 이는 자칫 잊혀지기 쉬운 운전기사들만 찾아다니며 돌보는 일을 맡았다. 축제의 시작부터 마무리 단계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맡은 역할을 최선의 성실을 다해 기쁘게 수행하는 이들의 그 모습은 보기에도 흐뭇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모두 밖에 나가 보름달과 별들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축제에 대한 서로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모든 생활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수도생활은 무엇보다도 충실성, 극히 사소한 일까지도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해선 안되는 사랑의 충실성을 필요로 한다. 나는 원래 일손이 서투른 데다가 인내심이 부족하고, 마음도 별로 단단하질 못해서, 변함없이 충실한 수도자가 될 수 있을까 몹시 걱정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남들보다 몇배 더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언제나 작은 일부터 충실히'라는 좌우명을 세워놓고 지금껏 내 나름대로는 애쓰며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작은 일'이라는 게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충실성이 자연스런 덕으로 몸에 배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찮은 일도 사랑으로 완성하려면 끝없는 인내와 겸손과 극기의 수련이 필요함을 더욱 절감하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사용한 물건을 누가 찾기 전에 즉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든지, 전화기 옆에 비치해 둔 메모지나 볼펜이 없는 걸 보면 즉시 구해다 놓는다든지, 습기 찬 바닥에 누가 넘어질까 염려하여 마른 걸레를 갖다놓는다든지 하는 따위의 조그만 행위들은 잘 하다가도 문득 귀찮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나 아니라도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하는 생각에 슬쩍 지나쳐버리고 싶은 유혹을 쉽게 받게 되는 것이다. 또 누가 무슨 책이 보고 싶으니 인편으로 챙겨 보내달라거나, 헌 우표를 모아서 우송해 달라거나, 대화나 편지를 통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는 종류의 부탁들까지도 잊지 않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는 정성과 예민한 준비성이 필요하다. 실상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들을 우리는 가장 소홀히 하기 쉽고, 따라서 이에 따르는 소박한 기쁨들을 놓쳐버리고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자기의 의무를 조용히 실천하는 기쁨에 비교될 만한 기쁨은 없다'고 한 간디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물을 아껴씁시다' '문은 꼭 닫고 다니십시오' '청소 도구는 꼭 제자리에 놓아주십시오' '쓰레기는 꼭 구분해서 버려주십시오' 등의 주의사항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수녀원이나 기숙사, 그리고 그밖의 장소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것만 보아도, 또한 '놀던 자리 깨끗이, 쓰레기는 휴지통에'라는 표어가 여행길의 휴게소마다 크게 써붙여진 것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기본적인 의무들을 소홀히 하며 사는가를 말해 준다고 본다.
어느 장소에서건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 즉시 막아주고, 필요없이 켜 있는 전기를 보면 확인해 본 뒤에 즉시 꺼버리고, 담배꽁초나 휴지는 휴지통이 멀리 있더라도 꼭 그 자리에 가서 버리는 일상의 충실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기본 도리이며 의무이다. 버스터미널과 각 휴게소의 화장실이나 어느 일류대학의 화장실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이 지저분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생리대, 머리카락, 껌 같은 것들은 아무리 급한 때라도 반드시 종이에 싸서 보이지 않게 버려져야 하지 않을까? 매사에 가장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충실성이 결여된다면 결코 '문화국민으로서의 긍지'를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유익과 편리를 위한 이기적, 개인적 주인의식은 있어도 우리 모두를 위한 이타적, 공동체적 주인의식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픈일인가. 남들이 그 무엇을 잘못한다고 탓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성찰해 보는 겸허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들이 무관심해서 미처 메워놓지 못한 '틈'이 있다면 그것을 큰소리로 불평하고 푸념하기보다는 묵묵히 대신 메워줄 수 있는 너그러움과 사랑이 어느 가정, 어느 사회에서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대인 것 같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주라' 는 성서 말씀처럼 주가 보든 안 보든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어진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매일 '작은 일에 충실한 삶'을 열심히 살아 보다 새롭고 풍요로운 삶의 주인이 되길 기도한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우리나라를 만들어, 요즘 자주 눈에 띄는 구호처럼 '하나로, 세계로, 미래로' 밝고 크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1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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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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